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에게 무슨 일이 있어서는 안 된다! 그것만은 절대 안 된다!강지혁은 지금 어떻게 해서든 그녀를 찾아야만 했다.“주변 CCTV는?”강지혁이 물었다.“곧 연락이 올 겁니다.”고이준이 얼른 대답했다.다행히 근처 도로에 CCTV가 있어 만약 임유진이 이 구역을 벗어났다면 분명히 찍혔을 것이다.하지만 몇 분 후 CCTV 관리자에게서 온 내용에 따르면 이곳을 지나간 차량은 오직 13대로 행인은 몇 명밖에 보이지 않았다고 한다.이곳은 한적한 지역으로 원래 차량이 자주 드나들지 않는 곳이고 13대 차량 주를 다 검색해 봤지만, 전부 다 전과기록 같은 것도 없는 평범한 마을 주민으로 임유진과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사람들뿐이었다.그러면 임유진은 높은 확률로 아직 산속에 있는 것이 되는데 눈앞에 산은 여러 산이 붙어있어 막상 찾으려 한다면 다량의 인원과 시간이 필요해 보였다.고이준은 CCTV 관리자가 보내온 영상을 강지혁에게 보내준 후 그의 지시를 기다렸고 얼마 안 가 강지혁의 입에서 차가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지금 당장 산을 봉쇄하고 임유진 찾아내!”고이준은 조금 놀란 눈치였다.“하지만 대표님, 너무 일을 크게 만드시는 건 아닐까요?”임유진이 사라진 건 고작 2시간 남짓이고 말마따나 정말 산속에서 길을 잃은 것뿐이라면?고이준이 다급하게 말을 이었다.“지금 당장 경찰에게 연락해 임유진 씨의 행방을 찾게 하겠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산을 봉쇄하는 건...”“봉쇄해!”강지혁은 타협의 여지가 없다는 듯 그의 말을 끊었다.일을 크게 만들어도 좋다. 과한 조치라고 생각해도 좋다. 지금의 그는 그저 한시라도 빨리 임유진을 찾아내기만 하면 그걸로 된다!고이준은 단호한 그의 지시에 곧바로 이곳 경찰서에 연락했고 얼마 안 가 경찰차들이 줄을 지어 산 아래에 몰려들었다.“대표님은 이곳에서 상황 보고를 전해 들으시면 될 것 같습니다.”고이준도 찾을 준비를 마치고 그에게 말했다.“나도 가!”하지만 강지혁은 이대로 다른 사람이 그녀를 찾아낼 때까지 기다릴
강지혁은 보고서로만 이곳을 알게 됐을 뿐 이렇게 직접 오게 된 건 지금이 처음이었다.수색대와 함께 산속을 걸어가 보니 자기도 모르게 머릿속에서 예전 강현수의 화실에서 봤던 그림들이 떠올랐다.그림 속 여자아이는 가녀린 몸으로 이곳에서 남자아이를 업은 채 걸어가고 있었다.무거운 듯 허리를 잔뜩 숙인 채 힘겨워 보였지만 그럼에도 남자아이를 버리지 않았고 묵묵히 앞으로 나아갔다.그 그림을 봤을 당시 강지혁은 아무런 감흥도 없었지만 지금 막상 그 두 아이에게 강현수와 임유진을 대입해 보니 가슴이 꽉 막힌 듯 답답하고 불안했다.대체 그는 뭘 불안해하고 있는 걸까?두 사람이 마주치지 못하게, 서로를 알아보지 못하게 뒤에서 방해해서? 아니면 임유진이 지금은 기억을 잃어도 항상 마음속에는 강현수가 있어 언젠가 기억이 돌아오는 날에 자신을 매몰차게 버릴까 봐? 그것도 아니면 자신을 향한 임유진의 사랑이 깊지 않아서 언젠가 자신을 배신할까 봐?“대표님, 안색이 안 좋아 보이는데 저희 조금 쉴까요?”고이준은 아까부터 어두워지다 못해 이제는 하얗게 질려버린 듯한 강지혁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럽게 물었다.하지만 강지혁은 고개를 저었다.“필요 없어. 날이 더 어두워지기 전에 빨리 찾기나 해!”시간을 지체하면 할수록 그의 불안과 걱정은 더욱더 커질 것이다.그리고 지금은 여름인 터라 나무들이 우거져 산속으로 들어갈수록 들어오는 햇빛을 가로막아 앞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여기서 무슨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아요! 사람 발걸음 소리 같은데요?!”그때 제일 앞에 있던 수색대원 한 명이 외쳤고 그에 모든 사람의 발걸음이 멈췄다.그러자 무거운 발걸음 소리가 한 발짝 한 발짝씩 그들을 향해 다가왔고 이윽고 실루엣까지 보이더니 천천히 모습을 드러냈다.거기에는 어떤 남자가 여자를 업은 채 걸어오고 있었고 그 모습을 본 강지혁은 몸에 있던 피가 전부 멈춘 듯 자리에 굳어버렸다.남녀는 바로 강현수와 임유진이었다!강지혁이 제일 두려워했던 일이 결국에는 벌어지고 만 걸까? 두 사람은
상황을 보니 그녀를 구하기 위해 산까지 오른 게 분명했다. 시간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그녀가 걱정돼 찾아왔을 것이다.임유진은 강지혁에게 달려가려고 몸을 움직이다가 문득 아직 강현수의 등에 업혀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그에게 말했다.“이제 나 내려줘요.”“강지혁 옆으로 갈 거예요?”강현수의 싸늘한 음성이 들려왔다.“네.”임유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임유진 씨, 내가 지금 이대로 당신을 놓아주면 앞으로 당신이 어떤 곤란한 상황이든 난 가만히 있을 겁니다. 나한테 임유진 씨는 이제부터 모르는 사람이에요. 혹시라도 ‘현수야’라는 호칭은 앞으로 절대 내 앞에서 부르지 말아요. 이건 당신이 부를 수 있는 게 아니니까.”강현수는 마치 경고인 듯 작별 인사인 듯 그녀에게 얘기했다. 그에 임유진은 코가 시큰거리고 가슴이 뭔가에 눌린 듯 답답하고 조금 서글퍼 났다.모든 걸 기억하고도 그를 속여서 이런 걸까? 아니면 한때 힘든 순간을 함께 했던 친구와 앞으로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리는 거에 서운함이라도 느껴서 이런 걸까?“알겠어요.”임유진은 감정을 추스르고 담담하게 대답했다.방금 두 사람이 했던 대화는 오직 그들밖에 듣지 못했다.강현수는 천천히 몸을 숙여 그녀를 땅에 내려놨고 이 모습에 가장 크게 놀란 사람은 강지혁이 아니라 그 옆에 있는 고이준이었다.‘내가 아는 그 강현수가 여자를 등에 업었다고?!’만약 연예부 기자가 이 자리에 있었으면 분명 고이준과 마찬가지로 사진을 찍기도 전에 벌써 넋이 나갔을 것이다.그러다 문득 고이준은 자신의 옆에 서 있는 강지혁을 힐끔 쳐다봤다. 강지혁은 꽤 평온한 모습으로 두 사람을 바라만 봤지만, 고이준은 오히려 그 모습에서 더 큰 두려움을 느꼈다.마치 거센 폭풍우가 몰아치기 전 바다의 고요함 같았다.한편 임유진은 천천히 강현수의 등에서 내려와 강지혁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때 강현수가 갑자기 그녀의 손목을 잡았고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봤다.“당신이 아니라 다행이야.”그는 문득 알 수 없
그래서 아니라서 다행이야... 다행이야...다시 가슴이 아팠다. 강현수는 입술을 굳게 다물었다. 앞으로 그는 자신의 마음속에서 이 여자를 아무런 흔적도 남기지 않고 완전히 지워버릴 것이다.강지혁의 앞으로 다가간 임유진은 그가 평소와 다르게 조용한 것을 느꼈다. 그의 아름다운 도화안은 마치 까맣고 깊은 바다처럼 쓸쓸한 기운을 풍기고 있었다. 그는... 화가 난 것일까? 방금 그녀가 강현수와 함께 있는 것을 본 걸까? 아니면 그녀가 산에서 너무 오래 머물러서 그를 걱정하게 만든 걸까? 하지만 여기는 사람이 많아 해명하기 어려워서 나중에 둘이서만 있을 때 제대로 설명하기로 했다. “걱정시켜서 미안해!”임유진이 말했다. “전화해서 말해주려고 했는데... 실수로 휴대폰을 떨어뜨려 고장 나서 연락할 수가 없었어.” 게다가 그녀의 휴대폰뿐만 아니라 강현수의 휴대폰도 그녀를 구하다가 화면이 깨졌기에 연락할 수 없게 되었다. 두 사람의 휴대폰이 모두 전화를 할 수 없게 되어 그때 외부와 연락할 수 없었다. “그래?” 강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손을 들어 그녀의 볼 옆에 있는 약간 헝클어진 머리카락을 귀 뒤로 넘겨주며 부드럽게 말했다. “시간이 늦었어, 일단 돌아가자.”그는 말하면서 임유진의 긴 검은색 원피스에 흙이 묻어서 지저분해 보이는 것을 발견하고는 갑자기 허리를 굽혀 그녀를 안아 들고 산 아래로 걸어갔다. “혁아, 나... 나 혼자 걸을 수 있어, 안아 줄 필요 없어.”임유진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무래도 이렇게 안고 내려가면 그가 아주 힘들 테니까 말이다.강지혁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는데 두 눈동자는 평소처럼 다정하지 않았고 어두운 기운은 마치 까마득한 밤 풍경 같았다.“그 말은 강현수는 너를 업고 갈 수 있는데 나는 너를 안고 산에서 내려가면 안 된다는 거야?”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이런 말을 하자 임유진은 순간 말문이 막혀 어떻게 대답할지 몰랐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얼굴에서 시선을 옮기고 그녀를 안은 채 계속해서 산에서 내려갔다. 임유진을
“미안해?”강지혁은 화가 나서 비아냥거리듯 웃으며 말했다. 임유진이 미안해야 할 일은 걱정을 끼친 것뿐만이 아니다.임유진은 알기나 할까, 강현수가 그녀를 업고 나타났을 때 강지혁이 얼마나 당황했는지. 그때 강지혁은 두 발로 서 있기조차 힘든 느낌이 들었다. 그녀가 강현수와 속삭이는 동안에 그의 기분이 어땠는지 임유진은 알까?강현수가 임유진을 내려놓고 그녀가 강현수에게 고마움을 표시하며 웃었을 때, 그의 귓가에는 예전에 아버지가 그에게 한 말이 울려 퍼졌다. “혁아, 언젠가 너의 기쁨과 슬픔, 분노와 즐거움이 모두 다른 사람의 손에 달려 있게 된다면, 그런 인생은 너무 고통스러울거야... 너무 고통스러워...”고통스러운가? 아주 고통스러운 게 맞다. 강지혁은 입안 가득 쓴맛을 느끼며 그녀를 오직 자신만이 갈 수 있는 곳에 가두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 임유진이 어디에도 갈 수 없게 하고 자신을 제외한 누구도 만나지 못하게 하고 싶었다. 그녀의 미소는 오직 자신에게만 피어나기를 바랐다. 다른 남자에게 그런 미소를 보이지 않게 하고 싶었다! 질투였다! 강지혁은 강현수를 질투하고 있었다.아까 강지혁은 임유진과 강현수가 자신 앞에 그런 모습으로 나타난 것을 보며 임유진과 강현수 사이에는 마치 그들만의 시간과 공간이 있는 것처럼 느꼈다. 다른 사람은 그사이에 끼어들 수 없을 것 같았다!그리고 자신은... 다른 사람 중 하나가 되어 버렸다! ... 한편, 강현수는 산에서 내려와 아직 철수하지 않은 경찰과 도로 차단막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강지혁이 정말로 임유진을 상당히 신경 쓰는 모양이다. 하지만 생각해보면 자신과 강지혁은 20년을 알고 지냈는데 이 친구가 여자를 위해 이렇게 행동하는 것을 본 적이 없었다. 예전에 진애령은 강지혁의 조그마한 다정함도 누리지 못했었다! “현수 씨!”급하게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리고 배여진이 강현수의 곁으로 달려왔다. “괜찮아요? 당신이 노씨 가문에 안 돌아가고 여기서 실종됐다는 소리를 듣고 바로 왔어
“여진아.”강현수가 배여진에게 말했다. “너는 나에게 다른 여자들과 조금 달라. 너는 내 목숨을 구한 적이 있으니까.”응?!배여진은 상대방을 멍하니 바라보며 그가 갑자기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네가 원하는 것들을 최대한 만족시켜 줄 수 있어. 네가 원하는 사치스러운 생활도, 다른 사람 앞에서 고개를 빳빳이 쳐들 수 있는 자존심도, 심지어 네가 연예계에서 인기 스타가 되고 싶은 야망까지 나는 모두 이루어 줄 수 있어.”배여진은 그 말을 듣고 곧바로 두 눈이 빛나며 흥분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강현수는 그녀의 이런 모습을 보면서 마음속에는 뭐라고 설명할 수 없는 실망감이 갑자기 솟구쳤다. 그가 여태껏 마음에 두고 있던 여자가 바로 이런 여자란 말인가? “현수 씨, 나한테 이렇게까지 잘해주는 사람 현수 씨밖에 없을 거예요!”배여진의 얼굴은 흥분으로 인해 더 붉어졌다. 자신이 꿈꾸던 미래가 조금씩 실현되고 있다고 느끼면서 앞으로는 반드시 사람들의 위에 서 있는 존재가 될 것으로 생각했다! 그녀를 경멸했던 사람들을 모두 그녀의 발아래에서 무릎을 꿇게 할 것이다! 하지만 이다음에 강현수가 한 말은 배여진의 모든 상상을 깨뜨리고 그녀의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다. 그가 한 말은 바로--“하지만 그것뿐이야. 넌 나의 생명을 구한 사람일 뿐,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야!”배여진은 순식간에 찬물을 뒤집어쓴 것처럼 느껴졌다. 강현수의 말은 마치 그녀에게 헛된 꿈을 꾸지 말라고 경고하는 것 같았다.배여진은 눈앞에 있는 매혹적인 눈을 멍하니 바라보았지만, 그 눈동자 속에는 오직 평온함과 무관심만이 가득했다. 갑자기 그녀의 마음이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이것이 바로 강현수, 연예계의 황태자였다! 만약 어릴 적에 그를 구해준 임유진의 신분으로 속여 말하지 않았다면 이 남자는 아마 그녀를 한 번도 제대로 바라보지 않았을 것이다! 더구나 그녀와 이렇게 얼굴을 마주하고 대화를 나누는 일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결국, 이 모든 것은
만약 이전에 강지혁한테는 일종의 차가운 느낌이 가득했다면, 지금은 그의 눈과 눈썹 끝에는 화려한 분위기가 가득 차 있었다. “지금은 어때, 아직도 아파?”강지혁이 다정하게 물었다. 그의 태도는 너무나 매혹적이고 행동은 아주 부드러웠다. “아니... 별로 안 아파.”임유진의 목소리가 약간 떨렸다. 이렇게 된 분위기에 아픈 느낌을 느낄 새가 어디 있겠는가. 그녀의 모든 감각이 그에게 사로잡힌 것만 같았다! 그의 섬세한 입맞춤이 손목 위의 빨간 자국에 계속해서 이어졌다. 임유진은 수줍어하며 손을 빼려고 했다. 아무래도 차 안에는 두 사람 외에 다른 사람들도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고집스럽게 그녀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움직이지 마!”강지혁이 말했다.“하지만...”임유진의 표정이 당황스러웠다.“움직이지 마, 절대로 움직이지 마. 그렇지 않으면 나도 무슨 짓을 할지 몰라.”강지혁의 목소리는 갑자기 애원하는 것처럼 변했고 그녀의 손목을 잡은 손은 미세하게 떨고 있었다. 임유진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강지혁이 산에서 자신을 찾은 이후부터 그는 평소와 조금 다른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 다른 사람들이 있기에 일부 말은 직접 물어볼 수 없었다. 앞 좌석에 있는 운전기사와 고이준은 강지혁이 방금 한 말을 듣고 경악했다.방금 말한 사람이... 정말 강 대표님인가? 그렇게 도도한 남자가 언제 여자에게 이런 애원하는 어조로 부탁을 한 적이 있는가? 임유진은 잠시 망설였지만, 더 움직이지 않았다. 하지만 강지혁은 그저 조용히 눈을 감고 그녀의 손목에 입맞춤을 계속했다. 강현수가 그녀에게 남긴 모든 흔적을 지우고 자신의 낙인을 새기고 싶었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로 손을 빼냈다면, 그는 무엇을 했을까? 어쩌면... 바로 그녀의 손을 부러뜨렸을까? 왜 그녀는 오늘 강현수와 함께 있었을까? 왜 그녀는 강현수가 업도록 내버려 뒀지? 그녀의 마음속에서 강현수는 대체 어떤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인가?! 이런 질문들이 그의 머릿속에서 계속해서
강지혁의 입에서 쏟아져 나온 질문들, 이런 조급함은 평소의 그에게서 볼 수 없었다! 임유진은 위에 있는 강지혁을 다소 놀란 눈길로 바라보았다. 마치 그동안의 침묵과 억제가 이 순간 폭발하는 것 같았다. “혁아, 먼저 손부터 놓아 줘. 다 설명해줄게.”임유진이 말했다. 하지만 그는 그녀의 손을 놓지 않았고 그 대신 그녀의 얼굴에 연속적으로 부드러운 입맞춤을 퍼부었다. “좋아, 설명해. 듣고 있을게.”어떻게 되었든, 그는 그녀를 놓고 싶지 않았다. 임유진은 그의 입맞춤에 생각이 흐려지는 것만 같았다. “나... 오늘 외할머니의 묘지에 제사를 지내러 갔었어. 그리고 산에서 내려오다가 샛길로 빠져서 옆 산으로 갔어. 그 산은 어릴 때 자주 놀았던 곳이라 한번 가보고 싶었거든. 그러다가 우연히 강현수 씨를 만난 거야.”임유진은 계속해서 되도록 빠르게 상황을 설명했다. 강지혁이 이 일에 대해 오해를 갖지 않기를 바랐다. 하지만 설명하는 과정에서 그녀는 자신이 기억을 되찾았다는 사실을 숨겼다. 그 사실을 비밀로 하려고 한 순간부터 평생 마음속에 묻어두기로 했으니까! “너의 말대로라면 네가 절벽에서 떨어졌다고?”강지혁의 동공이 순간적으로 커졌다. “응, 다행히 그때... 강현수 씨가 옆에 있어서 나를 잡아줬어. 하지만 나중에 기절했고 깨어났을 때는 그가 나를 업고 산에서 내려오는 중이었어.”임유진은 계속 설명했다. “나 혼자 걸어 내려가고 싶었지만, 몸에 약간의 찰과상이 있어서 혼자 걸어서는 해가 지기 전에 산 아래에 도착하지 못할까 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은 바로 임유진의 긴 치마를 들어 올렸고 이내 그녀의 두 다리에 있는 선명한 찰과상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특히 그녀의 두 발목에는 긴 치마와 신발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붉고 부은 상처가 나 있어 눈에 띄었다.“아까는 왜 말하지 않았어?”임유진의 상처를 보며 강지혁은 가슴이 쥐어짜는 듯이 아픈 게 느껴졌다. 그의 성격대로라면 다른 사람이 자신 앞에서 피투성이가 되어도, 상처 없는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