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지해 보이는 친구의 모습에 이한은 침을 꼴깍 삼켰다. 강지혁의 말로부터 큰 이변이 없는 한 임유진이 미래 강씨 일가 안주인이 되는 건 틀림없는 듯 보였다."임유진 씨, 운이 좋네."이한이 중얼거렸다. 그러자 곧바로 강지혁의 한마디가 들려왔다."운이 좋은 건 나야."아니, 그녀의 불행이 그의 행운이 됐다는 표현이 더 맞을지도 모르겠다.만약 그 교통사고가 없었더라면 임유진은 아마 지금쯤 소민준과 결혼해 아이까지 낳고 행복하게 살았을 것이다. 그러면 이런 방식으로 강지혁의 눈에 띌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와 연인이 되지도 않았을 것이고.강지혁은 지금 임유진의 곁에서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나날을 보내고 있다.이한은 더 이상 놀랄 건 없다고 생각했지만, 강지혁의 행복해 보이는 미소에 또 한 번 놀랄 수밖에 없었다....임유진은 웨이터로부터 샴페인 한잔을 받았는데 거의 무알코올 느낌의 과일 향이 나는 술이었다. 하지만 그녀는 주량이 세지 않아 금방 취할 수도 있었기에 많이 마시지는 못했다.샴페인을 홀짝이며 주위를 둘러보니 유명인사들이 화려한 공간 속에서 서로 술잔을 부딪치며 하하 호호 웃고 있었다. 그녀도 변호사였을 당시 인맥을 넓히기 위해 상류 사회 사람들과 접촉하며 같이 웃고 떠들었었다.그리고 그때 그녀는 매번 연회에 참가할 때마다 정성껏 자신을 단장하고 사람들과 얘기를 나눌 때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을 보였다. 소민준에게 부끄럽지 않은 여자친구가 되고 싶었으니까.지금 돌이켜보면 마치 딴 세상 얘기 같기도 하다.임유진이 한창 과거를 회상하고 있을 때, 여자 몇 명이 그녀 쪽으로 걸어왔고 그 중 그 무리의 실세로 보이는 여자가 말을 걸어왔다."그쪽이 오늘 강지혁 씨 파트너로 온 사람이죠?"임유진이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세 명의 여자는 평소 잡지나 뉴스에 자주 이름을 올리는 셀럽들이었고 임유진도 그녀들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건 잡지나 뉴스를 통해서가 아닌 소민준의 여자친구였을 당시 소민준 때문에 특별히 S 시 상류 인사들 자료를 미리
"임유진 씨가 강지혁 씨와 어떤 사이인지 다들 궁금해하는 데 괜찮다면 얘기 좀 해줄래요?"육지혜의 말에 임유진은 옅게 웃었다."개인적인 일이라서 이런 곳에서 얘기하는 좀 그렇네요."그 말에 세 여자는 갑자기 얼굴색을 바꾸더니 편의점 체인 회장 딸인 황인아가 입을 열었다."말을 못 하는 건 아니고요?"임유진은 얼굴에 있는 웃음을 지워버렸다.역시 이런 상황은 피하고 싶어도 피해지지가 않는다.한편 호텔 사장 외손녀인 조유나는 임유진의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서 뭔가 생각에 잠긴 듯했다.황인아가 말을 이었다."혹시 떳떳하지 못한 수단으로 강지혁 씨 옆에 달라붙어 있는 건 아니에요?""죄송하지만 볼일이 있어서 이만 실례해야 할 것 같네요."임유진은 황인아의 질문은 가볍게 무시한 채 양해를 구하고 자리를 뜨려고 했다. 시비를 걸러 온 게 분명한 세 사람을 곧이곧대로 상대할 필요는 없다.하지만 그녀들은 순순히 임유진을 보내줄 생각이 없었고 황인아는 아예 그녀의 앞을 가로 막아섰다."내가 한 질문에 대답은 하고 가야죠. 떳떳하면 얘기하면 그만이잖아요."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여자를 보며 뭐라도 얘기하지 않는 한, 이 대화가 끝이 날 것 같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그래서 그녀는 피하지 않기로 했다."황인아 씨죠? 요즘 그쪽 집안 탈세 의혹 때문에 세무조사 받고 있지 않나요? 저도 궁금한데 황인아 씨부터 먼저 말해보는 게 어때요? 정말 탈세 한 거예요? 만약 오해라면 왜 그런 오해가 생겼죠? 그리고 지금 세무조사 내려온 국세청 직원, 황인아 씨 집안과 연관 있는 사람이죠? 어디 말해보세요. 떳떳하다면 얘기하면 그만이잖아요, 그렇죠?"마치 기자처럼 쏘아대는 임유진의 말에 황인아는 얼굴이 어두워졌다. 임유진의 말처럼 그녀의 집안은 현재 탈세 문제로 골머리를 앓고 있고 무슨 수를 써서든 이 사태를 빨리 해결하려고 하고 있다.오늘 그녀가 연회에 참가한 이유 중에는 육지혜와 조유나 두 집안에 도움을 요청하려는 목적도 있었다. 두 사람의 집안은 국세청 쪽으로 인맥
옆에 있던 육지혜와 황인아는 그 말을 듣고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러다 황인아는 이내 박장대소를 했다."난 또 얼마나 대단한 여자인가 했네. 인제 보니 그냥 살인범이잖아. 강지혁 씨는 그쪽이 진애령 씨를 죽였다는 사실, 알고 있어요?"황인아는 지금 임유진이 진애령을 죽인 살인범이라는 걸 안 후의 강지혁을 임유진이 어떤 얼굴로 대할지 미친 듯이 궁금해졌다.그녀가 볼 때 강지혁은 이 사실을 모르는 것이 분명했다. 그게 아니면 어떻게 임유진을 자신의 파트너로 데려왔겠는가!육지혜도 피식 웃으며 말했다."참, 소민준도 이 자리에 와 있어요. 아까 둘이 같이 서 있는 걸 봤거든요. 어떻게, 옛 연인들끼리 재회하게 자리 좀 만들어 줄까요?"황인아는 그 말에 바로 고개를 들어 주위를 둘러보며 멀지 않는 곳에 있는 두 사람을 발견하고는 소민준을 향해 큰소리로 외쳤다."소민준, 여기 네 전 여자친구도 와 있는데 한번 와보지 그래?"황인아의 외침에 소민준 뿐만 아니라 주위에 있는 사람들까지 그녀가 하는 말을 들어버렸고 다들 임유진 쪽을 쳐다봤다.임유진을 꼽주기 위한 행동이 분명했다.소민준은 흠칫하더니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곧 예쁜 드레스를 입은 임유진을 발견했다. 그러고는 넋이 나간 듯 그녀를 바라봤다.오늘의 그녀는 우아하고 기품있어 보였고 그는 마치 3년 전의 임유진을 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아니, 심지어 그때 당시의 그녀보다 한층 더 아름다워 보였고 반짝반짝 빛나던 시절과는 또 다른 사람을 편안하게 만드는 그녀의 모습에 눈을 뗄 수가 없었다.임유진... 대체 왜 그녀가 여기 있는 거지? 설마 강지혁이 데리고 왔나? 강지혁은 안 보이는데?여러 가지 질문들이 소민준의 머릿속에 떠올랐다.한편, 소민준 옆에 있던 진세령은 소민준의 넋이 빠진 표정을 보고는 동공이 세차게 흔들렸다. 하지만 곧장 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말했다."우리를 부르는 것 같은데, 가자."소민준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고개를 끄덕인 후 진세령과 함께 임유진 쪽으
"그래, 지혜 말이 맞아."조유나도 얼른 옆에서 거들었다."그리고 이 여자 무슨 수를 써서 강지혁 씨 옆에 있게 됐는지는 몰라도 강지혁 씨는 아마 이 여자가 감방에서 살다 나온 일을 모르고 있는 게 분명해."그 말에 진세령과 소민준은 조금 놀란 얼굴을 했고 막 소민준이 뭐라고 얘기하려고 하자 진세령은 나서지 말라는 듯 그의 옷을 잡아당겼다.임유진은 구경꾼들이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는 것을 느꼈다. 아까 황인아가 그런 소리를 하는 바람에 어떤 사람들은 놀랍다는 얼굴을 했고 또 어떤 사람은 이 상황이 재밌다는 듯 흥미진진하게 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우려했던 일이 결국에는 벌어지고야 말았다.그녀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더니 이곳에서 더는 사람들의 웃음거리가 되고 싶지는 않아 다시 한번 몸을 돌려 자리를 벗어나려고 했다.하지만 막 두 걸음 정도 걸었을 때 그녀는 뭔가에 걸린 듯싶더니 곧 뒤에서 옷이 찢어지는 소리가 들렸다.고개를 돌려보니 황인아가 그녀의 드레스를 하이힐로 밟고 있었고 그 바람에 드레스 밑단 일부가 찢어져 버렸다. 만약 임유진이 제때 멈추지 않았더라면 드레스 밑단 전체가 찢어질 수도 있었다. 그러면 더욱더 창피를 당했을 것이다.황인아는 만족스럽다는 듯 웃더니 곧 가식을 떨며 말했다."어이쿠, 이거 미안해서 어쩌죠? 드레스가 찢어져 버렸네. 수선비는 내가 내줄게요. 하지만 생각해보면 그쪽은 이제 이런 드레스 입을 기회도 없을 텐데 수선해 봤자 쓸모없겠네요?"황인아의 말에 임유진은 그저 차갑게 그녀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눈빛에 황인아는 왠지 모르게 소름이 돋았다. 또한, 지금, 이 상황도 임유진은 전혀 타격이 없는 듯 보였고 마치 광대는 자신이고 공주는 임유진인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다.퉤! 감방이나 다녀온 여자가 공주는 무슨!임유진을 보는 황인아의 눈빛에는 악의와 경멸로 가득 차 있었다.한편, 옆에 있던 육지혜와 조유나는 입을 가린 채 키득거리고 있었는데 임유진을 조롱하고 있는 것이 분명해 보였다.반면, 소민준
"그냥 드레스가 찢어졌을 뿐이야."임유진은 여기서 일을 키울 생각이 없었다."미안해, 여기까지 데려와 줬는데 내가...""뭐가 미안해."강지혁은 그녀의 말을 자르더니 이내 말을 이었다."내가 더 미안하지. 옆에 꼭 붙어있어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으니까."강지혁은 한쪽 무릎을 꿇더니 그녀가 넘어지지 않게 찢긴 드레스 밑단을 묶기 시작했다.주위 사람들은 강지혁이 무릎을 꿇는 순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어느 누가 강지혁이 여자 앞에서 무릎 꿇을 줄 알았을까!강지혁은 그녀의 드레스를 정리해 준 뒤 고개만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어디 다친 곳은 없어?"강지혁은 한쪽 무릎을 꿇고 고개를 들고 있었고 임유진은 선 채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서로 눈이 마주친 순간 임유진은 마치 자신이 강지혁의 주인이 된 것만 같이 기분이 들었다.세상에,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임유진은 얼른 정신을 차리고는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없어."하지만 그런 생각을 한 게 그녀만이 아니었으니. 지금 이 광경을 보고 있는 사람들 모두 그녀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그들이 말도 쉽게 건네지 못하는 S 시의 군주 같은 남자가 지금 한낱 여자 앞에서 무릎까지 꿇으며 그녀를 모시듯 하고 있었다.이 남자, 정말 강지혁이 맞나?!그중에서도 황인아는 주섬주섬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강지혁이 감방까지 살다 온 여자한테 이렇게까지 한다고? 말도 안 돼!그녀는 틀림없이 임유진이 감방 살았다는 사실을 강지혁에게 숨겼다고 생각하며 강지혁은 그녀의 과거를 전혀 모르고 있다고 생각했다.‘분명히 그럴 거야!’멋대로 확신한 황인아는 바로 강지혁을 향해 외쳤다."강 대표님은 지금 속고 계세요. 저 여자 감방 살다 온 여자예요. 강 대표님 약혼자였던 진애령 씨를 차로 쳐 죽인 게 바로 저 여자라고요!"그 말에 주위의 공기는 싸늘하게 얼어붙었다. 강지혁은 그녀 쪽으로 고개를 돌리더니 차가운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고 황인아는 순간 극도의 불안함을
임유진이 바로 진애령을 죽인 범인이었다니!절대 이루어 질 수 없는 두 사람이 이어졌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털썩!이한의 뒤로 뭔가 무거운 물건이 바닥에 떨어지는 소리에 고개를 돌려보니 황인아가 다리에 힘이 빠졌는지 또다시 바닥에 주저앉아 있었다.그녀를 바라보는 이한의 눈에는 약간의 동정이 서려 있었다. 조만간 그녀의 집안에는 재앙이 닥쳐올 것이고 황인아는 더 이상 이곳에 속할 수 없게 될 것이다. 강지혁은 애초에 마음이 넓은 사람이 아니었으니까.한편, 육지혜와 조유나는 두려움에 몸을 덜덜 떨었다. 특히 육지혜는 강지혁에게 대접받는 임유진을 보며 질투심이 피어오르기는 했지만, 강지혁을 향한 두려움이 더 컸다.아까 강지혁의 행동으로 볼 때 그는 임유진이 감방을 갔다 왔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는 듯 보였다. 그러니 아까 황인아가 한 행동은 말 그대로 죽음을 자초한 것이다.또한, 그녀는 머릿속에서 아까 강지혁이 무릎을 꿇은 채 임유진을 올려다보는 장면이 떠올랐다.강지혁에게 그런 대접을 받아본 여자가 또 있을까? 그는 전 약혼녀였던 진애령에게도 그런 모습을 보인 적이 없었다.아까의 장면들이 자꾸 떠오르자 육지혜는 질투 나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동시에 오늘 눈치 없이 나댄 사람이 자기가 아니라 황인아였다는 사실에 안심하기도 했다.그때, 드디어 정신을 차린 황인아가 절박한 표정으로 육지혜와 조유나를 바라봤다."지혜야, 유나야, 나 좀 도와줘. 이게 다 너희를 위해서 그런 거잖아...""말은 똑바로 해야지. 우리가 너한테 그런 짓을 부탁한 적 없어."조유나는 바로 꼬리 자르듯 그녀를 외면했고 이에 황인아는 얼굴이 붉게 달아올라서는 다급하게 말했다."네가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가 있어. 임유진이 감방 갔다 왔다는 일도 네가 말해서 알게 된 거잖아!""난 그냥 떠오른 걸 말했을 뿐이야. 사람들 앞에서 멋대로 떠벌린 건 너고."조유나의 말에 황인아는 잔뜩 화가 나서 그녀를 힘껏 째려보았다. 그러다 이번에는 육지혜에게 매달리기 시작했다
"민준아, 나 잠깐 바람 좀 쐬고 싶어.""그래, 같이 나가자."진세령의 말에 소민준은 그녀를 데리고 베란다 쪽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가는 길에 둘만 들을 수 있게 작은 목소리고 그녀를 향해 말했다."넌 알고 있었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는 걸. 그래서 아까 내가 아무 말 못 하게 막았던 거고.""저들이 자초한 일인데 내가 굳이 귀띔해줄 필요는 없지."진세령이 옅게 웃었다."이렇게 되면 우리 두 가문을 제외한 다른 가문들도 강지혁의 눈 밖에 나게 될 거야. 아마 더 심할지도 모르지."소민준은 진세령의 얼굴을 보고는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실망감과 착잡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고는 마치 뭔가를 잃어버린 듯한 느낌도 들었다.하지만 지금 그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고 이제부터 그는 눈앞에 있는 여자와 딱 붙어서 서로의 가문을 위해 움직일 수밖에 없다.한편, 멀지 않는 곳에서 모든 광경을 쳐다보는 사람이 또 한 명 있었다.강현수는 차가운 얼굴로 싸우고 있는 여자 세 명을 보더니 손에 들린 와인잔을 단번에 마셔버렸다.아까 세 명의 여자에 의해 임유진이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되어버린 걸 발견했을 때 강현수는 그녀를 위해 나서고 싶었다. 그래서 발걸음을 옮기려는데 어느샌가 강지혁이 그녀에게로 다가가고 있었다.그제야 그는 또 쓸데없는 짓을 하려고 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임유진은 강지혁이 알아서 지켜줄 것이기에 그가 신경 쓸 필요는 없었다. 또한, 임유진을 괴롭혔던 여자들도 강지혁이 어련히 알아서 처리할 것이다.강현수는 일전 강지혁에게서 임유진을 뺏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했었다.그는 시선을 아래로 내리더니 멍청하게 굴고 있는 저 자신을 발견하고 조소했다.임유라는 옆에서 그런 그를 바라보다 자기도 모르게 ‘현수 씨...’라고 불렀다. 그녀는 강현수가 점점 더 멀어져가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 애초에 가까웠던 적이 없었을지도 모른다."이만 가죠."강현수는 임유라를 향해 한마디 내뱉더니 곧바로 몸을 돌려 연회장 입구를 향해 걸어갔다."아!
그녀의 말에 강지혁은 마치 심장이 뭔가에 찔린 듯 아파 나기 시작했다."하지만 이 드레스는 너무 아깝긴 하다. 이제 한 번밖에 안 입었는데."임유진은 아쉬운 표정으로 드레스를 바라봤다. 밑단이 거의 너덜너덜해진 상태로는 수선도 힘들 것이다."다음에 새 드레스로 다시 사줄게."강지혁이 말했다."난 누나가 아무 일 없으면 그걸로 됐어."임유진은 그를 향해 웃어 보였다."난 괜찮아, 그리고 난 네가 생각하는 것처럼 약하지 않아."그녀의 웃음에 강지혁은 더욱더 마음이 안 좋았다. 확실히 겉모습은 유약해 보일지 몰라도 그녀의 마음만큼은 누구보다도 강했다.계속 옆에서 지켜봐 왔던 강지혁은 그 사실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잘 알기에 더욱더 죄책감이 들었다.그만 아니었으면 임유진은 굳이 강인함으로 자신을 무장시키지 않아도 됐었다."미안해..."강지혁의 갑작스러운 사과에 임유진은 그에게 되물었다."뭐가 미안해?""내가 좀 더 빨리 움직여서 누나한테 결백을 찾아줘야 했어."강지혁이 나지막이 속삭였다."그 사건이 네 잘못도 아닌데 왜 자꾸 사과하는 거야! 나는 네가 내 결백을 찾아주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너무 기뻐!"그녀는 진심을 담아 그에게 말했고 그를 향해 믿음 가득한 눈빛을 보냈다."정말이야?"강지혁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숙여 그녀의 입술에 키스하기 시작했다.그는 오직 키스할 때만이 자신의 모든 양심의 가책을 털어놓을 수 있었고 그녀에게 했던 일을 얼마나 후회하는지 전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앞으로 그녀에게 뭐라고 하는 사람이 없도록 만들어주겠노라며 더 거세게 키스했다.임유진은 일방적으로 그의 키스를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지금 숨도 제대로 쉬지 못했고 그의 가슴팍을 두드리며 주위 사람들이 본다고 얘기하고 싶었다.하지만 매번 그녀가 말을 하려고 할 때마다 강지혁의 입술은 또다시 그녀의 입술을 덮쳐버렸고 그녀는 그렇게 한마디도 제대로 하지 못한 채 그의 키스에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그때 강지혁이 갑자기 감고 있던 눈을 천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
“네, 자극을 차단하면 기억을 회복하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박건태가 말했다.사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그에게 약을 처방해 주려 했을 때도 오늘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다만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그럼 약 처방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지.”“네?”박건태가 조금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약 처방을 받지 않겠다고? 그렇다는 건...’“기억을 되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 오래 잊어버리고 살았으니 이제 찾을 때도 됐지.”강지혁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번 더 심한 통증이 일 테고 그 통증으로 인해 회장님 몸이...”박건태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회장님, 사람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그 한계선을 벗어나게 되면 어떤 상태가 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강지혁의 기억은 일반 기억상실 환자들과 달리 기억을 되찾을 때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만약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라도 생기면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웃는 듯 마는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한번 보고 싶네. 기억을 회복할 때의 통증이 더 강한지 내 몸이 더 단단한지 말이야.”박건태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랐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S 시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고 또 대단한 남자다. 즉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S 시 전체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이 남자는 자기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억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분명히 4년 전에는 ‘그런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약 처방해.’라고 했으면서 말이다.‘갑자기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혹시... 아까 봤던 살아 돌아온 사모님 때문인가? 하지만 정말...?
“내가 누나야. 아까도 봐. 아빠가 엄마한테 누나라고 했잖아!”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했던 누나라는 소리를 자신들의 관계에도 적용하려는 아이의 말에 진땀이 다 났다.1층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2층 서재에서는 강지혁의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박건태는 강지혁에게서 두통이 시작된 계기와 통증의 정도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말로 과거의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사실 박건태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강지혁에게서 거실에 있던 여자가 바로 그의 사망한 아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매스컴은 물론이고 S 시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S 시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여성이 될 테고 강지혁의 옆자리를 노리던 여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되겠지.“그럼 만약 앞으로도 그 여자가 예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얘기를 하게 되면 또다시 오늘처럼 기억이 자극을 받아 두통이 일 거라는 소린가?”강지혁이 물었다.“그렇다고 봐야죠. 애초에 회장님의 두통이 시작된 계기도 사모님과의 짤막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사모님께서 돌아온 지금, 더더욱 그 기억이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그럼 내 기억이 완전히 다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강지혁이 또 한 번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다만...”박건태가 말을 흐렸다.“다만 뭐지?”“다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회장님은 매번 고통스러울 겁니다. 오늘도 고작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것만으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사모님과 점점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렇게 되면 두통의 빈도도 커질 테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박건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사람마다 체질
여동생에게 안기면 이런 느낌인 건가?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양녀로 들어온 또 다른 여동생과 많이 달랐다. 소안나는 매번 그를 보면 잘 보이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멀리 떨어진 채 가까이 다가오는 걸 무서워했는데 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그의 손을 덥석 잡는 것도 모자라 엄마처럼 그를 꼭 끌어안아 주기까지 했다.강선율은 아까 임유진도 밀쳐내지 못하더니 이번에는 여동생의 포옹도 밀쳐내지 못하고 있었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이 꼭 끌어안은 채 감정을 나누는 모습에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강선율이 워낙 과묵하고 애어른 같은 면이 있는 아이라 조금 걱정이 됐는데 수다쟁이에 애교쟁이인 딸이 먼저 가까이 다가가 주니 둘 사이에 밸런스가 맞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었다.게다가 강선율의 반응을 보면 현이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잠시 후, 의사인 박건태가 저택에 도착했다.서둘러 소파로 다가온 박건태는 임유진과 강지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강지혁의 몸 상태를 살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서서히 두 눈을 뜨며 말했다.“이제 괜찮아졌어. 아까처럼 아프지 않아.”박건태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전에는 한번 아프면 적어도 몇 시간은 아팠었으니까. 그런데 집사에게서 전화를 받고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고작 20분밖에 안 됐는데 전과 달리 정말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전혀 아픈 얼굴이 아니었다.‘증상이 전보다 괜찮아진 건가...?’“그래도 검사는 한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박건태의 노파심에 강지혁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2층으로 올라가 검사를 받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올라간 뒤 집사를 향해 물었다.“혁이 저러는 거 자주 있는 일이에요?”“그게... 사모님께서 곁에 없으신 뒤로 자주 두통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셨어요. 근 2년간은 그래도 전보다 아프다고 하신 빈도가 줄었는데 오늘 갑자기 또 두통이 도졌네요. 아마 사모님을 봬서 두통이 재발한 것 같아요.”집사가 자신의 추측을 얘기했다.그리고
‘누나’라는 두 글자가 나왔을 때 임유진과 강지혁의 몸이 동시에 움찔했다.임유진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듣는 ‘누나’라는 소리에 조금 벙찐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당시의 강지혁은 그녀와 연인이 되어서도 가끔 둘만 있을 때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다.그에게는 그녀가 단지 ‘사랑하는 여자’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강지혁은 그녀를 누나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은 외롭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임유진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나머지 한 손을 들어 가볍게 그의 앞머리를 위로 젖힌 후 그의 관자놀이를 주물러주었다.“혁아, 나 여기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편히 누워있어.”강지혁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 때문에 상당히 놀란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인 놀람으로 머리가 아픈 것까지 다 잊어버렸다.왜 그녀를 누나라고 부른 거지?또한 처음 부르는 호칭일 텐데 왜 이토록 몇백 번이나 불러봤던 것처럼 익숙하고 또 자연스럽게 입에서 뱉어지는 거지?“너...”강지혁이 뭔가 물으려는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머리 아플 때 자꾸 말하려고 하면 더 아플 거야. 이따 괜찮아지면 뭐든 대답해 줄 테니까 지금은 가만히 있어.”임유진이 그의 말을 끊고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그리고 손 좀 풀어줘. 내가 마사지해줄게. 그러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서서히 눈을 감고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었다.임유진의 손목은 빨갛게 손자국이 나서야 드디어 그에게서 해방되었다.임유진은 분명히 그에게 잡힌 손목이 아플 텐데도 마치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적절히 힘을 조절해 가며 그가 아플 것 같은 곳을 세심하게 마사지해주었다.임유진의 몸은 마사지를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강지혁의 몸 가까이 기울어졌고 이에 강지혁은 마치 그녀의 숨결에 몸이 포근히 감싸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손길 때문인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