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다 너까지 잡히면 어떡해?"이건 어린 남자아이의 목소리였고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난 안 잡혀!"여자아이의 당찬 말에 남자아이는 그저 그녀를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러자 여자아이가 뭔가 고민하더니 또다시 입을 열었다."만약 잡혀도 우리는 같이 있으니까 무섭지 않을 거야!"여자아이는 남자아이의 손을 꼭 잡았고 손목에는 한 쌍의 은팔찌가 반짝거리고 있었다.두 아이는 그렇게 산속에서 도망쳤고 남자아이는 갑작스러운 상황에 직면해 당황하는 바람에 여자아이가 이끄는 대로 따라가기만 했다.그때, 남자아이가 발을 헛디뎠고 그만 언덕 아래로 미끄러져 버렸다. 손을 꼭 잡고 있던 탓에 여자아이도 뒤따라 몸이 아래로 떨어졌다. 하지만 다행히 여자아이는 떨어지는 도중 길게 뻗은 나뭇가지에 몸이 걸려 끝까지 떨어지는 건 방지할 수 있었다.여자아이는 떨어지는 와중에도 남자아이의 손을 놓지 않았고 남자아이는 두 발로 열심히 지면을 밟으려고 애썼다. 하지만 꽤 가파른 언덕이라 아이의 발은 닿지 못했고 어쩌지도 못하는 절망적인 상황에 점점 두려워 났다.아마 여자아이가 이대로 손을 놓고 그를 버릴까 봐 두려웠던 것 같기도 하다. 만약 이대로 손을 놓게 되면 여자아이는 금방 다시 언덕 위로 올라갈 수 있게 되지만 남자아이는 그대로 언덕 아래로 굴러떨어져 어떻게 될지 모른다.어릴 적부터 아버지에게서 인간의 어두운 면에 대해 배운 남자아이는 위기의 순간 인간은 자신의 이익을 위해 가감 없이 타인의 이익을 짓밟는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게다가 여자아이는 그와 처음 만난 사이이고 이대로 그의 손을 놓쳐버린다고 해도 지극히 정상적인 일일 뿐이다.하지만 무서웠다. 이 모든 걸 알고 있는데도 무서워 죽을 것 같았다. 여자아이가 이대로 자신을 버릴까 봐, 이렇게 허무하게 죽을까 봐..."야, 너..."그때 여자아이가 힘겨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남자아이는 두려움에 가득 찬 얼굴을 들어 여자아이를 바라봤다. 너무 두려운 나머지 그는 지금 온몸이 얼
숨을 고르고 이마를 만져보니 땀으로 가득했다. 그뿐만이 아니라 그녀의 등과 손바닥, 온몸이 땀범벅이었다.악몽을 꿨나? 하지만 꿈에서 봤던 그 언덕은 마을의 언덕이 분명했다.그리고 꿈속에서 봤던 광경은...임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었다.창문 밖을 바라보니 따스한 햇볕이 그녀의 방을 내리쬐고 있었다. 시간을 보니 벌써 11시가 다 되었고 그녀는 며칠 만에 푹 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고개를 돌려 침대 머리맡을 보자 거기에는 강지혁이 남기고 간 메모가 있었다. 그는 오늘 밀린 회사 업무를 처리하느라 일찍 출근했고 저녁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같이 저녁 먹으러 들어오겠다고 한다.그가 남긴 메모에 임유진은 아까의 불안이 조금 가셔지는 것 같았다.그녀는 기지개를 한번 켜더니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따뜻한 물줄기가 그녀의 몸을 타고 흘러내렸고 임유진은 문득 자신의 왼손을 바라보면서 조금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이 손은 아까 꿈속에서 그 남자아이의 손을 꽉 잡고 있던 손이다.현수... 현수...그녀가 아는 사람 중에 이 이름을 가진 사람은 강현수밖에 없다.그리고 아까 꿈에서 봤던 그 광경은 전에 꿨던 꿈과도 연관이 있는 것 같았다.그 꿈에서도 역시 두 아이는 나쁜 사람에게서 도망치는 중이었고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를 데리고 산속에서 도망 다녔다.그때는 강현수가 이상한 말을 하는 바람에 그런 꿈을 꿨다고 하지만 이번에는 왜지? 그리고 왜 이렇게 익숙한 느낌이 드는 거지?그녀는 꿈속 남자아이의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았지만 꿈에서 겪은 일이 마치 자신이 직접 겪은 듯한 그런 느낌이 들었다.하지만 확실한 건 임유진은 그런 경험을 한 기억이 없다.만약 이런 꿈을 꾸는 게 저번에 강현수가 했던 말 때문이라면 오늘 꿈은 뭐지? 강현수가 오늘 꿨던 꿈 얘기는 해준 적이 없는데?그리고 이상한 건 만약 정말 실제로 겪은 일이 맞다고 해도 그건 배여진과 강현수 사이의 일이어야 하는데 왜 임유진은 자꾸 그 꿈속 여자아이가 자신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꼬리에
"네가 원하는 일인데 당연히 내가 도와야지."강현수가 담담하게 얘기했다."현수야, 넌 정말 왜 이렇게 다정해?"‘현수야’라는 호칭에 그는 흠칫했다. 그토록 찾아 헤맸던 여자의 입에서 나온 말인데 왜 이렇게 거슬리는 걸까?"그 호칭은 아직 어색하니까 차차 적응해 나가는 거로 하자.""알겠어요."강현수의 제안에 배여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지금 생각해보면 ‘현수야’라는 호칭은 어릴 적 임유진이 배여진에게 알려준 것이다. 그날 치마가 너덜너덜해져서 돌아온 임유진은 대뜸 자신이 사람을 한 명 구했다고 얘기했다. 하지만 그녀의 말을 믿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고 어른들은 아이가 실컷 놀다가 늦게 돌아온 핑계를 댄다고 생각해 오히려 그녀를 혼내기까지 했다.하지만 어렸던 배여진은 그녀의 얘기가 궁금했고 자세히 물어보자 임유진은 남자아이를 어떻게 구했고 그 아이의 이름은 무엇인지까지 전부 다 말을 해주었다.그때의 기억이 없었더라면 강현수가 찾아왔을 때 그녀는 이렇게도 쉽게 가짜 행세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물론 제일 다행인 건 임유진이 앓았기 때문이었다. 당시 고열을 앓은 임유진은 마을 병원에서 치료를 받지 못했고 결국에는 S 시의 병원으로 갔다. 그리고 고열이 다 나았을 때는 그 하루의 기억을 다 잊어버리고 말았다.그때 당시 어른들은 어차피 하루 기억일 뿐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고 임유진은 그렇게 자신이 하루의 기억을 잊었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배여진도 어른들이 그 얘기를 하고 나서야 임유진이 기억을 잃었다는 걸 알게 됐다.그래서 지금 현재 그날 일을 기억하고 있는 건 그 당시의 어린 남자아이와 제삼자인 배여진 뿐이다.그녀는 이것이 마치 하늘이 준 기회라고 생각됐고 임유진의 기억이 이대로 영원히 묻혀있길 바라고 또 바랐다....임유진과 한지영은 지금 커피숍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외할머니 장례식은 다 치른 거야?""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아버지는 만났어?"한지영이 조심스럽게 묻자 임유진이 고개를 저었다.임정호 부부는 S
"1년?"한지영은 조금 놀란 듯 보였다."혁이한테는 저녁에 얘기해보려고."말은 그렇게 했지만, 임유진은 강지혁이라면 흔쾌히 동의할 것 같았다. 이제까지 그 많은 요구를 다 들어줬던 그니까.한지영은 조금 초췌해진 친구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우리 쇼핑하러 갈까? 연신 씨가 나랑 같이 포럼에 참석하려고 이 근처 백화점에서 옷을 주문해 뒀다고 했거든. 그거 찾고 나서 같이 쇼핑하러 가자."사실은 포럼이든 연회든 한지영은 다른 사람 눈에 띄는 일을 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백연신은 한번 같이 가더니 꽤 기분이 좋았는지 어디든 그녀와 함께 가려고 했다.그녀를 제일 화 나게 했던 건 일과 야근을 핑계로 가고 싶지 않다고 말하면 백연신은 늘 웃는 얼굴로 알겠다고 하고서는 다음 날 바로 상사에게 전화를 걸어 일을 빼주거나 야근을 못 하게 한다는 것이다.두 사람은 먼저 한지영의 옷을 찾으러 매장으로 향했다. 백연신은 그저 그런 흔한 브랜드가 아닌 제일 비싼 브랜드의 옷을 주문했다.매장에 도착한 한지영이 백연신의 이름을 대자 매장 직원은 활짝 미소를 지으며 옷을 가져와 그녀에게 한번 입어 볼 것을 제안했다. 마음에 안 드는 곳이 있으면 언제든지 수선 가능하다면서 말이다."유진아, 잠깐만 나 옷 좀 입어보고 올게."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매장 안을 이리저리 둘러보던 중 문득 뒤편 매장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현수 씨, 여기 엄청 비싸던데 너무 많이 사는 거 아니에요, 우리? 나는 저렴한 거라도 괜찮은데.""기왕 온 거 제일 좋은 거로 골라. 좋아하는 거 있으면 다 사."곧이어 남자의 목소리도 들려왔다."현수 씨는 너무 다정한 것 같아요."배여진이 몸을 배배 꼬며 달콤하게 웃었다."날 구해준 사람한테 잘하는 건 당연한 거야."강현수는 담담하게 말을 뱉은 후 시선을 돌려 우연히 뒤쪽 가게를 쳐다봤다. 그러다 익숙한 뒷모습을 발견하고는 순간 몸이 얼어버렸다. 단지 뒷모습을 보는 것만으로도 눈가가 뜨거워졌다.그는
"난 친구랑 같이 온 거라서, 나 말고 매장 직원에게 물어보는 게 어때?"임유진이 담담하게 얘기하자 배여진은 그녀의 말대로 직원 쪽으로 다가갔다.그때 강현수가 임유진 쪽으로 걸어왔다."외할머니 일 너무 슬퍼하지 마세요. 사람은 원래 언젠가는 다 죽게 돼 있어요. 그저 누가 먼저 가느냐의 차이일 뿐인 거죠."이건... 위로인가?임유진은 고개를 들어 강현수를 바라봤다. 딱 떨어지는 슈트 차림은 그의 슬림하지만 탄탄한 몸매를 그대로 드러나게 했고 조금 차가운 듯한 얼굴은 잘생김이 더 해져 시선을 떼지 못하게 했다.연예계의 황태자인 그는 여자친구를 밥 먹듯이 바꾸는 거로 유명하다. 임유라와 헤어진 지금 그의 여자친구는 누가 될까? 배여진?강현수의 전 여자친구들은 전부 배여진의 대체품이었으니 이제는 정말 한 사람에게 충성하게 되는 걸까?"무슨 생각 해요?""아무것도 아니에요."강현수의 말에 임유진은 다시 정신을 차렸다.아까 머릿속으로만 생각했던 것들은 굳이 입 밖으로 꺼낼 필요가 없다. 배여진과 어떤 사이가 되든 임유진과는 상관없는 일이니까.그저... 자꾸 그 꿈이 생각나 견딜 수가 없다. 대체 뭐였을까? 꿈속의 남자아이와 강현수는 어떤 연관이 있는 거지?남자아이가 언덕에서 미끄러져 여자아이의 손을 꽉 잡았을 때 느껴졌던 그 떨림과 두려움, 임유진은 꿈에서 깨고 나서도 그 감각이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하지만 눈앞에 있는 이 남자는 두려움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다.임유진은 조금 뜸을 들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어릴 때 혹시...""네?"그때 배여진이 가방 하나를 들고 흥분한 얼굴로 강현수에게로 다가왔다."현수 씨, 이 가방 어때요?"그녀가 들고 온 건 한정판 가방이다. 얼마 전 한 부잣집 영애가 이 가방을 들고 사진을 올린 적이 있었는데 댓글에는 그녀의 재력과 미모를 칭찬하는 글들이 파다했다. 그래서 배여진은 만약 자신도 저 가방이 있다면 사람들의 부러움을 한꺼번에 살 거라고 생각했다.그리고 그때 마침 임유진의 입에서 이 한마디가 튀
"둘이 무슨 얘기 했는데 갑자기..."배여진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강현수가 입을 열었다."임유진 씨, ‘현수야’라는 호칭 어떻게 알았어요?"순간 배여진은 등골이 오싹해지는 걸 느끼며 임유진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봤다.‘유진이가 그 호칭을 불렀다고...? 설마 기억이 돌아온 건가?’임유진의 기억이 돌아오면 배여진은 지금 누리고 있는 모든 것들을 빼앗기게 된다."그래서 어릴 때 정말 ‘현수야’라고 불렸던 거예요?"임유진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럼 꿈속 남자아이가 정말 강현수라는 건가? 꿈속에서 있었던 모든 일도 다 실제로 있었던 일이고?"그 호칭을 어떻게 알고 있냐고 물었어요."강현수가 그녀를 추궁했다."내가! 내가 어릴 때 유진이에게 알려줬어요!"그때 배여진이 갑자기 끼어들었고 임유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그리고 강현수는 배여진의 말에 그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네가 알려준 거라고?""네, 어릴 때 유진이한테 현수 씨 구해줬던 일을 얘기한 적 있어요. 그때 이름도 알려줬고요. 유진이가 아마 그래서 알고 있었나 봐요."배여진은 임유진과 자신의 행동을 바꿔서 말해버렸다.강현수의 눈동자는 다시 어둡게 가라앉았고 이내 실소를 터트렸다.‘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이미 찾고 싶었던 사람을 찾았잖아!’그렇게 되뇌었는데도 임유진의 입에서 나온 ‘현수야’라는 한마디에 그는 또다시 이성을 잃고 말았다."유진아!"그때 옷을 다 갈아입은 한지영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와보니 거기에는 뉴스에 자주 등장하던 강현수가 친구의 팔을 잡고 있었고 그 옆에는 처음 보는 여자가 서 있었다."이게 무슨..."한지영이 조심스럽게 물었다."아, 여기는 강현수 씨, 너도 알지?"임유진의 말에 한지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연예계 일이라면 빠삭한 한지영이 강현수를 모를 리가 없었다."그리고 여긴 내 사촌 언니인 배여진."임유진의 소개에 한지영은 어색하게 고개를 한번 끄덕였다.상황이 돌아가는 걸 보니 강현수와 배여진이라는 여자 사이에 뭔가가 있는 게 분명해
이유는 모르겠지만 강현수의 말을 듣는 순간 임유진은 마음 한구석이 찌릿하고 아파 났다....한지영은 임유진에게서 강현수와 배여진의 일을 전해 들은 후 입을 틀어막으며 중얼거렸다."이건 뭐 드라마도 아니고..."허구한 날 여자친구가 바뀌던 강현수가 그렇게 찾아 헤맨 여자가 바로 친구의 사촌 언니라니... 이런 우연이 세상에 또 있을까?"근데 아까 네 팔은 왜 그렇게 잡고 있었던 거야?"한지영이 물었다."뭐 좀 물어볼 게 있어서 물었는데... 예민한 부분을 건드렸나 봐, 내가."임유진은 지금 조금 혼란스러웠다. 그녀는 배여진이 왜 강현수에 관한 얘기를 자신에게 들려줬다고 했는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그녀가 기억하는 한 배여진은 한 번도 어린 시절 어떤 남자를 구해줬다는 얘기를 해준 적이 없다. 게다가 ‘현수야’라고 불리는 남자는 더더욱 없었다.아까는 타이밍이 안 맞아 제대로 물어보지 못했다."참, 그때 강현수가 너를 어릴 적 자기를 구해줬던 사람으로 착각한 적 있었잖아? 너 솔직히 말해봐, 만약 네가 정말 그 소녀라면 넌 강지혁과 강현수 중 누구를 선택할 거야?"한지영은 친구 연애사에 들뜬 여고생 같은 얼굴을 했다.그 말에 임유진은 불현듯 그 꿈이 떠올랐다. 그러다 이내 꿈은 꿈이고 강현수를 구해준 건 배여진이라며 생각을 정리했다."그런 일이 생길 리가 없잖아."임유진이 답했다."그리고 무슨 일이 있든지 내가 선택할 사람은 혁이뿐이야.""너 강지혁 씨 정말 많이 사랑하는구나."한지영은 조금 감개무량해졌다. 전에는 출소한 후 친구의 인생이 걱정됐던 것도 사실이다. 전과가 있는 사람이 살아가기에는 너무 각박한 세상이니까. 하지만 이제는 강지혁이라는 남자도 만나고 곧 결혼도 하게 된다.이건 뭐 강현수와 배여진의 사연보다 더 드라마 같은 상황이 아닐 수 없었다."응."임유진은 고개를 끄덕였다.전에는 무섭고 두렵기도 했지만, 이제는 확실히 말할 수 있다. 임유진은 강지혁을 사랑하고 있다.저녁.임유진이 강지혁을 향해 물었다."우
"사실 우리 지금도 결혼한 거랑 다를 거 없잖아."생각해보면 두 사람은 지금 같은 집에 살고 있고 심지어는 같은 침대까지 사용하고 있다.결혼과 다른 점이 있다면 그저 나라가 허락했다는 종이 쪼가리만 없을 뿐이다."달라."강지혁이 단호하게 말했다."사람들 눈에 누나는 강씨 가문 사모님이 아니잖아. 나는 누나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내 거였으면 좋겠어. 물론 나도 하나부터 열까지 모두 누나 것이 되고 싶고."임유진은 강지혁이 형식적인 절차를 매우 중요하게 생각하는구나 싶었다."결혼했다가 이혼하는 커플도 있어."아무런 생각 없이 내뱉은 말에 강지혁의 얼굴은 무섭게 굳어졌고 칠흑 같은 눈동자가 더욱더 어둡게 가라앉았다."그러니까 누나 말은 우리도 언젠가 이혼할 거라는 소리야?"임유진은 아까부터 자신의 팔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점점 더 힘이 들어가고 있음을 느꼈다."그런 뜻 아니야. 그냥 결혼했다고 해서 우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서로의 것이 되는 게 아니라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 결혼은 사람이 하는 거지 그딴 종이 쪼가리가 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야."임유진은 강지혁의 눈을 마주하며 계속 말을 이었다."우리가 서로를 사랑할 때면 우리는 서로의 것이겠지만 만약 사랑하지 않게 되는 날이 오면 그때는 아무리 나라에서 결혼한 사이라고 지정해도 아무것도 아닌 사이가 되겠지.""나 안 사랑할 거야?"강지혁은 이글거리는 눈동자와는 다르게 꽤 조심스럽게 묻고 있다.그러자 임유진이 입꼬리를 살짝 말아 올리며 웃었다."혁아, 내가 너를 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어."강지혁은 그녀를 위해 많은 걸 해주었고 절망 속에 허우적거리는 그녀를 구제해주었으며 기꺼이 사랑해주었다. 이런 남자를 어떻게 사랑하지 않을 수 있을까? 게다가 언제부턴가 그를 향한 사랑이 점점 더 커져만 가는 걸 느끼고 있다.하지만 그녀의 말에 강지혁의 마음은 더 가라앉을 수밖에 없었다.사랑하지 않을 이유가 어디 있냐고? 그럴 이유가 있다는 게 문제였다!"날 사랑해줘. 내 곁을 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