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또 그 꿈이었다.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꿈.다만 이번엔 남자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았고 임유진은 곧바로 잠에서 깼다!시선을 올리자 익숙한 그 눈빛과 마주했다. 강지혁은 한없이 짙은 두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칠흑 같은 깊은 바다처럼 아득했다.“꿈꿨어?”강지혁이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그녀에게 물었는데 목소리가 왠지 희미하게 들렸다.“응.”임유진이 머리를 끄덕이고 벽시계를 봤더니 어느덧 새벽 두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나 때문에 깼어?”“아니.”강지혁이 대답했다.“나도 마침 잠이 안 오더라고. 무슨 꿈을 꿨길래 안색이 이렇게 창백해?”임유진이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구하는 꿈을 꿨는데 그 남자아이가 강현수 같다고 말해도 될까?안 그래도 강지혁은 강현수가 그녀를 어릴 때 그 소녀로 착각한 일을 언짢게 생각하고 있는데 왜 지금 이런 꿈을 꾼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배여진이 어릴 때 강현수를 구해줬다고 말한 것 때문에 이런 꿈을 꾼 걸까?그런데 왜? 꿈속의 여자아이가 왜 꼭 임유진 본인처럼 느껴질까?“아니야, 아무것도.”임유진이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그냥 별 의미 없는 꿈이었어.”의미 없는 꿈? 강지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이마에 땀 엄청 많이 흘렸어.”강지혁은 말하면서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임유진은 그제야 이마에 땀이 난 걸 발견했다. 손과 등에도 온통 땀으로 흠뻑 젖었다.하지만 곧이어 강지혁의 손이 그녀의 이마에 멈췄다. 더는 아래로 내려가며 땀을 닦아주지 않았다.임유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왜 그래?”순간 강지혁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그는 힘겹게 손을 거두어들였다.임유진은 그의 손을 확 잡았는데 손이 엄청 세게 떨렸다.“너 손 왜 이렇게 떨어?”그녀는 묻자마자 발견했다. 강지혁은 손뿐만 아니라 전신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혁아, 왜 그래? 왜 이렇게 심하게 떠는 거야?”임유진이 초조하게
그녀의 말 한마디에 이토록 당혹감에 휩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좀 괜찮아?”임유진이 물었다. 그에게 안겨 있는 것이 얼마나 아픈지는 안중에 없다. 그녀가 걱정되는 건 오직 강지혁뿐이다.다행히 강지혁은 좀 전보다 떨림이 잦아들었다. 서서히 안정을 되찾은 듯싶다.“응, 많이 나아졌어...”그는 중얼거리며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었다.그녀는 강지혁을 극도의 불안감에 떨게 했다. 그녀의 영향력은 강지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한참 후에야 강지혁이 완전히 떨림을 멈췄다.그는 두 손을 놓아주며 임유진에게 말했다.“방금 누나 안고 있어서 많이 아팠지?”“괜찮아.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야. 나 사실 아픈 거 되게 잘 참아.”감옥에서 그런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고 나니 평범한 작은 고통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강지혁은 뭔가 생각난 듯 두 눈이 어두워졌다.“됐어, 나 이제 괜찮아.”“너 아까는 대체 왜 그런 거야?”그녀가 물었다. 연유를 모르니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아마도...”강지혁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악몽을 꾸다가 놀라서 깼거든. 그래서 몸이 세게 떨린 거야.”임유진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꿈을 꿀 때 강지혁도 꿈을 꾸고 있었다니.심지어 악몽 때문에 놀라서 온몸을 그토록 격하게 떨 줄 예상치도 못했다.“많이 무서운 꿈이었어?”그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아마도.”“아마도?”“깨고 나서 그 꿈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몸이 반응하고 격하게 떨린 것 같아.”그녀가 ‘현수야’라고 부를 때 강지혁에겐 악몽과도 다름없었다.꿈에서 강현수를 본 걸까? 왜 강현수에 관한 꿈을 꾸지? 그녀의 마음속에 강현수가 있다는 걸 의미할까?두 사람이 서로 알아보지 못하게 아무리 애써도, 배여진이 그의 소원대로 임유진의 신분을 대체했어도 이건 마치 그 어떤 굴레처럼 끊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도통 끊을 수가 없었다!“이제 고작 새벽 두 시야. 얼른 더 자.”강지혁이 말했다.“그럼 넌? 넌 안 자?”그녀가 초조하게 물
임유진은 계속 그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러운 말투로 읊조렸다.“우리 혁이 괜찮아. 악몽 안 꿀 거야. 누나가 지켜줄게.”강지혁은 한심해서 실소를 터트렸다.‘이 여자가 정말 나를 애 취급하나?’다만 신기하게도 마음속에 남아있던 두려운 느낌이 그녀의 다정한 말투와 제스처 속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잠이 솔솔 몰려왔다.‘날 지켜준다고? 누나가 항상 내 옆에 있으면 진짜 아무것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아...’강지혁도 자신이 금방 잠들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그의 고른 숨결을 느낀 임유진은 동작을 멈추고 나지막이 물었다.“혁아?”그는 깊이 잠들어서 그녀에게 대답하지 못했다.임유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강지혁은 잠드니 아까처럼 미간을 세게 구기지 않았다. 잠든 모습은 마치 천사처럼 순수하고 평온해 보였다.사람들 앞에서 보여준 그의 이미지와 완전 달랐다.또 혹은 그녀에게만 천사일지도...한편 그녀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에 관한 꿈을 제대로 알아내기 전까지 강지혁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의심만 살 테니까.배여진이 어릴 때 겪은 일을 그녀에게 말해서 그런 꿈을 꾼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적어도 이것만은 알아내야 한다!...배여진이란 여자가 강현수 옆에 나타난 사실이 곧장 언론매체에 의해 보도됐다.물론 강현수의 보호 아래 배여진의 배경을 캐내려는 기자는 없었고 또한 진짜 무언가를 캐냈다고 해도 감히 보도할 엄두가 안 났을 것이다!사람들은 그녀가 정말 강현수의 새 여친인지 추측에 나섰다.그중 대부분은 아닐 거라고 예상했다. 강현수는 그녀를 친구라고만 단정 지을 뿐 연인 사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배여진은 강현수의 전 여친들보다 외모가 한참 많이 달렸다.열심히 가꾸면 그럭저럭 봐줄 만 하지만 그건 오롯이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스킬이 좋기 때문이다!하여 한동안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배여진은 강현수의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이제 막 이혼한지라 너무 적극적으로 들이댈 순
다만 그의 눈빛은 배여진 너머로 다른 한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대체품이라... 도대체 누구야말로 대체품일까?한때 그 소녀의 어른이 된 모습을 수없이 상상했고 만났던 여자친구들도 어느 정도 그가 상상했던 모습과 비슷했었다.하지만 임유진을 본 순간 어릴 때 그 소녀와 너무 흡사했다.아쉽게도 그해 강현수를 구한 사람은 임유진이 아니라 현재 눈앞에 있는 배여진이다.배여진이 어릴 때부터 커온 사진도 쭉 봤는데 그녀가 8, 9살쯤 됐을 때 강현수의 기억 속 그 소녀와 확실히 비슷하긴 했다.다만 어른이 된 배여진은 강현수가 생각했던 그 소녀의 모습과 너무 달랐다. 오히려 임유진을 조금 닮아 있었는데 눈매와 턱이 유난히 비슷했다. 그래도 두 여자가 나란히 서 있으면 강현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임유진과 배여진의 분위기가 아예 달랐으니.“현수 씨?”배여진의 목소리에 강현수는 정신을 다잡고 그녀를 쳐다봤다.“넌 대체품이 아니야.”“그럼... 전에는 진짜 대체품을 찾았던 거예요? 아니면 언론매체들이 아무 말이나 해대는 건가요?”배여진이 일부러 순진한 척하며 물었다.마치 정말 단순히 궁금해서 그런 것처럼 말이다.다만 강현수처럼 연예계에서 형형색색의 사람들을 지켜봐 온 사람이 어찌 그녀의 진짜 속내를 모를까?시간은 정말 모든 걸 바꿀 수 있나 보다. 강현수는 속으로 저 자신을 비웃었다. 애초에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던 사람을 드디어 찾았는데 왜 정작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망감이 들까?정의감에 차 있던 그 소녀는, 그토록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그의 손을 잡고 단 한 번도 놓아주지 않던 그 소녀는 정말 시간이 흐르면서 돈에 매료되고 남들과 비교하지 못해 안달인 여자로 변한 걸까?강현수가 조사한 자료들, 배여진의 사진, 그리고 배여진이 그해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것까지... 강현수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너무 집착한 탓에, 그리워하고 기대가 큰 탓에 지금처럼 마음이 고인 물이 돼버린 걸까? 심지어 가끔은 여생에 무
어쩌면 그땐 배여진의 처지가 한없이 비참해지겠지.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미 이 길에 발을 들였으니 더 이상 고개를 돌릴 순 없다.뭐가 됐든 강현수를 꽉 잡고 있어야 한다. 그가 진실을 모르는 한 영원히 그녀의 가장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테니!...강지혁은 임유진과 함께 구치소로 왔다. 그녀는 드디어 허재명을 보았다.40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은 살짝 통통한 체구에 전혀 낯선 얼굴이었다. 그녀에겐 그저 낯선 이에 불과했는데 이 사람이 그녀를 그토록 비참하게 만들었다.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3년간 감방살이를 하지 않았을 테고 그 많은 고통을 겪지도 않았을 테고 여전히 앞날이 창창한 변호사 일을 하면서 평생을 사업에 몰두할 텐데!임유진은 원래 재판 전까지 허재명을 못 볼 줄 알았다. 상대가 해외로 도주했으니까.그런데 이렇게 빨리 구치소에서 이 남자를 볼 줄이야.그는 강지혁과 임유진을 본 순간 얼굴이 두려움으로 휩싸였다.곧이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털썩 무릎 꿇고 빌었다.“임유진 씨,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임유진 씨를 해쳤어요! 저 때문에 임유진 씨 인생을 망쳤어요. 법의 처벌을 달갑게 받을 테니 제발 저를 용서해 주세요!”임유진은 제 앞에 무릎 꿇은 이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이 낯선 남자는 그해 모질게 그녀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작 또 이렇게 쉽게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임유진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그의 이런 식의 사과를 거부했다.강지혁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왜 그래?”“나...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 여기 있는 게 불편해.”그녀의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그래.”강지혁은 말하며 그녀를 데리고 면회실에서 나왔다.바깥의 나무 그늘 아래에 걸어 나오고 나서야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해댔다. 자신을 해친 사람과의 만남이 이런 장면일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오늘 허재명을 보러 와서 많은 걸 물어보려 했는
강지혁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말했다.“그 사람도 널 해치고 잘 지내지 못했을 거야. 줄곧 해외에 있었는데 만약 이번에 선뜻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잡지도 못했을 거야. 국내에서 이 사건을 재조사한다는 걸 알고 직접 귀국해서 자수했어.”물론 허재명이 선뜻 자수한 데에는 강지혁이 적잖은 수단으로 상대를 자수하게 만들었다는 요소가 들어있다. 그는 당연히 임유진에게 이 말까지 하진 않았다.“잘 지내지 못해?”임유진이 피식 웃었다.“그 사람이 잘 못 지내면 내가 용서해줘야 해? 사람을 죽여놓고 돌아와서 죽은 자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웃기지도 않아! 내가 감방에서 안 죽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해 감방에서 죽었다면 지금 저 인간 앞에 서 있지도 못했을 거야!”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채찍처럼 강지혁의 심장을 후려쳤다. 그는 점점 숨이 가빠졌다.“그래서... 용서 안 하려고?”강지혁이 나지막이 물었다.“응. 날 모질게 해친 사람, 내게 그토록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영원히!”임유진은 말하면서 강지혁의 이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녀의 모든 정서가 한때 겪었던 고통 속에 잠겨 있었다.“대체 무슨 낯짝으로 내게 용서를 빌어? 뻔뻔스러워서! 무릎 꿇고 사과한다고 해결될 일이면 법은 왜 있는 건데? 난 절대 용서 안 해. 내 인생을 망친 자야!”“그만해!”강지혁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유진아, 제발 그만 얘기해. 그 사람 안 보고 싶으면 앞으로 영원히 보지 말자.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면 판결대로 처벌받게 해!”그러니까 제발 그만 얘기하라고...그녀가 진실을 다 알고 나면 방금 했던 말이 허재명을 겨냥한 게 아니라 바로 강지혁에게 하는 말이란 것도 알게 되겠지!그해 강지혁이 그녀에게 일말의 연민의 감정이라도 있었더라면 지금 같은 결과를 안 낳았을 것이다.임유진은 그의 품에 안겨 서럽게 흐느꼈다.“혁아, 인간의 본심은 왜 그렇게 악독할까? 어떻게 이럴 수가
“지혁 씨, 저는... 이미 지혁 씨가 요구한 대로 다 했어요.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허재명이 초조하게 말했다.강지혁은 짙은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해 임유진에게 죄명을 뒤집어씌운 주요 가해자 중 한 명인 허재명을!“말하지 말아야 하는 말은 영원히 입 밖에 내지 마. 그럼 목숨은 살려둘게.”허재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마음 같아선 귀국해서 자수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강지혁의 협박에 못 이겨 돌아왔을 뿐이다.해외로 도주했다고 해도 강지혁 같은 인물이 작심하고 찾아내려고 하면 절대 도망갈 길이 없다.“그럼 제 가족은...”허재명이 초조하게 물었다.“가족들이 네가 한 짓을 모르는 한 나도 그 사람들 안 건드려. 단!”강지혁이 문득 말을 멈추자 좀 전까지 한숨을 돌리던 허재명은 바짝 긴장했다.“그해 네가 유진이에게 어떤 고통을 안겨줬고 어떤 대가를 치르게 했으면 너도 똑같이, 아니 두 배로 갚아야 할 거야.”허재명이 황급히 해명하려 했지만 강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더는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허재명, 네 목숨을 살려둔 건 유진이에게 고마워해. 유진이는 네가 법의 처벌을 받길 원했어. 안 그랬다면 넌 지금 나랑 여기서 얘기할 기회도 없었을 거야.”허재명의 눈가에 공포가 스쳤다. 그는 상대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그리고 잘 기억해둬. 말하지 말아야 할 말은 절대 입 밖에 꺼내지 마. 안 그러면 감방살이로 끝나지 않을 거야. 가장 비참한 고통을 겪을 줄 알아!”말을 마친 강지혁은 면회실을 나섰다.허재명의 손바닥과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그는 잘 알고 있다. 강지혁 같은 사람이 누군가를 괴롭히려거든 천방백계의 수단으로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그가 감방에 갇혀있던, 해외에 도주해있던 절대 강지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강지혁의 분부를 따르는 것뿐이다.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그해 이 사건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언젠가는 이 사건을 위해 대가를
“어쩌다 여길 올 생각을 했어?”강지혁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어릴 때 이 산에 자주 와서 놀았거든!”임유진이 대답했다.“어른들이 위험하다고 우리더러 놀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몰래 달려와서 놀았어. 그땐 이 산에 있으면 내가 마치 탐험가가 된 기분이 들었어.”그에 반면 배여진은 이 산에 와서 노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애들이니까 다 그렇지 뭐.”강지혁이 대답했다.“그땐 이 산에서 꼭 무슨 비밀을 발견할 것 같았어. 어떤 보물이라던가, UFO라던가 또 혹은 타임슬립 같은 것 말이야. 나 많이 유치했지?”임유진이 말했다.어른들의 눈엔 이 언덕이 뒷산과 이어져 그리 크게 느껴지진 않겠지만 아이들 눈엔 여기가 마치 새로운 세상 같았다.“아니, 너무 귀여워.”강지혁이 말했다.“하지만 이젠 어른이 됐고 이 산도 고작 언덕일 뿐이야. 가자, 날이 곧 어두워질 거야. S 시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엄청 늦어질 걸.”임유진은 머리를 끄덕였지만 떠나기 전에 또다시 고개 돌려 그 언덕을 바라봤다.그 순간 그녀는 옆에 있는 강지혁이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고 눈가에 이상한 빛이 스쳐 지나간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진세령은 촬영장에서 나오자마자 한 무리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진세령 씨, 약혼자 소민준 씨의 전 여자친구 임유진 씨가 오늘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진세령은 대뜸 걸음을 멈추고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기자를 쳐다봤다.“뭐라고요?”기자는 재빨리 다시 한번 되물었다. 이 소식은 외부에서 아직 모른다. 기자가 법원에 지인이 있어 바로 획득한 것이다.임유진 사건의 재심은 매우 조용하게 진행되어 외부에서 전혀 모른다. 하여 이 기자에겐 단독 특보가 아닐 수 없다!기자는 흥분에 휩싸여 있었고 진세령은 낯빛이 확 돌변했다. 임유진이 정말 사건을 뒤집었다니!그녀는 기자들을 통해 허재명이란 이름을 들은 후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무려 3년 만에 듣는 이름이었다.법원은 허재명이 죄를 뒤집어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