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이젠 사람들의 비난을 너무 많이 받다 보니 무덤덤해졌지만 강지혁은... 그녀는 마음이 살짝 불안했다.“왜? 누나 가기 싫어?”강지혁이 미간을 살짝 구기며 물었다.“내가 진짜 그런 자리에 갈 수 있을까?”임유진은 숨을 깊게 몰아쉬고는 머리를 번쩍 들었다.“혁아, 내가 만약 너 따라 연회에 참석하면 많은 사람들이 날 알아볼 거야. 그해 소민준을 따라다니며 적잖은 사람들을 알게 됐거든... 게다가 난 감방에도 다녀와서...”“그게 왜?”강지혁이 전혀 아무렇지 않은 듯 되물었다.“나한텐 누나가 가장 적합한 사람이야. 감방 다녀온 게 뭐? 사람들이 알아보는 게 무슨 문제라도 돼?”그는 말하면서 임유진의 손을 꼭 잡더니 손등에 살포시 키스했다.“누나, 내가 길거리에서 거지꼴을 하고 다닐 때 누나가 날 집까지 데려갔어. 그때 누나는 이게 맞는 건지 고민했었어? 아니잖아. 나도 마찬가지야. 누나가 공주였든 거지였든 상관없어. 그저 내 옆에만 있어 주면 돼. 그 누구보다 당당하게 있어 줘.”그의 입술이 임유진의 손등에 살며시 내려앉았고 서서히 그녀의 마음속에 스며들었다.강지혁은 비스듬히 눈을 뜨고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그윽하게 바라봤다.“게다가 누나는 이번 생에 영원히 내 옆에 있어야 해. 벌써 걱정하면 앞으론 어떡해? 대체 언제쯤 내 곁에 편안히 서 있을 수 있어? 설마 진짜 사건을 뒤집는 그 날까지 기다려야 하는 거야?”임유진은 숨이 확 막혔다.“누나, 난 누나가 사건을 뒤집을지 말지 관심 없어. 난 오직 누나만 신경 써. 누난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니까 당연히 내 옆에 서 있어야지.”강지혁이 말했다.임유진은 입술을 앙다물고 있다가 드디어 말을 꺼냈다.“알았어, 함께 가.”연회에서 또 어떤 일을 마주하든 그녀는 강지혁과 함께 가고 싶었다. 그녀 또한 똑같이 강지혁을 사랑하니까. 강지혁이 딴사람들의 유언비어를 신경 쓰지 않는다는데 그녀가 뭐가 두려울까?“그래, 그럼 함께 가는 거야.”강지혁은 손가락으로 부드럽게 그녀의 턱을 치키고
“네 그 잘난 전 여친 때문이지.”진세령이 대답했다.“임유진?”소민준은 화들짝 놀랐다. 애초에 소씨 일가는 임유진과의 관계 때문에 하마터면 큰코다칠 뻔했고 다행히 그 위기는 모면했지만 여동생이 임유진 때문에 다리를 절뚝거리고 있다. 의사 말로는 앞으로 몇 차례 수술을 거치지 않고서는 완치되기 어렵다고 한다.게다가 수술도 리스크가 있어 자칫하면 평생 장애인으로 지낼지도 모른다.이 때문에 소민영은 요즘 성격이 엄청 많이 변했다. 예전에는 무서울 것 하나 없고 거만하고 활발한 성격이었는데 이젠 종일 방에만 처박혀 있고 예전 친구들과 모임을 갖지도 않는다. 소민준은 그런 동생이 실로 걱정될 따름이다.“걔 말고 더 있어? 임유진은 지금 강지혁의 철통보호를 받고 있어 아무도 감히 못 건드려.”진세령이 시큰둥한 말투로 말을 내뱉었다.전에는 영원히 발밑에 짓누를 여자라고 생각했고, 심지어 다신 만날 일이 없을 거라고 여겼었다. 두 사람의 사교권이 너무 달랐으니까.그런데 뜻밖에도 상대는 이런 방식으로 다시 그녀 앞에 나타났고 감히 손도 못 대게 벼랑 끝으로 몰아붙였다.소민준은 뭔가 알아챈 듯 말했다.“너희 집에서 임유진 건드렸구나?”진세령은 빨간 입술을 깨물더니 뜬금없이 자책하며 대답했다.“내가 먼저 엄마, 아빠한테 그년 얘기를 꺼냈고 나중에 엄마, 아빠가 임유진과 마주치더니 또 우리 언니 일이 떠오르셨나 봐. 어떻게 걔를 보고도 그냥 지나칠 수 있겠어?”“장인어른, 장모님께 이제 그 일은 내려놓으시라고 해. 유진이는 감방에 3년이나 갇혀 있었고 미래를 다 망가진 사람이야. 계속 그 일로 전전긍긍해봤자 장인어른, 장모님만 더 괴로우셔.”소민준이 그녀를 타일렀다.진세령은 불쑥 그를 째려보며 말했다.“왜? 인제 와서 임유진이 안쓰러운 거야? 애초에 감방 들어갔을 땐 왜 속상해하지 않았어? 그때 임유진은 열 손톱이 다 뽑히고 손가락 뼈마디가 통째로 부러졌잖아!”소민준은 안색이 확 돌변했다.그때 일은 3년이란 시간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의 눈앞에 선명
하지만 무엇보다 견고할 것 같던 그의 다짐은 너무 빨리 와르르 무너져내렸다. 이건 아무도 예상치 못한 일이다.한차례 사고가 닥친 후 그는 당황스럽고 겁이 나 부모님이 당장 임유진과 관계를 정리하라고 했을 때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부모님의 뜻을 따랐다.그 순간 소민준은 알아챘다. 자신이 높이 샀던 사랑은 결국 제 미래를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임유진 때문에 자신의 미래까지 희생하고 싶지 않았다.임유진을 사랑한 전제조건은 위풍당당한 소씨 일가 도련님이 되는 것이다. 일단 이 전제가 사라지면 사랑도 부질없어진다.이 몇 해 동안 그는 가끔 미안한 마음도 들었지만 매번 그럴 때마다 모든 게 임유진의 잘못이라고 자신에게 되뇌었다.그녀가 음주운전으로 진애령을 들이받지만 않았어도 두 사람은 이 지경까지 다다를 일이 없으니 이 모든 건 임유진이 자초한 일이라고 몰아붙였다.마치 이렇게 생각하면 본인 속이 편해질 것처럼 말이다.임유진과는 그때 이미 끝난 사이였고 각자 제 갈 길을 갈 거라고 여겼는데 지금 그의 삶에 또 슬슬 그녀의 그림자가 드리워진다.전에 민영의 다리도 그렇고 현재 진세령네 집안 백화점도 그렇고, 모든 게 임유진과 관련됐고 그녀 뒤에 강지혁이 뒷받침해주고 있다.“민준아?!”진세령의 목소리에 그는 사색에서 빠져나왔다.정신을 가다듬고 눈앞의 아름다운 여인을 보고 있자니 임유진과는 확연히 다른 절세의 미모였다. 진세령은 인기 여배우이자 재벌 출신이라 수많은 남자들에게 여신으로 불리고 있다. 앞으로 진씨 일가의 모든 걸 그녀가 물려받게 될 것이다. 이런 여자야말로 그의 아내가 되기에 가장 적합했다.“내가 사랑하는 사람은 당연히 너지!”소민준이 대답했다.“그해 교통사고가 일어나지 않았더라도 난 유진이랑 끝까지 못 갔어. 우리 두 사람은 아예 안 어울렸거든.”“그럼... 우리 결혼할까?”진세령이 뜬금없이 물었다. 둘은 약혼한 이후로 서로 부부처럼 대하고 있고 그들과 같은 상류층에서도 약혼은 결혼이나 다름없는 일이다. 차이점이라면 혼인신고서
그해도 그렇고 지금도 마찬가지였다.지금 임유진이 강지혁의 철통보호를 받고 있어도 달라질 건 없다. 이후에 그녀는 더이상 강지혁의 옆에 머무를 수 없을 테니까. 어떤 일들은 임유진이 현재 갖고 있는 인식을 무너뜨리기에 충분했다....임유진은 사실 연회에 참석하는 일이 그리 낯설지 않았다. 소민준과 함께 여러 번 참석했었으니까. 다만 지금의 그녀는 그때보다 많은 게 달라졌다.3년간의 감옥생활로 인해 관리도 제대로 못 받아 피부가 전보다 푸석푸석해지고 양손엔 굳은살이 가득 박혔다. 머릿결도 예전처럼 매끄럽지 못했다.그런 그녀의 걱정거리를 싹 가시게 해주듯 오후에 전문 스타일리스트와 메이크업아티스트가 강씨 저택에 방문해 임유진이 연회에 참석할 스타일링을 직접 해주었다.연보라색 이브닝드레스는 우아한 기품이 저절로 흘러넘쳤고 드레스에 박힌 크리스털과 큐빅이 유난히 시선을 사로잡았다.이런 드레스는 한 벌에 가격이 어마어마할 것이다.스타일리스트가 임유진에게 말했다.“이건 강지혁 씨가 임유진 씨를 위해 마련한 드레스에요. 유진 씨 사이즈에 딱 맞을 거라고 하셨어요.”임유진은 순간 얼굴이 빨갛게 물들었다.강지혁은 그녀의 사이즈를 너무 잘 알고 있었다.한편 드레스를 갈아입은 후 그녀는 또다시 강지혁의 옷 선택과 사이즈 판별 능력에 감탄이 저절로 새어 나왔다. 이 드레스는 그녀 몸에 꽉 끼지도 헐렁하지도 않았고 색상도 그녀의 피부에 아주 잘 어울렸다. 마치 그녀를 위해 제작한 옷인 것처럼 말이다.아직 메이크업도 안 받았지만 드레스만으로도 낯빛이 훨씬 화사해졌다.곧이어 스타일리스트가 임유진의 머리를 다듬었다. 스타일리스트는 그녀의 매끄러운 머리를 반 묶음하고 옆머리는 예쁘게 땋아 올렸다. 뒷머리는 그대로 풀어헤치고 웨이브를 넣어서 여성스러우면서도 발랄한 분위기를 연출했다.메이크업아티스트가 메이크업까지 다 마친 후 임유진은 멍하니 거울 속 제 모습을 바라봤다.메이크업아티스트는 짙은 메이크업보다 단아하고 청순한 메이크업을 선사했다. 눈매와 입술만 강조하여 이
“너무 예뻐.”임유진이 나지막이 말했다. 여자는 늘 예쁜 것을 좋아하니 이렇게 화사한 드레스가 마음에 안 들 리가 있을까? 다만...“이 드레스 엄청 비쌀 텐데 한 번만 입기엔 너무 낭비인 것 같아.”그녀의 말은 좀 더 저렴한 드레스를 선택해도 된다는 뜻이다.하지만 강지혁이 바로 맞받아쳤다.“낭비라고 생각되면 나랑 함께 연회에 좀 더 많이 참석해. 그럼 여러 번 입을 수 있잖아.”“...”임유진은 말문이 막혀 입을 꾹 다물었다.강지혁은 다정하게 그녀의 손을 잡았다.“가자.”그의 손 온도가 끊임없이 그녀 손으로 전해졌다. 임유진은 알겠다며 가볍게 대답하곤 자리에서 일어나 그와 함께 방에서 나와 아래층으로 내려갔다.밖엔 이미 차가 대기하고 있었고 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잡은 채 나란히 차에 앉았다.가는 길에서 임유진은 저도 몰래 강지혁을 힐끔거렸다. 오늘 그는 수수한 검은색 양복을 입고 흰 셔츠에 짙은 보라색 넥타이를 하고 있었는데 깔끔하고 세련된 모습이 그를 유난히 돋보이게 했다.동양인에게서 흔히 볼 수 없는 입체적인 실루엣과 정교한 이목구비, 찰랑거리는 검은 머리와 뒤로 넘긴 앞머리 덕분에 훤칠하게 드러낸 이마까지 그야말로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만약 이때 셔츠 단추를 조금 풀어헤친다면 쇄골이 은은하게 비칠 텐데, 그녀의 머릿속엔 이미 강지혁의 쇄골 모양이 아른거렸다.그의 쇄골은 유난히 예뻤다. ‘예쁘다’라는 말로 한 남자의 쇄골을 비유할 거라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인데 그의 쇄골을 본 순간 저절로 감탄이 새어 나왔다.임유진은 또 저도 몰래 그날 밤 일이 떠올라 얼굴이 점점 더 화끈거렸다.본인은 절대 외모지상주의가 아니라고 여겼지만 강지혁을 마주할 때마다 그의 잘생긴 얼굴에 몇 번이고 감탄하는 그녀였다.남자는 너무 잘생기면 여자에게 엄청난 살상력을 주는 것 같다!‘제발, 그만 생각해!’임유진이 속으로 몇 번이고 되뇔 때 귓가에 불쑥 청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누나, 무슨 생각해?”유혹으로 가득 찬 아찔한 목소리에 그녀의 몸
"입술 깨물지 마. 립스틱 다 지워지겠어."강지혁은 나지막이 속삭이더니 천천히 그녀에게로 몸을 기울였다."무슨 생각 했는지 내가 맞춰볼까? 누나 방금 우리 스킨십했던 거 생각했지."그러자 임유진은 놀란 듯 눈을 커다랗게 떴고 그 모습을 본 강지혁은 바로 자신이 알아맞혔다는 것을 눈치챘다."그래서 구체적으로 어떤 장면을 떠올렸는데?"그의 목소리는 마치 여름밤 바람처럼 가볍게 그녀의 마음을 간지럽혔다."혹시 그날 밤?"뜨끔.임유진은 얼굴이 마치 불타오르는 것 같이 뜨겁게 느껴졌고 부끄러운 나머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은 기분이었다. 그러나 하필이면 강지혁의 손이 그녀의 턱을 잡고 있는 바람에 고개를 돌릴 수조차 없었다.얼굴이 빨갛게 물든 그녀의 모습에서 강지혁은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사랑스러움을 느꼈다. 또한, 촉촉한 눈동자로 끊임없이 그의 눈을 피하는 걸 보며 소유욕이 들끓었다."누나 지금 부끄러워 하는 거야? 뭐가 부끄러워?"강지혁의 손가락이 천천히 그녀의 볼을 쓸어내렸다."연인이 사랑을 확인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잖아."그의 숨결, 귓가에 감도는 잔잔한 목소리 이 모든 것이 마치 마력처럼 임유진을 끌어당기고 있었다."누나는 지금 행복해?"갑자기 날아든 그의 질문에 임유진은 흠칫했다. 눈을 마주쳐 보니 강지혁은 지금 진지하게 묻고 있었다. 아니, 진지하게 그녀의 대답이 듣고 싶은 것이다.임유진은 대답하기를 망설였지만, 그의 눈과 마주한 순간 자기도 모르게 입을 열고 말았다."응. 행복해."그녀의 대답에 강지혁은 예쁘게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나도 행복해. 누나는 앞으로도 내 생각 많이 할 거야, 그렇지?"강지혁이 나지막이 물었다.임유진은 그의 웃음에 취한 것처럼 그저 멍하니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앞으로도 그녀는 강지혁의 생각을 많이 할 거다. 그게 아니었으면 이 순간 그에게 푹 빠진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 않았을 테니까.게다가 임유진은 그의 웃음이 더 보고 싶다는 생각도 했다. 그의 미소를 보면 그녀는 공허했던
차량은 어느새 연회장 앞에 도착했고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잡고 연회장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두 사람이 모습을 드러내자 무수히 많은 눈길이 임유진에게로 쏠렸다. 강지혁은 늘 화제의 중심이고 게다가 3년이나 공석이던 그의 옆자리를 차지한 여자가 나타났으니 그들의 관심이 쏠리는 건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강지혁은 전 약혼녀였던 진애령과 이러한 연회에 참석했을 때 한 번도 그녀의 손을 잡지 않았지만, 오늘은 다르다. 강지혁은 연회장에 입장해서부터 줄곧 임유진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오늘 연회에는 S 시의 부잣집 아가씨들이 대거 참석했는데 그녀들은 모두 마음 한구석에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손에 넣고 싶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강지혁은 S 시에서 여색을 가까이하지 않기로 유명하고 진애령이 죽은 다음에도 한 번도 여자와 스캔들이 난 적이 없었기에 남자친구로서도 남편으로서도 정말 최적의 인물이었다.하지만 그 누구도 선뜻 용기를 내지 못했다. 예전에 한 여성이 강지혁을 꼬시려고 했다가 비참한 말로를 맞이했다는 사실이 부잣집 아가씨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퍼졌기 때문이다.그래서 다들 강지혁은 이번에도 혼자 왔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이게 웬걸, 그의 옆에 어떤 여자가 생겨버린 것이다.그 여자의 정체가 뭔지는 아무도 몰랐지만, 그녀의 차림새로부터 보통 여자는 아닐 거라고 생각했다. 심지어 몇몇은 그녀가 입고 있는 드레스가 유명 브랜드 한정판 드레스에 VVIP 고객들에게만 구매할 자격이 주어지는 것이라는 걸 알아보는 사람도 있었다.그래서 그들은 부럽기도 하고 질투가 나기도 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옆에 꼭 붙어 그가 유명 인사들과 얘기 나누는 것을 곁에서 바라봤다. 강지혁은 다가오는 사람들에게 꽤 간단하게 그녀를 소개했다. ‘이쪽은 제 여자친구, 임유진입니다.’라고 말이다.지극히 간단한 한마디였지만 사람들을 놀라게 하기는 충분했다.강지혁은 지금 공개적으로 임유진이 어떤 사람인지를 여기 참석한 모든 사람에게 각인시킨 것이다.바로 그때, 연회장 입구 쪽에서 사람들의 웅
강현수 같은 사람은 진정으로 누구를 좋아해 본 적이 있을까?임유진은 머릿속에 이러한 질문이 떠오르는 동시에 자기도 모르게 강현수의 은팔찌가 생각났다.그 은팔찌 때문에 임유진은 강현수라는 사람을 알게 됐다.누가 봐도 어린아이용인 팔찌를 강현수는 정말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었다.은팔찌에 얽힌 사연이라도 있는 걸까?"지금 누구 보는 거야?"그때 낮게 깔린 목소리가 임유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깜짝 놀란 임유진이 고개를 다시 홱 돌리자 얼굴 바로 앞에 강지혁의 얼굴이 보였다. 두 사람 사이의 거리가 너무나도 가까워 하마터면 입맞춤할뻔했다.강지혁은 예쁜 입술로 나지막이 속삭였다."누나가 누구를 보던지 누나 마음속에는 나 하나뿐이어야 해."그는 말은 임유진에게 하면서 시선은 그녀 너머로 보이는 한 남자에게 고정했다.강현수와 강지혁은 어릴 때부터 알고 지냈던 사이이다. 그런 두 사람이 한 여자를 좋아하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하지만 다른 점이 있다면 강지혁은 현재 임유진의 마음을 얻은 상태이고 강현수는 아직도 자신이 줄곧 찾고 있는 여자가 임유진이라는 걸 모르고 있다.물론 강지혁은 영원히 강현수가 이 사실을 알아채지 못하게 할 예정이다.강현수는 자신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듯한 누군가의 시선에 고개를 돌렸고 곧 두 사람은 허공에서 눈이 마주쳤다.그렇게 한참을 바라보다 강현수는 임유라를 데리고 강지혁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그러다 임유진을 발견한 그는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은 듯한 느낌을 받았다. 오늘의 임유진은 평소와는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예쁘게 땋아 올린 머리 스타일은 우아하면서도 발랄하기까지 했고 거기에 단아한 메이크업까지 더해져 남자들의 시선을 단번에 끌어당겼다.또한, 촉촉한 눈동자는 화려한 조명 아래 보석처럼 빛이 났고 거기에는 의연함까지 묻어 있었다. 이에 강현수는 마치 자신이 그토록 찾아 헤매던 그 여자아이의 두 눈을 다시 마주 보는 듯했다.어렸을 때의 그 여자아이도 꼭 이런 눈을 한 채 그에게 ‘걱정하지마. 내가 꼭 너를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