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는 말을 채 끝마치기도 전에 누군가에 의해 바닥에 꼴사납게 널브러졌다."실수, 발이 제멋대로 움직이는 바람에."실수라고 하기에는 강지혁의 왼쪽 발은 여전히 남자의 심장 쪽을 꾹 짓누르고 있다. 남자는 숨이 막히는 듯한 고통에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끙끙 앓으며 신음을 냈다. 발버둥을 치려고도 해봤지만 마치 돌덩이에 깔리기라도 한 것처럼 꿈쩍할 수가 없었다.상황이 심각해지자 옆에서 구경만 하던 노씨 집안 삼촌들과 이모가 헐레벌떡 다가오더니 그에게 사정하기 시작했다."저... 아무리 그래도 여기는 장례식장인데 이럴 필요가 있을까요?""장례식에서 불상사라도 생기면 안 되잖아요.""이 사람도 그냥 생각 없이 막 내뱉은 말일 거예요. 진심으로 받아들일 필요 없어요."강지혁은 세 사람 쪽으로 고개를 돌린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사랑해 마지않는 손녀가 이런 어디서 굴러먹다 온 건지도 모를 놈한테 비난이나 듣는 걸 할머니가 아신다면 엄청나게 속상해하지 않을까요? 내 말이 틀렸습니까?"무표정한 얼굴에 이렇게까지 소름이 끼쳐본 적은 그들도 아마 처음일 것이다."그, 그럼요. 그렇고 말고요.""이 인간 그때 유진이가 프러포즈 좀 거절했다고 속 좁게 이러는 게 틀림없어요. 남자가 돼서는, 쯧쯧.""이런 인간은 장례식에 올 자격도 없는 사람이에요. 우리 유진이가 어떤 앤데, 이런 막말을 듣고만 있게 해줘서는 안 되죠! 우리 엄마가 평소에 제일 좋아하는 사람도 바로 유진이었는걸요."세 사람은 금세 태도를 돌변해서는 서둘러 임유진의 편을 서며 강지혁의 기분을 살폈다. 게다가 큰 삼촌은 경비원까지 불러 임유진에게 막말한 남자와 그의 가족들을 전부 다 빈소에서 쫓아내 버렸다.그리고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본 조문객들은 입을 떡 벌리고 그저 벙쪄있었다.감옥살이하고 나온 임유진을 당연히 노씨 집안의 천덕꾸러기라고 생각했던 그들은 이제까지 그녀에게 비난의 말을 서슴지 않았는데 그녀 뒤에 이런 무서운 남자친구 있었을 줄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아까 까불다가 경비원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영정사진 속 외할머니를 바라봤다. 이제는 정말 작별 인사를 고할 때가 왔고 그녀 역시 그걸 알고 있었기에 외할머니 얼굴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엄마를 잃은 임유진의 공허한 마음을 채워줬던 건 바로 외할머니의 사랑이었다. 그녀 덕에 임유진은 어린 시절 외롭고 쓸쓸하게 보내지 않아도 됐었고 엄마 다음으로 사랑하는 사람이 생겼다.다음 날 아침, 발인 후 임유진은 결국 외할머니의 화장 순간을 지켜보지 못하고 뛰쳐나왔다. 외할머니가 정말 그녀의 곁을 떠나버렸다는 생각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고 그런 그녀를 강지혁이 옆에서 지켜줬다."혁아, 할머니가 나만 버리고 가셨어."임유진은 구석 쪽에 주저앉아 중얼거렸다."나는 나를 진정으로 사랑해주는 사람을 또 한 명 잃게 된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을 꽉 끌어안으며 말했다."나는 널 떠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무슨 일이 있어도 그녀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이다."응, 알아. 너는 날 떠나지 않을 거야. 그리고... 나도."강지혁은 임유진의 불안한 마음을 끊임없이 달래줬고 그녀를 안심시켰다.화장을 마친 후 임유진의 삼촌들과 이모는 외할머니를 노씨 집안 조상들의 묘지에 모셨다.외할머니의 묘비 앞에서 노씨 집안 사람들은 예의를 갖춰 향을 피운 후 세 번의 목례를 하고 절을 한번 했다. 이건 집안 대대로 내려오는 방식대로 고인이 어른일 경우 하는 예절이다.삼촌들과 이모 그리고 배여진이 먼저 인사를 하고 임유진이 마지막으로 절을 한 후 몸을 일으켰다. 그때 어느샌가 옆으로 다가온 강지혁이 아무 말도 없이 그녀와 똑같은 방식으로 향을 피우고 묘비를 향해 목례를 한 후 그들의 방식을 따라 절을 했다.강지혁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자 노씨 집안 사람들은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강씨 집안 성묘를 제외하고 그가 이렇게 무릎을 꿇을 일이 과연 또 있기나 할까?그의 이런 행동은 임유진을 향한 사랑이고 그녀의 외할머니를 향한 존중이다.배여진은 강지혁의 모습에 눈을 반짝이더니 언젠가는 자신도 강현수를 저렇게
임유진은 달리는 차 안에서 창밖 풍경을 바라보며 가볍게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조용했던 차 안은 그녀의 목소리로 가득 찼고 강지혁은 그녀가 한 곡을 다 부른 뒤에야 입을 열었다."방금 부른 노래 뭐야?""‘인생길’이라는 옛날 노래야."임유진이 말을 이었다."외할머니가 즐겨 들으시던 노래였어. 할머니가 부르는 걸 따라부르다 보니까 어느샌가 입에 붙어버리더라고. 그때는 어릴 때라 가사의 의미까지는 와닿지 않았는데 지금은 그 가사를 이해할 수 있는 나이가 됐네.""좋은 노래야."강지혁이 말했다."맞아. 할머니가 부르시는 걸 다시는 들을 수 없다는 게 조금 아쉽지만."그녀는 말을 하면서 조금 피곤한 듯 연신 하품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요 며칠 임유진은 장례식 때문에 매일 3시간 정도밖에 자지 못했다."피곤하면 좀 자. 도착하려면 2시간 정도 더 있어야 해."강지혁은 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녀를 위해 잠자기 편한 자세로 의자를 조절해주었다.그녀는 눈을 감은 후 얼마 안 가 금방 잠이 들었다.강지혁은 잠든 임유진의 얼굴을 한참 동안 바라보더니 안주머니에서 은팔찌를 꺼냈다. 이건 강현수가 지닌 은팔찌와 똑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이 은팔찌는 원래 한 쌍이었고 한쪽은 강현수가 한쪽은 임유진 외할머니의 유품에 들어있었다.외할머니는 입원하기 전 친한 친구에게 상자를 맡겼었고 혹시 자신이 죽으면 이 물건들을 임유진에게 건네주라고 당부했다.상자 안에는 돈이 되는 물건이 들어있을 리는 없었고 그저 임유진의 엄마가 전에 넣어뒀던 액세서리와 할머니가 그 뒤로 더 넣어둔 목걸이 같은 것이 들어있었다. 그리고 이 은팔찌는 액세서리 속에 섞여 있었던 것이다.강지혁은 임유진보다 한발 먼저 이 은팔찌를 손에 넣었다. 이 물건이 만약 임유진 손에 들어가면 그때는 강현수에 대한 기억이 떠오를 수도 있고 그건 강지혁이 제일 피하고 싶은 것이다.그는 배여진이 임유진을 대신해 강현수의 옆에 있게 된 것이 제일 좋은 마무리라고 생각하고 있다.차가운 은팔찌를 매만지는 강
"그러다 너까지 잡히면 어떡해?"이건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였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난 안 잡혀!"여자아이의 당찬 말에 남자아이는 그저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여자아이가 뭔가 고민하더니 또다시 입을 열었다."만약 잡혀도 우리는 같이 있으니까 무섭지 않을 거야!"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손을 꼭 잡았고 손목에는 한 쌍의 은팔찌가 반짝거리고 있었다.두 아이는 그렇게 산속에서 도망쳤고 남자아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직면해 당황하는 바람에 여자아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했다.그때, 남자아이가 발을 헛디뎠고 그만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버렸다. 손을 꼭 잡고 있던 탓에 여자아이도 뒤따라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다행히 여자아이는 떨어지는 도중 길게 뻗은 나뭇가지에 몸이 걸려 끝까지 떨어지는 건 방지할 수 있었다.여자아이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남자아이의 손을 놓지 않았고 남자아이는 두 발로 열심히 지면을 밟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꽤 가파른 언덕이라 아이의 발은 닿지 못했고 어쩌지도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점점 두려워 났다.아마 여자아이가 이대로 손을 놓고 그를 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만약 이대로 손을 놓게 되면 여자아이는 금방 다시 언덕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지만 남자아이는 그대로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져 어떻게 될지 모른다.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서 인간의 어두운 면에 대해 배운 남자아이는 위기의 순간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감 없이 타인의 이익을 짓밟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여자아이는 그와 처음 만난 사이이고 이대로 그의 손을 놓쳐버린다고 해도 지극히 정상적인 일일 뿐이다.하지만 무서웠다. 이 모든 걸 알고 있는데도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여자아이가 이대로 자신을 버릴까 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까 봐..."야, 너..."그때 여자아이가 힘겨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남자아이는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을 들어 여자아이를 바라봤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그는 지금 온몸이 얼
숨을 고르고 이마를 만져보니 땀으로 가득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등과 손바닥, 온몸이 땀범벅이었다.악몽을 꿨나? 하지만 꿈에서 봤던 그 언덕은 마을의 언덕이 분명했다.그리고 꿈속에서 봤던 광경은...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창문 밖을 바라보니 따스한 햇볕이 그녀의 방을 내리쬐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가 다 되었고 그녀는 며칠 만에 푹 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개를 돌려 침대 머리맡을 보자 거기에는 강지혁이 남기고 간 메모가 있었다. 그는 오늘 밀린 회사 업무를 처리하느라 일찍 출근했고 저녁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저녁 먹으러 들어오겠다고 한다.그가 남긴 메모에 임유진은 아까의 불안이 조금 가셔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기지개를 한번 켜더니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줄기가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고 임유진은 문득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면서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손은 아까 꿈속에서 그 남자아이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손이다.현수... 현수...그녀가 아는 사람 중에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은 강현수밖에 없다.그리고 아까 꿈에서 봤던 그 광경은 전에 꿨던 꿈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그 꿈에서도 역시 두 아이는 나쁜 사람에게서 도망치는 중이었고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산속에서 도망 다녔다.그때는 강현수가 이상한 말을 하는 바람에 그런 꿈을 꿨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왜지? 그리고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거지?그녀는 꿈속 남자아이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꿈에서 겪은 일이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확실한 건 임유진은 그런 경험을 한 기억이 없다.만약 이런 꿈을 꾸는 게 저번에 강현수가 했던 말 때문이라면 오늘 꿈은 뭐지? 강현수가 오늘 꿨던 꿈 얘기는 해준 적이 없는데?그리고 이상한 건 만약 정말 실제로 겪은 일이 맞다고 해도 그건 배여진과 강현수 사이의 일이어야 하는데 왜 임유진은 자꾸 그 꿈속 여자아이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꼬리에
"네가 원하는 일인데 당연히 내가 도와야지."강현수가 담담하게 얘기했다."현수야, 넌 정말 왜 이렇게 다정해?"‘현수야’라는 호칭에 그는 흠칫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걸까?"그 호칭은 아직 어색하니까 차차 적응해 나가는 거로 하자.""알겠어요."강현수의 제안에 배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생각해보면 ‘현수야’라는 호칭은 어릴 적 임유진이 배여진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날 치마가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온 임유진은 대뜸 자신이 사람을 한 명 구했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어른들은 아이가 실컷 놀다가 늦게 돌아온 핑계를 댄다고 생각해 오히려 그녀를 혼내기까지 했다.하지만 어렸던 배여진은 그녀의 얘기가 궁금했고 자세히 물어보자 임유진은 남자아이를 어떻게 구했고 그 아이의 이름은 무엇인지까지 전부 다 말을 해주었다.그때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강현수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이렇게도 쉽게 가짜 행세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물론 제일 다행인 건 임유진이 앓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열을 앓은 임유진은 마을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고 결국에는 S 시의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고열이 다 나았을 때는 그 하루의 기억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그때 당시 어른들은 어차피 하루 기억일 뿐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임유진은 그렇게 자신이 하루의 기억을 잊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배여진도 어른들이 그 얘기를 하고 나서야 임유진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됐다.그래서 지금 현재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건 그 당시의 어린 남자아이와 제삼자인 배여진 뿐이다.그녀는 이것이 마치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됐고 임유진의 기억이 이대로 영원히 묻혀있길 바라고 또 바랐다....임유진과 한지영은 지금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외할머니 장례식은 다 치른 거야?""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아버지는 만났어?"한지영이 조심스럽게 묻자 임유진이 고개를 저었다.임정호 부부는 S
"1년?"한지영은 조금 놀란 듯 보였다."혁이한테는 저녁에 얘기해보려고."말은 그렇게 했지만, 임유진은 강지혁이라면 흔쾌히 동의할 것 같았다. 이제까지 그 많은 요구를 다 들어줬던 그니까.한지영은 조금 초췌해진 친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우리 쇼핑하러 갈까? 연신 씨가 나랑 같이 포럼에 참석하려고 이 근처 백화점에서 옷을 주문해 뒀다고 했거든. 그거 찾고 나서 같이 쇼핑하러 가자."사실은 포럼이든 연회든 한지영은 다른 사람 눈에 띄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백연신은 한번 같이 가더니 꽤 기분이 좋았는지 어디든 그녀와 함께 가려고 했다.그녀를 제일 화 나게 했던 건 일과 야근을 핑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백연신은 늘 웃는 얼굴로 알겠다고 하고서는 다음 날 바로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일을 빼주거나 야근을 못 하게 한다는 것이다.두 사람은 먼저 한지영의 옷을 찾으러 매장으로 향했다. 백연신은 그저 그런 흔한 브랜드가 아닌 제일 비싼 브랜드의 옷을 주문했다.매장에 도착한 한지영이 백연신의 이름을 대자 매장 직원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옷을 가져와 그녀에게 한번 입어 볼 것을 제안했다. 마음에 안 드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수선 가능하다면서 말이다."유진아, 잠깐만 나 옷 좀 입어보고 올게."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매장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문득 뒤편 매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수 씨, 여기 엄청 비싸던데 너무 많이 사는 거 아니에요, 우리? 나는 저렴한 거라도 괜찮은데.""기왕 온 거 제일 좋은 거로 골라. 좋아하는 거 있으면 다 사."곧이어 남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현수 씨는 너무 다정한 것 같아요."배여진이 몸을 배배 꼬며 달콤하게 웃었다."날 구해준 사람한테 잘하는 건 당연한 거야."강현수는 담담하게 말을 뱉은 후 시선을 돌려 우연히 뒤쪽 가게를 쳐다봤다. 그러다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순간 몸이 얼어버렸다. 단지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가가 뜨거워졌다.그는
"난 친구랑 같이 온 거라서, 나 말고 매장 직원에게 물어보는 게 어때?"임유진이 담담하게 얘기하자 배여진은 그녀의 말대로 직원 쪽으로 다가갔다.그때 강현수가 임유진 쪽으로 걸어왔다."외할머니 일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사람은 원래 언젠가는 다 죽게 돼 있어요. 그저 누가 먼저 가느냐의 차이일 뿐인 거죠."이건... 위로인가?임유진은 고개를 들어 강현수를 바라봤다. 딱 떨어지는 슈트 차림은 그의 슬림하지만 탄탄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나게 했고 조금 차가운 듯한 얼굴은 잘생김이 더 해져 시선을 떼지 못하게 했다.연예계의 황태자인 그는 여자친구를 밥 먹듯이 바꾸는 거로 유명하다. 임유라와 헤어진 지금 그의 여자친구는 누가 될까? 배여진?강현수의 전 여자친구들은 전부 배여진의 대체품이었으니 이제는 정말 한 사람에게 충성하게 되는 걸까?"무슨 생각 해요?""아무것도 아니에요."강현수의 말에 임유진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아까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가 없다. 배여진과 어떤 사이가 되든 임유진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그저... 자꾸 그 꿈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다. 대체 뭐였을까? 꿈속의 남자아이와 강현수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거지?남자아이가 언덕에서 미끄러져 여자아이의 손을 꽉 잡았을 때 느껴졌던 그 떨림과 두려움, 임유진은 꿈에서 깨고 나서도 그 감각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임유진은 조금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릴 때 혹시...""네?"그때 배여진이 가방 하나를 들고 흥분한 얼굴로 강현수에게로 다가왔다."현수 씨, 이 가방 어때요?"그녀가 들고 온 건 한정판 가방이다. 얼마 전 한 부잣집 영애가 이 가방을 들고 사진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댓글에는 그녀의 재력과 미모를 칭찬하는 글들이 파다했다. 그래서 배여진은 만약 자신도 저 가방이 있다면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꺼번에 살 거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 마침 임유진의 입에서 이 한마디가 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