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숭아 같은 눈동자가 순간 차가운 눈빛으로 변하자 소민준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떨었다.“묻지 말아야 할 것은 묻지 말아야죠. 소 대표님은 이런 것도 모르나요?”옆에 있던 고이준이 말문을 열었다.소민준은 얼굴이 창백해지더니 어색해하며 자리를 떴다.한편 강지혁은 소파에 기대어 싸구려 핸드폰을 꺼냈다. 핸드폰에는 번호 하나만 저장돼 있었다.그가 유일하게 저장된 번호를 누르자 잠시 후 핸드폰 반대편에서 부드러운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저녁에 뭐 먹고 싶어? 내가 포장해 갈게.”그는 방금 전 차가운 느낌은 온데간데 없고 부드러웠다.……저녁에 임유진은 티슈를 들고 어머니의 액자를 닦았다. 그녀는 특별히 작은 상을 사 평소에 어머니 사진을 그 상에 올려놓았고 며칠마다 사진에 쌓인 먼지를 닦았다.어머니의 유물들은 모두 임 씨 가문에 있으니 그녀가 어머니와 관련된 물건 중 갖고 있는 건 사진밖에 없다.그리고 그녀가 사진을 닦을 때 강지혁은 한쪽에 앉아 조용히 그녀를 바라보았다.“참, 혁아. 곧 설이 다가오는데. 혹시……차표 샀어?”최근 며칠 환경위생과의 회사 동료들이 구정에 집에 갈 기차표를 사고 있어 임유진이 물었다.강지혁은 순간 그녀가 묻고 싶은 걸 알아차렸다.“난 차표 살 필요 없어.”“집에 안 가도 돼?”그녀가 의아해했다.“난 누나 여기 말고는 집이 없어.”그는 강 씨 자택에 여러 해 동안 살았지만 여태껏 집이라는 느낌을 받지 못했다.그녀는 그가 가족이 없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 하지만……친척 정도는 있기 마련이다. 보통 설에는 친척 집을 다니는 게 정상이다.그녀가 질문을 하려고 할 때 그가 덤덤하게 말했다.“친척이 있지만 굳이 갈 필요는 없어.”비록 할아버지도 가족이기는 하지만 강 씨 가문은 가족애라는 것이 없고 할아버지가 필요한 것도 단지 강 씨 가문의 상속자일 뿐이다.그가 충분히 우수하고 강하면 할아버지가 원하는 것이고 그가 강하지 않다면 설령 할아버지의 친손자라 할지라도 매몰차게 쫓겨날 것이다.하물며 그의
임유진은 자신이 그를 처음 만난 그 자리가 그의 아버지가 사망한 곳이라는 것을 생각지도 못했다.“미안해.”그녀가 말했다.“아버지가 돌아간 것은 자업자득이니 누나가 사과할 필요는 없어.”강지혁이 목소리를 깔고 말했다.“자업자득?”그녀는 의아해했다. 그가 아버지의 죽음을 이렇게 말할 줄은 몰랐다.“자업자득이 아니면 뭐야? 사랑하지 말아야 할 사람을 사랑해 상대가 이용할 가치가 없으니 곧바로 아버지를 버렸어. 아무리 무릎을 꿇고 애원을 해도 아무런 소용이 없었어. 그러다 결국에는 그 자리에서 얼어 죽은 거야.”그의 표정은 아주 평범한 일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했고 심지어 목소리도 평소와 같았다.그러나 그의 몸은 마치 쓸쓸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것 같다.마치 임유진이 그를 처음 봤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다.“혁아.”그녀가 그를 불렀다.그가 머리를 들어 칠흑 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누나가 보기에는 자초한 것이 아니야?”그녀는 목이 메어 한참이 지나서야 말을 뗐다.“그 여자, 혹시 네 엄마야?”그는 아무 표정도 없이 침묵하고 있었지만 그 두 눈동자는 고통을 스쳐 지나갔다.그 순간 그녀는 답을 알았다.그녀는 그를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몰랐다. 마치 지금, 어떤 말도 무의미한 것 같았다. 어떤 일은 겪어본 사람만이 고통을 안다.그녀는 일어서서 의자에 앉아 있는 그를 껴안았다.그는 그녀의 몸에 기대어 숨결을 느꼈으며 볼 옆으로 그녀의 온기가 전해왔다.그녀의 심장 박동 소리가 옷을 사이에 두고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그는 이렇게 계속……듣고 싶었다.……“엄마, 가지 마…….”어리고 야원 몸이 무릎을 꿇고 짐을 싸서 떠나는 여자에게 떠나지 말라고 빌고 있다.그러나 소용없다. 여자는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고 단호하게 떠나려 한다.상대가 떠나려 하자 남자아이는 손을 뻗어 어머니를 잡으려 했다.그러나 그 순간 그는 매몰차게 밀려나더니 곧이어 가슴을 파고드는 통증이 전해왔다…….아프다……너무 아프다!누가 이런 고통
임유진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다행이야. 드디어 깼어.”그는 벌떡 앉았다. 방금 그는 어렸을 때의 그 장면을 꿈꿨다. 꿈에서 그가 그 여자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걸복걸했다……잠들기 전에 그 여자 얘기가 나와 그런 꿈을 꾼 건가?“그냥 꿈을 꾸었을 뿐이야.”그가 길게 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이자 자신의 잠옷 단추가 이미 풀린 채 가슴을 드러냈다.“내 옷은…….”임유진은 순간 어색해하며 입술을 삐죽거렸다.“네가 자꾸……아프다고 해서 네 몸에 뭐가 있을까 봐……그래서 단추를 풀고 봤어.”그가 그녀를 보자 그녀의 얼굴이 서서히 뜨거워지기 시작했다.“하지만 장담할게. 내가 보기도 전에 네가 깼어. 난 아무것도 못 봤어.”그녀는 황급히 설명했다. 하지만 설명할수록 오히려 애매하게 들리는 것 같았다.“누나가 봤다 해도 괜찮아.”강지혁이 말했다.임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 하마터면 자신의 침에 사레가 들 뻔했다.강지혁은 다른 사람이 들었으면 얼마나 비뚤어진 생각을 할지 모를 것이다.“너 몸은……이제 안 아파?”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더듬거리며 말했다.“응. 안 아파.”그는 고개를 숙이고 잠옷의 단추를 채우기 시작했다.그녀는 시선을 목에 고정하려고 노력했지만 자기도 모르게 그의 가슴을 힐끗 보더니 갑자기 그의 잠옷을 벗겼다.“너 여기 왜…….”그녀는 물끄러미 그의 가슴 위치에 흉터를 바라보았다. 비록 흉터가 이미 옅어졌지만 그 당시의 상처는 아주 심했을 것이다.“작은 상처일 뿐이야.”그가 담담하게 말했다.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손을 들어 그의 상처를 가볍게 만졌다. 그가 방금 잠결에 아프다고 소리치며 끊임없이 이곳을 만졌다. 바로 이 상처 때문일까?몇 년이 지나도 꿈에서 아프다고 외치는 상처가 어찌 작은 상처일 수 있겠는가?그 당시 그가 이 상처를 입었을 때 얼마나 아팠을까?임유진은 총에 맞은 것처럼 가슴이 너무 아팠다.“어떻게 이런 상처를 입은 거야. 언제 다쳤어?”그녀가 중얼중얼 물었다.그의 몸은 약간 경직되
“혁아!”그녀는 큰소리로 그를 부르면서 두 손으로 그의 얼굴을 잡았다.순간 그는 정신을 차렸고 칠흑 같은 눈동자도 점차 초점이 잡히더니 머리를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다만 눈빛은 복잡미묘했다.“왜 그러는 거야?”그녀가 말했다.“아무것도 아니야.”그는 아주 쓸쓸해 보였다.“괜찮으면 됐어.”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너 방금 마치…….”그녀는 잠시 고민했다.“곧 깨질 것같은 유리 같았어. 깜짝 놀랐어.”“곧 깨질 것같은 유리?”그는 싱긋 웃더니 차가운 눈동자가 곧 평소처럼 바뀌었다.“누나, 이 세계에서 날 깰 사람은 없을 거야.”그녀는 방금 그가 다른 사람으로 바뀐 것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잘못 봤다고 생각했다.“누나는 영원히 날 떠나지 않을 거지?”그가 그녀를 바라보며 묻자 그녀가 싱긋 웃었다.“예전에도 말했잖아? 네가 날 버리지 않으면 난 널 버리지 않을 거라고.”“맞아. 말 한 적 있다는 걸 깜빡했어.”그는 중얼거리며 두 팔을 뻗어 그녀를 품에 안으면서 그녀의 존재를 느꼈다.분명히 그녀는 그를 버리지 않겠다고 말했는데, 왜 그의 마음은 오히려 불안해진 것일까? 언젠가 그녀가 그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되면 그를 떠날까 봐 두려운 걸까?혁이는 그녀의 곁에 있을 수 있는데 강지혁은? 가능할까?……소 씨 자택 거실에서 소민준의 아버지가 아들에게 물었다.“민준아, 세령이가 강지혁의 비서가 널 데려갔다고 말하던데 왜 갑자기 단둘이 만난 거야?”강지혁에 대해 말하자 소민준의 아버지는 조금 두려워 했다. 소 씨 가문은 강 씨 가문과 다르다. 현재 소 씨 가문의 모든 사업은 진 씨 가문과의 혼인 때문에 되살아났고 소민준의 아버지는 소 씨 가문이 구사일생 했다고 생각했다.그는 강지혁이 소 씨 가문에 대한 편견이 있어 혼인이 막힐까 봐 매우 두려웠다.“아무것도 아니에요.”소민준이 말했다.“세령이에게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고 나한테도 아무 것도 아니라고 하는 거야? 아무 일도 없으면 강지혁이 왜 비서를 시켜 널 데려오
임유진 얘기를 꺼내자 소민영은 화가 치밀어 올랐다. 임유진이 교통사고를 낸 뒤에 소민영은 영애들의 파티에서 소 씨 가문이 말할 것이라는 말을 듣고는 너무 창피했다.그리고 자신의 오빠가 진세령과 사귀고 나서야 비로소 아무도 다시는 그렇게 말하지 않았다.“임유진 때문에 소 씨 가문에 재수 없는 일이 너무 많이 생겼어요. 임유진은 오빠와 어울리지도 않아요. 지금은 환경미화원으로 일한다면서요? 정말 창피해요. 애당초 판사는 형량을 왜 3년밖에 내리지 않았대요? 나 같으면 적어도 몇십 년을 판결할 거예요!”소민영은 혐오스러운 표정으로 임유진을 말했다. 하지만 소민준은 그녀가 이렇게 말할수록 더욱 간담이 서늘해졌다.임유진은 지금 강지혁의 사람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비록 강지혁이 두 사람 사이가 어떤 관계인지 명확히 말한 적이 없다고 해도 같은 남자로서 소민준은 짐작할 수 있다.“그만해. 민영아, 더 이상 그녀에 대해 말하지 마. 앞으로 임유진을 만나면 예의를 갖추는 게 좋겠어.”소민준이 말하자 소민영은 불만을 토로했다.“오빠, 왜 그래요? 예전에는 내가 이렇게 말해도 아무런 얘기가 없더니 왜 이제는 그녀의 편을 들어요?”“민준아, 너 설마 임유진에게 미련 있는 건 아니겠지?”소민준의 엄마는 걱정했다.그러자 소민준의 아버지는 미간을 찌푸렸다.“생각도 하지마. 임유진은 소 씨 가문에 절대 못 들어와.”사실은 그들이 생각하는 것과 다르지만 사실대로 얘기할 수 없어 소민준은 머리가 아팠다.“저는 임유진에게 그 어떤 감정도 없어요. 하지만 임유진은 우리가 함부로 건드릴 수 없는 사람이에요! 저는 여기까지만 말할 수 있어요!”“함부로 건드리지 못한다고요?”소민영은 코웃음을 쳤다.“오빠,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예요. 임유진은 고작 환경미화원인데 우리가 함부로 대하지 못한다고요?”“아무튼 내 말을 들으면 돼. 소 씨 가문을 해치지 말고!”소민준은 엄하게 경고했다.소민준의 아버지는 여러가지를 많이 경험해봤기에 아들이 이렇게 말하자 사태의 심각성을 느겼
“그럼 네 생각에는 그녀가 내 곁에 남아 있기를 원할 것 같아?”강지혁이 묻자 고이준은 조금 의아했다.“대표님은 임유진 씨와 함께하기를 원합니까?”‘이 게임은 대표님이 임유진에게 진짜 신분을 알려주면 끝나는 게임인 걸까? 아니면 대표님은 임유진 씨에게……진짜 다른 감정이 생긴 걸까?’여기까지 생각한 고이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대표님은…….”그는 말을 하려다 입을 다물었다.“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빨리 말해!”강지혁이 명령했다.“대표님, 설마 임유진 씨를 사랑하게 된 거예요?”고이준이 말했다. 하여 대표님은 임유진이 모르게 그녀를 돕고 있고 이 게임이 끝나더라도 임유진이 그와 함께하길 원하는 게 아닐까?강지혁의 표정이 점점 굳어졌다.사랑, 그럴 리가? 그가 어떻게 한 여자를 사랑하게 될 수 있겠는가, 아버지를 보고도 그런 감정이 들 수 있을까? 영원히 그 누구든 사랑하면 안 된다. 그래야 자신의 존엄이 다른 사람에게 밟히지 않는다.그는 기껏해야 임유진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할 뿐이다. 그 여자의 체온, 숨결은 그를 안심시키고 편안하게 한다.“앞으로 그런 말 하지 마.”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고이준은 흠칫하며 곧바로 대답했다.“네.”……노란 불빛이 사람을 매혹시킨다.이한은 호기심 가득한 눈빛으로 소파에 나른하게 앉아있는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강지혁은 이런 모임에 참석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무슨 이유인지 오늘은 참석했다.“어떻게 올 생각을 했어?”그가 다가가서 물었다.그와 강지혁은 어릴 때부터 친구였고 초중, 고중까지 같은 반 친구였기에 그는 당연히 강지혁이 조용한 곳을 좋아하고 떠들썩한 곳을 싫어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갑자기 생각나서 온 거야. 특별한 이유가 필요해? 너희도 날 자주 불렀잖아?”강지혁이 말했다.비록 이렇게 말하지만, 이한은 이상하다고 생각했다.바로 이때 화사한 옷차림에 정교한 화장을 한 여자가 다가와 강지혁에게 말을 걸었다.이한은 그가 반드시 거절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강지혁은
가끔 이한은 친구들과 내기를 한다. 강현수의 새 여자친구가 그의 독신생활을 끝낼 수 있는가 없는가를 내기를 하는데 매번 반드시 진다.강현수란 사람은 겉으로는 예의가 있어 보이지만 실제로는 차갑기 그지없다.“응. 알아. 네 팔찌는 만지지 못하지.”강현수와 오랫동안 알고 지낸 사람들이라면 강현수가 이 은팔찌를 보물처럼 아끼고 절대 못 만지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한은 놀라지 않았다.바로 이때, 한 그림자가 다가왔다. 강현수의 새 여자친구 김선아였다. 그녀는 연예계에서 새로 떠오르는 스타이고 수 많은 보물을 갖고 있다.물론 이것은 모두 강현수가 준 것이다.연예계의 큰손으로서 강현수는 전국에서 가장 큰 기획사를 갖고 있으며 스타 하나를 키우는 건 더할 나위 없이 쉬운 일이다.강현수는 한 여자를 사귈 때마다 아주 아끼지만 자신이 필요 없을 때는 그 어떤 미련도 남기지 않고 버린다.“현수 씨, 미안해. 내가 늦었어.”김선아가 부드럽게 말하더니 강현수가 들고 있는 은팔찌를 힐끔 보고는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비록 강현수는 그녀를 아주 아껴 그녀가 수억이 되는 보석을 원한다 하더라도 사라고 할 것이지만 그 은팔찌는 금기와 같다.그는 심지어 그녀가 만지는 것조차 허락하지 않았다.한번은 그녀가 손을 대려고 하자 그가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보며 말했다.“네가 이 팔찌를 만지면 넌 두 번 다시 네 두 손을 보지 못하게 될 거야. 알겠어?”그 순간, 그의 눈동자는 아주 무자비했다.그녀는 놀라서 감히 움직이지도 못했다.비록 그 후에도 그는 여전히 그녀를 평소처럼 아꼈지만, 그녀는 자신이 그의 팔찌와 비교조차 안 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이 은팔찌는 도대체 무엇일까, 팔찌가 작아 아이의 손목 사이즈이다.“괜찮아.”강현수는 담담하게 말하더니 팔찌를 넣었다.김선아는 자리에 앉아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강지혁을 보더니 멍때렸다.“저분은……강지혁, 강 대표님이잖아.”그녀는 이전에 먼 곳에서 한번 본 적 있기에 확신하지 못했다.특히 지금 강지혁은 다
심지어 그 여자가 좀 더 가까이 다가갔을 때 그는 혐오감을 느꼈다.역시 다른 여자를 안았을 때랑 그녀를 안을 때랑 느낌이 너무 다르다.임대주택에 도착하자 그는 몸을 숙이고 문 앞 바닥에서 예비 키를 꺼냈다. 그녀는 항상 예비 키를 여기에 두는 것을 좋아한다. 만약 키를 못 가지고 나갈 때 예비 키가 있으면 집에 들어갈 수 있다고 말했다.그가 문을 열었을 때 방 안의 불이 여전히 켜져 있었다. 가녀린 그림자가 테이블에 앉아있는데 잠든 것인지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그는 불빛 아래 그녀의 잠든 얼굴을 보자 마음이 평온해졌고 그녀를 본 순간 안정되었다.그는 손끝으로 그녀의 머리카락을 살며시 만졌고 한평생 그녀만 본다 해도 질리지 않을 것 같았다.잠시 후 그는 허리를 굽혀 조심스럽게 그녀를 안았다.하지만 그가 애써 가볍게 움직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깼다.“혁아…….”그녀가 흐리멍텅하게 눈을 뜨자 흐릿한 살구 눈동자는 마치 유리 색으로 물든 것 같았다.“응, 나 왔어.”그가 말했다.“침대로 옮겨줄게. 계속 자.”그는 말하면서 그녀를 안고 침대 옆으로 걸어갔다.그녀의 머리는 그의 품에 기대어 잠결에 물었다.“너한테……아주 좋은 향기가 나. 향수 냄새지……어디 갔던 거야?”“오늘 일이 좀 있어서 술집에 갔는데 아마 그쪽에서 묻었나 봐.”그는 그녀를 침대에 눕혔다.“계속 자. 난 좀 씻을게.”그녀는 서서히 눈을 감았다.그는 그녀에게 이불을 덮어주고 나서야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갔다.욕실에서 그는 서서 몸을 씻고 있다. 몸에서 나는 이 향수 냄새는 아마 방금 클럽에 있던 여자한테 묻은 거다.비싼 향수는 오히려 그의 손에 있는 비누 냄새보다 좋지 않다. 왜냐하면……그것은 그녀의 몸에서 나는 냄새와 다르기 때문이다.마치 그의 몸에도 그녀의 냄새가 물든 것 같다.강지혁은 씻고 욕실을 나서더니 침대에 누워 깊이 잠든 사람을 보고 있다.그는 허리를 살짝 굽히고 그녀에게 조금씩 다가가 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다.“임유진, 내가 언제 내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우리 현이는 어쩜 기억력도 좋아... 하하.”임유진은 어색하게 웃더니 곧바로 율이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런데 율아, 정말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 적 없어?”“네, 아빠랑 같이 간 적은 없어요.”강선율의 대답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랑 같이 안 가줬어?”“도우미들이 함께 가줬어.”“같이 가주지. 그러다 율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걱정도 안 됐어?”임유진은 자기가 다 서운한 듯 강지혁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며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놀이공원 자체가 즐거운 곳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걸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안 잃어버려.”강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야...”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에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놀이공원 전체를 하루 대관한 거라 사람이라고는 아이 한 명과 직원들, 그리고 율이 곁을 지켜주는 도우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지혁은 10명의 경호원을 아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기도 했다.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전은 확보가 됐지만 그런 식의 놀이공원이라면 줄을 설 때의 미묘한 기대감도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느낄 수 없게 된다.“율아, 놀이공원 갔을 때 어땠어? 좋았어?”임유진이 물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이는 고개를 저었다.“재미없었어요.”재미있어 보이던 놀이 기구도 두어 번 타보니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놀이공원이 얼마나 재미있는데!”강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나랑 엄마는 엄청 자주 갔어.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대관람차도 타고. 그런데 매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 같은 건 두 번 밖에 못 탔어...”현이는 말을 하다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재밌다고?’강선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고이준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해졌다.“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나간 후 강지혁은 의자에 힘없이 기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살아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지는 웃음소리와 반대로 그의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맺혀 올랐다. 그리고 그 눈물은 매끈한 볼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는 임유진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녀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 또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그리고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 덕에 배웠던 후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까지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하고 고통으로 사뭇 쳤다. 자신만 입을 닫고 진실을 감춰버리면 그녀는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고배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세상에는 영원히 발각되지 않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또한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기억을 되찾은 강지혁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게 꼭 꿈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게 꼭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일까, 그날 밤 이후부터 그는 임유진이 깊은 수면에 든 후면 어김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곤 했다.마치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날 싫어하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제발...”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일 밤 그들의 침실에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주말.임유진과 강지혁은 강선율과 강선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놀이공원에 가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어느 날 현이가
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부름으로 사무실에 왔다가 벌써 10분째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의 눈빛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혹시 사모님과 다투신 건가? 아니면 또 두통 때문에...?’강지혁은 계속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내 곁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뭔지, 정말 몰라?”고이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철렁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진애령 사건 때문에 도저히 날 용서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내 곁을 떠난 거라고, 너나 한 집사나 두 사람 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네, 그랬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추측일 뿐입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사모님밖에 모르시니까요...”고이준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희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년 만에 돌아오시고 나서 진애령 씨 사건에 관해 얘기했을 때 사모님은 회장님을 다 용서했다고 하셨거든요.”“용서?”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조금만 살이 맞닿아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토까지 했는데 그게 과연 용서한 사람의 행동일까?용서했다고 한 말도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자신이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해외에 있는 요셉 선생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유진이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요셉은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로 특히 기억 관련해서는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회장님 설마...’“혹시 기억을 완전히 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강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의 기억은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돌아온 상태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세세한 기억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하지만 박 선생도 전에 말했다시피 갑자기 모든 기억을 다 찾으려고 하면 회장님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할 겁
소민아는 그런 그녀의 아부가 싫지 않았기에 이름이 알려진 뒤로 심심풀이용으로 하던 라이브에 문혜진을 포함한 상류층 사람들을 부르며 인기몰이를 했다. 다들 무척이나 협조적이었고 심지어는 새벽에 연락해도 흔쾌히 나와주었다.부자들이 나오는 컨텐츠는 수요가 많았기에 소민아는 라이브로 얻은 인기에 힘입어 자신만의 작은 회사까지 차리며 계속해서 라이브로 수익을 벌어 들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돌아온 뒤로 모든 것이 변했다. 매일같이 아부하며 스케줄을 물어보던 친구들은 갑자기 연락이 뚝 끊겼고 라이브에 와주기로 했던 사람들은 모두 하나같이 다른 스케줄이 있다며 거절을 해왔다.그리고 이제는 제일 만만하고 항상 개처럼 따르던 문혜진조차도 그녀의 초대를 단칼에 거절해버렸다.강씨 가문의 안주인 후보가 아닌 소민아는 아무런 가치도 없으니까.옆에 있던 비서는 소민아의 얼굴이 어둡게 가라앉은 것을 보고 조심스럽게 물었다.“대표님, 그럼 오늘 라이브는 어떻게...”“뭘 어떻게 해요? 지금 당장 스케줄 가능한 연예인 쪽으로 연락 돌리세요. 인기 없는 애들 말고 지금 한창 핫한 애들로요.”소민아가 앙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너희들이 없으면 내가 라이브 못할 줄 알아? 두고봐. 반드시 후회하게 해주겠어!’“네, 알겠습니다.”비서는 고개를 한번 숙이더니 서둘러 사무실을 빠져나갔다.소민아는 의자 시트에 등을 기댄 채 화를 억누르다 다시금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앨범을 한번 훑어보았다.많고 많은 사진 속 유난히 눈에 띄는 사진이 있었는데 그건 다름 아닌 한정판 드레스에 예쁜 루비 목걸이를 하고 강지혁의 바로 옆에 서 있는 임유진의 사진이었다.해당 사진은 누군가가 SNS에 업데이트한 사진으로 소민아는 사진을 보자마자 바로 자신의 앨범에 저장했다.소민아는 사진을 뚫어지게 바라보다 또다시 분노를 터트렸다.“드레스도 내가 먼저 고른 거고 루비 목걸이도 내가 먼저 발견한 건데 왜 다 이 여자한테 가 있는 거야!”임유진이 나타나기 전, 한창 사모님 기분을 내며 쇼핑하던 어
“아주 잠깐 아팠을 뿐인데 뭐하러. 그리고 통증이 시작됐을 때 나는 침실이 아니라 서재에 있었어. 아침에 박 선생한테 연락해봤는데 큰 문제는 아니래. 그리고 일전에 박 선생이 처방해준 약도 아직 있어서 크게 문제 될 건 없어. 괜찮아.”임유진은 괜찮다는 그의 말에도 좀처럼 걱정이 가시지 않았다.“나 정말 괜찮아. 큰 상처도 아니고. 며칠 지나면 금방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잠시 머뭇거리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그보다... 5년 전에 내 곁을 떠난 이유가 뭔지 정말 기억이 안 나?”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사실이었다.다른 기억은 다 돌아왔지만 하필이면 그때의 기억만 마치 누가 잘라놓기라도 한 듯 아주 조금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사실 기억을 찾고 싶은 건 강지혁뿐만이 아니라 임유진 역시 마찬가지였다. 당시 절벽에서 그렇게 떨어진 후 무슨 일이 있었는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었는지, 왜 현이만 곁에 있었는지, 그리고 나머지 한 아이는 죽었는지 살았는지, 만약 살아있다면 지금쯤 어디에 있는지 등등 궁금한 게 너무도 많았다.임유진은 손을 뻗어 강지혁의 입술을 조심스럽게 매만졌다.“어젯밤에... 사실은 많이 아팠던 거지?”강지혁은 아주 잠시만 아팠다고 했지만 그랬다면 이런 깊은 상처들이 생겼을 리가 없다.“지금은 안 아파.”“만약 앞으로 또 통증이 찾아오면 내가 자고 있더라도 깨워. 내가 아무것도 모르게 하지 마.”임유진은 강지혁이 고통스러워하는 순간에 아무것도 모른 채로 자고 있었다는 게 너무나도 속상했다.“나도 알아. 너 아플 때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뭐 없다는 거. 하지만 우리는 부부잖아. 그때 혼인신고하고 나올 때 아플 때도 슬플 때도 언제나 함께 있자고 맹세했잖아. 그러니까 앞으로는 뭐든 얘기해줘. 너 혼자 아파하지 마.”강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임유진의 얼굴만 빤히 바라보았다.얼굴이 창백해질 때까지 괴롭게 토를 하던 그녀의 얼굴이 또다시 그의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임유진은 그의 곁을 떠난 게 분명히 그럴
하지만 머리에 손이 닿기도 전에 강지혁이 빠르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괜찮아. 이제 안 아파.”“그래.”임유진은 안도한 듯 웃으며 손을 거두어들이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의 손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꽉 잡은 채 놓아주려 하지 않았다.“왜? 뭐 할 말 있어?”강지혁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이내 큰 결심을 한 듯 천천히 입을 열었다.“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거 말이야. 정말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거 확실해?”“그건 갑자기 왜 물어? 그리고 말했잖아.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어서일 거라고. 다른 건 몰라도 이거 하나만은 확실해. 내가 사랑했던 사람은 너밖에 없어.”임유진은 당시 절벽에서의 일을 얘기해 주면 강지혁에게 큰 자극으로 다가올까 봐 오늘도 진실을 얘기해 주지 않았다.“그냥... 갑자기 궁금해져서. 너도 알다시피 난 너에 관한 기억이 거의 없잖아.”임유진은 그 말에 미소를 지었다.“그럼 앞으로 내가 틈틈이 우리가 함께했을 때 얘기를 해줄게. 계속 듣다 보면 네 기억도 점점 돌아오게 될 거야.”“너는 내가 기억을 다 찾았으면 좋겠어?”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당연하지. 하지만 내 바람이 그렇다고 괜히 조바심낼 필요는 없어. 나는 네 기억이 아주 자연스럽게 무리가 가지 않는 선에서 천천히 돌아왔으면 좋겠으니까.”‘천천히... 하지만 내 기억은 이미...’강지혁은 조금 복잡한 얼굴로 임유진의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손이 풀리자 침대에서 내려가려는 듯 몸을 옆으로 돌렸다. 하지만 막 바닥에 발을 딛고 일어나려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리는 바람에 몸이 앞으로 기울여버렸다.강지혁은 재빠르게 임유진을 받아내고는 이내 미간을 찌푸렸다.“고마...”임유진은 몸을 바로 세운 후 고맙다는 말을 하려다 강지혁의 손등을 보고 멈칫했다. 그도 그럴 게 고운 손에 시퍼런 멍이 한가득했기 때문이다.“너 손이 왜 이래?”임유진이 눈을 크게 뜬 채 묻자 강지혁은 재빠르게 손을 거두어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