퇴근 후 백연신이 한지영을 픽업하러 왔다. 차 안에서 그녀는 여전히 가십거리 기사와 댓글로 분주히 보내며 기필코 그 기사를 실검에 올릴 작정이었다.한편으로 ‘전투’를 시행하면서 그에게 말했다.“진씨 일가 진짜 너무 비겁해요. 끈질기게 실검 기사 내리는 거 봐요. 그냥 뒀더라면 지금쯤 아마 실검 1위에 올랐을 거라고요.”“1위 했으면 좋겠어?”백연신이 물었다.“당연하죠. 내가 지금 뭣 때문에 바삐 돌아치는데.”그녀는 구시렁댔지만 손동작은 멈출 기미가 없었다.“기사 하나 실검에 올리는 것뿐인데 뭐가 그렇게 바빠?”백연신이 말했다.“이렇게라도 안 하면 아예 가망이 없다고요.”한지영은 시큰둥하게 대답했다.“실검을 돈 주고 살 수 있다는 거 너 설마 모르는 건 아니지?”그의 말을 들은 순간 한지영은 큰 깨달음을 얻은 것처럼 몸을 움찔거리더니 머리를 번쩍 쳐들고 고양이처럼 두 눈을 반짝였다.왜 그걸 깜빡했지? 이 남자는 딴 건 몰라도 돈은 끝내주게 많잖아! 실검 하나 사는 건 식은 죽 먹기일 텐데!돈을 위해, 실검을 위해, 계속 진세령을 짓밟기 위해 한지영은 불쑥 요염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연신 씨가 날 위해 실검 사주실래요?”“내가 왜? 오늘 낮에 이미 네 부탁 받고 인스타에 기사도 올렸는데.”백연신이 넌지시 말했다.한지영은 잠시 고민하더니 동의한다는 듯이 더 물었다.“그럼 내가 어떻게 하면 실검 사주실래요?”그녀는 겸허하게 그의 뜻을 물었다.“지금 네가 뭘 해야 내가 실검을 살만한 가치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아?”그가 되물었다.“나 두들겨 패게요?”곰곰이 생각해봤는데 그는 복수하기 위해 그녀를 만나주는 거니까 이참에 화끈하게 얻어맞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백연신은 두 눈을 희번덕거렸다. 이 녀석의 머리엔 대체 뭐가 들어있는 걸까? 옆에 남겨두고 연애도 하고 있는데 정말 전혀 눈치 못 챘다고?백연신은 핸들을 돌리고 길옆에 급정거했다.“탁.”그는 문득 안전펠트를 풀고 몸을 기울여 그녀의 입술에 터프하게 키스했다.한지영은
그런데 왜? 지금 그녀를 바라보는 눈빛과 그 속에 담긴 감정은 이토록 그윽한 걸까?심지어 그가 자신을 사랑하고 있다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사랑한다고? 말도 안 돼!백연신은 마땅히 그녀를 죽을 만큼 증오해야 한다! 그해 그녀는 백연신과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 아예 잠수타버렸다!“난...”한지영은 입술을 꼭 깨물고 미처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백연신은 그녀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휴대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진세령 연예계에서 매장당한 기사 실검 1위로 올려... 아 참, 잠깐만.”그는 문득 고개 돌려 한지영에게 물었다.“실검에 며칠 동안 걸어둘까?”“네?”한지영은 두 눈을 깜빡거리며 미처 반응하지 못하다가 무심코 대답했다.“3일이요.”“3일 동안 걸어둬.”백연신은 전화기 너머의 상대에게 분부한 후 통화를 마치고 휴대폰을 다시 넣었다.“이제 소원 성취했지?”한지영은 다시 두 눈을 깜빡거렸다. 이렇게 해결됐다고?!그녀가 반나절이나 애써도 해내지 못한 일을... 한 번의 키스로, 한 통의 전화로 바로 오케이 됐다고?그녀는 문득 자신의 키스가 나름대로 값지게 느껴졌다. 다만 백연신이 실검 1위에 이 기사를 올리는 비용이 과연 얼마나 들었을까?...기사를 내릴 수가 없다! 진세령은 가족의 도움을 빌려도, 자신이 동용할 수 있는 모든 인맥을 끄집어내도 연예계에서 매장당한 기사를 실검 1위에서 내릴 수가 없다!누구야?! 대체 누구 짓이야?!강지혁?아니면 또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걸까? 연예계에 그녀를 질투하는 사람이 많으니 이 기회에 나락으로 떨어트리려는 사람도 많겠지.“아직도 누구 짓인지 조사해내지 못했어?”진세령이 전화에 대고 매니저를 향해 고함을 질렀다.“상대의 정체가 너무 신비로워 도저히 찾아낼 수가 없어.”매니저가 말했다.“네 기사를 세 날 동안 실검 1위에 올린다는 것밖에 몰라.”“뭐라고?!”진세령은 믿을 수가 없었다. 한 시간도 버틸 수 없는데 사흘이라니? 이게 말이 돼?!“돈은 얼마든지 상관
“언니가 말했어. 강지혁 같은 남자는 절대 한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강지혁은 여자를 믿지 않아. 이 세상에서 오직 저 자신만 믿을 거야. 강지혁은 바로 그런 사람이거든!”임유진이 그의 경계를 전부 내려놓는다면 모를까, 조금이라도 의심되는 부분이 있다면... 진세령의 눈빛이 점점 더 어두워졌다.강지혁은 미친놈이다. 애초에 진애령은 그에게 흠뻑 빠져있었다. 강지혁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걸 뻔히 알면서도 기어코 그와 결혼하려고 애를 썼다.그런데 언니가 사망한 후 강지혁은 언니를 위해 눈물 한 방울도 안 흘렸다.이젠 임유진이 처참한 대가를 치를 때가 되었다.임유진 때문에 진세령은 이 신세가 되었으니. 그녀가 강지혁에게 버림받는 날까지 기다렸다가 또 한 번 그녀에게 죽음의 고통을 맛보여줄 것이다!...소씨 일가에서 많은 인맥을 동원하고 돈도 적잖게 썼지만 진세령의 연예계 매장 기사는 실검 1위에서 내려올 기미가 없었다. 족히 3일 동안 굳건히 1위를 차지했다.진씨 일가와 소씨 일가에서 얻은 정보에 의하면 이 기사를 실검 1위에 올려놓으려고 애쓰는 사람들이 한둘이 아니라고 한다.진세령은 이제 철저히 망신을 당했다.한지영은 매일 실검 1위를 보며 기분이 날아갈 것 같았고 백연신에게도 칭찬을 남발했다. 심지어 실검 1위 기사를 캡처해 사진으로 인화하여 기념하기도 했다.그 모습에 백연신은 한심하다는 표정을 지었다.“아 참, 유진아. 모레면 네 생일인데 강지혁 씨 집에서 보내?”한지영이 전화해서 물었다.전에 임유진은 올해 생일이 마침 외할머니의 49재 다음날이라 성대하게 지내고 싶지 않다고 했다.“맞아. 그때 가서 연신 씨랑 같이 와. 물론, 연신 씨가 시간이 된다면.”임유진이 초대했다.“알았어. 잠깐만, 지금 바로 물어볼게.”한지영은 머리 들어 코앞에 서 있는 백연신에게 물었다.“유진이 모레 생일이에요. 나랑 함께 가줄 시간 돼요?”“응, 돼.”백연신이 대답했다. 임유진은 한지영의 베프이다. 그녀가 초대했으니 백연신
“어차피 금방 돌아올 거라서 너까지 번거로울 필요는 없는데, 거기까지 가는 거 귀찮지 않아?”임유진이 물었다.“안 귀찮아. 네 외할머니잖아.”강지혁의 단호한 목소리에 임유진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 나며 동시에 코가 시큰거려 그대로 그를 꽉 껴안았다.사랑받는다는 건 아마 이런 기분일 듯싶었다.강지혁은 품에 안긴 임유진을 보며 예쁘게 웃더니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었다.“생일 때 빌고 싶은 소원 같은 건 있어?”소원이라...출소하고 난 뒤 그녀가 가장 원했던 건 사건을 뒤집고 결백을 찾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소원을 이뤘으니 지금 그녀에게 가장 큰 소원이라고 하면 아마...“내 소원 들어주려고?”임유진이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마주친 채 물었다.“응, 네가 원하는 거면 내가 무슨 짓을 해서든 다 들어줄 거야.”“그럼 나 생일 때, 그때 말해줄게.”그녀의 소원은 그가 무리할 필요도 없고 엄청나게 큰 노력을 들일 필요도 없다. 임유진이 원하는 건 그저 강지혁이 그녀를 온전히 믿는 것이다. 그녀가 이토록 깊게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고 불안해하는 모습과 약해진 모습을 더는 보이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강지혁이 아파하면 그녀 역시 마음이 아프니까.“알았어. 그럼 생일 때 얘기해 줘. 뭐든 들어줄 테니.”같은 시각.이경빈은 지금 호텔 로열 스위트 룸 창문 앞에 서서 불빛이 반짝이는 거리를 바라보며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나 당분간 S 시에 머무르다 갈 거야.”“왜요? 협력 건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공수진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으면서도 이경빈의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다.“그런 건 아니고 다른 볼 일이 생겼어.”이경빈이 더는 캐묻지 말라는 듯이 말하자 공수진도 곧장 화제를 바꿨다.“참, 부모님이 우리 언제 결혼하냐고 계속 재촉해요. 아빠가 결혼 날짜는 10월로 정하는 게 좋다고 하던데 경빈 씨는 어때요?”결혼?이경빈은 이 화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공수진은 그가 선택한 사람이니 결혼을 하게 되
‘이곳 어딘가에 탁유미 그 여자가 있는 거겠지?’몇 년간 그녀는 마치 풀지 못한 저주처럼 이경빈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이긴 건 분명 그일 텐데 왜 그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 걸까? 이경빈은 매번 그녀가 떠오를 때마다 누가 심장을 둔기로 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런 감정을 잠재우려면 탁유미를 찾아내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철저하게 그녀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워버려야 한다!...다음날, 강씨 저택 기사는 임유진을 태우고 마을로 향했다.얼마 후,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차에서 내려 외할머니댁으로 들어갔다.오늘은 임유진 외할머니의 49재로 노씨 집안은 평소 안면이 있던 스님을 집에 모셨고 친척들과 이웃 주민들은 벌써 도착해 있었다.임유진은 앞으로 다가가 흑백사진 속 외할머니 얼굴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어머니 다음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아껴주던 사람이 바로 외할머니였다.3살에서 9살이 되기까지 외할머니는 그녀에게 부모나 다름없었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외할머니, 제가 이제 크면 돈을 엄청 많이 벌어서 할머니 호강시켜 줄게요!”어릴 적 임유진은 항상 외할머니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하지만 호강시켜드리기도 전에 외할머니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돼버렸고 그녀의 곁을 떠나버렸다.눈을 감기 전 그녀의 외할머니는 간호사에게 부탁해 임유진에게 전화를 넣어달라고 했다. 아마 자신이 떠난 후 혼자 남게 될 임유진이 눈에 밟혔을 것이다.‘할머니, 혹시라도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혁이가 옆에서 날 지켜주고 사랑해줄 거예요.’임유진은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한 후 예의를 갖춰 절을 올렸다.그녀의 첫째 삼촌과 둘째 삼촌은 임유진이 절을 올린 후 그녀의 손을 잡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자신들의 조카 남자친구가 강지혁이라고 안 뒤부터 그들은 더는 그녀를 건드릴 엄두가 안 났다.또한, 일전 자신들의 조카를 마을에 있는 바보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던 사실도 있었기에 행여 강지혁이
그와 눈이 마주친 임유진은 흠칫 몸을 떨었다. 강현수가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기 때문이다.그리고 그 순간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쓸쓸함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어릴 적 힘든 순간을 같이 했던 남자아이가 모르는 사람 보듯 해서 이러는 걸까? 하지만... 이 모든 건 그녀의 선택이다.며칠 전, 그녀는 어릴 적 강현수를 구한 사람이 자신이 맞다고 해도 강지혁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강지혁이 불안해하는 걸, 사랑하는 남자가 약해지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기억 속 너머의 진실이 어떠하든 그녀는 이미 외면하기로 했다.‘그래, 이게 맞아.’임유진은 쓰게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한편, 강현수 옆에 있던 배여진은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힐끗 보고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강현수를 쳐다봤다.임유진을 본 그가 또 어떤 이상한 행동을 할지 몰랐으니까. 전시회장에서처럼 또 임유진의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불상사라도 벌어지면 그녀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하게 될 것이다.그녀의 친척들과 이웃 주민들은 배여진이 강현수의 여자친구가 되리라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상태이니까.다행히 강현수는 싸늘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한번 바라본 후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았고 이에 배여진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강현수가 진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이대로 어릴 적 그를 구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계속 밀어붙여야만 한다!외할머니에게 절을 한 후 배여진은 임유진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유진아, 강지혁 씨는? 같이 안 왔어?”“오후에 온대.”대답을 마친 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자신의 사촌 언니를 빤히 바라봤다.배여진이 대체 뭐라고 했길래 강현수가 어릴 적 자신을 구한 사람이 배여진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었던 걸까? 그녀가 들려준 어린 시절 두 아이가 처했던 상황 때문에?임유진의 기억이 아직 돌아온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 자신이 정말 강현수와 있었던 일을 배여진에게 말해줬다고는 해도 그렇게 디테일한 부분까지 전부 다 얘기해 주지 않았
임유진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어릴 적 강현수 씨 구해준 거. 정말 언니 맞아?”그러자 배여진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그게 아니면 현수 씨가 내가 뭐라고 이렇게 잘해주겠어?”“하지만 내 기억 속 언니는 산을 타고 노는 걸 싫어했던 것 같은데. 언니보다는 내가 더 잘 갔지.”그 말에 배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너... 그 말 무슨 뜻이야? 내가 산속에 가서 노는 걸 좋아하든 아니든 그게 현수 씨를 구한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난 그날 우연히 산으로 간 것뿐이고 마침 현수 씨를 구하게 된 거야.”“마침? 우연히?”임유진은 정처 없이 흔들리는 배여진의 눈동자로 그녀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거의 확신했다. 떳떳하다면 이렇게 흔들릴 이유가 없을 테니까.강현수를 구한 건 배여진이 아니다.“야, 너 뭐 하자는 거야?”배여진은 당황함을 감추려 일부러 화를 냈다.“네가 뭔데 자꾸 나랑 현수 씨 일에 끼어들려고 그래? 넌 네 일이나 잘해!”그러고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임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양손을 바라봤다. 만약 꿈속에서 봤던 그 장면이 정말 어릴 적 강현수를 구했던 장면이라면, 절벽 아래 있던 강현수를 힘껏 위로 끌어올린 것도 다리가 풀린 강현수를 일으켜 업고 산 아래까지 내려온 것도 전부 자신의 두 손이 한 일인 게 된다.‘그럼 강현수가 몸에 지니고 다녔던 그 은팔찌도 내 건가...?’어릴 적 그녀에게는 한 쌍의 은팔찌 있었는데 한쪽은 어쩌다 잃어버렸고 남은 한쪽은 어른이 된 후 외할머니가 대신 보관해주었다.하지만... 외할머니의 유품 중 은팔찌 같은 건 없었다.물론 오래전 물건이고 값이 나가는 것도 아니라 외할머니가 실수로 버렸을 수도 있다.임유진은 외할머니댁을 나와 어릴 적 살던 이 집을 바라보며 앞으로 다시는 이곳으로 발을 들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강씨 저택 기사는 임유진이 나온 걸 보고 그녀에게 다음 목적지에 대해 물었다.“외할머니 보러 산소에 갈 거예요.”그때 마침 임유진의 눈에 배여진이
임유진은 외할머니와 단둘이 있고 싶어 먼저 산소로 출발했다.몇 분 후 차는 산 아래 멈춰 섰고 임유진은 같이 따라가려는 기사를 제지하며 그의 동행을 거절했다.“기사님, 저 혼자 가도 돼요. 할머니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요.”그러자 기사는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꼭 임유진 씨 곁을 지키라는 명을 받아서...”“그건 제가 혁이한테 잘 말해드릴게요. 그리고 여기는 마을 사람들만 있는 곳이라 위험한 것도 없어요.”임유진은 옅게 웃은 후 물건을 챙겨 들고 위로 올라갔다.운전기사는 어쩔 수 없이 차에 돌아가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임유진이 막 외할머니 산소에 도착했을 때 강지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나 회의 다 끝났어. 지금 갈게.”“서두르지 않아도 돼. 내가 아직 할 일이 조금 있어서 그러니까 천천히 와.”임유진이 물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 뭐 하고 있어?”강지혁이 물었다.“나 지금 할머니 산소에 왔어. 할머니 댁은 사람이 많아서 나 혼자 먼저 온 거야. 너 먼저 도착하게 되면 나 조금 기다려 줄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기사님한테 도와달라고 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엄밀히 따지면 임유진은 강지혁보다 몇 개월이나 먼저 태어났고 처음 만났을 때도 강지혁을 돌봐준 건 그녀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가 그녀를 아기 취급하듯 대하고 있다.임유진은 피식 웃고는 천천히 외할머니 무덤 앞으로 다가갔다. 대리석으로 된 묘비 위에는 외할머니의 흑백사진도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해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생전 외할머니가 좋아했던 음식들과 소주를 꺼내 올려두었다.어머니도 가고 남동생도 가고 이제는 외할머니마저 가버렸다. 그녀를 사랑 가족들은 전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하지만 다행인 건 강지혁이 그녀의 곁에 남아있다. 그리고 아마 곧 그녀의 가족이 될 것이며 평생을 함께하고 자식을 낳은 후 도란도란 예쁜 가정을 꾸리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고개를 숙
“그럼 다른 경호원들을 물려줘. 전처럼 채린 씨만 곁에 있게 해줘. 솔직히 매번 내 뒤에 여러 명이 따라다니는 거, 나 불편해.”임유진은 그 상황이 꼭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당하는 것 같은 느낌이었다.“안 돼.”강지혁이 단호하게 거절했다.“왜? 왜 안 되는데?”“뭐가 됐든 안 돼. 넌 지금 경호가 필요한 몸이야. 그러니까 사람 물리는 건 안 돼.”강지혁은 김재호 일도 그렇고 진세령이 탈옥한 일도 그렇고 아직 임유진에게는 그 어떤 것도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불안의 근원 중 어떤 것은 단지 그의 의심과 추측에 불과하니까. 그러니 앞으로 일주일 정도밖에 남지 않은 출산 예정일까지는 그녀가 불안해할 만한 그 어떤 빌미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하지만 그 마음이 임유진에게는 전달이 되지 않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이러는 게 결국에는 자신을 향한 불신 때문이라고 생각했다.“우리 사이에 믿음이 고작 그거밖에 안 돼? 내가 어떻게 해야 할까? 내가 어떻게 하면 떠나지 않겠다는 내 말을 믿어줄래?”그녀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강지혁은 마치 임유진의 내면을 꿰뚫어 보기라도 하려는 듯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럼 나한테 키스해 봐.”“뭐?”갑작스러운 요구에 임유진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나한테 키스하라고. 네가 먼저 나한테 입을 맞추면 그때는 네가 떠나지 않을 거라는 거 믿어줄게.”강지혁은 단지 살과 살이 맞닿는 느낌을 원하는 게 아니라 일종의 마음의 안정감을 원했다. 그녀를 믿어도 된다는, 그녀의 사랑이 진심이라고 확신할만한 안정감을 원했다.그의 사랑은 날이 갈수록 점점 더 커지고 부풀어지기만 하는데 임유진은 꼭 아닌 것 같아서, 임유진은 언제든지 그를 떠날 수 있을 것 같아서.실제로 임유진이 결혼을 승낙한 것도 이미 생겨버린 아이들과 병원에 누워있는 한지영 때문이었다. 그런 상황 때문에 임유진은 어쩔 수 없게 그의 곁에 있게 된 것이었다.그래서 강지혁은 마음속으로 늘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그녀가 아무
강지혁은 샤워를 마친 후 가운으로 갈아입고 거울 앞으로 가 자신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물방울이 머리카락에서부터 떨어져 그의 볼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얼굴 전체를 뒤덮은 물방울들은 꼭 그의 눈물 같기도 했다.“할아버지가 얘기한 그 날은 절대 오지 않을 거예요. 유진이는 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했고 나도 아버지처럼 목숨을 끊을 생각 없어요. 나와 유진이는 곧 태어날 아이들과 함께 평생 잘 살 거예요.”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속에는 견고한 다짐이 섞여 있었다....그 뒤로 며칠간 임유진과 강지혁은 거의 저택에만 있다시피 했다.임유진은 간혹 심심하거나 할 때 한지영과 탁유미에게 전화를 해 무료함을 달랬다.한지영과 탁유미는 임유진과 강지혁의 사이가 다시 원래대로 돌아왔다는 것을 듣고 잘 됐다며 기뻐해 주었다.탁유미는 두 사람 사이에 정확히 무슨 일이 있었는지 들은 바가 없지만 뭐가 됐든 잘 해결됐다고 하니 기분이 좋았다.그리고 다 알고 있는 한지영은 다시 임유진에게 전화를 걸어 조심스럽게 물었다.“정말 내려놓기로 한 거야? 괜찮겠어?”그녀는 임유진의 당시 사건을 처음부터 끝까지 지켜본 사람이라 임유진이 감방에서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고통을 받은 것과 괴롭힘에 지쳐 하마터면 자살 직전까지 내몰렸다는 것까지 전부 다 알고 있기에 아무래도 걱정이 될 수밖에 없었다.“응. 한번 노력해보려고. 진심이야.”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은 그제야 조금 안심이 됐다.“그럼 다행이고. 참, 엄마랑 아빠가 명절 겸 너희 두 사람을 집으로 초대하고 싶다는데 시간 괜찮아? 나 구해줘서 고맙다고 꼭 한번 맛있는 거 먹이고 싶으시대.”“고마운 거로 따지면 내가 더 고맙지. 네가 아니었으면 난 이렇게 멀쩡하게 살아있지도 못했을 테니까.”임유진은 한지영에게만큼은 뭘 줘도 아깝지 않았다.두 사람은 한지영의 집으로 가는 날짜를 정하고 전화를 끊었다.임유진은 휴대폰을 내려놓은 후 마침 이쪽으로 걸어오는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방금 지영이랑 통화했는데 내일 우리더러 자기
다만 전과 다른 게 있다면 한 침대에서 자지는 않는다는 것이었다.임유진이 씻고 나왔을 때 강지혁은 소파로 향하며 말했다.“나는 소파에서 잘게. 내가 침대에서 자야 네가 편할 거야.”강지혁은 그녀가 그로 인해 또다시 토를 하고 반응을 일으킬까 봐 자진해서 소파에서 자겠다고 했다.다음날.임유진은 눈을 비비며 침대에서 조심스럽게 윗몸을 일으켰다. 앞을 바라보니 강지혁은 소파에 누운 채 여전히 잠을 자고 있었다.이에 그녀는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내려와 소파 쪽으로 걸어갔다.이상한 일이었다.강지혁은 단 한 번도 그녀보다 늦게 눈을 뜬 적이 없었으니까. 게다가 지금은 아침 9시였다.‘아직도 잔다고?’임유진은 의문을 품으며 조용히 강지혁의 잠 자는 얼굴을 바라보았다.어제도 느꼈지만 그는 확실히 살이 빠져 있었다. 잠자는 모습에서도 살이 빠진 게 확 티가 날 정도였다.게다가 잠을 제대로 못 잔 건지 그의 눈 밑에는 옅은 다크서클도 있었다.그때 강지혁의 미간이 꿈틀거리더니 평온했던 얼굴이 순식간에 두려움에 잠식되고 식은땀까지 흘리기 시작했다.“아니야... 아니야... 그럴 리 없어... 절대...”강지혁의 입이 살짝 열리며 이런 말들이 튀어나왔다.“뭐가 그럴 리 없는데?”임유진은 그의 상태에 조금 당황한 듯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의 볼을 매만졌다.하지만 그와 살이 맞닿는 순간 그녀의 몸은 또다시 급속도로 굳어지기 시작했다.‘대체 뭐가 문제인 건데! 내가 내려놓겠다잖아. 과거 같은 거 이제는 잊어보겠다잖아! 그런데 왜 아직도 이런 반응이냐고!’임유진은 몸이 점점 차가워지자 결국 손을 거두어들이고 큰소리로 강지혁을 향해 외쳤다.“혁아, 혁아! 일어나봐!”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던 걸까? 강지혁의 눈이 갑자기 번쩍 떠졌다.절망으로 가득 잠겨있던 그의 눈동자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고서야 정신을 차린 듯 서서히 원래대로 돌아왔다.“대체 꿈에서 뭘 봤길래 이래?”임유진이 호흡을 가다듬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무것도 아니야.”강지혁은
“지나간 일은 돌이킬 수 없잖아. 그러니 이제는 내려놓고 더 이상 과거에 얽매이지 않으려고. 지영이 말대로 이제는 앞만 보며 행복하게 살려고.”임유진은 심호흡을 한번 내쉰 후 자신 안의 갈등과 모순들을 하나둘 내려놓고 드디어 요 며칠 줄곧 고민했던 말을 그에게 전했다.“혁아, 널 용서할게. 그리고 널 떠나지 않을게. 그때 너한테 했던 약속, 지킬게.”그녀는 결정을 내렸다.이 말이 입 밖으로 나왔을 때 임유진의 몸은 마치 그때의 고통을 기억하라는 듯 그녀에게 신호를 보냈다. 하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치 무거운 짐을 내려놓은 것처럼 머리가 맑아졌다.어쩌면 임유진은 그간 그녀를 괴롭혔던 것들을 전부 다 내려놔야만 진정한 행복을 얻게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야만 사랑하는 사람과 평생 함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임유진은 강지혁을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았다. 만약 지금 그를 놓쳐버린다면 평생 후회와 지금보다 더 큰 고통 속에서 살게 될 거라는 걸 그녀는 본능적으로 알고 있었다.강지혁은 떨리는 입술을 서서히 벌리며 물었다.“정말... 정말 날 용서해줄 거야? 정말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거야...?”“응, 영원히 네 곁에 있을게.”강지혁의 어머니도 그를 떠났고 강지혁의 아버지도 그를 떠났고 이제는 강지혁의 할아버지마저 그를 떠났지만 그녀는 아니었다. 임유진은 평생 강지혁과 함께 즐겁게 살고 싶었다.강지혁은 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또다시 눈물을 흘렸다.“유진아... 유진아...”그는 어린아이처럼 눈물을 쏟아내며 그녀의 이름만 계속해서 불러댔다.임유진은 탁자 위에 있는 티슈를 들어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울지 마. 다 용서할 테니까 울지 마...”“응. 안 울게. 나 안 울어...”강지혁은 울지 말라는 그녀의 말에 애써 눈물을 참아보며 빨개진 눈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우는 강지혁의 모습은 정말 흔치 않은데 오늘 그는 그녀의 앞에서 두 번이나 펑펑 울어댔다.일전 병원에서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그를 이렇게 울보로 만들 수 있는 건 오직 임유진
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마치 이제야 생기가 돌아오는 듯 눈을 반짝이더니 입꼬리를 아주 예쁘게 위로 말아 올렸다.“정말 내가 보고 싶었어? 정말...?”강지혁은 감격에 찬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며 눈물까지 글썽였다.임유진은 생각보다 더 큰 그의 반응에 순간 심장이 움찔거렸다. 고작 보고 싶었다는 그 한마디가 그에게는 눈물까지 글썽일 일이었나?강지혁이 자신을 많이 사랑하고 있다는 건 그녀 역시 잘 알고 있는 일이다.그리고 그녀 역시 강지혁 못지않게 그를 사랑하고 있다.“밥 먹어. 음식 다 식겠다. 식으면 맛없어.”“응, 그럴게. 오늘이 우리가 함께 보내는 첫 설날이지만 앞으로는 이런 날들이 끝도 없이 많을 거야. 우리는 앞으로 계속 함께 있을 거야. 내 말이 맞아?”강지혁은 조금 긴장과 기대감이 뒤섞인 얼굴로 질문을 빙자한 자신의 바람을 얘기했다.임유진은 그가 원하는 답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리고 그녀는 그를 실망시키고 싶지 않았다.“응. 앞으로는 매년 이렇게 함께 있을 거야.”그녀의 이 한마디로 그의 바람과 기대가 완전히 충족되었다.그때 강지혁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그의 볼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렸다. 그는 울고 있었다. 하지만 입꼬리는 기쁜 듯 여전히 위로 올라가 있었다.그 웃음이 꼭 따뜻한 햇볕과도 같아 임유진은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그리고 그의 우는 모습에 괜히 가슴이 찌릿하며 마음이 아파 났다....강지혁이 갑자기 울어버리는 바람에 거의 2시간이 지나서야 식사가 끝이 났다.“이따 설날 특집으로 하는 예능을 볼 건데 같이 볼래?”임유진이 물었다.그러고 보면 설날 특집으로 하는 예능 프로를 안 본 지도 꽤 오래되었다.어릴 때까지만 해도 외할머니 품에 안겨 늘 함께 예능 프로를 봤었는데 아버지와 함께 도시로 가게 된 뒤로는 설날 특집으로 나오는 예능 프로든 설 특선 영화든 하나도 관심이 없어졌다.설날만 되면 티비 시청 권한은 언제나 임유라에게 있었으니까. 임유진은 진정한 가족 같은 임정호와 방미령, 그리고 임유라 사이
“언제부터 자고 있었습니까?”강지혁이 물었다.“주무신 지 1시간 정도 됐을 거예요.”이모님이 자리에서 일어서며 그에게 곁을 양보했다.강지혁은 허리를 숙이며 한쪽 무릎을 꿇더니 손을 들어 임유진의 볼을 부드럽게 매만졌다.그는 그녀가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가 됐을 때만 그녀를 만질 수 있다. 또다시 그녀가 거부반응을 일으키며 토해서는 안 되니까.이모님은 강지혁의 행동을 보더니 저도 모르게 짧게 소리를 내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사실 그녀는 강지혁이 그 대신으로 고용한 사람이라 그간 강지혁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말이 사모님이지 임유진을 그저 엉겁결에 강지혁의 아이를 임신해 이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꿰찬 별 볼 일 없는 여자라고 생각했었다. 강지혁이 그녀를 사랑할 거라고는 아주 조금도 생각하지 못했다.하지만 이렇게 두 사람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니 전혀 그렇지 않았다.마치 조금만 건드려도 깨지는 유리구슬이라도 되는 것처럼 임유진을 조심스럽게 매만지고 또 꿀이 떨어질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보는 이 행동은 누가 봐도 사랑하는 사람을 대하는 행동이었다.그때 임유진의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그녀가 천천히 눈을 뜨기 시작했다.임유진은 눈을 뜨자마자 가장 먼저 보이는 강지혁의 얼굴에 몽롱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혁아...”강지혁은 그 말에 마치 해서는 안 될 짓을 한 아이처럼 서둘러 손을 거두어들였다.“미안, 내가 깨웠지? 졸리면 더 자도 돼.”“안 잘래. 지금 자면 저녁에 잘 수 없을 테니까.”임유진은 눈을 비비적거리며 일어나기 위해 몸을 움직였다.강지혁은 얼른 그녀를 부축하려다가 뭔가 생각난 듯 뻗은 손을 다시 거두어들이더니 이모님더러 부축하라고 했다.“세수하고 나와. 그동안 식탁 세팅하고 있을 테니까.”“응.”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배가 커진 탓에 소파에서 일어서는 것도 시간이 한참이나 걸렸다.세수를 다 하고 식탁 쪽으로 걸어가자 강지혁이 아무 말 없이 조용히 앉은 채 고개를
임유진이 먼저 식사 제안을 해왔다는 건 그를 용서할 마음이 생겼다는 뜻이 틀림없었다.똑똑.그때 누군가가 조금은 조급하게 사무실 문을 두드렸다.“들어와.”허락이 떨어지자 고이준이 빠르게 안으로 들어와 보고했다.“대표님, 진세령이 탈옥했습니다!”그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순식간에 다시 어두워졌다. 그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어떻게 된 거야?”“경찰들 말로는 오늘 새벽 3시경에 탈옥했다고 합니다. CCTV는 누군가에 의해 지워졌고요. 그래서 현재 상황으로는 누가 진세령을 도와준 건지 파악하기 어렵습니다.”고이준의 말에 강지혁은 주먹을 꽉 말아쥐며 머릿속으로 사람들을 한번 훑어 내려갔다.진씨 가문일까? 아니면 소씨 가문?진세령은 연예인이었으니까 뒷배가 있는 사생팬이 그녀를 꺼내줬을 수도 있다.만약 그것도 아니면...“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인간들한테 사람을 붙여. 수상한 낌새가 포착되면 바로 나한테 보고하고. 그리고 최대한 빨리 김재호를 찾아내!”강지혁은 김재호가 꼭 시한폭탄 같았다. 그래서 그 시한폭탄이 엉뚱한 곳에서 터지기 전에 하루빨리 찾고 싶었다.김재호의 실종이 정말 강문철의 지시와 연관이 있는 건지, 만약 있다고 하면 그 지시내용이 정확히 무엇인지는 김재호를 찾아내야만 알 수 있다....드디어 설 전날이 되고 임유진은 드디어 강지혁과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강지혁은 머리를 깔끔하게 뒤로 넘기고 회색 스리피스 정장에 검은색 코트를 입었다. 조금 핼쑥해진 감이 없지 않아 있었지만 그것 나름대로 또 분위기 있고 멋있어 보였다.하지만 다 좋은데 두르고 있는 목도리와 장갑은 지금 그의 패션과 많이 동떨어져 있었다.임유진은 그가 하고 있는 목도리와 털장갑이 1년 전 자신이 그를 위해 뜬 것이라는 것을 한눈에 알아봤다.당시 그녀는 오래된 스웨터의 올을 다 풀고 그것으로 그의 목도리와 장갑을 만들었다.“왜? 왜 그렇게 빤히 봐?”강지혁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부드럽게 물었다.“아... 그냥 음.. 네가 그 목도리랑 장갑을
임유진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지영을 와락 끌어안았다.“미안해. 미안해 지영아. 울지 마...”“울긴 누가 운다고 그래?”한지영은 코를 한번 훌쩍이더니 이내 씩씩하게 말을 내뱉었다.“유진아, 나는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어. 과거의 고통에 얽매이지 않고 이제는 앞만 보며 나아갔으면 좋겠어. 진심이야.”임유진은 그녀의 웃음에 괜히 코끝이 찡해졌다.그 누구보다 마음이 아플 텐데도 한지영은 힘든 티 한번 내지 않고 오히려 그녀에게 위로를 건네주었다.“응, 행복해질게. 꼭 그럴게. 그리고 너도 하루빨리 나아서 원래의 한지영으로 돌아와. 아이들을 낳으면 맨날 너한테 봐달라고 부탁할 테니까.”임유진의 진심 반 장난 반이 담긴 말에 한지영은 미소를 지으며 임유진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였다.그러면서 속으로 이렇게 다짐했다.백연신은 이제 잊겠다고, 너무나도 사랑했던 사람이지만 이제는 보내주겠다고, 그와의 기억은 그저 아름다운 추억으로만 남겨주겠다고 말이다....날씨는 점점 차가워지고 이제 이틀 뒤면 설날을 맞이하게 된다.임유진은 부드럽게 복부를 쓸어내리며 벌써 강지혁을 못 본 지도 일주일이 넘어가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요 며칠 그녀는 줄곧 한지영과의 대화를 되뇌었다. 한지영은 그녀에게 과거의 고통에 얽매이지 말고 이제는 앞만 보며 살라고 했다.고통이라...만약 누군가가 강지혁을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그 답은 생각할 것도 없이 ‘그렇다’였다.강지혁을 사랑하지 않았으면 그 잔인한 진실이 눈앞에 놓였을 때 그렇게도 고통스럽지 않았을 것이고 또 이렇게까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지도 않았을 테니까.임유진은 강지혁을 사랑하고 있다. 그녀가 감옥에 가는 걸 차가운 눈길로 그저 지켜보기만 한 남자를 그녀는 아직도 깊이 사랑하고 있다.임유진은 그때 강지혁에게 이런 약속을 했다. 그녀는 절대 그의 어머니처럼 그의 아버지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하지만 지금은...임유진은 휴대폰을 뒤척이며 사진첩으로 들어갔다.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바로 그녀의 배
“대표님은 그저 사모님을 더 잘 보호하려고 하는 것일 뿐입니다.”고이준이 답했다.“보호요? 감시가 아니라?”임유진의 되물음에 고이준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강지혁은 일전 그에게 김재호의 일에 관해서는 임유진에게 아무것도 얘기하지 말라고 했었다. 곧 출산을 앞둔 사람이 괜한 걱정을 하는 건 싫다면서 말이다.임유진은 고이준의 침묵에 더 추궁하지 않고 고개를 숙여 볼록해진 자신의 복부를 바라보았다.병원에 도착한 후 임유진은 아까보다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에 도착해보니 상당히 컨디션이 좋아 보이는 한지영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치료에 잘 협조한 덕에 한지영은 이제 일상생활도 무리 없이 즐길 수 있게 되었고 퇴원하는 날도 이제는 멀지 않아졌다.“유진아, 왔어?”한지영은 손을 휘휘 저으며 임유진을 반갑게 맞이했다.“빨리 이쪽으로 와서 앉아. 너는 지금 세상에서 제일 조심해야 하는 임산부란 말이야!”임유진은 자리에 앉으며 미소를 지었다.“몸은 좀 어때? 선생님은 뭐라셔?”“다음 주면 퇴원할 수 있대.”한지영이 이를 활짝 드러내며 웃더니 허전한 머리를 쓱쓱 매만졌다.그녀는 수술 때문에 머리카락을 전부 다 잘라야만 했다. 그래서 지금은 마치 어린 남자아이처럼 머리가 다 잘려있었다.퇴원하고 나면 아마 가장 먼저 가발을 사야 할 것이다.“어제 유미 언니가 나 보러 왔어. 언니는 이미 퇴원했대.”“너랑 언니랑 두 사람 다 무사해서 정말 다행이야.”“언니는 착한 일을 한 보답을 받은 거고 나는 정말 운이 좋았지.”한지영은 새삼 자신이 살아난 것이 놀라웠다.“참, 그러고 보니 뉴스 봤어. 진애령을 죽인 게 진세령이었다면서? 내가 그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우리는 줄곧 허재명이 진범인 줄 알고 있었잖아. 진세령도 참 대단해? 어떻게 다른 사람도 아니고 강지혁까지 속였지?”“속이지 못했어.”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은 고개를 갸웃하며 되물었다.“응? 그게 무슨 말이야? 속이지 못했다니?”임유진은 주먹을 꽉 말아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