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지영은 백연신의 존재를 숨길 수만 있다면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아니면 헤어질 때 여러모로 피곤해지니까. 그리고 어쩌다 백연신의 존재를 부모님에게 들켜버려서 그렇지 그녀는 원래 부모님한테도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그게... 하하, 일하는데 방해될까 봐서요."한지영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친구한테는 괜찮고요?"그 말에 한지영은 그대로 얼어붙었고 옆에 있던 임유진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난 괜찮아."그러고는 한지영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앞으로도 무슨 일 있으면 꼭 나한테 연락해. 넌 나한테 제일 소중한 친구니까."한지영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알겠다고 대답한 후 곧바로 룸미러로 임유진의 옆에 앉은 강지혁를 힐끔 바라봤다. 아까 그의 말투는 마치 질투하는 사람 같았고 한지영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질투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강지혁이 질투한다고? 임유진과 친하다는 것 하나 때문에? 한지영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S 시를 원하는 대로 휘두를 수 있는 강지혁이 임유진 때문에, 그것도 여자인 자신을 질투하는 걸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차량은 금세 한지영 집 입구에 도착했고 그때 또 하나의 차량도 입구에 들어섰다. 한지영은 해당 차량을 자세히 보다가 백연신의 차인 걸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같은 시각, 백연신도 강지혁의 차를 발견하고는 바로 차에서 내려 그쪽으로 갔다.한지영은 그의 얼굴을 확인한 후 얼른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연신 씨가 왜 여기 있어요?""핸드폰은 왜 꺼놨어?"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은 얼른 핸드폰을 꺼냈고 켜지지 않는 핸드폰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음... 배터리가 없네요."백연신은 차 안을 힐긋 보고는 한지영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이 왜 너를 데려다줘?""그게 말하자면 좀 긴데..."한지영은 입이 바싹 마르는 느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바로 그때 강지혁이 차창을 내리더니 백연신을 향해 말했다."백연신 씨가 정말
임유진은 잠깐 멍해 있더니 곧 입을 열었다."그걸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어."한 사람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데 이걸 어떻게 비교한단 말인가!"하지만..."임유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얘기했다."너랑 지영이는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두 사람 다 소중해!"임유진이 목숨까지 바쳐서 지키고 싶다는데 이제 그도 만족하지 않을까?‘왜 꼭 두 사람이지?’하지만 강지혁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유일한 사람이고 싶었고 그녀의 마음속에 자신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길 바랐다."그때 누나 도와준 것 때문에?"강지혁이 물었다."아마 그게 계기가 됐을 거야. 난 지영이가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거든."원래부터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사이가 더더욱 견고해졌다.어떤 일은 정말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봐야 상대방이 얼마나 자신을 위하는지를 알 수 있고 또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지도 알 수 있다."지영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어. 그러니까 나한테 지영이는 정말 소중한 존재야."임유진은 강지혁을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너 설마 지영이한테 질투한 건 아니지?""맞다면?"강지혁이 되물었다.임유진은 잠깐 놀란 얼굴을 하고는 강지혁이 마치 어린 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일전 아무리 성숙하고 듬직해 보이는 남자라도 애 같은 면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강지혁을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그건 네가 조금 참아야 할 부분이겠는데?"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입술 근처에 가져와서는 손바닥에 가볍게 키스했다."그래야겠지."강지혁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만약 애초에 그런 사고가 없었더라면 한지영은 그저 좋은 친구 사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고 그녀의 말대로 만약 그때 한지영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임유진도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남자 동료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그 뒤에 오해를 빚어 몸싸움을 벌여서 경찰서에 잡혀갔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것까지 단번에 조리 정연하게 다 토해냈다.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에 목이 살짝 말랐다.백연신은 들으면서 줄곧 미간을 찌푸렸고 잘생긴 얼굴에 한기가 감돌아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한지영이 다 말한 후 백연신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나한테 전화하지 않았어?”“그게... 연신 씨 바쁘잖아요. 이런 작은 일로 방해하면 안 되죠.”한지영이 아양을 떨어댔다.백연신이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따가운 시선에 가슴이 움찔거렸다.“진짜 날 방해하기 싫어서 그런 거야?”한참 후 그가 되물었다.한지영은 찔린 마음을 안고 꿋꿋이 대답했다.“그럼요, 당연하죠.”백연신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두 사람은 또 그렇게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봤고 한지영은 속으로 구시렁댔다.‘아니 대체 이 동네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물끄러미 쳐다봐야 하는 건데?’봉변을 당하기 전에 그에게 전화해 귀찮게 군 건 응당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왜 백연신의 표정은 마치 그녀가 몇십억이라도 빚진 것만 같지?“가자 이만.”문득 백연신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네?”흠칫 놀란 한지영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어디 가는데요?”“너희 집. 언제까지 여기 서 있을 수만은 없잖아.”그가 대답했다.한지영은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만약 그녀의 집으로 간다면...“그럼 오늘 일은 우리 부모님께 얘기하지 말아요.”안 그랬다가 그녀가 잘못했든 안 했든 부모님은 또 쉴 새 없이 그녀의 귀에 대고 잔소리를 퍼부을 테니까.백연신은 갑자기 차갑게 웃더니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지영아, 왜 나까지 너희 부모님께 숨겨야 하는 건데?”“내 남자친구잖아요!”한지영은 대뜸 대답하곤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다. 두 사람은 ‘남자친구’의 의미를 다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내가 남자친구인 거 알고는 있네?”백연신이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근데
그 순간 그녀는 의외로 반박할 여력이 없었다....결국 그녀는 백연신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들어서니 부모님께서 백연신을 반갑게 맞아주며 저녁도 함께 하자고 했다.백연신도 당연히 흔쾌히 동의했지만 한지영은 심장이 철렁거렸다. 백연신이 너무 오래 머물러 있다가 부모님이랑 얘기 나누면서 말이 샐 수 있으니까.식사를 마친 후 그녀는 재빨리 백연신을 데리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저기, 언제쯤 돌아갈 생각이에요?”“내가 빨리 가줬으면 좋겠어?”백연신이 눈썹을 치키며 되물었다.그녀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엄마, 아빠가 너무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대하셔서 연신 씨 귀찮아질까 봐 그래요. 알잖아요, 우리 부모님은 연신 씨가 진짜 내 남자친구인 줄 알고 갖은 질문 공세를 퍼부을 거라고요.”“귀찮을 거 없어. 되레 두 분과 얘기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재밌는데.”백연신은 그녀의 부모님과 얘기를 나누면 그녀에 관한 많은 일을 엿들을 수 있다.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백연신이 모르는 것들을 그녀 부모님을 통해 무심결에 알 수 있다.“그리고 앞으론 무슨 일 생기든 꼭 나한테 전화해. 임유진 씨 찾아가지 말고.”백연신이 말했다.“유진이는 내 친구예요. 나한테 일이 생기면 유진이를 찾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그녀가 반박했다.백연신은 가볍게 웃었는데 그녀를 향한 야유가 가득 차 있었다.“한 번만 더 임유진 씨를 찾으면 강지혁 씨가 아예 사람 써서 널 해결해버릴걸.”한지영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그건 너무 오버에요.”“그래?”백연신이 눈썹을 들썩거렸다.“강지혁 씨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야. 저번에 함께 해성시로 갈 때 유진 씨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너도 봤지? 네가 유진 씨랑 더 가까워질수록 강지혁 씨는 널 더 질투하게 될 거야.”한지영은 차 안에서 받았던 기분을 되새겨보았는데 그때 강지혁은 확실히 질투하고 있었던 듯싶었다. 설마 진짜...“근데 난 여자잖아요!”한지영이 구시렁댔다.“여자면 뭐?”백연신이 말했다.“
“그건... 아무리 남자친구 있다고 회사에서 보는 사람마다 알릴 순 없잖아요.”만약 진짜 그랬다면 동료들은 그녀가 미친 게 아닐까 의심할지도 모른다.“그래? 알겠어.”백연신이 대답했다.한지영은 두 눈을 깜빡이며 대체 뭘 알겠다는 건지 머리가 어리둥절해졌다....다음날 출근 후 한지영이 있는 디자인숍은 어제 일로 소문이 파다했고 동료들이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도 조금 달라졌다.심지어 일부 동료들은 한지영 앞에서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지영 씨도 참, 주새벽 씨랑 신민재 씨는 연인 사이인데 거기에 끼어들어요?!”“내 말이, 아무리 내연녀가 되고 싶어도 우리 숍에선 그러지 말았어야죠!”한지영은 쓴웃음을 짓고는 상대에게 강하게 밀어붙였다.“내연녀는 개뿔! 증거 있어요? 상황 파악이 안 되었으면 본인들이 직접 가서 알아보시던가요. 내가 눈이 멀지 않은 한 신민재 같은 남자를 좋아할 리가 있겠냐고요!”“말로만 센 척 하시지. 신민재 씨가 뭐 어때서요? 적어도 명문대 졸업생이고 곧 있으면 숍 본부에서 데려갈 거라고요. 그때 되면 아마 승승장구하겠죠.”동료가 말했다.그들이 지금 있는 디자인숍은 그룹 산하의 디자인숍이고 숍 본부는 여러모로 지금 디자인숍보다 대우가 좋다. 하여 다들 앞으로 본부에 들어갈 수 있기만 기대하고 있다.이때 주새벽과 신민재가 걸어왔다. 한지영을 본 주새벽은 문득 야유 조로 말했다.“한지영 씨, 짐 정리하시고 지금이라도 얼른 가서 새 직장 알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 어머, 그런데 이걸 어쩌나. 올해 취업 형세가 안 좋아서, 내가 그냥 다른 디자인숍에 연락해 지영 씨를 채용하라고 말해줄까요?”한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주새벽의 아버지가 디자인 학원 교수라 대부분 디자인숍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한편 주새벽의 말을 들으니 이건 분명 디자인 업계에서 한지영을 몰살해버리겠다는 뜻이었다.그야말로 파렴치하기 짝이 없었다!한지영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상대의 협박에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이 업계를 벗어난다고 굶어 죽을 리가 있을
한지영이 막 더 몰아붙이려 할 때 주새벽 너머로 회사 입구를 바라보자 디자인숍 소장이 한창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는데... 소장 옆에 있는 사람은... 백연신?!그녀는 두 눈을 깜빡이며 재차 확인했지만 영락없는 백연신이었다.백연신도 그녀를 발견했지만 딱히 인사 없이 가볍게 웃고는 소장과 얘기를 나눴다.한편 소장은 매우 공손한 태도로 백연신을 대했다. 두 사람은 함께 걸어오며 담소를 나눴는데 소장은 비서에게 얼른 사무실로 차를 준비해오라고 시켰다.하긴 지금 이 디자인숍은 S 시에서 유명한 숍도 아니니까. 본부는 그나마 인지도라도 있는데 한지영이 있는 디자인숍은 종종 사람들에게 본부의 발판이라고 불린다.백연신은 현재 백선그룹 오너이니 소장이 깍듯한 태도로 모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백선그룹과 관계를 잘 맺는다면 디자인숍에도 큰 횡재일 테니까.하지만 문제는... 백연신이 여긴 대체 어쩐 일이냐고?!그들 같은 작은 디자인숍이 백연신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을 텐데.잠시 후 백연신은 소장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고 옆에 있던 주새벽은 야유 어린 눈길로 한지영을 째려봤다.“뭘 봐요? 저분 누군지는 알아요? 백선그룹 대표님이에요. 지영 씨 같은 사람은 아마 저런 분 앞에 설 기회조차 없을 거예요.”한지영은 살짝 의아한 눈길로 주새벽을 쳐다봤다. 그녀가 백연신을 알고 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주새벽은 속으로 백연신에게 잘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장은 그녀의 아빠와 사이가 좋다 보니 직장에서 그녀를 적잖게 챙겨줬다.방금 외출하기 전에도 마침 주새벽과 마주쳤고 이따가 백선그룹 대표님이 갑자기 숍에 찾아올 거라고 미리 알려주었다. 상대가 왜 갑자기 찾아온 건지 의도는 모르겠으나 일단 그녀에게 백선그룹 대표 앞에서 잘 보일 기회를 마련해주겠다고 했다.어렵게 구한 기회라 주새벽은 재빨리 인터넷으로 백선그룹 대표님이 어떤 분이신지 검색해보았는데 실물이 인터넷 프로필 사진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백연신이 소장 사무실로 들어갈 때 주새벽은 넋 나간 표
한지영은 백연신을 힐긋 쳐다봤다.“스읍...”깔끔한 옷차림에 훤칠한 이목구비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 이러니 그해 그가 술에 취했을 때도 한지영은 참지 못하고 바로 그를 덮쳐버린 것이다.백연신은 몸매가 환상적이었다. 비록 조금 말라 보여도 근육으로 다부진 체구였다. 그녀는 백연신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예전에 봤던 그 몸매가 떠올랐다...순간 그녀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냉큼 고개를 숙이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자고 저 자신을 단속했다.백연신은 그녀를 힐긋 쳐다봤는데 모퉁이에 앉아서 머리를 푹 숙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를 바라보던 백연신은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이때 소장이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바로 시작할까요?”“네, 그러시죠.”백연신은 웃으며 대답했다.소장이 회의를 진행했고 우선 백연신을 소개한 후 숍에서 디자인했던 일부 프로젝트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이때 빠짐없이 주새벽을 언급했다.“이쪽은 우리 숍의 젊은 디자이너입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아버지가 업계에서 명망이 높은 디자이너이고 본인도 해외 수상 경력이 아주 많습니다. 디자인이 워낙 독창적이라 대표님도 나중에 시간 되시면 한 번 봐주시길 부탁드려요.”주새벽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최상의 컨디션으로 말을 꺼냈다.“안녕하세요, 대표님. 저는 주새벽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그쪽 알고 있어요.”백연신이 느긋하게 대답했다.주새벽은 당혹감과 희열에 휩싸였다. 상대가 이미 알고 있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대표님이 전에 그녀 작품을 보고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신 걸까?주새벽은 순간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한편 구석에 있던 한지영이 고개 들어 백연신을 쳐다봤는데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엄습해왔다...이어진 백연신의 한마디에 한지영은 온몸이 굳어졌고 예측이 현실로 변한 것만 같았다.“내 여자친구가 그쪽을 한번 언급하더라고
숍에 있는 대부분 사람들이 이대로 믿고 있었다. 어쨌거나 신민재의 조건이 좋고 한지영은 숍에서 아주 작은 인물이니까. 집안 조건도 평범하고 외모도 평범하니 신민재 같은 남자에게 호감을 느끼는 건 너무나 지당한 일이라고 여겼다.어제 사건이 터진 후 수많은 동료가 주새벽 편을 들었다.주새벽과 신민재가 아무리 비밀연애를 한다고 해도 한지영이 신민재에게 꼬리치는 건 잘못된 일이라고 주장했는데 정작 그녀의 남자친구가 백선그룹 대표 백연신이었다니!백연신과 신민재는 아예 비교할 가치가 없다. 신민재가 너무 보잘것없으니까! 백연신은 어느 면에서나 완승이다!한지영이 백연신 같은 남자친구를 제쳐두고 신민재에게 꼬리 친다고? 이건 당최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문득 주새벽과 신민재의 편을 들었던 동료들이 두 사람을 이상한 눈길로 쳐다보았다. 이 사건의 진상은 주새벽의 말과 아예 딴판인 듯싶었다.그 시각 주새벽은 머리가 백지장이 되었다. 이 모든 게 너무 어이없어 한참 후에야 겨우 말을 내뱉었다.“그러니까... 한지영 씨가 대표님 여자친구란 말씀인가요?”그녀는 뭇사람들을 대신해 질문을 건넨 거나 다름없었고 답안은 모두가 이해한 바였다.“맞아요.”백연신이 웃으며 자리에서 일어나 뭇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성큼성큼 한지영에게 다가왔다. 그는 걸음을 멈추고 한지영에게 말했다.“지영아, 그냥 네가 말해줄래? 어제 네가 동료랑 싸우게 된 그 장본인 신민재 씨가 대체 누군지 말이야. 얼마나 훌륭한 사람이길래, 진짜 나보다 나은 건지 궁금해서 그래. 다들 네가 꼬리친 거라고 오해하고 있잖아.”백연신은 지금 그녀의 억울함을 대신 풀어주려 하고 있었다.한지영은 그를 물끄러미 쳐다보며 생각했다.‘어떻게 이런 식으로 동료들 앞에서 내 남자친구란 신분을 밝힐 수 있지?’“여긴 어쩐 일이에요?”“네 프로젝트에 투자하려고 왔지. 요즘 네 프로젝트 비용에 차질이 생겼다고 했잖아.”백연신은 한없이 다정한 애인처럼 그녀에게 말했다.순간 회의실의 많은 여자들이 부러움에 가득 찬 눈길로
“그래, 그렇게 해.”임유진은 흔쾌히 알겠다고 했다.“나는 네 손을 놓을 생각이 없으니까 뭐가 됐든 상관없어. 두 손이 부러지는 한이 있더라도 나는 네 손을 놓지 않을 거야. 그런데 혁아, 언젠가는 나만 네 손을 놓지 않는 게 아니라 너도 내 손을 꽉 잡고 놓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지금처럼...”그녀의 시선이 서로를 꽉 잡고 있는 두 사람의 손 쪽으로 내려갔다.“한사람이 잡는 것보다 역시 둘이 함께 잡는 게 훨씬 더 단단하잖아. 안 그래?”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강지혁은 순간적으로 저도 모르게 그녀의 손을 더 꽉 잡고 싶다는 미친 생각이 들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끈질긴 말에 결국 그녀가 가져온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 다만 그녀가 두 손을 턱에 받친 채 생글생글 웃으며 지켜보는 바람에 그는 식사하는 내내 조금 불편한 기분이 들었다.여자의 시선 같은 건 이미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져 있는데 이상하게도 이 여자가 바라보면 심장이 평소보다 더 빠르게 쿵쿵거리며 피가 얼굴에 몰리는 느낌이었다.고작 여자의 시선 하나에 이런 식의 반응이 온다는 건 정말 이상한 일이 아닐 수가 없었다.그날 저녁, 임유진은 씻은 후 전처럼 강지혁과 이어져 있는 침실에서 잠을 청하기로 했다.침실로 들어온 후 그녀가 조금 의외라고 느꼈던 건 방이 그녀가 5년 전에 썼던 그대로라는 것이었다. 심지어 그녀의 옷가지들까지 똑같이 그대로 옷장 안에 걸려 있었다.지속해서 도우미들이 방을 깨끗이 청소해준 게 틀림없었다.임유진은 오늘 하루 너무나도 많은 일이 있어 조금 피곤했던 건지 딸까지 마저 씻긴 후 금방 잠자리에 들었다.깊은 밤.누군가가 침대 바로 옆으로 다가와 창문으로 쏟아진 달빛을 빌어 새근새근 자고 있는 여자와 아이를 바라보았다.두 사람은 정말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리고 이 두 사람은 바로 그의 아내와 딸이다.어제까지만 해도 죽은 아내가 다시 살아올 거라는 생각은 하지도 못했는데 바로 오늘, 이미 사망한 것으로 밝혀진 아내가 그와
입맞춤이 끝났을 때 임유진은 조금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은 별다른 표정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의 두 눈동자에는 모순의 감정이 가득 엉켜있었다.그리고 임유진은 그 눈동자를 보며 또다시 그와 입술을 맞추고 싶다는 충동이 일었다.“네가 얼마나 예쁜지 알아? 네가 얼마나 내 혼을 쏙 빼놓는지 알아? 나는 오히려 너한테 묻고 싶어. 왜 내가 널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 왜 내가 몸과 마음을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너한테 빠져있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해? 이런 예쁜 얼굴을 하고서 그러한 자신감도 없어?”임유진은 말을 하면서 손가락으로 그의 입술을 부드럽게 매만졌다.“너...!”강지혁은 이에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녀의 행동은 마치 그를 유혹하고 있는듯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뭐라고 얘기하려다가 문득 손에 잡힌 그녀의 손가락이 조금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는 그제야 그녀의 손가락이 다른 사람과 달리 삐뚤빼뚤 변형되어 있다는 것을 눈치챘다.“너 손가락이 왜...”그의 눈동자에 순간 고통의 감정이 스쳐 갔다.“아무것도 아니야. 감옥에 있을 때 조금 다쳤는데 그때 이렇게 됐어.”임유진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가볍게 말해주었다.강지혁은 그 말에 침묵했고 임유진은 이에 고개를 숙인 채 강지혁의 손을 세게 맞잡았다. 그러고는 다시 고개를 들고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말로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내가 널 떠난 건 분명히 그럴 만한 사정이 있었을 거야. 그리고 뭐가 됐든 결국에는 다시 널 찾아왔잖아. 이렇게 다시 네 곁으로 왔잖아. 앞으로는 절대 네 곁을 떠나지 않을게. 이렇게 네 손을 꽉 잡고 절대 놓지 않을게. 약속해.”그녀의 목소리는 다정하고 또 그만큼 무척이나 단호했다. 그리고 그녀의 두 눈동자는 한 치의 거짓말도 담겨있지 않은 것처럼 매우 깨끗하고 맑았다.강지혁은 그런 그녀를 빤히 바라보았다.절대 내 곁을 떠나지 않고 또 손도 놓지 않을 거라고?그녀의 눈빛과 그녀의 목
임유진이 강지혁을 떠난 건 그를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닌 오히려 그를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서, 그를 대신해 죽어줄 수 있을 정도로 사랑해서, 그렇게도 지키고 싶었던 세 아이의 목숨을 잃을 각오까지 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해서였다.그녀는 세 사이의 엄마면서 이기적이게도 아이들의 목숨으로 그의 목숨을 바꾸려고 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말에 그녀의 눈을 빤히 바라보았다.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어머니를 너무 많이 사랑하고 또 철석같이 믿은 바람에 비참한 최후를 맞이한 아버지의 모습을 바로 눈앞에서 봤었기에 그는 여자를 믿지 않는다.원래 믿음이라는 건 배신당할 리스크를 어느 정도 쥐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애초에 믿지 않으면 배신당하는 기분 같은 걸 느낄 일이 없다.“그럼 5년 전에 네가 날 떠난 이유가 뭔지 네 입으로 한번 말해봐.”강지혁이 말했다.“그건...”임유진은 잠깐 멈칫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그건 나도 아직 기억을 못 하고 있어.”그녀의 기억은 강지혁이 과거에 했던 행동을 용서해주기로 한 거기가 끝이고 그 뒤는 고이준에게서 오늘 막 들었으니 거짓말을 한 것도 아니었다.하지만 그녀의 자신 없는 말에 강지혁의 빈정거림은 더더욱 짙어졌다.“그래? 그럼 기억을 다 되찾고 나서 나한테 이런 말을 하던가 해. 아무것도 기억 못 하면서 날 사랑한다는 말을 습관처럼 내뱉지 말고.”임유진은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지혁은 분명히 그녀를 사랑했다.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진 것을 알고 하마터면 정신을 완전히 놓을 정도로 그녀를 사랑했다.아무리 모든 걸 다 잊었다고 해도 그녀를 사랑했던 마음의 아주 조그마한 조각 정도는 남아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정말 이제는 그녀를 향한 마음 같은 건 하나도 기억나지 않는 건가?임유진은 그의 눈빛에 선명히 어려있는 빈정거림도 싫었고 불신으로 가득 차 있는 그의 태도도 싫었다.그래서 그녀는 욱하는 마음에 몸을 강지혁 쪽으로 확 기댔다.이에 강지혁은 어찌할 새도 없이 임유진의 아래에 꼼짝없이 갇혀버렸
“혁아, 내가 널 얼마나 사랑하는지 알아?”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낮은 목소리로 이 말을 중얼거렸다. 그녀는 지금 이 순간 그에게 이대로 입을 맞추고 싶은 충동까지 일었다.기다란 속눈썹이 움찔 떨리더니 이내 강지혁의 눈이 천천히 떠졌다. 그리고 다 떠진 눈동자에 임유진의 얼굴이 그대로 비쳤다.임유진은 순간 그의 눈에 사로잡힌 포로라도 되는 양 무슨 말을 할 수가 없었고 마치 홀린 것처럼 그저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그럼 말해봐. 네가 날 얼마나 사랑하는지.”그때 조금 잠긴 듯한 목소리가 울려 퍼지고 임유진은 그제야 번쩍 정신을 차렸다.“나는...”강지혁을 얼마나 사랑하냐고?그녀는 그를 위해 3년간 억울하게 옥살이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고만 있던 그의 행동을 다 알고도 과거의 원망을 다 내려놓겠다고 할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이 세상에서 자신을 이렇게도 사랑해주는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과 이렇게도 마음을 다해 사랑할 만한 남자가 또 없을 거라는 확신이 들었으니까.게다가 고이준의 말에 따르면 그녀는 강지혁이 죽는 게 싫어 자신이 절벽에서 떨어지는 선택을 했다고도 했다. 물론 기억을 잃은 강지혁은 이 사실을 전부 다 잊어버렸지만 말이다.“왜 말을 못 하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하긴 정말 날 사랑했으면 애초에 내 곁을 떠나지 않았겠지. 안 그래?”‘떠났다라... 혁이한테는 내가 내 두 발로 떠난 것으로 되어있으니까...’임유진은 꼭 심장이 뭔가에 의해 눌린 것처럼 숨이 잘 쉬어지지 않았다.“만약 네가 정말 나를 사랑했으면 그때 내가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관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아무리 내가 잘못했다고 해도 내 곁에 있었어야지. 안 그래?”강지혁의 목소리에 점점 빈정거림이 섞여들기 시작했다.“즉 너는 날 진심으로 사랑한 게 아닌 거야. 그러니까 날 대단히 많이 사랑한다느니 하는 말은 두 번 다시 내 앞에서 하지 마.”임유진은 그의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사모님, 회장님은 사모님과의 기억이 떠오를 때면 늘 저
그때 현이가 옆에서 큰소리로 외쳤다.“나도 좋은 동생이 될 거야. 그리고 오빠는 내가 지켜줄 거야!”부풀린 볼이 꺼진 걸 보니 이제는 자신이 동생이 된 걸 인정한 모양이다.강선율은 현이의 말에 저도 모르게 몸이 움찔 떨렸다.‘동생이면서 나를 지켜주겠다고...?’아이는 오늘 온통 처음 겪는 것들투성이였다. 누군가를 지켜주겠다고 약속한 것도 처음이었고 누군가가 자신을 지켜주겠다는 약속을 들은 것도 처음이었다.이게 바로 여동생이 생기면 느끼게 되는 진짜 기분인 건가? 소안나는 진짜 동생이 아니라 그간 이런 느낌이 들지 않았던 건가?“사모님, 식사 준비가 다 되었습니다.”집사의 말에 임유진은 2층을 쳐다보았다.“혁이는요?”박건태는 1시간 전에 이미 저택을 떠났고 가기 전 임유진에게 강지혁은 그저 기억이 자극된 바람에 두통이 온 거라고 얘기해주었다.“방금 도우미가 물어보고 왔는데 입맛이 없으시다고 사모님과 아이들 먼저 식사하라고 하셨답니다.”‘혹시 두통 때문인가?’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며 아이 둘을 데리고 식탁으로 향했다.하지만 저녁 식사를 다 마쳤는데도 여전히 강지혁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식사를 들고 직접 2층으로 올라가기로 했다. 그런데 계단을 막 오르려는 찰나 작은 손이 그녀의 옷을 살짝 잡아당겼다.이에 임유진이 고개를 돌리자 강선율이 자신을 빤히 바라보고 있는 것이 보였다.“또다시 나랑 아빠 곁을 떠날 거예요?”아이가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아니, 안 떠나. 율이랑 아빠 곁을 떠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을 거야.”임유진은 부드럽게 웃으며 아이를 안심시켜 주었다.“율아, 엄마라고 불러줄래?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주면 엄청 기쁠 것 같아.”강선율은 그 말에 잠깐 흠칫하더니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게 부끄러운 듯 점점 볼을 붉히기 시작했다. 그러다 한참이나 지나서야 입을 열었다.“엄마...”아직 마음의 문을 다 연 것은 아닌 듯했지만 임유진은 율이가 엄마라고 불러준 것만으로도 가슴이 벅찼다.아들과는 5년이라는
“네, 자극을 차단하면 기억을 회복하는 데 지장이 생기게 됩니다.”박건태가 말했다.사실 그는 당시 처음으로 그에게 약을 처방해 주려 했을 때도 오늘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다만 그에 대한 대답이 오늘은 조금 달랐다.“그럼 약 처방은 받지 않는 것으로 하지.”“네?”박건태가 조금 벙찐 얼굴로 되물었다.‘약 처방을 받지 않겠다고? 그렇다는 건...’“기억을 되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 오래 잊어버리고 살았으니 이제 찾을 때도 됐지.”강지혁이 가벼운 말투로 대답했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매번 더 심한 통증이 일 테고 그 통증으로 인해 회장님 몸이...”박건태는 침을 한번 삼키고는 다시 말을 이었다.“회장님, 사람의 몸이 받아들일 수 있는 고통의 한계는 정해져 있습니다. 만약 그 한계선을 벗어나게 되면 어떤 상태가 될지 그 누구도 모릅니다.”강지혁의 기억은 일반 기억상실 환자들과 달리 기억을 되찾을 때 극심한 고통이 따른다. 그래서 만약 기억을 회복하는 과정에서 의도치 않은 사고라도 생기면 그때는 상상도 못 할 참담한 결과를 맞이하게 될 수도 있다.“그게 뭐 어쨌다는 거지?”강지혁이 입꼬리를 살짝 위로 올리며 웃는 듯 마는듯한 눈빛을 보냈다.“어디 한번 보고 싶네. 기억을 회복할 때의 통증이 더 강한지 내 몸이 더 단단한지 말이야.”박건태는 그 말에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를 몰랐다.눈앞에 있는 남자는 S 시 전체를 손아귀에 쥐고 있다고 과언이 아닐 정도로 중요하고 또 대단한 남자다. 즉 이 남자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S 시 전체가 하루아침에 모습을 달리할 수도 있다는 뜻이다.그런데 자기가 서 있는 위치를 누구보다 본인이 제일 잘 알고 있을 텐데 이 남자는 자기 목숨 따위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기억을 회복하려고 하고 있다.분명히 4년 전에는 ‘그런 기억은 떠올리지 않아도 상관없으니까 약 처방해.’라고 했으면서 말이다.‘갑자기 왜 이런 심경의 변화가 생긴 거지? 혹시... 아까 봤던 살아 돌아온 사모님 때문인가? 하지만 정말...?
“내가 누나야. 아까도 봐. 아빠가 엄마한테 누나라고 했잖아!”현이가 눈을 동그랗게 뜬 채 말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했던 누나라는 소리를 자신들의 관계에도 적용하려는 아이의 말에 진땀이 다 났다.1층에서 누가 더 큰지에 대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을 때, 2층 서재에서는 강지혁의 검사가 진행되고 있었다.박건태는 강지혁에게서 두통이 시작된 계기와 통증의 정도를 확인한 후 천천히 입을 열었다.“아무래도 사모님의 말로 과거의 기억들이 자극을 받아 멋대로 머릿속에 떠오르게 된 것 같습니다.”사실 박건태는 말을 하면서도 여전히 머릿속의 혼란을 지울 수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조금 전에 강지혁에게서 거실에 있던 여자가 바로 그의 사망한 아내라는 사실을 듣게 되었으니까.만약 강지혁의 아내가 죽지 않고 살아있었다는 게 알려지면 매스컴은 물론이고 S 시 전체가 들썩일지도 모른다.그리고 그렇게 되면 임유진은 S 시에 제일 꼭대기에 있는 여성이 될 테고 강지혁의 옆자리를 노리던 여자들은 닭 쫓던 개처럼 허망한 표정을 짓게 되겠지.“그럼 만약 앞으로도 그 여자가 예전을 떠올리게 할 만한 얘기를 하게 되면 또다시 오늘처럼 기억이 자극을 받아 두통이 일 거라는 소린가?”강지혁이 물었다.“그렇다고 봐야죠. 애초에 회장님의 두통이 시작된 계기도 사모님과의 짤막한 기억이 갑자기 떠올랐기 때문이셨잖습니까. 그러니 사모님께서 돌아온 지금, 더더욱 그 기억이 자극을 받게 될 겁니다.”“그럼 내 기억이 완전히 다 회복될 수도 있다는 말인가?”강지혁이 또 한 번 물었다.“그럴 가능성이 매우 큽니다. 다만...”박건태가 말을 흐렸다.“다만 뭐지?”“다만 이런 식으로 기억이 회복되면 회장님은 매번 고통스러울 겁니다. 오늘도 고작 한 장면이 눈앞에 떠오른 것만으로 머리가 찢어질 듯 아프셨다고 하셨잖습니까. 앞으로는 사모님과 점점 더 자주 얼굴을 마주할 텐데 그렇게 되면 두통의 빈도도 커질 테고 통증도 점점 더 심해질 겁니다.”박건태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말했다.사람마다 체질
여동생에게 안기면 이런 느낌인 건가?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양녀로 들어온 또 다른 여동생과 많이 달랐다. 소안나는 매번 그를 보면 잘 보이려는 눈빛을 보내면서도 멀리 떨어진 채 가까이 다가오는 걸 무서워했는데 눈앞에 있는 여동생은 그의 손을 덥석 잡는 것도 모자라 엄마처럼 그를 꼭 끌어안아 주기까지 했다.강선율은 아까 임유진도 밀쳐내지 못하더니 이번에는 여동생의 포옹도 밀쳐내지 못하고 있었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이 꼭 끌어안은 채 감정을 나누는 모습에 괜히 뿌듯한 마음이 들었다.강선율이 워낙 과묵하고 애어른 같은 면이 있는 아이라 조금 걱정이 됐는데 수다쟁이에 애교쟁이인 딸이 먼저 가까이 다가가 주니 둘 사이에 밸런스가 맞는 것 같아 참으로 다행이었다.게다가 강선율의 반응을 보면 현이를 싫어하지는 않는 것 같았다.잠시 후, 의사인 박건태가 저택에 도착했다.서둘러 소파로 다가온 박건태는 임유진과 강지혁이 함께 있는 모습을 보고 잠깐 멈칫하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강지혁의 몸 상태를 살폈다.그런데 그때 강지혁이 서서히 두 눈을 뜨며 말했다.“이제 괜찮아졌어. 아까처럼 아프지 않아.”박건태는 그 말에 깜짝 놀랐다. 그도 그럴 게 전에는 한번 아프면 적어도 몇 시간은 아팠었으니까. 그런데 집사에게서 전화를 받고 저택에 도착하기까지 고작 20분밖에 안 됐는데 전과 달리 정말 표정이 편안해 보였다. 전혀 아픈 얼굴이 아니었다.‘증상이 전보다 괜찮아진 건가...?’“그래도 검사는 한번 해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회장님.”박건태의 노파심에 강지혁은 잠깐 생각하더니 이내 2층으로 올라가 검사를 받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올라간 뒤 집사를 향해 물었다.“혁이 저러는 거 자주 있는 일이에요?”“그게... 사모님께서 곁에 없으신 뒤로 자주 두통 때문에 고통을 호소하셨어요. 근 2년간은 그래도 전보다 아프다고 하신 빈도가 줄었는데 오늘 갑자기 또 두통이 도졌네요. 아마 사모님을 봬서 두통이 재발한 것 같아요.”집사가 자신의 추측을 얘기했다.그리고
‘누나’라는 두 글자가 나왔을 때 임유진과 강지혁의 몸이 동시에 움찔했다.임유진은 너무나도 오랜만에 듣는 ‘누나’라는 소리에 조금 벙찐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당시의 강지혁은 그녀와 연인이 되어서도 가끔 둘만 있을 때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다.그에게는 그녀가 단지 ‘사랑하는 여자’뿐만이 아니라 하나의 가족이기도 했으니까. 어쩌면 강지혁은 그녀를 누나라고 부름으로써 자신은 외롭지 않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각인해주고 싶었는지도 모른다.임유진은 그에게 잡히지 않은 나머지 한 손을 들어 가볍게 그의 앞머리를 위로 젖힌 후 그의 관자놀이를 주물러주었다.“혁아, 나 여기 있으니까 아무 생각도 하지 말고 편히 누워있어.”강지혁은 저도 모르게 내뱉은 말 때문에 상당히 놀란 듯한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 순간적인 놀람으로 머리가 아픈 것까지 다 잊어버렸다.왜 그녀를 누나라고 부른 거지?또한 처음 부르는 호칭일 텐데 왜 이토록 몇백 번이나 불러봤던 것처럼 익숙하고 또 자연스럽게 입에서 뱉어지는 거지?“너...”강지혁이 뭔가 물으려는 듯 힘겹게 입을 열었다.“지금은 아무 말도 하지 마. 머리 아플 때 자꾸 말하려고 하면 더 아플 거야. 이따 괜찮아지면 뭐든 대답해 줄 테니까 지금은 가만히 있어.”임유진이 그의 말을 끊고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그리고 손 좀 풀어줘. 내가 마사지해줄게. 그러면 조금은 괜찮아질 거야.”강지혁은 까만 눈동자로 그녀를 빤히 바라보다 서서히 눈을 감고 그녀의 손목을 풀어주었다.임유진의 손목은 빨갛게 손자국이 나서야 드디어 그에게서 해방되었다.임유진은 분명히 그에게 잡힌 손목이 아플 텐데도 마치 전혀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아무런 표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그녀는 적절히 힘을 조절해 가며 그가 아플 것 같은 곳을 세심하게 마사지해주었다.임유진의 몸은 마사지를 해주면서 자연스럽게 강지혁의 몸 가까이 기울어졌고 이에 강지혁은 마치 그녀의 숨결에 몸이 포근히 감싸지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그녀의 손길 때문인지 아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