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 주위에 안 그래도 많은 사람들이 몰렸는데 이 외침과 함께 더 많은 인파가 몰려들었다.강현수는 미간을 살짝 찌푸리더니 그녀를 확 끌어당겨 옆에 세운 차에 함께 올라타 재빨리 출발했다.몰려든 사람들은 멀어져가는 차를 멍하니 쳐다보다가 임유진과 강현수가 또 무슨 사이인지 쉬쉬거리기 시작했다.차에 올라탄 그녀가 강현수에게 말했다.“아까는 고마웠어요. 이 근처 아무 데나 세워주면 돼요.”다만 강현수는 차를 세울 기미가 없었다.“대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낯선 사람이 저를 알아봐서 생긴 에피소드에요. 요즘 제가 소송을 뒤집고 진세령이 인터넷에 사과 영상을 올린 게 화제가 됐잖아요.”임유진이 말을 이었다.“차 좀 세워줄래요? 친구가 아직 서점에 있어요. 이따가 친구 다시 만나러 가야 해요!”강현수는 입술을 앙다물더니 결국 길옆에 주차했다.임유진이 차에서 내리려 할 때 그가 확 잡아당겼다.“여긴 서점과 300미터밖에 안 떨어져서 그 사람들이 또 쫓아와 유진 씨를 둘러쌀 수도 있어요. 그냥 친구분께 연락해서 이리로 온 다음에 다시 내려요.”그녀는 잠시 고민하다가 머리를 끄덕이곤 그에게 잡힌 팔을 물끄러미 쳐다봤다.강현수는 손을 움찔거리더니 이내 그녀를 놓아줬다. 임유진은 그제야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내 한지영에게 전화했다.“지영아, 나 방금 좀 귀찮은 일이 생겨서 서점 나왔어. 여기 서점 앞 금호 빌딩 쪽이야. 서점에서 300미터 걸어오면 돼...”한편 옆에 있는 강현수는 또다시 넋 놓은 채 그녀를 빤히 쳐다봤다.오늘 차를 타고 이 근처를 지나가다가 인파들 속에서 한눈에 그녀를 알아봤다. 그녀가 아무것도 안 하고 그저 사람들 속에 서 있기만 해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매번 그녀를 볼 때마다 두 눈과 심장과 온몸에 흐르는 혈액이 통제를 벗어날 것만 같았다.그녀야말로 자신이 찾던 그 소녀인 줄 알았는데, 모든 증거를 다 찾으면 더 이상 부정하지 못할 거로 여겼는데 증거를 찾을수록 타깃은 다른 사람을 향했다.그가 잘해줘야 하는 사람은
“그럼 넌 무슨 일을 하고 싶은데?”그때 강현수는 이렇게 물었다. 그에겐 모든 게 다 너무 쉽게 얻어졌으니 굳이 노력할 필요가 없었다.누군가는 태어날 때부터 모든 게 주어진 삶을 산다.게다가 일을 해야 한다는 건 그로써 단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은 문제였다.그런 문제를 자신보다 한두 살 어린 애가 이미 생각하고 있다니.“아직 결정 못 했어. 근데 난 정의로운 일을 하고 싶어. 나뿐만 아니라 내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전부 다 지켜주고 싶어.”그 소녀는 청량한 목소리로 이렇게 대답했다.정의?재벌가에 태어난 강현수는 어려서부터 보고 배운 교육이 이 세상엔 절대적인 정의가 없다는 것이었다. 소위 말하는 정의란 사람들이 저 자신을 속이기 위한 트릭일 뿐이다.다만 그녀가 이토록 진지한 눈빛으로 말하니 강현수는 차마 입밖에 말을 내뱉지 못했다.시간이 흘러 다시 그해 그 소녀를 찾았을 때 배여진은 딱히 하는 일도 없었고 두 눈에 정의감도 더는 찾아볼 수 없었다.그런데 임유진의 눈동자엔 정의감이 차 넘쳤다. 이 얼마나 아이러니한 일인가.“변호사 일을 다시 하고 싶은 이유가 본인뿐만 아니라 유진 씨가 좋아하는 사람들을 전부 다 지켜주고 싶어서인가요?”강현수가 물었다.임유진은 순간 머리가 지끈거리고 귓가에 앳된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네가 정의로운 일을 안 해도 난 널 지켜줄 수 있어!”“지금은 내가 널 지켜주고 있는 것 같은데. 혼자 일어설 수 있겠어?”머리가 또다시 지끈거리고 귓가에 누가 속삭이는지 말소리가 울려 퍼졌다.임유진의 머릿속에 파편처럼 부서진 조각들이 스쳐 지나갔다. 아무리 애써봐도 그 조각들이 맞춰지지 않았고 똑똑히 보이지도 않았다.“유진 씨, 왜 그래요?”초조한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들렸다.머리를 돌리자 또다시 희미한 얼굴의 그 소년이 스쳐 갔고 서서히 눈앞의 이 남자 얼굴과 겹쳐졌다.머리는 깨질 듯이 아프고... 그 소년은 대체 누구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똑똑히 지켜보려고 안간힘을 쓰다가... 떨리는 손으로 강현수의
“죄송해요!”그녀는 황급히 사과했다. 손목에 통증이 느껴지니 두통이 조금 나아지는 것 같았다.“왜 그렇게 내 얼굴을 만져요? 그 호칭은 왜 또 부르죠? 임유진 씨, 정말 나한테 아무 감정 없어요?”그는 임유진을 뚫어지게 쳐다봤다.순간 그녀의 새하얀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오해에요!”“오해?”그는 가볍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대체 어떤 오해길래 내 어릴 때 호칭을 그렇게 부르는 건지 설명 좀 해줄래요? 게다가 아까는 왜 또 내 얼굴까지 만졌어요?”임유진은 입술을 꼭 깨물고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다가 겨우 말을 이었다.“현수 씨가 생각하는 그런 거 아니에요. 앞으론 두 번 다시 이런 일 없을 거예요. 아까는 머리가 아파서 잠깐 현수 씨를 딴 사람으로 착각한 것 같아요.”“착각이요?”강현수가 나지막이 물었다.“그럼 ‘현수야’라는 호칭도 딴 사람으로 착각하고 부른 거예요?”“이 세상에 현수라는 이름이 강현수 씨 한 명뿐인 건 아니잖아요.”그녀가 반박했다.이때 마침 한지영이 근처에 도착했다. 임유진은 재빨리 강현수에게 말했다.“친구가 거의 다 왔어요. 이 손 놔요. 이만 내려야 해요.”강현수의 짙은 두 눈이 불타오를 듯 이글거렸다. 그는 임유진을 빤히 쳐다봤고 차 안에는 숨 막히는 긴장감이 감돌았다.강현수가 손을 놓아주자 임유진은 재빨리 차 문을 열고 안에서 뛰어내려 절친에게 손짓했다.“지영아, 나 여기!”한지영은 그녀의 목소리를 듣고 종종걸음으로 달려왔다. 가까이 오자 임유진의 옆에 있던 외제차가 시동을 걸고 앞으로 나갔는데 운전석에 앉은 남자를 보니... 강현수였다!“유진아, 너 방금 강현수 씨 차에 있었어?”한지영이 의아한 듯 물었다.“응.”임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근데 너 왜... 강현수 씨랑, 강현수 씨는 왜 갑자기 서점에 나타난 거야?”한지영은 잡지 코너로 간 사이에 대체 무슨 일을 놓쳤는지 몰라 어안이 벙벙했다.임유진은 좀 전에 겪은 일을 그녀에게 말해줬다. 한지영은 그녀를 쫓아오며 영상을
강지혁은 지금 핸드폰을 뚫어지게 보고 있다. 정확히는 강현수가 임유진의 손목을 잡고 차에 타는 사진을 말이다.해당 사진은 금방 인터넷에 올라왔고 사람들은 두 사람 사이를 의심하며 댓글에서 열띤 토론을 펼쳤다.고이준은 지금 싸늘한 얼굴로 핸드폰만 바라보는 자신의 대표를 보며 식은땀이 절로 흘렀다. 그러다 드디어 용기를 내 한마디를 건넸다."대표님... 저희 쪽 경호원이 미처 손을 쓰기도 전에 강현수 씨가 임유진 씨를 데려가셔서..."그의 시선은 사진에서 멀어질 줄을 몰랐고 핸드폰을 잡은 손에는 점점 더 힘이 들어갔다."이 사진 인터넷에 다시는 돌아다니지 않게 깔끔하게 처리해.""네, 바로 처리하겠습니다."고이준은 그의 분부가 떨어지자마자 고개를 숙인 후 빠르게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적막만 흐르는 사무실 안에서 강지혁은 여전히 사진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고 처음에는 임유진의 뒷모습만 바라보다 마지막에는 강현수가 잡고 있는 그녀의 손목으로 시선을 옮겼다.강현수가 그녀를 데리고 가는 장면은 어릴 적 그가 봤던 그림과 많이 닮아있었다.어린 시절 그는 엉겁결에 강현수의 화실로 들어갔고 거기서 소년과 소녀의 그림을 봤다.거기에는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숲을 거니는 그림도 있었고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업고 있는 그림도 있었다. 그 공간은 마치 강현수의 보물창고처럼 남의 시선이 닿지도 못하게 꽁꽁 감춰져 있었다.다만 그때의 그림 속에는 여자아이가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있었지만 지금 보는 사진 속에는 강현수가 임유진의 손을 잡고 있다. 마치 시간이 흘러 그 장면을 또다시 재연하기라고 하듯 말이다.두 사람의 인연의 끈은 정말 끊어낼 수 없는 것일까? 매번 놓치기만 하고 서로 알아보지도 못하는데, 두 사람은 그럼에도 여전히 이어져 있는 걸까?아니, 설령 그렇다고 해도 그래서는 안 된다. 강지혁이 어떻게 해서든 그사이를 갈라놓을 테니까.임유진은 그의 것이고 그만의 것이어야 한다.강씨 저택으로 돌아온 임유진은 침실 불을 켠 후 깜짝 놀랐다.강지혁이
"책 사러 서점에 갔다가 일이 좀 있었어. 그때 강현수 씨도 만났고."임유진은 굳이 강현수에 대해 숨기지 않았다. 다른 사람에게서 전해 들은 강지혁이 혹시라도 오해하는 건 싫었으니까.강지혁은 시선을 그녀에게 고정하고 물었다."그래서?""서점에서 누가 핸드폰으로 나를 따라오면서 미친 듯이 사진을 찍어댔어. 그 때문에 사람들의 이목도 많이 집중됐고, 그때 마침 강현수 씨가 거기를 지나다가 나를 구해준 거야. 차량은 서점 근처에 세워뒀고 지영이가 온 뒤에 나는 바로 내렸어."임유진은 마치 가해자가 진술하듯 오늘 있었던 일을 하나도 빠짐없이 얘기해주었다."혁아, 네가 괜한 오해는 안 했으면 좋겠어. 오늘 강현수 씨를 만난 건 그저 우연일 뿐이야."임유진이 만약 강현수에게 조금 이상한 감정이 생겼다고 한다면 그건 어디까지나 그녀가 자주 꾸는 이상한 꿈 때문일 뿐이다.강지혁은 말을 마친 임유진을 품에 꽉 끌어안았다."오해 안 해. 누나가 제일 사랑하는 사람은 바로 나니까. 그치?""응, 맞아."임유진은 그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으며 조금 서늘한 그의 체온을 느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혁이 너뿐이야. 다른 사람은 없어."그 말에 강지혁은 그녀를 더 꽉 껴안았다."유진아, 너는 다른 사람 사랑하면 안 돼. 네가 그러면 나는 아마 철저하게 무너질 거야.""그럴 리 없어."임유진은 예쁘게 웃더니 고개를 들어 그의 입술에 먼저 키스했다."이 세상에서 날 이렇게 많이 사랑해주는 사람은 너밖에 없을 거야.""응, 이 세상에서 널 이렇게 많이 사랑해주는 사람은 나밖에 없어."그는 그녀의 입술을 서서히 탐하기 시작했다.그녀의 사랑은 매번 확인해도 끝도 없이 모자라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이런 갈증은 아마 죽어서야만 끝이 나는 건 아닌지 싶다.하지만 그는 절대 강선우의 전철을 밟지 않을 것이다.강선우는 마지막에 죽음이라는 방식으로 사랑에서 벗어났지만, 그는 강선우가 아니고 마찬가지로 임유진도 그의 어머니가 아니다."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누군지
"그리고 나는 너만의 혁이야."강지혁은 조용히 읊조리더니 다시 한번 그녀의 입술을 탐했다.밖에서의 그는 차갑고 안하무인인 강지혁이지만 임유진 앞에서의 그는 그저 그녀의 사랑을 받고 싶은 그저 평범한 남자일 뿐이다.그는 이토록 그녀를 사랑하고 있고, 그녀를 사랑해서 자신을 감싸고 있는 모든 경계를 풀어버린 채 그녀의 발아래 무릎을 꿇었다.오직 자신과 똑같은 사랑을 얻기 위해서......배여진은 방금까지 있었던 인터넷 기사를 찾아 계속 이리저리 훑어봤다.그녀는 아까 강현수가 임유진의 손을 끌고 가는 사진을 본 후부터 기분이 몹시 언짢아진 상태이다.강현수는 자신을 구해준 여자를 그녀로 알고 있는데 왜 사람들 앞에서 임유진을 구해주고 심지어는 차에까지 태워준 거지?사진 속 강현수가 임유진을 바라보는 눈빛은 마치 사랑해 마지않는 사람을 보는 그런 눈빛이었다!만약 강현수가 임유진이 바로 그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사람인 걸 알게 된다면... 배여진은 이 이상은 상상도 하기 싫었다.그때 그녀의 뒤편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그렇게 뚫어지게 쳐다본다고 뭐가 나오나? 강현수에 관한 기사는 전부 다 삭제됐을 텐데 인제 와서 뭘 또 보겠다고. 내가 볼 때 그 사진 속 여자를 지켜주려고 사진을 다 내리게 한 게 분명해."이어서 또 다른 목소리도 들려왔다."내 생각에도 그래. 그리고 어릴 때 강현수 좀 구해줬다고 재벌 집에 시집가려는 애들도 있던데 제발 주제 파악이나 했으면 좋겠네.""그러니까 말이야. 강현수 아니면 대학교 근처도 못 왔을 거면서."배여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그녀의 대학 동기들이 큰소리로 그녀의 앞 담을 하고 있었다.대학교에 다니고 싶다고 강현수에게 요구한 건 배여진이다. 하지만 해당 대학교는 재벌 집 자제들만 들어오는 명문대로 이곳에서의 배여진은 그들에게 섞이지도 못한 채 그저 동떨어져 있다.온몸을 명품으로 휘감아 봐도, 억대가 넘는 가방을 들고 다녀도 동기들 눈에 그녀는 촌뜨기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그래서 배여진은 틈만
강현수는 항상 머리를 위로 올려 깔끔한 모습만 보였지만 지금은 머리가 흐트러진 채로 있었고 그의 잘생긴 얼굴에는 오늘따라 퇴폐미까지 흘러넘쳤다.와인잔을 든 반대편 손에는 은팔찌가 쥐어져 있었고 두 눈은 하염없이 그 팔찌를 바라보고 있었다.한편 배여진은 그 팔찌를 보고 마음이 복잡해졌다. 임유진의 자리를 꿰찬 다음에도 강현수는 해당 은팔찌를 그녀에게 주지 않은 채 계속 간직하고 있었고 또한, 가끔은 배여진이 옆에 있어도 그는 팔찌만 쳐다봤다. 마치 이 은팔찌를 통해 무언가를 보고 있는 사람처럼...뭘 보고 있는 걸까? 어린 시절의 임유진?"현수 씨."배여진은 입술을 깨물고 잔뜩 심통한 표정을 지었다."오늘 왜 나 데리러 안 왔어요. 난 현수 씨에게 무슨 일 생긴 줄 알고 엄청 걱정했단 말이에요."그 말에 강현수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고 배여진을 보더니 가볍게 피식 웃었다. 그녀를 향한 웃음이라기보다는 자신을 향한 실소에 가까운 그런 웃음이었다."까먹어 버렸네, 미안해."배여진은 그의 대답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강현수는 항상 이런 식으로 그녀에게 벽을 쳤고 한 번도 먼저 그녀의 손을 잡아준다거나 스킨쉽을 해오지 않았다.하지만 오늘 배여진이 본 사진 속에서 그는 임유진의 손목을 먼저 잡았을 뿐만 아니라 차에까지 태웠다."오늘 무슨 일 있었어요? 왜 이렇게 술을 많이 마셨어요."배여진은 착한 여자 코스프레를 하며 그를 걱정했다."내가 도움이 될지는 모르겠지만 나 듣는 건 잘해요. 어릴 때처럼 나한테 뭐든 털어놔도 돼요."물론 이 내용도 모두 어릴 적 임유진에게서 들은 것이다.강현수가 술을 마신, 이 타이밍에 그녀는 일부러 추억 얘기를 꺼내 그를 흔들 작정이었다."어릴 때..."강현수는 비틀거리는 몸을 일으켜 세운 후 손에 들린 와인잔을 놓고 천천히 그녀에게로 걸어갔다. 그의 눈은 이미 취기로 가득 차 있었다.이윽고 배여진의 코앞까지 다가선 그는 서서히 입을 열었다."왜 너야? 왜 그 여자가 아니고 너야?"배여진은 처음에 그의 말을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법률 서적을 가까이하지 않았기에 임유진은 머릿속 지식이 전부 사라졌을 거라고 생각했다.하지만 막상 책을 들여다보니, 마치 변호사 시절로 돌아간 것처럼 법조문들이 너무나도 쉽게 외워졌고 스펀지처럼 기존판례와 선배 변호사들의 경험을 흡수하고 있었다.아마 근 4년간의 공백을 대뇌가 본능적으로 메꾸려고 하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두꺼운 두 권의 법률 서적을 흥미진진하게 읽어 내려갔다.강씨 저택 서재 안, 강지혁의 책상 옆에는 어느새 임유진을 위한 책상이 있었고 임유진은 지금 거기에서 열심히 책을 읽고 있다. 그러다 이해가 가지 않는 곳은 습관적으로 표식을 해둔 다음 인터넷으로 검색해 보기도 한다.너무 많이 집중한 탓에 그녀는 지금 강지혁이 옆에서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는 것조차 알아채지 못했다.강지혁은 변호사로서의 임유진은 본 적이 없었다. 정학이 말하면 그녀가 감옥에 갇히게 됐을 때조차도 얼굴을 제대로 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이 환경미화원 옷을 입고 있던 그때가 바로 두 사람의 첫 만남이었다. 그 뒤로 강지혁은 그녀의 여러 가지 모습을 봐왔지만, 단언컨대 오늘처럼 집중하고 있는 모습은 처음이었다.아마 전에 변호사였을 때도 이렇게 책상에 앉아 잔뜩 집중한 채로 사건을 해결했을 것이다.임유진은 변호사 일이 좋다고 한 적이 있다. 그리고 그걸 증명이라도 하듯 그녀는 지금 집중을 넘어 즐거워 보이기까지 했다. 마치 지금 그녀의 눈에는 각종 판례와 법조문들밖에 보이지 않은 것처럼 말이다.강지혁은 오늘 색다른 그녀의 모습에 또 어쩔 수 없이 반하고 만다. 심지어 오늘은 유난히 더 예뻐 보이는 것 같기도 했다. 평소에는 그저 잔잔하게 흐르는 강물 같은 모습이라면 오늘은 마치 갓 핀 꽃이 폭풍우를 앞에 두고 끄떡하지 않는 그런 모습이었다.이게 바로 그가 사랑하는 여자인 걸까? 삶이 아무리 고통스럽고 힘들어도 그녀의 마음속에는 여전히 희망을 품고 있었고 거침없이 앞으로 나아가려고 한다.강지혁은 순간 몸에 전율이 흘렀다. 그러고는 이런 그녀
임유진은 기억이 돌아온 후 한지영과의 통화에서 그녀가 죽은 후 강현수가 한동안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술을 진탕 마시고 또 허구한 날 그녀의 무덤 앞으로 가 무릎을 꿇은 채 통곡했다던 기사가 났었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그리고 그 뒤로 한동안 S 시가 아닌 해외로만 계속 돌고 있었다는 얘기도 말이다.강현수는 목석처럼 차에 기댄 채 계속해서 기다리다 누군가의 시선을 느끼고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대로 몸이 굳어버리고 말았다.5년간 줄곧 꿈속에서만 또는 정신없이 취해있어야만 간신히 보이던 이의 모습이 이렇게 현실감 없이 눈앞에 나타났다.강현수는 순간 하마터면 다리의 힘이 다 풀릴 뻔했다.그녀다. 그녀가 살아있었다. 이한의 말대로 임유진은 정말 살아있었다.“유진아...”잔뜩 매인 목소리가 강현수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그리고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강현수가 임유진 쪽으로 뛰어갔다.강현수의 마음은 임유진을 사랑했던 만큼 요동쳤고 또 몸은 그녀를 그리워했던 만큼 흥분이 일었다.임유진의 바로 앞까지 당도했을 때 갑자기 아래쪽에서 웬 아이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엄마, 이 아저씨 누구야?”강현수는 목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숙이다 그제야 임유진의 곁에 서 있는 현이를 발견했다. 눈빛이 똘망하고 예쁜 것이 임유진과 무척이나 닮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이 뭐라 설명하기도 전에 이 아이가 임유진의 아이라는 것을 바로 알아챘다.당시 뱄던 세쌍둥이 중의 한 명이 틀림없었다.‘선율이만 살아남은 게 아니었구나.’“나는...”강현수는 무릎을 구부리고 현이와 눈높이를 맞춘 다음 천천히 입을 열었다.“나는 강현수 삼촌이야. 너는 이름이 뭐야?”“강선현이에요. 원래는 임현이었고요. 현이라고 불러주세요.”아이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강현수는 현이를 보면서 문득 어린 시절의 임유진이 떠올랐다. 그날 우거진 풀숲에서 그를 구해주고 또 산 아래까지 그를 업어줬던 용감한 어린 여자아이의 얼굴이 말이다.그때의 기억은 강현수가 한평생 놓
이경빈은 탁유미 사건이 뒤집히면 회사가 타격을 입을 거라는 걸 이미 예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탁유미를 위해 당시의 사건을 뒤집어주었다.“이경빈 씨 나름의 속죄네요. 그 뒤로 언니 찾아온 적은 있어요?”“네. 그런데 내가 보고 싶어 하지 않아 하는 걸 아니까 직접 내 앞에 모습을 드러낸 횟수는 그렇게 많지 않아요.”탁유미는 시선을 돌려 현이와 함께 놀고 있는 윤이를 바라보았다.“오히려 이경빈보다 더 많이 찾아온 건 이경빈의 부모님이죠. 윤이를 집에 들이고 싶다고 몇 번이나 찾아왔었어요.”“그걸 언니가 거절했고요?”만약 윤이를 보냈다면 지금쯤 탁윤이 아니라 이윤으로 살고 있었을 테니 거절한 건 분명해 보였다.“윤이가 원하지 않는다고 했어요. 그때 이경빈이 하면 안 되는 말을 한 뒤로 윤이는 이경빈에게 줄곧 마음을 닫고 있는 상태예요. 이경빈은 어차피 어린애라 몇 번 달래주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디 그렇게 쉽게 용서가 될 문제인가요? 아이들도 어른들 못지않게 분위기 파악을 잘하고 또 섬세하다는 걸 몰랐던 거죠.”“그럼 언니는 어때요? 언니는 이경빈을 용서할 수 있어요?”임유진이 물었다.사실 그녀는 이곳으로 오기 전에 인터넷으로 이경빈에 관한 소식을 검색해 보았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이경빈은 결혼은 물론이고 그 어떤 스캔들도 없었다.아무래도 탁유미의 마음이 돌아서길 기다리는 듯해 보였다.“이경빈이 한 짓은 이미 용서했어요. 계속해서 과거의 일을 붙잡아두고 있어봤자 감정 낭비하는 건 나일 테니까요. 그런데 다시 합치는 건 불가능해요. 우리 사이는 이미 5년 전에 모든 게 다 끝이 났어요.”탁유미가 담담한 어조로 얘기했다. 마치 그로 인해 겪었던 다양한 감정들을 이미 말끔히 지운 사람처럼 말이다.임유진은 탁유미가 이런 식으로 모든 걸 내려놓은 것이 정말 잘된 일인지 몰라 생각이 복잡했다.한때는 그렇게도 사랑하던 두 사람이었는데 공수진의 개입으로 한평생 함께할 수 없는 두 사람이 되어버렸으니까.임유진은 딸을 데리
윤이는 한참이 지나서야 자신이 여전히 임유진을 안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얼굴이 빨개진 채 서둘러 그녀를 품에서 놓아주었다. 귀까지 빨개진 것이 무척이나 귀여워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윤이는 여전히 예전의 그 귀여운 윤이었다.강선율은 유치원에 가야 했기에 임유진은 오늘 강선현만 데리고 나왔다. 현이와 윤이는 다행히도 죽이 잘 맞는 듯했다.그런데 둘이서 잘 얘기하며 놀던 중에 현이가 윤이의 귀에 꽂혀있는 보청기를 신기한 눈으로 보더니 곧장 보청기를 빼버렸고 그 탓에 하마터면 보청기가 물컵 안에 떨어질 뻔했다.임유진을 그걸 보고는 엄한 얼굴로 그러면 안 된다고 얘기해 주었다.그러자 현이가 눈을 깜빡이며 이해가 안 된다는 얼굴로 물었다.“왜? 이거 중요한 거야?”“응, 이거 없으면 소리를 못 들어. 그래서 이걸 꼭 착용하고 있어야 해.”탁윤이 차분한 목소리로 대신 대답해주었다.윤이는 세상 사람들이 어떠한 시각으로 장애인을 보는지 이제는 굳이 누구에게 듣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보청기를 끼고 있는 이상 일반인과 다를 거 하나 없는데도 학교에서는 여전히 그에게 동정 어린 시선을 보내거나 키득키득하며 대놓고 조롱의 시선을 보내는 아이들이 존재했다.“우와! 이 보청기 대단하다. 이거 덕분에 오빠가 현이 목소리도 들을 수 있는 거잖아. 정말 잘 됐다! 오빠, 현이가 나중에 오빠를 위해서 피아노 연주해줄게. 현이 피아노 엄청 잘 쳐!”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윤이에게 말했다.만약 이곳에 피아노가 있었으면 아마 이런 말 할 겨를도 없이 바로 자기 솜씨를 뽐내러 건반을 두드렸을 것이다.탁윤은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하는 현이를 조금 멍한 얼굴로 바라보았다. 현이는 진심으로 그가 들을 수 있는 것에 기뻐하고 있었다.이제껏 다른 사람에게 청력에 관한 얘기를 했을 때 이런 대답을 들은 적은 이번이 처음이었다.그래서일까, 윤이는 현이의 말과 미소에 괜스레 마음이 따뜻해지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래. 현이가 쳐주는 피아노 연주 꼭 들을게.”사실
지난 5년간 그는 매일같이 후회했다. 그때 임유진과 조금 더 가까워질 기회를 자기 스스로 놓쳐버렸던 그였으니까. 결과적으로 그는 자기 손으로 그녀를 강지혁에게 내어준 거나 다름이 없었다.그리고 그 때문에 임유진은 절벽에서 떨어지고 말았다.만약 그때 억지로라도 그녀를 곁에 두었으면 어쩌면 그딴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차량이 강씨 저택 앞에 도착했다.강현수가 차에서 내려 안으로 들어가려 하자 경호원들이 그의 앞을 막아섰다.“유진이 보러 온 거니까 비켜.”강현수를 알아본 경호 실장이 예의를 갖추어 그에게 말을 건넸다.“사모님께서는 지금 외출 중이십니다. 사모님과 만나 뵙기를 원하시면 후일 따로 약속을 잡고 오시죠.”강현수는 그 말에 떠나는 것이 아닌 차에 기댄 채 임유진이 오기를 기다렸다.몇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상관없었다. 5년이라는 시간에 비하면 몇 시간 정도는 귀여운 수준이었으니까.경호원들은 고집스러운 그의 행동에 별다른 얘기는 못 하고 그저 그를 가만히 내버려 둘 수밖에 없었다. 그도 그럴 게 아무리 강지혁이 대단하다고 한들 강현수도 만만치 않은 인물이었으니까.그시각, 임유진은 현이와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오는 지하철에 안에 있었다.사실 외출하겠다고 했을 때 집사가 차량을 준비해두겠다고 했지만 임유진은 오랜만에 돌아오기도 했고 또 딸에게 S 시를 제대로 보여주고 싶어 집사에게 지하철로 가겠다고 했다. 이곳은 그녀와 강지혁이 만나고 서로 알아가고 사랑했던 곳이니까.“엄마, 우리 다음에 또 윤이 오빠 보러 가자. 그때는 율이 오빠도 같이!”현이가 활짝 웃으며 말했다. 기분이 좋아 보이는 것으로 보아 탁윤이 상당히 마음에 들었던 모양이다.“그래, 다음에는 율이도 같이 가자. 유미 이모랑 윤이가 엄청 좋아할 거야.”두 사람이 오늘 외출한 이유는 탁유미 때문이었다.탁유미는 간이식 수술을 받은 뒤로 전과 같이 힘들게 일을 하는 건 무리라 윤이 초등학교 근처에 작은 분식점을 차렸다.그 덕에 윤이는 하교하고 나면 바로 분식집에 들
강지혁은 조금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다시 바로 세웠다.“별로.”그는 이 말을 남긴 후 강선율의 손을 잡고 밖으로 향했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떠난 후 멍한 얼굴로 강지혁의 말을 곱씹어보았다.‘별로... 싫은 건 아니라는 뜻인가? 정말 싫었다면 혁이 성격상 바로 얘기했을 테니까. 그렇다는 건 앞으로도 계속 그렇게 쓰다듬어도 된다는 말인가?’임유진은 강지혁이 생각보다는 그녀를 잘 받아주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어쩌면 그가 자신을 다시 사랑하게 만드는 게 그렇게까지 어려운 일은 아닐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네가 여기까지는 웬일이야?”이한이 웃으며 강현수에게 물었다.“시간이 조금 비어서 왔어.”강현수가 답했다.“그리고 며칠 뒤에 또다시 나가봐야 할 것 같아서 그 전에 얼굴 한번 보려고.”“또 해외로 간다고? 돌아온 지 일주일도 채 안 됐잖아.”“해외에서 새로 시작한 프로젝트가 있는데 주관할 사람이 필요해.”강현수가 어깨를 으쓱하며 말했다.“아저씨도 너 가는 거 동의하셨어?”“아버지가 동의 안 한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어. 내가 가겠다고 한 거니까.”이한은 잠깐 멈칫하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현수야, 너 자꾸 해외로 나가는 거 임유진 씨 때문이지?”강현수는 그 말에 얼굴이 확 어두워졌다. 여전히 그는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고 가슴에 통증이 밀려왔다.“임유진 씨가 죽은 것 때문에 괴로워서 해외로 나가는 거라면 이제 그러지 않아도 돼. 그럴 필요가 없어졌으니까.”이한이 강현수의 얼굴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유진 씨 죽지 않았어. 다시 돌아왔어. 지혁이 곁으로.”어차피 임유진이 살아있단 얘기는 그가 말하지 않아도 강현수도 며칠 뒤면 자연스럽게 알게 될 일이다.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사실은 죽은 게 아니라는 것과 다시 살아서 강지혁의 곁으로 돌아왔다는 걸 알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으니까.강현수는 그간 줄곧 해외사업에만 몰두하고 있어 국내 소식은 조금 늦게 접하는 편이었다. 만약 그
강지혁의 오른쪽 옆에 앉은 강선현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며 물었다.“아빠, 안 먹어? 엄마가 만든 김밥 엄청 맛있어! 현이가 장담해!”아이는 말을 마친 후 다시 고개를 돌려 왼쪽 옆에 앉은 강선율을 바라보았다.“오빠도 엄청 맛있다고 했어. 그치?”강선율은 그 말에 입에 김밥을 넣은 채로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사실 엄청 맛있는 건 아니었지만 엄마가 만든 거라 계속 입에 넣었다. 유치원에서 또래 친구들은 항상 엄마가 준비해준 음식을 먹었으니까.임유진의 김밥은 아이들이 좋아할 만한 예쁜 모양을 하고 있었다.맛이 없지는 않다만 과연 아빠가 이 김밥을 먹을까?강선율은 강지혁이 이런 귀여운 김밥을 먹는다는 게 좀처럼 상상이 가지 않았다.두 아이는 들고 있던 포크도 내려놓고 강지혁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고 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한번 먹어봐. 분명히 맛있을 거야.”그녀가 이렇게 자신감을 가지고 말하기까지 수많은 시행착오가 있었다. 처음에는 단지 김밥을 마는 것뿐인데도 모양이 제대로 나지 않았고 맛도 짜거나 이상했으니까.강지혁이 선뜻 손을 대지 않자 옆에 있던 집사가 한마디 거들었다.“사모님께서 1시간이나 넘게 부엌에서 만드신 거예요. 저도 맛을 봤는데 아주 맛있더라고요.”그 말에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변형되어있는 손가락을 보고 있자니 또다시 심장에 통증이 이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몇 초 고민하다 결국 젓가락을 들어 김밥을 입에 넣었다.그리고 강선율은 그 모습에 깜짝 놀라 입을 떡하고 벌렸다.아빠가 아이들이나 먹을 것 같은 김밥을 먹다니, 이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에 셰프가 귀여운 동물 모양의 음식을 내왔을 때도 한 번쯤은 먹을 만한데 끝까지 손을 대지 않았던 그였으니까.반면 강선현은 묵묵히 김밥을 먹는 강지혁을 바라보며 역시 엄마의 김밥은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김밥이라며 뿌듯해하고 있었다.아침 식사를 마친 후 강지혁은 회사에 가기 위해, 그리고 강선율을 유치원에 가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