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차피 금방 돌아올 거라서 너까지 번거로울 필요는 없는데, 거기까지 가는 거 귀찮지 않아?”임유진이 물었다.“안 귀찮아. 네 외할머니잖아.”강지혁의 단호한 목소리에 임유진은 마음 한구석이 따뜻해 나며 동시에 코가 시큰거려 그대로 그를 꽉 껴안았다.사랑받는다는 건 아마 이런 기분일 듯싶었다.강지혁은 품에 안긴 임유진을 보며 예쁘게 웃더니 머리카락을 어루만져주었다.“생일 때 빌고 싶은 소원 같은 건 있어?”소원이라...출소하고 난 뒤 그녀가 가장 원했던 건 사건을 뒤집고 결백을 찾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 소원을 이뤘으니 지금 그녀에게 가장 큰 소원이라고 하면 아마...“내 소원 들어주려고?”임유진이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마주친 채 물었다.“응, 네가 원하는 거면 내가 무슨 짓을 해서든 다 들어줄 거야.”“그럼 나 생일 때, 그때 말해줄게.”그녀의 소원은 그가 무리할 필요도 없고 엄청나게 큰 노력을 들일 필요도 없다. 임유진이 원하는 건 그저 강지혁이 그녀를 온전히 믿는 것이다. 그녀가 이토록 깊게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아주고 불안해하는 모습과 약해진 모습을 더는 보이지 않길 바라는 것이다.강지혁이 아파하면 그녀 역시 마음이 아프니까.“알았어. 그럼 생일 때 얘기해 줘. 뭐든 들어줄 테니.”같은 시각.이경빈은 지금 호텔 로열 스위트 룸 창문 앞에 서서 불빛이 반짝이는 거리를 바라보며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다.“나 당분간 S 시에 머무르다 갈 거야.”“왜요? 협력 건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공수진은 걱정스러운 말투로 물으면서도 이경빈의 목소리가 이상하다고 생각을 했다.“그런 건 아니고 다른 볼 일이 생겼어.”이경빈이 더는 캐묻지 말라는 듯이 말하자 공수진도 곧장 화제를 바꿨다.“참, 부모님이 우리 언제 결혼하냐고 계속 재촉해요. 아빠가 결혼 날짜는 10월로 정하는 게 좋다고 하던데 경빈 씨는 어때요?”결혼?이경빈은 이 화제가 그다지 마음에 들지 않아 미간을 찌푸렸다.공수진은 그가 선택한 사람이니 결혼을 하게 되
‘이곳 어딘가에 탁유미 그 여자가 있는 거겠지?’몇 년간 그녀는 마치 풀지 못한 저주처럼 이경빈의 마음을 헤집어 놓았다.이긴 건 분명 그일 텐데 왜 그는 하나도 행복하지 않은 걸까? 이경빈은 매번 그녀가 떠오를 때마다 누가 심장을 둔기로 때리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이런 감정을 잠재우려면 탁유미를 찾아내는 방법밖에 없다. 그래서 이번에야말로 철저하게 그녀를 자신의 마음속에서 지워버려야 한다!...다음날, 강씨 저택 기사는 임유진을 태우고 마을로 향했다.얼마 후, 검은색 원피스를 입은 그녀가 차에서 내려 외할머니댁으로 들어갔다.오늘은 임유진 외할머니의 49재로 노씨 집안은 평소 안면이 있던 스님을 집에 모셨고 친척들과 이웃 주민들은 벌써 도착해 있었다.임유진은 앞으로 다가가 흑백사진 속 외할머니 얼굴을 바라보다 저도 모르게 눈물이 차올랐다.어머니 다음으로 그녀를 보살펴주고 아껴주던 사람이 바로 외할머니였다.3살에서 9살이 되기까지 외할머니는 그녀에게 부모나 다름없었고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주었다.“외할머니, 제가 이제 크면 돈을 엄청 많이 벌어서 할머니 호강시켜 줄게요!”어릴 적 임유진은 항상 외할머니에게 이런 말을 했었다. 하지만 호강시켜드리기도 전에 외할머니는 벌써 이 세상 사람이 아니게 돼버렸고 그녀의 곁을 떠나버렸다.눈을 감기 전 그녀의 외할머니는 간호사에게 부탁해 임유진에게 전화를 넣어달라고 했다. 아마 자신이 떠난 후 혼자 남게 될 임유진이 눈에 밟혔을 것이다.‘할머니, 혹시라도 내 걱정은 하지 마세요. 할머니가 그랬던 것처럼 이제는 혁이가 옆에서 날 지켜주고 사랑해줄 거예요.’임유진은 속으로 하고 싶은 말을 전한 후 예의를 갖춰 절을 올렸다.그녀의 첫째 삼촌과 둘째 삼촌은 임유진이 절을 올린 후 그녀의 손을 잡으며 따뜻한 위로를 건넸다. 자신들의 조카 남자친구가 강지혁이라고 안 뒤부터 그들은 더는 그녀를 건드릴 엄두가 안 났다.또한, 일전 자신들의 조카를 마을에 있는 바보에게 시집보내려고 했던 사실도 있었기에 행여 강지혁이
그와 눈이 마주친 임유진은 흠칫 몸을 떨었다. 강현수가 마치 낯선 사람을 보는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기 때문이다.그리고 그 순간 뭐라고 정의하기 힘든 쓸쓸함이 그녀의 몸을 감쌌다.어릴 적 힘든 순간을 같이 했던 남자아이가 모르는 사람 보듯 해서 이러는 걸까? 하지만... 이 모든 건 그녀의 선택이다.며칠 전, 그녀는 어릴 적 강현수를 구한 사람이 자신이 맞다고 해도 강지혁을 선택하기로 마음먹었다.강지혁이 불안해하는 걸, 사랑하는 남자가 약해지는 모습을 더는 보고 싶지 않았기에 기억 속 너머의 진실이 어떠하든 그녀는 이미 외면하기로 했다.‘그래, 이게 맞아.’임유진은 쓰게 웃고는 고개를 숙였다.한편, 강현수 옆에 있던 배여진은 적개심 가득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힐끗 보고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강현수를 쳐다봤다.임유진을 본 그가 또 어떤 이상한 행동을 할지 몰랐으니까. 전시회장에서처럼 또 임유진의 손을 붙잡고 놓아주지 않는 불상사라도 벌어지면 그녀는 이 많은 사람 앞에서 창피를 당하게 될 것이다.그녀의 친척들과 이웃 주민들은 배여진이 강현수의 여자친구가 되리라 한 치의 의심도 없는 상태이니까.다행히 강현수는 싸늘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한번 바라본 후 더 이상 시선을 주지 않았고 이에 배여진은 안심한 듯 가슴을 쓸어내렸다.강현수가 진실을 알게 해서는 안 된다. 이대로 어릴 적 그를 구한 사람이 자신이라고 계속 밀어붙여야만 한다!외할머니에게 절을 한 후 배여진은 임유진 곁으로 다가가 물었다.“유진아, 강지혁 씨는? 같이 안 왔어?”“오후에 온대.”대답을 마친 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자신의 사촌 언니를 빤히 바라봤다.배여진이 대체 뭐라고 했길래 강현수가 어릴 적 자신을 구한 사람이 배여진이라고 단정지을 수 있었던 걸까? 그녀가 들려준 어린 시절 두 아이가 처했던 상황 때문에?임유진의 기억이 아직 돌아온 건 아니지만 어린 시절 자신이 정말 강현수와 있었던 일을 배여진에게 말해줬다고는 해도 그렇게 디테일한 부분까지 전부 다 얘기해 주지 않았
임유진이 가볍게 웃으며 물었다.“어릴 적 강현수 씨 구해준 거. 정말 언니 맞아?”그러자 배여진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그게 아니면 현수 씨가 내가 뭐라고 이렇게 잘해주겠어?”“하지만 내 기억 속 언니는 산을 타고 노는 걸 싫어했던 것 같은데. 언니보다는 내가 더 잘 갔지.”그 말에 배여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너... 그 말 무슨 뜻이야? 내가 산속에 가서 노는 걸 좋아하든 아니든 그게 현수 씨를 구한 거랑 무슨 상관이 있는데? 난 그날 우연히 산으로 간 것뿐이고 마침 현수 씨를 구하게 된 거야.”“마침? 우연히?”임유진은 정처 없이 흔들리는 배여진의 눈동자로 그녀가 거짓말하고 있다는 걸 거의 확신했다. 떳떳하다면 이렇게 흔들릴 이유가 없을 테니까.강현수를 구한 건 배여진이 아니다.“야, 너 뭐 하자는 거야?”배여진은 당황함을 감추려 일부러 화를 냈다.“네가 뭔데 자꾸 나랑 현수 씨 일에 끼어들려고 그래? 넌 네 일이나 잘해!”그러고는 씩씩거리며 자리를 떠났다.임유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려 자신의 양손을 바라봤다. 만약 꿈속에서 봤던 그 장면이 정말 어릴 적 강현수를 구했던 장면이라면, 절벽 아래 있던 강현수를 힘껏 위로 끌어올린 것도 다리가 풀린 강현수를 일으켜 업고 산 아래까지 내려온 것도 전부 자신의 두 손이 한 일인 게 된다.‘그럼 강현수가 몸에 지니고 다녔던 그 은팔찌도 내 건가...?’어릴 적 그녀에게는 한 쌍의 은팔찌 있었는데 한쪽은 어쩌다 잃어버렸고 남은 한쪽은 어른이 된 후 외할머니가 대신 보관해주었다.하지만... 외할머니의 유품 중 은팔찌 같은 건 없었다.물론 오래전 물건이고 값이 나가는 것도 아니라 외할머니가 실수로 버렸을 수도 있다.임유진은 외할머니댁을 나와 어릴 적 살던 이 집을 바라보며 앞으로 다시는 이곳으로 발을 들일 일이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강씨 저택 기사는 임유진이 나온 걸 보고 그녀에게 다음 목적지에 대해 물었다.“외할머니 보러 산소에 갈 거예요.”그때 마침 임유진의 눈에 배여진이
임유진은 외할머니와 단둘이 있고 싶어 먼저 산소로 출발했다.몇 분 후 차는 산 아래 멈춰 섰고 임유진은 같이 따라가려는 기사를 제지하며 그의 동행을 거절했다.“기사님, 저 혼자 가도 돼요. 할머니랑 단둘이 있고 싶어서요.”그러자 기사는 조금 난감한 표정으로 말했다.“꼭 임유진 씨 곁을 지키라는 명을 받아서...”“그건 제가 혁이한테 잘 말해드릴게요. 그리고 여기는 마을 사람들만 있는 곳이라 위험한 것도 없어요.”임유진은 옅게 웃은 후 물건을 챙겨 들고 위로 올라갔다.운전기사는 어쩔 수 없이 차에 돌아가 그녀가 내려오기를 기다렸다.임유진이 막 외할머니 산소에 도착했을 때 강지혁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나 회의 다 끝났어. 지금 갈게.”“서두르지 않아도 돼. 내가 아직 할 일이 조금 있어서 그러니까 천천히 와.”임유진이 물건을 내려놓으며 말했다.“지금 뭐 하고 있어?”강지혁이 물었다.“나 지금 할머니 산소에 왔어. 할머니 댁은 사람이 많아서 나 혼자 먼저 온 거야. 너 먼저 도착하게 되면 나 조금 기다려 줄래?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야.”“알았어. 무슨 일 있으면 기사님한테 도와달라고 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알겠다고 대답한 후 전화를 끊었다.엄밀히 따지면 임유진은 강지혁보다 몇 개월이나 먼저 태어났고 처음 만났을 때도 강지혁을 돌봐준 건 그녀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그가 그녀를 아기 취급하듯 대하고 있다.임유진은 피식 웃고는 천천히 외할머니 무덤 앞으로 다가갔다. 대리석으로 된 묘비 위에는 외할머니의 흑백사진도 있었고 언제나 그렇듯 환한 미소로 그녀를 맞이해주고 있었다.임유진은 생전 외할머니가 좋아했던 음식들과 소주를 꺼내 올려두었다.어머니도 가고 남동생도 가고 이제는 외할머니마저 가버렸다. 그녀를 사랑 가족들은 전부 이 세상에서 사라져버렸다.하지만 다행인 건 강지혁이 그녀의 곁에 남아있다. 그리고 아마 곧 그녀의 가족이 될 것이며 평생을 함께하고 자식을 낳은 후 도란도란 예쁜 가정을 꾸리게 될 것이다.임유진은 고개를 숙
“차 대기 시켜.”강지혁이 잔뜩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자신의 상사 얼굴을 힐끔 보고는 순간 털이 쭈뼛 서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지금 이 상태의 강지혁을 건드렸다가는 큰일이라도 날 것만 같았다.물론 이 모든 게 임유진이라는 여자 때문인 걸 그는 잘 알고 있다.강지혁이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마 강지혁 자신도 모를 것이다.다만 고이준은 강지혁이 왜 이토록 강현수를 신경 쓰는 것까지는 몰랐다.그의 눈에 비친 강지혁은 마치 임유진과 강현수 사이에 무슨 일이라도 있을까 봐 겁을 내는 것 같이 보였다.하지만 이내 자조하듯 웃었다. 천하의 강지혁이 두려워하는 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외할머니의 무덤 앞에서 이런저런 얘기를 했다. 강지혁과 그녀 사이의 일들, 사건을 뒤집은 일들 그리고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겠다는 다짐 등을 주저리 늘어놓았다.오늘은 명절이 아니었기에 성묘하는 사람들도 없었고 이 넓은 곳에는 오로지 임유진의 목소리만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외할머니가 천국에서 자신의 얘기를 듣고 조금은 안심하기를 바랐다.그러다 문득 지금쯤 강지혁이 이곳으로 향할 거로 생각해 음식들과 소주병을 정리한 뒤 아래로 내려갔다.그렇게 절반쯤 내려왔을 때 오를 때는 신경을 쓰지 않았던 작은 길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다 이 길이 그녀가 자주 뛰어놀던 산과 이어진 길이라는 걸 기억해냈다.어릴 적 산에서 뛰어놀다가 샛길로 빠져 우연히 이곳으로 왔다가 무덤만 가득한 걸 보고 놀랐던 기억이 있었으니까.그날 외할머니는 따뜻한 차를 우려주고는 혹시 악몽이라도 꿀까 봐 며칠이나 그녀를 꼭 끌어안고 잤었다.임유진은 눈앞에 놓인 길을 두고 시간을 확인한 후 강지혁이 도착하려면 아직 멀었을 거라고 생각해 그 길을 따라 옆으로 방향을 틀었다.오랜만에 다시 찾은 놀이터를 한번 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꿈속에서 봤던 그 장면을 다시 한번 보고 싶었던 걸까?또 혹은 이번에야말로 정말 모든 걸 포기하려는 걸지
꿈속 남자아이는 이 낭떠러지에서 발을 헛디뎌 미끄러졌고 여자아이는 본능적으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은 후 그대로 같이 미끄러졌다. 그러다 끝까지 남자아이의 손을 놓지 않았던 여자아이 덕에 두 사람은 무사히 위로 올라올 수 있었다.이 절벽은 성인도 다리에 힘이 풀릴 정도로 가팔라 보였고 떨어지면 죽음을 둘째치고 운이 좋아도 병원 신세는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그녀는 그렇게 몇 초 정도 바라보다 서서히 뒷걸음질하며 물러섰다.그때의 강현수는 사람을 착각하지 않았다. 다만 임유진이 그를 기억하지 못했던 것뿐이다.하지만 임유진이 이제 막 그를 기억하게 된 지금, 강현수는 이미 그녀를 다른 여자로 착각하고 있다.그리고 이 진실은 앞으로 영원히 비밀에 묻혀 그녀만 알고 있게 될 것이다.그때, 뒤편에서 누군가가 나뭇가지를 밟은듯한 소리가 들려왔고 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강현수가 있었다.검은색 정장 차림의 그는 손에 호떡을 담은 비닐봉지를 들고 있었다.차갑기 그지없는 남자의 얼굴은 그녀의 얼굴을 보고 마찬가지로 깜짝 놀란듯한 표정을 지었다.“당신이 여기 왜 있어요?”이건 그녀가 묻고 싶은 말이었다.임유진은 강현수의 뒤를 본 후 배여진이 없다는 사실에 또 한 번 놀랐다.‘언니도 없이 지금 혼자서 이곳으로 온 거야?’“왜 여기 있는 거냐고 물었습니다.”강현수는 그녀와의 거리를 좁혀간 후 물었다.“할머니 보러 왔다가 내려오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임유진의 대답에 강현수가 다시 한번 싸늘한 목소리로 물었다.“그러니까 왜 ‘이곳’으로 왔냐고요!”이곳은 강현수에게 의미가 있는 곳이라 그는 임유진이 왜 이곳에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그날 병원 비상계단에서 물었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아니라고, 모든 건 그의 착각일 뿐이라고 대답했다.그날 그는 모든 게 끝나버린 듯한 느낌이 들었고 그녀에 대한 미련도 이제 버려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그렇게 며칠 동안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킬 수 있었는데, 그래서 아까까지만 해도 아무렇지 않게 그녀를 무시할 수 있었
지금에 와서 보니 이곳은 어린 시절처럼 무섭지는 않았다. 하지만 이곳에서의 기억은 마치 각인처럼 그의 머릿속에 새겨져 계속 떠올랐다.강현수의 얼굴에는 씁쓸한 기운이 감돌았고 그런 그를 바라보며 임유진은 왠지 모르게 가슴이 답답해 났다.어릴 적 두 사람은 이곳에서 생사의 갈림길에 서 있었고 마치 전우라도 된 것처럼 서로에게 의지했다.하지만 십몇 년이 지난 지금 두 사람 사이에는 마치 넘을 수 없는 벽들이 세워져 있는 것 같았다.“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게 어떤 느낌인지 알아요?”강현수의 쓸쓸한 목소리가 고요한 적막을 깨고 흘러나왔다.임유진이 아무 말 없이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자 강현수는 그녀의 답을 기다리지 않고 혼자 얘기를 이어갔다.“누군가를 그리워한다는 건 그 대상이 마치 머릿속에 박혀 있는 것처럼, 마음속에 자리 잡은 것처럼 시도 때도 없이 생각난다는 뜻이에요.”강현수가 입꼬리를 올리며 미소를 띄웠다. 하지만 그 미소는 따뜻한 햇볕에 금방이라도 녹아 사라질 것만 같았다.“11살 때부터였어요, 누군가를 그리워한 게. 그리고 그때부터 계속 찾아다녔습니다. 하지만 찾지 못했죠. 그때 내 마음이 어땠을지 상상할 수 있겠어요? 어딘가에 분명히 있을 텐데 도저히 찾을 수 없는 거예요.”임유진은 그가 말하는 사람이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다.“그리고 아마 이 마음이 절망으로 바뀔 때쯤이었을 겁니다. 나는 그녀와 비슷한 누군가를 끊임없이 찾아다녔고 보이는 대로 곁에 뒀어요. 아주 조금이라도 닮은 부분만 있으면 그걸로 괜찮았어요. 그러면 적어도 이 마음이 그렇게까지 절망으로 변하지는 않을 테니까요.”임유진은 조금 놀란 얼굴로 그를 바라봤다. 이제까지 여자친구를 바꾸고 또 바꾼 게 그것 때문이었단 말인가?강현수가 여자친구를 계속 바꾸는, 어찌 보면 정 많은 사람처럼 보일지라도 실상은 무정하고 냉정한 인간이라는 건 이미 유명한 사실이다. 하지만 그가 그토록 그녀의 대체품을 찾아 헤맸던 건 그저 마음속 절망을 조금이나마 지우기 위해서라니... 그의 고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