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말에 신민재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그, 그래. 맞아. 한지영 씨가 먼저 나 꼬셨어!"한지영은 신민재의 얼굴을 한 대 세게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임유진은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알았는지 얼른 한지영의 손을 잡으며 자신이 나섰다."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지금 다시 경찰서로 들어가서 그쪽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수도 있어요."그러자 신민재가 흠칫하더니 바로 입을 닫았다.강지혁은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옆에서 소리치는 주새벽을 힐끔 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그쪽 앞가림이나 잘하시죠. 그리고 내 여자친구를 당신 같은 인간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지 모르겠네."그 말에 주새벽은 쪽팔림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말까지 버벅대며 해명했다."나, 나는 그냥 좋은 마음으로... 그쪽이 저 여자한테 혹시라도 당할까 봐..."강지혁은 주새벽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한지영에게 말을 걸었다."이딴 것들 때문에 경찰서까지 왔어요? 백연신 씨는 모르는 거죠? 알면 이 여자가 지금 이렇게 계속 입을 놀리지는 못하겠죠.""..."한지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내리 깔았다."가자."강지혁은 고개를 숙여 임유진에게 말하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때 검은색 벤틀리가 그들 앞에 멈춰 섰고 세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주새벽과 신민재는 버려진 병풍처럼 그들이 떠나는 모습만 지켜봤고 주새벽은 아까까지만 해도 분노에 가득 차 있던 얼굴이 차량을 확인하자마자 놀라움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저 차는 절대 아무나 탈 수 있는 게 아닌데... 차도 그렇고 그 남자친구라는 사람도 그렇고 한지영 친구라는 저 여자 대체 정체가 뭐야?!’주새벽은 아까 강지혁이 그녀를 노려보는 눈빛을 떠올리고는 자기고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차 안, 임유진은 한지영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한지영은 한숨을 내쉬더니 하나하나 얘기하기 시작했다."아까 저 두 사람 우리 회사
"..."한지영은 백연신의 존재를 숨길 수만 있다면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아니면 헤어질 때 여러모로 피곤해지니까. 그리고 어쩌다 백연신의 존재를 부모님에게 들켜버려서 그렇지 그녀는 원래 부모님한테도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그게... 하하, 일하는데 방해될까 봐서요."한지영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친구한테는 괜찮고요?"그 말에 한지영은 그대로 얼어붙었고 옆에 있던 임유진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난 괜찮아."그러고는 한지영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앞으로도 무슨 일 있으면 꼭 나한테 연락해. 넌 나한테 제일 소중한 친구니까."한지영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알겠다고 대답한 후 곧바로 룸미러로 임유진의 옆에 앉은 강지혁를 힐끔 바라봤다. 아까 그의 말투는 마치 질투하는 사람 같았고 한지영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질투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강지혁이 질투한다고? 임유진과 친하다는 것 하나 때문에? 한지영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S 시를 원하는 대로 휘두를 수 있는 강지혁이 임유진 때문에, 그것도 여자인 자신을 질투하는 걸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차량은 금세 한지영 집 입구에 도착했고 그때 또 하나의 차량도 입구에 들어섰다. 한지영은 해당 차량을 자세히 보다가 백연신의 차인 걸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같은 시각, 백연신도 강지혁의 차를 발견하고는 바로 차에서 내려 그쪽으로 갔다.한지영은 그의 얼굴을 확인한 후 얼른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연신 씨가 왜 여기 있어요?""핸드폰은 왜 꺼놨어?"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은 얼른 핸드폰을 꺼냈고 켜지지 않는 핸드폰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음... 배터리가 없네요."백연신은 차 안을 힐긋 보고는 한지영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이 왜 너를 데려다줘?""그게 말하자면 좀 긴데..."한지영은 입이 바싹 마르는 느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바로 그때 강지혁이 차창을 내리더니 백연신을 향해 말했다."백연신 씨가 정말
임유진은 잠깐 멍해 있더니 곧 입을 열었다."그걸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어."한 사람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데 이걸 어떻게 비교한단 말인가!"하지만..."임유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얘기했다."너랑 지영이는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두 사람 다 소중해!"임유진이 목숨까지 바쳐서 지키고 싶다는데 이제 그도 만족하지 않을까?‘왜 꼭 두 사람이지?’하지만 강지혁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유일한 사람이고 싶었고 그녀의 마음속에 자신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길 바랐다."그때 누나 도와준 것 때문에?"강지혁이 물었다."아마 그게 계기가 됐을 거야. 난 지영이가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거든."원래부터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사이가 더더욱 견고해졌다.어떤 일은 정말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봐야 상대방이 얼마나 자신을 위하는지를 알 수 있고 또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지도 알 수 있다."지영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어. 그러니까 나한테 지영이는 정말 소중한 존재야."임유진은 강지혁을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너 설마 지영이한테 질투한 건 아니지?""맞다면?"강지혁이 되물었다.임유진은 잠깐 놀란 얼굴을 하고는 강지혁이 마치 어린 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일전 아무리 성숙하고 듬직해 보이는 남자라도 애 같은 면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강지혁을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그건 네가 조금 참아야 할 부분이겠는데?"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입술 근처에 가져와서는 손바닥에 가볍게 키스했다."그래야겠지."강지혁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만약 애초에 그런 사고가 없었더라면 한지영은 그저 좋은 친구 사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고 그녀의 말대로 만약 그때 한지영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임유진도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남자 동료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그 뒤에 오해를 빚어 몸싸움을 벌여서 경찰서에 잡혀갔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것까지 단번에 조리 정연하게 다 토해냈다.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에 목이 살짝 말랐다.백연신은 들으면서 줄곧 미간을 찌푸렸고 잘생긴 얼굴에 한기가 감돌아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한지영이 다 말한 후 백연신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나한테 전화하지 않았어?”“그게... 연신 씨 바쁘잖아요. 이런 작은 일로 방해하면 안 되죠.”한지영이 아양을 떨어댔다.백연신이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따가운 시선에 가슴이 움찔거렸다.“진짜 날 방해하기 싫어서 그런 거야?”한참 후 그가 되물었다.한지영은 찔린 마음을 안고 꿋꿋이 대답했다.“그럼요, 당연하죠.”백연신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두 사람은 또 그렇게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봤고 한지영은 속으로 구시렁댔다.‘아니 대체 이 동네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물끄러미 쳐다봐야 하는 건데?’봉변을 당하기 전에 그에게 전화해 귀찮게 군 건 응당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왜 백연신의 표정은 마치 그녀가 몇십억이라도 빚진 것만 같지?“가자 이만.”문득 백연신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네?”흠칫 놀란 한지영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어디 가는데요?”“너희 집. 언제까지 여기 서 있을 수만은 없잖아.”그가 대답했다.한지영은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만약 그녀의 집으로 간다면...“그럼 오늘 일은 우리 부모님께 얘기하지 말아요.”안 그랬다가 그녀가 잘못했든 안 했든 부모님은 또 쉴 새 없이 그녀의 귀에 대고 잔소리를 퍼부을 테니까.백연신은 갑자기 차갑게 웃더니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지영아, 왜 나까지 너희 부모님께 숨겨야 하는 건데?”“내 남자친구잖아요!”한지영은 대뜸 대답하곤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다. 두 사람은 ‘남자친구’의 의미를 다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내가 남자친구인 거 알고는 있네?”백연신이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근데
그 순간 그녀는 의외로 반박할 여력이 없었다....결국 그녀는 백연신에게 이끌려 집으로 돌아갔다.집에 들어서니 부모님께서 백연신을 반갑게 맞아주며 저녁도 함께 하자고 했다.백연신도 당연히 흔쾌히 동의했지만 한지영은 심장이 철렁거렸다. 백연신이 너무 오래 머물러 있다가 부모님이랑 얘기 나누면서 말이 샐 수 있으니까.식사를 마친 후 그녀는 재빨리 백연신을 데리고 제 방으로 들어갔다.“저기, 언제쯤 돌아갈 생각이에요?”“내가 빨리 가줬으면 좋겠어?”백연신이 눈썹을 치키며 되물었다.그녀는 겸연쩍게 웃으며 대답했다.“엄마, 아빠가 너무 ‘지나치게 열정적’으로 대하셔서 연신 씨 귀찮아질까 봐 그래요. 알잖아요, 우리 부모님은 연신 씨가 진짜 내 남자친구인 줄 알고 갖은 질문 공세를 퍼부을 거라고요.”“귀찮을 거 없어. 되레 두 분과 얘기 나눌 수 있어서 너무 재밌는데.”백연신은 그녀의 부모님과 얘기를 나누면 그녀에 관한 많은 일을 엿들을 수 있다.그녀의 어린 시절부터 시작해서 백연신이 모르는 것들을 그녀 부모님을 통해 무심결에 알 수 있다.“그리고 앞으론 무슨 일 생기든 꼭 나한테 전화해. 임유진 씨 찾아가지 말고.”백연신이 말했다.“유진이는 내 친구예요. 나한테 일이 생기면 유진이를 찾는 게 당연한 거 아닌가요?”그녀가 반박했다.백연신은 가볍게 웃었는데 그녀를 향한 야유가 가득 차 있었다.“한 번만 더 임유진 씨를 찾으면 강지혁 씨가 아예 사람 써서 널 해결해버릴걸.”한지영은 몸이 파르르 떨렸다.“그건 너무 오버에요.”“그래?”백연신이 눈썹을 들썩거렸다.“강지혁 씨는 너그러운 사람이 아니야. 저번에 함께 해성시로 갈 때 유진 씨를 얼마나 신경 쓰는지 너도 봤지? 네가 유진 씨랑 더 가까워질수록 강지혁 씨는 널 더 질투하게 될 거야.”한지영은 차 안에서 받았던 기분을 되새겨보았는데 그때 강지혁은 확실히 질투하고 있었던 듯싶었다. 설마 진짜...“근데 난 여자잖아요!”한지영이 구시렁댔다.“여자면 뭐?”백연신이 말했다.“
“그건... 아무리 남자친구 있다고 회사에서 보는 사람마다 알릴 순 없잖아요.”만약 진짜 그랬다면 동료들은 그녀가 미친 게 아닐까 의심할지도 모른다.“그래? 알겠어.”백연신이 대답했다.한지영은 두 눈을 깜빡이며 대체 뭘 알겠다는 건지 머리가 어리둥절해졌다....다음날 출근 후 한지영이 있는 디자인숍은 어제 일로 소문이 파다했고 동료들이 그녀를 쳐다보는 눈빛도 조금 달라졌다.심지어 일부 동료들은 한지영 앞에서 야유 조로 쏘아붙였다.“지영 씨도 참, 주새벽 씨랑 신민재 씨는 연인 사이인데 거기에 끼어들어요?!”“내 말이, 아무리 내연녀가 되고 싶어도 우리 숍에선 그러지 말았어야죠!”한지영은 쓴웃음을 짓고는 상대에게 강하게 밀어붙였다.“내연녀는 개뿔! 증거 있어요? 상황 파악이 안 되었으면 본인들이 직접 가서 알아보시던가요. 내가 눈이 멀지 않은 한 신민재 같은 남자를 좋아할 리가 있겠냐고요!”“말로만 센 척 하시지. 신민재 씨가 뭐 어때서요? 적어도 명문대 졸업생이고 곧 있으면 숍 본부에서 데려갈 거라고요. 그때 되면 아마 승승장구하겠죠.”동료가 말했다.그들이 지금 있는 디자인숍은 그룹 산하의 디자인숍이고 숍 본부는 여러모로 지금 디자인숍보다 대우가 좋다. 하여 다들 앞으로 본부에 들어갈 수 있기만 기대하고 있다.이때 주새벽과 신민재가 걸어왔다. 한지영을 본 주새벽은 문득 야유 조로 말했다.“한지영 씨, 짐 정리하시고 지금이라도 얼른 가서 새 직장 알아보는 게 좋을 겁니다. 어머, 그런데 이걸 어쩌나. 올해 취업 형세가 안 좋아서, 내가 그냥 다른 디자인숍에 연락해 지영 씨를 채용하라고 말해줄까요?”한지영은 미간을 찌푸렸다. 주새벽의 아버지가 디자인 학원 교수라 대부분 디자인숍과 알고 지내는 사이였다.한편 주새벽의 말을 들으니 이건 분명 디자인 업계에서 한지영을 몰살해버리겠다는 뜻이었다.그야말로 파렴치하기 짝이 없었다!한지영은 두 눈을 희번덕거리며 상대의 협박에 전혀 주눅 들지 않았다. 이 업계를 벗어난다고 굶어 죽을 리가 있을
한지영이 막 더 몰아붙이려 할 때 주새벽 너머로 회사 입구를 바라보자 디자인숍 소장이 한창 이리로 걸어오고 있었는데... 소장 옆에 있는 사람은... 백연신?!그녀는 두 눈을 깜빡이며 재차 확인했지만 영락없는 백연신이었다.백연신도 그녀를 발견했지만 딱히 인사 없이 가볍게 웃고는 소장과 얘기를 나눴다.한편 소장은 매우 공손한 태도로 백연신을 대했다. 두 사람은 함께 걸어오며 담소를 나눴는데 소장은 비서에게 얼른 사무실로 차를 준비해오라고 시켰다.하긴 지금 이 디자인숍은 S 시에서 유명한 숍도 아니니까. 본부는 그나마 인지도라도 있는데 한지영이 있는 디자인숍은 종종 사람들에게 본부의 발판이라고 불린다.백연신은 현재 백선그룹 오너이니 소장이 깍듯한 태도로 모시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백선그룹과 관계를 잘 맺는다면 디자인숍에도 큰 횡재일 테니까.하지만 문제는... 백연신이 여긴 대체 어쩐 일이냐고?!그들 같은 작은 디자인숍이 백연신의 눈에 들어올 리가 없을 텐데.잠시 후 백연신은 소장과 함께 사무실로 들어갔고 옆에 있던 주새벽은 야유 어린 눈길로 한지영을 째려봤다.“뭘 봐요? 저분 누군지는 알아요? 백선그룹 대표님이에요. 지영 씨 같은 사람은 아마 저런 분 앞에 설 기회조차 없을 거예요.”한지영은 살짝 의아한 눈길로 주새벽을 쳐다봤다. 그녀가 백연신을 알고 있을 줄은 미처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주새벽은 속으로 백연신에게 잘 보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소장은 그녀의 아빠와 사이가 좋다 보니 직장에서 그녀를 적잖게 챙겨줬다.방금 외출하기 전에도 마침 주새벽과 마주쳤고 이따가 백선그룹 대표님이 갑자기 숍에 찾아올 거라고 미리 알려주었다. 상대가 왜 갑자기 찾아온 건지 의도는 모르겠으나 일단 그녀에게 백선그룹 대표 앞에서 잘 보일 기회를 마련해주겠다고 했다.어렵게 구한 기회라 주새벽은 재빨리 인터넷으로 백선그룹 대표님이 어떤 분이신지 검색해보았는데 실물이 인터넷 프로필 사진보다 훨씬 더 젊어 보였다.백연신이 소장 사무실로 들어갈 때 주새벽은 넋 나간 표
한지영은 백연신을 힐긋 쳐다봤다.“스읍...”깔끔한 옷차림에 훤칠한 이목구비가 그야말로 완벽 그 자체였다! 이러니 그해 그가 술에 취했을 때도 한지영은 참지 못하고 바로 그를 덮쳐버린 것이다.백연신은 몸매가 환상적이었다. 비록 조금 말라 보여도 근육으로 다부진 체구였다. 그녀는 백연신을 바라보며 머릿속에 예전에 봤던 그 몸매가 떠올랐다...순간 그녀는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라 냉큼 고개를 숙이고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자고 저 자신을 단속했다.백연신은 그녀를 힐긋 쳐다봤는데 모퉁이에 앉아서 머리를 푹 숙이고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그녀를 바라보던 백연신은 입꼬리가 저절로 올라가 가볍게 미소를 지었다.이때 소장이 그에게 말했다.“대표님, 바로 시작할까요?”“네, 그러시죠.”백연신은 웃으며 대답했다.소장이 회의를 진행했고 우선 백연신을 소개한 후 숍에서 디자인했던 일부 프로젝트를 브리핑하기 시작했다.그리고 이때 빠짐없이 주새벽을 언급했다.“이쪽은 우리 숍의 젊은 디자이너입니다. 나이는 어리지만 아버지가 업계에서 명망이 높은 디자이너이고 본인도 해외 수상 경력이 아주 많습니다. 디자인이 워낙 독창적이라 대표님도 나중에 시간 되시면 한 번 봐주시길 부탁드려요.”주새벽도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최상의 컨디션으로 말을 꺼냈다.“안녕하세요, 대표님. 저는 주새벽이라고 합니다. 처음 뵙겠습니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그쪽 알고 있어요.”백연신이 느긋하게 대답했다.주새벽은 당혹감과 희열에 휩싸였다. 상대가 이미 알고 있다니,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설마 대표님이 전에 그녀 작품을 보고 아주 마음에 들어 하신 걸까?주새벽은 순간 심장이 콩닥콩닥 뛰기 시작했다.한편 구석에 있던 한지영이 고개 들어 백연신을 쳐다봤는데 왠지 모를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무언가 일어날 것만 같은 그런 느낌이 엄습해왔다...이어진 백연신의 한마디에 한지영은 온몸이 굳어졌고 예측이 현실로 변한 것만 같았다.“내 여자친구가 그쪽을 한번 언급하더라고
처음부터 강지혁은 그녀가 억울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진씨 가문과 얽혀있는 각종 이해관계 때문에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그녀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그녀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지켜만 봤다.임유진은 온몸에 한기가 돌고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1층까지는 고작 5초도 안 돼 내려갈 수 있는 거리인데 임유진은 마치 눈앞에 있는 이 길이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아무리 걸어도 도통 1층에는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네가 정말 진심으로 유진이를 위하고 있다면 진세령을 경찰서에 넘겨. 그리고 진씨 가문은 물론이고 너도 상응한 대가를 치러!”강현수가 분노에 차서 외쳤다.그는 임유진이 억울하게 옥살이한 게 진세령과 강지혁 때문이라는 것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고 가슴이 찌릿하며 아파 났다.만약 그가 조금만 더 빨리 그녀를 찾았더라면, 조금만 더 빨리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더라면 절대 그런 험한 꼴은 당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강지혁은 눈으로 살기를 내뿜더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대로 강현수의 멱살을 확 잡아챘다.“네가 뭘 알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만약 내가 조금 더 일찍 유진이를 알게 됐으면, 조금 더 일찍 유진이를 사랑했으면 유진이가 그런 일을 겪게 내버려 두지 않았어!”그 말에 강현수가 냉랭하게 웃었다.“그래, 그랬겠지. 하지만 넌 그때 유진이와 아무런 접점도 없었고 유진에게 일말의 호감도 없었어. 그래서 너와 진씨 가문의 더러운 작당에 유진이가 휘말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너한테 유진이는 인간도 아니었어! 내 말이 틀려?”“나한테 이딴 말 하는 이유가 뭐야? 왜, 유진이한테 모든 걸 다 얘기해버리게? 내가 그때 수수방관하고 있었다고, 사실은 진세령이 바로 진범이었다고 얘기라도 하게? 강현수, 만약 네가 유진이한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그때는 내 손으로 직접 널 죽여버릴 거야!”강지혁의 말에는 아주 조금의 농담도 들어가 있지
임유진이 방에서 나와 계단 쪽으로 향했을 때 마침 아래층에 있는 강지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곁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도 보였다.‘강현수? 강현수가 왜 여기 있지?’임유진이 계단 아래로 내려오려고 발을 옮기려던 그때 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설마 유진이 사건에 네가 관련돼 있었을 줄은 몰랐어.”순간 임유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뭐? 강현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내 사건에 혁이가 관련되어 있다고? 그때 그 사건은 진범이 밝혀지면서 끝이 났잖아? 혁이가 나를 위해서 판결을 뒤집어 줬잖아? 그런데 왜...’“할 말은 그게 끝이야?”강지혁의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허재명이라는 사람은 그저 네가 심어 놓은 장기 말에 불과했어. 너는 유진이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진범이 누군지 알면서 줄곧 모른 척 외면했어. 왜 그랬니? 진씨 가문과 얽혀 있는 이익 때문에? 그래서 유진이 인생을 아주 손쉽게 박살 낸 거야?”강지혁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노인네가 가는 길에 폭탄을 심어두고 갔네. 할아버지가 얘기해주든?”“익명으로 나한테 메일이 한 통 왔어. 거기에는 유진이 사건의 진실과 그 사건 뒤로 너희 집안과 진씨 가문 사이에 오간 모든 이익 관계 자료들이 다 첨부되어 있었어. 당시 너희 집안과 진씨 가문은 공동으로 진가원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어. 만약 당시 진애령 사건의 진상이 밖으로 드러나면 진씨 가문은 희대의 스캔들로 큰 타격을 입었을 거고 너희 집안 역시 어마어마한 손실을 보게 됐겠지.”강현수의 말은 계속되었다.“공동으로 추진한 프로젝트인 만큼 각자 50%가 되는 지분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유진이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 후 진씨 가문은 그중 20%를 GH 그룹에 양도했어. 왜 그랬을까?”전부 다 조사하고 온 것 같은 강현수의 확신 어린 말투에 여유로웠던 강지혁의 표정도 이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흉흉한 눈빛만이 남아있었다.“그걸 나한테 얘기해주는 목적이 뭐야?”“한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