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그림들은 모두 당시 ‘그녀’가 강현수를 업고 하산할 때의 광경이 아니면 두 어린 남녀가 산속에서 서로 의지하고 있는 풍경이었다.그때의 두 사람은 의지할 곳이 서로뿐이었고 아마도 그때 처음으로 옆에 있는 이 사람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심지어는 이 사람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걸 깨달았을 것이다.많고 많은 그림 중에 하나의 예외도 있었는데 거기에는 아이들의 모습이 아닌 성인 여성이 그려져 있었다. 그림 속의 여성은 옅은 미소를 짓고 있었고 눈동자에는 따뜻함이 흘러나와 있었다. 그녀를 보고 있으면 마치 모든 걱정이 다 사라지는 듯한 기분마저 들었다.강현수는 그림 앞에 서서 가만히 여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칠흑같이 어두운 눈동자 속에 슬픔이 스쳐 지나갔다.만약 이곳에 임유진이 있었으면 강현수는 그림 속 여인이 바로 임유진, 그녀라는 걸 확신했을 것이다."왜 네가 아닌 거야..."원망이 섞여 있는듯한 그의 목소리가 화실에 울려 퍼졌고 그에 대한 답은 돌아오지 않았으며 그림 속 여인은 그저 옅게 웃으며 그를 바라보기만 할 뿐이다.강현수는 손을 들어 여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단지 그림인데도 불구하고 조심스럽기 그지없는 그의 손길은 마치 실존하는 여인의 얼굴을 만지는 듯했다.만약 임유진이 지금 여기 나타난다면 그녀는 강현수가 이렇게 만지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오늘 웨딩드레스 모습의 그녀가 눈앞에 나타났을 때, 강현수는 그제야 임유진과 강지혁이 결혼한다는 사실을 실감했다.임유진은 강현수가 아닌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될 것이고 앞으로는 그 남자만 눈에 담을 것이며 그 남자의 아이를 낳고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다. 강현수와는 아무런 가능성도 남기지 않은 채 말이다.이 생각이 머릿속에 스쳐 지나가자 강현수는 갑자기 숨이 막혀오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한참 후, 갑자기 화실 문이 벌컥 열리더니 강현수가 입을 열었다."화실에 있는 그림 전부 다 치워버리세요. 그리고 방문을 잠근 후 그 누구의 출입도 허락하지 마세요.""네, 알겠습니
한편 임유진은 이 마을에서의 평판이 좋지 못하다. 마을 사람들은 감옥살이한 임유진을 경멸했고 조문 오는 사람 중에는 혀를 끌끌 차며 삿대질하거나 심지어는 노씨 집안 사람들에게 그녀를 내쫓아버리라고 얘기하기도 했다.그러나 매번 그런 소리를 들을 때마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는 건 임유진이 아니라 오히려 노씨 집안 사람들이었다. 임유진을 건드려 화가 난 강지혁이 홧김에 노씨 집안을 없애버릴 수도 있는 노릇이었으니까. 게다가 강현수가 배여진을 지켜준다고는 하지만 그 범위가 노씨 집안까지일지는 그 누구도 알 길이 없었다.상복을 입은 임유진의 얼굴이 퉁퉁 부은 것이 벌써 몇 번이나 눈물을 흘린 게 틀림없다.그러다 조문객들을 대접하는 자리에서 큰 삼촌이 사람들에게 외할머니와의 추억을 얘기할 때 임유진은 어김없이 또 한 번 눈물을 흘렸다.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은 점점 사라져만 간다. 임유진의 어머니도 그렇게, 이제는 외할머니도 그녀의 곁을 떠났다.다음에는 또 누가 그녀의 곁을 떠나게 될까...?임유진의 머릿속에는 자꾸만 자기도 모르게 무서운 상상이 들었다.그렇게 두려움에 잠식되어 주먹을 꽉 쥐고 있을 때 한 남자의 따뜻한 손이 그녀에게 다가와 정처 없이 흐르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닦아주었다.마치 아기 다루듯 다정하고 따뜻한 남자의 손에 임유진의 두려움이 서서히 걷히기 시작했다.고개를 돌려보니 거기에는 자신만을 바라봐주는 강지혁이 있었다.‘지혁이는 나만 내버려 두고 쉽게 떠나지는 않을 거야. 우리는 할머니 할아버지가 될 때까지 평생 함께 있을 거야...’장례식장을 찾는 사람들은 더더욱 많아졌고 그중에는 이미 술에 얼큰하게 취한 사람들도 있었다. 삼촌들과 이모는 사람들 챙기기에 바빴고 상주 자리는 임유진이 대신 지키며 조문객들을 맞이했다.모든 게 평화로운 그때 조문을 마친 한 남자가 다짜고짜 임유진에게 삿대질하며 언성을 높였다."네가 무슨 자격으로 상주 자리에 있어? 감옥까지 다녀온 애가 집안 망신인 줄 알면 안 보이는 구석에 찌그러져 있거나 차라리 이곳에
남자는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누군가에 의해 바닥에 꼴사납게 널브러졌다."실수, 발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바람에."실수라고 하기에는 강지혁의 왼쪽 발은 여전히 남자의 심장 쪽을 꾹 짓누르고 있다. 남자는 숨이 막히는 듯한 고통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끙끙 앓으며 신음을 냈다. 발버둥을 치려고도 해봤지만 마치 돌덩이에 깔리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할 수가 없었다.상황이 심각해지자 옆에서 구경만 하던 노씨 집안 삼촌들과 이모가 헐레벌떡 다가오더니 그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저...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장례식장인데 이럴 필요가 있을까요?""장례식에서 불상사라도 생기면 안 되잖아요.""이 사람도 그냥 생각 없이 막 내뱉은 말일 거예요. 진심으로 받아들일 필요 없어요."강지혁은 세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사랑해 마지않는 손녀가 이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도 모를 놈한테 비난이나 듣는 걸 할머니가 아신다면 엄청나게 속상해하지 않을까요? 내 말이 틀렸습니까?"무표정한 얼굴에 이렇게까지 소름이 끼쳐본 적은 그들도 아마 처음일 것이다."그,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이 인간 그때 유진이가 프러포즈 좀 거절했다고 속 좁게 이러는 게 틀림없어요. 남자가 돼서는, 쯧쯧.""이런 인간은 장례식에 올 자격도 없는 사람이에요. 우리 유진이가 어떤 앤데, 이런 막말을 듣고만 있게 해줘서는 안 되죠! 우리 엄마가 평소에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바로 유진이었는걸요."세 사람은 금세 태도를 돌변해서는 서둘러 임유진의 편을 서며 강지혁의 기분을 살폈다. 게다가 큰 삼촌은 경비원까지 불러 임유진에게 막말한 남자와 그의 가족들을 전부 다 빈소에서 쫓아내 버렸다.그리고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본 조문객들은 입을 떡 벌리고 그저 벙쪄있었다.감옥살이하고 나온 임유진을 당연히 노씨 집안의 천덕꾸러기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이제까지 그녀에게 비난의 말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녀 뒤에 이런 무서운 남자친구 있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아까 까불다가 경비원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영정사진 속 외할머니를 바라봤다. 이제는 정말 작별 인사를 고할 때가 왔고 그녀 역시 그걸 알고 있었기에 외할머니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엄마를 잃은 임유진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줬던 건 바로 외할머니의 사랑이었다. 그녀 덕에 임유진은 어린 시절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지 않아도 됐었고 엄마 다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다음 날 아침, 발인 후 임유진은 결국 외할머니의 화장 순간을 지켜보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외할머니가 정말 그녀의 곁을 떠나버렸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그런 그녀를 강지혁이 옆에서 지켜줬다."혁아, 할머니가 나만 버리고 가셨어."임유진은 구석 쪽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나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또 한 명 잃게 된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나는 널 떠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응, 알아. 너는 날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도."강지혁은 임유진의 불안한 마음을 끊임없이 달래줬고 그녀를 안심시켰다.화장을 마친 후 임유진의 삼촌들과 이모는 외할머니를 노씨 집안 조상들의 묘지에 모셨다.외할머니의 묘비 앞에서 노씨 집안 사람들은 예의를 갖춰 향을 피운 후 세 번의 목례를 하고 절을 한번 했다. 이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대로 고인이 어른일 경우 하는 예절이다.삼촌들과 이모 그리고 배여진이 먼저 인사를 하고 임유진이 마지막으로 절을 한 후 몸을 일으켰다. 그때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온 강지혁이 아무 말도 없이 그녀와 똑같은 방식으로 향을 피우고 묘비를 향해 목례를 한 후 그들의 방식을 따라 절을 했다.강지혁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자 노씨 집안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강씨 집안 성묘를 제외하고 그가 이렇게 무릎을 꿇을 일이 과연 또 있기나 할까?그의 이런 행동은 임유진을 향한 사랑이고 그녀의 외할머니를 향한 존중이다.배여진은 강지혁의 모습에 눈을 반짝이더니 언젠가는 자신도 강현수를 저렇게
임유진은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조용했던 차 안은 그녀의 목소리로 가득 찼고 강지혁은 그녀가 한 곡을 다 부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방금 부른 노래 뭐야?""‘인생길’이라는 옛날 노래야."임유진이 말을 이었다."외할머니가 즐겨 들으시던 노래였어. 할머니가 부르는 걸 따라부르다 보니까 어느샌가 입에 붙어버리더라고. 그때는 어릴 때라 가사의 의미까지는 와닿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가사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됐네.""좋은 노래야."강지혁이 말했다."맞아. 할머니가 부르시는 걸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그녀는 말을 하면서 조금 피곤한 듯 연신 하품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 며칠 임유진은 장례식 때문에 매일 3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다."피곤하면 좀 자. 도착하려면 2시간 정도 더 있어야 해."강지혁은 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를 위해 잠자기 편한 자세로 의자를 조절해주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후 얼마 안 가 금방 잠이 들었다.강지혁은 잠든 임유진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안주머니에서 은팔찌를 꺼냈다. 이건 강현수가 지닌 은팔찌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이 은팔찌는 원래 한 쌍이었고 한쪽은 강현수가 한쪽은 임유진 외할머니의 유품에 들어있었다.외할머니는 입원하기 전 친한 친구에게 상자를 맡겼었고 혹시 자신이 죽으면 이 물건들을 임유진에게 건네주라고 당부했다.상자 안에는 돈이 되는 물건이 들어있을 리는 없었고 그저 임유진의 엄마가 전에 넣어뒀던 액세서리와 할머니가 그 뒤로 더 넣어둔 목걸이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 은팔찌는 액세서리 속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강지혁은 임유진보다 한발 먼저 이 은팔찌를 손에 넣었다. 이 물건이 만약 임유진 손에 들어가면 그때는 강현수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고 그건 강지혁이 제일 피하고 싶은 것이다.그는 배여진이 임유진을 대신해 강현수의 옆에 있게 된 것이 제일 좋은 마무리라고 생각하고 있다.차가운 은팔찌를 매만지는 강
"그러다 너까지 잡히면 어떡해?"이건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였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난 안 잡혀!"여자아이의 당찬 말에 남자아이는 그저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여자아이가 뭔가 고민하더니 또다시 입을 열었다."만약 잡혀도 우리는 같이 있으니까 무섭지 않을 거야!"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손을 꼭 잡았고 손목에는 한 쌍의 은팔찌가 반짝거리고 있었다.두 아이는 그렇게 산속에서 도망쳤고 남자아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직면해 당황하는 바람에 여자아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했다.그때, 남자아이가 발을 헛디뎠고 그만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버렸다. 손을 꼭 잡고 있던 탓에 여자아이도 뒤따라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다행히 여자아이는 떨어지는 도중 길게 뻗은 나뭇가지에 몸이 걸려 끝까지 떨어지는 건 방지할 수 있었다.여자아이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남자아이의 손을 놓지 않았고 남자아이는 두 발로 열심히 지면을 밟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꽤 가파른 언덕이라 아이의 발은 닿지 못했고 어쩌지도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점점 두려워 났다.아마 여자아이가 이대로 손을 놓고 그를 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만약 이대로 손을 놓게 되면 여자아이는 금방 다시 언덕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지만 남자아이는 그대로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져 어떻게 될지 모른다.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서 인간의 어두운 면에 대해 배운 남자아이는 위기의 순간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감 없이 타인의 이익을 짓밟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여자아이는 그와 처음 만난 사이이고 이대로 그의 손을 놓쳐버린다고 해도 지극히 정상적인 일일 뿐이다.하지만 무서웠다. 이 모든 걸 알고 있는데도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여자아이가 이대로 자신을 버릴까 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까 봐..."야, 너..."그때 여자아이가 힘겨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남자아이는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을 들어 여자아이를 바라봤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그는 지금 온몸이 얼
숨을 고르고 이마를 만져보니 땀으로 가득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등과 손바닥, 온몸이 땀범벅이었다.악몽을 꿨나? 하지만 꿈에서 봤던 그 언덕은 마을의 언덕이 분명했다.그리고 꿈속에서 봤던 광경은...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창문 밖을 바라보니 따스한 햇볕이 그녀의 방을 내리쬐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가 다 되었고 그녀는 며칠 만에 푹 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개를 돌려 침대 머리맡을 보자 거기에는 강지혁이 남기고 간 메모가 있었다. 그는 오늘 밀린 회사 업무를 처리하느라 일찍 출근했고 저녁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저녁 먹으러 들어오겠다고 한다.그가 남긴 메모에 임유진은 아까의 불안이 조금 가셔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기지개를 한번 켜더니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줄기가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고 임유진은 문득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면서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손은 아까 꿈속에서 그 남자아이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손이다.현수... 현수...그녀가 아는 사람 중에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은 강현수밖에 없다.그리고 아까 꿈에서 봤던 그 광경은 전에 꿨던 꿈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그 꿈에서도 역시 두 아이는 나쁜 사람에게서 도망치는 중이었고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산속에서 도망 다녔다.그때는 강현수가 이상한 말을 하는 바람에 그런 꿈을 꿨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왜지? 그리고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거지?그녀는 꿈속 남자아이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꿈에서 겪은 일이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확실한 건 임유진은 그런 경험을 한 기억이 없다.만약 이런 꿈을 꾸는 게 저번에 강현수가 했던 말 때문이라면 오늘 꿈은 뭐지? 강현수가 오늘 꿨던 꿈 얘기는 해준 적이 없는데?그리고 이상한 건 만약 정말 실제로 겪은 일이 맞다고 해도 그건 배여진과 강현수 사이의 일이어야 하는데 왜 임유진은 자꾸 그 꿈속 여자아이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꼬리에
"네가 원하는 일인데 당연히 내가 도와야지."강현수가 담담하게 얘기했다."현수야, 넌 정말 왜 이렇게 다정해?"‘현수야’라는 호칭에 그는 흠칫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걸까?"그 호칭은 아직 어색하니까 차차 적응해 나가는 거로 하자.""알겠어요."강현수의 제안에 배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생각해보면 ‘현수야’라는 호칭은 어릴 적 임유진이 배여진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날 치마가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온 임유진은 대뜸 자신이 사람을 한 명 구했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어른들은 아이가 실컷 놀다가 늦게 돌아온 핑계를 댄다고 생각해 오히려 그녀를 혼내기까지 했다.하지만 어렸던 배여진은 그녀의 얘기가 궁금했고 자세히 물어보자 임유진은 남자아이를 어떻게 구했고 그 아이의 이름은 무엇인지까지 전부 다 말을 해주었다.그때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강현수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이렇게도 쉽게 가짜 행세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물론 제일 다행인 건 임유진이 앓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열을 앓은 임유진은 마을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고 결국에는 S 시의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고열이 다 나았을 때는 그 하루의 기억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그때 당시 어른들은 어차피 하루 기억일 뿐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임유진은 그렇게 자신이 하루의 기억을 잊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배여진도 어른들이 그 얘기를 하고 나서야 임유진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됐다.그래서 지금 현재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건 그 당시의 어린 남자아이와 제삼자인 배여진 뿐이다.그녀는 이것이 마치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됐고 임유진의 기억이 이대로 영원히 묻혀있길 바라고 또 바랐다....임유진과 한지영은 지금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외할머니 장례식은 다 치른 거야?""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아버지는 만났어?"한지영이 조심스럽게 묻자 임유진이 고개를 저었다.임정호 부부는 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