지금은 그를 잊게 해달라고 빌 것이다. 이 마음이 철저하게 잊히도록. 앞으로 혁이라는 남자는 없고 오직 강지혁만 남도록.소원을 빈 후 임유진은 서서히 눈을 떴고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촛불을 꺼버렸다.“내가 자를게.”임유진은 케이크를 세 조각으로 자른 후 두 조각을 한지영과 백연신에게 건넸다. 그리고 나머지 한 조각을 천천히 입에 넣었다.케이크는 달아야 하는 건데 왜 지금은 이토록 쓰게 느껴지는 걸까?케이크를 다 먹은 후 한지영은 임유진에게 오늘 여기서 같이 자자고 제안했다.“아니야. 나 오늘은 혼자 있고 싶어. 연신 씨랑 돌아가.”하지만 임유진은 괜찮다며 거절했고 한지영은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에는 돌아가기로 했다.“그럼... 알겠어. 오늘은 아무것도 생각하지 말고 푹 자! 내일 다시 올게!”“응, 잘 가. 연신 씨도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백연신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한지영은 여전히 걱정되는 듯 좀처럼 발걸음을 떼지 않았다.“지영아, 나 정말 괜찮아. 어서 가.”임유진이 또 웃는다. 그리고 한지영은 또 심장 언저리가 무겁게 내려앉았다.아마 당분간은 이 상태가 쭉 이어질 듯하다.모텔에서 나온 후 한지영은 차에 타서도 미간을 찌푸리고 있었다.“왜, 아직도 유진 씨가 걱정돼?”백연신이 물었다.“당연하죠. 말로는 괜찮다고 하는데 어떻게 괜찮겠냐고요!”한지영은 불만을 토로하면 할수록 강지혁을 향한 불만이 더욱 켜졌다. 그러고는 한때 강지혁을 좋게 봤었던 자신도 원망스러워졌다.“역시 강지혁을 만나야겠어요. 지금 당장 그 집으로 가요!”한지영은 도저히 못 참겠는지 씩씩거리며 말했다.“지금?”그러자 백연신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되물었다“네, 지금! 싫어요? 그럼 택시 타고 갈게요.”한지영은 당장이라도 차에서 내릴 것처럼 몸을 돌렸고 백연신이 그녀의 팔을 잡아 제지했다.“싫을 게 뭐 있어. 근데... 너 마음의 준비는 한 거야? 친구 대신 분풀이 좀 했다가 강지혁을 건드리게 되면 어떡하려고?”“상관없어요.”한지영은 임유진의 억지웃음
“왜요?”한지영은 굳이 흙탕물에 뛰어들겠다는 이 남자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백씨 가문 사업이 정식적으로 S 시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면 앞으로 강지혁과 비즈니스적으로 엮일 일도 많아질 텐데 만약 지금 강지혁을 건드리게 되면 S 시에서의 사업은 여러모로 힘들어질 수도 있다.“내가 만약 너 때문이라고, 너를 위해서라면 누구를 건드리게 돼도 상관없다고 말하면 믿을 거야?”백연신이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그의 짙은 눈빛에 한지영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가 하는 말은 대체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일까?하지만 지금 이런 생각을 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한지영의 머릿속은 지금, 이 순간 그를 믿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고이준은 집사로부터 백연신과 한지영이 지금 막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제야 굳어있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오늘은 유난히 바람 잘 날 없는 하루였다.그리고 그 하루 끝에서 유일하게 걱정되는 사람은 역시 강지혁이었다. 아까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 후 강지혁은 장장 3시간을 주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눈앞에 놓인 미완성 케이크만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말이다.고이준은 강지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대체 왜 임유진을 그토록 사랑하면서 오늘 갑자기 헤어지자는 얘기를 했을까.혹시 안은영이 찾아온 것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라도 있었던 걸까?아니면... 그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물론 그게 어떤 이유이든지 이건 부하직원이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될 일이다.그때,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손을 올리더니 미완성이었던 케이크에 크림을 묻히고 데코를 하며 천천히 케이크를 완성하고 있었다.고이준은 그의 옆에서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한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그렇게 얼마 안 가 케이크가 완성되고 강지혁은 2와 8이 적힌 초를 케이크 중앙에 꽂은 후 불까지 붙였다.그 모습은
앞으로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강현수 곁으로 갈까 봐 매일 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강현수가 그녀의 마음속에 얼마만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추측하며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된다.그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며 고작 사랑 때문에 폐인이 되거나 망가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강지혁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드디어 주방에서 나와 홀로 2층으로 올라갔다.고이준은 멀어져가는 상사의 뒷모습을 조금 복잡한 얼굴로 바라봤다.만약 이 세상에 그 누군가가 강지혁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다면...고이준은 지금 자기도 모르게 임유진의 이름 석 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다음 날 아침, 임유진이 잠에서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상자가 놓여있었다. 이건 어제 한지영과 백연신이 준 선물이지만 그녀는 어젯밤 풀어보지 않았다.서서히 몸을 일으킨 후, 선물을 뜯어보니 거기에는 정장 차림의 여자 인형이 들어있었고 변호사 배지까지 단 인형은 어딘가 모르게 그녀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인형 아래에는 한지영이 쓴 글도 있었다.[유진아, 생일 축하해! 나는 네 하루하루가 행복으로만 가득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네가 원하는 꿈도 꼭 이루길 바랄게! PS. 인형의 왼손 손바닥을 누르면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야!]꿈? 행복?그녀가 과연 이런 걸 또다시 바랄 수 있을까?임유진은 손으로 인형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다가 버튼 같은 게 있는 걸 발견하고 꾹 눌렀다.그러자 인형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나는 꼭 정의를 실현하는 좋은 변호사가 될 거야. 그래서 의뢰인들이 재판이 끝난 후 나한테 의뢰하길 잘했다고, 천만다행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이건... 임유진 그녀의 목소리이다!처음 로펌에 들어갔을 때 한지영이 축하한다며 휴대폰을 들고 동영상을 찍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녀가 했던 말들이었다.한지영이 그때의 동영상을 여태 간직하고 생일 선물로 그 말만 잘라 인형에 넣어 둘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임유진은 문득
이런 상황에서도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에게 변호사 자격증이 있다는 것이었고 그 말은 즉 다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같이 가. 차로 움직이면 편할 거야.”그렇게 두 사람은 부동산으로 향했다. 임유진이 원하는 조건은 까다롭지 않았기에 두세 군데 돌아본 후 바로 적당한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월 34만 원짜리 방이지만 교통도 편리하고 주위에는 마트와 시장도 있어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하지만 한지영의 눈에는 그녀가 선택한 지역의 치안이 좋지 않아 보였고 괜히 친구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이곳에 평생 있을 것도 아닌데, 뭐. 그리고 저녁에는 최대한 적게 외출하면 돼. 아무 문제 없을 거야.”한지영도 지금 당장은 이게 최선이라는 걸 알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오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이사에 돌입했고 먼저 월세방을 대청소한 다음 마트에서 기본적인 생필품을 사들였다.몇 시간 후, 이사가 일단락되고 한지영은 떠나기 전 그녀에게 신신당부했다.“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알았지?”“응, 그럴게.”그렇게 한지영이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서려는 순간, 임유진이 돌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왜 그래?”그에 한지영이 조금 놀란 듯 물었다.“지영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임유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어제 한지영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버스 정류장에서 홀로 무너졌을 것이다.매번 임유진이 절망의 늪에서 허덕일 때면 항상 한지영이 그녀를 구출해주곤 했다.한지영은 친구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말했잖아. 우리는 평생 친구라고. 앞으로도 무슨 일 생기면 네 옆에 내가 있다는 것만 기억해!”“응.”임유진의 답에는 울먹거림이 묻어있었다.만약 그 언젠가 한지영도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임유진은 자신의 전부를 내걸고 그녀를 지켜줄 것이다....한지영을 보낸 후 임유진은 이제부터 살게 될 자신의 집을 바라봤다. 전에 살던 곳과 얼추 비슷한 크
임유진은 문득 고개를 숙여 자신의 평평한 배를 바라봤다.어쩌면 이번 생은 정말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몰랐다. 전에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라 포기했지만, 지금은 몸이 괜찮아도 마음이 괜찮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사랑을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임유진이 식당에 도착한 건 저녁 8시가 다 돼서였고 다행히 피크 타임은 피할 수 있었다.“왔어요?”탁유미는 임유진을 반갑게 맞이하고는 조금 초췌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밥은 먹었어요?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그럼 언니, 나 칼국수 한 그릇 먹고 싶어요.”“잠깐만 기다려요.”탁유미는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 주방장에게 부탁했고 몇 분 후 뜨끈한 칼국수가 임유진 앞에 놓였다.“먹어요. 하루 지나긴 했지만, 생일 축하해요!”“고마워요.”임유진은 아무 말 없이 식사하기 시작했다. 탁유미는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먼저 손님을 받고 주방일도 돕다가 임유진이 식사를 마친 후에야 다시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어제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탁유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나 강지혁이랑 헤어졌어요. 지금은 그 집에서 나왔고요.”하룻밤 지나고 나니 이런 얘기도 평정심에 할 수 있게 됐다. 이대로라면 그를 향한 마음들도 조만간 전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탁유미는 너무나도 평온해 보이는 그녀를 보며 더더욱 걱정이 일었다. 그녀 역시 힘든 사랑에 다치고 할퀴어 넝마가 된 사람이라 임유진의 평온함도 그저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것뿐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녀에게 힘이 나는 조언을 해주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자격도 없거니와 이 상황에서 어떤 위로를 건네야 좋을지 감이 서지 않았다.오직 시간의 흐름만이 그녀의 상처를 전부 치유해 줄 수 있는 건 아닐까?“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 아니에요.”임유진은 탁유미 눈에서 자신을 향한 걱정을 읽고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참, 이건 내가 윤이 주려고 산 케이크예요. 어제는 약속
그리고 손에 든 케이크도 놓치고 말았다.아까 몸을 돌린 순간 가게 앞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그 실루엣은 지금 차에 기댄 몸을 세우더니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머리는 항상 그랬듯 단정하게 세팅하고 검은색 정장은 그의 몸에 딱 맞게 자리 잡아 완벽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금욕적인 얼굴은 조금 차가워 보이기도 했고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볼 듯한 눈동자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 같기도 했다.그리고 지금 그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탁유미는 순간 흐르던 피가 멈춘 듯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주위 공기마저 차갑게 느껴졌다.이경빈!이 남자가 결국에는 그녀를 찾아내고야 말았다!백화점에서 도망갔을 때 탁유미는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올 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이번에야말로 그가 그녀를 찾아낼 것이라고.하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 미처 이 상황에 대비할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이 남자를 마주해야 했고 지금 그녀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오랜만이야.”싸늘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그러자 탁유미의 몸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흠칫 떨리고 만다.오랜만이려나...?백화점에서 도망갈 때 스치듯 봤던 그의 옆모습이라면 확실히 오랜만이 맞을 것이다.그러면 그전에 마지막으로 본 건 언제였지? 아, 법정에서 그가 증인이 되어 그녀에게 죄를 입힌 그날이려나?이경빈은 그날 그 예쁜 입으로 직접 그녀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그때 아마 ‘네가 지은 죄 달갑게 받아!’라고 했었나?하지만 탁유미는 죄를 지은 적이 없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외치고 또 외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그녀는 그가 내린 ‘벌’을 그저 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그녀에게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 이경빈을 사랑한 죄밖에 없을 것이다.그녀를 감옥에 밀어 넣은 장본인이 지금 그녀에게 ‘오랜만이야’라는 인사를 건
그녀가 배고픔에 시달리면서 고통받았을 때, 그는 아마도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고 진수성찬을 만끽하고 있었을 것이다.“손 좀 놓아줄래?”탁유미가 말했다. “우리 사이에 할 얘기는 이미 법정에서 다 끝낸 것 같은데. 네가 날 감옥에 보내서 순순히 갔다 왔잖아. 경빈아, 넌 나한테 뭘 더 원하는 거야?”이경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예전처럼 다정하지 않았고 온몸에 가시가 돋친듯해서 사람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이경빈의 귀에는 그녀가 손을 놓아달라고 하는 말이 많이 거슬렸다.“탁유미, 네가 그 몇 년 감옥에 있은 거로 네가 진 빚이 다 청산됐다고 생각하는 거야?”이경빈은 차갑게 말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팔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너무 순진해!”그 말에 탁유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순진하다니... 그가 그녀를 순진하다고 말하다니! 그녀의 순진함은 진작에 이경빈 때문에 파괴되고 산산이 부서졌다! “이경빈, 나는 원래부터 너에게 빚진 게 하나도 없어.”탁유미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초라하고 보잘것없어도, 그녀의 존엄성이 모두 상실되었어도, 절대로 그에게 빚진 것은 없다! “나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그는 분노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나에게 생명 하나를 빚졌어! 네가 아니었으면 수진이 배 속의 아이를 잃지 않았을 거야!” 탁유미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더 크게 웃었다.그때, 그녀는 바로 이 일로 감옥에 간 것이 아닌가? 이경빈은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기에 공수진이 유산하고 아이를 잃게 됐다고 지목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상해죄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3년 반의 감옥 생활을 마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가 자신에게 생명을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그럼 너는 내가 얼마나 더 감옥에 있기를 바라는 거야? 5년? 10년? 아니면 20년... 그것도 아니면 무기징역?”탁유미는 비아냥거
평온한 탁유미의 모습에 이경빈은 약간 놀란 듯했다. “안 도망쳐?”그는 넥타이를 풀면서 물었다. “도망칠 수 있기나 해?” 그녀는 우스운 얘기를 듣기라도 한 듯 반문했다. 탁유미는 도망쳤었다. 감옥에서 나올 때 한 번, 그리고 그를 백화점에서 본 후에 또 한 번 도망쳤다. 하지만 결국... 이경빈은 그녀를 다시 찾아냈다. 가끔 운명은 이렇게 돌고 돌아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우스꽝스럽고도 슬픈 일이지만 또한 사람을 어쩔 수 없게 만든다. “도망칠 수 없어.” 이경빈이 그녀에게 준 대답이었다. “이번에 또 도망친다고 해도 나는 또다시 너를 찾아낼 거야.”“그러니까 도망칠 필요가 없지.” 탁유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저항하기를 모두 포기한 듯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너는 내가 너에게 빚졌다는 그 목숨을 어떻게 갚길 원해?”이경빈은 입술을 깨물며 가라앉은 눈빛으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 “난 궁금해. 그때 네가 출소한 후에 누가 너의 모든 행적을 숨겨 준 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이렇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을 것이다.“친구.”탁유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떤 친구?”이경빈이 추궁했다. “내 목숨도 내줄 수 있는 친구!” 탁유미가 말했다. 하지만 이경빈은 이 친구를 이성이라고 오해했다. 불쾌한 감정이 순식간에 이경빈의 마음을 덮쳤다. 언제부터 그녀에게 목숨을 내줄 정도인 다른 남자가 생긴 거지? “너는 정말 남자가 끊이지를 않네. 왜, 감옥 안에서는 남자가 부족했어?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목숨을 줄 수 있을 만큼 그런 남자가 생겼어? 그 남자를 나랑 비교해보면 어떤 것 같아?”이경빈이 다가가며 말했다. 탁유미는 바로 그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몇 년 전, 그녀는 이미 이경빈에게 수많은 해명을 했다. 하지만 매번 그 해명들은 모욕받을 일을 자처하는 꼴밖에 더 되지 않았다. 하여 지금, 그녀는 더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나는 다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