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가 원하는 일인데 당연히 내가 도와야지."강현수가 담담하게 얘기했다."현수야, 넌 정말 왜 이렇게 다정해?"‘현수야’라는 호칭에 그는 흠칫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걸까?"그 호칭은 아직 어색하니까 차차 적응해 나가는 거로 하자.""알겠어요."강현수의 제안에 배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생각해보면 ‘현수야’라는 호칭은 어릴 적 임유진이 배여진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날 치마가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온 임유진은 대뜸 자신이 사람을 한 명 구했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어른들은 아이가 실컷 놀다가 늦게 돌아온 핑계를 댄다고 생각해 오히려 그녀를 혼내기까지 했다.하지만 어렸던 배여진은 그녀의 얘기가 궁금했고 자세히 물어보자 임유진은 남자아이를 어떻게 구했고 그 아이의 이름은 무엇인지까지 전부 다 말을 해주었다.그때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강현수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이렇게도 쉽게 가짜 행세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물론 제일 다행인 건 임유진이 앓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열을 앓은 임유진은 마을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고 결국에는 S 시의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고열이 다 나았을 때는 그 하루의 기억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그때 당시 어른들은 어차피 하루 기억일 뿐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임유진은 그렇게 자신이 하루의 기억을 잊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배여진도 어른들이 그 얘기를 하고 나서야 임유진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됐다.그래서 지금 현재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건 그 당시의 어린 남자아이와 제삼자인 배여진 뿐이다.그녀는 이것이 마치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됐고 임유진의 기억이 이대로 영원히 묻혀있길 바라고 또 바랐다....임유진과 한지영은 지금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외할머니 장례식은 다 치른 거야?""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아버지는 만났어?"한지영이 조심스럽게 묻자 임유진이 고개를 저었다.임정호 부부는 S
"1년?"한지영은 조금 놀란 듯 보였다."혁이한테는 저녁에 얘기해보려고."말은 그렇게 했지만, 임유진은 강지혁이라면 흔쾌히 동의할 것 같았다. 이제까지 그 많은 요구를 다 들어줬던 그니까.한지영은 조금 초췌해진 친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우리 쇼핑하러 갈까? 연신 씨가 나랑 같이 포럼에 참석하려고 이 근처 백화점에서 옷을 주문해 뒀다고 했거든. 그거 찾고 나서 같이 쇼핑하러 가자."사실은 포럼이든 연회든 한지영은 다른 사람 눈에 띄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백연신은 한번 같이 가더니 꽤 기분이 좋았는지 어디든 그녀와 함께 가려고 했다.그녀를 제일 화 나게 했던 건 일과 야근을 핑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백연신은 늘 웃는 얼굴로 알겠다고 하고서는 다음 날 바로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일을 빼주거나 야근을 못 하게 한다는 것이다.두 사람은 먼저 한지영의 옷을 찾으러 매장으로 향했다. 백연신은 그저 그런 흔한 브랜드가 아닌 제일 비싼 브랜드의 옷을 주문했다.매장에 도착한 한지영이 백연신의 이름을 대자 매장 직원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옷을 가져와 그녀에게 한번 입어 볼 것을 제안했다. 마음에 안 드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수선 가능하다면서 말이다."유진아, 잠깐만 나 옷 좀 입어보고 올게."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매장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문득 뒤편 매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수 씨, 여기 엄청 비싸던데 너무 많이 사는 거 아니에요, 우리? 나는 저렴한 거라도 괜찮은데.""기왕 온 거 제일 좋은 거로 골라. 좋아하는 거 있으면 다 사."곧이어 남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현수 씨는 너무 다정한 것 같아요."배여진이 몸을 배배 꼬며 달콤하게 웃었다."날 구해준 사람한테 잘하는 건 당연한 거야."강현수는 담담하게 말을 뱉은 후 시선을 돌려 우연히 뒤쪽 가게를 쳐다봤다. 그러다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순간 몸이 얼어버렸다. 단지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가가 뜨거워졌다.그는
"난 친구랑 같이 온 거라서, 나 말고 매장 직원에게 물어보는 게 어때?"임유진이 담담하게 얘기하자 배여진은 그녀의 말대로 직원 쪽으로 다가갔다.그때 강현수가 임유진 쪽으로 걸어왔다."외할머니 일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사람은 원래 언젠가는 다 죽게 돼 있어요. 그저 누가 먼저 가느냐의 차이일 뿐인 거죠."이건... 위로인가?임유진은 고개를 들어 강현수를 바라봤다. 딱 떨어지는 슈트 차림은 그의 슬림하지만 탄탄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나게 했고 조금 차가운 듯한 얼굴은 잘생김이 더 해져 시선을 떼지 못하게 했다.연예계의 황태자인 그는 여자친구를 밥 먹듯이 바꾸는 거로 유명하다. 임유라와 헤어진 지금 그의 여자친구는 누가 될까? 배여진?강현수의 전 여자친구들은 전부 배여진의 대체품이었으니 이제는 정말 한 사람에게 충성하게 되는 걸까?"무슨 생각 해요?""아무것도 아니에요."강현수의 말에 임유진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아까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가 없다. 배여진과 어떤 사이가 되든 임유진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그저... 자꾸 그 꿈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다. 대체 뭐였을까? 꿈속의 남자아이와 강현수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거지?남자아이가 언덕에서 미끄러져 여자아이의 손을 꽉 잡았을 때 느껴졌던 그 떨림과 두려움, 임유진은 꿈에서 깨고 나서도 그 감각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임유진은 조금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릴 때 혹시...""네?"그때 배여진이 가방 하나를 들고 흥분한 얼굴로 강현수에게로 다가왔다."현수 씨, 이 가방 어때요?"그녀가 들고 온 건 한정판 가방이다. 얼마 전 한 부잣집 영애가 이 가방을 들고 사진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댓글에는 그녀의 재력과 미모를 칭찬하는 글들이 파다했다. 그래서 배여진은 만약 자신도 저 가방이 있다면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꺼번에 살 거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 마침 임유진의 입에서 이 한마디가 튀
"둘이 무슨 얘기 했는데 갑자기..."배여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현수가 입을 열었다."임유진 씨, ‘현수야’라는 호칭 어떻게 알았어요?"순간 배여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끼며 임유진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유진이가 그 호칭을 불렀다고...? 설마 기억이 돌아온 건가?’임유진의 기억이 돌아오면 배여진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게 된다."그래서 어릴 때 정말 ‘현수야’라고 불렸던 거예요?"임유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꿈속 남자아이가 정말 강현수라는 건가? 꿈속에서 있었던 모든 일도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그 호칭을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물었어요."강현수가 그녀를 추궁했다."내가! 내가 어릴 때 유진이에게 알려줬어요!"그때 배여진이 갑자기 끼어들었고 임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리고 강현수는 배여진의 말에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네가 알려준 거라고?""네, 어릴 때 유진이한테 현수 씨 구해줬던 일을 얘기한 적 있어요. 그때 이름도 알려줬고요. 유진이가 아마 그래서 알고 있었나 봐요."배여진은 임유진과 자신의 행동을 바꿔서 말해버렸다.강현수의 눈동자는 다시 어둡게 가라앉았고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미 찾고 싶었던 사람을 찾았잖아!’그렇게 되뇌었는데도 임유진의 입에서 나온 ‘현수야’라는 한마디에 그는 또다시 이성을 잃고 말았다."유진아!"그때 옷을 다 갈아입은 한지영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와보니 거기에는 뉴스에 자주 등장하던 강현수가 친구의 팔을 잡고 있었고 그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이게 무슨..."한지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 여기는 강현수 씨, 너도 알지?"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계 일이라면 빠삭한 한지영이 강현수를 모를 리가 없었다."그리고 여긴 내 사촌 언니인 배여진."임유진의 소개에 한지영은 어색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상황이 돌아가는 걸 보니 강현수와 배여진이라는 여자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현수의 말을 듣는 순간 임유진은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고 아파 났다....한지영은 임유진에게서 강현수와 배여진의 일을 전해 들은 후 입을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이건 뭐 드라마도 아니고..."허구한 날 여자친구가 바뀌던 강현수가 그렇게 찾아 헤맨 여자가 바로 친구의 사촌 언니라니... 이런 우연이 세상에 또 있을까?"근데 아까 네 팔은 왜 그렇게 잡고 있었던 거야?"한지영이 물었다."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물었는데...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나 봐, 내가."임유진은 지금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배여진이 왜 강현수에 관한 얘기를 자신에게 들려줬다고 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배여진은 한 번도 어린 시절 어떤 남자를 구해줬다는 얘기를 해준 적이 없다. 게다가 ‘현수야’라고 불리는 남자는 더더욱 없었다.아까는 타이밍이 안 맞아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다."참, 그때 강현수가 너를 어릴 적 자기를 구해줬던 사람으로 착각한 적 있었잖아? 너 솔직히 말해봐, 만약 네가 정말 그 소녀라면 넌 강지혁과 강현수 중 누구를 선택할 거야?"한지영은 친구 연애사에 들뜬 여고생 같은 얼굴을 했다.그 말에 임유진은 불현듯 그 꿈이 떠올랐다. 그러다 이내 꿈은 꿈이고 강현수를 구해준 건 배여진이라며 생각을 정리했다."그런 일이 생길 리가 없잖아."임유진이 답했다."그리고 무슨 일이 있든지 내가 선택할 사람은 혁이뿐이야.""너 강지혁 씨 정말 많이 사랑하는구나."한지영은 조금 감개무량해졌다. 전에는 출소한 후 친구의 인생이 걱정됐던 것도 사실이다. 전과가 있는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각박한 세상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강지혁이라는 남자도 만나고 곧 결혼도 하게 된다.이건 뭐 강현수와 배여진의 사연보다 더 드라마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응."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전에는 무섭고 두렵기도 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임유진은 강지혁을 사랑하고 있다.저녁.임유진이 강지혁을 향해 물었다."우
"사실 우리 지금도 결혼한 거랑 다를 거 없잖아."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지금 같은 집에 살고 있고 심지어는 같은 침대까지 사용하고 있다.결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저 나라가 허락했다는 종이 쪼가리만 없을 뿐이다."달라."강지혁이 단호하게 말했다."사람들 눈에 누나는 강씨 가문 사모님이 아니잖아. 나는 누나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 거였으면 좋겠어. 물론 나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누나 것이 되고 싶고."임유진은 강지혁이 형식적인 절차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싶었다."결혼했다가 이혼하는 커플도 있어."아무런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강지혁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졌고 칠흑 같은 눈동자가 더욱더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러니까 누나 말은 우리도 언젠가 이혼할 거라는 소리야?"임유진은 아까부터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그런 뜻 아니야. 그냥 결혼했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서로의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결혼은 사람이 하는 거지 그딴 종이 쪼가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임유진은 강지혁의 눈을 마주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때면 우리는 서로의 것이겠지만 만약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아무리 나라에서 결혼한 사이라고 지정해도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겠지.""나 안 사랑할 거야?"강지혁은 이글거리는 눈동자와는 다르게 꽤 조심스럽게 묻고 있다.그러자 임유진이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웃었다."혁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어."강지혁은 그녀를 위해 많은 걸 해주었고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는 그녀를 구제해주었으며 기꺼이 사랑해주었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언제부턴가 그를 향한 사랑이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걸 느끼고 있다.하지만 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마음은 더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냐고? 그럴 이유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날 사랑해줘. 내 곁을 떠
임유진은 기지개를 한번 켠 후 몸을 일으켜 씻으러 갔다.다 씻고 나온 후 막 계단을 내려가려는데 배여진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유진아, 오늘 시간 돼? 할 얘기가 있어서 그런데 잠깐 볼까?"임유진은 조금 고민하더니 이내 알겠다고 했다."그래, 그럼, 거기서 만나."마침 그녀도 배여진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으니 잘 됐다.‘현수야’라는 호칭과 어릴 적 강현수를 구해준 사실을 얘기해줬다는 것에 관해 어떻게 된 일인지 물어야만 했다.커피숍에 들어서자마자 배여진이 눈에 띄었다. 그녀는 온갖 명품으로 몸을 휘감고 있었고 테이블 위에는 요즘 제일 유행하는 가방이 놓여 있었다. 웨이브를 넣은 머리에 선글라스까지 낀 그녀는 마치 셀럽이 따로 없었다.누가 지금의 배여진을 보고 한때는 시골 마을의 가정주부였다는 걸 상상이나 할 수 있을까?"어? 유진아, 여기야."배여진은 선글라스를 벗으며 환하게 웃었다."그러고 보니 우리 둘이서 이렇게 만나는 것도 너무 오랜만이지 않아? 앞으로 나도 S 시에 자주 놀러 올 테니까 우리 자주 만나자."임유진은 배여진이 고작 이런 얘기나 하려고 자신을 불러낸 것 같지는 않았다. 그리고 두 사람은 어릴 적부터 사이가 좋지 않았고 성인이 돼서도 마찬가지였다.게다가 그녀가 감옥살이했을 때 그녀는 임유진을 비웃음거리로 만든 적도 있었다."왜 보자고 했어? 본론이나 얘기해 줄래?"임유진의 말에 배여진도 진지한 얼굴로 얘기했다."그래, 좋아. 내가 오늘 너 찾아온 건 현수 씨 때문이야."그러자 임유진도 같은 이유로 찾아왔기에 조금 흠칫했다."유진아, 나 솔직히 그날 너무 당황스러웠던 거 알아? 갑자기 현수 씨 이름을 그렇게 불러버리면 어떡해, 누가 들으면 오해하겠어. 게다가 넌 남자친구도 있는데 조심 좀 해야지."배여진이 뻔뻔하게 말했다."언니 정말 어릴 때 나한테 강현수 씨 구해준 얘기 한 적 있어? 그리고 ‘현수야’라는 호칭도 언니가 알려준 거 맞아?"임유진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고 배여진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간신히 부
배여진은 턱을 치켜들었다."솔직히 말하면 현수 씨가 나 그동안 많이 찾고 있었다는 거 알고 설렜어. 그리고 나 이제 이혼도 했고 이제는 자유롭게 내 행복을 찾아다녀도 아무 문제 없는 거잖아. 나 너랑 현수 씨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라는 거 알아. 내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너를 나로 오해하기도 했었다는 얘기도 들었고. 하지만 결국 네가 아니라 나였잖아. 안 그래? 그러니까 앞으로는 좀 주의해 줬으면 좋겠어."요즘 배여진은 항상 스타일리스트에게 코디와 메이크업을 받는다. 생긴 건 평범해도 꾸미면 연예인 버금가는 외모가 되어버려 그녀는 지금 자신감이 최고치에 달했다.그녀는 자신이 예쁘게 꾸미기만 한다면 강현수의 전 여자친구들에게 절대 꿀리지 않을 자신이 있었다."유진아, 난 네가 내 행복을 방해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만약 방해한다면 그때는 그게 아무리 사촌 동생이라도 난 절대 용서하지 않을 거야."배여진은 하늘에서 굴러온 강현수라는 떡을 절대로 남에게 빼앗길 수 없었다....임유진은 지금 또다시 비슷한 꿈을 꾸고 있다.꿈속 남자아이 얼굴은 여전히 몽롱한 상태였고 꿈속에서 그녀는 상대방의 손을 놓지 않으려 안간힘을 주고 있다. 두 사람은 젖먹던 힘까지 끌어내 위로 올라가려고 애썼다.언덕은 너무 가팔랐고 발을 헛디디는 순간 죽지는 않겠지만 심한 부상을 입을 게 뻔했다.남자아이의 몸은 힘을 다 소진한 듯 점점 떨리기 시작했고 여자아이는 끊임없이 그에게 힘내라고 외쳤다."나 절대 안 놓을 거니까, 너도 조금만 더 힘을 내. 내가... 내가 꼭 너를 저 위에까지 데리고 올라갈게! 그러니까 포기하지 마!""정말 안 놓을 거야?"남자아이가 두려움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응, 안 놓을 거야."여자아이는 그 어느 때보다 더 단호하게 대답했다.두 아이는 몇 번이나 더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질 뻔했지만 포기하지 않은 덕에 끝내 여자아이가 남자아이를 제일 안전한 곳까지 끌어올렸다.안전하다는 확신이 드는 순간 두 사람은 바닥에 털썩 누워버렸다."내가 그랬지?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