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이한은 친구들과 내기를 한다. 강현수의 새 여자친구가 그의 독신생활을 끝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내기를 하는데 매번 반드시 진다.강현수란 사람은 겉으로는 예의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차갑기 그지없다.“응. 알아. 네 팔찌는 만지지 못하지.”강현수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이라면 강현수가 이 은팔찌를 보물처럼 아끼고 절대 못 만지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한은 놀라지 않았다.바로 이때, 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강현수의 새 여자친구 김선아였다. 그녀는 연예계에서 새로 떠오르는 스타이고 수 많은 보물을 갖고 있다.물론 이것은 모두 강현수가 준 것이다.연예계의 큰손으로서 강현수는 전국에서 가장 큰 기획사를 갖고 있으며 스타 하나를 키우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쉬운 일이다.강현수는 한 여자를 사귈 때마다 아주 아끼지만 자신이 필요 없을 때는 그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고 버린다.“현수 씨, 미안해. 내가 늦었어.”김선아가 부드럽게 말하더니 강현수가 들고 있는 은팔찌를 힐끔 보고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비록 강현수는 그녀를 아주 아껴 그녀가 수억이 되는 보석을 원한다 하더라도 사라고 할 것이지만 그 은팔찌는 금기와 같다.그는 심지어 그녀가 만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한번은 그녀가 손을 대려고 하자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이 팔찌를 만지면 넌 두 번 다시 네 두 손을 보지 못하게 될 거야. 알겠어?”그 순간, 그의 눈동자는 아주 무자비했다.그녀는 놀라서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다.비록 그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평소처럼 아꼈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의 팔찌와 비교조차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이 은팔찌는 도대체 무엇일까, 팔찌가 작아 아이의 손목 사이즈이다.“괜찮아.”강현수는 담담하게 말하더니 팔찌를 넣었다.김선아는 자리에 앉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지혁을 보더니 멍때렸다.“저분은……강지혁, 강 대표님이잖아.”그녀는 이전에 먼 곳에서 한번 본 적 있기에 확신하지 못했다.특히 지금 강지혁은 다
심지어 그 여자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는 혐오감을 느꼈다.역시 다른 여자를 안았을 때랑 그녀를 안을 때랑 느낌이 너무 다르다.임대주택에 도착하자 그는 몸을 숙이고 문 앞 바닥에서 예비 키를 꺼냈다. 그녀는 항상 예비 키를 여기에 두는 것을 좋아한다. 만약 키를 못 가지고 나갈 때 예비 키가 있으면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그가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의 불이 여전히 켜져 있었다. 가녀린 그림자가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잠든 것인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그는 불빛 아래 그녀의 잠든 얼굴을 보자 마음이 평온해졌고 그녀를 본 순간 안정되었다.그는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만졌고 한평생 그녀만 본다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잠시 후 그는 허리를 굽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하지만 그가 애써 가볍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깼다.“혁아…….”그녀가 흐리멍텅하게 눈을 뜨자 흐릿한 살구 눈동자는 마치 유리 색으로 물든 것 같았다.“응, 나 왔어.”그가 말했다.“침대로 옮겨줄게. 계속 자.”그는 말하면서 그녀를 안고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그녀의 머리는 그의 품에 기대어 잠결에 물었다.“너한테……아주 좋은 향기가 나. 향수 냄새지……어디 갔던 거야?”“오늘 일이 좀 있어서 술집에 갔는데 아마 그쪽에서 묻었나 봐.”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계속 자. 난 좀 씻을게.”그녀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그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나서야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갔다.욕실에서 그는 서서 몸을 씻고 있다. 몸에서 나는 이 향수 냄새는 아마 방금 클럽에 있던 여자한테 묻은 거다.비싼 향수는 오히려 그의 손에 있는 비누 냄새보다 좋지 않다. 왜냐하면……그것은 그녀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다르기 때문이다.마치 그의 몸에도 그녀의 냄새가 물든 것 같다.강지혁은 씻고 욕실을 나서더니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든 사람을 보고 있다.그는 허리를 살짝 굽히고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가 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다.“임유진, 내가 언제 내
이번 주말에는 모처럼 임유진이 쉴 차례가 되었다. 한지영은 임유진을 끌고 쇼핑을 했다.두 사람은 아마도 오랫동안 쇼핑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영이와 이렇게 돌아다니니 임유진은 옛날로 돌아간 느낌이 든다.그 당시 그녀가 사고가 나기 전에 그녀는 주말마다 지영이와 쇼핑을 했다. 그때의 그녀는 아무런 근심 걱정이 없었고 마치 자신의 미래는 아름답기만 할 것 같았다.“참, 혁이는? 그에 대해 좀 더 알게 됐어? 그의 고향이 어딘지? 가족이 있는지?”한지영은 자신의 친구가 사기꾼을 만날까 너무 걱정되었다.“단지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고 그의 어머니는 그들을 떠났다는 것만 알아. 다른 건 말하지 않으니 나도 묻지 않았어.”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너 바보야? 왜 더 물어보지 않았어? 어쨌든 그가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 알아야 해!”한지영이 말했다.임유진은 덤덤하게 웃었다.“정말 그가 이전에 무엇을 했는지 알면 무슨 소용이 있어? 나도 예전에 소민준에 대해 아주 잘 알고 있었어. 그의 집안을 알고 그가 어릴 때부터 어느 학교에서 공부했는지, 그의 차량 번호, 신분증 번호조차도 나는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만 그것만으로 그 사람을 알 수 있는 게 아니야.”한지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미안해.”“뭐가 미안해.”임유진은 싱긋 웃었다.“너와 상관없는 일이야. 네가 나를 걱정하는 건 알지만, 나는 지금 말이야, 정말 그런 거 신경 안 써. 게다가 그가 나에게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마음대로 꾸며서 나를 속여도 나는 몰라. 그렇게 물어보면 무슨 의미가 있어?”“이런 얘기 그만하고 가자. 나랑 같이 옷 사러 가자. 나 고객 만날 때 입을 정장도 사야 돼. 디자인 팀의 대표가 고객 만날 때 무조건 정장을 입으래.”한지영은 불평하면서 임유진을 끌고 옆에 있는 큰 매장으로 들어갔다.한지영은 어차피 보는데 돈을 낼 필요도 없고 여러 가지 스타일을 본 뒤에 감당할 수 있는 가격의 옷을 사면 된다고 했다.가게에 들어간 뒤 임유진은 매장 직원이 자신을 보는 눈빛을 느
“누가 안 산다고 했어요. 내가…….”한지영은 직원들이 무시하니 옷 한 벌을 사 보여주려고 했다.그때 임유진이 그녀를 잡아당기더니 담당자에게 말했다.“옷을 사지 않으면 가게에 들어와서 보지도 못하나요?”“두 분이 자신의 수입보다 훨씬 초과하는 가게에 옷을 보러 오셨으니 소란을 피울 혐의가 있을 것 같습니다. 저는 단지 가게의 다른 손님들을 보호하려고 있을 뿐입니다.”담당자는 일리가 있는 것처럼 말했다.그러자 임유진이 곧바로 대답했다.“하지만 당신은 증거가 없죠. 당신은 소비자를 차별하는 게 분명해요. 참 방금 당신이 한 말은 이미 녹음했어요. 저는 증거라고 생각해요. 백화점 관리팀에 제출할 거예요.”“당신…….”담당자의 얼굴은 즉시 붉어졌다. 그는 임유진이 휴대폰으로 녹음할 줄은 도무지 생각지도 못했다.“임유진, 그만 해요. 환경미화원이 이곳에서 옷을 보다니. 설마 옛날 입던 옷이 그리웠어요?”소민영이 비웃었다.“정말 굳이 이 가게의 옷을 사고 싶다면 내가 불쌍해서 사줄 수 있어요.”“왜, 설마 길을 청소하는 환경미화원이 이곳에 와서 옷을 보거나 옷을 살 수 없단 말이에요? 아니면 소 씨 가문은 환경미화원이 남보다 못하다고 생각하는 건가요? 만약 대중이 소 씨 가문이 환경미화원을 이렇게 대한다는 것을 알았다면 어떤 생각을 할지 모르겠네요.”임유진은 비굴하지도 거만하지도 않고 소민영의 개인 행위에 소 씨 가문까지 끌어들였다.소민영의 얼굴도 순간 담당자처럼 빨갛게 되었고 그녀도 반박하지 못했다.정말 환경미화원이 남보다 못하다고 말한다면 내일 인터넷에서 네티즌들이 소 씨 가문을 공격할 것이다.“민영이는 그냥 한마디 했을 뿐인데 왜 그렇게 정색을 하고 그래.”줄곧 한쪽에서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진세령은 이때 차갑게 입을 열었다.“환경미화원도 당연히 이곳에 와서 옷을 살 수 있어. 다만 네가 어떤 옷을 마음에 들어하는지 모르겠네. 만약 사지 않는다면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주지 마.”“이거로 할게요.”임유진은 손가락으로 전시되어 있는
소민준은 순간 멍을 때렸다.“유진아!”한편 소민영은 자신의 오빠를 보자마자 재빨리 다가가 고자질을 했다.“오빠! 임유진, 이 뻔뻔한 것이 감히 나한테 10억짜리 원피스를 사달래요. 자신이 어울리는지는 생각도 안 해요!”“닥쳐!”소민준은 낯색이 어두워지더니 곧바로 호통을 쳤다. 자신의 여동생은 정말 목숨 귀한줄 모르는 것 같았다. 지금 임유진의 배후에는 강지혁이 있다. 10억은 물론 100억짜리 원피스도 어울린다!“오빠, 왜 그래요? 왜 갑자기 소리를 질러요. 난 단지 임유진을 말하는 거예요.”소민영은 불만을 토로했다.“말할 게 뭐 있어.”소민준은 화를 내더니 옆에 있는 직원에게 말했다.“그 원피스를 포장해 주세요.”그의 한마디에 가게 안의 모든 사람이 깜짝 놀랐다.“오빠, 뭐 하는 짓이에요? 설마 그 원피스를 사서 임유진에게 줄 거예요?”소민영은 믿을 수가 없었다.한편 진세령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순간 분노에 찬 눈빛을 하였다.그리고 직원은 10억짜리 원피스를 팔면 그 보너스가 어마어마하여 낯색이 아주 밝았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말을 좀 거칠게 했어. 하지만 너한테 별다른 악의는 없어. 너그러이 이해해 줘. 이 원피스는 사죄라고 생각해 줘.”소민준은 아주 저자세로 말했다.소민영은 믿기 힘들다는 듯한 얼굴로 자신의 오빠를 바라보았다.“오빠, 원피스를 선물한다고요? 왜요? 그리고 사죄라니! 임유진이 뭐라도 돼요?”소민영이 이렇게 말할수록 소민준은 머리가 아팠으며 임유진이 강지혁에게 무슨 말을 해 소 씨 가문에 큰 문제가 생길까 두려웠다.“유진아, 민영이가 한 말은 신경 쓰지 않을 거지.”소민준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임유진은 기이한 표정으로 소민준을 바라보았다. 그가 갑자기 조심스러운 태도로 10억짜리 원피스를 선물한다. 그는 마치 무엇인가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그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것일까?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렸다.“원피스는 필요 없어. 현금으로 환산해 줘. 10억. 소 대표님은 수표를 가지고 있겠지
임유진은 수표를 받아 한지영와 함께 가게를 떠났다.“유진아, 좀 이상하지 않아?”가게를 나서자 한지영이 말했다.“소민준이 망설임 없이 단번에 10억을 너에게 주다니, 게다가 진세령이 옆에 있었는데 진세령이 오해할까 두려워하지도 않는 것 같아.”“이상하긴 해.”임유진이 말했다.“설마 소민준이 아직도 너를 좋아하는 거 아니야?”한지영은 추측했다.“아니야, 소민준은 내가 소민영에게 화를 내면 소 씨 가문에게 불리해질까 봐 두려워하는 것 같아.”임유진은 그녀의 느낌을 말했다.한지영은 좀 황당할 뿐이었다.“너무 많은 걸 생각하지 마.”“누가 알겠어.”임유진은 어깨를 으쓱거리며 수표를 바라보았다.“이 수표를 어떻게 할 거야? 찢을까?”그녀가 말했다. 그녀는 친구를 잘 알고 있었다. 친구의 성격으로는 절대 이 돈을 쓰지 않을 것이다.“찢어서 뭐해. 필요한 사람에게 직접 기부하면 돼.”임유진은 수표를 조심스럽게 가방에 넣었다.두 사람이 또 잠시 둘러보다가 밥을 먹고 지하 주차장의 에스컬레이터 쪽으로 가려고 할 때 소민준, 소민영, 진세령 세 사람을 보았다.그 시각 세 사람의 안색이 별로 좋지 않았는데 다툼이 있던 것 같다.이때 세 사람도 임유진이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소민영은 임유진을 보면 볼수록 더욱 화가 났다. 도대체 임유진이 오빠에게 무슨 짓을 했기에 오빠가 이렇게 그녀를 보호해주고, 심지어 그녀가 임유진에게 함부로 말 한마디도 하지 못하게 하는지 알 수 없었다.특히 방금 오빠는 또 그녀에게 만약 다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린다면 그녀를 해외로 보내겠다고 경고했다.그녀는 더더욱 화가 치밀어 올랐다.이때 임유진이 에스컬레이터를 향해 걸어왔다. 임유진이 자신의 앞을 지나갈 때 소민영은 갑자기 발을 내밀어 임유진의 발을 걸었다.임유진은 휘청거리다가 에스컬레이터 아래로 떨어졌다.한지영은 비명을 지르며 에스컬레이터 옆으로 재빨리 달려가 긴급 정지 버튼을 눌렀다.하지만 그래도 이미 늦었고, 임유진은 에스컬레이터 계
“왜 내가 사과를 해야 해!”소민영은 화가 나서 말했다.그리고 이때, 또 계속해서 누군가가 이쪽을 향해 걸어왔다. 그 중 누군가가 진세령을 알아보았다. 어쨌거나 진세령은 인기 스타였으니까. 비록 지금 선글라스와 모자를 쓰고 얼굴을 거의 다 가렸지만, 여전히 사람들이 알아보았다.“진세령이야, 옆에 있는 사람이 그녀의 약혼자인 것 같아!”“여기서 무엇을 하는 거지?”“에스컬레이터가 왜 이래? 방금 무슨 사고 났나?”주위가 술렁이자 한지영은 임유진을 부축하며 에스컬레이터를 내려갔고, 소민준은 급히 앞으로 따라갔다.진세령의 눈에 의아함이 스쳤다. 소민준은 뜻밖에도 그녀를 버리고 임유진을 따라갔다. 그리고 주위에 진세령을 에워싼 사람들은 또 가십을 떨기 시작했다.“진세령의 약혼자가 다른 여자를 쫓아갔어요.”“세상에, 설마 막장 삼각관계는 아니겠죠?”진세령은 난감한 표정으로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그녀를 향한 주위의 카메라를 피하려고 애쓰며 소민영과 함께 황급히 떠났다.반면 다른 한쪽에서는 소민준이 임유진을 쫓아와 초조하고 불안한 얼굴로 말했다.“유진아, 너…… 병원비를 네가 원하는 만큼 내가 다 줄게. 민영이는 고의가 아니야. 이 일은 네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원하는 걸 뭐든 말만 해…….”“말은 무슨.”한지영이 분노하며 말했다.“소민준 씨, 어떻게 여동생이 고의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어요? 당신들 소 씨 가문의 사람들은 정말 어이없네요.”그녀는 말하면서 차 문을 열고 친구를 조수석에 앉힌 뒤 스스로 운전석에 앉았다. 소민준은 계속 차 문을 두드리며 얼굴이 창백하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한지영조차 소민준은 확실히 두려워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러나 문제는 그가 무엇을 두려워하는가였다. 유진이 소송해서 소민영를 고소할까 봐?설사 소송을 한다고 하더라도 소민영은 아마 돈으로 해결할 것이고 소 씨네 집은 전혀 돈이 부족하지 않을 것이다.한지영이 차를 몰고 임유진을 데리고 떠나자 소민준은 멍하니 제자리에 서서 머릿속에는
“혁이.”그녀가 말했다.“내가 병원에 언제까지 있어야 할지 몰라서 기다리지 말고 혼자 밥 먹으라고 말해줘야겠어.”임유진은 말하면서 주소록에서 ‘혁이'이라는 이름을 찾은 뒤 전화를 걸었다.얼마 지나지 않아 휴대전화가 연결되자 수화기 너머에서 강지혁의 조금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나는 일이 좀 있어서 오늘 아마 늦게 돌아올 거야. 저녁은 혼자 알아서 잘 먹어.”임유진이 말했다.“일이 좀 있다니! 지금 병원에 있다고 그냥 말하면 될걸.”한지영이 옆에서 끼어들었다.“누나, 지금 병원에 있어?”강지혁의 말투가 조금 변한 것 같다.“응, 넘어져서 지금 병원에서 CT 결과를 기다리고 있어.”임유진이 말했다.“어느 병원이야, 지금 갈게.”강지혁이 말했다.“올 필요 없어. 지영이랑 같이 있어. 넌 그냥 집에서 있어.” 그녀가 다급히 말했다.전화기 너머로 침묵이 이어지다가 잠시 후, 그 차가운 목소리가 다시 한번 들려왔다. 그는 좀 전의 질문을 다시 던졌다.“어느 병원인데?”“일성 병원이야.”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대답했다. 어릴 때부터 어머니를 여의고, 게다가 3년간의 감옥생활까지 더해져 그녀는 매사에 다른 사람을 귀찮게 하고 싶지 않았다.오늘 만약 한지영이 마침 옆에 있지 않았다면 그녀 혼자 병원에 왔을지도 모른다.“지금 갈게.”강지혁이 말했다.통화를 마친 뒤 강지혁은 고이준에게 전화를 걸었다.“오늘 유진이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알아봐.”“네.”고이준이 대답했다.“그리고 일성 병원 정형외과에서 어느 의사의 의술이 가장 좋은지 알아보고, 지금 당장 병원에 가서 유진이의 상처를 봐달라고 해.”강지혁이 말했다.“알겠습니다.”고이준은 다시 한번 대답했다.통화를 마친 후, 그는 멍하니 핸드폰을 보면서 자신의 상사가 정말 임유진을 좋아하게 된 건 아닌지 의심했다.한 여자를 위해 그 여자의 행방을 알아보고, 심지어 그 여자를 위해 최고의 의사를 찾으려 한다.예전에 그들의 차가 임유진이 청소하는 구역을 지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
탁유미는 차갑게 말을 내뱉은 후 이경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옷을 반대로 잡아당겼다.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겨도 도저히 잡아당겨 지지를 않았다.이경빈은 이대로 그녀의 옷을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손이 하얘질 때까지 꽉 쥐고 놓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경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놔. 손 다치고 싶지 않으면.”경호원은 그녀의 눈빛에 얼른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의 옷을 꽉 잡고 있는 이경빈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이경빈은 경호원의 엄청난 손아귀 힘에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나 원망하는 거 알아. 당연해. 네가 날 싫어하는 것도, 날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내 말 좀 들어줘. 너랑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난 너랑 할 얘기 없어.”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이경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옷을 꽉 잡은 손이 경호원의 힘으로 하나둘 펴지며 서서히 고통이 일고 있는데도,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이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꺾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옷을 놓아주지 않았다.이대로 놓아주면 다시는 그녀 가까이 갈 수조차 없을까 봐, 그녀와는 이로써 모든 게 다 끝이 날까 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탁유미는 제 옷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그를 보며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너는 항상 이런 식이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너는 네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었다면 억지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짓은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항상 네 기분만 중요하고 네 생각만 중요한 사람이었어! 존중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마치 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크나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손아귀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탁유미는 옷을 정
이경빈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인수로만 놓고 보면 이경빈 쪽이 훨씬 우세였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의 경호원들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특정 인원들의 출입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라는 강지혁의 명령을 받았으니까.“비켜드릴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긴장감이 흐르고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탁유미가 걸어 나왔다.강지혁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소란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경빈 대표님은 저희가 금방 되돌려보내겠습니다.”그들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며 경계태세를 갖췄다.탁유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달리 깔끔한 차림이기는 했으나 턱 쪽에 수염이 까끌까끌 나 있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으며 다크서클은 물론이고 눈가도 엄청 빨개 있었다.이제껏 줄곧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세팅하고 다니던 남자였는데 말이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부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며칠 만에 보는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더 야위어 있었으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유독 더 힘이 없어 보였다.게다가 이마에는 까진 상처가 있었는데 복도 조명 때문에 더 잘 보였다.이경빈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심장에 마치 칼에 찔린 듯한 고통이 일었다.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는 그날 그의 명령으로 머리가 조아려졌을 때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그렇게도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는 억지로 그녀의 무릎을 꿇리고 강제로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이경빈은 그날 경호원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박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왜 바보같이 그녀에게 그런 수모를 줬을까.왜 등신처럼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고 공수진에게 사과하게 했을까.이경빈이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던 그때 탁유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은 시간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왜, 또
주원호의 말에 이경빈의 몸이 움찔 떨렸다.탁유미는 그저 복수대상일 뿐이라고?아니. 탁유미는 그에게 단지 복수대상뿐인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였다.이경빈은 심장이 점점 더 세게 아파 와 이윽고 벽에 몸을 기댔다.꼭 이 통증에 잠식되어가는 듯한 기분이다.그는 멀고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자신이 탁유미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한때는 고작 원수 집안의 딸일 뿐인 여자라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 따위는 금방 지워질 줄 알았다. 그녀를 감옥에 보내 복수를 하고 나면 아주 손쉽게 그녀를 마음속에서 떨쳐낼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희망했을 뿐 그는 줄곧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만약 탁유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허름한 모습으로 있는 게 신경이 쓰일 리도 없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질투 날 리도 없다.또한 상처만 줬던 그녀에게 배신감이 들 리도 없다.이경빈은 항상 공수진의 편에만 서고 한 번도 탁유미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는 것에서 늘 도망쳐왔다.죽도록 미운 원수의 딸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이경빈은 몸 옆으로 축 늘어진 자신의 두 손에 서서히 힘을 가했다.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뚫어버리고 이내 바닥으로 피까지 뚝뚝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고통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텅 비어 버린 얼굴로 탁유미의 병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탁유미를 만나 그간 상처를 줘서 미안했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멍청하게 굴어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를 해야만 한다.그녀의 아버지를 향한 증오를 그따위 비열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화풀이해서는 안 됐다고 사과해야만 한다.또한 앞으로는 정말 잘 해주겠다고, 지금까지의 고통을 전부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잘해주겠다고 말을 해야만 한다.이경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놓고는 막상 탁유미의 병실에 점점 가까워지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탁유미가 전과 같은 원망과 증오가 서
이경빈은 말 그대로 공수진에게 생지옥이라는 게 무엇인지 맛보게 해줄 생각이다.그와 탁유미의 인생을 가지고 논 대가를 평생에 걸쳐 갚게 할 생각이다....병실에서 나온 이경빈은 심장께가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는 탁유미를 모함하려고 한 공수진도 물론 증오스러웠지만 그녀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여자에게 무자비했던 자신이 더 증오스러웠다.아까 병실로 들어간 순간 이경빈은 억지로 탁유미의 무릎을 꿇리고 그녀에게 머리까지 조아리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바닥에 쿵쿵 부딪히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정말 공수진을 위해서였을까?사실은 그저 그런 방식으로 탁유미에게 상처를 줘 그녀를 향한 마음을 애써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윤이를 이용해 이씨 집안 재산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공수진이 어렵게 생긴 아이를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자꾸 상처받은 듯한 탁유미의 얼굴들이 떠올라 더 모질게 굴었던 건 아닐까?탁유미는 그에게 등신이라고 했다.맞는 말이다.그는 정말 구제 불능의 등신이었다.“저... 저기, 저는 그저 공수진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에요. 제가 아는 건 다 털어놨으니 이제 그만 저 풀어주세요...”주원호가 이경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몇십 분 전 그는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찰나 검은색 정장의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병원으로 데려와 졌고 이경빈의 앞에서 공수진에 관한 모든 얘기를 실토하라는 협박을 받았다.만약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평생 감방에서 썩게 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주원호는 솔직히 그저 공수진에게 돈만 조금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돈이고 뭐고 공수진 근처로는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대체 누가 날 데리고 온 거지? 상황을 볼 때 이경빈은 아닌 것 같은데.’“풀어달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헛웃음을 쳤다.공수진을 도와 진실을 덮어버린 그
이경빈은 공수진에게로 더 바짝 다가가 그녀의 두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래서 네 배 속의 아이가 주원호의 아이라는 걸 다 알고 일부러 그런 식으로 유산해 아이도 제거하고 탁유미도 제거하려고 했던 거야?”공수진의 흥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이경빈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차분했다.하지만 그건 꼭 거대한 해일이 밀려들기 전의 고요함으로 차라리 화를 내는 게 더 낫겠다 싶을 정도로 무서웠다.공수진은 이경빈의 질문에 머리가 새하얘지고 아니라는 말이 목구멍에 꽉 막힌 채 좀처럼 튀어나오지 않았다.이경빈은 그녀의 머릿속을 다 꿰뚫어버리려는 듯 눈조차 깜빡이지 않았다.“나는... 나는...”공수진의 목소리가 덜덜 떨리기 시작했다.“네 유산 수술을 집도했던 의사를 불러올까? 태아가 정확히 몇 개월 된 아이였는지 물어봐 줘? 그것도 아니면 너희 집안이 의사한테 돈을 먹인 증거를 가지고 올까?”공수진은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부인해봤자 큰 의미가 없을 거라고 생각해 노선을 바꿔 그에게 매달리며 눈물을 글썽였다.“경빈 씨, 미안해요. 경빈 씨를 너무 사랑해서 그랬어요.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한 일로 경빈 씨가 나를 싫어할까 봐... 그래서 말을 못 했어요. 그리고 일부러 탁유미 씨를 모함하려고 했던 것은 아니에요. 유미 씨가 나를 밀어버려서,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유산하게 된 거예요. 절대 일부러 그럴 생각은 아니었어요. 경빈 씨, 나 한 번만 용서해주면 안 돼요...? 전에는 내가 한 잘못은 다 용서해줬잖아요. 그리고 날 평생에 걸쳐 사랑하고 또 아껴주겠다고 했잖아요... 그러니까 이번도 한 번만 봐줘요. 네...?”그녀의 눈물과 애처로운 말은 더 이상 이경빈의 동정심을 자아내지 못했다. 오히려 그의 심기만 건드릴 뿐이었다.“용서?”이경빈이 코웃음을 치더니 그대로 공수진의 팔을 뿌리쳤다.공수진은 그 충격으로 뒤에 있는 벽에 몸이 부딪쳐버렸다.그리고 외마디 비명을 지를 겨를도 없이 이경빈에 의해 목이 졸려졌다.냉랭하고 차분했던 기색은 이제 온데간데없이 사라지
이경빈의 말에 공씨 집안 사람들의 표정이 삽시간에 변했다.공수진은 등줄기를 타고 오는 오싹함에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 떨었다.‘무슨 뜻으로 하는 말이지? 설마...!’“그, 그게 무슨 말이에요? 나는 경빈 씨가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잘 모르겠어요. 속이다뇨... 그럴 리가 없잖아요.”공수진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으며 눈물을 글썽였다.예전이면 가여워 보였을 그녀의 모습이 지금은 혐오스럽기 그지없었다.“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몰라?”이경빈은 가볍게 웃더니 휴대폰을 꺼내 들고 화면을 두어 번 터치하더니 곧바로 공수진 쪽으로 휴대폰을 내밀었다.그러자 휴대폰 안에서 의사와 공수진의 통화 녹음이 흘러나왔다.공수진의 목소리가 흘러나왔을 때 공수진은 물론이고 공씨 부부 역시 표정이 확 어두워졌다.심지어 공수진은 많이 당황한 것인지 이마에서 식은땀까지 흘러내렸다.‘임유진이 말했던 녹음이라는 게 이거였어?! 그 여자가 기어코 경빈 씨한테 이 녹음 파일을 전해준 거야?!’공수진은 임유진을 향한 분노에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참 대단해.”그때 이경빈이 천천히 병상 옆으로 다가와 공기조차 얼려버릴 것 같은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이 나를 몇 년이나 가지고 놀고 말이야. 참 대단해, 공수진.”“이... 이거 거짓말이에요! 가짜라고요! 누가 내 목소리로 일부러 이런 통화 녹음을 만든 거예요!”“네가 아니라고?”공수진의 부인에 이경빈은 손에 든 자료를 그대로 그녀의 얼굴에 던져버렸다.“당시 너랑 통화했던 의사 선생님도 찾았고 네 목소리가 맞는지 전문가한테 의뢰하기까지 했어. 그런데도 네가 아니야? 증거가 버젓이 있는데?”공수진은 당황한 듯 말을 버벅거렸다.“그. 그렇게 의심스러우면 병원 기록을 알아보면 되잖아요! 기, 기록에 다 적혀 있어요. 내가 경빈 씨한테 기증했다는...”드르륵.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문이 열리고 누군가가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공수진은 갑자기 나타난 주원호의 얼굴을 보고는 얼굴이 새하얗