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편, 임유진은 윤이를 보러 병원에 왔다.전과 달리 윤이는 이번에 깨어있었고 한창 탁유미와 듣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탁유미가 주위 물건들을 가리키며 어떻게 발음하는지 알려주면 윤이는 동그란 눈을 하고는 열심히 듣고 있다. 그러다 윤이가 다시금 물건을 가리키면 그녀는 또 한 번 물건들의 이름을 똑같이 말해주었다."윤이야."임유진의 부름에 윤이는 바로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쳐다봤다. 이제 윤이는 정말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일에 임유진은 진심으로 기뻐했다.들을 수 있다는 건 곧 말도 배울 수 있다는 뜻이고 인공와우를 착용하고만 있으면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3살이면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의사의 말에 따르면 윤이는 점점 더 좋아질 것이고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단계이기에 너무 늦은 것도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임유진은 윤이에게 다가가서 그의 머리를 만져주었다."우리 윤이,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말도 할 수 있겠네."윤이는 임유진의 목소리에 흥분한 듯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더니 웅얼웅얼 대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임유진은 윤이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열심히 호응해주었다."유진 씨, 얼마 전에도 왔었으면서 오늘 또 왔어요?"탁유미가 내심 기쁜 듯 물었다."저번에 왔을 때는 윤이랑 얘기도 못 했잖아요. 오늘은 운이 좋네요. 윤이도 깨어있고."임유진은 탁유미를 보며 말을 이었다."의사는 뭐래요? 윤이 이제 괜찮은 거 맞대요?""네, 이제 괜찮아요. 이틀 후면 퇴원도 가능해요. 1년 동안 특수강의를 들어야 하지만 의사 말로는 1년 후면 언어능력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그때면 유치원도 갈 수 있대요."그 말에 임유진이 환하게 웃었다."정말 잘됐네요.""그러니까요."탁유미 역시 활짝 웃고는 자신의 엄마에게 윤이를 맡긴 후 임유진에게 물을 한잔 따라주었다."오늘 강지혁 씨는 같이 안 왔네요?""네, 출근했어요. 나는 어차피 언니가
"그래도 강지혁 씨가 잘해주는 것 같아 다행이에요. 고생 끝에 낙이 온다는 게 바로 유진 씨를 가리키는 말 같아요."그럴지도 모른다. 지금 강지혁과 임유진의 사이는 점점 더 돈독해지고 있고 그녀는 가끔가다 셋방에서 살았던 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기분도 느끼고 있다.하지만 다른 점도 있었는데 그때의 임유진은 그를 그저 동생으로, 가족으로만 생각했었다면 지금의 그녀는 강지혁을 자신의 연인으로, 미래에도 같이 옆에 있고 싶은 동반자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다."언니도요. 윤이가 머지않아 말도 할 수 있게 되면 다른 아이들처럼 공부도 하고 친구도 사귀고 뭐든 다 할 수 있게 되니까요."임유진이 말했다."그렇죠. 나는 윤이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고생은 얼마든지 할 수 있어요."탁유미는 임유진을 향해 예쁘게 웃어 보였다."아마 유진 씨도 엄마가 되면 알 수 있을 거예요. 자신의 아이를 위해서라면 엄마가 어디까지 할 수 있는지."엄마라... 임유진은 자신의 평평한 복부를 쓸어내리며 옅은 미소를 띠었다....병원에서 나와 집으로 가는 길.임유진은 문득 강지혁과 보냈던 그 날 밤 아무런 피임도 하지 않았다는 걸 떠올렸다. 그러다 임신할까 봐 걱정하는 자신을 발견하고 이내 피식 웃었다.그녀의 지금 몸으로는 임신이 될 리가 없었고 피임을 하든 안 하든 아무런 의미가 없다. 그리고 만약 정말 임신하게 된다면 그건 바라던 바다. 그녀가 그렇게 원하던 진정한 엄마가 될 기회이니까.강씨 저택.퇴근하기에는 이른 시간이었기에 강지혁은 아직 집에 돌아오지 않았다. 임유진은 뉴스나 볼 겸 핸드폰을 켰고 그때 한지영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임유진이 전화를 받자 전화기 너머에서 한지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아. 너... 음, 혹시 지금 경찰서로 와서 나 좀 꺼내줄 수 있어?"임유진은 하마터면 침에 사레들릴 뻔했다. 그러고는 소파에서 몸을 일으키더니 다급하게 물었다."무슨 일이야. 경찰서는 또 뭐고?""음, 그게... 말하자면 길어. 우리 엄마 아빠가 아시면 기절할
"이제는 친구까지 불렀다, 이거네."젊은 여자의 이름은 주새벽으로 그녀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비아냥거렸다. 이에 임유진은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지영을 향해 물었다."지영아,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저 여자는 신경 쓰지 않아도 돼."그 말에 주새벽은 발끈하더니 한지영을 향해 소리쳤다."하, 아직도 인정을 안 하네요? 뻔뻔하게 남의 남자나 꼬시는 주제에, 내가 봤으니 망정이지 그게 아니면 지금쯤 홀딱 벗고 내 남자친구를 침대까지 데려갔을지 누가 알아요!"그러자 한지영이 기가 막힌다는 얼굴을 하며 상대방을 노려봤다."내가 꼬셨다고요? 그쪽 남자친구가 내 눈에 찰 것 같아요? 남한테 이런 소리 하기 전에 자기 남자친구 행실이나 돌아보는 게 어때요?""내가 다 봤는데 어디서 시치미에요?!"주새벽이 눈을 부릅뜨고 말했다."다 보기는 개뿔."한지영은 남자 쪽을 가리키며 주새벽을 향해 말했다."저런 남자는 내 앞에 한 트럭을 갖다 놓아도 눈에 안 차요. 내 남자친구가 저 인간보다 훨씬 더 잘났는데 내가 뭐가 아쉬워서 저런 걸 만나요?!"그러자 주새벽이 비웃음 섞인 말투로 대꾸했다."남자친구는 무슨. 남의 남자나 몰래 쳐다보는 주제에 그런 말을 하면 누가 믿어요?"한지영은 정말 주새벽의 머리통을 갈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들여다보고 싶었다. 아무리 콩깍지가 씌었어도 어떻게 세상 모든 여자가 다 본인 남자친구를 좋아한다고 생각할 수 있는 거지?"지영이 남자친구 있습니다."그때 임유진이 주새벽을 향해 말했다."그리고 대체 무슨 증거로 내 친구가 당신 남자친구를 꼬셨다고 말하는 거죠? 근거도 없이 이러는 거면 우리는 명예훼손죄로 당신을 고소할 수도 있어요.""내가 두 눈으로 직접 봤다고요.""대체 뭘 보셨는데요?"임유진이 되물었다."내 두 눈으로 한지영 씨가 내 남자친구와 비상계단에서 다정하게 얘기하는 걸 봤어요."주새벽이 말했다."회사 비상계단은 누구든 지나갈 수 있는 곳인데 그런 곳에서 대화를 나눴다면 다정하게 뭘 얘기하기보다는 일
임유진은 한지영을 꺼내주기 위해 서류를 작성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핸드폰이 울렸고 발신자는 강지혁이었다."지금 경찰서에 있어?""응?"임유진은 잠깐 놀란 얼굴을 하다 곧 운전기사가 그에게 얘기해줬을 거라는 생각에 납득한 듯 말을 이었다."응, 나 지금 경찰서야. 지영이가 유치장에 갇혀서 나한테 도움을 요청했거든.""누나한테?"강지혁은 눈썹을 치켜세우며 말했다."왜 백연신 씨한테 도와달라고 하지 않고? 지영 씨 남자친구 아니야?""..."임유진은 한지영의 개인 사정을 멋대로 떠들 수 없었기에 대충 얼버무렸다."지영이도 뭔가 생각이 있겠지. 아무튼, 나 지금 서류 작성해야 해서 이따가 다시 전화할게."임유진은 전화를 끊고 다시 서류를 작성했다.한편, 옆에서는 아직도 욕설이 끊이지 않고 있다. 주새벽은 한지영이 신민재에게 마음이 있다고 확신하는 것 같았고 한지영은 말이 안 통하는 그녀를 보며 이제는 대놓고 욕을 했다.백연신이 아무리 그녀의 임시 연인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남자친구인데 얼굴을 밝히는 한지영이 그를 두고 다른 남자에게 마음이 동할 리가 없었다.가끔 연인 관계에 문제가 생기면 자신의 남자친구를 탓하기보다는 모든 걸 주위 여자들의 탓으로 돌리는 여자들이 있다. 마치 주새벽처럼 말이다.서류 작성을 다 한 후 한지영은 곧바로 풀려났고 두 사람이 경찰서를 나오자 그 앞에는 강지혁이 서 있었다."왜 여기 있어?"임유진이 놀란 얼굴로 물었다."누나 데리러 왔지."강지혁은 한지영 쪽을 힐끔 쳐다봤다. 큰 문제는 없어 보였고 만약 정말 무슨 일이 있다고 해도 백연신이 알아서 해결할 것이다."해결 됐으면 이제 가자."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응. 그럼 일단 지영이부터 데려다주자."그러자 한지영이 머쓱해 하며 웃었다."그럼 신세 좀 질게요."강지혁은 자연스럽게 임유진의 손을 잡고 걸어가려고 했다. 그때 주새벽과 신민재도 경찰서에서 나왔고 주새벽은 임유진 옆에 서 있는 강지혁을 보고는 넋이 나간 얼굴로 그를 빤
그 말에 신민재는 잠깐 머뭇거리더니 곧 고개를 끄덕였다."그, 그래. 맞아. 한지영 씨가 먼저 나 꼬셨어!"한지영은 신민재의 얼굴을 한 대 세게 치고 싶은 기분이었다. 임유진은 그런 그녀의 심정을 알았는지 얼른 한지영의 손을 잡으며 자신이 나섰다."지금 그 말 책임질 수 있어요? 제대로 말하지 않으면 지금 다시 경찰서로 들어가서 그쪽을 명예훼손죄로 고소할 수도 있어요."그러자 신민재가 흠칫하더니 바로 입을 닫았다.강지혁은 아직도 사태 파악을 못 하고 옆에서 소리치는 주새벽을 힐끔 보고는 차가운 목소리로 그녀를 향해 말했다."그쪽 앞가림이나 잘하시죠. 그리고 내 여자친구를 당신 같은 인간이 뭘 안다고 함부로 지껄이는지 모르겠네."그 말에 주새벽은 쪽팔림에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서는 말까지 버벅대며 해명했다."나, 나는 그냥 좋은 마음으로... 그쪽이 저 여자한테 혹시라도 당할까 봐..."강지혁은 주새벽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은 채 고개를 돌려 한지영에게 말을 걸었다."이딴 것들 때문에 경찰서까지 왔어요? 백연신 씨는 모르는 거죠? 알면 이 여자가 지금 이렇게 계속 입을 놀리지는 못하겠죠.""..."한지영은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시선을 내리 깔았다."가자."강지혁은 고개를 숙여 임유진에게 말하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계단으로 내려갔다. 그때 검은색 벤틀리가 그들 앞에 멈춰 섰고 세 사람은 차에 올라탔다.주새벽과 신민재는 버려진 병풍처럼 그들이 떠나는 모습만 지켜봤고 주새벽은 아까까지만 해도 분노에 가득 차 있던 얼굴이 차량을 확인하자마자 놀라움 가득한 표정으로 바뀌었다.‘저 차는 절대 아무나 탈 수 있는 게 아닌데... 차도 그렇고 그 남자친구라는 사람도 그렇고 한지영 친구라는 저 여자 대체 정체가 뭐야?!’주새벽은 아까 강지혁이 그녀를 노려보는 눈빛을 떠올리고는 자기고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차 안, 임유진은 한지영에게 자초지종을 물었고 한지영은 한숨을 내쉬더니 하나하나 얘기하기 시작했다."아까 저 두 사람 우리 회사
"..."한지영은 백연신의 존재를 숨길 수만 있다면 최대한 숨기고 싶었다. 아니면 헤어질 때 여러모로 피곤해지니까. 그리고 어쩌다 백연신의 존재를 부모님에게 들켜버려서 그렇지 그녀는 원래 부모님한테도 얘기할 생각이 없었다."그게... 하하, 일하는데 방해될까 봐서요."한지영은 한참을 침묵하더니 그럴싸한 핑계를 댔다."친구한테는 괜찮고요?"그 말에 한지영은 그대로 얼어붙었고 옆에 있던 임유진이 다급하게 끼어들었다."난 괜찮아."그러고는 한지영을 보며 말을 덧붙였다."앞으로도 무슨 일 있으면 꼭 나한테 연락해. 넌 나한테 제일 소중한 친구니까."한지영은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며 알겠다고 대답한 후 곧바로 룸미러로 임유진의 옆에 앉은 강지혁를 힐끔 바라봤다. 아까 그의 말투는 마치 질투하는 사람 같았고 한지영은 왠지 모르게 그에게 질투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강지혁이 질투한다고? 임유진과 친하다는 것 하나 때문에? 한지영은 순간 온몸에 소름이 돋았다. S 시를 원하는 대로 휘두를 수 있는 강지혁이 임유진 때문에, 그것도 여자인 자신을 질투하는 걸 지금 두 눈으로 똑똑히 보고 있는데 어떻게 놀라지 않을 수 있을까.차량은 금세 한지영 집 입구에 도착했고 그때 또 하나의 차량도 입구에 들어섰다. 한지영은 해당 차량을 자세히 보다가 백연신의 차인 걸 확인하고는 깜짝 놀랐다.같은 시각, 백연신도 강지혁의 차를 발견하고는 바로 차에서 내려 그쪽으로 갔다.한지영은 그의 얼굴을 확인한 후 얼른 차에서 내리며 물었다."연신 씨가 왜 여기 있어요?""핸드폰은 왜 꺼놨어?"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은 얼른 핸드폰을 꺼냈고 켜지지 않는 핸드폰을 보고는 어색하게 웃었다."음... 배터리가 없네요."백연신은 차 안을 힐긋 보고는 한지영에게 물었다."저 두 사람이 왜 너를 데려다줘?""그게 말하자면 좀 긴데..."한지영은 입이 바싹 마르는 느낌에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랐다.바로 그때 강지혁이 차창을 내리더니 백연신을 향해 말했다."백연신 씨가 정말
임유진은 잠깐 멍해 있더니 곧 입을 열었다."그걸 어떻게 비교할 수 있겠어."한 사람은 그녀가 사랑하는 사람이고 한 사람은 그녀의 가장 친한 친구인데 이걸 어떻게 비교한단 말인가!"하지만..."임유진은 잠깐 고민하다가 얘기했다."너랑 지영이는 내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키고 싶은 사람이야. 그러니까 두 사람 다 소중해!"임유진이 목숨까지 바쳐서 지키고 싶다는데 이제 그도 만족하지 않을까?‘왜 꼭 두 사람이지?’하지만 강지혁의 욕심은 끝이 없었다. 그는 그녀에게 유일한 사람이고 싶었고 그녀의 마음속에 자신만큼 중요한 사람은 없길 바랐다."그때 누나 도와준 것 때문에?"강지혁이 물었다."아마 그게 계기가 됐을 거야. 난 지영이가 나를 위해 그렇게까지 할 줄은 몰랐거든."원래부터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지만, 그 일이 있고 나서 사이가 더더욱 견고해졌다.어떤 일은 정말 어려운 상황에 직면해 봐야 상대방이 얼마나 자신을 위하는지를 알 수 있고 또 상대방이 얼마나 나쁜지도 알 수 있다."지영이가 없었다면 지금의 나도 없었어. 그러니까 나한테 지영이는 정말 소중한 존재야."임유진은 강지혁을 바라보더니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졌다."너 설마 지영이한테 질투한 건 아니지?""맞다면?"강지혁이 되물었다.임유진은 잠깐 놀란 얼굴을 하고는 강지혁이 마치 어린 아이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일전 아무리 성숙하고 듬직해 보이는 남자라도 애 같은 면이 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는데 지금 강지혁을 보니 정말 그런 것 같기도 했다."그건 네가 조금 참아야 할 부분이겠는데?"임유진이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자신의 입술 근처에 가져와서는 손바닥에 가볍게 키스했다."그래야겠지."강지혁은 시선을 아래로 떨어트리며 중얼거렸다.만약 애초에 그런 사고가 없었더라면 한지영은 그저 좋은 친구 사이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고 그녀의 말대로 만약 그때 한지영이 없었더라면 지금의 임유진도 없었을 것이다.그래서
그녀는 남자 동료에게 성희롱을 당하고 그 뒤에 오해를 빚어 몸싸움을 벌여서 경찰서에 잡혀갔다가 보석으로 풀려난 것까지 단번에 조리 정연하게 다 토해냈다. 말을 너무 많이 한 탓에 목이 살짝 말랐다.백연신은 들으면서 줄곧 미간을 찌푸렸고 잘생긴 얼굴에 한기가 감돌아 아무도 그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가늠할 수 없었다.한지영이 다 말한 후 백연신은 그제야 입을 열었다.“그런 일이 있었는데 왜 나한테 전화하지 않았어?”“그게... 연신 씨 바쁘잖아요. 이런 작은 일로 방해하면 안 되죠.”한지영이 아양을 떨어댔다.백연신이 빤히 쳐다보자 그녀는 따가운 시선에 가슴이 움찔거렸다.“진짜 날 방해하기 싫어서 그런 거야?”한참 후 그가 되물었다.한지영은 찔린 마음을 안고 꿋꿋이 대답했다.“그럼요, 당연하죠.”백연신은 입술을 앙다물었다. 두 사람은 또 그렇게 서로를 물끄러미 쳐다봤고 한지영은 속으로 구시렁댔다.‘아니 대체 이 동네에서 언제까지 이렇게 물끄러미 쳐다봐야 하는 건데?’봉변을 당하기 전에 그에게 전화해 귀찮게 군 건 응당 기뻐해야 할 일이 아닌가? 왜 백연신의 표정은 마치 그녀가 몇십억이라도 빚진 것만 같지?“가자 이만.”문득 백연신이 그녀의 손을 덥석 잡았다.“네?”흠칫 놀란 한지영은 그를 빤히 쳐다봤다.“어디 가는데요?”“너희 집. 언제까지 여기 서 있을 수만은 없잖아.”그가 대답했다.한지영은 숨을 깊게 몰아쉬었다. 만약 그녀의 집으로 간다면...“그럼 오늘 일은 우리 부모님께 얘기하지 말아요.”안 그랬다가 그녀가 잘못했든 안 했든 부모님은 또 쉴 새 없이 그녀의 귀에 대고 잔소리를 퍼부을 테니까.백연신은 갑자기 차갑게 웃더니 짙은 눈동자로 그녀를 바라봤다.“지영아, 왜 나까지 너희 부모님께 숨겨야 하는 건데?”“내 남자친구잖아요!”한지영은 대뜸 대답하곤 어딘가 불편함을 느꼈다. 두 사람은 ‘남자친구’의 의미를 다 너무 잘 알고 있으니까.“내가 남자친구인 거 알고는 있네?”백연신이 그녀에게 바짝 다가갔다.“근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