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눈이 마주친 임유진은 흠칫 몸을 떨었다. 강현수가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기 때문이다.그리고 그 순간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쓸쓸함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어릴 적 힘든 순간을 같이 했던 남자아이가 모르는 사람 보듯 해서 이러는 걸까? 하지만... 이 모든 건 그녀의 선택이다.며칠 전, 그녀는 어릴 적 강현수를 구한 사람이 자신이 맞다고 해도 강지혁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강지혁이 불안해하는 걸, 사랑하는 남자가 약해지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기억 속 너머의 진실이 어떠하든 그녀는 이미 외면하기로 했다.‘그래, 이게 맞아.’임유진은 쓰게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한편, 강현수 옆에 있던 배여진은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힐끗 보고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강현수를 쳐다봤다.임유진을 본 그가 또 어떤 이상한 행동을 할지 몰랐으니까. 전시회장에서처럼 또 임유진의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불상사라도 벌어지면 그녀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하게 될 것이다.그녀의 친척들과 이웃 주민들은 배여진이 강현수의 여자친구가 되리라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상태이니까.다행히 강현수는 싸늘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한번 바라본 후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았고 이에 배여진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강현수가 진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이대로 어릴 적 그를 구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계속 밀어붙여야만 한다!외할머니에게 절을 한 후 배여진은 임유진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유진아, 강지혁 씨는? 같이 안 왔어?”“오후에 온대.”대답을 마친 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자신의 사촌 언니를 빤히 바라봤다.배여진이 대체 뭐라고 했길래 강현수가 어릴 적 자신을 구한 사람이 배여진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었던 걸까? 그녀가 들려준 어린 시절 두 아이가 처했던 상황 때문에?임유진의 기억이 아직 돌아온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 자신이 정말 강현수와 있었던 일을 배여진에게 말해줬다고는 해도 그렇게 디테일한 부분까지 전부 다 얘기해 주지 않았
임유진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어릴 적 강현수 씨 구해준 거. 정말 언니 맞아?”그러자 배여진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그게 아니면 현수 씨가 내가 뭐라고 이렇게 잘해주겠어?”“하지만 내 기억 속 언니는 산을 타고 노는 걸 싫어했던 것 같은데. 언니보다는 내가 더 잘 갔지.”그 말에 배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너... 그 말 무슨 뜻이야? 내가 산속에 가서 노는 걸 좋아하든 아니든 그게 현수 씨를 구한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난 그날 우연히 산으로 간 것뿐이고 마침 현수 씨를 구하게 된 거야.”“마침? 우연히?”임유진은 정처 없이 흔들리는 배여진의 눈동자로 그녀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거의 확신했다. 떳떳하다면 이렇게 흔들릴 이유가 없을 테니까.강현수를 구한 건 배여진이 아니다.“야, 너 뭐 하자는 거야?”배여진은 당황함을 감추려 일부러 화를 냈다.“네가 뭔데 자꾸 나랑 현수 씨 일에 끼어들려고 그래? 넌 네 일이나 잘해!”그러고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임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양손을 바라봤다. 만약 꿈속에서 봤던 그 장면이 정말 어릴 적 강현수를 구했던 장면이라면, 절벽 아래 있던 강현수를 힘껏 위로 끌어올린 것도 다리가 풀린 강현수를 일으켜 업고 산 아래까지 내려온 것도 전부 자신의 두 손이 한 일인 게 된다.‘그럼 강현수가 몸에 지니고 다녔던 그 은팔찌도 내 건가...?’어릴 적 그녀에게는 한 쌍의 은팔찌 있었는데 한쪽은 어쩌다 잃어버렸고 남은 한쪽은 어른이 된 후 외할머니가 대신 보관해주었다.하지만... 외할머니의 유품 중 은팔찌 같은 건 없었다.물론 오래전 물건이고 값이 나가는 것도 아니라 외할머니가 실수로 버렸을 수도 있다.임유진은 외할머니댁을 나와 어릴 적 살던 이 집을 바라보며 앞으로 다시는 이곳으로 발을 들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강씨 저택 기사는 임유진이 나온 걸 보고 그녀에게 다음 목적지에 대해 물었다.“외할머니 보러 산소에 갈 거예요.”그때 마침 임유진의 눈에 배여진이
임유진은 외할머니와 단둘이 있고 싶어 먼저 산소로 출발했다.몇 분 후 차는 산 아래 멈춰 섰고 임유진은 같이 따라가려는 기사를 제지하며 그의 동행을 거절했다.“기사님, 저 혼자 가도 돼요. 할머니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요.”그러자 기사는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꼭 임유진 씨 곁을 지키라는 명을 받아서...”“그건 제가 혁이한테 잘 말해드릴게요. 그리고 여기는 마을 사람들만 있는 곳이라 위험한 것도 없어요.”임유진은 옅게 웃은 후 물건을 챙겨 들고 위로 올라갔다.운전기사는 어쩔 수 없이 차에 돌아가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임유진이 막 외할머니 산소에 도착했을 때 강지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나 회의 다 끝났어. 지금 갈게.”“서두르지 않아도 돼. 내가 아직 할 일이 조금 있어서 그러니까 천천히 와.”임유진이 물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 뭐 하고 있어?”강지혁이 물었다.“나 지금 할머니 산소에 왔어. 할머니 댁은 사람이 많아서 나 혼자 먼저 온 거야. 너 먼저 도착하게 되면 나 조금 기다려 줄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기사님한테 도와달라고 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엄밀히 따지면 임유진은 강지혁보다 몇 개월이나 먼저 태어났고 처음 만났을 때도 강지혁을 돌봐준 건 그녀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가 그녀를 아기 취급하듯 대하고 있다.임유진은 피식 웃고는 천천히 외할머니 무덤 앞으로 다가갔다. 대리석으로 된 묘비 위에는 외할머니의 흑백사진도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해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생전 외할머니가 좋아했던 음식들과 소주를 꺼내 올려두었다.어머니도 가고 남동생도 가고 이제는 외할머니마저 가버렸다. 그녀를 사랑 가족들은 전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하지만 다행인 건 강지혁이 그녀의 곁에 남아있다. 그리고 아마 곧 그녀의 가족이 될 것이며 평생을 함께하고 자식을 낳은 후 도란도란 예쁜 가정을 꾸리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고개를 숙
“차 대기 시켜.”강지혁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자신의 상사 얼굴을 힐끔 보고는 순간 털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지금 이 상태의 강지혁을 건드렸다가는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물론 이 모든 게 임유진이라는 여자 때문인 걸 그는 잘 알고 있다.강지혁이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마 강지혁 자신도 모를 것이다.다만 고이준은 강지혁이 왜 이토록 강현수를 신경 쓰는 것까지는 몰랐다.그의 눈에 비친 강지혁은 마치 임유진과 강현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봐 겁을 내는 것 같이 보였다.하지만 이내 자조하듯 웃었다. 천하의 강지혁이 두려워하는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외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강지혁과 그녀 사이의 일들, 사건을 뒤집은 일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다짐 등을 주저리 늘어놓았다.오늘은 명절이 아니었기에 성묘하는 사람들도 없었고 이 넓은 곳에는 오로지 임유진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외할머니가 천국에서 자신의 얘기를 듣고 조금은 안심하기를 바랐다.그러다 문득 지금쯤 강지혁이 이곳으로 향할 거로 생각해 음식들과 소주병을 정리한 뒤 아래로 내려갔다.그렇게 절반쯤 내려왔을 때 오를 때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작은 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이 길이 그녀가 자주 뛰어놀던 산과 이어진 길이라는 걸 기억해냈다.어릴 적 산에서 뛰어놀다가 샛길로 빠져 우연히 이곳으로 왔다가 무덤만 가득한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었으니까.그날 외할머니는 따뜻한 차를 우려주고는 혹시 악몽이라도 꿀까 봐 며칠이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잤었다.임유진은 눈앞에 놓인 길을 두고 시간을 확인한 후 강지혁이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 길을 따라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오랜만에 다시 찾은 놀이터를 한번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꿈속에서 봤던 그 장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던 걸까?또 혹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모든 걸 포기하려는 걸지
꿈속 남자아이는 이 낭떠러지에서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고 여자아이는 본능적으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은 후 그대로 같이 미끄러졌다. 그러다 끝까지 남자아이의 손을 놓지 않았던 여자아이 덕에 두 사람은 무사히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이 절벽은 성인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가팔라 보였고 떨어지면 죽음을 둘째치고 운이 좋아도 병원 신세는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그녀는 그렇게 몇 초 정도 바라보다 서서히 뒷걸음질하며 물러섰다.그때의 강현수는 사람을 착각하지 않았다. 다만 임유진이 그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뿐이다.하지만 임유진이 이제 막 그를 기억하게 된 지금, 강현수는 이미 그녀를 다른 여자로 착각하고 있다.그리고 이 진실은 앞으로 영원히 비밀에 묻혀 그녀만 알고 있게 될 것이다.그때, 뒤편에서 누군가가 나뭇가지를 밟은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강현수가 있었다.검은색 정장 차림의 그는 손에 호떡을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차갑기 그지없는 남자의 얼굴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마찬가지로 깜짝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당신이 여기 왜 있어요?”이건 그녀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임유진은 강현수의 뒤를 본 후 배여진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언니도 없이 지금 혼자서 이곳으로 온 거야?’“왜 여기 있는 거냐고 물었습니다.”강현수는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간 후 물었다.“할머니 보러 왔다가 내려오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임유진의 대답에 강현수가 다시 한번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니까 왜 ‘이곳’으로 왔냐고요!”이곳은 강현수에게 의미가 있는 곳이라 그는 임유진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날 병원 비상계단에서 물었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모든 건 그의 착각일 뿐이라고 대답했다.그날 그는 모든 게 끝나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녀에 대한 미련도 이제 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는데, 그래서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무시할 수 있었
지금에 와서 보니 이곳은 어린 시절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기억은 마치 각인처럼 그의 머릿속에 새겨져 계속 떠올랐다.강현수의 얼굴에는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임유진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 났다.어릴 적 두 사람은 이곳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고 마치 전우라도 된 것처럼 서로에게 의지했다.하지만 십몇 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마치 넘을 수 없는 벽들이 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강현수의 쓸쓸한 목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깨고 흘러나왔다.임유진이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자 강현수는 그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얘기를 이어갔다.“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그 대상이 마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난다는 뜻이에요.”강현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그 미소는 따뜻한 햇볕에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11살 때부터였어요, 누군가를 그리워한 게. 그리고 그때부터 계속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찾지 못했죠. 그때 내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겠어요?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텐데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거예요.”임유진은 그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다.“그리고 아마 이 마음이 절망으로 바뀔 때쯤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녀와 비슷한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고 보이는 대로 곁에 뒀어요. 아주 조금이라도 닮은 부분만 있으면 그걸로 괜찮았어요. 그러면 적어도 이 마음이 그렇게까지 절망으로 변하지는 않을 테니까요.”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이제까지 여자친구를 바꾸고 또 바꾼 게 그것 때문이었단 말인가?강현수가 여자친구를 계속 바꾸는, 어찌 보면 정 많은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무정하고 냉정한 인간이라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그녀의 대체품을 찾아 헤맸던 건 그저 마음속 절망을 조금이나마 지우기 위해서라니... 그의 고통을
이것으로 강현수도 찾아 헤매던 소녀가 임유진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인지했을 것이다.다만... 그녀는 마음 한구석은 바늘에 찔리듯 계속 따끔거렸다. 하지만 이내 어릴 적 처음 친구라고 불릴 만한 남자아이와 이대로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조금 쓸쓸할 뿐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이 마을에서 몇 년을 살았어도 그녀는 근처 아이들과는 어색하고 친밀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꿈속의 여자아이는 마치 처음 봤을 때부터 남자아이에게 친밀감을 느끼듯 행동했으니까.“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게요.”임유진이 한발 물러서 막 몸을 돌리려는데 발밑 나뭇가지 때문에 발을 삐끗해 몸이 뒤로 넘어가 버렸다.“아악!”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의 몸이 절벽 쪽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임유진이 다급하게 뭔가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리던 그때, 누군가의 손이 그녀를 잡았다!덕분에 그녀의 몸은 절벽에 찰싹 달라붙었고 만약 그 손이 없었으면 이대로 굴러떨어졌을 수도 있었다.강현수는 절벽 위에 납작 엎드린 채 그녀의 손목을 꽉 잡으며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저쪽 손도 내게 줘! 내가 위로 끌어올려 줄테니까!”강현수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동자는 당황한 듯 세차게 흔들렸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마치 서로가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떨어진 건 그녀이니 당황하는 것도 그녀 몫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강현수는 그녀보다 더 당황하고 심지어는 두려워 보이기까지 했다.“빨리, 빨리 손을 줘, 임유진!”그는 안간힘을 쓰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 말에 임유진도 강현수의 손을 잡으려고 한쪽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그렇게 두 손이 서서히 가까워지려는데 머릿속에서 또다시 잊고 있었던 장면들이 떠오르며 머리가 아파 나기 시작했다.제발... 왜 하필 지금이야!임유진은 마음속으로 외치며 지금 상황에 두통이 오는 자신을 원망했다.이대로 정신이라도 놨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는 점점 더 아고 그 여파로 강현
“나 무겁지?”남자아이가 조금 미안한 듯 물었다.“응, 무거워.”여자아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힘들었으니까.“미안해... 하지만 만약 이후 네가 다치게 되면 그때는 내가 꼭 너를 업어줄게!”남자아이는 행여나 여자아이가 자신을 약골이라고 여겨 싫어할까 봐 다급하게 말했다.“네가 날 어떻게 업어? 얼마 못 가 내려놓고 말 거야, 넌.”여자아이는 상대가 자신보다 큰 남자아이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모두 자신이 지켜줬기에 전혀 기대하지 않는 말투로 얘기했다.“아니야. 평생 업을 수 있어!”남자아이가 발끈하듯 대답했다.아마 이때 당시 두 아이는 평생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갈기갈기 찢긴 화면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고 이내 선명한 기억이 되었다.임유진은 지금 머리가 무거웠고 눈은 뜨고 싶어도 떠지지 않았다. 그리고 몸은 아까부터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누가 그녀를 업고 걸어가는 것처럼 말이다.누구지? 누가 그녀를 업고 있는 걸까?“현수야...”그때 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강현수의 이름이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에 그녀를 업고 내려가던 강현수가 몸을 움찔거리더니 곧 발걸음을 멈췄다.방금 그녀는 확실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다시는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왜 또 부르는 거지?!임유진 이 여자는 항상 멋대로 선을 그으며 또 멋대로 이상한 행동을 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임유진 씨, 만약 지금 정신을 차렸다면 잘 들으세요. 다른 건 다 괜찮은 데 ‘현수야’라는 호칭은 부르지 마세요. 임유진 씨가 막 불러도 되는 호칭 아니니까.”강현수는 차갑게 말을 뱉은 후 다시 산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임유진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을 느꼈지만 그게 누군지, 또 누가 지금 자신을 업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그렇게 몇 분 후 안간힘을 써서 서서히 눈을 떠보니 눈앞에 있는 건 어떤 남자의 넓은 등과 매력적인 목덜미뿐이었다.강현수!임유진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눈에 띄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