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어릴 적 강현수 씨 구해준 거. 정말 언니 맞아?”그러자 배여진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그게 아니면 현수 씨가 내가 뭐라고 이렇게 잘해주겠어?”“하지만 내 기억 속 언니는 산을 타고 노는 걸 싫어했던 것 같은데. 언니보다는 내가 더 잘 갔지.”그 말에 배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너... 그 말 무슨 뜻이야? 내가 산속에 가서 노는 걸 좋아하든 아니든 그게 현수 씨를 구한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난 그날 우연히 산으로 간 것뿐이고 마침 현수 씨를 구하게 된 거야.”“마침? 우연히?”임유진은 정처 없이 흔들리는 배여진의 눈동자로 그녀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거의 확신했다. 떳떳하다면 이렇게 흔들릴 이유가 없을 테니까.강현수를 구한 건 배여진이 아니다.“야, 너 뭐 하자는 거야?”배여진은 당황함을 감추려 일부러 화를 냈다.“네가 뭔데 자꾸 나랑 현수 씨 일에 끼어들려고 그래? 넌 네 일이나 잘해!”그러고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임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양손을 바라봤다. 만약 꿈속에서 봤던 그 장면이 정말 어릴 적 강현수를 구했던 장면이라면, 절벽 아래 있던 강현수를 힘껏 위로 끌어올린 것도 다리가 풀린 강현수를 일으켜 업고 산 아래까지 내려온 것도 전부 자신의 두 손이 한 일인 게 된다.‘그럼 강현수가 몸에 지니고 다녔던 그 은팔찌도 내 건가...?’어릴 적 그녀에게는 한 쌍의 은팔찌 있었는데 한쪽은 어쩌다 잃어버렸고 남은 한쪽은 어른이 된 후 외할머니가 대신 보관해주었다.하지만... 외할머니의 유품 중 은팔찌 같은 건 없었다.물론 오래전 물건이고 값이 나가는 것도 아니라 외할머니가 실수로 버렸을 수도 있다.임유진은 외할머니댁을 나와 어릴 적 살던 이 집을 바라보며 앞으로 다시는 이곳으로 발을 들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강씨 저택 기사는 임유진이 나온 걸 보고 그녀에게 다음 목적지에 대해 물었다.“외할머니 보러 산소에 갈 거예요.”그때 마침 임유진의 눈에 배여진이
임유진은 외할머니와 단둘이 있고 싶어 먼저 산소로 출발했다.몇 분 후 차는 산 아래 멈춰 섰고 임유진은 같이 따라가려는 기사를 제지하며 그의 동행을 거절했다.“기사님, 저 혼자 가도 돼요. 할머니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요.”그러자 기사는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꼭 임유진 씨 곁을 지키라는 명을 받아서...”“그건 제가 혁이한테 잘 말해드릴게요. 그리고 여기는 마을 사람들만 있는 곳이라 위험한 것도 없어요.”임유진은 옅게 웃은 후 물건을 챙겨 들고 위로 올라갔다.운전기사는 어쩔 수 없이 차에 돌아가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임유진이 막 외할머니 산소에 도착했을 때 강지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나 회의 다 끝났어. 지금 갈게.”“서두르지 않아도 돼. 내가 아직 할 일이 조금 있어서 그러니까 천천히 와.”임유진이 물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 뭐 하고 있어?”강지혁이 물었다.“나 지금 할머니 산소에 왔어. 할머니 댁은 사람이 많아서 나 혼자 먼저 온 거야. 너 먼저 도착하게 되면 나 조금 기다려 줄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기사님한테 도와달라고 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엄밀히 따지면 임유진은 강지혁보다 몇 개월이나 먼저 태어났고 처음 만났을 때도 강지혁을 돌봐준 건 그녀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가 그녀를 아기 취급하듯 대하고 있다.임유진은 피식 웃고는 천천히 외할머니 무덤 앞으로 다가갔다. 대리석으로 된 묘비 위에는 외할머니의 흑백사진도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해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생전 외할머니가 좋아했던 음식들과 소주를 꺼내 올려두었다.어머니도 가고 남동생도 가고 이제는 외할머니마저 가버렸다. 그녀를 사랑 가족들은 전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하지만 다행인 건 강지혁이 그녀의 곁에 남아있다. 그리고 아마 곧 그녀의 가족이 될 것이며 평생을 함께하고 자식을 낳은 후 도란도란 예쁜 가정을 꾸리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고개를 숙
“차 대기 시켜.”강지혁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자신의 상사 얼굴을 힐끔 보고는 순간 털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지금 이 상태의 강지혁을 건드렸다가는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물론 이 모든 게 임유진이라는 여자 때문인 걸 그는 잘 알고 있다.강지혁이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마 강지혁 자신도 모를 것이다.다만 고이준은 강지혁이 왜 이토록 강현수를 신경 쓰는 것까지는 몰랐다.그의 눈에 비친 강지혁은 마치 임유진과 강현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봐 겁을 내는 것 같이 보였다.하지만 이내 자조하듯 웃었다. 천하의 강지혁이 두려워하는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외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강지혁과 그녀 사이의 일들, 사건을 뒤집은 일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다짐 등을 주저리 늘어놓았다.오늘은 명절이 아니었기에 성묘하는 사람들도 없었고 이 넓은 곳에는 오로지 임유진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외할머니가 천국에서 자신의 얘기를 듣고 조금은 안심하기를 바랐다.그러다 문득 지금쯤 강지혁이 이곳으로 향할 거로 생각해 음식들과 소주병을 정리한 뒤 아래로 내려갔다.그렇게 절반쯤 내려왔을 때 오를 때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작은 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이 길이 그녀가 자주 뛰어놀던 산과 이어진 길이라는 걸 기억해냈다.어릴 적 산에서 뛰어놀다가 샛길로 빠져 우연히 이곳으로 왔다가 무덤만 가득한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었으니까.그날 외할머니는 따뜻한 차를 우려주고는 혹시 악몽이라도 꿀까 봐 며칠이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잤었다.임유진은 눈앞에 놓인 길을 두고 시간을 확인한 후 강지혁이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 길을 따라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오랜만에 다시 찾은 놀이터를 한번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꿈속에서 봤던 그 장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던 걸까?또 혹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모든 걸 포기하려는 걸지
꿈속 남자아이는 이 낭떠러지에서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고 여자아이는 본능적으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은 후 그대로 같이 미끄러졌다. 그러다 끝까지 남자아이의 손을 놓지 않았던 여자아이 덕에 두 사람은 무사히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이 절벽은 성인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가팔라 보였고 떨어지면 죽음을 둘째치고 운이 좋아도 병원 신세는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그녀는 그렇게 몇 초 정도 바라보다 서서히 뒷걸음질하며 물러섰다.그때의 강현수는 사람을 착각하지 않았다. 다만 임유진이 그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뿐이다.하지만 임유진이 이제 막 그를 기억하게 된 지금, 강현수는 이미 그녀를 다른 여자로 착각하고 있다.그리고 이 진실은 앞으로 영원히 비밀에 묻혀 그녀만 알고 있게 될 것이다.그때, 뒤편에서 누군가가 나뭇가지를 밟은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강현수가 있었다.검은색 정장 차림의 그는 손에 호떡을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차갑기 그지없는 남자의 얼굴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마찬가지로 깜짝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당신이 여기 왜 있어요?”이건 그녀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임유진은 강현수의 뒤를 본 후 배여진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언니도 없이 지금 혼자서 이곳으로 온 거야?’“왜 여기 있는 거냐고 물었습니다.”강현수는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간 후 물었다.“할머니 보러 왔다가 내려오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임유진의 대답에 강현수가 다시 한번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니까 왜 ‘이곳’으로 왔냐고요!”이곳은 강현수에게 의미가 있는 곳이라 그는 임유진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날 병원 비상계단에서 물었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모든 건 그의 착각일 뿐이라고 대답했다.그날 그는 모든 게 끝나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녀에 대한 미련도 이제 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는데, 그래서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무시할 수 있었
지금에 와서 보니 이곳은 어린 시절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기억은 마치 각인처럼 그의 머릿속에 새겨져 계속 떠올랐다.강현수의 얼굴에는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임유진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 났다.어릴 적 두 사람은 이곳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고 마치 전우라도 된 것처럼 서로에게 의지했다.하지만 십몇 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마치 넘을 수 없는 벽들이 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강현수의 쓸쓸한 목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깨고 흘러나왔다.임유진이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자 강현수는 그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얘기를 이어갔다.“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그 대상이 마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난다는 뜻이에요.”강현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그 미소는 따뜻한 햇볕에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11살 때부터였어요, 누군가를 그리워한 게. 그리고 그때부터 계속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찾지 못했죠. 그때 내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겠어요?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텐데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거예요.”임유진은 그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다.“그리고 아마 이 마음이 절망으로 바뀔 때쯤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녀와 비슷한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고 보이는 대로 곁에 뒀어요. 아주 조금이라도 닮은 부분만 있으면 그걸로 괜찮았어요. 그러면 적어도 이 마음이 그렇게까지 절망으로 변하지는 않을 테니까요.”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이제까지 여자친구를 바꾸고 또 바꾼 게 그것 때문이었단 말인가?강현수가 여자친구를 계속 바꾸는, 어찌 보면 정 많은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무정하고 냉정한 인간이라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그녀의 대체품을 찾아 헤맸던 건 그저 마음속 절망을 조금이나마 지우기 위해서라니... 그의 고통을
이것으로 강현수도 찾아 헤매던 소녀가 임유진이 아니라는 걸 확실하게 인지했을 것이다.다만... 그녀는 마음 한구석은 바늘에 찔리듯 계속 따끔거렸다. 하지만 이내 어릴 적 처음 친구라고 불릴 만한 남자아이와 이대로 멀어진다고 생각하니 조금 쓸쓸할 뿐이라고 그녀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이 마을에서 몇 년을 살았어도 그녀는 근처 아이들과는 어색하고 친밀감을 느끼지 못했는데 꿈속의 여자아이는 마치 처음 봤을 때부터 남자아이에게 친밀감을 느끼듯 행동했으니까.“다시는 이곳에 오지 않을게요.”임유진이 한발 물러서 막 몸을 돌리려는데 발밑 나뭇가지 때문에 발을 삐끗해 몸이 뒤로 넘어가 버렸다.“아악!”외마디 비명과 함께 그녀의 몸이 절벽 쪽으로 넘어갈 위기에 처했다.임유진이 다급하게 뭔가를 잡으려고 허우적거리던 그때, 누군가의 손이 그녀를 잡았다!덕분에 그녀의 몸은 절벽에 찰싹 달라붙었고 만약 그 손이 없었으면 이대로 굴러떨어졌을 수도 있었다.강현수는 절벽 위에 납작 엎드린 채 그녀의 손목을 꽉 잡으며 있는 힘껏 소리 질렀다.“저쪽 손도 내게 줘! 내가 위로 끌어올려 줄테니까!”강현수의 얼굴은 어느새 하얗게 질려 있었고 눈동자는 당황한 듯 세차게 흔들렸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눈동자를 바라보고는 마치 서로가 바뀐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떨어진 건 그녀이니 당황하는 것도 그녀 몫이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지만 강현수는 그녀보다 더 당황하고 심지어는 두려워 보이기까지 했다.“빨리, 빨리 손을 줘, 임유진!”그는 안간힘을 쓰며 그녀를 향해 손을 뻗었고 그 말에 임유진도 강현수의 손을 잡으려고 한쪽 손을 서서히 들어 올렸다.그렇게 두 손이 서서히 가까워지려는데 머릿속에서 또다시 잊고 있었던 장면들이 떠오르며 머리가 아파 나기 시작했다.제발... 왜 하필 지금이야!임유진은 마음속으로 외치며 지금 상황에 두통이 오는 자신을 원망했다.이대로 정신이라도 놨다가는 정말 죽을 수도 있다.하지만 이런 생각을 하면 할수록 머리는 점점 더 아고 그 여파로 강현
“나 무겁지?”남자아이가 조금 미안한 듯 물었다.“응, 무거워.”여자아이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한 걸음 한 걸음이 힘들었으니까.“미안해... 하지만 만약 이후 네가 다치게 되면 그때는 내가 꼭 너를 업어줄게!”남자아이는 행여나 여자아이가 자신을 약골이라고 여겨 싫어할까 봐 다급하게 말했다.“네가 날 어떻게 업어? 얼마 못 가 내려놓고 말 거야, 넌.”여자아이는 상대가 자신보다 큰 남자아이이긴 하지만 지금까지 모두 자신이 지켜줬기에 전혀 기대하지 않는 말투로 얘기했다.“아니야. 평생 업을 수 있어!”남자아이가 발끈하듯 대답했다.아마 이때 당시 두 아이는 평생이라는 단어가 어떤 의미인지, 무엇을 뜻하는지도 몰랐을 것이다.갈기갈기 찢긴 화면들이 서서히 제자리를 찾았고 이내 선명한 기억이 되었다.임유진은 지금 머리가 무거웠고 눈은 뜨고 싶어도 떠지지 않았다. 그리고 몸은 아까부터 규칙적으로 흔들리고 있었다. 마치 누가 그녀를 업고 걸어가는 것처럼 말이다.누구지? 누가 그녀를 업고 있는 걸까?“현수야...”그때 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강현수의 이름이 입에서 흘러나왔고 그에 그녀를 업고 내려가던 강현수가 몸을 움찔거리더니 곧 발걸음을 멈췄다.방금 그녀는 확실히 그의 이름을 불렀다.다시는 부르지 말라고 그렇게 얘기했는데 왜 또 부르는 거지?!임유진 이 여자는 항상 멋대로 선을 그으며 또 멋대로 이상한 행동을 해 그의 마음을 흔들어 놓는다.“임유진 씨, 만약 지금 정신을 차렸다면 잘 들으세요. 다른 건 다 괜찮은 데 ‘현수야’라는 호칭은 부르지 마세요. 임유진 씨가 막 불러도 되는 호칭 아니니까.”강현수는 차갑게 말을 뱉은 후 다시 산 아래로 발걸음을 옮겼다.임유진은 누군가의 목소리가 귓가에 맴도는 것을 느꼈지만 그게 누군지, 또 누가 지금 자신을 업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그렇게 몇 분 후 안간힘을 써서 서서히 눈을 떠보니 눈앞에 있는 건 어떤 남자의 넓은 등과 매력적인 목덜미뿐이었다.강현수!임유진의 몸이 움찔거리더니 눈에 띄게
그는 언제나 그녀를 찾아다녔는데 그녀는 그를 까맣게 잊어버렸다.임유진은 자신을 업고 묵묵히 산길을 내려가는 남자의 등을 바라보며 눈가가 촉촉하게 젖어왔다.그는 지금 자신이 했던 약속처럼 그녀가 다쳤을 때 업어주고 있다. 하지만 두 사람 사이에 평생이라는 건 없을 것이다...임유진이 좋아하고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은 그가 아니니까.“현수 씨, 나 앞으로 이곳에 안 올 거예요. 그리고 어릴 때 일은 그저 어릴 때 일일 뿐이니까 현수 씨도 너무 과거에 집착 안 했으면 좋겠어요.”임유진은 그가 계속 어린 시절에 갇혀 살기를 바라지 않는다. 그리고 배여진에게 더는 속지 않기를 바란다. 하지만 모든 걸 털어놓을 수 없었기에 지금은 이런 말밖에 해줄 수 없다.그러자 강현수는 그녀의 말에 코웃음을 쳤다.“임유진 씨가 뭔데 나한테 그런 소리를 합니까?”임유진은 그의 태도에 입술을 깨물었다.“여진이와 사이가 좋지 않다고 들었어요. 그런데 그런 와중에 여진이가 갑자기 나를 구해줬다고 하니까 기분이 나빠요?”그는 뭔가 단단히 오해하고 있었다.“나는 그저 현수 씨가 언니한테 속지 않았으면 해서 말한 것뿐이에요.”“속아요? 당신 사촌 언니가 날 속일 정도로 똑똑하기나 하고?”강현수의 말투에는 절대 속아 넘어갈 일 없다는 아주 본능적인 자신감이 묻어있었다.그도 그럴 것이 배여진은 고졸에 바로 전업주부로 전향하고 세상 물정도 제대로 모르는 그저 시골 여자일 뿐이고 강현수는 그런 그녀의 일생을 전부 뒷조사로 알 수 있을 만큼 높은 위치에 있는 사람이니 어떻게 감히 자신을 속인다고 생각할 수 있겠는가?임유진은 단호한 그의 말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그녀가 뭐라고 하든 그는 듣지 않을 테니까. 게다가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건 그녀나 다름없고 따지고 보면 그녀 역시 그를 속이고 있지 않은가.“이만 내려줘요. 나 혼자 걸어갈 수 있어요.”임유진의 말에 강현수는 발걸음을 멈추지 않은 채 입을 열었다.“그 몸으로 하산했다가는 날이 어두워질 때야 겨우 도착하게 될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