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쩌면 그땐 배여진의 처지가 한없이 비참해지겠지.그녀는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지만 이미 이 길에 발을 들였으니 더 이상 고개를 돌릴 순 없다.뭐가 됐든 강현수를 꽉 잡고 있어야 한다. 그가 진실을 모르는 한 영원히 그녀의 가장 든든한 뒷배가 되어줄 테니!...강지혁은 임유진과 함께 구치소로 왔다. 그녀는 드디어 허재명을 보았다.40대로 보이는 중년 남성은 살짝 통통한 체구에 전혀 낯선 얼굴이었다. 그녀에겐 그저 낯선 이에 불과했는데 이 사람이 그녀를 그토록 비참하게 만들었다.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3년간 감방살이를 하지 않았을 테고 그 많은 고통을 겪지도 않았을 테고 여전히 앞날이 창창한 변호사 일을 하면서 평생을 사업에 몰두할 텐데!임유진은 원래 재판 전까지 허재명을 못 볼 줄 알았다. 상대가 해외로 도주했으니까.그런데 이렇게 빨리 구치소에서 이 남자를 볼 줄이야.그는 강지혁과 임유진을 본 순간 얼굴이 두려움으로 휩싸였다.곧이어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바닥에 털썩 무릎 꿇고 빌었다.“임유진 씨,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제가 임유진 씨를 해쳤어요! 저 때문에 임유진 씨 인생을 망쳤어요. 법의 처벌을 달갑게 받을 테니 제발 저를 용서해 주세요!”임유진은 제 앞에 무릎 꿇은 이 남자를 물끄러미 쳐다봤다.이 낯선 남자는 그해 모질게 그녀에게 누명을 뒤집어씌우고 그녀의 인생을 바꿔놓은 사람이다. 그런데 지금은 정작 또 이렇게 쉽게 그녀 앞에 무릎을 꿇고 있다.임유진은 뒤로 몇 걸음 물러서며 그의 이런 식의 사과를 거부했다.강지혁은 한 손으로 그녀의 허리를 감싸 안았다.“왜 그래?”“나... 밖에 나가서 바람 좀 쐬고 올게. 여기 있는 게 불편해.”그녀의 안색이 잔뜩 일그러졌다.“그래.”강지혁은 말하며 그녀를 데리고 면회실에서 나왔다.바깥의 나무 그늘 아래에 걸어 나오고 나서야 그녀는 심호흡을 몇 번 해댔다. 자신을 해친 사람과의 만남이 이런 장면일 줄은 꿈에도 예상치 못했다.오늘 허재명을 보러 와서 많은 걸 물어보려 했는
강지혁의 눈빛이 반짝였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고 말했다.“그 사람도 널 해치고 잘 지내지 못했을 거야. 줄곧 해외에 있었는데 만약 이번에 선뜻 돌아오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잡지도 못했을 거야. 국내에서 이 사건을 재조사한다는 걸 알고 직접 귀국해서 자수했어.”물론 허재명이 선뜻 자수한 데에는 강지혁이 적잖은 수단으로 상대를 자수하게 만들었다는 요소가 들어있다. 그는 당연히 임유진에게 이 말까지 하진 않았다.“잘 지내지 못해?”임유진이 피식 웃었다.“그 사람이 잘 못 지내면 내가 용서해줘야 해? 사람을 죽여놓고 돌아와서 죽은 자에게 용서를 구할 수 있다고 생각해? 웃기지도 않아! 내가 감방에서 안 죽었으니 망정이지 만약 그해 감방에서 죽었다면 지금 저 인간 앞에 서 있지도 못했을 거야!”그녀의 한마디 한마디가 채찍처럼 강지혁의 심장을 후려쳤다. 그는 점점 숨이 가빠졌다.“그래서... 용서 안 하려고?”강지혁이 나지막이 물었다.“응. 날 모질게 해친 사람, 내게 그토록 깊은 상처를 준 사람은 절대 용서할 수 없어, 영원히!”임유진은 말하면서 강지혁의 이상한 낌새를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그녀의 모든 정서가 한때 겪었던 고통 속에 잠겨 있었다.“대체 무슨 낯짝으로 내게 용서를 빌어? 뻔뻔스러워서! 무릎 꿇고 사과한다고 해결될 일이면 법은 왜 있는 건데? 난 절대 용서 안 해. 내 인생을 망친 자야!”“그만해!”강지혁이 그녀를 와락 끌어안았다.“유진아, 제발 그만 얘기해. 그 사람 안 보고 싶으면 앞으로 영원히 보지 말자. 마땅한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생각되면 판결대로 처벌받게 해!”그러니까 제발 그만 얘기하라고...그녀가 진실을 다 알고 나면 방금 했던 말이 허재명을 겨냥한 게 아니라 바로 강지혁에게 하는 말이란 것도 알게 되겠지!그해 강지혁이 그녀에게 일말의 연민의 감정이라도 있었더라면 지금 같은 결과를 안 낳았을 것이다.임유진은 그의 품에 안겨 서럽게 흐느꼈다.“혁아, 인간의 본심은 왜 그렇게 악독할까? 어떻게 이럴 수가
“지혁 씨, 저는... 이미 지혁 씨가 요구한 대로 다 했어요. 제발 한 번만 살려주세요!”허재명이 초조하게 말했다.강지혁은 짙은 눈빛으로 그를 쳐다봤다. 그해 임유진에게 죄명을 뒤집어씌운 주요 가해자 중 한 명인 허재명을!“말하지 말아야 하는 말은 영원히 입 밖에 내지 마. 그럼 목숨은 살려둘게.”허재명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그는 마음 같아선 귀국해서 자수할 생각이 아예 없었다. 강지혁의 협박에 못 이겨 돌아왔을 뿐이다.해외로 도주했다고 해도 강지혁 같은 인물이 작심하고 찾아내려고 하면 절대 도망갈 길이 없다.“그럼 제 가족은...”허재명이 초조하게 물었다.“가족들이 네가 한 짓을 모르는 한 나도 그 사람들 안 건드려. 단!”강지혁이 문득 말을 멈추자 좀 전까지 한숨을 돌리던 허재명은 바짝 긴장했다.“그해 네가 유진이에게 어떤 고통을 안겨줬고 어떤 대가를 치르게 했으면 너도 똑같이, 아니 두 배로 갚아야 할 거야.”허재명이 황급히 해명하려 했지만 강지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더는 그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허재명, 네 목숨을 살려둔 건 유진이에게 고마워해. 유진이는 네가 법의 처벌을 받길 원했어. 안 그랬다면 넌 지금 나랑 여기서 얘기할 기회도 없었을 거야.”허재명의 눈가에 공포가 스쳤다. 그는 상대의 말뜻을 바로 이해했다.“그리고 잘 기억해둬. 말하지 말아야 할 말은 절대 입 밖에 꺼내지 마. 안 그러면 감방살이로 끝나지 않을 거야. 가장 비참한 고통을 겪을 줄 알아!”말을 마친 강지혁은 면회실을 나섰다.허재명의 손바닥과 등은 식은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그는 잘 알고 있다. 강지혁 같은 사람이 누군가를 괴롭히려거든 천방백계의 수단으로 괴롭힐 수 있다는 것을. 그가 감방에 갇혀있던, 해외에 도주해있던 절대 강지혁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 없다.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강지혁의 분부를 따르는 것뿐이다.그리고... 문득 이런 생각이 들었다. 본인뿐만 아니라 그해 이 사건에 참여한 사람 모두가 언젠가는 이 사건을 위해 대가를
“어쩌다 여길 올 생각을 했어?”강지혁은 살짝 잠긴 목소리로 물었다.“어릴 때 이 산에 자주 와서 놀았거든!”임유진이 대답했다.“어른들이 위험하다고 우리더러 놀지 말라고 했는데 그래도 몰래 달려와서 놀았어. 그땐 이 산에 있으면 내가 마치 탐험가가 된 기분이 들었어.”그에 반면 배여진은 이 산에 와서 노는 걸 썩 좋아하지 않았다.“애들이니까 다 그렇지 뭐.”강지혁이 대답했다.“그땐 이 산에서 꼭 무슨 비밀을 발견할 것 같았어. 어떤 보물이라던가, UFO라던가 또 혹은 타임슬립 같은 것 말이야. 나 많이 유치했지?”임유진이 말했다.어른들의 눈엔 이 언덕이 뒷산과 이어져 그리 크게 느껴지진 않겠지만 아이들 눈엔 여기가 마치 새로운 세상 같았다.“아니, 너무 귀여워.”강지혁이 말했다.“하지만 이젠 어른이 됐고 이 산도 고작 언덕일 뿐이야. 가자, 날이 곧 어두워질 거야. S 시에 도착하려면 시간이 엄청 늦어질 걸.”임유진은 머리를 끄덕였지만 떠나기 전에 또다시 고개 돌려 그 언덕을 바라봤다.그 순간 그녀는 옆에 있는 강지혁이 핸들을 잡은 손에 힘을 꽉 주고 눈가에 이상한 빛이 스쳐 지나간 걸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진세령은 촬영장에서 나오자마자 한 무리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진세령 씨, 약혼자 소민준 씨의 전 여자친구 임유진 씨가 오늘 법원에서 무죄 판결을 받은 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진세령은 대뜸 걸음을 멈추고 못 믿겠다는 표정으로 기자를 쳐다봤다.“뭐라고요?”기자는 재빨리 다시 한번 되물었다. 이 소식은 외부에서 아직 모른다. 기자가 법원에 지인이 있어 바로 획득한 것이다.임유진 사건의 재심은 매우 조용하게 진행되어 외부에서 전혀 모른다. 하여 이 기자에겐 단독 특보가 아닐 수 없다!기자는 흥분에 휩싸여 있었고 진세령은 낯빛이 확 돌변했다. 임유진이 정말 사건을 뒤집었다니!그녀는 기자들을 통해 허재명이란 이름을 들은 후 표정이 더 일그러졌다. 무려 3년 만에 듣는 이름이었다.법원은 허재명이 죄를 뒤집어씌
“하지만 진짜 사건을 뒤집으려 해도 이렇게 빠를 순 없어요! 정상적인 절차대로 하자면...”진세령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진기태가 가로챘다.“임유진 뒤에 지금 누가 있는지 잊었어?”진세령은 문득 침묵했다. 임유진의 뒤엔 강지혁이 있다!정상적인 절차라는 건 일반인에게만 해당한다.“됐고, 아무튼 그때 가서 이 사건이 기사로 터진다 해도 우리 집안에서 겉치레 말은 해야 해. 이 일로 강씨 일가에 밉보일 순 없어. 명심해!”진기태가 딸에게 당부했다.진세령이 예쁘게 다듬은 네일은 휴대폰을 짓부술 것만 같았다.애초에 그녀는 언론매체 앞에서 수없이 임유진을 짓밟았다. 언니를 죽인 원흉이라며 동네방네 떠벌리고 다녔다.그런데 지금 아빠의 말은 그녀더러 임유진에게 공개 사과라도 하라는 뜻인데, 이 수모를 진세령이 겪을 수 있을까? 생각만 해도 창피한 일이다.“세령아, 듣고 있니?”진기태가 엄숙하게 되물었다.“우리 집안을 진흙탕 물에 끌어들이지 마. 우리 가문은 오랫동안 이어져 나가야 해.”진세령은 숨을 깊게 들이쉬고 나서야 대답했다.“알겠어요, 아빠!”통화를 마친 후 그녀는 휴대폰을 바닥에 내던졌다.이젠 결국 분노를 꾹 참고 대중들 앞에서 지난날 임유진에게 누명을 씌운 일에 대해 정중하게 사과해야 한다. 고개 숙여 반성하는 수밖에 없다....임유진은 손에 판결서를 들고 있지만 여전히 실감이 나지 않았다. 정말... 사건을 뒤집은 걸까? 한때 무거운 돌덩어리처럼 그녀의 머리를 짓누르던 죄명이, 목 졸라서 숨조차 안 쉬어지던 나날이, 평생 결백을 얻지 못할 것만 같던 어두운 삶이 이렇게 빨리 해결되다니?!판결서를 손에 쥐면 대성통곡할 줄 알았다. 결백을 얻는 것이 그녀에겐 너무나도 간절하고 집요한 바람이었으니까.하지만 정작 이 판결을 손에 쥐니 피로감만 휩싸였다. 이 죄명 때문에, 보이지 않는 족쇄 때문에 그녀는 너무 오랜 시간을 얽매여 있었다.이제 드디어 족쇄가 사라지자 온몸이 탈진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왜 그래? 안 기뻐?”강지혁
강지혁은 고개 숙여 제 어깨에 기댄 그녀를 바라봤다. 만약 진실을 전부 알게 돼도... 그를 만난 것이 최고의 행운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아마 아니겠지.임유진이 깊게 잠든 후 강지혁은 가볍게 몸을 움직이며 그녀를 안고 조심스럽게 침실로 돌아갔다. 그녀를 푹신한 침대에 내려준 후 손가락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유진아, 모든 걸 이쯤에서 끝내. 그래도 되겠지?”강지혁은 그녀 사건의 진실도 이쯤에서 끝내고 강현수에 관한 모든 과거도 이쯤에서 끝내고 싶었다.이 두 사건은 제발 더는 조사하지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었다!이것이야말로 제일 바람직한 일이니까....임유진이 사건을 뒤집은 일이 기자들 덕에 인터넷을 도배했고 한순간 장안의 화젯거리가 되었다.물론 그녀는 전에 앞날이 창창한 신인 변호사였다가 억울한 죄명을 씻고 결백을 얻었을 뿐, 포커스는 바로 임유진의 전 남친 소민준과 대스타 진세령에게 맞춰졌다.이 기사를 최초 보도한 기자가 진세령을 취재하러 갔지만 그녀는 사건을 뒤집은 일을 아예 모르고 있다가 나중에 다 알고 난 후에도 그렇다 할 입장 표명이 없었다!많은 사람들이 그녀의 인스타그램에 찾아가 디엠이나 댓글로 임유진이 소송을 뒤집은 것에 대해 무슨 생각이냐고 집요하게 캐물었다!심지어 누군가는 당시 진세령이 공개석상에서 임유진을 절대 용서치 않을 거라고, 인성 쓰레기에 역겹다는 등 말을 내뱉은 영상을 따와서 업로드하기도 했다.진세령은 공개사과문을 올리며 본인도 이제야 임유진이 누명을 썼다는 걸 알았다며 당시 했던 부당한 언론은 법의 오판 때문에 그런 거라고 책임을 떠밀었다. 임유진에게 공개로 사과할 의향도 있다고 했고 이어서 공개 사과 영상까지 하나 올렸는데 내용은 매우 간단했다. 진세령이 카메라에 대고 ‘유진아, 그때 너에게 했던 말들에 대해 사과할게.’라는 이 한마디만 남길 뿐 다른 건 아무것도 없었다.다들 그녀의 사과가 지나치게 간단한 거 아니냐며 말했고 누군가는 또 이런 분석까지 했다. 임유진이 억울하게 당한 거라면 진세령은
“내가 남이야? 임유진, 우린 평생 친구라고 했지! 앞으로 무슨 일 생기면 절대 나한테 숨기지 마. 내 친구에 관한 일을 뉴스로 알고 싶진 않단 말이야.”한지영이 말했다.“알았어.”임유진은 코끝이 찡했다.한지영은 늘 이랬다. 누군가를 진짜 친구로 여기면 온 마음을 다해 상대에게 잘해준다.다음날 둘은 만났고 한지영은 그제야 사건의 상세 내용을 알았다. 주모자 허재명에 관한 일까지 낱낱이 들었다.“진짜 생각지도 못했어. 본인이 연루될까 봐 이렇게 사람을 해친 거야?”한지영이 감개무량하게 말했다.“그래도 이젠 결백을 찾았으니 참 다행이야. 앞으로 어떻게 할 셈이야? 계획은 있어?”“아직.”임유진이 대답했다. 앞날에 대한 기대도 있지만 자꾸만 머뭇거리게 된다.“계속 변호사 할 생각이야?”한지영의 물음에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4년이나 손을 놓았는데 잘할 수 있을지 모르겠네. 이젠 그렇게 숙련되게 외웠던 법조문도 기억이 가물가물해.”“너 변호사 안 하기엔 너무 아까워. 어차피 지금 빨리 직장을 구해야 하는 것도 아니니 일단 법조문이나 사례부터 다시 숙지해. 임유진, 할 수 있다! 난 널 믿어.”한지영이 자신감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절친의 학습 능력은 늘 그녀를 탄복게 했다.임유진이 곰곰이 생각하다가 답했다.“하긴, 일단 공부를 시작해야지. 될지 안 될지는 시도해봐야 아는 거잖아.”간신히 되찾은 변호사 자격증이니 배로 소중히 여겨야 한다.“그럼 이따가 나랑 함께 서점 가자. 최신 법률 서적부터 사야겠어.”임유진이 말했다.“오케이!”한지영은 친구가 다시 일어서는 모습에 본인이 더 기뻐했다. 임유진이 다시 법학을 공부하는 건 두 손 들어 찬성하는 일이다.서점에 도착한 후 임유진은 법률 전문 서적 코너로 가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얼마 만에 오는 서점인지.감방에 갇히기 전까지 그녀는 이곳의 단골손님이라 한 달에 한두 번은 꼭꼭 다녔다. 법에 관한 책뿐만 아니라 일부 잡지도 즐겨 샀었다.요즘은 인터넷 독서가 일상화되었지만 그녀는
이 남자는 속사포로 말을 쏟아내며 진세령을 위해 변호했다. 아마도 진세령의 팬인 듯싶다.임유진은 미간을 살짝 구기고 방금 고른 두 책을 들고는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 결제했다. 결제를 마치고 한지영을 찾아갈 예정이었다.하지만 이 남자는 집요하게 그녀를 따라오며 쉴 새 없이 입을 떠벌렸다. 그녀더러 인터넷으로 진세령을 용서한다는 입장표명을 하라고 했고 심지어 휴대폰을 꺼내 그녀를 촬영하기 시작했다.화가 난 임유진은 미간이 더 세게 구겨졌다.“내 허락 없이 촬영하는 건 초상권침해에요!”“왜요? 찔리셨어요? 내가 내 폰으로 찍는다는데 당신이 뭔 상관이야. 왜 줄곧 진세령 씨 사과에 대해 아무런 회답도 안 해요? 뭔가 켕기는 거라도 있나 보죠. 설마 소민준 씨랑 다시 잘해보고 싶은 거예요?”그 남자는 마치 뜨거운 화제를 일부러 유인하듯 더 과장되게 말했다.임유진은 부랴부랴 결제를 마치고 한지영을 찾아가려 했지만 주변에 몰려든 사람이 점점 더 많아졌다.이 낯선 남자가 내뱉은 말로 그녀를 모르는 사람마저 이젠 그녀를 다 알게 됐다.진세령의 사과문이 요즘 인터넷을 뜨겁게 달구고 있으니까.“임유진이었네!”“그 소송을 뒤집었다는 임유진?”“불쌍해서 어떡해? 3년 동안 감방살이한 거 헛수고잖아. 재벌 남친도 잃었겠다, 이젠 죽을 마음마저 생겨나겠어.”“난 또 진세령 씨랑 한 남자를 뺏는 여자라길래 얼마나 예쁜가 했더니, 별것도 아니네.”주위 사람들은 수군거리기 시작했고 누군가는 휴대폰을 꺼내 그녀를 찍기 시작했다.사람들이 점점 많이 몰려들었다. 이때 한지영을 찾아가면 괜히 그녀까지 이 흙탕물에 들여놓는 꼴이 된다.생각을 마친 임유진은 서점 출구로 향했다. 일단 여길 빠져나간 후에 한지영에게 전화하기로 했다.다만 그녀가 서점 문 앞까지 달려가자 맨 먼저 일을 떠벌였던 그 남자가 안달이 나서 팔을 뻗어 그녀를 덥석 잡았다.“가긴 어딜 가요? 아직 내 물음에 대답 안 했잖아요! 진세령 씨와 소민준 씨 사이를 무너뜨릴 생각이에요? 아니면 또 차마 입밖에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