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지금 여자친구가 화려한 드레스를 입고 있는데 그의 머릿속에는 어젯밤 광경이 수없이 떠올랐다. 바로 강지혁과 임유진의 얼굴이다.그는 지금까지도 어젯밤에 본 모든 것이 꿈만 같다.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임유진과 강지혁에게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자신의 약혼자가 정신을 딴 데 팔고 있는 모습을 보자 진세령은 불쾌하여 눈살을 찌푸렸다.“너 왜 그래? 어제도 정신을 딴 데 팔더니. 오늘도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어? 나랑 약혼하고 싶지 않으면 그냥 말해.”소민준은 흠칫 놀라더니 얼른 미소를 지었다.“그럴 리가. 내가 어떻게 너와 약혼하고 싶지 않을 수 있어. 알잖아. 내 마음에는 너밖에 없어.”“확실해?”진세령이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럼 임유진에 대해 진짜 아무런 감정이 없어?”소민준은 순간 표정이 굳더니 어색하게 말했다.“왜 또 그녀를 언급하는 거야. 이미 헤어진 지 3년이 되었는데 어떻게 아직도 감정이 있을 수 있겠어.”“그럼 왜 그녀에게 일자리를 소개해 주고 싶었어?”그녀가 추궁했다.“그냥 불쌍해 보였을 뿐이야.”소민준이 말했다.“뭐가 불쌍해, 우리 언니가 더 불쌍해, 우리 언니는 임유진 때문에 목숨을 잃었어.”진세령이 콧방귀를 뀌며 말했다.“다시 그녀를 불쌍히 여기면 강지혁이 너에게 손 쓸 때 우리는 돕지 않을 거야.”소민준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만약 전이었다면 그는 자연히 여자친구의 말이 틀렸다고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임유진의 존재가 있기에 그렇지 않을 것이다.그는 잠시 망설이다가 떠보듯 물었다.“세령아, 혹시 최근 강지혁에게 새로운 여자가 생겼어?”“그럴 리가.”진세령이 즉시 부인했다.“강지혁은 여자를 가까이 하지 않아. 3년 동안 여자가 없었어.”그래서 외부에서는 모두 강지혁이 진애령을 아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진 씨 가문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안다.그러나 진 씨 가문도 굳이 이런 오해를 폭로하지 않을 것이며 심지어 오히려 다른 사람이 더욱 깊이 오해하기
고이준은 웃는 듯 마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강 대표님을 만나면 알게 될 거예요.”소민준은 갈수록 두근거린다.차가 강 씨 저택 입구에 세워지자 소민준이 고이준을 따라 집에 들어가자 강지혁이 소파에 앉아 손에 청첩장 하나를 가지고 놀고 있었다.소민준이 다가가보자 그 청첩장은 자신과 진세령의 약혼식 청첩장이었다.“또 만났네요.”강지혁이 담담하게 말했다.소민준은 흠칫 놀랐다. 그 시각 강지혁은 핸드메이드 정장을 입고 있었고 앞머리를 뒤로 넘겨 넓은 이마를 드러내고 날렵한 코, 복숭아 같은 눈동자, 그리고 섹시한 얇은 입술까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분위기를 품기고 있다.어쩐지 많은 여자가 그를 집착했다. 심지어 상류층에서도 적지 않은 사람들이 모두 목숨을 걸고 강지혁의 주의를 끌려고 한다. 강지혁의 신분 때문만이 아니라 그의 용모 때문이었다.하지만……복숭아 같은 눈동자가 소민준을 노려볼 때 소민준은 마치 맹수에게 주목받는 느낌이 들었고 피가 순식간에 굳는 느낌이 들었으며 호흡마저 가빠졌다.마치……어젯밤 상대가 쳐다봤을 때의 느낌이었다.다만 어제 그는 어두운 곳에 있었고 강지혁은 밝은 곳에 있었다.당시 그는 강지혁을 똑똑히 볼 수 있었지만 아마 강지혁은 그를 알아보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 그는 강지혁의 시선 아래에 있다.그때 소민준이 멋쩍게 웃었다.“맞아요.”마음속으로 강지혁이 말한 것이 어젯밤을 의미하는지 추측하고 있다.“어젯밤 일을 다른 사람에게 말했나요?”강지혁은 전혀 신경을 쓰지 않는 것 같다.하지만 소민준은 간담이 서늘하다!아니나 다를까……어젯밤 일이다! 비록 소민준은 그런 예감이 들었지만 강지혁이 직접 물으니 그 추측들이 맞다고 생각했다.그러니 강지혁은 진짜 임유진과 사귀고 있었다!“아니요.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았어요,”소민준이 말했다.“잘하셨어요.”강지혁이 말했다.“다른 사람이 이 일을 아는 걸 바라지 않거든요.”소민준은 대답을 하면서 상대가 자신을 훑어보는 것을 느끼고 자기도 모르게 침을 삼켰다. 그는
복숭아 같은 눈동자가 순간 차가운 눈빛으로 변하자 소민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묻지 말아야 할 것은 묻지 말아야죠. 소 대표님은 이런 것도 모르나요?”옆에 있던 고이준이 말문을 열었다.소민준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어색해하며 자리를 떴다.한편 강지혁은 소파에 기대어 싸구려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에는 번호 하나만 저장돼 있었다.그가 유일하게 저장된 번호를 누르자 잠시 후 핸드폰 반대편에서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저녁에 뭐 먹고 싶어? 내가 포장해 갈게.”그는 방금 전 차가운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부드러웠다.……저녁에 임유진은 티슈를 들고 어머니의 액자를 닦았다. 그녀는 특별히 작은 상을 사 평소에 어머니 사진을 그 상에 올려놓았고 며칠마다 사진에 쌓인 먼지를 닦았다.어머니의 유물들은 모두 임 씨 가문에 있으니 그녀가 어머니와 관련된 물건 중 갖고 있는 건 사진밖에 없다.그리고 그녀가 사진을 닦을 때 강지혁은 한쪽에 앉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참, 혁아. 곧 설이 다가오는데. 혹시……차표 샀어?”최근 며칠 환경위생과의 회사 동료들이 구정에 집에 갈 기차표를 사고 있어 임유진이 물었다.강지혁은 순간 그녀가 묻고 싶은 걸 알아차렸다.“난 차표 살 필요 없어.”“집에 안 가도 돼?”그녀가 의아해했다.“난 누나 여기 말고는 집이 없어.”그는 강 씨 자택에 여러 해 동안 살았지만 여태껏 집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가족이 없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친척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보통 설에는 친척 집을 다니는 게 정상이다.그녀가 질문을 하려고 할 때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친척이 있지만 굳이 갈 필요는 없어.”비록 할아버지도 가족이기는 하지만 강 씨 가문은 가족애라는 것이 없고 할아버지가 필요한 것도 단지 강 씨 가문의 상속자일 뿐이다.그가 충분히 우수하고 강하면 할아버지가 원하는 것이고 그가 강하지 않다면 설령 할아버지의 친손자라 할지라도 매몰차게 쫓겨날 것이다.하물며 그의
임유진은 자신이 그를 처음 만난 그 자리가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곳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미안해.”그녀가 말했다.“아버지가 돌아간 것은 자업자득이니 누나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강지혁이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자업자득?”그녀는 의아해했다. 그가 아버지의 죽음을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자업자득이 아니면 뭐야?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해 상대가 이용할 가치가 없으니 곧바로 아버지를 버렸어. 아무리 무릎을 꿇고 애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 그러다 결국에는 그 자리에서 얼어 죽은 거야.”그의 표정은 아주 평범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했고 심지어 목소리도 평소와 같았다.그러나 그의 몸은 마치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 같다.마치 임유진이 그를 처음 봤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다.“혁아.”그녀가 그를 불렀다.그가 머리를 들어 칠흑 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누나가 보기에는 자초한 것이 아니야?”그녀는 목이 메어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뗐다.“그 여자, 혹시 네 엄마야?”그는 아무 표정도 없이 침묵하고 있었지만 그 두 눈동자는 고통을 스쳐 지나갔다.그 순간 그녀는 답을 알았다.그녀는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마치 지금, 어떤 말도 무의미한 것 같았다. 어떤 일은 겪어본 사람만이 고통을 안다.그녀는 일어서서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껴안았다.그는 그녀의 몸에 기대어 숨결을 느꼈으며 볼 옆으로 그녀의 온기가 전해왔다.그녀의 심장 박동 소리가 옷을 사이에 두고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그는 이렇게 계속……듣고 싶었다.……“엄마, 가지 마…….”어리고 야원 몸이 무릎을 꿇고 짐을 싸서 떠나는 여자에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있다.그러나 소용없다. 여자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단호하게 떠나려 한다.상대가 떠나려 하자 남자아이는 손을 뻗어 어머니를 잡으려 했다.그러나 그 순간 그는 매몰차게 밀려나더니 곧이어 가슴을 파고드는 통증이 전해왔다…….아프다……너무 아프다!누가 이런 고통
임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 드디어 깼어.”그는 벌떡 앉았다. 방금 그는 어렸을 때의 그 장면을 꿈꿨다. 꿈에서 그가 그 여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했다……잠들기 전에 그 여자 얘기가 나와 그런 꿈을 꾼 건가?“그냥 꿈을 꾸었을 뿐이야.”그가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자 자신의 잠옷 단추가 이미 풀린 채 가슴을 드러냈다.“내 옷은…….”임유진은 순간 어색해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네가 자꾸……아프다고 해서 네 몸에 뭐가 있을까 봐……그래서 단추를 풀고 봤어.”그가 그녀를 보자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장담할게. 내가 보기도 전에 네가 깼어. 난 아무것도 못 봤어.”그녀는 황급히 설명했다. 하지만 설명할수록 오히려 애매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누나가 봤다 해도 괜찮아.”강지혁이 말했다.임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하마터면 자신의 침에 사레가 들 뻔했다.강지혁은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얼마나 비뚤어진 생각을 할지 모를 것이다.“너 몸은……이제 안 아파?”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더듬거리며 말했다.“응. 안 아파.”그는 고개를 숙이고 잠옷의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그녀는 시선을 목에 고정하려고 노력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의 가슴을 힐끗 보더니 갑자기 그의 잠옷을 벗겼다.“너 여기 왜…….”그녀는 물끄러미 그의 가슴 위치에 흉터를 바라보았다. 비록 흉터가 이미 옅어졌지만 그 당시의 상처는 아주 심했을 것이다.“작은 상처일 뿐이야.”그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손을 들어 그의 상처를 가볍게 만졌다. 그가 방금 잠결에 아프다고 소리치며 끊임없이 이곳을 만졌다. 바로 이 상처 때문일까?몇 년이 지나도 꿈에서 아프다고 외치는 상처가 어찌 작은 상처일 수 있겠는가?그 당시 그가 이 상처를 입었을 때 얼마나 아팠을까?임유진은 총에 맞은 것처럼 가슴이 너무 아팠다.“어떻게 이런 상처를 입은 거야. 언제 다쳤어?”그녀가 중얼중얼 물었다.그의 몸은 약간 경직되
“혁아!”그녀는 큰소리로 그를 부르면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았다.순간 그는 정신을 차렸고 칠흑 같은 눈동자도 점차 초점이 잡히더니 머리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만 눈빛은 복잡미묘했다.“왜 그러는 거야?”그녀가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그는 아주 쓸쓸해 보였다.“괜찮으면 됐어.”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너 방금 마치…….”그녀는 잠시 고민했다.“곧 깨질 것같은 유리 같았어. 깜짝 놀랐어.”“곧 깨질 것같은 유리?”그는 싱긋 웃더니 차가운 눈동자가 곧 평소처럼 바뀌었다.“누나, 이 세계에서 날 깰 사람은 없을 거야.”그녀는 방금 그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누나는 영원히 날 떠나지 않을 거지?”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가 싱긋 웃었다.“예전에도 말했잖아? 네가 날 버리지 않으면 난 널 버리지 않을 거라고.”“맞아. 말 한 적 있다는 걸 깜빡했어.”그는 중얼거리며 두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으면서 그녀의 존재를 느꼈다.분명히 그녀는 그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왜 그의 마음은 오히려 불안해진 것일까? 언젠가 그녀가 그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되면 그를 떠날까 봐 두려운 걸까?혁이는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는데 강지혁은? 가능할까?……소 씨 자택 거실에서 소민준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다.“민준아, 세령이가 강지혁의 비서가 널 데려갔다고 말하던데 왜 갑자기 단둘이 만난 거야?”강지혁에 대해 말하자 소민준의 아버지는 조금 두려워 했다. 소 씨 가문은 강 씨 가문과 다르다. 현재 소 씨 가문의 모든 사업은 진 씨 가문과의 혼인 때문에 되살아났고 소민준의 아버지는 소 씨 가문이 구사일생 했다고 생각했다.그는 강지혁이 소 씨 가문에 대한 편견이 있어 혼인이 막힐까 봐 매우 두려웠다.“아무것도 아니에요.”소민준이 말했다.“세령이에게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고 나한테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거야? 아무 일도 없으면 강지혁이 왜 비서를 시켜 널 데려오
임유진 얘기를 꺼내자 소민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임유진이 교통사고를 낸 뒤에 소민영은 영애들의 파티에서 소 씨 가문이 말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너무 창피했다.그리고 자신의 오빠가 진세령과 사귀고 나서야 비로소 아무도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임유진 때문에 소 씨 가문에 재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생겼어요. 임유진은 오빠와 어울리지도 않아요. 지금은 환경미화원으로 일한다면서요? 정말 창피해요. 애당초 판사는 형량을 왜 3년밖에 내리지 않았대요? 나 같으면 적어도 몇십 년을 판결할 거예요!”소민영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임유진을 말했다. 하지만 소민준은 그녀가 이렇게 말할수록 더욱 간담이 서늘해졌다.임유진은 지금 강지혁의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비록 강지혁이 두 사람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명확히 말한 적이 없다고 해도 같은 남자로서 소민준은 짐작할 수 있다.“그만해. 민영아, 더 이상 그녀에 대해 말하지 마. 앞으로 임유진을 만나면 예의를 갖추는 게 좋겠어.”소민준이 말하자 소민영은 불만을 토로했다.“오빠, 왜 그래요? 예전에는 내가 이렇게 말해도 아무런 얘기가 없더니 왜 이제는 그녀의 편을 들어요?”“민준아, 너 설마 임유진에게 미련 있는 건 아니겠지?”소민준의 엄마는 걱정했다.그러자 소민준의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렸다.“생각도 하지마. 임유진은 소 씨 가문에 절대 못 들어와.”사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만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어 소민준은 머리가 아팠다.“저는 임유진에게 그 어떤 감정도 없어요. 하지만 임유진은 우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에요! 저는 여기까지만 말할 수 있어요!”“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고요?”소민영은 코웃음을 쳤다.“오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임유진은 고작 환경미화원인데 우리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고요?”“아무튼 내 말을 들으면 돼. 소 씨 가문을 해치지 말고!”소민준은 엄하게 경고했다.소민준의 아버지는 여러가지를 많이 경험해봤기에 아들이 이렇게 말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겼
“그럼 네 생각에는 그녀가 내 곁에 남아 있기를 원할 것 같아?”강지혁이 묻자 고이준은 조금 의아했다.“대표님은 임유진 씨와 함께하기를 원합니까?”‘이 게임은 대표님이 임유진에게 진짜 신분을 알려주면 끝나는 게임인 걸까? 아니면 대표님은 임유진 씨에게……진짜 다른 감정이 생긴 걸까?’여기까지 생각한 고이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대표님은…….”그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빨리 말해!”강지혁이 명령했다.“대표님, 설마 임유진 씨를 사랑하게 된 거예요?”고이준이 말했다. 하여 대표님은 임유진이 모르게 그녀를 돕고 있고 이 게임이 끝나더라도 임유진이 그와 함께하길 원하는 게 아닐까?강지혁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사랑, 그럴 리가? 그가 어떻게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될 수 있겠는가, 아버지를 보고도 그런 감정이 들 수 있을까? 영원히 그 누구든 사랑하면 안 된다. 그래야 자신의 존엄이 다른 사람에게 밟히지 않는다.그는 기껏해야 임유진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그 여자의 체온, 숨결은 그를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한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이준은 흠칫하며 곧바로 대답했다.“네.”……노란 불빛이 사람을 매혹시킨다.이한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있는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강지혁은 이런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무슨 이유인지 오늘은 참석했다.“어떻게 올 생각을 했어?”그가 다가가서 물었다.그와 강지혁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초중, 고중까지 같은 반 친구였기에 그는 당연히 강지혁이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떠들썩한 곳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갑자기 생각나서 온 거야. 특별한 이유가 필요해? 너희도 날 자주 불렀잖아?”강지혁이 말했다.비록 이렇게 말하지만, 이한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바로 이때 화사한 옷차림에 정교한 화장을 한 여자가 다가와 강지혁에게 말을 걸었다.이한은 그가 반드시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강지혁은
그래서 소민아는 어떻게든 그 전에 강지혁의 마음을 잡아야만 했다.소민아는 남자들을 꼬실 때 쓰던 청순한 미소를 지으며 강지혁을 맞이했다. 그녀는 원체 얼굴도 예쁘고 또 몸매도 좋았다.만약 예쁜 얼굴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돈 많은 남자의 시선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시선을 끈 것까지는 좋았지만 혼전임신으로 부잣집에 시집가려 했던 그녀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남자 쪽 집안에서 그녀의 배가 잔뜩 불러있는데도 그녀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으니까.소민아는 당시 아이를 이미 밴 상태였기에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반드시 돌아봐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어코 아이까지 낳았다.하지만 그럼에도 남자 쪽 집안은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녀의 딸까지도 모른 척했다.“회장님, 오셨어요? 안나가 회장님 보고 싶다고 계속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어요. 얘도 참, 나한테는 안 이러면서 회장님은 엄청 좋아한다니까요.”소민아가 말했다.그리고 소민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안나가 강지혁에게 안기려는 듯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쌀쌀맞은 강지혁의 눈빛에 소안나는 결국 겁을 먹고 중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고는 조금 눈치 보는 말투로 얘기했다.“아빠, 보고 싶었어요...”강지혁은 소씨 모녀를 한번 훑더니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한마디 했다.“늦었으니 이만 가봐.”“하지만... 안나는 아빠랑 여기서 같이 자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소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민아가 가르쳐줬던 그대로 얘기했다.소민아는 아이에게 반드시 양부인 강지혁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하며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어야만 앞으로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먹고 예쁜 옷도 입으며 마치 공주님처럼 살 수 있다고 했다.아이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일단은 소민아가 시키는 건 뭐든 하기로 했다.아이는 공주가 되고 싶었고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지혁은 아
아마 지금의 강지혁이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의 아들인 강선율일 것이다.물론 겉으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말이다.고이준은 두 부자지간의 평소 모습을 떠올리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만약 임유진이 살아있었다면, 만약 강지혁이 그녀를 향한 감정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강지혁은 아마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표현도 하며 더 많이 사랑해줬을 것이다. 보통의 아버지들처럼 그렇게 아들과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분위기가 아니라 말이다.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고 강지혁은 임유진을 잊어버린 대가로 살 수 있게 됐으니 여러모로 다행인 결과였다.“회장님은 사모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셨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내가?”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주위에서 임유진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는 마치 책이라도 읽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히 자기 얘기인데도 전혀 다가오는 바가 없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만약 내가 정말 그 여자를 그토록 사랑했다면 이렇게도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겠지. 그런데 난 그 여자와의 모든 기억을 다 잊었어. 그렇다는 건 내 기억에 남을 만한 여자는 아니었다는 소리야.”강지혁이 차갑게 말했다.고이준은 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의 기억이 사라진 게 김재호 때문이라는 걸 그는 말할 수 없었다.기억을 잃은 것으로 그때의 감정을 다 지울 수 있게 됐는데 만약 다시 기억이라도 났다가는 강지혁이 또다시 무너질 테니까.차량이 강씨 저택에 멈춰서고 강지혁이 차 안에서 내렸다.그리고 집사는 그런 강지혁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건넸다.“소안나 아가씨와 소민아 씨가 와 계십니다.”집사가 말한 소안나가 바로 강지혁이 입양한 딸이었다. 그런데 입양이라고는 하나 생모가 살아있어 합법적인 입양절차는 밟지 못했다. 그러나 강씨 가문은 대외적으로 소안나를 입양했다고 얘기했기에 사람들은 입양절차 같은 것이 없어도 그녀가 강씨 저택에 양녀인 것을
“강지혁, 너...!”강현수가 뭐라 말하려는데 이한이 다급하게 달려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지혁아, 신경 쓰지 마. 현수 이놈이 아까 술을 좀 많이 마셔서 헛소리하는 것뿐이야.”이한은 말을 마친 후 얼른 강현수의 손을 잡으며 옆으로 잡아당겼다.하지만 그의 손에 끌려갈 강현수가 아니었다.“놔. 강지혁한테 확실하게 물어야 할 게 있으니까.”“현수야. 너 오랜만에 돌아온 거잖아. 안 그래도 너랑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데 지금 갈까? 기왕이면 다른 애들도 부르자, 어때?”이한이 필사적으로 화제를 바꾸며 강현수를 설득했다.그런데 그때 가만히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한아, 현수 놔줘. 나 때문에 일부러 왔다는데 궁금한 거 다 해결하게 하고 보내야지 않겠어?”이한은 그 말에 속으로 제발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빌며 강현수의 손을 놓아주었다.강현수는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지혁을 보며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강지혁이 맞나 싶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어쩌면 이런 느낌이 드는 게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연락 한번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강현수는 지난 5년간 일부러 더 강지혁과 만나는 것을 피했고 그에게 먼저 연락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임유진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강지혁과 만나면 더 고통스러워질 게 뻔했으니까.“유진이를 아직도 사랑해?”강현수가 물었다.“아니. 안 사랑해.”시원하고도 명쾌한 대답이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대답 들었으니 이제 만족해?”강현수는 그의 대답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강지혁의 두 눈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정말 아무런 동요도 없었으니까.정말 더 이상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강현수는 좀처럼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강지혁한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강지혁이 파티장에서 나오자 고이준이 예를 갖춰 차량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고이준은 오늘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강
이한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하지만 되도록 강지혁 앞에서 유진 씨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더 이상 유진 씨에게 별다른 마음이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들 입에서 유진 씨 이름이 나오는 걸 썩 좋아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강지혁이 정말 유진이를 잊었다고...?”강현수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그럼 뭐 이미 죽은 사람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까? 현수야, 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잖아. 물론 강지혁의 아들까지 낳은 여자는 흔하지 하지만...”이한은 강지혁의 아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는 이제 고작 5살밖에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강지혁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그런지 머리는 지나치게 똑똑하고 또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냉랭한 구석이 있었다.실제로 이한은 강지혁의 아들과 한번 만났다가 뼈도 못 추리고 벙찐 얼굴로 5살짜리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만 했다.그리고 그날 그는 그 꼬맹이가 제 아들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아들이 있었으면 아마 평생을 아들에게 잔뜩 눌린 채로 살았을 테니까.강지혁의 아들을 제압할 수 있는 건 강지혁뿐이었다.강현수는 이한의 말에 표정이 점점 급격히 어두워졌다.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라고?그 여자 때문에 강지혁은 하마터면 미친놈이 될 뻔했는데 그렇게도 사랑했던 여자를 고작 5년도 안 돼서 잊어버렸다고?강현수는 와인을 한입에 마셔버리더니 이내 잔을 내려놓고 강지혁 쪽으로 걸어갔다.“야, 현수야!”이한이 뒤에서 강현수를 불렀다.‘저 녀석 설마 지혁이 앞에서 유진 씨 얘기를 꺼낼 생각인가? 설마... 저 녀석이야말로 아직도 유진 씨를 잊지 못한 거 아니야?!’이한은 즐거운 파티장에서 임유진 때문에 두 사람이 괜한 소란이 일으킬까 봐 얼른 강현수의 뒤를 따라갔다.실제로 두 사람은 임유진 때문에 하마터면 치고받고 싸울 뻔하기도 했으니까.강현수가 강지혁의 앞에 멈춰 서자 강지혁과 얘기를 나누던 남자가 얼
강지혁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또 이렇게 마치 임유진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울분과 속상함을 잔뜩 털어놓았다.그런 그를 보며 강현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을 결국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 뒤로 강현수는 해외 시장을 넓히는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며 S 시를 떠났다. 사실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는 일이었지만 그는 당시 S 시에 있는 게 숨이 막히고 또 너무 고통스러워 자신이 직접 가기로 했다.하지만 해외로 가서도 그는 여전히 임유진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다. 그는 당시 질투 때문에 그녀를 모른 척했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지속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 만약 그때 차에서 내려 그녀의 사정을 들어줬으면 그녀가 강지혁과 결혼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그리고 차라리 그때 임유진이 아무리 원치 않아도, 아무리 강지혁을 사랑한다며 버텨도 억지로라도 그녀를 데리고 갔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렇게 했으면 임유진은 꽤 오랜 시간 그를 미워했을 테지만 적어도 이 세상과 완전히 작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강현수가 시선을 내리며 조금 어두운 얼굴로 과거를 회상하던 그때 익숙한 누군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강현수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 남자는 다름 아닌 그와 강지혁의 오랜 친구인 이한이었다.이한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언제 돌아온 거야?”“며칠 전에.”강현수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답했다.“돌아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해줬어야지. 오늘 파티에 참석 안 했으면 너 왔는지도 몰랐을 거 아니야.”이한이 불만인 듯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이제 알았잖아.”강현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강지혁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딸을 하나 입양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그리고 그 딸의 친모랑 꽤 사이가 가깝다지?”강현수는 줄곧 해외에만 있었지만 강지혁의 소식은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그래서 강지혁이 2년 전에 웬 여자아이를 한 명 입양하고 그 아이의 엄
모든 건 다 강문철의 시나리오대로였다. 딱 한 가지, 임유진이 정말 강지혁을 위해 목숨을 내걸었다는 사실을 빼고 말이다.물론 임유진이 천만분의 일의 확률로 정말 그런 선택을 했을 때를 대비해 미리 대책을 마련해두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유진의 목숨을 살려주라는 것까지만 얘기했을 뿐 그 뒤의 일은 김재호에게 얘기해주지 않았다.그래서 김재호는 어쩔 수 없이 지금부터는 자기가 직접 이후의 일을 설계해야만 했다. 물론 그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는 그조차도 모르지만 말이다.강문철은 강지혁에게 약점이 없기를 바랐다. 그래서 제일 큰 약점이자 유일한 약점이 임유진을 처리해버렸다. 그러나 결국 강문철은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강지혁에게도 졌고 임유진에게도 졌다.‘만약 회장님이 살아계셨다면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생각을 달리하시지는 않았을까?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정말 맞는 일일까?’김재호는 속으로 되뇌다 쓰러진 강지혁을 잠깐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곁으로 다가가 강지혁만 들을 수 있게 나지막이 속삭였다.“만약 임유진 씨가 대표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맞다면 그 언젠가 다시 대표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겠죠. 하지만 만약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저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는 뜻이겠죠.”...5년 후.화려한 파티장 안은 늘 그렇듯 S 시의 부잣집 자제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더 눈에 띄는 건 단연코 GH 그룹의 회장인 강지혁이었다.이제 고작 34세밖에 안 된 나이로 회장직에 오르게 된 그였지만 그는 강문철이 세상을 떠난 후 5년간 완벽하게 회사를 운영해 나가며 진정으로 회사의 주인이 되었다.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에게는 아들과 양녀가 각각 한 명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자들은 늘 그의 눈에 들고 싶어 하며 틈틈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노렸다.그리고 오늘도 역시 여자들은 파티라는 훌륭한 교류 장소를 빌려 그와 거리를 좁혀가며 강지혁과 인사를 나눌 때 은근히 눈빛을 던졌다.하지만 강지혁은 마치 감정이라고는 없
고이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유골함이라니... 설마...!’그는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강지혁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지혁은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듯 김재호의 손에 든 유골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유진이는...?”그러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고 말을 내뱉었다.“바로 앞에 계시잖아요.”김재호가 유골함을 가리키며 말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다시 한번 큰소리로 물었다.“유진이는 어디 있냐고!”그러자 김재호가 피식 웃었다.“대표님,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임산부였던 몸으로 정말 살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상황에서 아이 하나 남긴 것도 천운이었습니다.”강지혁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들어서는 안 될 얘기를 들은 것처럼 흥분하며 김재호를 향해 달려들었다.그런데 그때 그의 행동을 예상한 건지 김재호가 유골함을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유골함이 산산조각이 나고 안에 담긴 임유진 씨의 유골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져도 괜찮으시면 얼마든지 주먹을 휘두르세요.”그 말에 강지혁의 주먹이 멈췄다.그는 이를 꽉 깨물며 김재호를 노려보더니 이내 그의 손에서 유골함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유골함이 부서질 듯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유골이라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당시 아버지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들었을 때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순간인 줄 알았는데 임유진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드니 그때보다 더한 고통이 밀려드는 게 느껴졌다.임유진의 화사했던 미소와 그녀의 달콤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이렇게도 생생한데 이제는 두 번 그녀를 다시 만날 수도 없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고?“혁아, 사랑해.”“혁아, 나는 너랑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있는 행복한 가정을 꼭 이루고야 말 거야.”“혁아, 널 용서할게.”“널 용서하기로 한 거 아이들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잘 살아.”진지했던 얼굴, 행복해하며 웃던 얼굴, 조금은 힘들게 미소짓
“누가 대문 바로 앞에 아이를 두고 갔다고 경호 실장님이 얘기해줬어요. CCTV를 돌려보니 김재호 비서더라고요.”집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도련님, 이 아이... 도련님 어릴 때와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집사는 갓난아기 시절의 강지혁을 본 적이 있다.당시 강선우는 울고 있는 강지혁을 품에 소중히 안은 채 강씨 저택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사랑스러운 손주를 봐서 강문철이 자신의 아내를 받아주길 바라면서 말이다.하지만 강문철은 강지혁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강선우까지 필요 없다며 아주 단호하게 두 사람을 내쳤다.“이 집 문턱을 넘고 싶으면 그 여자를 버리고 와!”그렇게 강선우는 어쩔 수 없이 아기였던 강지혁을 데리고 다시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집사는 그때 강선우의 품속에서 목 놓아 울던 아이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기에 경호 실장에게서 아이를 전해 받은 후 아주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강지혁은 굳어버린 몸을 일으키더니 눈을 서서히 크게 뜨며 마치 신기한 것을 본 듯 말했다.“나와... 닮았다고?”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려있었다.“네, 가까이에 와서 한번 봐보세요.”집사의 말에 강지혁은 몸을 살짝 휘청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고이준은 집사와 그의 품에 안긴 아이 덕에 간신히 다시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집사의 품에 안긴 아이는 여전히 무척이나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얼굴이 핑크색이다 못해 이제는 빨갛게 달아오르기까지 했다.‘설마... 유진이가 낳은 아이인 건가? 하지만... 그러면 아이가 세 명이어야 하는데? 왜 한 명이지? 그리고... 유진이는 어디 있지? 왜 아이만 있는 거지?’강지혁의 머릿속은 지금 질문으로 혼란스럽게 휘몰아쳤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고 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전화기 너머 상대의 말을 들은 후 다급하게 강지혁을 불렀다.“대표님, 김재호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대표님께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답니다!”강지혁은 그 말에 발걸음
강씨 저택.고이준은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강지혁이 있는 침실의 문을 열었다.방안을 들여다보니 S 시의 꼭대기에 군림해있는 남자가 임유진의 옷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리고 그런 그의 주위에는 임유진의 어린 시절 사진부터 최근에 찍은 사진까지 한가득 널려있었다. 사진 속 그녀는 항상 환하게 웃고 있었다.“대표님...”고이준이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새로운 프로젝트에 관한 미팅에 이제는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결재해주셔야 할 서류들도 있고요. 이대로 계속 손을 놓고 계시다가는...”“유진이 소식은 아직이야?”잔뜩 잠긴 목소리가 고이준의 말을 끊었다. 다만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는 상태였다.마치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고 있는 이 순간을 계속해서 느끼려는 사람처럼, 마치 지금 눈을 떠버리면 사랑하는 이의 숨결을 완전히 빼앗겨버릴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그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네,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임유진을 찾아 헤맨지도 벌써 40일이나 지났다. 긴 시간에 지친 수색대원들은 이쯤 되면 포기할 때도 됐다며 이 이상 수색해봤자 아무런 가망도 없다고 했다.하지만 고이준은 그 말을 강지혁에게 전할 수 없었다. 전하면 강지혁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유진아,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얘기 좀 해줘, 응? 제발...”강지혁이 품에 있는 옷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얼굴을 완전히 옷에 파묻었다.“나한테 잘살라고 했지? 그런데 유진아,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어... 네가 없는데...”“대표님,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사모님께서 하늘에서 대표님의 이런 모습을 보시면 과연 좋아할까요? 오히려 속상하지 않겠습니까?”보다 못한 고이준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하지만 그는 말을 내뱉자마자 1초도 안 돼 바로 후회했다. 굳게 닫혀있던 강지혁의 눈이 번쩍 떠지며 그를 아주 무섭게 노려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