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의 침묵에 강현수는 이제 확신이 들었다."정말 뭔가를 잊어버린 거야? 그리고 그게 나와 관련 있는 일이고?"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뭔가 오해가 있는 것 같네요. 나는 그저 최면을 통해 다른 증세를 치료하려고 온 것뿐이에요. 강현수 씨도 알다시피 난 3년 동안 감옥에 있었고 불안증세가 조금 있어요."강현수는 그녀를 꿰뚫어 보듯 눈을 마주치고 물었다."당신이 불안증세가 있다고?"임유진은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답했다."네."강현수는 잘생긴 얼굴을 그녀의 얼굴 가까이 가져다 댔다."다시 한번 물어볼게. 그때 전시회에서 내 손 잡고 했던 말 뭐였어? 왜 날 구해준 그 아이와 똑같은 말을 했냐고!""그때도 말했지만 별다른 뜻은 없었어요. 그저 헛소리일 뿐이라고요."임유진은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대꾸했다."하, 헛소리라고?"강현수가 코웃음을 쳤다."그때 너는 내 손을 잡고 절대 이 손 놓지 않을 거라고, 반드시 날 데리고 올라갈 테니 이 손 꽉 잡으라고 했어! 헛소리를 어떻게 해야 이런 말이 나와? 그리고 날 어디로 데려가려고 했던 건데?"그의 질문들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심장을 찔렀고 임유진은 가슴이 답답해 나며 숨조차 쉬기 힘들었다.강현수는 서서히 그녀와의 거기를 좁혔고 임유진의 등은 어느새 벽에 부딪혔다.그녀는 본능적으로 손을 올려 그를 밀치려고 했지만, 강현수에 이해 두 손 모두 벽에 포박되었다."강현수 씨, 지금 뭐 하는 거예요? 이거 안 놔요?!"임유진이 아무리 저항해 봤자 남자의 힘은 당해낼 수가 없었다."임유진, 날 구해준 걸 인정하는 게 그렇게 힘들어?!"강현수가 울부짖었다.천하의 강현수가, 평생 사람 위에 군림했던 남자가 지금은 한 여자 때문에 애원하고 있었다.임유진은 발버둥 치는 걸 멈추고 고개를 들어 눈앞에 있는 남자를 바라봤다. 거리가 좁혀진 덕에 드디어 그의 얼굴이 제대로 보였다.눈가가 빨갛게 부어오른 그는 지금 죄인을 보듯 그녀를 노려보았다.하지만 그 눈빛 속에는 억울함도
임유진은 숨을 깊게 들이쉰 후 더는 몸부림치지 않고 되레 차분해졌다.“강현수 씨를 구해준 사람은 여진 언니 아닌가요? 이 점은 현수 씨가 직접 조사했겠는데 되레 나한테 이렇게 묻는 게 웃기지 않아요?”그녀는 강현수에게 찬물을 끼얹었다. 순간 강현수의 낯빛이 창백해졌다.“강현수 씨 추측이 너무 황당하다고 생각되지 않으세요? 여진 언니가 이 자리에서 방금 현수 씨가 한 질문을 들었다면 어떤 기분이었을까요?”강현수는 충혈된 두 눈으로 임유진을 빤히 쳐다봤다. 그가 조사한 바로 모든 단서가 배여진을 지목하고 있다.그녀야말로 강현수가 찾는 사람이라고 모든 단서가 알려주고 있다.하지만 왜? 강현수는 여전히 눈앞의 이 여자말로 어릴 때 그 소녀 같은 걸까? 외모 때문에? 아니면 그녀가 가끔 내비치는 그런 눈빛 때문에?뭇사람들에게 짓밟혀도 여전히 남아있는 오만함과 정의에 대한 동경과 추구... 그런 모습들이 너무 닮아있었다!“너 정말... 아니야?”간단한 물음이지만 그의 입에서 내뱉기가 너무 어려웠다.“나 아니에요.”임유진이 대답했다.강현수는 불쑥 가볍게 웃었다.“그러게. 너 아니지. 너 아니야...”단지 이 팩트가 마치 그를 얼음물에 잠가놓은 것처럼 뼛속까지 춥게 했다.대체 왜? ‘나 아니에요’라는 말을 들었을 때 왜 이렇게 괴로운 걸까? 마치 심장을 도려내는 것처럼 죽도록 아팠다.강현수는 죽을힘을 다해 이성의 끈을 잡고 그녀의 손목을 놓아주었다.꽉 잡았던 열 손가락에 서서히 힘을 풀자 임유진도 그제야 구속에서 벗어나 황급히 비상구 쪽으로 걸어갔다.강현수는 온몸에 힘이 쫙 풀려서 초췌한 몰골로 벽에 기대 쓴웃음을 지었다.결국 그녀가 아니었다. 이 모든 건 강현수가 제멋대로 추측한 일이다.어릴 때 그를 구해준 사람은 배여진이다. 더 이상 의심할 여지가 없지 않은가?!...임유진은 황급히 병원을 나섰지만 마음은 줄곧 침울했다.그녀는 이미 결정을 내렸다.강현수에게 자신이 그 소녀가 아니라고 말했을 때 실은 그 꿈에 대한 진실도 인제 그
“왔어? 병은 잘 보였어? 의사가 뭐래?”강지혁이 물었다.“그럭저럭 괜찮대.”임유진은 잠시 생각하다가 대답했다.“그 두통은 나중에 내가 또다시 머리 아프다고 하면 네가 대신 의사 선생님 소개해줄래?”강지혁의 두 눈이 살짝 반짝였다.“그래.”“그나저나 너 언제부터 케이크 만드는 데 관심 가졌어? 이걸 배운 계기가 뭐야? 얼마나 배웠어?”임유진은 물으면서 고개 숙여 강지혁이 데코한 케이크를 자세히 관찰했다.문외한인 그녀가 볼 때 나름 데코가 괜찮았다. 빵집에서 파는 케이크랑 거의 비슷했다.“강지혁 씨는 습득 능력이 매우 빨라요. 한 번만 가르치면 바로 요령을 장악해요.”옆에 있던 제빵사가 칭찬을 남발했다.“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할게요. 먼저 나가보세요.”강지혁이 제빵사에게 말했다.제빵사는 머리를 끄덕이고 주방을 떠났다.문득 커다란 주방에 임유진과 강지혁 두 사람만 남았다.“누나는? 오늘 병원 간 것 말고 또 다른 일은 없었어?”강지혁이 담담하게 물었다.분명 다 알면서, 그녀가 왜 병원에 갔는지 다 알면서, 게다가 병원에서 강현수와 마주친 것도 다 알면서 기어코 그녀 입에서 모든 얘기를 듣고 싶었다.거만일까 자존심 때문일까? 또 혹은... 그녀가 어떠한 일도 숨김없이 그에게 토로하길 바라는 마음일까?임유진은 살짝 불편한 기색이 스쳤지만 곧바로 웃어넘겼다.“딱히 특별한 일은 없었어. 아 참, 너 왜 집에서 케이크 만들어? 지금 이 시간대는 회사에 있어야 하는 거 아니야?”그녀는 화제를 돌렸다.“누나가 말했잖아. 생일에 케이크 갖고 싶다며. 미리 배워둬야지.”그의 긴 속눈썹이 살짝 떨리면서 그 안에 드리워진 짙은 눈빛을 전부 가렸다.임유진은 두 눈을 깜빡거렸다.“그러니까 지금... 내 생일 때 직접 케이크를 만들어주려고?”“마음에 들어?”강지혁이 물었다.“나도 오늘 막 배우기 시작했어. 누나 생일 땐 제대로 된 케이크를 만들어야겠는데.”임유진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그가 자신을 사랑하는 건 알고 있지만 직접 케이
그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그 미소는 마치 눈 녹은 봄날의 산처럼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그래, 유진아. 난 널 믿어.”강지혁이 넌지시 대답했다.그는 태생이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누군가를 진정 믿어본 적이 없다.다만 지금 이 여자가 하는 말은 전부 믿고 싶다. 그녀는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그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 테니까!그렇다면 유진의 말을 믿으면 된다. 강현수와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고 믿으면 된다! 그 또한 아빠의 길을 반복하지 않을 거로 믿으면 된다!강지혁은 몸을 살짝 기울이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임유진의 부드러운 키스와는 달리 그의 키스는 매우 거칠었다. 그녀의 스윗함을 전부 앗아갈 것처럼 거칠기 그지없었다.그렇게 거칠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너무 부드러웠다.이 부드러운 느낌은 오직 그녀에게만 선사한다!키스를 마친 후 임유진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더 하고 싶어?”강지혁이 씩 웃었다.순간 임유진의 볼이 더 빨개졌다.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너... 전에도 케이크 데코레이션 배운 적 있어? 엄청 숙련된 솜씨던데.”그는 한눈에 그녀의 속내를 알아챘지만 묻는 말에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아니, 오늘 금방 배웠는데 꽤 재밌더라고.”“...”강지혁은 천재다.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비즈니스에 대한 안목이 예리하고 결단력이 있을뿐더러 이젠 케이크까지 잘 만든다.“사실 데코 그렇게 어렵지 않아. 금방 배워.”강지혁이 대답했다.금방 배운다고? 임유진은 살짝 의아했다. 강지혁은 생크림을 조금 짜서 간단한 플라워를 만든 게 아니라 장미꽃을 만들었다고!“내가 가르쳐줄게. 한번 해봐.”그가 제안했다.임유진도 은근 도전하고 싶었다. 마침 또 주방에 케이크를 만들 재료가 다 있으니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강지혁은 그녀 앞에서 아주 천천히 케이크 데코레이션을 했다. 동작마다 일부러 속도를 늦춰 그녀가 자세히 관찰하고 배울 수 있게 도와줬다.사실 과정
강지혁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앙증맞은 손을 꼭 잡았다. 실로 대비되는 손 크기였다.그의 손은 손가락 길이며, 모양이며, 관절과 손톱까지 완벽 그 자체였다.다만 그녀의 손은 관절마다 고르지 않고 두 군데는 유난히 돌출되어 있었는데 한때 무리하게 육체노동을 한 사람처럼 피부도 거칠고 또 찬찬히 들여다보면 흉터도 있었다...이런 손이 강지혁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더 못생겨 보였다.“왜 이렇게 내 손 잡고 있어...”임유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 손을 빼내려 했다.하지만 강지혁이 못 그러게 가로막았다.“앞으로 네 이 두 손으로 할 수 없는 일은 내가 다 도와줄게.”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미안함이 섞인 그의 표정을 읽고 그제야 이해하며 가볍게 웃었다.“내 손이 못생긴 게 네 탓도 아닌데 뭘 그렇게 미안해해?”강지혁은 복잡한 눈빛으로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임유진은 지금 강지혁이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일부러 웃고 있으니까.‘네 탓도 아닌데’라는 말은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마구 난도질했다.그녀가 애초에 그런 일을 겪은 것은 강지혁과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강지혁이 암묵적으로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손도 다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했을 텐데.이 죄책감은 평생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 할 듯싶다!“최고의 의사를 찾아서 이 손 반드시 철저하게 치료할 거야.”강지혁이 맹세했다.“그래.”임유진은 대답하면서도 손이 완치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강지혁이 더 이상 죄책감을 받지 말길 바랄 뿐이다.게다가 그녀는 앞서 치료도 받고 약도 복용하여 출소 때보다 손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 이젠 너무 아프지도 않다.강지혁은 고개 숙여 그녀의 손가락에 키스했다. 변형된 관절마다 또 혹은 흉터가 생긴 곳마다 뜨거운 입맞춤을 남겼다.잔잔한 키스는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였다.임유진은 눈앞의 남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평생 지금처럼 강지혁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건 임유진의 인생 최고의 행복이겠지....“뭐라고?!”진세령은 못 믿겠다는
“누구야? 누가 날 매장해?”진세령이 분노를 터트렸다.하지만 매니저의 입에서 상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낯빛이 창백해졌다.강지혁!그녀를 매장하려는 사람은 강지혁이란다!연예계에 전혀 관심 없는 강지혁이, 그 어떤 연예인도 겨냥한 적 없는 강지혁이 지금 처음 손대고 있다!이유라면... 진세령은 문득 전시회장에서 있은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일부러 자세를 낮추고 임유진에게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는데 단호하게 거절당했다.이어서 강지혁이 이렇게 말했다.“용서하기 싫으면 하지 마.”그때 진세령도 나중에 강지혁이 뭔가 수단을 쓸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아예 연예계에서 매장할 줄은 몰랐다.그래도 한때 그의 처제가 될 뻔한 사이인데!강지혁이 아무리 진애령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도 외부인들이 볼 땐 강씨 일가와 진씨 일가는 나름대로 가까운 사이였다.강지혁이 그녀를 연예계에서 매장한 일이 퍼지기라도 하면 진세령은 앞으로 대중들 앞에 얼굴을 내밀 수도 없고 상류층에서도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강지혁이... 임유진을 위해 이 정도로 몰아붙인단 말인가?!진세령의 두 눈에 분노가 가득 찼지만 급선무는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그녀는 서둘러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말씀드렸다.진기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아무 말이 없었고 윤수경은 딸아이가 괴롭힘을 당하자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강지혁 이 자식이 해도 해도 너무하네. 우리 집안의 상가도 허물더니 이젠 네 진로까지 망치려고 들어?”윤수경은 말할수록 더 화가 나 아예 가방을 챙기고 강지혁을 찾아가 따져 물을 기세였다.진세령은 그런 엄마를 얼른 말렸다. 엄마는 욱한 성질이라 진정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은 아빠뿐이다.“강지혁은 지금 한창 임유진에게 빠져있어요. 내가 한때 유진이를 저격한 것 때문에, 그리고 걔가 감방에 있을 때도 몇 번 좀 괴롭혔거든요. 그런 것들 때문에 임유진 대신 화풀이하는 거라고요.”진세령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사실 나도 유진이한테 사과하고 싶었다고요. 심지어
옆에 있던 윤수경과 진세령 두 모녀는 이 말을 듣더니 화들짝 놀랐다.성남의 땅은 위치가 좋아 뜨거운 감자나 다름없다. 애초에 진씨 일가에서 거금을 들여 겨우 사놓은 땅이고 요 몇 년간 집값이 오르며 현 시세가 수천억에 달한다!수천억을 이대로 임유진에게 준다고?!그럴 순 없지!윤수경이 막 미쳐 날뛰려 할 때 상대가 뭐라 대답했는지 진기태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두 모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강 대표 정말 더 고려할 마음 없어?”설마... 강지혁이 거절한 거야?!윤수경과 진세령은 충격에 휩싸였다.한참 후 진기태는 통화를 마치고 축 처진 채 동정 어린 눈길로 딸아이를 바라봤다.씨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 틀린 말 하나 없다.한때 모두에게 유린당하던 임유진이 어쩌다가 S 시에서 제일 막강한 뒷배를 차지하게 된 걸까?“연예계 떠나서 진씨 일가에 돌아와 발전해. 네 언니가 돌아갔으니 가업을 당연히 네가 물려받아야 해.”진기태가 말했다.진세령도 가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서른 살 이후의 계획이지, 지금은 일단 연예계에서 각종 상을 휩쓸고 으리으리하게 은퇴하여 가문의 기업으로 돌아와 그룹 총수가 될 생각이다. 그땐 만인의 전설로 불릴 테니까.그녀는 이러한 목표를 세우고 알차게 계획대로 살아가고 있다.그런데 지금 연예계에서 매장당하고 가문의 기업을 물려받으라니, 성질부터 완전히 다르잖아!그때 가서 진세령은 그저 남들 눈에 웃음거리로 전락할 뿐이다!“강지혁이 왜 거절해요? 그 땅은 현재 가격이 2천억 원이란 걸 모른대요?”진세령이 물었다.“모를 리가 있겠어. 그저...”진기태가 뜸 들였다.“그때 네가 유진의 앞날을 망쳤으니 지금 유진이를 대신해서 네 사업을 망치는 거래!”진세령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강지혁은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임유진이 다시 윤이 식당에 갔을 때 탁유미 엄마랑 윤이가 안 보였다.“언니 어머님은 윤이 데리고 근처 공원에 가셨어요?”“아니요.”탁유미는 말하려다가
사실 요 며칠 그녀도 마음을 정했다. 만약 이경빈과 계속 더 얽히고설킬 운명이라면, 그가 반드시 찾아온다면, 그땐 그냥 이경빈이 실컷 복수하게 내버려 둘 셈이다.“하지만...”임유진이 더 말하려 했으나 탁유미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유진 씨가 나 위해주는 거 알아요. 유진 씨라는 친구가 있어서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요. 다만... 나랑 이경빈 사이의 일은 결국 해결해야만 해요.”탁유미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유진 씨, 딱 하나 부탁할 게 있어요.”그녀의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에 임유진은 심장이 움찔거렸다.“만약... 경빈이가 정말 나를 찾아온다면 아마 한동안 엄마랑 윤이 보러 못 갈 거예요. 그땐 유진 씨가 나 대신 두 사람 보살펴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늙은이와 어린이니 옆에서 돌봐줘야 하거든요.”탁유미가 말했다.그녀는 이미 전 재산을 엄마에게 남겨뒀지만... 여전히 걱정됐다.그해 이경빈의 관계로 그녀의 친구들은 전부 그녀와 선을 그었다. 이젠 진심으로 믿고 의지할 데가 임유진밖에 없다.임유진이 얼른 대답했다.“내가 잘 보살필게요.”애초에 일자리를 구할 때 탁유미는 그녀가 감방에 다녀온 걸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식당에서 출근하게 했다. 탁유미는 그녀를 절망 속에서 건져준 은인이다.그러니 인제 와서 은혜에 보답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게다가 탁유미의 엄마와 윤이도 다들 그녀를 너무 좋아한다. 특히 윤이는 그녀를 볼 때마다 찰떡처럼 붙어있고 그녀도 이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다.탁유미는 드디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유진 씨.”“하지만 언니, 정말 위기에 처했을 땐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날 찾아와도 돼요.”임유진이 말했다.“알아요. 만약... 정말 못 버티겠다 싶으면 꼭 유진 씨 찾을게요.”탁유미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속으론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만약 그 언젠가 내가 정말 이경빈의 복수를 감당하지 못할 날이 다가온다면 아마 유진 씨도 도와줄 수 없을 거예요.’임유진의 뒤에 강지혁이 있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