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여진은 턱을 치켜들었다."솔직히 말하면 현수 씨가 나 그동안 많이 찾고 있었다는 거 알고 설렜어. 그리고 나 이제 이혼도 했고 이제는 자유롭게 내 행복을 찾아다녀도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 나 너랑 현수 씨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거 알아.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너를 나로 오해하기도 했었다는 얘기도 들었고. 하지만 결국 네가 아니라 나였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는 좀 주의해 줬으면 좋겠어."요즘 배여진은 항상 스타일리스트에게 코디와 메이크업을 받는다. 생긴 건 평범해도 꾸미면 연예인 버금가는 외모가 되어버려 그녀는 지금 자신감이 최고치에 달했다.그녀는 자신이 예쁘게 꾸미기만 한다면 강현수의 전 여자친구들에게 절대 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유진아, 난 네가 내 행복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만약 방해한다면 그때는 그게 아무리 사촌 동생이라도 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배여진은 하늘에서 굴러온 강현수라는 떡을 절대로 남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임유진은 지금 또다시 비슷한 꿈을 꾸고 있다.꿈속 남자아이 얼굴은 여전히 몽롱한 상태였고 꿈속에서 그녀는 상대방의 손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주고 있다. 두 사람은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 위로 올라가려고 애썼다.언덕은 너무 가팔랐고 발을 헛디디는 순간 죽지는 않겠지만 심한 부상을 입을 게 뻔했다.남자아이의 몸은 힘을 다 소진한 듯 점점 떨리기 시작했고 여자아이는 끊임없이 그에게 힘내라고 외쳤다."나 절대 안 놓을 거니까, 너도 조금만 더 힘을 내. 내가... 내가 꼭 너를 저 위에까지 데리고 올라갈게!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정말 안 놓을 거야?"남자아이가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응, 안 놓을 거야."여자아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단호하게 대답했다.두 아이는 몇 번이나 더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덕에 끝내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제일 안전한 곳까지 끌어올렸다.안전하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두 사람은 바닥에 털썩 누워버렸다."내가 그랬지?
임유진은 두 눈을 번쩍 떴다. 또 그 꿈이었다. 어린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의 꿈.다만 이번엔 남자아이가 바닥에 주저앉았고 임유진은 곧바로 잠에서 깼다!시선을 올리자 익숙한 그 눈빛과 마주했다. 강지혁은 한없이 짙은 두 눈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그의 눈동자는 마치 칠흑 같은 깊은 바다처럼 아득했다.“꿈꿨어?”강지혁이 얇은 입술을 움직이며 그녀에게 물었는데 목소리가 왠지 희미하게 들렸다.“응.”임유진이 머리를 끄덕이고 벽시계를 봤더니 어느덧 새벽 두 시를 넘긴 시각이었다.“나 때문에 깼어?”“아니.”강지혁이 대답했다.“나도 마침 잠이 안 오더라고. 무슨 꿈을 꿨길래 안색이 이렇게 창백해?”임유진이 입을 열었지만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한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구하는 꿈을 꿨는데 그 남자아이가 강현수 같다고 말해도 될까?안 그래도 강지혁은 강현수가 그녀를 어릴 때 그 소녀로 착각한 일을 언짢게 생각하고 있는데 왜 지금 이런 꿈을 꾼 건지 이해되지 않았다. 배여진이 어릴 때 강현수를 구해줬다고 말한 것 때문에 이런 꿈을 꾼 걸까?그런데 왜? 꿈속의 여자아이가 왜 꼭 임유진 본인처럼 느껴질까?“아니야, 아무것도.”임유진이 가볍게 머리를 흔들었다.“그냥 별 의미 없는 꿈이었어.”의미 없는 꿈? 강지혁의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이마에 땀 엄청 많이 흘렸어.”강지혁은 말하면서 그녀의 이마를 닦아주었다.임유진은 그제야 이마에 땀이 난 걸 발견했다. 손과 등에도 온통 땀으로 흠뻑 젖었다.하지만 곧이어 강지혁의 손이 그녀의 이마에 멈췄다. 더는 아래로 내려가며 땀을 닦아주지 않았다.임유진은 놀란 기색이 역력했다.“왜 그래?”순간 강지혁의 안색이 확 일그러졌다. 그는 힘겹게 손을 거두어들였다.임유진은 그의 손을 확 잡았는데 손이 엄청 세게 떨렸다.“너 손 왜 이렇게 떨어?”그녀는 묻자마자 발견했다. 강지혁은 손뿐만 아니라 전신이 격하게 떨리고 있었다.“혁아, 왜 그래? 왜 이렇게 심하게 떠는 거야?”임유진이 초조하게
그녀의 말 한마디에 이토록 당혹감에 휩싸일 줄은 꿈에도 몰랐다.“좀 괜찮아?”임유진이 물었다. 그에게 안겨 있는 것이 얼마나 아픈지는 안중에 없다. 그녀가 걱정되는 건 오직 강지혁뿐이다.다행히 강지혁은 좀 전보다 떨림이 잦아들었다. 서서히 안정을 되찾은 듯싶다.“응, 많이 나아졌어...”그는 중얼거리며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었다.그녀는 강지혁을 극도의 불안감에 떨게 했다. 그녀의 영향력은 강지혁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컸다.한참 후에야 강지혁이 완전히 떨림을 멈췄다.그는 두 손을 놓아주며 임유진에게 말했다.“방금 누나 안고 있어서 많이 아팠지?”“괜찮아. 그렇게 아픈 것도 아니야. 나 사실 아픈 거 되게 잘 참아.”감옥에서 그런 비인간적인 고통을 겪고 나니 평범한 작은 고통은 그녀에게 아무것도 아니었다.강지혁은 뭔가 생각난 듯 두 눈이 어두워졌다.“됐어, 나 이제 괜찮아.”“너 아까는 대체 왜 그런 거야?”그녀가 물었다. 연유를 모르니 내내 마음이 불안했다.“아마도...”강지혁이 머뭇거리다가 말을 이었다.“악몽을 꾸다가 놀라서 깼거든. 그래서 몸이 세게 떨린 거야.”임유진은 놀란 듯 두 눈을 크게 떴다. 그녀가 꿈을 꿀 때 강지혁도 꿈을 꾸고 있었다니.심지어 악몽 때문에 놀라서 온몸을 그토록 격하게 떨 줄 예상치도 못했다.“많이 무서운 꿈이었어?”그녀가 의아한 듯 물었다.“아마도.”“아마도?”“깨고 나서 그 꿈이 기억나지 않았지만 몸이 반응하고 격하게 떨린 것 같아.”그녀가 ‘현수야’라고 부를 때 강지혁에겐 악몽과도 다름없었다.꿈에서 강현수를 본 걸까? 왜 강현수에 관한 꿈을 꾸지? 그녀의 마음속에 강현수가 있다는 걸 의미할까?두 사람이 서로 알아보지 못하게 아무리 애써도, 배여진이 그의 소원대로 임유진의 신분을 대체했어도 이건 마치 그 어떤 굴레처럼 끊으려고 안간힘을 써도 도통 끊을 수가 없었다!“이제 고작 새벽 두 시야. 얼른 더 자.”강지혁이 말했다.“그럼 넌? 넌 안 자?”그녀가 초조하게 물
임유진은 계속 그의 가슴을 가볍게 두드리며 부드러운 말투로 읊조렸다.“우리 혁이 괜찮아. 악몽 안 꿀 거야. 누나가 지켜줄게.”강지혁은 한심해서 실소를 터트렸다.‘이 여자가 정말 나를 애 취급하나?’다만 신기하게도 마음속에 남아있던 두려운 느낌이 그녀의 다정한 말투와 제스처 속에서 조금씩 사라지고 잠이 솔솔 몰려왔다.‘날 지켜준다고? 누나가 항상 내 옆에 있으면 진짜 아무것도 두렵지 않을 것 같아...’강지혁도 자신이 금방 잠들 거라곤 생각지 못했다.그의 고른 숨결을 느낀 임유진은 동작을 멈추고 나지막이 물었다.“혁아?”그는 깊이 잠들어서 그녀에게 대답하지 못했다.임유진은 그제야 마음이 놓였다. 강지혁은 잠드니 아까처럼 미간을 세게 구기지 않았다. 잠든 모습은 마치 천사처럼 순수하고 평온해 보였다.사람들 앞에서 보여준 그의 이미지와 완전 달랐다.또 혹은 그녀에게만 천사일지도...한편 그녀는 남자아이와 여자아이에 관한 꿈을 제대로 알아내기 전까지 강지혁에게 말해주고 싶지 않았다. 오히려 그의 의심만 살 테니까.배여진이 어릴 때 겪은 일을 그녀에게 말해서 그런 꿈을 꾼 건지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적어도 이것만은 알아내야 한다!...배여진이란 여자가 강현수 옆에 나타난 사실이 곧장 언론매체에 의해 보도됐다.물론 강현수의 보호 아래 배여진의 배경을 캐내려는 기자는 없었고 또한 진짜 무언가를 캐냈다고 해도 감히 보도할 엄두가 안 났을 것이다!사람들은 그녀가 정말 강현수의 새 여친인지 추측에 나섰다.그중 대부분은 아닐 거라고 예상했다. 강현수는 그녀를 친구라고만 단정 지을 뿐 연인 사이라고 인정하지 않았으니까. 그리고 또 한 가지, 배여진은 강현수의 전 여친들보다 외모가 한참 많이 달렸다.열심히 가꾸면 그럭저럭 봐줄 만 하지만 그건 오롯이 메이크업 아티스트의 스킬이 좋기 때문이다!하여 한동안 온갖 추측이 난무했다.배여진은 강현수의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 안달이 났지만 이제 막 이혼한지라 너무 적극적으로 들이댈 순
다만 그의 눈빛은 배여진 너머로 다른 한 사람을 보는 것만 같았다. 대체품이라... 도대체 누구야말로 대체품일까?한때 그 소녀의 어른이 된 모습을 수없이 상상했고 만났던 여자친구들도 어느 정도 그가 상상했던 모습과 비슷했었다.하지만 임유진을 본 순간 어릴 때 그 소녀와 너무 흡사했다.아쉽게도 그해 강현수를 구한 사람은 임유진이 아니라 현재 눈앞에 있는 배여진이다.배여진이 어릴 때부터 커온 사진도 쭉 봤는데 그녀가 8, 9살쯤 됐을 때 강현수의 기억 속 그 소녀와 확실히 비슷하긴 했다.다만 어른이 된 배여진은 강현수가 생각했던 그 소녀의 모습과 너무 달랐다. 오히려 임유진을 조금 닮아 있었는데 눈매와 턱이 유난히 비슷했다. 그래도 두 여자가 나란히 서 있으면 강현수는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임유진과 배여진의 분위기가 아예 달랐으니.“현수 씨?”배여진의 목소리에 강현수는 정신을 다잡고 그녀를 쳐다봤다.“넌 대체품이 아니야.”“그럼... 전에는 진짜 대체품을 찾았던 거예요? 아니면 언론매체들이 아무 말이나 해대는 건가요?”배여진이 일부러 순진한 척하며 물었다.마치 정말 단순히 궁금해서 그런 것처럼 말이다.다만 강현수처럼 연예계에서 형형색색의 사람들을 지켜봐 온 사람이 어찌 그녀의 진짜 속내를 모를까?시간은 정말 모든 걸 바꿀 수 있나 보다. 강현수는 속으로 저 자신을 비웃었다. 애초에 그토록 애타게 그리워하던 사람을 드디어 찾았는데 왜 정작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실망감이 들까?정의감에 차 있던 그 소녀는, 그토록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꿋꿋이 그의 손을 잡고 단 한 번도 놓아주지 않던 그 소녀는 정말 시간이 흐르면서 돈에 매료되고 남들과 비교하지 못해 안달인 여자로 변한 걸까?강현수가 조사한 자료들, 배여진의 사진, 그리고 배여진이 그해 일을 똑똑히 기억하고 정확하게 말하는 것까지... 강현수는 이 현실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너무 집착한 탓에, 그리워하고 기대가 큰 탓에 지금처럼 마음이 고인 물이 돼버린 걸까? 심지어 가끔은 여생에 무
어쩌면 그땐 배여진의 처지가 한없이 비참해지겠지.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미 이 길에 발을 들였으니 더 이상 고개를 돌릴 순 없다.뭐가 됐든 강현수를 꽉 잡고 있어야 한다. 그가 진실을 모르는 한 영원히 그녀의 가장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테니!...강지혁은 임유진과 함께 구치소로 왔다. 그녀는 드디어 허재명을 보았다.40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은 살짝 통통한 체구에 전혀 낯선 얼굴이었다. 그녀에겐 그저 낯선 이에 불과했는데 이 사람이 그녀를 그토록 비참하게 만들었다.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3년간 감방살이를 하지 않았을 테고 그 많은 고통을 겪지도 않았을 테고 여전히 앞날이 창창한 변호사 일을 하면서 평생을 사업에 몰두할 텐데!임유진은 원래 재판 전까지 허재명을 못 볼 줄 알았다. 상대가 해외로 도주했으니까.그런데 이렇게 빨리 구치소에서 이 남자를 볼 줄이야.그는 강지혁과 임유진을 본 순간 얼굴이 두려움으로 휩싸였다.곧이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털썩 무릎 꿇고 빌었다.“임유진 씨,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임유진 씨를 해쳤어요! 저 때문에 임유진 씨 인생을 망쳤어요. 법의 처벌을 달갑게 받을 테니 제발 저를 용서해 주세요!”임유진은 제 앞에 무릎 꿇은 이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이 낯선 남자는 그해 모질게 그녀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작 또 이렇게 쉽게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임유진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그의 이런 식의 사과를 거부했다.강지혁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왜 그래?”“나...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 여기 있는 게 불편해.”그녀의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그래.”강지혁은 말하며 그녀를 데리고 면회실에서 나왔다.바깥의 나무 그늘 아래에 걸어 나오고 나서야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해댔다. 자신을 해친 사람과의 만남이 이런 장면일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오늘 허재명을 보러 와서 많은 걸 물어보려 했는
강지혁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말했다.“그 사람도 널 해치고 잘 지내지 못했을 거야. 줄곧 해외에 있었는데 만약 이번에 선뜻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잡지도 못했을 거야. 국내에서 이 사건을 재조사한다는 걸 알고 직접 귀국해서 자수했어.”물론 허재명이 선뜻 자수한 데에는 강지혁이 적잖은 수단으로 상대를 자수하게 만들었다는 요소가 들어있다. 그는 당연히 임유진에게 이 말까지 하진 않았다.“잘 지내지 못해?”임유진이 피식 웃었다.“그 사람이 잘 못 지내면 내가 용서해줘야 해? 사람을 죽여놓고 돌아와서 죽은 자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웃기지도 않아! 내가 감방에서 안 죽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해 감방에서 죽었다면 지금 저 인간 앞에 서 있지도 못했을 거야!”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채찍처럼 강지혁의 심장을 후려쳤다. 그는 점점 숨이 가빠졌다.“그래서... 용서 안 하려고?”강지혁이 나지막이 물었다.“응. 날 모질게 해친 사람, 내게 그토록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영원히!”임유진은 말하면서 강지혁의 이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녀의 모든 정서가 한때 겪었던 고통 속에 잠겨 있었다.“대체 무슨 낯짝으로 내게 용서를 빌어? 뻔뻔스러워서! 무릎 꿇고 사과한다고 해결될 일이면 법은 왜 있는 건데? 난 절대 용서 안 해. 내 인생을 망친 자야!”“그만해!”강지혁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유진아, 제발 그만 얘기해. 그 사람 안 보고 싶으면 앞으로 영원히 보지 말자.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면 판결대로 처벌받게 해!”그러니까 제발 그만 얘기하라고...그녀가 진실을 다 알고 나면 방금 했던 말이 허재명을 겨냥한 게 아니라 바로 강지혁에게 하는 말이란 것도 알게 되겠지!그해 강지혁이 그녀에게 일말의 연민의 감정이라도 있었더라면 지금 같은 결과를 안 낳았을 것이다.임유진은 그의 품에 안겨 서럽게 흐느꼈다.“혁아, 인간의 본심은 왜 그렇게 악독할까? 어떻게 이럴 수가
“지혁 씨, 저는... 이미 지혁 씨가 요구한 대로 다 했어요.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허재명이 초조하게 말했다.강지혁은 짙은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해 임유진에게 죄명을 뒤집어씌운 주요 가해자 중 한 명인 허재명을!“말하지 말아야 하는 말은 영원히 입 밖에 내지 마. 그럼 목숨은 살려둘게.”허재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마음 같아선 귀국해서 자수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강지혁의 협박에 못 이겨 돌아왔을 뿐이다.해외로 도주했다고 해도 강지혁 같은 인물이 작심하고 찾아내려고 하면 절대 도망갈 길이 없다.“그럼 제 가족은...”허재명이 초조하게 물었다.“가족들이 네가 한 짓을 모르는 한 나도 그 사람들 안 건드려. 단!”강지혁이 문득 말을 멈추자 좀 전까지 한숨을 돌리던 허재명은 바짝 긴장했다.“그해 네가 유진이에게 어떤 고통을 안겨줬고 어떤 대가를 치르게 했으면 너도 똑같이, 아니 두 배로 갚아야 할 거야.”허재명이 황급히 해명하려 했지만 강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더는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허재명, 네 목숨을 살려둔 건 유진이에게 고마워해. 유진이는 네가 법의 처벌을 받길 원했어. 안 그랬다면 넌 지금 나랑 여기서 얘기할 기회도 없었을 거야.”허재명의 눈가에 공포가 스쳤다. 그는 상대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그리고 잘 기억해둬. 말하지 말아야 할 말은 절대 입 밖에 꺼내지 마. 안 그러면 감방살이로 끝나지 않을 거야. 가장 비참한 고통을 겪을 줄 알아!”말을 마친 강지혁은 면회실을 나섰다.허재명의 손바닥과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그는 잘 알고 있다. 강지혁 같은 사람이 누군가를 괴롭히려거든 천방백계의 수단으로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그가 감방에 갇혀있던, 해외에 도주해있던 절대 강지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강지혁의 분부를 따르는 것뿐이다.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그해 이 사건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언젠가는 이 사건을 위해 대가를
임유진은 기억이 돌아온 후 한지영과의 통화에서 그녀가 죽은 후 강현수가 한동안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술을 진탕 마시고 또 허구한 날 그녀의 무덤 앞으로 가 무릎을 꿇은 채 통곡했다던 기사가 났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그리고 그 뒤로 한동안 S 시가 아닌 해외로만 계속 돌고 있었다는 얘기도 말이다.강현수는 목석처럼 차에 기댄 채 계속해서 기다리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5년간 줄곧 꿈속에서만 또는 정신없이 취해있어야만 간신히 보이던 이의 모습이 이렇게 현실감 없이 눈앞에 나타났다.강현수는 순간 하마터면 다리의 힘이 다 풀릴 뻔했다.그녀다. 그녀가 살아있었다. 이한의 말대로 임유진은 정말 살아있었다.“유진아...”잔뜩 매인 목소리가 강현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강현수가 임유진 쪽으로 뛰어갔다.강현수의 마음은 임유진을 사랑했던 만큼 요동쳤고 또 몸은 그녀를 그리워했던 만큼 흥분이 일었다.임유진의 바로 앞까지 당도했을 때 갑자기 아래쪽에서 웬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이 아저씨 누구야?”강현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숙이다 그제야 임유진의 곁에 서 있는 현이를 발견했다. 눈빛이 똘망하고 예쁜 것이 임유진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이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이 아이가 임유진의 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당시 뱄던 세쌍둥이 중의 한 명이 틀림없었다.‘선율이만 살아남은 게 아니었구나.’“나는...”강현수는 무릎을 구부리고 현이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는 강현수 삼촌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강선현이에요. 원래는 임현이었고요. 현이라고 불러주세요.”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강현수는 현이를 보면서 문득 어린 시절의 임유진이 떠올랐다. 그날 우거진 풀숲에서 그를 구해주고 또 산 아래까지 그를 업어줬던 용감한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말이다.그때의 기억은 강현수가 한평생 놓
이경빈은 탁유미 사건이 뒤집히면 회사가 타격을 입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탁유미를 위해 당시의 사건을 뒤집어주었다.“이경빈 씨 나름의 속죄네요. 그 뒤로 언니 찾아온 적은 있어요?”“네. 그런데 내가 보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걸 아니까 직접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횟수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탁유미는 시선을 돌려 현이와 함께 놀고 있는 윤이를 바라보았다.“오히려 이경빈보다 더 많이 찾아온 건 이경빈의 부모님이죠. 윤이를 집에 들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찾아왔었어요.”“그걸 언니가 거절했고요?”만약 윤이를 보냈다면 지금쯤 탁윤이 아니라 이윤으로 살고 있었을 테니 거절한 건 분명해 보였다.“윤이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때 이경빈이 하면 안 되는 말을 한 뒤로 윤이는 이경빈에게 줄곧 마음을 닫고 있는 상태예요. 이경빈은 어차피 어린애라 몇 번 달래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될 문제인가요? 아이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분위기 파악을 잘하고 또 섬세하다는 걸 몰랐던 거죠.”“그럼 언니는 어때요? 언니는 이경빈을 용서할 수 있어요?”임유진이 물었다.사실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이경빈에 관한 소식을 검색해 보았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경빈은 결혼은 물론이고 그 어떤 스캔들도 없었다.아무래도 탁유미의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리는 듯해 보였다.“이경빈이 한 짓은 이미 용서했어요. 계속해서 과거의 일을 붙잡아두고 있어봤자 감정 낭비하는 건 나일 테니까요. 그런데 다시 합치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 사이는 이미 5년 전에 모든 게 다 끝이 났어요.”탁유미가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마치 그로 인해 겪었던 다양한 감정들을 이미 말끔히 지운 사람처럼 말이다.임유진은 탁유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 정말 잘된 일인지 몰라 생각이 복잡했다.한때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공수진의 개입으로 한평생 함께할 수 없는 두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임유진은 딸을 데리
윤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서둘러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윤이는 여전히 예전의 그 귀여운 윤이었다.강선율은 유치원에 가야 했기에 임유진은 오늘 강선현만 데리고 나왔다. 현이와 윤이는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 듯했다.그런데 둘이서 잘 얘기하며 놀던 중에 현이가 윤이의 귀에 꽂혀있는 보청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더니 곧장 보청기를 빼버렸고 그 탓에 하마터면 보청기가 물컵 안에 떨어질 뻔했다.임유진을 그걸 보고는 엄한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그러자 현이가 눈을 깜빡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이거 중요한 거야?”“응, 이거 없으면 소리를 못 들어. 그래서 이걸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해.”탁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해주었다.윤이는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장애인을 보는지 이제는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상 일반인과 다를 거 하나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키득키득하며 대놓고 조롱의 시선을 보내는 아이들이 존재했다.“우와! 이 보청기 대단하다. 이거 덕분에 오빠가 현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거잖아. 정말 잘 됐다! 오빠, 현이가 나중에 오빠를 위해서 피아노 연주해줄게. 현이 피아노 엄청 잘 쳐!”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윤이에게 말했다.만약 이곳에 피아노가 있었으면 아마 이런 말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자기 솜씨를 뽐내러 건반을 두드렸을 것이다.탁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현이를 조금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현이는 진심으로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청력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일까, 윤이는 현이의 말과 미소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 현이가 쳐주는 피아노 연주 꼭 들을게.”사실
지난 5년간 그는 매일같이 후회했다. 그때 임유진과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를 자기 스스로 놓쳐버렸던 그였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손으로 그녀를 강지혁에게 내어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그리고 그 때문에 임유진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만약 그때 억지로라도 그녀를 곁에 두었으면 어쩌면 그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차량이 강씨 저택 앞에 도착했다.강현수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유진이 보러 온 거니까 비켜.”강현수를 알아본 경호 실장이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사모님께서는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사모님과 만나 뵙기를 원하시면 후일 따로 약속을 잡고 오시죠.”강현수는 그 말에 떠나는 것이 아닌 차에 기댄 채 임유진이 오기를 기다렸다.몇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몇 시간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었으니까.경호원들은 고집스러운 그의 행동에 별다른 얘기는 못 하고 그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강지혁이 대단하다고 한들 강현수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으니까.그시각, 임유진은 현이와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안에 있었다.사실 외출하겠다고 했을 때 집사가 차량을 준비해두겠다고 했지만 임유진은 오랜만에 돌아오기도 했고 또 딸에게 S 시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집사에게 지하철로 가겠다고 했다. 이곳은 그녀와 강지혁이 만나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했던 곳이니까.“엄마, 우리 다음에 또 윤이 오빠 보러 가자. 그때는 율이 오빠도 같이!”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탁윤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그래, 다음에는 율이도 같이 가자. 유미 이모랑 윤이가 엄청 좋아할 거야.”두 사람이 오늘 외출한 이유는 탁유미 때문이었다.탁유미는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로 전과 같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건 무리라 윤이 초등학교 근처에 작은 분식점을 차렸다.그 덕에 윤이는 하교하고 나면 바로 분식집에 들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