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에 와서 보니 이곳은 어린 시절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기억은 마치 각인처럼 그의 머릿속에 새겨져 계속 떠올랐다.강현수의 얼굴에는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임유진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 났다.어릴 적 두 사람은 이곳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고 마치 전우라도 된 것처럼 서로에게 의지했다.하지만 십몇 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마치 넘을 수 없는 벽들이 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강현수의 쓸쓸한 목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깨고 흘러나왔다.임유진이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자 강현수는 그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얘기를 이어갔다.“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그 대상이 마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난다는 뜻이에요.”강현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그 미소는 따뜻한 햇볕에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11살 때부터였어요, 누군가를 그리워한 게. 그리고 그때부터 계속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찾지 못했죠. 그때 내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겠어요?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텐데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거예요.”임유진은 그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다.“그리고 아마 이 마음이 절망으로 바뀔 때쯤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녀와 비슷한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고 보이는 대로 곁에 뒀어요. 아주 조금이라도 닮은 부분만 있으면 그걸로 괜찮았어요. 그러면 적어도 이 마음이 그렇게까지 절망으로 변하지는 않을 테니까요.”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이제까지 여자친구를 바꾸고 또 바꾼 게 그것 때문이었단 말인가?강현수가 여자친구를 계속 바꾸는, 어찌 보면 정 많은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무정하고 냉정한 인간이라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그녀의 대체품을 찾아 헤맸던 건 그저 마음속 절망을 조금이나마 지우기 위해서라니... 그의 고통을
이것으로 강현수도 찾아 헤매던 소녀가 임유진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인지했을 것이다.다만... 그녀는 마음 한구석은 바늘에 찔리듯 계속 따끔거렸다. 하지만 이내 어릴 적 처음 친구라고 불릴 만한 남자아이와 이대로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조금 쓸쓸할 뿐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이 마을에서 몇 년을 살았어도 그녀는 근처 아이들과는 어색하고 친밀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꿈속의 여자아이는 마치 처음 봤을 때부터 남자아이에게 친밀감을 느끼듯 행동했으니까.“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게요.”임유진이 한발 물러서 막 몸을 돌리려는데 발밑 나뭇가지 때문에 발을 삐끗해 몸이 뒤로 넘어가 버렸다.“아악!”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의 몸이 절벽 쪽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임유진이 다급하게 뭔가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리던 그때, 누군가의 손이 그녀를 잡았다!덕분에 그녀의 몸은 절벽에 찰싹 달라붙었고 만약 그 손이 없었으면 이대로 굴러떨어졌을 수도 있었다.강현수는 절벽 위에 납작 엎드린 채 그녀의 손목을 꽉 잡으며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저쪽 손도 내게 줘! 내가 위로 끌어올려 줄테니까!”강현수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동자는 당황한 듯 세차게 흔들렸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마치 서로가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떨어진 건 그녀이니 당황하는 것도 그녀 몫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강현수는 그녀보다 더 당황하고 심지어는 두려워 보이기까지 했다.“빨리, 빨리 손을 줘, 임유진!”그는 안간힘을 쓰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 말에 임유진도 강현수의 손을 잡으려고 한쪽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그렇게 두 손이 서서히 가까워지려는데 머릿속에서 또다시 잊고 있었던 장면들이 떠오르며 머리가 아파 나기 시작했다.제발... 왜 하필 지금이야!임유진은 마음속으로 외치며 지금 상황에 두통이 오는 자신을 원망했다.이대로 정신이라도 놨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는 점점 더 아고 그 여파로 강현
“나 무겁지?”남자아이가 조금 미안한 듯 물었다.“응, 무거워.”여자아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힘들었으니까.“미안해... 하지만 만약 이후 네가 다치게 되면 그때는 내가 꼭 너를 업어줄게!”남자아이는 행여나 여자아이가 자신을 약골이라고 여겨 싫어할까 봐 다급하게 말했다.“네가 날 어떻게 업어? 얼마 못 가 내려놓고 말 거야, 넌.”여자아이는 상대가 자신보다 큰 남자아이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모두 자신이 지켜줬기에 전혀 기대하지 않는 말투로 얘기했다.“아니야. 평생 업을 수 있어!”남자아이가 발끈하듯 대답했다.아마 이때 당시 두 아이는 평생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갈기갈기 찢긴 화면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고 이내 선명한 기억이 되었다.임유진은 지금 머리가 무거웠고 눈은 뜨고 싶어도 떠지지 않았다. 그리고 몸은 아까부터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누가 그녀를 업고 걸어가는 것처럼 말이다.누구지? 누가 그녀를 업고 있는 걸까?“현수야...”그때 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강현수의 이름이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에 그녀를 업고 내려가던 강현수가 몸을 움찔거리더니 곧 발걸음을 멈췄다.방금 그녀는 확실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다시는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왜 또 부르는 거지?!임유진 이 여자는 항상 멋대로 선을 그으며 또 멋대로 이상한 행동을 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임유진 씨, 만약 지금 정신을 차렸다면 잘 들으세요. 다른 건 다 괜찮은 데 ‘현수야’라는 호칭은 부르지 마세요. 임유진 씨가 막 불러도 되는 호칭 아니니까.”강현수는 차갑게 말을 뱉은 후 다시 산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임유진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을 느꼈지만 그게 누군지, 또 누가 지금 자신을 업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그렇게 몇 분 후 안간힘을 써서 서서히 눈을 떠보니 눈앞에 있는 건 어떤 남자의 넓은 등과 매력적인 목덜미뿐이었다.강현수!임유진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눈에 띄게
그는 언제나 그녀를 찾아다녔는데 그녀는 그를 까맣게 잊어버렸다.임유진은 자신을 업고 묵묵히 산길을 내려가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왔다.그는 지금 자신이 했던 약속처럼 그녀가 다쳤을 때 업어주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평생이라는 건 없을 것이다...임유진이 좋아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은 그가 아니니까.“현수 씨, 나 앞으로 이곳에 안 올 거예요. 그리고 어릴 때 일은 그저 어릴 때 일일 뿐이니까 현수 씨도 너무 과거에 집착 안 했으면 좋겠어요.”임유진은 그가 계속 어린 시절에 갇혀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배여진에게 더는 속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지금은 이런 말밖에 해줄 수 없다.그러자 강현수는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임유진 씨가 뭔데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합니까?”임유진은 그의 태도에 입술을 깨물었다.“여진이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와중에 여진이가 갑자기 나를 구해줬다고 하니까 기분이 나빠요?”그는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나는 그저 현수 씨가 언니한테 속지 않았으면 해서 말한 것뿐이에요.”“속아요? 당신 사촌 언니가 날 속일 정도로 똑똑하기나 하고?”강현수의 말투에는 절대 속아 넘어갈 일 없다는 아주 본능적인 자신감이 묻어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배여진은 고졸에 바로 전업주부로 전향하고 세상 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그저 시골 여자일 뿐이고 강현수는 그런 그녀의 일생을 전부 뒷조사로 알 수 있을 만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니 어떻게 감히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임유진은 단호한 그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뭐라고 하든 그는 듣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건 그녀나 다름없고 따지고 보면 그녀 역시 그를 속이고 있지 않은가.“이만 내려줘요. 나 혼자 걸어갈 수 있어요.”임유진의 말에 강현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그 몸으로 하산했다가는 날이 어두워질 때야 겨우 도착하게 될
임유진을 만나게 된 것도 놀라운데 더 놀랄 만할 일까지 생겨버렸다.그녀의 몸이 절벽 아래로 떨어지는 순간 강현수는 머리가 새하얗게 되어버려 본능적으로 그녀의 손을 잡았다. 자신도 같이 떨어질 수 있다는 건 아예 머릿속에 없는 듯싶었다.그리고 그녀가 한쪽 손을 뻗다가 재발한 두통으로 다시 손을 거두어들였을 때 그는 두려웠다.그녀의 손을 잡지 못할까 봐, 이대로 그녀가 절벽 아래로 떨어지게 될까 봐, 그는 미치도록 두려웠다!강현수가 이런 두려움을 느낀 건 정말 오랜만일 것이다.그의 손에 의지한 채 절벽에서 기절한 그녀를 끌어올렸을 때 그의 등은 이미 식은땀으로 가득했고 그의 손은 정처 없이 떨렸다.그리고 이성을 되찾을 때 그는 이미 그녀를 자신의 품에 꽉 끌어안고 있었다. 마치 그녀가 잃으면 안 되는 중요한 보물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다.왜... 왜 아직도 이럴까? 임유진이 찾고 있는 소녀가 아닌 걸 이미 몇 차례나 확인을 받았으면서 대체 왜 아직도 그녀만 생각하면 이렇게 되어버리는 걸까?!강현수는 고개를 숙인 후 기절한 그녀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깨달았다.이건 좋아하는 감정이다.강현수는 임유진을 좋아하고 있다.아마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부터 좋아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한 번도 자신의 마음을 제대로 들여다보지 않았고 여자 하나 때문에 강지혁과 마찰을 빚고 싶지 않아 결국 그녀의 손을 놔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강지혁의 여자가 되었고 그도 이제는 더 그녀를 마음에 품으면 안 된다.모든 걸 여기서 끝내야 한다.“임유진, 널 목숨 걸고 구해준 건 이번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야. 앞으로 난 너를 내 마음에서 지워버릴 거야.”강현수는 마치 임유진이 아니라 자신에게 다짐하듯 낮은 목소리로 읊조렸다.임유진은 지금도, 앞으로도 강지혁의 여자일 것이고 강현수는 다른 남자를 사랑하는 여자를 좋아하는 걸 용납할 수 없는 사람이기에 이대로 마음을 접어야 한다.그는 기절한 그녀를 등에 업고 천천히 아래로 내려갔다. 어릴 적 여자아이가 자신을 그렇게 업어줬듯이.
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강지혁은 지금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주변 CCTV는?”강지혁이 물었다.“곧 연락이 올 겁니다.”고이준이 얼른 대답했다.다행히 근처 도로에 CCTV가 있어 만약 임유진이 이 구역을 벗어났다면 분명히 찍혔을 것이다.하지만 몇 분 후 CCTV 관리자에게서 온 내용에 따르면 이곳을 지나간 차량은 오직 13대로 행인은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이곳은 한적한 지역으로 원래 차량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곳이고 13대 차량 주를 다 검색해 봤지만, 전부 다 전과기록 같은 것도 없는 평범한 마을 주민으로 임유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뿐이었다.그러면 임유진은 높은 확률로 아직 산속에 있는 것이 되는데 눈앞에 산은 여러 산이 붙어있어 막상 찾으려 한다면 다량의 인원과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고이준은 CCTV 관리자가 보내온 영상을 강지혁에게 보내준 후 그의 지시를 기다렸고 얼마 안 가 강지혁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지금 당장 산을 봉쇄하고 임유진 찾아내!”고이준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하지만 대표님, 너무 일을 크게 만드시는 건 아닐까요?”임유진이 사라진 건 고작 2시간 남짓이고 말마따나 정말 산속에서 길을 잃은 것뿐이라면?고이준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지금 당장 경찰에게 연락해 임유진 씨의 행방을 찾게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산을 봉쇄하는 건...”“봉쇄해!”강지혁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듯 그의 말을 끊었다.일을 크게 만들어도 좋다. 과한 조치라고 생각해도 좋다. 지금의 그는 그저 한시라도 빨리 임유진을 찾아내기만 하면 그걸로 된다!고이준은 단호한 그의 지시에 곧바로 이곳 경찰서에 연락했고 얼마 안 가 경찰차들이 줄을 지어 산 아래에 몰려들었다.“대표님은 이곳에서 상황 보고를 전해 들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고이준도 찾을 준비를 마치고 그에게 말했다.“나도 가!”하지만 강지혁은 이대로 다른 사람이 그녀를 찾아낼 때까지 기다릴
강지혁은 보고서로만 이곳을 알게 됐을 뿐 이렇게 직접 오게 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수색대와 함께 산속을 걸어가 보니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예전 강현수의 화실에서 봤던 그림들이 떠올랐다.그림 속 여자아이는 가녀린 몸으로 이곳에서 남자아이를 업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무거운 듯 허리를 잔뜩 숙인 채 힘겨워 보였지만 그럼에도 남자아이를 버리지 않았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그 그림을 봤을 당시 강지혁은 아무런 감흥도 없었지만 지금 막상 그 두 아이에게 강현수와 임유진을 대입해 보니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불안했다.대체 그는 뭘 불안해하고 있는 걸까?두 사람이 마주치지 못하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뒤에서 방해해서? 아니면 임유진이 지금은 기억을 잃어도 항상 마음속에는 강현수가 있어 언젠가 기억이 돌아오는 날에 자신을 매몰차게 버릴까 봐?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향한 임유진의 사랑이 깊지 않아서 언젠가 자신을 배신할까 봐?“대표님,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저희 조금 쉴까요?”고이준은 아까부터 어두워지다 못해 이제는 하얗게 질려버린 듯한 강지혁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하지만 강지혁은 고개를 저었다.“필요 없어.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찾기나 해!”시간을 지체하면 할수록 그의 불안과 걱정은 더욱더 커질 것이다.그리고 지금은 여름인 터라 나무들이 우거져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들어오는 햇빛을 가로막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여기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사람 발걸음 소리 같은데요?!”그때 제일 앞에 있던 수색대원 한 명이 외쳤고 그에 모든 사람의 발걸음이 멈췄다.그러자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한 발짝 한 발짝씩 그들을 향해 다가왔고 이윽고 실루엣까지 보이더니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거기에는 어떤 남자가 여자를 업은 채 걸어오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강지혁은 몸에 있던 피가 전부 멈춘 듯 자리에 굳어버렸다.남녀는 바로 강현수와 임유진이었다!강지혁이 제일 두려워했던 일이 결국에는 벌어지고 만 걸까? 두 사람은
상황을 보니 그녀를 구하기 위해 산까지 오른 게 분명했다.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그녀가 걱정돼 찾아왔을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에게 달려가려고 몸을 움직이다가 문득 아직 강현수의 등에 업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말했다.“이제 나 내려줘요.”“강지혁 옆으로 갈 거예요?”강현수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네.”임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임유진 씨, 내가 지금 이대로 당신을 놓아주면 앞으로 당신이 어떤 곤란한 상황이든 난 가만히 있을 겁니다. 나한테 임유진 씨는 이제부터 모르는 사람이에요. 혹시라도 ‘현수야’라는 호칭은 앞으로 절대 내 앞에서 부르지 말아요. 이건 당신이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니까.”강현수는 마치 경고인 듯 작별 인사인 듯 그녀에게 얘기했다. 그에 임유진은 코가 시큰거리고 가슴이 뭔가에 눌린 듯 답답하고 조금 서글퍼 났다.모든 걸 기억하고도 그를 속여서 이런 걸까? 아니면 한때 힘든 순간을 함께 했던 친구와 앞으로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리는 거에 서운함이라도 느껴서 이런 걸까?“알겠어요.”임유진은 감정을 추스르고 담담하게 대답했다.방금 두 사람이 했던 대화는 오직 그들밖에 듣지 못했다.강현수는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를 땅에 내려놨고 이 모습에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강지혁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고이준이었다.‘내가 아는 그 강현수가 여자를 등에 업었다고?!’만약 연예부 기자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분명 고이준과 마찬가지로 사진을 찍기도 전에 벌써 넋이 나갔을 것이다.그러다 문득 고이준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강지혁을 힐끔 쳐다봤다. 강지혁은 꽤 평온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바라만 봤지만, 고이준은 오히려 그 모습에서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마치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 바다의 고요함 같았다.한편 임유진은 천천히 강현수의 등에서 내려와 강지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강현수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고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당신이 아니라 다행이야.”그는 문득 알 수 없