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어릴 적 강현수 씨 구해준 거. 정말 언니 맞아?”그러자 배여진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그게 아니면 현수 씨가 내가 뭐라고 이렇게 잘해주겠어?”“하지만 내 기억 속 언니는 산을 타고 노는 걸 싫어했던 것 같은데. 언니보다는 내가 더 잘 갔지.”그 말에 배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너... 그 말 무슨 뜻이야? 내가 산속에 가서 노는 걸 좋아하든 아니든 그게 현수 씨를 구한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난 그날 우연히 산으로 간 것뿐이고 마침 현수 씨를 구하게 된 거야.”“마침? 우연히?”임유진은 정처 없이 흔들리는 배여진의 눈동자로 그녀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거의 확신했다. 떳떳하다면 이렇게 흔들릴 이유가 없을 테니까.강현수를 구한 건 배여진이 아니다.“야, 너 뭐 하자는 거야?”배여진은 당황함을 감추려 일부러 화를 냈다.“네가 뭔데 자꾸 나랑 현수 씨 일에 끼어들려고 그래? 넌 네 일이나 잘해!”그러고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임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양손을 바라봤다. 만약 꿈속에서 봤던 그 장면이 정말 어릴 적 강현수를 구했던 장면이라면, 절벽 아래 있던 강현수를 힘껏 위로 끌어올린 것도 다리가 풀린 강현수를 일으켜 업고 산 아래까지 내려온 것도 전부 자신의 두 손이 한 일인 게 된다.‘그럼 강현수가 몸에 지니고 다녔던 그 은팔찌도 내 건가...?’어릴 적 그녀에게는 한 쌍의 은팔찌 있었는데 한쪽은 어쩌다 잃어버렸고 남은 한쪽은 어른이 된 후 외할머니가 대신 보관해주었다.하지만... 외할머니의 유품 중 은팔찌 같은 건 없었다.물론 오래전 물건이고 값이 나가는 것도 아니라 외할머니가 실수로 버렸을 수도 있다.임유진은 외할머니댁을 나와 어릴 적 살던 이 집을 바라보며 앞으로 다시는 이곳으로 발을 들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강씨 저택 기사는 임유진이 나온 걸 보고 그녀에게 다음 목적지에 대해 물었다.“외할머니 보러 산소에 갈 거예요.”그때 마침 임유진의 눈에 배여진이
임유진은 외할머니와 단둘이 있고 싶어 먼저 산소로 출발했다.몇 분 후 차는 산 아래 멈춰 섰고 임유진은 같이 따라가려는 기사를 제지하며 그의 동행을 거절했다.“기사님, 저 혼자 가도 돼요. 할머니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요.”그러자 기사는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꼭 임유진 씨 곁을 지키라는 명을 받아서...”“그건 제가 혁이한테 잘 말해드릴게요. 그리고 여기는 마을 사람들만 있는 곳이라 위험한 것도 없어요.”임유진은 옅게 웃은 후 물건을 챙겨 들고 위로 올라갔다.운전기사는 어쩔 수 없이 차에 돌아가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임유진이 막 외할머니 산소에 도착했을 때 강지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나 회의 다 끝났어. 지금 갈게.”“서두르지 않아도 돼. 내가 아직 할 일이 조금 있어서 그러니까 천천히 와.”임유진이 물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 뭐 하고 있어?”강지혁이 물었다.“나 지금 할머니 산소에 왔어. 할머니 댁은 사람이 많아서 나 혼자 먼저 온 거야. 너 먼저 도착하게 되면 나 조금 기다려 줄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기사님한테 도와달라고 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엄밀히 따지면 임유진은 강지혁보다 몇 개월이나 먼저 태어났고 처음 만났을 때도 강지혁을 돌봐준 건 그녀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가 그녀를 아기 취급하듯 대하고 있다.임유진은 피식 웃고는 천천히 외할머니 무덤 앞으로 다가갔다. 대리석으로 된 묘비 위에는 외할머니의 흑백사진도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해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생전 외할머니가 좋아했던 음식들과 소주를 꺼내 올려두었다.어머니도 가고 남동생도 가고 이제는 외할머니마저 가버렸다. 그녀를 사랑 가족들은 전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하지만 다행인 건 강지혁이 그녀의 곁에 남아있다. 그리고 아마 곧 그녀의 가족이 될 것이며 평생을 함께하고 자식을 낳은 후 도란도란 예쁜 가정을 꾸리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고개를 숙
“차 대기 시켜.”강지혁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자신의 상사 얼굴을 힐끔 보고는 순간 털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지금 이 상태의 강지혁을 건드렸다가는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물론 이 모든 게 임유진이라는 여자 때문인 걸 그는 잘 알고 있다.강지혁이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마 강지혁 자신도 모를 것이다.다만 고이준은 강지혁이 왜 이토록 강현수를 신경 쓰는 것까지는 몰랐다.그의 눈에 비친 강지혁은 마치 임유진과 강현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봐 겁을 내는 것 같이 보였다.하지만 이내 자조하듯 웃었다. 천하의 강지혁이 두려워하는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외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강지혁과 그녀 사이의 일들, 사건을 뒤집은 일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다짐 등을 주저리 늘어놓았다.오늘은 명절이 아니었기에 성묘하는 사람들도 없었고 이 넓은 곳에는 오로지 임유진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외할머니가 천국에서 자신의 얘기를 듣고 조금은 안심하기를 바랐다.그러다 문득 지금쯤 강지혁이 이곳으로 향할 거로 생각해 음식들과 소주병을 정리한 뒤 아래로 내려갔다.그렇게 절반쯤 내려왔을 때 오를 때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작은 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이 길이 그녀가 자주 뛰어놀던 산과 이어진 길이라는 걸 기억해냈다.어릴 적 산에서 뛰어놀다가 샛길로 빠져 우연히 이곳으로 왔다가 무덤만 가득한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었으니까.그날 외할머니는 따뜻한 차를 우려주고는 혹시 악몽이라도 꿀까 봐 며칠이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잤었다.임유진은 눈앞에 놓인 길을 두고 시간을 확인한 후 강지혁이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 길을 따라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오랜만에 다시 찾은 놀이터를 한번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꿈속에서 봤던 그 장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던 걸까?또 혹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모든 걸 포기하려는 걸지
꿈속 남자아이는 이 낭떠러지에서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고 여자아이는 본능적으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은 후 그대로 같이 미끄러졌다. 그러다 끝까지 남자아이의 손을 놓지 않았던 여자아이 덕에 두 사람은 무사히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이 절벽은 성인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가팔라 보였고 떨어지면 죽음을 둘째치고 운이 좋아도 병원 신세는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그녀는 그렇게 몇 초 정도 바라보다 서서히 뒷걸음질하며 물러섰다.그때의 강현수는 사람을 착각하지 않았다. 다만 임유진이 그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뿐이다.하지만 임유진이 이제 막 그를 기억하게 된 지금, 강현수는 이미 그녀를 다른 여자로 착각하고 있다.그리고 이 진실은 앞으로 영원히 비밀에 묻혀 그녀만 알고 있게 될 것이다.그때, 뒤편에서 누군가가 나뭇가지를 밟은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강현수가 있었다.검은색 정장 차림의 그는 손에 호떡을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차갑기 그지없는 남자의 얼굴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마찬가지로 깜짝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당신이 여기 왜 있어요?”이건 그녀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임유진은 강현수의 뒤를 본 후 배여진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언니도 없이 지금 혼자서 이곳으로 온 거야?’“왜 여기 있는 거냐고 물었습니다.”강현수는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간 후 물었다.“할머니 보러 왔다가 내려오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임유진의 대답에 강현수가 다시 한번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니까 왜 ‘이곳’으로 왔냐고요!”이곳은 강현수에게 의미가 있는 곳이라 그는 임유진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날 병원 비상계단에서 물었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모든 건 그의 착각일 뿐이라고 대답했다.그날 그는 모든 게 끝나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녀에 대한 미련도 이제 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는데, 그래서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무시할 수 있었
지금에 와서 보니 이곳은 어린 시절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기억은 마치 각인처럼 그의 머릿속에 새겨져 계속 떠올랐다.강현수의 얼굴에는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임유진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 났다.어릴 적 두 사람은 이곳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고 마치 전우라도 된 것처럼 서로에게 의지했다.하지만 십몇 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마치 넘을 수 없는 벽들이 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강현수의 쓸쓸한 목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깨고 흘러나왔다.임유진이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자 강현수는 그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얘기를 이어갔다.“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그 대상이 마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난다는 뜻이에요.”강현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그 미소는 따뜻한 햇볕에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11살 때부터였어요, 누군가를 그리워한 게. 그리고 그때부터 계속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찾지 못했죠. 그때 내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겠어요?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텐데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거예요.”임유진은 그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다.“그리고 아마 이 마음이 절망으로 바뀔 때쯤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녀와 비슷한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고 보이는 대로 곁에 뒀어요. 아주 조금이라도 닮은 부분만 있으면 그걸로 괜찮았어요. 그러면 적어도 이 마음이 그렇게까지 절망으로 변하지는 않을 테니까요.”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이제까지 여자친구를 바꾸고 또 바꾼 게 그것 때문이었단 말인가?강현수가 여자친구를 계속 바꾸는, 어찌 보면 정 많은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무정하고 냉정한 인간이라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그녀의 대체품을 찾아 헤맸던 건 그저 마음속 절망을 조금이나마 지우기 위해서라니... 그의 고통을
이것으로 강현수도 찾아 헤매던 소녀가 임유진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인지했을 것이다.다만... 그녀는 마음 한구석은 바늘에 찔리듯 계속 따끔거렸다. 하지만 이내 어릴 적 처음 친구라고 불릴 만한 남자아이와 이대로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조금 쓸쓸할 뿐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이 마을에서 몇 년을 살았어도 그녀는 근처 아이들과는 어색하고 친밀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꿈속의 여자아이는 마치 처음 봤을 때부터 남자아이에게 친밀감을 느끼듯 행동했으니까.“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게요.”임유진이 한발 물러서 막 몸을 돌리려는데 발밑 나뭇가지 때문에 발을 삐끗해 몸이 뒤로 넘어가 버렸다.“아악!”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의 몸이 절벽 쪽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임유진이 다급하게 뭔가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리던 그때, 누군가의 손이 그녀를 잡았다!덕분에 그녀의 몸은 절벽에 찰싹 달라붙었고 만약 그 손이 없었으면 이대로 굴러떨어졌을 수도 있었다.강현수는 절벽 위에 납작 엎드린 채 그녀의 손목을 꽉 잡으며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저쪽 손도 내게 줘! 내가 위로 끌어올려 줄테니까!”강현수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동자는 당황한 듯 세차게 흔들렸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마치 서로가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떨어진 건 그녀이니 당황하는 것도 그녀 몫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강현수는 그녀보다 더 당황하고 심지어는 두려워 보이기까지 했다.“빨리, 빨리 손을 줘, 임유진!”그는 안간힘을 쓰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 말에 임유진도 강현수의 손을 잡으려고 한쪽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그렇게 두 손이 서서히 가까워지려는데 머릿속에서 또다시 잊고 있었던 장면들이 떠오르며 머리가 아파 나기 시작했다.제발... 왜 하필 지금이야!임유진은 마음속으로 외치며 지금 상황에 두통이 오는 자신을 원망했다.이대로 정신이라도 놨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는 점점 더 아고 그 여파로 강현
“나 무겁지?”남자아이가 조금 미안한 듯 물었다.“응, 무거워.”여자아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힘들었으니까.“미안해... 하지만 만약 이후 네가 다치게 되면 그때는 내가 꼭 너를 업어줄게!”남자아이는 행여나 여자아이가 자신을 약골이라고 여겨 싫어할까 봐 다급하게 말했다.“네가 날 어떻게 업어? 얼마 못 가 내려놓고 말 거야, 넌.”여자아이는 상대가 자신보다 큰 남자아이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모두 자신이 지켜줬기에 전혀 기대하지 않는 말투로 얘기했다.“아니야. 평생 업을 수 있어!”남자아이가 발끈하듯 대답했다.아마 이때 당시 두 아이는 평생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갈기갈기 찢긴 화면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고 이내 선명한 기억이 되었다.임유진은 지금 머리가 무거웠고 눈은 뜨고 싶어도 떠지지 않았다. 그리고 몸은 아까부터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누가 그녀를 업고 걸어가는 것처럼 말이다.누구지? 누가 그녀를 업고 있는 걸까?“현수야...”그때 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강현수의 이름이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에 그녀를 업고 내려가던 강현수가 몸을 움찔거리더니 곧 발걸음을 멈췄다.방금 그녀는 확실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다시는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왜 또 부르는 거지?!임유진 이 여자는 항상 멋대로 선을 그으며 또 멋대로 이상한 행동을 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임유진 씨, 만약 지금 정신을 차렸다면 잘 들으세요. 다른 건 다 괜찮은 데 ‘현수야’라는 호칭은 부르지 마세요. 임유진 씨가 막 불러도 되는 호칭 아니니까.”강현수는 차갑게 말을 뱉은 후 다시 산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임유진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을 느꼈지만 그게 누군지, 또 누가 지금 자신을 업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그렇게 몇 분 후 안간힘을 써서 서서히 눈을 떠보니 눈앞에 있는 건 어떤 남자의 넓은 등과 매력적인 목덜미뿐이었다.강현수!임유진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눈에 띄게
그는 언제나 그녀를 찾아다녔는데 그녀는 그를 까맣게 잊어버렸다.임유진은 자신을 업고 묵묵히 산길을 내려가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왔다.그는 지금 자신이 했던 약속처럼 그녀가 다쳤을 때 업어주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평생이라는 건 없을 것이다...임유진이 좋아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은 그가 아니니까.“현수 씨, 나 앞으로 이곳에 안 올 거예요. 그리고 어릴 때 일은 그저 어릴 때 일일 뿐이니까 현수 씨도 너무 과거에 집착 안 했으면 좋겠어요.”임유진은 그가 계속 어린 시절에 갇혀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배여진에게 더는 속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지금은 이런 말밖에 해줄 수 없다.그러자 강현수는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임유진 씨가 뭔데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합니까?”임유진은 그의 태도에 입술을 깨물었다.“여진이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와중에 여진이가 갑자기 나를 구해줬다고 하니까 기분이 나빠요?”그는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나는 그저 현수 씨가 언니한테 속지 않았으면 해서 말한 것뿐이에요.”“속아요? 당신 사촌 언니가 날 속일 정도로 똑똑하기나 하고?”강현수의 말투에는 절대 속아 넘어갈 일 없다는 아주 본능적인 자신감이 묻어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배여진은 고졸에 바로 전업주부로 전향하고 세상 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그저 시골 여자일 뿐이고 강현수는 그런 그녀의 일생을 전부 뒷조사로 알 수 있을 만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니 어떻게 감히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임유진은 단호한 그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뭐라고 하든 그는 듣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건 그녀나 다름없고 따지고 보면 그녀 역시 그를 속이고 있지 않은가.“이만 내려줘요. 나 혼자 걸어갈 수 있어요.”임유진의 말에 강현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그 몸으로 하산했다가는 날이 어두워질 때야 겨우 도착하게 될
강지혁은 강현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네가 아무리 나보다 더 빨리 만났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어. 내가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아도 임유진은 날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날 사랑해야만 하며 내 곁에 있어야만 해.”그는 말을 마친 후 갑자기 임유진의 턱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임유진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곧바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임유진은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과 입술이 맞닿는 감촉에 깜짝 놀라 순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강지혁이 먼저 입을 맞춰왔다. 그것도 강현수와 경호원들 앞에서 말이다.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스킨십하는 걸 그녀는 좋아하지도 않고 굳이 말하자면 불편해하는 편이었는데 강지혁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강지혁이 지금 무슨 이유로 그녀에게 키스한 건지는 몰라도 5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에게 먼저 다가와 키스하는 거라 그녀는 그의 입술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강지혁과의 키스에 심취해 있었다.강지혁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아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아팠는지.강지혁이 그런 말을 하는 게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아팠다.그에게 냉랭한 말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도 있고 당시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눈앞에 선해 그것 또한 마음이 아팠다.그녀는 적어도 절벽에서 떨어진 후 병원에서 깨어난 순간 모든 걸 다 잊어버린 상태라 아예 고통의 감정 같은 게 없었지만 강지혁은 최면을 받기 전까지 계속 고통에 시달렸어야만 했을 테니까.죽음은 늘 그렇다. 항상 살아있는 사람이 더 괴로운 게 바로 죽음이었다.강지혁은 그녀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했기에 지금 이렇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내뱉게 된 것이다.강현수는 주먹을 꽉 말아쥔 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임유진은 강지혁이 혹시 오해라도 할까 봐 괜히 심장이 철렁했다.“마침 잘 왔네. 네가 한번 말해봐. 너 그때 분명히 나한테 유진이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 안 그래, 강지혁?”강현수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리고 강지혁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꾹 닫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갑작스러운 대치상황에 임유진은 서둘러 팔을 빼기 위해 버둥거렸다. 하지만 강현수가 너무나도 꽉 잡고 있는 바람에 도저히 팔을 뺄 수가 없었다.현이는 무서운 분위기에 많이 놀란 건지 창백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그때 강지혁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맞아, 그랬지. 그런데 그게 뭐?”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하더니 이내 임유진을 잡고 있던 강현수의 손목을 억세게 잡았다.“내가 네 앞에서 뭐라고 했던 임유진이 내 아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내가 놓지 않는 한 임유진은 어디도 못 가.”“만약 유진이가 떠나겠다고 하면 그게 아무리 너라도 막을 권리는 없어!”강현수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만약 임유진이 떠나겠다고 하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도울 것이다.소중한 이를 강지혁에게 보냈던 건 강지혁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강지혁은 지난번에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여전히 임유진을 사랑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만약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을 마음속에서 지운 거라면 더 이상 임유진을 그의 옆에 둘 수 없다.“내가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직접 시험해보면 되겠네.”강지혁은 강현수를 향해 차가운 말을 내뱉고는 이내 뒤에 있는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애를 집 안으로 데려가.”기사는 그 말에 강선현을 안으려는 듯 앞으로 다가갔다.“아가씨, 이리로 오세요.”하지만 현이는 떠날 생각이 없는 듯 임유진의 손을 꽉 잡은 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이에 임유진이 아이를 설득했다.“우리 현이 착하지. 현수 삼촌이랑 할 얘기가 있
강현수는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는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우고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있었는데 왜 5년간 아무런 소식도 주지 않은 거야? 난 정말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네 장례식에 참가했을 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냐고.”강현수는 당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그녀가 떨어졌던 절벽에서 투신할까도 생각했었다.“미안해요. 의도치 않게 걱정을 끼쳤네요.”임유진이 말했다.그녀를 바라보는 강현수의 두 눈은 이미 잔뜩 빨개져 있었다.“아니야.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너무 다행이야.”강현수는 말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와 닿으려고 했다. 임유진이 정말 살아있는 게 맞다는 것을, 그의 환각이나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임유진이 몸을 살짝 옆으로 틀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이에 강현수의 손이 허공에서 움찔하고 멈췄다.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명백한 거절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강현수는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강지혁 때문이야?”“네.”임유진이 답했다.“계속해서 나한테 말 편히 하지 않는 것도 강지혁 때문이고?”“나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고 나는 여전히 혁이를 사랑하고 있어요.”강현수는 그 말에 허탈하고도 조금 슬픈 웃음을 터트렸다.“5년이야. 5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주지 않았으면서, 강지혁 보러 찾아오지도 않았으면서 여전히 강지혁을 사랑한다고? 정말 사랑했으면 더 빨리 돌아와야 하는 거 아니야?”임유진은 강현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돌아오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어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났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혁이고 내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면 그것 또한 혁이 옆이에요. 현수 씨 말대로 5년이나 지났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날 잊어버리고 나한테 시간이든 뭐든 쓰지 말아줘요. 그럴 가치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강현수의 눈에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
임유진은 기억이 돌아온 후 한지영과의 통화에서 그녀가 죽은 후 강현수가 한동안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술을 진탕 마시고 또 허구한 날 그녀의 무덤 앞으로 가 무릎을 꿇은 채 통곡했다던 기사가 났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그리고 그 뒤로 한동안 S 시가 아닌 해외로만 계속 돌고 있었다는 얘기도 말이다.강현수는 목석처럼 차에 기댄 채 계속해서 기다리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5년간 줄곧 꿈속에서만 또는 정신없이 취해있어야만 간신히 보이던 이의 모습이 이렇게 현실감 없이 눈앞에 나타났다.강현수는 순간 하마터면 다리의 힘이 다 풀릴 뻔했다.그녀다. 그녀가 살아있었다. 이한의 말대로 임유진은 정말 살아있었다.“유진아...”잔뜩 매인 목소리가 강현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강현수가 임유진 쪽으로 뛰어갔다.강현수의 마음은 임유진을 사랑했던 만큼 요동쳤고 또 몸은 그녀를 그리워했던 만큼 흥분이 일었다.임유진의 바로 앞까지 당도했을 때 갑자기 아래쪽에서 웬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이 아저씨 누구야?”강현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숙이다 그제야 임유진의 곁에 서 있는 현이를 발견했다. 눈빛이 똘망하고 예쁜 것이 임유진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이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이 아이가 임유진의 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당시 뱄던 세쌍둥이 중의 한 명이 틀림없었다.‘선율이만 살아남은 게 아니었구나.’“나는...”강현수는 무릎을 구부리고 현이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는 강현수 삼촌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강선현이에요. 원래는 임현이었고요. 현이라고 불러주세요.”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강현수는 현이를 보면서 문득 어린 시절의 임유진이 떠올랐다. 그날 우거진 풀숲에서 그를 구해주고 또 산 아래까지 그를 업어줬던 용감한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말이다.그때의 기억은 강현수가 한평생 놓
이경빈은 탁유미 사건이 뒤집히면 회사가 타격을 입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탁유미를 위해 당시의 사건을 뒤집어주었다.“이경빈 씨 나름의 속죄네요. 그 뒤로 언니 찾아온 적은 있어요?”“네. 그런데 내가 보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걸 아니까 직접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횟수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탁유미는 시선을 돌려 현이와 함께 놀고 있는 윤이를 바라보았다.“오히려 이경빈보다 더 많이 찾아온 건 이경빈의 부모님이죠. 윤이를 집에 들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찾아왔었어요.”“그걸 언니가 거절했고요?”만약 윤이를 보냈다면 지금쯤 탁윤이 아니라 이윤으로 살고 있었을 테니 거절한 건 분명해 보였다.“윤이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때 이경빈이 하면 안 되는 말을 한 뒤로 윤이는 이경빈에게 줄곧 마음을 닫고 있는 상태예요. 이경빈은 어차피 어린애라 몇 번 달래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될 문제인가요? 아이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분위기 파악을 잘하고 또 섬세하다는 걸 몰랐던 거죠.”“그럼 언니는 어때요? 언니는 이경빈을 용서할 수 있어요?”임유진이 물었다.사실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이경빈에 관한 소식을 검색해 보았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경빈은 결혼은 물론이고 그 어떤 스캔들도 없었다.아무래도 탁유미의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리는 듯해 보였다.“이경빈이 한 짓은 이미 용서했어요. 계속해서 과거의 일을 붙잡아두고 있어봤자 감정 낭비하는 건 나일 테니까요. 그런데 다시 합치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 사이는 이미 5년 전에 모든 게 다 끝이 났어요.”탁유미가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마치 그로 인해 겪었던 다양한 감정들을 이미 말끔히 지운 사람처럼 말이다.임유진은 탁유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 정말 잘된 일인지 몰라 생각이 복잡했다.한때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공수진의 개입으로 한평생 함께할 수 없는 두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임유진은 딸을 데리
윤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서둘러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윤이는 여전히 예전의 그 귀여운 윤이었다.강선율은 유치원에 가야 했기에 임유진은 오늘 강선현만 데리고 나왔다. 현이와 윤이는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 듯했다.그런데 둘이서 잘 얘기하며 놀던 중에 현이가 윤이의 귀에 꽂혀있는 보청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더니 곧장 보청기를 빼버렸고 그 탓에 하마터면 보청기가 물컵 안에 떨어질 뻔했다.임유진을 그걸 보고는 엄한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그러자 현이가 눈을 깜빡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이거 중요한 거야?”“응, 이거 없으면 소리를 못 들어. 그래서 이걸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해.”탁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해주었다.윤이는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장애인을 보는지 이제는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상 일반인과 다를 거 하나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키득키득하며 대놓고 조롱의 시선을 보내는 아이들이 존재했다.“우와! 이 보청기 대단하다. 이거 덕분에 오빠가 현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거잖아. 정말 잘 됐다! 오빠, 현이가 나중에 오빠를 위해서 피아노 연주해줄게. 현이 피아노 엄청 잘 쳐!”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윤이에게 말했다.만약 이곳에 피아노가 있었으면 아마 이런 말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자기 솜씨를 뽐내러 건반을 두드렸을 것이다.탁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현이를 조금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현이는 진심으로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청력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일까, 윤이는 현이의 말과 미소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 현이가 쳐주는 피아노 연주 꼭 들을게.”사실
지난 5년간 그는 매일같이 후회했다. 그때 임유진과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를 자기 스스로 놓쳐버렸던 그였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손으로 그녀를 강지혁에게 내어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그리고 그 때문에 임유진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만약 그때 억지로라도 그녀를 곁에 두었으면 어쩌면 그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차량이 강씨 저택 앞에 도착했다.강현수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유진이 보러 온 거니까 비켜.”강현수를 알아본 경호 실장이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사모님께서는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사모님과 만나 뵙기를 원하시면 후일 따로 약속을 잡고 오시죠.”강현수는 그 말에 떠나는 것이 아닌 차에 기댄 채 임유진이 오기를 기다렸다.몇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몇 시간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었으니까.경호원들은 고집스러운 그의 행동에 별다른 얘기는 못 하고 그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강지혁이 대단하다고 한들 강현수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으니까.그시각, 임유진은 현이와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안에 있었다.사실 외출하겠다고 했을 때 집사가 차량을 준비해두겠다고 했지만 임유진은 오랜만에 돌아오기도 했고 또 딸에게 S 시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집사에게 지하철로 가겠다고 했다. 이곳은 그녀와 강지혁이 만나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했던 곳이니까.“엄마, 우리 다음에 또 윤이 오빠 보러 가자. 그때는 율이 오빠도 같이!”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탁윤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그래, 다음에는 율이도 같이 가자. 유미 이모랑 윤이가 엄청 좋아할 거야.”두 사람이 오늘 외출한 이유는 탁유미 때문이었다.탁유미는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로 전과 같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건 무리라 윤이 초등학교 근처에 작은 분식점을 차렸다.그 덕에 윤이는 하교하고 나면 바로 분식집에 들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