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요?”한지영은 굳이 흙탕물에 뛰어들겠다는 이 남자가 이해가 되지 않았다.백씨 가문 사업이 정식적으로 S 시에 뿌리내리기 시작하면 앞으로 강지혁과 비즈니스적으로 엮일 일도 많아질 텐데 만약 지금 강지혁을 건드리게 되면 S 시에서의 사업은 여러모로 힘들어질 수도 있다.“내가 만약 너 때문이라고, 너를 위해서라면 누구를 건드리게 돼도 상관없다고 말하면 믿을 거야?”백연신이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그의 짙은 눈빛에 한지영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면서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가슴을 뜨겁게 달구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가 하는 말은 대체 어디까지가 진짜고 어디까지가 가짜일까?하지만 지금 이런 생각을 하기에는 이미 늦어버렸다. 한지영의 머릿속은 지금, 이 순간 그를 믿고 싶다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으니까....고이준은 집사로부터 백연신과 한지영이 지금 막 떠났다는 보고를 받았다. 그리고 그제야 굳어있던 표정이 조금은 풀렸다.오늘은 유난히 바람 잘 날 없는 하루였다.그리고 그 하루 끝에서 유일하게 걱정되는 사람은 역시 강지혁이었다. 아까 그곳을 떠나 집으로 돌아온 후 강지혁은 장장 3시간을 주방에만 틀어박혀 있었다. 눈앞에 놓인 미완성 케이크만 뚫어지게 바라보면서 말이다.고이준은 강지혁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조차 하기 어려웠다. 대체 왜 임유진을 그토록 사랑하면서 오늘 갑자기 헤어지자는 얘기를 했을까.혹시 안은영이 찾아온 것 때문에 두 사람 사이에 갈등이라도 있었던 걸까?아니면... 그가 모르는 다른 이유가 있는 걸까?물론 그게 어떤 이유이든지 이건 부하직원이 함부로 물어서는 안 될 일이다.그때, 이제까지 가만히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손을 올리더니 미완성이었던 케이크에 크림을 묻히고 데코를 하며 천천히 케이크를 완성하고 있었다.고이준은 그의 옆에서 조금 당황한 얼굴을 한 채 그 모습을 지켜봤다.그렇게 얼마 안 가 케이크가 완성되고 강지혁은 2와 8이 적힌 초를 케이크 중앙에 꽂은 후 불까지 붙였다.그 모습은
앞으로 그는 더 이상 두려워하지 않아도 된다. 그녀가 강현수 곁으로 갈까 봐 매일 밤 불안해하지 않아도 되고 강현수가 그녀의 마음속에 얼마만큼의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지 추측하며 마음을 졸이지 않아도 된다.그는 아버지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며 고작 사랑 때문에 폐인이 되거나 망가지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강지혁은 서서히 몸을 일으켜 드디어 주방에서 나와 홀로 2층으로 올라갔다.고이준은 멀어져가는 상사의 뒷모습을 조금 복잡한 얼굴로 바라봤다.만약 이 세상에 그 누군가가 강지혁의 운명을 손에 쥐고 있다면...고이준은 지금 자기도 모르게 임유진의 이름 석 자가 머릿속에 떠올랐다....다음 날 아침, 임유진이 잠에서 일어나 보니 머리맡에는 예쁘게 포장된 선물상자가 놓여있었다. 이건 어제 한지영과 백연신이 준 선물이지만 그녀는 어젯밤 풀어보지 않았다.서서히 몸을 일으킨 후, 선물을 뜯어보니 거기에는 정장 차림의 여자 인형이 들어있었고 변호사 배지까지 단 인형은 어딘가 모르게 그녀와 비슷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인형 아래에는 한지영이 쓴 글도 있었다.[유진아, 생일 축하해! 나는 네 하루하루가 행복으로만 가득했으면 좋겠어! 그리고 네가 원하는 꿈도 꼭 이루길 바랄게! PS. 인형의 왼손 손바닥을 누르면 서프라이즈가 있을 거야!]꿈? 행복?그녀가 과연 이런 걸 또다시 바랄 수 있을까?임유진은 손으로 인형의 손바닥을 만지작거리다가 버튼 같은 게 있는 걸 발견하고 꾹 눌렀다.그러자 인형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나는 꼭 정의를 실현하는 좋은 변호사가 될 거야. 그래서 의뢰인들이 재판이 끝난 후 나한테 의뢰하길 잘했다고, 천만다행이었다고 그렇게 생각해줬으면 좋겠어!”이건... 임유진 그녀의 목소리이다!처음 로펌에 들어갔을 때 한지영이 축하한다며 휴대폰을 들고 동영상을 찍은 적이 있었는데 당시 그녀가 했던 말들이었다.한지영이 그때의 동영상을 여태 간직하고 생일 선물로 그 말만 잘라 인형에 넣어 둘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임유진은 문득
이런 상황에서도 그나마 다행인 건 그녀에게 변호사 자격증이 있다는 것이었고 그 말은 즉 다시 좋아하는 일을 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같이 가. 차로 움직이면 편할 거야.”그렇게 두 사람은 부동산으로 향했다. 임유진이 원하는 조건은 까다롭지 않았기에 두세 군데 돌아본 후 바로 적당한 집을 계약할 수 있었다.월 34만 원짜리 방이지만 교통도 편리하고 주위에는 마트와 시장도 있어 사는 데 큰 문제는 없어 보였다.하지만 한지영의 눈에는 그녀가 선택한 지역의 치안이 좋지 않아 보였고 괜히 친구가 이상한 사건에 휘말리면 어쩌나 걱정이 됐다.“이곳에 평생 있을 것도 아닌데, 뭐. 그리고 저녁에는 최대한 적게 외출하면 돼. 아무 문제 없을 거야.”한지영도 지금 당장은 이게 최선이라는 걸 알기에 그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오후, 두 사람은 본격적으로 이사에 돌입했고 먼저 월세방을 대청소한 다음 마트에서 기본적인 생필품을 사들였다.몇 시간 후, 이사가 일단락되고 한지영은 떠나기 전 그녀에게 신신당부했다.“무슨 일 있으면 바로 나한테 연락해! 모든 걸 혼자 짊어지려고 하지 말고, 알았지?”“응, 그럴게.”그렇게 한지영이 신발을 신고 집을 나서려는 순간, 임유진이 돌연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왜 그래?”그에 한지영이 조금 놀란 듯 물었다.“지영아, 네가 있어서 다행이야.”임유진이 나지막이 속삭였다.어제 한지영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버스 정류장에서 홀로 무너졌을 것이다.매번 임유진이 절망의 늪에서 허덕일 때면 항상 한지영이 그녀를 구출해주곤 했다.한지영은 친구의 손을 톡톡 두드리며 말했다.“말했잖아. 우리는 평생 친구라고. 앞으로도 무슨 일 생기면 네 옆에 내가 있다는 것만 기억해!”“응.”임유진의 답에는 울먹거림이 묻어있었다.만약 그 언젠가 한지영도 도움이 필요한 순간이 온다면 임유진은 자신의 전부를 내걸고 그녀를 지켜줄 것이다....한지영을 보낸 후 임유진은 이제부터 살게 될 자신의 집을 바라봤다. 전에 살던 곳과 얼추 비슷한 크
임유진은 문득 고개를 숙여 자신의 평평한 배를 바라봤다.어쩌면 이번 생은 정말 아이를 가질 수 없을지도 몰랐다. 전에는 임신할 수 없는 몸이라 포기했지만, 지금은 몸이 괜찮아도 마음이 괜찮지 않았다. 이제 더 이상 사랑을 시작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임유진이 식당에 도착한 건 저녁 8시가 다 돼서였고 다행히 피크 타임은 피할 수 있었다.“왔어요?”탁유미는 임유진을 반갑게 맞이하고는 조금 초췌한 그녀의 얼굴을 보며 물었다.“밥은 먹었어요? 일단 식사부터 할까요?”“그럼 언니, 나 칼국수 한 그릇 먹고 싶어요.”“잠깐만 기다려요.”탁유미는 얼른 주방으로 달려가 주방장에게 부탁했고 몇 분 후 뜨끈한 칼국수가 임유진 앞에 놓였다.“먹어요. 하루 지나긴 했지만, 생일 축하해요!”“고마워요.”임유진은 아무 말 없이 식사하기 시작했다. 탁유미는 방해하지 않으려는 듯 먼저 손님을 받고 주방일도 돕다가 임유진이 식사를 마친 후에야 다시 그녀 곁으로 다가갔다.“어제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무슨 일이 있었던 건데요?”탁유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나 강지혁이랑 헤어졌어요. 지금은 그 집에서 나왔고요.”하룻밤 지나고 나니 이런 얘기도 평정심에 할 수 있게 됐다. 이대로라면 그를 향한 마음들도 조만간 전부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한편 탁유미는 너무나도 평온해 보이는 그녀를 보며 더더욱 걱정이 일었다. 그녀 역시 힘든 사랑에 다치고 할퀴어 넝마가 된 사람이라 임유진의 평온함도 그저 고통을 억누르고 있는 것뿐이라는 걸 너무 잘 알고 있었다.그녀에게 힘이 나는 조언을 해주고 싶었지만, 자신에게는 그런 자격도 없거니와 이 상황에서 어떤 위로를 건네야 좋을지 감이 서지 않았다.오직 시간의 흐름만이 그녀의 상처를 전부 치유해 줄 수 있는 건 아닐까?“언니, 걱정하지 마세요. 나 그렇게 쉽게 무너질 사람 아니에요.”임유진은 탁유미 눈에서 자신을 향한 걱정을 읽고는 애써 입꼬리를 올리며 웃어 보였다.“참, 이건 내가 윤이 주려고 산 케이크예요. 어제는 약속
그리고 손에 든 케이크도 놓치고 말았다.아까 몸을 돌린 순간 가게 앞 멀지 않은 곳에서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그리고 그 실루엣은 지금 차에 기댄 몸을 세우더니 달빛을 받으며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어오고 있었다.머리는 항상 그랬듯 단정하게 세팅하고 검은색 정장은 그의 몸에 딱 맞게 자리 잡아 완벽한 몸매가 그대로 드러났다. 그리고 금욕적인 얼굴은 조금 차가워 보이기도 했고 사람 마음을 꿰뚫어 볼 듯한 눈동자는 마치 먹잇감을 노리는 짐승 같기도 했다.그리고 지금 그 눈동자가 그녀를 빤히 바라보고 있다.탁유미는 순간 흐르던 피가 멈춘 듯 자리에서 굳어버렸고 주위 공기마저 차갑게 느껴졌다.이경빈!이 남자가 결국에는 그녀를 찾아내고야 말았다!백화점에서 도망갔을 때 탁유미는 언젠가 이런 상황이 올 줄 어느 정도 예감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더 이상 그에게서 벗어날 수 없을 것이라고. 이번에야말로 그가 그녀를 찾아낼 것이라고.하지만 이렇게까지 빠를 줄은 몰랐다. 미처 이 상황에 대비할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이 남자를 마주해야 했고 지금 그녀는 숨이 멎을 지경이었다.“오랜만이야.”싸늘한 목소리가 정적을 깨고 울려 퍼졌다.그러자 탁유미의 몸은 어쩔 수 없이 그의 목소리에 반응하듯 흠칫 떨리고 만다.오랜만이려나...?백화점에서 도망갈 때 스치듯 봤던 그의 옆모습이라면 확실히 오랜만이 맞을 것이다.그러면 그전에 마지막으로 본 건 언제였지? 아, 법정에서 그가 증인이 되어 그녀에게 죄를 입힌 그날이려나?이경빈은 그날 그 예쁜 입으로 직접 그녀를 지옥으로 밀어 넣었다.그때 아마 ‘네가 지은 죄 달갑게 받아!’라고 했었나?하지만 탁유미는 죄를 지은 적이 없었다. 뭔가 오해가 있을 것이라고 외치고 또 외쳤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고 그녀는 그가 내린 ‘벌’을 그저 달게 받을 수밖에 없었다.그녀에게 죄가 있다고 한다면 그건 아마 이경빈을 사랑한 죄밖에 없을 것이다.그녀를 감옥에 밀어 넣은 장본인이 지금 그녀에게 ‘오랜만이야’라는 인사를 건
그녀가 배고픔에 시달리면서 고통받았을 때, 그는 아마도 사랑하는 여인을 품에 안고 진수성찬을 만끽하고 있었을 것이다.“손 좀 놓아줄래?”탁유미가 말했다. “우리 사이에 할 얘기는 이미 법정에서 다 끝낸 것 같은데. 네가 날 감옥에 보내서 순순히 갔다 왔잖아. 경빈아, 넌 나한테 뭘 더 원하는 거야?”이경빈은 눈을 가늘게 뜨고 눈앞에 있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그녀는 예전처럼 다정하지 않았고 온몸에 가시가 돋친듯해서 사람을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게 했다. 이경빈의 귀에는 그녀가 손을 놓아달라고 하는 말이 많이 거슬렸다.“탁유미, 네가 그 몇 년 감옥에 있은 거로 네가 진 빚이 다 청산됐다고 생각하는 거야?”이경빈은 차갑게 말하며 길고 가는 손가락으로 그녀의 팔을 더욱 세게 움켜쥐었다. “정말 그렇게 생각한다면 너는 너무 순진해!”그 말에 탁유미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렸다. 순진하다니... 그가 그녀를 순진하다고 말하다니! 그녀의 순진함은 진작에 이경빈 때문에 파괴되고 산산이 부서졌다! “이경빈, 나는 원래부터 너에게 빚진 게 하나도 없어.”탁유미는 고개를 들었다. 이번에는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그녀가 아무리 초라하고 보잘것없어도, 그녀의 존엄성이 모두 상실되었어도, 절대로 그에게 빚진 것은 없다! “나에게 빚진 것이 없다고?” 그는 분노에 찬 웃음을 터뜨렸다. “너는 나에게 생명 하나를 빚졌어! 네가 아니었으면 수진이 배 속의 아이를 잃지 않았을 거야!” 탁유미는 눈물이 나올 정도로 더 크게 웃었다.그때, 그녀는 바로 이 일로 감옥에 간 것이 아닌가? 이경빈은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기에 공수진이 유산하고 아이를 잃게 됐다고 지목했다. 이로 인해 그녀는 상해죄로 징역 3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3년 반의 감옥 생활을 마친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가 자신에게 생명을 빚지고 있다고 말한다!“그럼 너는 내가 얼마나 더 감옥에 있기를 바라는 거야? 5년? 10년? 아니면 20년... 그것도 아니면 무기징역?”탁유미는 비아냥거
평온한 탁유미의 모습에 이경빈은 약간 놀란 듯했다. “안 도망쳐?”그는 넥타이를 풀면서 물었다. “도망칠 수 있기나 해?” 그녀는 우스운 얘기를 듣기라도 한 듯 반문했다. 탁유미는 도망쳤었다. 감옥에서 나올 때 한 번, 그리고 그를 백화점에서 본 후에 또 한 번 도망쳤다. 하지만 결국... 이경빈은 그녀를 다시 찾아냈다. 가끔 운명은 이렇게 돌고 돌아 모든 것을 원점으로 되돌려 놓기를 좋아하는 것 같다. 우스꽝스럽고도 슬픈 일이지만 또한 사람을 어쩔 수 없게 만든다. “도망칠 수 없어.” 이경빈이 그녀에게 준 대답이었다. “이번에 또 도망친다고 해도 나는 또다시 너를 찾아낼 거야.”“그러니까 도망칠 필요가 없지.” 탁유미는 어깨를 으쓱하며 저항하기를 모두 포기한 듯 말했다. “그렇다면 이제 너는 내가 너에게 빚졌다는 그 목숨을 어떻게 갚길 원해?”이경빈은 입술을 깨물며 가라앉은 눈빛으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 “난 궁금해. 그때 네가 출소한 후에 누가 너의 모든 행적을 숨겨 준 건지.”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는 이렇게 많은 시간을 소비하지 않았을 것이다.“친구.”탁유미는 담담하게 대답했다. “어떤 친구?”이경빈이 추궁했다. “내 목숨도 내줄 수 있는 친구!” 탁유미가 말했다. 하지만 이경빈은 이 친구를 이성이라고 오해했다. 불쾌한 감정이 순식간에 이경빈의 마음을 덮쳤다. 언제부터 그녀에게 목숨을 내줄 정도인 다른 남자가 생긴 거지? “너는 정말 남자가 끊이지를 않네. 왜, 감옥 안에서는 남자가 부족했어? 감옥에서 나오자마자 목숨을 줄 수 있을 만큼 그런 남자가 생겼어? 그 남자를 나랑 비교해보면 어떤 것 같아?”이경빈이 다가가며 말했다. 탁유미는 바로 그가 오해하고 있다는 것을 알았지만 그녀는 설명하고 싶지 않았다. 몇 년 전, 그녀는 이미 이경빈에게 수많은 해명을 했다. 하지만 매번 그 해명들은 모욕받을 일을 자처하는 꼴밖에 더 되지 않았다. 하여 지금, 그녀는 더 해명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나는 다른
그 순간, 탁유미는 너무 놀라 넋이 나갔다.이 사람이 지금 뭐 하는 거지? 지금 키스하는 거야?왜 키스를 하는 거지? 이경빈은 그녀를 극도로 혐오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지만 지금 왜 그의 키스에는 그녀의 모든 것을 삼키려는 듯한 절박함을 담고 있는 건지.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키스는 드디어 끝이 났고 그의 목구멍에서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경빈 자신도 놀랐다. 이 키스가... 그에게 이렇게 큰 만족감을 줄 줄이야! 이런 만족감을 느낀 지가 오래되었다! 왜... 왜 하필이면 이 여자인 건가.복잡한 감정을 담은 그의 시선이 그녀를 응시했고 손끝은 조금 전의 키스로 약간 부어오른 입술을 문질렀다. 4년이 넘는 시간은 예전의 풋풋함을 벗겨내고 그녀에게 성숙한 느낌을 더했다. 그녀의 매력적인 눈썹과 눈매는 쉽게 남자의 마음을 흔들었다.아마 그녀는 이런 눈빛으로 다른 남자의 마음도 흔들었겠지?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다른 남자에게 바칠 수 있다고 말했던 것이 떠오르자 그의 기분은 극도로 나빠졌다. 그 남자도 그녀에게 이렇게 키스를 했을까?“이경빈, 너 대체 무슨 짓을 하려는 거야!”탁유미의 목소리가 그를 현실로 돌아오게 했다. 예전에 그가 키스한 후에 그녀가 보여주었던 수줍음은 더는 그녀의 얼굴에 없었다. 마치 방금 그의 키스가 아무것도 아닌 듯했다.그저 4년이 지났을 뿐인데, 자신은 더는 이 여자에게 아무것도 아니게 되었는가?!이경빈은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이 목구멍에서 퍼지는 것을 느꼈다. 그리고 그는 이 한 마디를 입에서 내뱉었다.“아이를 낳아줘!”“뭐라고?”탁유미는 당황했다. “내 아이를 낳아줘.”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보고 있었는데 자신이 잘못 들었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아이를 낳아달라고? 그가 지금 진심으로 자신에게 아이를 낳아달라고 한다고?!그때 탁유미가 자신이 임신했다고 말했을 때, 이경빈은 믿지 않았었고 심지어 그녀는 평생 그의 아이를 낳을 자격이 없다고도 말했다. 설사 그녀가 임신했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