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지금 임유진이 강지혁의 철통보호를 받고 있어도 달라질 건 없다. 이후에 그녀는 더이상 강지혁의 옆에 머무를 수 없을 테니까. 어떤 일들은 임유진이 현재 갖고 있는 인식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임유진은 사실 연회에 참석하는 일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소민준과 함께 여러 번 참석했었으니까. 다만 지금의 그녀는 그때보다 많은 게 달라졌다.3년간의 감옥생활로 인해 관리도 제대로 못 받아 피부가 전보다 푸석푸석해지고 양손엔 굳은살이 가득 박혔다. 머릿결도 예전처럼 매끄럽지 못했다.그런 그녀의 걱정거리를 싹 가시게 해주듯 오후에 전문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아티스트가 강씨 저택에 방문해 임유진이 연회에 참석할 스타일링을 직접 해주었다.연보라색 이브닝드레스는 우아한 기품이 저절로 흘러넘쳤고 드레스에 박힌 크리스털과 큐빅이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았다.이런 드레스는 한 벌에 가격이 어마어마할 것이다.스타일리스트가 임유진에게 말했다.“이건 강지혁 씨가 임유진 씨를 위해 마련한 드레스에요. 유진 씨 사이즈에 딱 맞을 거라고 하셨어요.”임유진은 순간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강지혁은 그녀의 사이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한편 드레스를 갈아입은 후 그녀는 또다시 강지혁의 옷 선택과 사이즈 판별 능력에 감탄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이 드레스는 그녀 몸에 꽉 끼지도 헐렁하지도 않았고 색상도 그녀의 피부에 아주 잘 어울렸다. 마치 그녀를 위해 제작한 옷인 것처럼 말이다.아직 메이크업도 안 받았지만 드레스만으로도 낯빛이 훨씬 화사해졌다.곧이어 스타일리스트가 임유진의 머리를 다듬었다. 스타일리스트는 그녀의 매끄러운 머리를 반 묶음하고 옆머리는 예쁘게 땋아 올렸다. 뒷머리는 그대로 풀어헤치고 웨이브를 넣어서 여성스러우면서도 발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메이크업아티스트가 메이크업까지 다 마친 후 임유진은 멍하니 거울 속 제 모습을 바라봤다.메이크업아티스트는 짙은 메이크업보다 단아하고 청순한 메이크업을 선사했다. 눈매와 입술만 강조하여 이
“너무 예뻐.”임유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여자는 늘 예쁜 것을 좋아하니 이렇게 화사한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들 리가 있을까? 다만...“이 드레스 엄청 비쌀 텐데 한 번만 입기엔 너무 낭비인 것 같아.”그녀의 말은 좀 더 저렴한 드레스를 선택해도 된다는 뜻이다.하지만 강지혁이 바로 맞받아쳤다.“낭비라고 생각되면 나랑 함께 연회에 좀 더 많이 참석해. 그럼 여러 번 입을 수 있잖아.”“...”임유진은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다물었다.강지혁은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자.”그의 손 온도가 끊임없이 그녀 손으로 전해졌다. 임유진은 알겠다며 가볍게 대답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방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밖엔 이미 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나란히 차에 앉았다.가는 길에서 임유진은 저도 몰래 강지혁을 힐끔거렸다. 오늘 그는 수수한 검은색 양복을 입고 흰 셔츠에 짙은 보라색 넥타이를 하고 있었는데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이 그를 유난히 돋보이게 했다.동양인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입체적인 실루엣과 정교한 이목구비,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와 뒤로 넘긴 앞머리 덕분에 훤칠하게 드러낸 이마까지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만약 이때 셔츠 단추를 조금 풀어헤친다면 쇄골이 은은하게 비칠 텐데, 그녀의 머릿속엔 이미 강지혁의 쇄골 모양이 아른거렸다.그의 쇄골은 유난히 예뻤다. ‘예쁘다’라는 말로 한 남자의 쇄골을 비유할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인데 그의 쇄골을 본 순간 저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임유진은 또 저도 몰래 그날 밤 일이 떠올라 얼굴이 점점 더 화끈거렸다.본인은 절대 외모지상주의가 아니라고 여겼지만 강지혁을 마주할 때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몇 번이고 감탄하는 그녀였다.남자는 너무 잘생기면 여자에게 엄청난 살상력을 주는 것 같다!‘제발, 그만 생각해!’임유진이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뇔 때 귓가에 불쑥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무슨 생각해?”유혹으로 가득 찬 아찔한 목소리에 그녀의 몸
"입술 깨물지 마. 립스틱 다 지워지겠어."강지혁은 나지막이 속삭이더니 천천히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무슨 생각 했는지 내가 맞춰볼까? 누나 방금 우리 스킨십했던 거 생각했지."그러자 임유진은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고 그 모습을 본 강지혁은 바로 자신이 알아맞혔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을 떠올렸는데?"그의 목소리는 마치 여름밤 바람처럼 가볍게 그녀의 마음을 간지럽혔다."혹시 그날 밤?"뜨끔.임유진은 얼굴이 마치 불타오르는 것 같이 뜨겁게 느껴졌고 부끄러운 나머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강지혁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있는 바람에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었다.얼굴이 빨갛게 물든 그녀의 모습에서 강지혁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또한, 촉촉한 눈동자로 끊임없이 그의 눈을 피하는 걸 보며 소유욕이 들끓었다."누나 지금 부끄러워 하는 거야? 뭐가 부끄러워?"강지혁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볼을 쓸어내렸다."연인이 사랑을 확인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잖아."그의 숨결, 귓가에 감도는 잔잔한 목소리 이 모든 것이 마치 마력처럼 임유진을 끌어당기고 있었다."누나는 지금 행복해?"갑자기 날아든 그의 질문에 임유진은 흠칫했다. 눈을 마주쳐 보니 강지혁은 지금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아니, 진지하게 그녀의 대답이 듣고 싶은 것이다.임유진은 대답하기를 망설였지만, 그의 눈과 마주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응. 행복해."그녀의 대답에 강지혁은 예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나도 행복해. 누나는 앞으로도 내 생각 많이 할 거야, 그렇지?"강지혁이 나지막이 물었다.임유진은 그의 웃음에 취한 것처럼 그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앞으로도 그녀는 강지혁의 생각을 많이 할 거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 순간 그에게 푹 빠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을 테니까.게다가 임유진은 그의 웃음이 더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의 미소를 보면 그녀는 공허했던
차량은 어느새 연회장 앞에 도착했고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고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무수히 많은 눈길이 임유진에게로 쏠렸다. 강지혁은 늘 화제의 중심이고 게다가 3년이나 공석이던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 여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의 관심이 쏠리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강지혁은 전 약혼녀였던 진애령과 이러한 연회에 참석했을 때 한 번도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지만, 오늘은 다르다. 강지혁은 연회장에 입장해서부터 줄곧 임유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오늘 연회에는 S 시의 부잣집 아가씨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그녀들은 모두 마음 한구석에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손에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강지혁은 S 시에서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기로 유명하고 진애령이 죽은 다음에도 한 번도 여자와 스캔들이 난 적이 없었기에 남자친구로서도 남편으로서도 정말 최적의 인물이었다.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예전에 한 여성이 강지혁을 꼬시려고 했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는 사실이 부잣집 아가씨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퍼졌기 때문이다.그래서 다들 강지혁은 이번에도 혼자 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게 웬걸, 그의 옆에 어떤 여자가 생겨버린 것이다.그 여자의 정체가 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녀의 차림새로부터 보통 여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몇몇은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가 유명 브랜드 한정판 드레스에 VVIP 고객들에게만 구매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그래서 그들은 부럽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옆에 꼭 붙어 그가 유명 인사들과 얘기 나누는 것을 곁에서 바라봤다. 강지혁은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꽤 간단하게 그녀를 소개했다. ‘이쪽은 제 여자친구, 임유진입니다.’라고 말이다.지극히 간단한 한마디였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는 충분했다.강지혁은 지금 공개적으로 임유진이 어떤 사람인지를 여기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각인시킨 것이다.바로 그때, 연회장 입구 쪽에서 사람들의 웅
강현수 같은 사람은 진정으로 누구를 좋아해 본 적이 있을까?임유진은 머릿속에 이러한 질문이 떠오르는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강현수의 은팔찌가 생각났다.그 은팔찌 때문에 임유진은 강현수라는 사람을 알게 됐다.누가 봐도 어린아이용인 팔찌를 강현수는 정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은팔찌에 얽힌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지금 누구 보는 거야?"그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임유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깜짝 놀란 임유진이 고개를 다시 홱 돌리자 얼굴 바로 앞에 강지혁의 얼굴이 보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도 가까워 하마터면 입맞춤할뻔했다.강지혁은 예쁜 입술로 나지막이 속삭였다."누나가 누구를 보던지 누나 마음속에는 나 하나뿐이어야 해."그는 말은 임유진에게 하면서 시선은 그녀 너머로 보이는 한 남자에게 고정했다.강현수와 강지혁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이다. 그런 두 사람이 한 여자를 좋아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강지혁은 현재 임유진의 마음을 얻은 상태이고 강현수는 아직도 자신이 줄곧 찾고 있는 여자가 임유진이라는 걸 모르고 있다.물론 강지혁은 영원히 강현수가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할 예정이다.강현수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듯한 누군가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고 곧 두 사람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강현수는 임유라를 데리고 강지혁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그러다 임유진을 발견한 그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의 임유진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예쁘게 땋아 올린 머리 스타일은 우아하면서도 발랄하기까지 했고 거기에 단아한 메이크업까지 더해져 남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당겼다.또한, 촉촉한 눈동자는 화려한 조명 아래 보석처럼 빛이 났고 거기에는 의연함까지 묻어 있었다. 이에 강현수는 마치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여자아이의 두 눈을 다시 마주 보는 듯했다.어렸을 때의 그 여자아이도 꼭 이런 눈을 한 채 그에게 ‘걱정하지마. 내가 꼭 너를
임유라는 이런 느낌을 오랜만에 받아봤다. 임유진이 강지혁과 함께 있을 때도 그녀는 자신이 임유진보다 못하다는 느낌은 받은 적이 없었다. 자신은 강현수가 인정한 여자친구이니까. 하지만 지금은 자기도 모르게 임유진을 자꾸 의식하게 되고 자신이 꿀린다는 생각이 들었다.강현수는 넋을 놓고 바라보다 임유라의 부름에 곧장 정신을 차리고는 임유진에게 인사를 건넸다."또 만났네요.""네, 안녕하세요."임유진도 그를 향해 짧게 인사했다.강현수는 이번에 시선을 돌려 강지혁을 바라봤다."네가 이번 연회에 참가할 줄은 몰랐네.""여자친구 데리고 눈도장 찍으러 왔어. 앞으로 자주 봐야 할 테니까."강지혁이 담담하게 내뱉은 말에 임유라는 속으로 상당히 놀랐다.‘임유진을 자주 봐야 한다고? 설마... 강지혁이 지금 임유진과 결혼할 수도 있다는 소리야?’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임유라는 또 질투심이 피어올랐지만, 겉으로는 티 내지 않고 웃는 얼굴로 임유진에게 말을 걸었다."언니, 오랜만이야. 그러고 보니 언니한테는 사과부터 해야겠네. 무덤 옮긴 일 말이야, 엄마와 아빠는 그런 의도가 아니었는데... 전화로 얘기가 제대로 전해지지 않는 탓에 뭔가 오해가 생긴 것 같아. 아빠도 요즘 언니 보고 싶다고 하셔. 그러니까 언니, 시간 되면 아빠 보러 집으로 좀 와."임유라는 마치 이 모든 것이 정말 오해였던 것처럼 얘기했다.그에 임유진은 피식 웃더니 곧 웃음을 지우고 말했다."사과는 됐어. 어차피 그 일은 너와는 상관없는 일이잖아. 그런데 네가 왜 사과를 해."감정이 하나도 섞여 있지 않은 듯한 말투에 임유라는 말문이 막힌 채 그저 불쌍한 표정을 지었다.강현수는 임유라를 힐끗 바라봤다. 그는 두 사람이 무슨 얘기를 하는지는 몰랐지만, 썩 좋은 얘기는 아니라는 건 금방 눈치챌 수 있었다."피곤하지? 저쪽으로 가서 좀 쉴까?"강지혁이 임유진을 바라보며 물었다."그래."임유진은 예쁘게 웃으며 대답했다.그 웃음에 강현수는 갑자기 심장이 저릿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고는
심지어 강현수는 지금 당장 손을 풀지 않으면 강지혁이 자신의 손을 그대로 끊어버릴 것 같은 예감도 들었다.여자 하나 때문에 강지혁과 척을 질 필요는 없다. 어차피 임유진은 그가 찾고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이건 이미 전부터 납득한 일 아니었나?강현수는 시선을 아래로 떨구더니 임유진을 붙잡고 있던 손을 천천히 풀었다."미안해요. 내가 실례한 것 같네요. 유진 씨가 제가 아는 고인과 너무 닮아서 저도 모르게 그만."강현수가 예의를 갖춰 사과했다."내 여자친구는 네가 아는 고인이 아니니까 앞으로 다시는 이런 짓 하지 마."강지혁은 차갑게 경고하더니 임유진의 손을 잡고 자리를 떴다.강현수는 멀어져 가는 임유진의 뒷모습을 보며 씁쓸한 마음을 감출 수가 없었다.한편 임유라는 지금 손으로 비명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다.‘아니라고? 아니, 아마 임유진이 맞을 거야.’만약 강현수가 방금 말한 고인이 화실에 걸려 있는 그림 속 여자를 지칭하는 거라면 임유진과 그 어린 소녀가 동일인물이라고 임유라는 거의 확신할 수 있다.임유진이 입었던 치마와 여자아이의 얼굴 그리고 강현수가 아끼는 은팔찌까지, 이 모든 것이 다 임유진을 가리키고 있다.하지만 임유라는 이 비밀은 무덤까지 묻어줄 생각이다."현수 씨, 아까 저한테 프로듀서분들 소개해 준다고 하지 않았어요?"임유라는 태연한 표정으로 강현수에게 말을 걸었다.강현수는 임유라를 힐끗 보더니 아련한 눈빛을 거두고 곧 다시 원래의 그의 모습으로 돌아와서는 옅게 웃었다."저쪽으로 가죠."그러고는 임유라를 데리고 프로듀서들이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임유라는 강현수의 팔짱을 끼고 있는 지금도 불안한 마음을 지울 수가 없다. 강현수의 여자친구는 자신이고 그와 가장 가까이에 있는 사람도 자신인데 마치 어떻게 해도 넘어가지 못하는 선이 존재하듯 그와 가까워지지 못하고 있다.‘기필코 강현수를 내 남자로 만들어서 누구보다 잘 살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을 데리고 조용한 곳으로 갔다."피곤할 텐데 여기 앉아."그러
임유진은 강지혁이 직접 친구라고 언급하는 걸 오랜만에 듣는 것 같았다. 아마 엄청 사이가 돈독한 친구인 듯하다."안녕하세요. 저는 임유진이에요."임유진은 얼굴에 미소를 띠며 자기소개를 했다."안녕하세요. 지혁의 여자친구가 누군지 늘 궁금했는데 이제야 보게 되네요."이한도 따라 웃었다.강지혁은 전에 임유진 때문에 강문철도 내팽개친 채 한 무리의 경찰을 끌고 S 시 옆 동네로 간 적이 있었다. 그런 사건도 있었는데 어떻게 궁금해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그리고 이한은 오늘 드디어 임유진을 보게 된 것이다. 그는 임유진이 절세미인은 아니지만, 사람을 매우 편안하게 해주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강지혁도 임유진 옆에서는 평소보다 많이 풀어진 듯 보였다.이한은 그 순간, 강지혁이 왜 임유진을 좋아하게 됐는지 알 것도 같았다. 서로 속고 속이는 환경 속에서 가식은 늘 진심보다 많았고 높은 위치에 있다고는 하나 자칫 잘못하면 금방 다시 아래로 내려갈 수 있는 것이 그들이 사는 세상이다. 그러니 다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어도 마음속으로는 항상 긴장감을 늦추지 않고 있다.반면 임유진은 마치 큰 변화 없이 흐르는 강물처럼 옆에 있는 사람을 편안하게 만들어준다. 그래서 아마 더 귀하게 느껴졌을 수도 있다."참, 아까 여기 오기 전에 저쪽에서 올해 IT 업계 전망에 관해 얘기 나누고 있던데 너도 갈래?"이한이 강지혁에게 물었다.그리고 곧이어 나온 토론자들 이름에 임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한이 얘기한 사람들은 보통 사람들도 한 번쯤은 들어봤을 법한 IT 업계 거물들이다.임유진은 지금 평소라면 접촉할 기회조차 없는 사람들과 같은 연회장에 있게 된 것이다.강지혁은 조금 흥미 있는 얼굴을 하더니 곧바로 고개를 돌려 임유진에게 물었다."같이 갈래?""아니. 나는 가도 못 알아들을 것 같아. 여기서 쉬고 있을 테니까 갔다 와."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 혹시 배가 고프면...""내가 알아서 먹을게. 걱정하지 마."임유진은 그를 향해
처음부터 강지혁은 그녀가 억울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진씨 가문과 얽혀있는 각종 이해관계 때문에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그녀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그녀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지켜만 봤다.임유진은 온몸에 한기가 돌고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1층까지는 고작 5초도 안 돼 내려갈 수 있는 거리인데 임유진은 마치 눈앞에 있는 이 길이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아무리 걸어도 도통 1층에는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네가 정말 진심으로 유진이를 위하고 있다면 진세령을 경찰서에 넘겨. 그리고 진씨 가문은 물론이고 너도 상응한 대가를 치러!”강현수가 분노에 차서 외쳤다.그는 임유진이 억울하게 옥살이한 게 진세령과 강지혁 때문이라는 것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고 가슴이 찌릿하며 아파 났다.만약 그가 조금만 더 빨리 그녀를 찾았더라면, 조금만 더 빨리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더라면 절대 그런 험한 꼴은 당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강지혁은 눈으로 살기를 내뿜더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대로 강현수의 멱살을 확 잡아챘다.“네가 뭘 알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만약 내가 조금 더 일찍 유진이를 알게 됐으면, 조금 더 일찍 유진이를 사랑했으면 유진이가 그런 일을 겪게 내버려 두지 않았어!”그 말에 강현수가 냉랭하게 웃었다.“그래, 그랬겠지. 하지만 넌 그때 유진이와 아무런 접점도 없었고 유진에게 일말의 호감도 없었어. 그래서 너와 진씨 가문의 더러운 작당에 유진이가 휘말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너한테 유진이는 인간도 아니었어! 내 말이 틀려?”“나한테 이딴 말 하는 이유가 뭐야? 왜, 유진이한테 모든 걸 다 얘기해버리게? 내가 그때 수수방관하고 있었다고, 사실은 진세령이 바로 진범이었다고 얘기라도 하게? 강현수, 만약 네가 유진이한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그때는 내 손으로 직접 널 죽여버릴 거야!”강지혁의 말에는 아주 조금의 농담도 들어가 있지
임유진이 방에서 나와 계단 쪽으로 향했을 때 마침 아래층에 있는 강지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곁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도 보였다.‘강현수? 강현수가 왜 여기 있지?’임유진이 계단 아래로 내려오려고 발을 옮기려던 그때 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설마 유진이 사건에 네가 관련돼 있었을 줄은 몰랐어.”순간 임유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뭐? 강현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내 사건에 혁이가 관련되어 있다고? 그때 그 사건은 진범이 밝혀지면서 끝이 났잖아? 혁이가 나를 위해서 판결을 뒤집어 줬잖아? 그런데 왜...’“할 말은 그게 끝이야?”강지혁의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허재명이라는 사람은 그저 네가 심어 놓은 장기 말에 불과했어. 너는 유진이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진범이 누군지 알면서 줄곧 모른 척 외면했어. 왜 그랬니? 진씨 가문과 얽혀 있는 이익 때문에? 그래서 유진이 인생을 아주 손쉽게 박살 낸 거야?”강지혁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노인네가 가는 길에 폭탄을 심어두고 갔네. 할아버지가 얘기해주든?”“익명으로 나한테 메일이 한 통 왔어. 거기에는 유진이 사건의 진실과 그 사건 뒤로 너희 집안과 진씨 가문 사이에 오간 모든 이익 관계 자료들이 다 첨부되어 있었어. 당시 너희 집안과 진씨 가문은 공동으로 진가원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어. 만약 당시 진애령 사건의 진상이 밖으로 드러나면 진씨 가문은 희대의 스캔들로 큰 타격을 입었을 거고 너희 집안 역시 어마어마한 손실을 보게 됐겠지.”강현수의 말은 계속되었다.“공동으로 추진한 프로젝트인 만큼 각자 50%가 되는 지분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유진이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 후 진씨 가문은 그중 20%를 GH 그룹에 양도했어. 왜 그랬을까?”전부 다 조사하고 온 것 같은 강현수의 확신 어린 말투에 여유로웠던 강지혁의 표정도 이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흉흉한 눈빛만이 남아있었다.“그걸 나한테 얘기해주는 목적이 뭐야?”“한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