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묵묵히 그녀를 바라보다가 가볍게 웃었다.그 미소는 마치 눈 녹은 봄날의 산처럼 아름다워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그래, 유진아. 난 널 믿어.”강지혁이 넌지시 대답했다.그는 태생이 의심이 많은 사람이라 누군가를 진정 믿어본 적이 없다.다만 지금 이 여자가 하는 말은 전부 믿고 싶다. 그녀는 배신하지 않을 테니까. 그의 마음을 저버리지 않을 테니까!그렇다면 유진의 말을 믿으면 된다. 강현수와 둘 사이에 아무 일도 없다고 믿으면 된다! 그 또한 아빠의 길을 반복하지 않을 거로 믿으면 된다!강지혁은 몸을 살짝 기울이고 그녀의 입술에 키스했다.임유진의 부드러운 키스와는 달리 그의 키스는 매우 거칠었다. 그녀의 스윗함을 전부 앗아갈 것처럼 거칠기 그지없었다.그렇게 거칠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너무 부드러웠다.이 부드러운 느낌은 오직 그녀에게만 선사한다!키스를 마친 후 임유진은 제대로 서 있지도 못하고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왜? 더 하고 싶어?”강지혁이 씩 웃었다.순간 임유진의 볼이 더 빨개졌다.그녀는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너... 전에도 케이크 데코레이션 배운 적 있어? 엄청 숙련된 솜씨던데.”그는 한눈에 그녀의 속내를 알아챘지만 묻는 말에 고분고분하게 대답했다.“아니, 오늘 금방 배웠는데 꽤 재밌더라고.”“...”강지혁은 천재다. 인정을 안 할 수가 없다. 비즈니스에 대한 안목이 예리하고 결단력이 있을뿐더러 이젠 케이크까지 잘 만든다.“사실 데코 그렇게 어렵지 않아. 금방 배워.”강지혁이 대답했다.금방 배운다고? 임유진은 살짝 의아했다. 강지혁은 생크림을 조금 짜서 간단한 플라워를 만든 게 아니라 장미꽃을 만들었다고!“내가 가르쳐줄게. 한번 해봐.”그가 제안했다.임유진도 은근 도전하고 싶었다. 마침 또 주방에 케이크를 만들 재료가 다 있으니 따로 준비할 필요가 없다.강지혁은 그녀 앞에서 아주 천천히 케이크 데코레이션을 했다. 동작마다 일부러 속도를 늦춰 그녀가 자세히 관찰하고 배울 수 있게 도와줬다.사실 과정
강지혁은 커다란 손으로 그녀의 앙증맞은 손을 꼭 잡았다. 실로 대비되는 손 크기였다.그의 손은 손가락 길이며, 모양이며, 관절과 손톱까지 완벽 그 자체였다.다만 그녀의 손은 관절마다 고르지 않고 두 군데는 유난히 돌출되어 있었는데 한때 무리하게 육체노동을 한 사람처럼 피부도 거칠고 또 찬찬히 들여다보면 흉터도 있었다...이런 손이 강지혁의 손에 쥐어져 있으니 더 못생겨 보였다.“왜 이렇게 내 손 잡고 있어...”임유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 손을 빼내려 했다.하지만 강지혁이 못 그러게 가로막았다.“앞으로 네 이 두 손으로 할 수 없는 일은 내가 다 도와줄게.”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미안함이 섞인 그의 표정을 읽고 그제야 이해하며 가볍게 웃었다.“내 손이 못생긴 게 네 탓도 아닌데 뭘 그렇게 미안해해?”강지혁은 복잡한 눈빛으로 미소 짓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봤다. 임유진은 지금 강지혁이 죄책감을 느끼지 말라고 일부러 웃고 있으니까.‘네 탓도 아닌데’라는 말은 칼날처럼 그의 심장을 마구 난도질했다.그녀가 애초에 그런 일을 겪은 것은 강지혁과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있을까?강지혁이 암묵적으로 허락하지 않았다면 그녀의 손도 다치지 않고 완벽하게 보존했을 텐데.이 죄책감은 평생 어깨에 짊어지고 가야 할 듯싶다!“최고의 의사를 찾아서 이 손 반드시 철저하게 치료할 거야.”강지혁이 맹세했다.“그래.”임유진은 대답하면서도 손이 완치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강지혁이 더 이상 죄책감을 받지 말길 바랄 뿐이다.게다가 그녀는 앞서 치료도 받고 약도 복용하여 출소 때보다 손 상태가 훨씬 좋아졌다. 이젠 너무 아프지도 않다.강지혁은 고개 숙여 그녀의 손가락에 키스했다. 변형된 관절마다 또 혹은 흉터가 생긴 곳마다 뜨거운 입맞춤을 남겼다.잔잔한 키스는 그녀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였다.임유진은 눈앞의 남자를 지그시 바라봤다. 평생 지금처럼 강지혁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그건 임유진의 인생 최고의 행복이겠지....“뭐라고?!”진세령은 못 믿겠다는
“누구야? 누가 날 매장해?”진세령이 분노를 터트렸다.하지만 매니저의 입에서 상대의 이름을 듣는 순간 낯빛이 창백해졌다.강지혁!그녀를 매장하려는 사람은 강지혁이란다!연예계에 전혀 관심 없는 강지혁이, 그 어떤 연예인도 겨냥한 적 없는 강지혁이 지금 처음 손대고 있다!이유라면... 진세령은 문득 전시회장에서 있은 일이 떠올랐다. 그녀는 일부러 자세를 낮추고 임유진에게 사과하며 용서를 빌었는데 단호하게 거절당했다.이어서 강지혁이 이렇게 말했다.“용서하기 싫으면 하지 마.”그때 진세령도 나중에 강지혁이 뭔가 수단을 쓸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아예 연예계에서 매장할 줄은 몰랐다.그래도 한때 그의 처제가 될 뻔한 사이인데!강지혁이 아무리 진애령을 진심으로 사랑하지 않았다고 해도 외부인들이 볼 땐 강씨 일가와 진씨 일가는 나름대로 가까운 사이였다.강지혁이 그녀를 연예계에서 매장한 일이 퍼지기라도 하면 진세령은 앞으로 대중들 앞에 얼굴을 내밀 수도 없고 상류층에서도 웃음거리로 전락할 것이다!강지혁이... 임유진을 위해 이 정도로 몰아붙인단 말인가?!진세령의 두 눈에 분노가 가득 찼지만 급선무는 이 일을 해결하는 것이다.그녀는 서둘러 집에 돌아가 부모님께 말씀드렸다.진기태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고 아무 말이 없었고 윤수경은 딸아이가 괴롭힘을 당하자 그 자리에서 펄쩍 뛰어올랐다.“강지혁 이 자식이 해도 해도 너무하네. 우리 집안의 상가도 허물더니 이젠 네 진로까지 망치려고 들어?”윤수경은 말할수록 더 화가 나 아예 가방을 챙기고 강지혁을 찾아가 따져 물을 기세였다.진세령은 그런 엄마를 얼른 말렸다. 엄마는 욱한 성질이라 진정 그녀의 문제를 해결해줄 사람은 아빠뿐이다.“강지혁은 지금 한창 임유진에게 빠져있어요. 내가 한때 유진이를 저격한 것 때문에, 그리고 걔가 감방에 있을 때도 몇 번 좀 괴롭혔거든요. 그런 것들 때문에 임유진 대신 화풀이하는 거라고요.”진세령이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사실 나도 유진이한테 사과하고 싶었다고요. 심지어
옆에 있던 윤수경과 진세령 두 모녀는 이 말을 듣더니 화들짝 놀랐다.성남의 땅은 위치가 좋아 뜨거운 감자나 다름없다. 애초에 진씨 일가에서 거금을 들여 겨우 사놓은 땅이고 요 몇 년간 집값이 오르며 현 시세가 수천억에 달한다!수천억을 이대로 임유진에게 준다고?!그럴 순 없지!윤수경이 막 미쳐 날뛰려 할 때 상대가 뭐라 대답했는지 진기태의 안색이 확 어두워졌다. 두 모녀가 전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강 대표 정말 더 고려할 마음 없어?”설마... 강지혁이 거절한 거야?!윤수경과 진세령은 충격에 휩싸였다.한참 후 진기태는 통화를 마치고 축 처진 채 동정 어린 눈길로 딸아이를 바라봤다.씨는 뿌린 대로 거둔다는 말 틀린 말 하나 없다.한때 모두에게 유린당하던 임유진이 어쩌다가 S 시에서 제일 막강한 뒷배를 차지하게 된 걸까?“연예계 떠나서 진씨 일가에 돌아와 발전해. 네 언니가 돌아갔으니 가업을 당연히 네가 물려받아야 해.”진기태가 말했다.진세령도 가업을 물려받아야 하는 건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서른 살 이후의 계획이지, 지금은 일단 연예계에서 각종 상을 휩쓸고 으리으리하게 은퇴하여 가문의 기업으로 돌아와 그룹 총수가 될 생각이다. 그땐 만인의 전설로 불릴 테니까.그녀는 이러한 목표를 세우고 알차게 계획대로 살아가고 있다.그런데 지금 연예계에서 매장당하고 가문의 기업을 물려받으라니, 성질부터 완전히 다르잖아!그때 가서 진세령은 그저 남들 눈에 웃음거리로 전락할 뿐이다!“강지혁이 왜 거절해요? 그 땅은 현재 가격이 2천억 원이란 걸 모른대요?”진세령이 물었다.“모를 리가 있겠어. 그저...”진기태가 뜸 들였다.“그때 네가 유진의 앞날을 망쳤으니 지금 유진이를 대신해서 네 사업을 망치는 거래!”진세령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강지혁은 미쳐도 제대로 미쳤다!...임유진이 다시 윤이 식당에 갔을 때 탁유미 엄마랑 윤이가 안 보였다.“언니 어머님은 윤이 데리고 근처 공원에 가셨어요?”“아니요.”탁유미는 말하려다가
사실 요 며칠 그녀도 마음을 정했다. 만약 이경빈과 계속 더 얽히고설킬 운명이라면, 그가 반드시 찾아온다면, 그땐 그냥 이경빈이 실컷 복수하게 내버려 둘 셈이다.“하지만...”임유진이 더 말하려 했으나 탁유미가 그녀의 손을 가볍게 잡아당겼다.“유진 씨가 나 위해주는 거 알아요. 유진 씨라는 친구가 있어서 얼마나 뿌듯한지 몰라요. 다만... 나랑 이경빈 사이의 일은 결국 해결해야만 해요.”탁유미는 잠시 멈췄다가 말을 이었다.“유진 씨, 딱 하나 부탁할 게 있어요.”그녀의 진지하고 엄숙한 표정에 임유진은 심장이 움찔거렸다.“만약... 경빈이가 정말 나를 찾아온다면 아마 한동안 엄마랑 윤이 보러 못 갈 거예요. 그땐 유진 씨가 나 대신 두 사람 보살펴줬으면 하는 바람이에요. 늙은이와 어린이니 옆에서 돌봐줘야 하거든요.”탁유미가 말했다.그녀는 이미 전 재산을 엄마에게 남겨뒀지만... 여전히 걱정됐다.그해 이경빈의 관계로 그녀의 친구들은 전부 그녀와 선을 그었다. 이젠 진심으로 믿고 의지할 데가 임유진밖에 없다.임유진이 얼른 대답했다.“내가 잘 보살필게요.”애초에 일자리를 구할 때 탁유미는 그녀가 감방에 다녀온 걸 전혀 신경 쓰지 않고 바로 식당에서 출근하게 했다. 탁유미는 그녀를 절망 속에서 건져준 은인이다.그러니 인제 와서 은혜에 보답하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게다가 탁유미의 엄마와 윤이도 다들 그녀를 너무 좋아한다. 특히 윤이는 그녀를 볼 때마다 찰떡처럼 붙어있고 그녀도 이 아이가 너무 사랑스럽다.탁유미는 드디어 편안한 미소를 지었다.“고마워요, 유진 씨.”“하지만 언니, 정말 위기에 처했을 땐 혼자 감당하려고 하지 말고 날 찾아와도 돼요.”임유진이 말했다.“알아요. 만약... 정말 못 버티겠다 싶으면 꼭 유진 씨 찾을게요.”탁유미는 이렇게 대답했지만 속으론 전혀 다르게 생각했다.‘만약 그 언젠가 내가 정말 이경빈의 복수를 감당하지 못할 날이 다가온다면 아마 유진 씨도 도와줄 수 없을 거예요.’임유진의 뒤에 강지혁이 있
하지만 정작 그녀가 가장 도움이 필요할 때 이 남자는 이런 식으로 말했다.“이번 생에 가장 후회되는 일이 바로 널 내 여자친구로 만든 거야.”얼마나 우습고 황당한 말인가? 이보다 아이러니할 순 없다!평생을 기약하던 맹세는 한차례 사고가 준 타격을 버텨내지 못했고 소위 말하는 유일하게 인정했다는 마음가짐은 그리 쉽게 딴 여자로 대체되었으니!한때 익숙했던 그 목소리가 지금은 이토록 낯설게 느껴졌다.임유진은 몸을 돌려 바로 뒤에 서 있는 소민준을 쳐다봤다. 여전히 명품으로 전신을 치장하여 패셔너블하고 꼭 마치 플레이보이 같았다.진세령이 왜 그와 함께한 지 알 것도 같았다. 겉모양은 번지르르하니까.“우리 사이에 더 나눌 얘기가 있었어? 내가 왜 그런 시간 낭비를 해야 하지?”임유진이 되물었다.“몇 분이면 돼. 너에게 몇 가지 할 말이 있어서 그래.”소민준이 초조하게 말했다. 이 기회를 놓칠까 봐 안절부절못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유진아, 그해 일은 내가 잘못했어. 압력을 견디지 못하고 네 손을 놓아버렸어.”임유진이 싸늘한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민준아, 이런 말이라면 전혀 할 필요 없어. 난 듣고 싶지 않거든.”소민준은 난감한 기색이 역력했다.“이것만은 꼭 알아줘. 널 해쳐서 억울하게 감방에 갇히게 한 사람은 허재명이야. 세령이는 억울해. 걔는 그저 네가 친언니를 죽인 줄 알고 그렇게 괴롭힌 거야. 세령이 미워하지 마. 걔 잘못 아니야.”임유진은 소민준의 이 말이 너무 웃길 따름이었다.그녀를 감방에 갇히게 한 건 허재명이 맞다. 하지만 자신은 억울하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를 때 진세령은 그녀에게 무슨 짓을 벌였던가?열 손톱을 뽑고 손가락 관절을 전부 부러트렸는데 이 고통을 대체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감방에서 그녀를 학대했던 사람들도 후에 알고 보니 그중 적잖은 사람이 진씨 일가에서 뒷돈을 받고 악행을 저질렀다.진 씨네 가족에게 진애령의 목숨만 목숨이고 다른 사람 목숨은 개 취급도 못 받는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가끔 이런 생각까지
“모질다고?”임유진이 그의 말을 가로챘다.“고작 이 정도인데 모질어? 진짜 모질게 구는 게 어떤 건지 한 번 보여줘?!”그녀가 감방에서 겪은 비인간적인 괴롭힘은 삶을 포기하고 싶게 만들었다. 소민준은 아마 그녀가 겪은 고통의 10분의 1도 못 겪어봤을 것이다.“세령이가 망해야 속이 시원하겠어?”소민준이 씩씩거렸다.“걔도 그땐 날 망쳤어. 안 그래? 내 이 두 손도 운이 좋았으니 망정이지, 지금 아무 물건도 못 들었을 수도 있다고.”임유진이 맹비난을 해댔다.소민준은 숨이 턱 막혀 그녀의 두 손을 물끄러미 쳐다봤다.사실 그도 이 몇 해 동안 머릿속에 가끔 그해 그 장면이 떠올라 마음이 복잡해질 때가 많다.임유진이 누명을 뒤집어쓴 걸 알게 된 이후로 더 괴로웠다. 만약 그때 임유진이 억울한 누명을 뒤집어쓰지 않았더라면 그와 그녀는 계속 함께할 수 있었을 텐데.다만 곧장 이런 생각을 접었다.소민준에게 있어 진세령이야말로 최상의 선택이다. 그녀는 소민준에게도, 그의 집안에도 완벽한 선택이다.“유진아, 넌 이젠 강지혁 씨가 있는데 왜 굳이 세령이를 죽음으로 몰아붙여?”소민준의 말투가 조금 유순해졌다.임유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증오에 섞인 두 눈으로 그를 노려봤다.“죽음으로 몰아붙인다는 게 무슨 뜻인지는 알고 얘기하는 거야? 진세령은 지금 단지 연예계에서 매장당할 뿐 여전히 진씨 일가의 둘째 딸이야. 가족도 있고 너라는 약혼자도 있어서 진가네와 소가네 두 집안이 든든한 뒷배가 되어준다고.”“진짜 죽음으로 몰아붙이는 건 가족도 잃고 연인도 잃고 너희 두 집안이 철저하게 무너지는 거야. 만신창이가 되어서 도움을 구할 데도 없이 죽지 못해 살아가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절망이라고.”임유진이 말을 내뱉을 때마다 소민준의 안색이 점점 더 창백해졌다.“어때? 진짜 죽음으로 밀어 부쳐볼까?”임유진의 물음에 소민준은 한마디 말도 못 했다.그녀는 차를 타고 자리를 떠났다. 소민준은 몸을 휘청거리며 방금 그녀가 말한 죽음으로 몰아붙이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다
이 짤막한 답장은 진세령이 정말 매장당했다는 걸 의미한다!미리 심리준비를 했지만 임유진은 여전히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어쨌거나 진세령은 평범한 연예계 배우가 아니라 진씨 일가의 둘째 딸이니까!강지혁이 정말 그녀를 매장할 줄이야.휴대폰에 뜬 그의 답장을 바라보며 임유진은 잠시 넋을 놓았다.한참 후 그녀가 되물었다.[진씨 일가에서 너와 맞서진 않아?]그녀는 자신 때문에 강지혁의 사업에 영향받는 걸 원치 않는다.진씨 일가도 어쨌거나 S 시에서 재벌가에 속하니까.강지혁의 답장은 여전히 깔끔 그 자체였다.[그럴 배짱은 없어.]짤막한 한마디에 임유진은 마음이 놓였다.저녁 시간, 진세령은 연예계 은퇴를 선언했다. 가업을 물려받겠다고 부연 설명까지 했다.갑작스러운 뉴스에 연예계가 발칵 뒤집혔다!그녀는 지금 한창 인기가 급상승 중인 여배우니까. 올해 상영한 영화로 여우주연상까지 노리고 있는데 상을 받기는커녕 은퇴를 해?이 기사가 실검 1위에 오르자 수십만 개의 댓글이 달렸다.임유진은 휴대폰으로 기사를 확인하며 눈 앞에 펼쳐진 변화가 너무 빠르게 느껴졌다.전시회 날까지만 해도 진세령은 만인의 주목을 받던 여배우였는데 지금은 핍박에 못 이겨 연예계를 은퇴했다.“진세령 기사 봐?”강지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울렸다.“마침 보게 됐는데 실검 1위야.”임유진이 대답했다.“누나가 용서 안 하고 싶댔잖아. 걔 때문에 누나가 잃었던 모든 걸 내가 대신 되돌려놓을 거야.”강지혁은 말하면서 실검에 뜬 진세령의 은퇴 선언을 보더니 피식 웃었다.“진세령, 위풍당당하게 은퇴하고 싶어? 절대 안 되지.”무슨 뜻이지?임유진이 멍하니 넋 놓고 있을 때 휴대폰이 갑자기 울렸는데 한지영한테 걸려온 전화였다.통화버튼을 누르자 한지영의 초조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유진아, 기사 봤어? 진세령 은퇴한대!”“응, 봤어.”임유진이 대답했다.“근데 걔도 참 뻔뻔스럽다. 분명 누군가가 연예계에서 매장시키고 있는 건데 결론은 뭐? 부모님이 연세가 들어서 집에 돌
강지혁은 강현수를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사랑하는 사람은 나야. 네가 아무리 나보다 더 빨리 만났다고 해도 바뀌는 건 없어. 내가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아도 임유진은 날 사랑할 수밖에 없고 날 사랑해야만 하며 내 곁에 있어야만 해.”그는 말을 마친 후 갑자기 임유진의 턱을 덥석 잡았다. 그러고는 임유진이 무슨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곧바로 얼굴을 가까이하며 그녀의 입술 위에 자신의 입술을 포갰다.임유진은 바로 코앞에서 보이는 그의 얼굴과 입술이 맞닿는 감촉에 깜짝 놀라 순간 머리가 제대로 돌아가지 않았다.강지혁이 먼저 입을 맞춰왔다. 그것도 강현수와 경호원들 앞에서 말이다.이렇게 사람이 많은 곳에서 스킨십하는 걸 그녀는 좋아하지도 않고 굳이 말하자면 불편해하는 편이었는데 강지혁을 밀어낼 수가 없었다.강지혁이 지금 무슨 이유로 그녀에게 키스한 건지는 몰라도 5년 만에 처음으로 그녀에게 먼저 다가와 키스하는 거라 그녀는 그의 입술을 거절할 수가 없었다.임유진은 어느새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강지혁과의 키스에 심취해 있었다.강지혁은 아마 모를 것이다. 그녀가 그를 얼마나 사랑하는지. 그리고 아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했을 때 그녀의 심장이 얼마나 아팠는지.강지혁이 그런 말을 하는 게 기억을 잃었기 때문이라는 걸 잘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아팠다.그에게 냉랭한 말을 들었다는 이유 때문도 있고 당시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졌을 때 그가 얼마나 고통스러웠을지 눈앞에 선해 그것 또한 마음이 아팠다.그녀는 적어도 절벽에서 떨어진 후 병원에서 깨어난 순간 모든 걸 다 잊어버린 상태라 아예 고통의 감정 같은 게 없었지만 강지혁은 최면을 받기 전까지 계속 고통에 시달렸어야만 했을 테니까.죽음은 늘 그렇다. 항상 살아있는 사람이 더 괴로운 게 바로 죽음이었다.강지혁은 그녀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했기에 지금 이렇게 그녀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말을 내뱉게 된 것이다.강현수는 주먹을 꽉 말아쥔 채 눈 앞에 펼쳐진 광경을 바라보았다. 익숙한 광경이었다
임유진은 강지혁이 혹시 오해라도 할까 봐 괜히 심장이 철렁했다.“마침 잘 왔네. 네가 한번 말해봐. 너 그때 분명히 나한테 유진이를 더 이상 사랑하지 않는다고 했어. 안 그래, 강지혁?”강현수가 조금도 당황하지 않은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리고 강지혁은 그의 시선을 받으며 입을 꾹 닫은 채로 가만히 있었다.갑작스러운 대치상황에 임유진은 서둘러 팔을 빼기 위해 버둥거렸다. 하지만 강현수가 너무나도 꽉 잡고 있는 바람에 도저히 팔을 뺄 수가 없었다.현이는 무서운 분위기에 많이 놀란 건지 창백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꼭 잡은 채 그녀의 옆에 딱 붙어 있었다.그때 강지혁이 한쪽 입꼬리를 위로 올리더니 이내 피식 웃었다.“맞아, 그랬지. 그런데 그게 뭐?”그는 발걸음을 옮기며 말을 하더니 이내 임유진을 잡고 있던 강현수의 손목을 억세게 잡았다.“내가 네 앞에서 뭐라고 했던 임유진이 내 아내라는 사실은 바뀌지 않아. 내가 놓지 않는 한 임유진은 어디도 못 가.”“만약 유진이가 떠나겠다고 하면 그게 아무리 너라도 막을 권리는 없어!”강현수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만약 임유진이 떠나겠다고 하면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그녀를 도울 것이다.소중한 이를 강지혁에게 보냈던 건 강지혁이 그녀를 행복하게 해줄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그런데 강지혁은 지난번에 봤을 때도 그렇고 지금도 그렇고 여전히 임유진을 사랑하는 것처럼은 보이지 않았다.만약 강지혁이 정말 임유진을 마음속에서 지운 거라면 더 이상 임유진을 그의 옆에 둘 수 없다.“내가 막을 수 있을지 없을지는 직접 시험해보면 되겠네.”강지혁은 강현수를 향해 차가운 말을 내뱉고는 이내 뒤에 있는 기사에게 지시를 내렸다.“애를 집 안으로 데려가.”기사는 그 말에 강선현을 안으려는 듯 앞으로 다가갔다.“아가씨, 이리로 오세요.”하지만 현이는 떠날 생각이 없는 듯 임유진의 손을 꽉 잡은 채 움직이려고 하지 않았다.이에 임유진이 아이를 설득했다.“우리 현이 착하지. 현수 삼촌이랑 할 얘기가 있
강현수는 아이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고는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우고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있었는데 왜 5년간 아무런 소식도 주지 않은 거야? 난 정말 네가 죽은 줄 알았어. 네 장례식에 참가했을 때 내가 얼마나 고통스러웠는지 알아? 내가 어떤 기분이었는지 아냐고.”강현수는 당시 너무나도 고통스러운 나머지 차라리 그녀가 떨어졌던 절벽에서 투신할까도 생각했었다.“미안해요. 의도치 않게 걱정을 끼쳤네요.”임유진이 말했다.그녀를 바라보는 강현수의 두 눈은 이미 잔뜩 빨개져 있었다.“아니야. 살아있어서 다행이야. 정말... 너무 다행이야.”강현수는 말을 하면서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그녀와 닿으려고 했다. 임유진이 정말 살아있는 게 맞다는 것을, 그의 환각이나 상상이 아니라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다.하지만 그녀에게 닿기도 전에 임유진이 몸을 살짝 옆으로 틀며 그의 손길을 피했다.이에 강현수의 손이 허공에서 움찔하고 멈췄다.그녀의 눈동자에 어린 명백한 거절이 그의 가슴을 아프게 했다.강현수는 조금 쓴웃음을 지으며 물었다.“강지혁 때문이야?”“네.”임유진이 답했다.“계속해서 나한테 말 편히 하지 않는 것도 강지혁 때문이고?”“나는 이미 결혼한 사람이고 나는 여전히 혁이를 사랑하고 있어요.”강현수는 그 말에 허탈하고도 조금 슬픈 웃음을 터트렸다.“5년이야. 5년 동안 아무런 소식도 주지 않았으면서, 강지혁 보러 찾아오지도 않았으면서 여전히 강지혁을 사랑한다고? 정말 사랑했으면 더 빨리 돌아와야 하는 거 아니야?”임유진은 강현수를 빤히 바라보다 이내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돌아오지 못했던 이유가 있었어요. 그리고 몇 년이 지났든 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혁이고 내가 다시 돌아와야 한다면 그것 또한 혁이 옆이에요. 현수 씨 말대로 5년이나 지났어요. 그러니까 이제는 날 잊어버리고 나한테 시간이든 뭐든 쓰지 말아줘요. 그럴 가치고 그럴 필요도 없으니까.”강현수의 눈에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가치가 있는지 없는지, 필요가 있는지 없는지는 내
임유진은 기억이 돌아온 후 한지영과의 통화에서 그녀가 죽은 후 강현수가 한동안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술을 진탕 마시고 또 허구한 날 그녀의 무덤 앞으로 가 무릎을 꿇은 채 통곡했다던 기사가 났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그리고 그 뒤로 한동안 S 시가 아닌 해외로만 계속 돌고 있었다는 얘기도 말이다.강현수는 목석처럼 차에 기댄 채 계속해서 기다리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5년간 줄곧 꿈속에서만 또는 정신없이 취해있어야만 간신히 보이던 이의 모습이 이렇게 현실감 없이 눈앞에 나타났다.강현수는 순간 하마터면 다리의 힘이 다 풀릴 뻔했다.그녀다. 그녀가 살아있었다. 이한의 말대로 임유진은 정말 살아있었다.“유진아...”잔뜩 매인 목소리가 강현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강현수가 임유진 쪽으로 뛰어갔다.강현수의 마음은 임유진을 사랑했던 만큼 요동쳤고 또 몸은 그녀를 그리워했던 만큼 흥분이 일었다.임유진의 바로 앞까지 당도했을 때 갑자기 아래쪽에서 웬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이 아저씨 누구야?”강현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숙이다 그제야 임유진의 곁에 서 있는 현이를 발견했다. 눈빛이 똘망하고 예쁜 것이 임유진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이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이 아이가 임유진의 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당시 뱄던 세쌍둥이 중의 한 명이 틀림없었다.‘선율이만 살아남은 게 아니었구나.’“나는...”강현수는 무릎을 구부리고 현이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는 강현수 삼촌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강선현이에요. 원래는 임현이었고요. 현이라고 불러주세요.”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강현수는 현이를 보면서 문득 어린 시절의 임유진이 떠올랐다. 그날 우거진 풀숲에서 그를 구해주고 또 산 아래까지 그를 업어줬던 용감한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말이다.그때의 기억은 강현수가 한평생 놓
이경빈은 탁유미 사건이 뒤집히면 회사가 타격을 입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탁유미를 위해 당시의 사건을 뒤집어주었다.“이경빈 씨 나름의 속죄네요. 그 뒤로 언니 찾아온 적은 있어요?”“네. 그런데 내가 보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걸 아니까 직접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횟수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탁유미는 시선을 돌려 현이와 함께 놀고 있는 윤이를 바라보았다.“오히려 이경빈보다 더 많이 찾아온 건 이경빈의 부모님이죠. 윤이를 집에 들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찾아왔었어요.”“그걸 언니가 거절했고요?”만약 윤이를 보냈다면 지금쯤 탁윤이 아니라 이윤으로 살고 있었을 테니 거절한 건 분명해 보였다.“윤이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때 이경빈이 하면 안 되는 말을 한 뒤로 윤이는 이경빈에게 줄곧 마음을 닫고 있는 상태예요. 이경빈은 어차피 어린애라 몇 번 달래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될 문제인가요? 아이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분위기 파악을 잘하고 또 섬세하다는 걸 몰랐던 거죠.”“그럼 언니는 어때요? 언니는 이경빈을 용서할 수 있어요?”임유진이 물었다.사실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이경빈에 관한 소식을 검색해 보았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경빈은 결혼은 물론이고 그 어떤 스캔들도 없었다.아무래도 탁유미의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리는 듯해 보였다.“이경빈이 한 짓은 이미 용서했어요. 계속해서 과거의 일을 붙잡아두고 있어봤자 감정 낭비하는 건 나일 테니까요. 그런데 다시 합치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 사이는 이미 5년 전에 모든 게 다 끝이 났어요.”탁유미가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마치 그로 인해 겪었던 다양한 감정들을 이미 말끔히 지운 사람처럼 말이다.임유진은 탁유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 정말 잘된 일인지 몰라 생각이 복잡했다.한때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공수진의 개입으로 한평생 함께할 수 없는 두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임유진은 딸을 데리
윤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서둘러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윤이는 여전히 예전의 그 귀여운 윤이었다.강선율은 유치원에 가야 했기에 임유진은 오늘 강선현만 데리고 나왔다. 현이와 윤이는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 듯했다.그런데 둘이서 잘 얘기하며 놀던 중에 현이가 윤이의 귀에 꽂혀있는 보청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더니 곧장 보청기를 빼버렸고 그 탓에 하마터면 보청기가 물컵 안에 떨어질 뻔했다.임유진을 그걸 보고는 엄한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그러자 현이가 눈을 깜빡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이거 중요한 거야?”“응, 이거 없으면 소리를 못 들어. 그래서 이걸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해.”탁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해주었다.윤이는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장애인을 보는지 이제는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상 일반인과 다를 거 하나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키득키득하며 대놓고 조롱의 시선을 보내는 아이들이 존재했다.“우와! 이 보청기 대단하다. 이거 덕분에 오빠가 현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거잖아. 정말 잘 됐다! 오빠, 현이가 나중에 오빠를 위해서 피아노 연주해줄게. 현이 피아노 엄청 잘 쳐!”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윤이에게 말했다.만약 이곳에 피아노가 있었으면 아마 이런 말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자기 솜씨를 뽐내러 건반을 두드렸을 것이다.탁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현이를 조금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현이는 진심으로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청력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일까, 윤이는 현이의 말과 미소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 현이가 쳐주는 피아노 연주 꼭 들을게.”사실
지난 5년간 그는 매일같이 후회했다. 그때 임유진과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를 자기 스스로 놓쳐버렸던 그였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손으로 그녀를 강지혁에게 내어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그리고 그 때문에 임유진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만약 그때 억지로라도 그녀를 곁에 두었으면 어쩌면 그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차량이 강씨 저택 앞에 도착했다.강현수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유진이 보러 온 거니까 비켜.”강현수를 알아본 경호 실장이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사모님께서는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사모님과 만나 뵙기를 원하시면 후일 따로 약속을 잡고 오시죠.”강현수는 그 말에 떠나는 것이 아닌 차에 기댄 채 임유진이 오기를 기다렸다.몇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몇 시간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었으니까.경호원들은 고집스러운 그의 행동에 별다른 얘기는 못 하고 그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강지혁이 대단하다고 한들 강현수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으니까.그시각, 임유진은 현이와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안에 있었다.사실 외출하겠다고 했을 때 집사가 차량을 준비해두겠다고 했지만 임유진은 오랜만에 돌아오기도 했고 또 딸에게 S 시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집사에게 지하철로 가겠다고 했다. 이곳은 그녀와 강지혁이 만나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했던 곳이니까.“엄마, 우리 다음에 또 윤이 오빠 보러 가자. 그때는 율이 오빠도 같이!”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탁윤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그래, 다음에는 율이도 같이 가자. 유미 이모랑 윤이가 엄청 좋아할 거야.”두 사람이 오늘 외출한 이유는 탁유미 때문이었다.탁유미는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로 전과 같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건 무리라 윤이 초등학교 근처에 작은 분식점을 차렸다.그 덕에 윤이는 하교하고 나면 바로 분식집에 들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