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 드디어 깼어.”그는 벌떡 앉았다. 방금 그는 어렸을 때의 그 장면을 꿈꿨다. 꿈에서 그가 그 여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했다……잠들기 전에 그 여자 얘기가 나와 그런 꿈을 꾼 건가?“그냥 꿈을 꾸었을 뿐이야.”그가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자 자신의 잠옷 단추가 이미 풀린 채 가슴을 드러냈다.“내 옷은…….”임유진은 순간 어색해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네가 자꾸……아프다고 해서 네 몸에 뭐가 있을까 봐……그래서 단추를 풀고 봤어.”그가 그녀를 보자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장담할게. 내가 보기도 전에 네가 깼어. 난 아무것도 못 봤어.”그녀는 황급히 설명했다. 하지만 설명할수록 오히려 애매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누나가 봤다 해도 괜찮아.”강지혁이 말했다.임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하마터면 자신의 침에 사레가 들 뻔했다.강지혁은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얼마나 비뚤어진 생각을 할지 모를 것이다.“너 몸은……이제 안 아파?”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더듬거리며 말했다.“응. 안 아파.”그는 고개를 숙이고 잠옷의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그녀는 시선을 목에 고정하려고 노력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의 가슴을 힐끗 보더니 갑자기 그의 잠옷을 벗겼다.“너 여기 왜…….”그녀는 물끄러미 그의 가슴 위치에 흉터를 바라보았다. 비록 흉터가 이미 옅어졌지만 그 당시의 상처는 아주 심했을 것이다.“작은 상처일 뿐이야.”그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손을 들어 그의 상처를 가볍게 만졌다. 그가 방금 잠결에 아프다고 소리치며 끊임없이 이곳을 만졌다. 바로 이 상처 때문일까?몇 년이 지나도 꿈에서 아프다고 외치는 상처가 어찌 작은 상처일 수 있겠는가?그 당시 그가 이 상처를 입었을 때 얼마나 아팠을까?임유진은 총에 맞은 것처럼 가슴이 너무 아팠다.“어떻게 이런 상처를 입은 거야. 언제 다쳤어?”그녀가 중얼중얼 물었다.그의 몸은 약간 경직되
“혁아!”그녀는 큰소리로 그를 부르면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았다.순간 그는 정신을 차렸고 칠흑 같은 눈동자도 점차 초점이 잡히더니 머리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만 눈빛은 복잡미묘했다.“왜 그러는 거야?”그녀가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그는 아주 쓸쓸해 보였다.“괜찮으면 됐어.”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너 방금 마치…….”그녀는 잠시 고민했다.“곧 깨질 것같은 유리 같았어. 깜짝 놀랐어.”“곧 깨질 것같은 유리?”그는 싱긋 웃더니 차가운 눈동자가 곧 평소처럼 바뀌었다.“누나, 이 세계에서 날 깰 사람은 없을 거야.”그녀는 방금 그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누나는 영원히 날 떠나지 않을 거지?”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가 싱긋 웃었다.“예전에도 말했잖아? 네가 날 버리지 않으면 난 널 버리지 않을 거라고.”“맞아. 말 한 적 있다는 걸 깜빡했어.”그는 중얼거리며 두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으면서 그녀의 존재를 느꼈다.분명히 그녀는 그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왜 그의 마음은 오히려 불안해진 것일까? 언젠가 그녀가 그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되면 그를 떠날까 봐 두려운 걸까?혁이는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는데 강지혁은? 가능할까?……소 씨 자택 거실에서 소민준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다.“민준아, 세령이가 강지혁의 비서가 널 데려갔다고 말하던데 왜 갑자기 단둘이 만난 거야?”강지혁에 대해 말하자 소민준의 아버지는 조금 두려워 했다. 소 씨 가문은 강 씨 가문과 다르다. 현재 소 씨 가문의 모든 사업은 진 씨 가문과의 혼인 때문에 되살아났고 소민준의 아버지는 소 씨 가문이 구사일생 했다고 생각했다.그는 강지혁이 소 씨 가문에 대한 편견이 있어 혼인이 막힐까 봐 매우 두려웠다.“아무것도 아니에요.”소민준이 말했다.“세령이에게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고 나한테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거야? 아무 일도 없으면 강지혁이 왜 비서를 시켜 널 데려오
임유진 얘기를 꺼내자 소민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임유진이 교통사고를 낸 뒤에 소민영은 영애들의 파티에서 소 씨 가문이 말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너무 창피했다.그리고 자신의 오빠가 진세령과 사귀고 나서야 비로소 아무도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임유진 때문에 소 씨 가문에 재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생겼어요. 임유진은 오빠와 어울리지도 않아요. 지금은 환경미화원으로 일한다면서요? 정말 창피해요. 애당초 판사는 형량을 왜 3년밖에 내리지 않았대요? 나 같으면 적어도 몇십 년을 판결할 거예요!”소민영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임유진을 말했다. 하지만 소민준은 그녀가 이렇게 말할수록 더욱 간담이 서늘해졌다.임유진은 지금 강지혁의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비록 강지혁이 두 사람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명확히 말한 적이 없다고 해도 같은 남자로서 소민준은 짐작할 수 있다.“그만해. 민영아, 더 이상 그녀에 대해 말하지 마. 앞으로 임유진을 만나면 예의를 갖추는 게 좋겠어.”소민준이 말하자 소민영은 불만을 토로했다.“오빠, 왜 그래요? 예전에는 내가 이렇게 말해도 아무런 얘기가 없더니 왜 이제는 그녀의 편을 들어요?”“민준아, 너 설마 임유진에게 미련 있는 건 아니겠지?”소민준의 엄마는 걱정했다.그러자 소민준의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렸다.“생각도 하지마. 임유진은 소 씨 가문에 절대 못 들어와.”사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만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어 소민준은 머리가 아팠다.“저는 임유진에게 그 어떤 감정도 없어요. 하지만 임유진은 우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에요! 저는 여기까지만 말할 수 있어요!”“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고요?”소민영은 코웃음을 쳤다.“오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임유진은 고작 환경미화원인데 우리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고요?”“아무튼 내 말을 들으면 돼. 소 씨 가문을 해치지 말고!”소민준은 엄하게 경고했다.소민준의 아버지는 여러가지를 많이 경험해봤기에 아들이 이렇게 말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겼
“그럼 네 생각에는 그녀가 내 곁에 남아 있기를 원할 것 같아?”강지혁이 묻자 고이준은 조금 의아했다.“대표님은 임유진 씨와 함께하기를 원합니까?”‘이 게임은 대표님이 임유진에게 진짜 신분을 알려주면 끝나는 게임인 걸까? 아니면 대표님은 임유진 씨에게……진짜 다른 감정이 생긴 걸까?’여기까지 생각한 고이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대표님은…….”그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빨리 말해!”강지혁이 명령했다.“대표님, 설마 임유진 씨를 사랑하게 된 거예요?”고이준이 말했다. 하여 대표님은 임유진이 모르게 그녀를 돕고 있고 이 게임이 끝나더라도 임유진이 그와 함께하길 원하는 게 아닐까?강지혁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사랑, 그럴 리가? 그가 어떻게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될 수 있겠는가, 아버지를 보고도 그런 감정이 들 수 있을까? 영원히 그 누구든 사랑하면 안 된다. 그래야 자신의 존엄이 다른 사람에게 밟히지 않는다.그는 기껏해야 임유진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그 여자의 체온, 숨결은 그를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한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이준은 흠칫하며 곧바로 대답했다.“네.”……노란 불빛이 사람을 매혹시킨다.이한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있는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강지혁은 이런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무슨 이유인지 오늘은 참석했다.“어떻게 올 생각을 했어?”그가 다가가서 물었다.그와 강지혁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초중, 고중까지 같은 반 친구였기에 그는 당연히 강지혁이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떠들썩한 곳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갑자기 생각나서 온 거야. 특별한 이유가 필요해? 너희도 날 자주 불렀잖아?”강지혁이 말했다.비록 이렇게 말하지만, 이한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바로 이때 화사한 옷차림에 정교한 화장을 한 여자가 다가와 강지혁에게 말을 걸었다.이한은 그가 반드시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강지혁은
가끔 이한은 친구들과 내기를 한다. 강현수의 새 여자친구가 그의 독신생활을 끝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내기를 하는데 매번 반드시 진다.강현수란 사람은 겉으로는 예의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차갑기 그지없다.“응. 알아. 네 팔찌는 만지지 못하지.”강현수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이라면 강현수가 이 은팔찌를 보물처럼 아끼고 절대 못 만지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한은 놀라지 않았다.바로 이때, 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강현수의 새 여자친구 김선아였다. 그녀는 연예계에서 새로 떠오르는 스타이고 수 많은 보물을 갖고 있다.물론 이것은 모두 강현수가 준 것이다.연예계의 큰손으로서 강현수는 전국에서 가장 큰 기획사를 갖고 있으며 스타 하나를 키우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쉬운 일이다.강현수는 한 여자를 사귈 때마다 아주 아끼지만 자신이 필요 없을 때는 그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고 버린다.“현수 씨, 미안해. 내가 늦었어.”김선아가 부드럽게 말하더니 강현수가 들고 있는 은팔찌를 힐끔 보고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비록 강현수는 그녀를 아주 아껴 그녀가 수억이 되는 보석을 원한다 하더라도 사라고 할 것이지만 그 은팔찌는 금기와 같다.그는 심지어 그녀가 만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한번은 그녀가 손을 대려고 하자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이 팔찌를 만지면 넌 두 번 다시 네 두 손을 보지 못하게 될 거야. 알겠어?”그 순간, 그의 눈동자는 아주 무자비했다.그녀는 놀라서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다.비록 그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평소처럼 아꼈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의 팔찌와 비교조차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이 은팔찌는 도대체 무엇일까, 팔찌가 작아 아이의 손목 사이즈이다.“괜찮아.”강현수는 담담하게 말하더니 팔찌를 넣었다.김선아는 자리에 앉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지혁을 보더니 멍때렸다.“저분은……강지혁, 강 대표님이잖아.”그녀는 이전에 먼 곳에서 한번 본 적 있기에 확신하지 못했다.특히 지금 강지혁은 다
심지어 그 여자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는 혐오감을 느꼈다.역시 다른 여자를 안았을 때랑 그녀를 안을 때랑 느낌이 너무 다르다.임대주택에 도착하자 그는 몸을 숙이고 문 앞 바닥에서 예비 키를 꺼냈다. 그녀는 항상 예비 키를 여기에 두는 것을 좋아한다. 만약 키를 못 가지고 나갈 때 예비 키가 있으면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그가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의 불이 여전히 켜져 있었다. 가녀린 그림자가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잠든 것인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그는 불빛 아래 그녀의 잠든 얼굴을 보자 마음이 평온해졌고 그녀를 본 순간 안정되었다.그는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만졌고 한평생 그녀만 본다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잠시 후 그는 허리를 굽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하지만 그가 애써 가볍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깼다.“혁아…….”그녀가 흐리멍텅하게 눈을 뜨자 흐릿한 살구 눈동자는 마치 유리 색으로 물든 것 같았다.“응, 나 왔어.”그가 말했다.“침대로 옮겨줄게. 계속 자.”그는 말하면서 그녀를 안고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그녀의 머리는 그의 품에 기대어 잠결에 물었다.“너한테……아주 좋은 향기가 나. 향수 냄새지……어디 갔던 거야?”“오늘 일이 좀 있어서 술집에 갔는데 아마 그쪽에서 묻었나 봐.”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계속 자. 난 좀 씻을게.”그녀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그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나서야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갔다.욕실에서 그는 서서 몸을 씻고 있다. 몸에서 나는 이 향수 냄새는 아마 방금 클럽에 있던 여자한테 묻은 거다.비싼 향수는 오히려 그의 손에 있는 비누 냄새보다 좋지 않다. 왜냐하면……그것은 그녀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다르기 때문이다.마치 그의 몸에도 그녀의 냄새가 물든 것 같다.강지혁은 씻고 욕실을 나서더니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든 사람을 보고 있다.그는 허리를 살짝 굽히고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가 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다.“임유진, 내가 언제 내
이번 주말에는 모처럼 임유진이 쉴 차례가 되었다. 한지영은 임유진을 끌고 쇼핑을 했다.두 사람은 아마도 오랫동안 쇼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영이와 이렇게 돌아다니니 임유진은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그 당시 그녀가 사고가 나기 전에 그녀는 주말마다 지영이와 쇼핑을 했다. 그때의 그녀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었고 마치 자신의 미래는 아름답기만 할 것 같았다.“참, 혁이는? 그에 대해 좀 더 알게 됐어? 그의 고향이 어딘지? 가족이 있는지?”한지영은 자신의 친구가 사기꾼을 만날까 너무 걱정되었다.“단지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의 어머니는 그들을 떠났다는 것만 알아. 다른 건 말하지 않으니 나도 묻지 않았어.”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너 바보야? 왜 더 물어보지 않았어? 어쨌든 그가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 알아야 해!”한지영이 말했다.임유진은 덤덤하게 웃었다.“정말 그가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 알면 무슨 소용이 있어? 나도 예전에 소민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어. 그의 집안을 알고 그가 어릴 때부터 어느 학교에서 공부했는지, 그의 차량 번호, 신분증 번호조차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게 아니야.”한지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미안해.”“뭐가 미안해.”임유진은 싱긋 웃었다.“너와 상관없는 일이야. 네가 나를 걱정하는 건 알지만, 나는 지금 말이야, 정말 그런 거 신경 안 써. 게다가 그가 나에게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마음대로 꾸며서 나를 속여도 나는 몰라. 그렇게 물어보면 무슨 의미가 있어?”“이런 얘기 그만하고 가자. 나랑 같이 옷 사러 가자. 나 고객 만날 때 입을 정장도 사야 돼. 디자인 팀의 대표가 고객 만날 때 무조건 정장을 입으래.”한지영은 불평하면서 임유진을 끌고 옆에 있는 큰 매장으로 들어갔다.한지영은 어차피 보는데 돈을 낼 필요도 없고 여러 가지 스타일을 본 뒤에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의 옷을 사면 된다고 했다.가게에 들어간 뒤 임유진은 매장 직원이 자신을 보는 눈빛을 느
“누가 안 산다고 했어요. 내가…….”한지영은 직원들이 무시하니 옷 한 벌을 사 보여주려고 했다.그때 임유진이 그녀를 잡아당기더니 담당자에게 말했다.“옷을 사지 않으면 가게에 들어와서 보지도 못하나요?”“두 분이 자신의 수입보다 훨씬 초과하는 가게에 옷을 보러 오셨으니 소란을 피울 혐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단지 가게의 다른 손님들을 보호하려고 있을 뿐입니다.”담당자는 일리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그러자 임유진이 곧바로 대답했다.“하지만 당신은 증거가 없죠. 당신은 소비자를 차별하는 게 분명해요. 참 방금 당신이 한 말은 이미 녹음했어요. 저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백화점 관리팀에 제출할 거예요.”“당신…….”담당자의 얼굴은 즉시 붉어졌다. 그는 임유진이 휴대폰으로 녹음할 줄은 도무지 생각지도 못했다.“임유진, 그만 해요. 환경미화원이 이곳에서 옷을 보다니. 설마 옛날 입던 옷이 그리웠어요?”소민영이 비웃었다.“정말 굳이 이 가게의 옷을 사고 싶다면 내가 불쌍해서 사줄 수 있어요.”“왜, 설마 길을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이 이곳에 와서 옷을 보거나 옷을 살 수 없단 말이에요? 아니면 소 씨 가문은 환경미화원이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만약 대중이 소 씨 가문이 환경미화원을 이렇게 대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겠네요.”임유진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고 소민영의 개인 행위에 소 씨 가문까지 끌어들였다.소민영의 얼굴도 순간 담당자처럼 빨갛게 되었고 그녀도 반박하지 못했다.정말 환경미화원이 남보다 못하다고 말한다면 내일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이 소 씨 가문을 공격할 것이다.“민영이는 그냥 한마디 했을 뿐인데 왜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줄곧 한쪽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진세령은 이때 차갑게 입을 열었다.“환경미화원도 당연히 이곳에 와서 옷을 살 수 있어. 다만 네가 어떤 옷을 마음에 들어하는지 모르겠네. 만약 사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마.”“이거로 할게요.”임유진은 손가락으로 전시되어 있는
그래서 소민아는 어떻게든 그 전에 강지혁의 마음을 잡아야만 했다.소민아는 남자들을 꼬실 때 쓰던 청순한 미소를 지으며 강지혁을 맞이했다. 그녀는 원체 얼굴도 예쁘고 또 몸매도 좋았다.만약 예쁜 얼굴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돈 많은 남자의 시선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시선을 끈 것까지는 좋았지만 혼전임신으로 부잣집에 시집가려 했던 그녀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남자 쪽 집안에서 그녀의 배가 잔뜩 불러있는데도 그녀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으니까.소민아는 당시 아이를 이미 밴 상태였기에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반드시 돌아봐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어코 아이까지 낳았다.하지만 그럼에도 남자 쪽 집안은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녀의 딸까지도 모른 척했다.“회장님, 오셨어요? 안나가 회장님 보고 싶다고 계속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어요. 얘도 참, 나한테는 안 이러면서 회장님은 엄청 좋아한다니까요.”소민아가 말했다.그리고 소민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안나가 강지혁에게 안기려는 듯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쌀쌀맞은 강지혁의 눈빛에 소안나는 결국 겁을 먹고 중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고는 조금 눈치 보는 말투로 얘기했다.“아빠, 보고 싶었어요...”강지혁은 소씨 모녀를 한번 훑더니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한마디 했다.“늦었으니 이만 가봐.”“하지만... 안나는 아빠랑 여기서 같이 자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소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민아가 가르쳐줬던 그대로 얘기했다.소민아는 아이에게 반드시 양부인 강지혁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하며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어야만 앞으로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먹고 예쁜 옷도 입으며 마치 공주님처럼 살 수 있다고 했다.아이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일단은 소민아가 시키는 건 뭐든 하기로 했다.아이는 공주가 되고 싶었고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지혁은 아
아마 지금의 강지혁이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의 아들인 강선율일 것이다.물론 겉으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말이다.고이준은 두 부자지간의 평소 모습을 떠올리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만약 임유진이 살아있었다면, 만약 강지혁이 그녀를 향한 감정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강지혁은 아마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표현도 하며 더 많이 사랑해줬을 것이다. 보통의 아버지들처럼 그렇게 아들과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분위기가 아니라 말이다.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고 강지혁은 임유진을 잊어버린 대가로 살 수 있게 됐으니 여러모로 다행인 결과였다.“회장님은 사모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셨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내가?”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주위에서 임유진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는 마치 책이라도 읽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히 자기 얘기인데도 전혀 다가오는 바가 없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만약 내가 정말 그 여자를 그토록 사랑했다면 이렇게도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겠지. 그런데 난 그 여자와의 모든 기억을 다 잊었어. 그렇다는 건 내 기억에 남을 만한 여자는 아니었다는 소리야.”강지혁이 차갑게 말했다.고이준은 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의 기억이 사라진 게 김재호 때문이라는 걸 그는 말할 수 없었다.기억을 잃은 것으로 그때의 감정을 다 지울 수 있게 됐는데 만약 다시 기억이라도 났다가는 강지혁이 또다시 무너질 테니까.차량이 강씨 저택에 멈춰서고 강지혁이 차 안에서 내렸다.그리고 집사는 그런 강지혁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건넸다.“소안나 아가씨와 소민아 씨가 와 계십니다.”집사가 말한 소안나가 바로 강지혁이 입양한 딸이었다. 그런데 입양이라고는 하나 생모가 살아있어 합법적인 입양절차는 밟지 못했다. 그러나 강씨 가문은 대외적으로 소안나를 입양했다고 얘기했기에 사람들은 입양절차 같은 것이 없어도 그녀가 강씨 저택에 양녀인 것을
“강지혁, 너...!”강현수가 뭐라 말하려는데 이한이 다급하게 달려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지혁아, 신경 쓰지 마. 현수 이놈이 아까 술을 좀 많이 마셔서 헛소리하는 것뿐이야.”이한은 말을 마친 후 얼른 강현수의 손을 잡으며 옆으로 잡아당겼다.하지만 그의 손에 끌려갈 강현수가 아니었다.“놔. 강지혁한테 확실하게 물어야 할 게 있으니까.”“현수야. 너 오랜만에 돌아온 거잖아. 안 그래도 너랑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데 지금 갈까? 기왕이면 다른 애들도 부르자, 어때?”이한이 필사적으로 화제를 바꾸며 강현수를 설득했다.그런데 그때 가만히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한아, 현수 놔줘. 나 때문에 일부러 왔다는데 궁금한 거 다 해결하게 하고 보내야지 않겠어?”이한은 그 말에 속으로 제발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빌며 강현수의 손을 놓아주었다.강현수는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지혁을 보며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강지혁이 맞나 싶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어쩌면 이런 느낌이 드는 게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연락 한번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강현수는 지난 5년간 일부러 더 강지혁과 만나는 것을 피했고 그에게 먼저 연락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임유진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강지혁과 만나면 더 고통스러워질 게 뻔했으니까.“유진이를 아직도 사랑해?”강현수가 물었다.“아니. 안 사랑해.”시원하고도 명쾌한 대답이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대답 들었으니 이제 만족해?”강현수는 그의 대답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강지혁의 두 눈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정말 아무런 동요도 없었으니까.정말 더 이상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강현수는 좀처럼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강지혁한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강지혁이 파티장에서 나오자 고이준이 예를 갖춰 차량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고이준은 오늘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강
이한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하지만 되도록 강지혁 앞에서 유진 씨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더 이상 유진 씨에게 별다른 마음이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들 입에서 유진 씨 이름이 나오는 걸 썩 좋아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강지혁이 정말 유진이를 잊었다고...?”강현수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그럼 뭐 이미 죽은 사람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까? 현수야, 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잖아. 물론 강지혁의 아들까지 낳은 여자는 흔하지 하지만...”이한은 강지혁의 아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는 이제 고작 5살밖에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강지혁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그런지 머리는 지나치게 똑똑하고 또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냉랭한 구석이 있었다.실제로 이한은 강지혁의 아들과 한번 만났다가 뼈도 못 추리고 벙찐 얼굴로 5살짜리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만 했다.그리고 그날 그는 그 꼬맹이가 제 아들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아들이 있었으면 아마 평생을 아들에게 잔뜩 눌린 채로 살았을 테니까.강지혁의 아들을 제압할 수 있는 건 강지혁뿐이었다.강현수는 이한의 말에 표정이 점점 급격히 어두워졌다.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라고?그 여자 때문에 강지혁은 하마터면 미친놈이 될 뻔했는데 그렇게도 사랑했던 여자를 고작 5년도 안 돼서 잊어버렸다고?강현수는 와인을 한입에 마셔버리더니 이내 잔을 내려놓고 강지혁 쪽으로 걸어갔다.“야, 현수야!”이한이 뒤에서 강현수를 불렀다.‘저 녀석 설마 지혁이 앞에서 유진 씨 얘기를 꺼낼 생각인가? 설마... 저 녀석이야말로 아직도 유진 씨를 잊지 못한 거 아니야?!’이한은 즐거운 파티장에서 임유진 때문에 두 사람이 괜한 소란이 일으킬까 봐 얼른 강현수의 뒤를 따라갔다.실제로 두 사람은 임유진 때문에 하마터면 치고받고 싸울 뻔하기도 했으니까.강현수가 강지혁의 앞에 멈춰 서자 강지혁과 얘기를 나누던 남자가 얼
강지혁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또 이렇게 마치 임유진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울분과 속상함을 잔뜩 털어놓았다.그런 그를 보며 강현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을 결국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 뒤로 강현수는 해외 시장을 넓히는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며 S 시를 떠났다. 사실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는 일이었지만 그는 당시 S 시에 있는 게 숨이 막히고 또 너무 고통스러워 자신이 직접 가기로 했다.하지만 해외로 가서도 그는 여전히 임유진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다. 그는 당시 질투 때문에 그녀를 모른 척했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지속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 만약 그때 차에서 내려 그녀의 사정을 들어줬으면 그녀가 강지혁과 결혼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그리고 차라리 그때 임유진이 아무리 원치 않아도, 아무리 강지혁을 사랑한다며 버텨도 억지로라도 그녀를 데리고 갔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렇게 했으면 임유진은 꽤 오랜 시간 그를 미워했을 테지만 적어도 이 세상과 완전히 작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강현수가 시선을 내리며 조금 어두운 얼굴로 과거를 회상하던 그때 익숙한 누군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강현수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 남자는 다름 아닌 그와 강지혁의 오랜 친구인 이한이었다.이한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언제 돌아온 거야?”“며칠 전에.”강현수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답했다.“돌아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해줬어야지. 오늘 파티에 참석 안 했으면 너 왔는지도 몰랐을 거 아니야.”이한이 불만인 듯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이제 알았잖아.”강현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강지혁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딸을 하나 입양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그리고 그 딸의 친모랑 꽤 사이가 가깝다지?”강현수는 줄곧 해외에만 있었지만 강지혁의 소식은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그래서 강지혁이 2년 전에 웬 여자아이를 한 명 입양하고 그 아이의 엄
모든 건 다 강문철의 시나리오대로였다. 딱 한 가지, 임유진이 정말 강지혁을 위해 목숨을 내걸었다는 사실을 빼고 말이다.물론 임유진이 천만분의 일의 확률로 정말 그런 선택을 했을 때를 대비해 미리 대책을 마련해두기는 했지만 어디까지나 임유진의 목숨을 살려주라는 것까지만 얘기했을 뿐 그 뒤의 일은 김재호에게 얘기해주지 않았다.그래서 김재호는 어쩔 수 없이 지금부터는 자기가 직접 이후의 일을 설계해야만 했다. 물론 그의 선택이 옳은 것인지는 그조차도 모르지만 말이다.강문철은 강지혁에게 약점이 없기를 바랐다. 그래서 제일 큰 약점이자 유일한 약점이 임유진을 처리해버렸다. 그러나 결국 강문철은 내기에서 지고 말았다. 강지혁에게도 졌고 임유진에게도 졌다.‘만약 회장님이 살아계셨다면 지금 이 상황을 보고 생각을 달리하시지는 않았을까? 내가 지금부터 하려는 일은 정말 맞는 일일까?’김재호는 속으로 되뇌다 쓰러진 강지혁을 잠깐 바라보더니 이내 그의 곁으로 다가가 강지혁만 들을 수 있게 나지막이 속삭였다.“만약 임유진 씨가 대표님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맞다면 그 언젠가 다시 대표님 앞에 모습을 드러내게 되겠죠. 하지만 만약 끝까지 모습을 드러내지 않으면... 그저 그 정도의 마음이었다는 뜻이겠죠.”...5년 후.화려한 파티장 안은 늘 그렇듯 S 시의 부잣집 자제들이 가득 몰려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더 눈에 띄는 건 단연코 GH 그룹의 회장인 강지혁이었다.이제 고작 34세밖에 안 된 나이로 회장직에 오르게 된 그였지만 그는 강문철이 세상을 떠난 후 5년간 완벽하게 회사를 운영해 나가며 진정으로 회사의 주인이 되었다.들리는 말에 의하면 그에게는 아들과 양녀가 각각 한 명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럼에도 여자들은 늘 그의 눈에 들고 싶어 하며 틈틈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 자리를 노렸다.그리고 오늘도 역시 여자들은 파티라는 훌륭한 교류 장소를 빌려 그와 거리를 좁혀가며 강지혁과 인사를 나눌 때 은근히 눈빛을 던졌다.하지만 강지혁은 마치 감정이라고는 없
고이준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유골함이라니... 설마...!’그는 잔뜩 긴장한 마음으로 강지혁 쪽을 향해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강지혁은 마치 얼어붙기라도 한 듯 김재호의 손에 든 유골함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유진이는...?”그러다 한참이 지난 뒤에야 입을 열고 말을 내뱉었다.“바로 앞에 계시잖아요.”김재호가 유골함을 가리키며 말했다.하지만 강지혁은 그의 말을 듣지 못한 것인지 다시 한번 큰소리로 물었다.“유진이는 어디 있냐고!”그러자 김재호가 피식 웃었다.“대표님, 상식적으로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 높은 절벽에서 떨어졌는데 임산부였던 몸으로 정말 살아날 수 있었겠습니까? 그 상황에서 아이 하나 남긴 것도 천운이었습니다.”강지혁은 그 말이 끝나자마자 마치 들어서는 안 될 얘기를 들은 것처럼 흥분하며 김재호를 향해 달려들었다.그런데 그때 그의 행동을 예상한 건지 김재호가 유골함을 위로 번쩍 치켜들었다.“유골함이 산산조각이 나고 안에 담긴 임유진 씨의 유골이 아무렇게나 흩뿌려져도 괜찮으시면 얼마든지 주먹을 휘두르세요.”그 말에 강지혁의 주먹이 멈췄다.그는 이를 꽉 깨물며 김재호를 노려보더니 이내 그의 손에서 유골함을 빼앗아 들었다. 그러고는 유골함이 부서질 듯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유골이라니,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당시 아버지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들었을 때가 세상에서 제일 힘든 순간인 줄 알았는데 임유진의 유골함을 품에 안아 드니 그때보다 더한 고통이 밀려드는 게 느껴졌다.임유진의 화사했던 미소와 그녀의 달콤했던 목소리가 아직도 이렇게도 생생한데 이제는 두 번 그녀를 다시 만날 수도 없고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도 없다고?“혁아, 사랑해.”“혁아, 나는 너랑 행복한 가정을 이루고 싶어. 너도 있고 나도 있고 우리 아이들도 있는 행복한 가정을 꼭 이루고야 말 거야.”“혁아, 널 용서할게.”“널 용서하기로 한 거 아이들 때문이 아니야. 그러니까 잘 살아.”진지했던 얼굴, 행복해하며 웃던 얼굴, 조금은 힘들게 미소짓
“누가 대문 바로 앞에 아이를 두고 갔다고 경호 실장님이 얘기해줬어요. CCTV를 돌려보니 김재호 비서더라고요.”집사가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가며 말했다.“도련님, 이 아이... 도련님 어릴 때와 아주 많이 닮았습니다.”집사는 갓난아기 시절의 강지혁을 본 적이 있다.당시 강선우는 울고 있는 강지혁을 품에 소중히 안은 채 강씨 저택 대문 앞에 서 있었다. 사랑스러운 손주를 봐서 강문철이 자신의 아내를 받아주길 바라면서 말이다.하지만 강문철은 강지혁에게는 눈길 한번 주지 않았고 강선우까지 필요 없다며 아주 단호하게 두 사람을 내쳤다.“이 집 문턱을 넘고 싶으면 그 여자를 버리고 와!”그렇게 강선우는 어쩔 수 없이 아기였던 강지혁을 데리고 다시 아내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돌아갔다.집사는 그때 강선우의 품속에서 목 놓아 울던 아이를 아직 기억하고 있었기에 경호 실장에게서 아이를 전해 받은 후 아주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강지혁은 굳어버린 몸을 일으키더니 눈을 서서히 크게 뜨며 마치 신기한 것을 본 듯 말했다.“나와... 닮았다고?”그의 목소리는 조금 떨려있었다.“네, 가까이에 와서 한번 봐보세요.”집사의 말에 강지혁은 몸을 살짝 휘청이며 천천히 앞으로 걸어갔다.고이준은 집사와 그의 품에 안긴 아이 덕에 간신히 다시 숨을 내쉴 수 있게 되었다.집사의 품에 안긴 아이는 여전히 무척이나 서럽게 울고 있었다. 얼마나 많이 울었는지 얼굴이 핑크색이다 못해 이제는 빨갛게 달아오르기까지 했다.‘설마... 유진이가 낳은 아이인 건가? 하지만... 그러면 아이가 세 명이어야 하는데? 왜 한 명이지? 그리고... 유진이는 어디 있지? 왜 아이만 있는 거지?’강지혁의 머릿속은 지금 질문으로 혼란스럽게 휘몰아쳤다.그때 휴대폰 벨 소리가 울리고 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전화를 받았다. 그러고는 전화기 너머 상대의 말을 들은 후 다급하게 강지혁을 불렀다.“대표님, 김재호가 전화를 걸어왔습니다. 대표님께 중요하게 할 말이 있답니다!”강지혁은 그 말에 발걸음
강씨 저택.고이준은 조금 무거운 마음으로 강지혁이 있는 침실의 문을 열었다.방안을 들여다보니 S 시의 꼭대기에 군림해있는 남자가 임유진의 옷을 품에 꼭 끌어안은 채 몸을 웅크리고 바닥에 앉아있는 모습이 보였다.그리고 그런 그의 주위에는 임유진의 어린 시절 사진부터 최근에 찍은 사진까지 한가득 널려있었다. 사진 속 그녀는 항상 환하게 웃고 있었다.“대표님...”고이준이 낮은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넸다.“새로운 프로젝트에 관한 미팅에 이제는 참석하셔야 합니다. 그리고 결재해주셔야 할 서류들도 있고요. 이대로 계속 손을 놓고 계시다가는...”“유진이 소식은 아직이야?”잔뜩 잠긴 목소리가 고이준의 말을 끊었다. 다만 그의 눈은 여전히 감겨 있는 상태였다.마치 사랑하는 이를 품에 안고 있는 이 순간을 계속해서 느끼려는 사람처럼, 마치 지금 눈을 떠버리면 사랑하는 이의 숨결을 완전히 빼앗겨버릴까 봐 두려운 사람처럼 그는 눈을 꼭 감고 있었다.“네, 여전히 아무런 소식도 없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임유진을 찾아 헤맨지도 벌써 40일이나 지났다. 긴 시간에 지친 수색대원들은 이쯤 되면 포기할 때도 됐다며 이 이상 수색해봤자 아무런 가망도 없다고 했다.하지만 고이준은 그 말을 강지혁에게 전할 수 없었다. 전하면 강지혁이 정말 미쳐버릴지도 모르니까.“유진아, 대체 어디 있는 거야... 얘기 좀 해줘, 응? 제발...”강지혁이 품에 있는 옷을 더 세게 끌어안으며 얼굴을 완전히 옷에 파묻었다.“나한테 잘살라고 했지? 그런데 유진아, 그게 가능할 리가 없잖아... 네가 없는데 내가 어떻게... 어떻게 잘 살 수 있겠어... 네가 없는데...”“대표님, 제발 정신을 차리세요! 사모님께서 하늘에서 대표님의 이런 모습을 보시면 과연 좋아할까요? 오히려 속상하지 않겠습니까?”보다 못한 고이준이 한 발 앞으로 다가와 그에게 말했다.하지만 그는 말을 내뱉자마자 1초도 안 돼 바로 후회했다. 굳게 닫혀있던 강지혁의 눈이 번쩍 떠지며 그를 아주 무섭게 노려봤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