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은 생수병을 임유진에게 주려고 조수석 쪽으로 고개를 돌리다 하얗게 질린 그녀의 얼굴을 보고는 다급하게 물었다."왜 그래? 어디 아파?""아니, 난... 난 그냥..."임유진은 말을 하고 싶었지만, 한마디도 할 수 없었고 그 모습에 강지혁은 눈썹을 치켜세웠다.그녀의 이마에는 땀이 흥건했고 한 손은 아직도 운전대를 꽉 잡고 있었으며 몸은 사시나무 떨듯 떨고 있었다. 그리고 검은 눈동자에는 두려움이 가득 차 있어 공황에 빠진 것처럼 보였다."그냥 뭐?"강지혁은 생수병을 옆에 놓은 후 운전대를 잡은 그녀의 손 위에 자신의 손을 포개고는 천천히 그녀의 손을 운전대에서 멀리 떼어냈다."내가 옆에 있어. 그러니까 무서워하지 말고 나 좀 봐."강지혁의 목소리가 그녀의 귓가에 맴돌았고 그녀는 눈을 질끈 감은 채 심호흡을 길게 두 번 하고서야 비로소 떨리는 몸을 진정시킬 수 있었다.임유진은 마음속으로 끊임없이 ‘다 지난 일이고 이제 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라고 되뇌며 천천히 눈을 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괜찮아. 그냥 사고 당시 기억이 떠올라서 그래. 지금 생각해보면 정말 운이 좋았어."임유진의 말대로 그녀는 정말 운이 좋았다. 만약 그녀가 조금이라도 운이 나빴더라면 절대 그 사고에서 멀쩡히 살아남을 수 없었을 것이다.이게 바로 어떻게든 살길은 있다는 것일까? 하늘은 그녀에게 시련을 내려주고서도 그녀의 목숨은 앗아가지 않았다.그녀가 간신히 진정됐을 때, 강지혁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쥐더니 자신의 품에 꽉 끌어안고는 얼굴을 그녀의 어깨에 파묻은 채 거칠게 숨을 내쉬었다.이에 임유진은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혁아, 왜 그래?"임유진에 이어 이제는 강지혁까지 이상증세를 보이고 있다. 아까 임유진이 사고 당시 얘기를 꺼내며 운이 좋았다고 했을 때 강지혁의 머릿속에는 사고 당시 자료들이 스쳐 지나갔다.자료에서는 임유진이 탄 차가 심하게 훼손되어 있었고 만약 충돌 위치가 조금만 더 옆으로 빗나갔더라면 그녀가 타고 있던 차도 불길에 휩싸였을 것이라고
강씨 저택으로 돌아온 후, 강지혁은 사용인에게 따뜻하게 데워진 한약과 사탕 그리고 초콜릿을 가져오라고 했다.임유진은 한약을 희망이라고 생각해서 그런지 분명히 쓴데도 전혀 쓰게 느껴지지 않았다. 운이 좋으면 자신의 아이를 가질 수 있으니까.강지혁은 초콜릿을 까더니 임유진에게 건네주었고 그녀는 당연하게 입을 벌려 그의 손에 든 초콜릿을 받아먹었다. 그러다 실수로 그의 손가락을 깨물어 버리고는 반사적으로 뒤로 물러났다."미안해."임유진이 얼른 말했다,강지혁은 그녀에게 깨물린 손가락을 자신의 입술로 가져가고는 물었다."많이 달아?"그의 목소리는 마치 여름밤의 산들바람처럼 그녀의 마음을 간지럽혔다.임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강지혁이 물어보는 게 초콜릿임을 알면서도 마치 그의 손가락이 다냐고 물어보는 것처럼 느껴졌다.입안에 있는 초콜릿은 그녀의 구강 온도에 서서히 녹아들었지만, 그녀는 초콜릿을 음미할 겨를이 없었다."달아?"그의 계속되는 질문에 임유진은 심장이 뛰는 걸 느끼며 그의 시선을 피하고 싶었지만 보이지 않는 힘이 그녀를 끌어당기듯 시선을 돌리 수가 없었다.강지혁의 눈빛, 표정, 그리고 손짓 하나하나까지 마치 당연히 이끌릴 수밖에 없는 것처럼 그녀를 그렇게 끌어당겼다."달아."임유진이 간신히 두 글자를 내뱉자 강지혁은 예쁘게 웃더니 천천히 허리를 숙이고는 예쁜 얼굴을 그녀의 눈앞에 갖다 댔다."누나, 나 사랑해주면 안 돼?"강지혁은 이토록 누군가의 사랑은 바란 적은 임유진이 처음이고 그는 그녀가 자신을 사랑해야만 이 갈증이 해소될 것 같았다.사랑해 달라고? 임유진은 아직도 그의 얼굴에 취해 정신이 몽롱해서는 제대로 된 사고를 할 수 없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을 좋아하는 건 확실하다. 하지만 사랑? 만약 사랑한다고 하면 그녀는 과연 그를 어느 정도로 깊이 사랑할 수 있을까?그녀가 막 입을 벌려 얘기를 하려고 할 때 강지혁의 입술이 그녀의 입술을 덮쳐왔고 임유진은 그제야 입안 가득 퍼진 초콜릿 향을 느낄 수 있었다.정말 달아.
강지혁은 마치 소중한 것을 다루듯 그녀의 얼굴을 매만졌고 천천히 입술을 열고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그녀에게 속삭였다."나 좀 사랑해줘. 응?"마치 구걸하듯 그녀의 사랑을 바라는 그의 모습에 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이 바짝 타는 것을 느끼며 혀로 입술을 살짝 핥았다. 그러고는 마치 그의 숨결에 잠식된 사람처럼 사고가 멈춰버린 채 몽롱한 얼굴을 했다.청초한 얼굴, 검은 눈동자, 앙증맞은 코 그리고 그를 바라보는 눈빛, 강지혁은 마치 덫에 걸린 사람처럼 평생 그녀에게 벗어날 수 없음을 느꼈다.한때 그는 여자의 사랑 같은 건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그 생각은 임유진을 만나고 나서 싹 다 사라져버렸고 그녀를 갖고 싶고 그녀의 사랑을 갖고 싶다는 생각만이 그의 머릿속을 지배하기 시작했다.그녀와 마주할 때면 그는 자존심과 지금까지 옳다고 생각해왔던 모든 것들을 내려놓을 준비가 되어있었고 온전히 새로운 감정에 자신을 맡기고 싶었다.강지혁의 입술이 다시 그녀의 입술을 포개왔고 그는 부드러운 키스로 그녀를 녹이기 시작했다.그때 임유진이 정신을 차리고는 빨개진 얼굴로 강지혁의 가슴팍을 밀어버렸다."나... 나..."버벅대며 말하는 그녀의 눈동자에는 명백한 두려움이 서려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임유진은 상황이 이렇게 흘러갈 거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녀의 얼굴에 서린 두려움을 본 강지혁은 눈빛이 점차 맑아지더니 곧 제정신으로 돌아왔다. 임유진은 지금 겁을 먹었다. 아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던가 혹은 아직은 그를 사랑하지 않을 수도 있다.강지혁은 그녀를 하루빨리 갖고 싶다는 마음에 급하게 몰아붙여 미처 그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했다."미안해..."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임유진이 너무나도 갖고 싶지만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다. 그는 그녀가 진심으로 원할 때, 그때 관계를 맺고 싶었다.강지혁은 서서히 몸을 일으킨 후 웃음을 자아내려고 노력하며 그녀를 향해 말했다."무서워하지 않아도 돼. 누나가 싫으면 안 해.
강지혁의 몸이 그대로 굳어버렸다."지금 누나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는 알아...?"그는 간단한 한마디를 힘겹게 한 글자 한 글자씩 내뱉었고 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는 천천히 답했다."응... 알아."이 순간, 그녀는 단지 마음이 시키는 대로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그에게 전해주고 싶을 뿐이다."혁아, 나 너 사랑하는 것 같아."임유진은 더 이상 강지혁이 그녀에게 자신을 사랑하냐고 물었을 때 아무런 대답도 못 한 채 그의 눈빛이 서서히 어둠에 잠식되어가는 모습을 그저 지켜만 보고 싶지 않았다. 매번 그녀가 침묵할 때면 그의 눈은 항상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깊게 가라앉았고 그는 줄곧 그녀가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다고 생각해왔을 것이다. 그렇기에 이제는 이런 진실한 감정을 그에게 전부 보여주고 싶었다."너를 얼마만큼 사랑하냐고 묻는다면 솔직히 잘 모르겠어. 지금, 이 감정이 얼마나 깊은지 어디까지 깊어질 수 있는지 나도 잘 몰라. 하지만 널 사랑하는 이 마음이 진짜라는 건 확신할 수 있어."임유진은 이 감정을 숨기고 싶지 않다. 그가 오해하며 혼자 마음 아파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으니까.강지혁은 잔뜩 굳어버린 몸을 천천히 돌려 눈앞의 그녀를 응시하고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정말이야? 날 정말 사랑해?"그는 자신이 그토록 원하는 대답을 들었음에도 여전히 믿기지 않는 건지, 아니면 실감이 나지 않는 건지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답을 요구했다."응."임유진이 말했다"널 사랑해. 혁아, 난 널 원해."말을 마친 그녀는 천천히 손을 들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그러고는 발끝을 들어 그의 입술에 자신의 입술을 포개며 행동으로 그에게 확신을 주었다.서로 마음이 통한다는 게 이런 걸까. 임유진은 강지혁을 사랑하기에 그가 더는 참지 않았으면 좋겠고 자신이 줄 수 있는 거라면 뭐든지 그에게 주고 싶었다.맞닿았던 입술이 천천히 떨어지고 강지혁은 허리를 숙여 그녀의 어깨에 자신의 얼굴을 묻고는 낮게 속삭였다."후회 안 해
어젯밤 일이 떠오른 임유진은 서서히 부끄러워 났다. 그녀는 진작에 깼지만, 눈을 뜨면 바로 강지혁의 얼굴이 보일까 봐 아직 눈을 뜨지 못하고 있다.얼굴을 마주하게 되면 대체 무슨 얘기를 해야 하지?임유진은 이따 있을 어색함을 떨치기 위해 머릿속으로 온갖 생각을 했고 아직 생각 정리가 채 되지 않았는데 옆에서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깼어? 깼으면 눈 좀 떠봐. 아니면... 내 얼굴을 보게 되는 게 겁나?"임유진은 그 말에 흠칫하더니 눈을 번쩍 떴다. 그러자 제일 먼저 눈에 들어온 것은 바로 신이 조각한 듯한 강지혁의 얼굴이었다.그는 한 손으로 침대를 짚고는 허리를 숙이고 있었고 얼굴은 그녀의 얼굴과 매우 가까워 숨결까지 느낄 수 있었다.여자들도 질투할 만한 길고 검은 속눈썹은 그의 예쁜 눈동자와 환상의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임유진은 그와 눈이 마주치고는 자기도 모르게 어젯밤 그녀를 홀릴 듯 바라봤던 그의 눈동자가 떠올랐다."무슨 생각해?"그때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고 임유진은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얼른 대답했다."아니야, 아무것도..."부랴부랴 옷을 입은 후 임유진이 몸을 일으키려고 하자 강지혁이 그녀를 불러세웠다."잠깐만."그는 그녀의 앞에 무릎을 꿇고 앉더니 정성스럽게 양말을 신겨주었다. 그러고는 슬리퍼까지 신겨준 후 그녀를 안아 들고 욕실로 향했다."뭐, 뭐 하는 거야?"임유진이 당황한 듯 물었다."씻으려는 거 아니야?"강지혁이 되물었고 임유진은 ‘아...’ 하는 소리와 함께 그에게 몸을 맡겼다.욕실로 들어간 후 강지혁은 그녀를 바닥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는 작게 속삭였다."서 있기 힘들면 나 잡아.""응."임유진은 짧게 대답한 후 고개를 들어 거울을 바라봤다. 거울에는 두 사람이 나란히 서 있었고 강지혁은 고개를 숙인 채 그녀를 위해 칫솔에 치약을 짜주고 있었다.그녀는 하나부터 열까지 자신을 위해 움직이는 강지혁을 보며 이게 바로 사랑받는 느낌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여기."강지혁은 그녀에게 칫솔을 건
이도 닦고 세수까지 마친 임유진의 얼굴은 빨갛게 달아오르다 못해 곧 터질 듯했다.그녀가 빗을 들고 머리를 빗으려고 하자 강지혁이 그녀의 손에서 빗을 뺏어 들었다."내가 해줄게."이에 임유진이 조금 놀란 얼굴로 말했다."하지만...""걱정 마. 예쁘게 빗겨줄 테니까."강지혁은 씩 웃더니 빗을 들고 마치 아기 다루듯 부드러운 손길로 천천히 그녀의 머리를 빗겨주기 시작했다.강지혁에게 이런 대접을 받을 사람이 임유진 말고 또 있을까?그녀는 거울에 비친 자신과 강지혁을 바라봤다. 빨갛게 달아오른 그녀의 얼굴에는 행복이 넘쳐흐르고 있었고 강지혁은 입가에 수많은 여자의 마음을 훔칠 듯한 웃음을 머금은 채 다정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빗을 내려놓은 후 그녀의 머리를 천천히 한곳으로 모으고는 이내 머리끈으로 묶었다."앞으로도 종종 나한테 누나 머리를 빗게 해줘."강지혁은 만족한 듯 웃으며 그녀에게 말했다.임유진은 그가 말한 앞으로라는 단어가 가슴에 확 와 닿았고 그녀의 심장을 두근거리게 했다...."어떻게 된 거예요? 대체 누가 우리 가문을 대상으로 공매도를 하고 있냐고요?"윤수경의 말에 진기태는 얼굴이 어두워져서 대답했다."강지혁이야.""네?"윤수경은 깜짝 놀랐다."강지혁이요? 아니, 우리하고 대체 무슨 원수를 졌다고 공매도를 한대요?"원수를 지지 않았다고? 진기태의 생각은 달랐다. 일전 임유진의 일로 그를 찾아가긴 했지만, 지금 상황을 보면 강지혁은 아직 끝낼 생각이 없는 것이다.윤수경도 머리를 굴리다 진기태와 똑같은 생각을 하고는 입을 열었다."설마... 강지혁이 임유진 그 여자 때문에 우리 집안에 복수하고 있는 건 아니겠죠?!"윤수경은 본인이 말하고도 믿어지지 않았다. 그녀는 여전히 임유진을 벌레만도 못한 존재로 생각하고 있으니까.그런데 강지혁 같은 남자가 여자 하나 때문에 이런 짓을 벌여가며 진씨 가문을 적으로 돌리는 것도 불사한다고?"감방까지 살고 온 여자잖아요!"윤수경은 이해가 안 된다는 듯 소리쳤다."그래. 감
"뭘 어떻게 도와주는데?"진기태가 물었다."소씨 집안 보고 강지혁과 적이 되어 달라고 얘기할 셈이야? 아니면 우리 회사에 몇천억이라는 거금을 들여서 주가를 올려달라고 부탁할 거야?"윤수경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즈니스에 관해서는 잘 몰랐지만 진기태의 반응으로부터 소씨 가문에게 도움을 구하는 건 아무래도 무리인 듯 보였다. 거금을 지원해 달라는 것보다는 강지혁과 적이 되어달라고 말하는 것부터가 말도 안 되는 부탁이니까."그... 그럼 어떡해요?"윤수경이 다급해서 소리쳤다."강지혁은 어떻게 된 게 임유진 같은 여자한테 홀딱 빠져서는! 그 여자가 무슨 약이라도 먹인 건 아닌지 모르겠어요. 게다가 민준이가 한번 버렸던 여잔데 강지혁은 그래도 좋대요?"진기태는 짜증을 내며 말했다."혹시나 해서 말하는데. 당신, 그런 말 이제는 내 앞에서만 하고 다른 사람 앞에서는 꺼내지도 마. 괜히 불필요한 트러블을 또 일으킬 필요는 없잖아."윤수경은 불만 가득한 얼굴이었지만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내가 강지혁을 만나보고 올게. 뭘 어떻게 하려는 건지 들어봐야겠어."진기태도 임유진이라는 여자 하나 때문에 진씨 일가가 위기에 놓이는 건 보고 싶지 않았다.그렇게 진기태는 강지혁을 만났고 곧 그에게서 이상한 제안을 듣게 된다."열흘 안에 유진이를 내쫓았던 백화점을 평지로 만들어 버리면 저도 그만하죠."강지혁이 담담하게 내뱉은 말에 진기태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백화점을 평지로 만들어 버리라고?"지금 백화점을 허물어 버리라는 건가? 얼마만큼의 거금을 투자해 세웠는지를 막론하고 거기는 도심이라 이윤도 괜찮기에 주주 쪽에서 멋대로 철거하게 내버려 두지 않을 것이다."지혁아, 혹시 임유진 씨를 위해 이러는 거면 다른 방법도 있을 것 같은데."진기태는 어떻게든 손실을 막아야 했다."유진이를 위해 이러는 거 맞아요. 그리고 다른 방법을 얘기하기 전에 당신 아내 팔을 잘라버리지 않은 걸 다행으로 여기셔야죠. 이 정도면 충분히 봐준 것 같은데."강지혁의 섬뜩
한편, 임유진은 윤이를 보러 병원에 왔다.전과 달리 윤이는 이번에 깨어있었고 한창 탁유미와 듣기 연습을 하고 있었다. 탁유미가 주위 물건들을 가리키며 어떻게 발음하는지 알려주면 윤이는 동그란 눈을 하고는 열심히 듣고 있다. 그러다 윤이가 다시금 물건을 가리키면 그녀는 또 한 번 물건들의 이름을 똑같이 말해주었다."윤이야."임유진의 부름에 윤이는 바로 고개를 돌려 그녀 쪽을 쳐다봤다. 이제 윤이는 정말 그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게 되었다! 얼마 전까지는 상상도 못 했던 일에 임유진은 진심으로 기뻐했다.들을 수 있다는 건 곧 말도 배울 수 있다는 뜻이고 인공와우를 착용하고만 있으면 보통사람들과 다를 바 없이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물론 3살이면 늦은 감이 없지 않아 있지만, 의사의 말에 따르면 윤이는 점점 더 좋아질 것이고 스펀지처럼 흡수하는 단계이기에 너무 늦은 것도 아니니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했다.임유진은 윤이에게 다가가서 그의 머리를 만져주었다."우리 윤이, 이제 조금만 더 지나면 말도 할 수 있겠네."윤이는 임유진의 목소리에 흥분한 듯 손가락으로 이곳저곳을 가리키더니 웅얼웅얼 대며 무언가 말하려고 했다. 임유진은 윤이가 가리키는 곳으로 시선을 돌리며 열심히 호응해주었다."유진 씨, 얼마 전에도 왔었으면서 오늘 또 왔어요?"탁유미가 내심 기쁜 듯 물었다."저번에 왔을 때는 윤이랑 얘기도 못 했잖아요. 오늘은 운이 좋네요. 윤이도 깨어있고."임유진은 탁유미를 보며 말을 이었다."의사는 뭐래요? 윤이 이제 괜찮은 거 맞대요?""네, 이제 괜찮아요. 이틀 후면 퇴원도 가능해요. 1년 동안 특수강의를 들어야 하지만 의사 말로는 1년 후면 언어능력이 정상으로 돌아와서 그때면 유치원도 갈 수 있대요."그 말에 임유진이 환하게 웃었다."정말 잘됐네요.""그러니까요."탁유미 역시 활짝 웃고는 자신의 엄마에게 윤이를 맡긴 후 임유진에게 물을 한잔 따라주었다."오늘 강지혁 씨는 같이 안 왔네요?""네, 출근했어요. 나는 어차피 언니가
처음부터 강지혁은 그녀가 억울하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진씨 가문과 얽혀있는 각종 이해관계 때문에 아무런 개입도 하지 않고 그녀가 감옥에 들어가는 것을, 그녀가 억울하게 당하는 것을 지켜만 봤다.임유진은 온몸에 한기가 돌고 몸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려왔다.1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이 바로 눈앞에 있는데, 1층까지는 고작 5초도 안 돼 내려갈 수 있는 거리인데 임유진은 마치 눈앞에 있는 이 길이 멀고 아득하게만 느껴졌다.아무리 걸어도 도통 1층에는 도착할 수 없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네가 정말 진심으로 유진이를 위하고 있다면 진세령을 경찰서에 넘겨. 그리고 진씨 가문은 물론이고 너도 상응한 대가를 치러!”강현수가 분노에 차서 외쳤다.그는 임유진이 억울하게 옥살이한 게 진세령과 강지혁 때문이라는 것만 생각하면 피가 거꾸로 솟고 가슴이 찌릿하며 아파 났다.만약 그가 조금만 더 빨리 그녀를 찾았더라면, 조금만 더 빨리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었더라면 절대 그런 험한 꼴은 당하게 하지 않았을 것이다.강지혁은 눈으로 살기를 내뿜더니 앞으로 성큼성큼 걸어가 그대로 강현수의 멱살을 확 잡아챘다.“네가 뭘 알아! 네가 무슨 자격으로 나한테 그런 말을 해! 만약 내가 조금 더 일찍 유진이를 알게 됐으면, 조금 더 일찍 유진이를 사랑했으면 유진이가 그런 일을 겪게 내버려 두지 않았어!”그 말에 강현수가 냉랭하게 웃었다.“그래, 그랬겠지. 하지만 넌 그때 유진이와 아무런 접점도 없었고 유진에게 일말의 호감도 없었어. 그래서 너와 진씨 가문의 더러운 작당에 유진이가 휘말린 것도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너한테 유진이는 인간도 아니었어! 내 말이 틀려?”“나한테 이딴 말 하는 이유가 뭐야? 왜, 유진이한테 모든 걸 다 얘기해버리게? 내가 그때 수수방관하고 있었다고, 사실은 진세령이 바로 진범이었다고 얘기라도 하게? 강현수, 만약 네가 유진이한테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면 그때는 내 손으로 직접 널 죽여버릴 거야!”강지혁의 말에는 아주 조금의 농담도 들어가 있지
임유진이 방에서 나와 계단 쪽으로 향했을 때 마침 아래층에 있는 강지혁의 모습이 보였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곁에 있는 또 다른 누군가의 모습도 보였다.‘강현수? 강현수가 왜 여기 있지?’임유진이 계단 아래로 내려오려고 발을 옮기려던 그때 강현수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설마 유진이 사건에 네가 관련돼 있었을 줄은 몰랐어.”순간 임유진의 발걸음이 우뚝 멈췄다.‘뭐? 강현수가 지금 뭐라고 한 거지? 내 사건에 혁이가 관련되어 있다고? 그때 그 사건은 진범이 밝혀지면서 끝이 났잖아? 혁이가 나를 위해서 판결을 뒤집어 줬잖아? 그런데 왜...’“할 말은 그게 끝이야?”강지혁의 아무런 감정도 없는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허재명이라는 사람은 그저 네가 심어 놓은 장기 말에 불과했어. 너는 유진이가 억울하게 옥살이를 하게 된 진범이 누군지 알면서 줄곧 모른 척 외면했어. 왜 그랬니? 진씨 가문과 얽혀 있는 이익 때문에? 그래서 유진이 인생을 아주 손쉽게 박살 낸 거야?”강지혁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노인네가 가는 길에 폭탄을 심어두고 갔네. 할아버지가 얘기해주든?”“익명으로 나한테 메일이 한 통 왔어. 거기에는 유진이 사건의 진실과 그 사건 뒤로 너희 집안과 진씨 가문 사이에 오간 모든 이익 관계 자료들이 다 첨부되어 있었어. 당시 너희 집안과 진씨 가문은 공동으로 진가원이라는 프로젝트를 추진해 왔어. 만약 당시 진애령 사건의 진상이 밖으로 드러나면 진씨 가문은 희대의 스캔들로 큰 타격을 입었을 거고 너희 집안 역시 어마어마한 손실을 보게 됐겠지.”강현수의 말은 계속되었다.“공동으로 추진한 프로젝트인 만큼 각자 50%가 되는 지분을 가지고 있었을 거야. 그런데 유진이가 감옥에 들어가게 된 후 진씨 가문은 그중 20%를 GH 그룹에 양도했어. 왜 그랬을까?”전부 다 조사하고 온 것 같은 강현수의 확신 어린 말투에 여유로웠던 강지혁의 표정도 이제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대신 흉흉한 눈빛만이 남아있었다.“그걸 나한테 얘기해주는 목적이 뭐야?”“한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