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니야, 여기도 너무 좋아!”임유진이 서둘러 대답했다. 그가 임유진 엄마를 위해 마련한 묘지는 이 묘원에서 단독으로 있는 곳이지 다른 묘지와 나란히 있는 곳이 아니다.만약 집으로 표현한다면 나란히 있는 묘지는 아파트 단지에 가깝고 그가 지금 선택한 이 묘지는 단독주택과 같다.이곳은 나무들이 줄지은 독립적인 작은 공간이고 묘지 앞 몇 미터 떨어진 곳에는 심지어 돌을 쌓아 만든 스톤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어 성묘객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다.“다행이네.”강지혁이 말했다.“그럼 어머님 유골함을 여기 넣어둬.”임유진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쪼그리고 앉아 엄마 유골함을 묘비 앞에 있는 유골 전용 공간에 넣어두었다. 이어서 일꾼들이 슬레이트를 덮고 시멘트를 부어 꼼꼼하게 밀봉했다.한편 묘원의 직원들은 계약서 한 부를 임유진에게 건넸는데 이 묘지에 관한 계약서였다.계약 시간은 50년이고 위에 적힌 비용을 본 순간 그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설사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녀의 능력으론 평생 벌어도 지급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비용은 강지혁 씨께서 이미 지급하셨으니 임유진 씨는 이 계약서에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묘원 직원이 말했다.그녀는 강지혁에게 또 한 번 큰 신세를 졌다.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펜을 들어 계약서에 서명했다. 지금으로선 그 미약한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니까.묘원 직원과 일꾼들이 떠난 후 강지혁은 고이준에게 국화꽃과 제사 지낼 음식, 과일을 꺼내라고 했다.“아직 어머님께 인사도 못 드렸겠는데 지금 인사드려.”그는 말하면서 몸을 움츠리고 앉아 음식과 과일을 가지런히 내려놓고 생화도 조심스럽게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임유진은 생화를 안고 눈앞의 묘비를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가 이젠 이곳에서 편히 쉴 수 있으니 그녀도 드디어 마음이 놓였다.비록 엄마가 돌아가셨지만 고이 잠드실 안식처가 있으니 그녀도 정신적인 의지가 생긴 것 같았다.임유진은 묘비 앞에서 공손하게 세 번 큰절을 올린 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속 깊이 간직해
어두운 밤, 달빛이 드리운 강지혁의 실루엣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아름다운 윤곽의 목선과 얼굴 옆 라인, 그리고 선명한 귀까지 그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임유진은 심지어 그의 귀마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강지혁이 허리를 곧게 펴고 그녀를 마주 보자 임유진은 순간 무언가로 가슴을 망치질하듯이 움찔했다.달빛에 드리워진 그의 눈동자는 마치 한 나무를 가득 채운 복숭아 꽃잎이 연못에 우수수 떨어져 잔잔한 은빛 물결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고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거문고의 현이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만 같았다.순간 임유진의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장으로 돼버렸고 두 눈엔 오직 강지혁만 가득 찼다.황홀한 그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고 조각 같은 이목구비는 하느님이 정성을 기울인 걸작과도 같았다.“왜 그래?”그녀의 귓가에 드디어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화들짝 놀란 임유진은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방금 강지혁에게 홀딱 반해버렸다.“아니야... 아무것도.”임유진은 횡설수설 대답했다.“그래, 그럼 이만 돌아가자. 앞으로 어머님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보러 와. 누나 아버님이 이곳을 알게 된다 해도 더는 유골함을 딴 곳에 못 가져가.”강지혁은 말하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임유진은 자신에게 선뜻 내민 손을 보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 손을 맞잡았다.“고마워.”그녀는 오늘 밤 두 번째로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처음엔 강지혁이 그녀 엄마의 유골함이 어디 있는지 찾아줘서 고맙다고 말했고 두 번째는 엄마의 유골함을 고이 모실 묘지를 마련해줘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정말 그렇게 고맙다면 날 좀 더 좋아해 주던가.”강지혁이 말했다.순간 임유진은 숨이 멎을 것 같고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강지혁을 따라 묘원에서 나왔다.두 사람이 나란히 차에 탄 후 임유진은 창밖의 멀어져가는 묘원을 바라보며 줄곧 마음을 짓눌렀던 큰 바위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오늘부로 엄마는 고이 잠드실
그녀가 강지혁을 쳐다보는 눈빛은 어느 한순간 그에게 푹 빠져들고 더없이 가깝게 느껴지다가도 금세 또 애써 그에게서 멀어지려는 듯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예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지금은 어떤 이유로 갈등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그녀는 한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의 뜨거운 시선 속에서 얼굴만 점점 더 빨개졌다.“왜 날 안 봐? 나 좀 봐줘, 누나!”강지혁이 가까이 다가오며 뜨거운 숨결을 내뿜었다. 그녀는 마치 그의 목소리에 홀린 듯 저도 모르게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강지혁은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는데 갈증과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는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훤칠한 이마를 드러냈지만 그녀 머릿속엔 여전히 기억 속의 ‘혁이’가 끊임없이 겹쳐졌다.애초의 혁이도 이런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으니.“누나는 날 조금이라도 좋아해?”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임유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가슴이 찔린 듯 입을 열고 부인하려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또다시 꽉 막혀버렸다.‘난... 지혁이를 좋아할까?’임유진이 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만약 그가 그저 혁이였다면 동생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진짜 좋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강지혁이라면...“누난 날 좋아해.”그는 단호한 말투로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그녀의 표정은 이미 그에게 원하는 대답을 준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고 두 눈에도 흡족한 듯한 미소가 번졌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미소가 너무 예뻐 보였다....강씨 저택에 돌아간 후 그녀는 강지혁을 따라 거실로 들어가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저기... 오늘 나를 이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내가 어떻게 보답했으면 좋겠어?”세상이 늘 그렇듯 얻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기에 그가 진짜 어떠한 보답을 원해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강지혁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어떻게 보답해줄 건데? 영원히 내 옆에 있어 줄래?”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처음부터 그가 원하는 건 그녀의 진심이다.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욕심이 점점 더 커졌다.그녀가 자신을 더 많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고 딴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심지어 그녀의 미래에 자신이 아닌 딴 남자가 나타나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는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금세 질투의 화신으로 돌변했다.질투라... 그녀 때문에 강지혁은 그제야 질투가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다.임유진은 시선을 올리고 강지혁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녀 얼굴에 닿은 그의 손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요 며칠 동안 그와 함께 지낸 순간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물론 아직도 그에게 모종의 공포가 남아있지만 방금 차에서 강지혁이 했던 말처럼 그녀는 이미 그를 좋아하게 된 듯싶다.애초에 그가 혁이였을 때부터 좋아했을 수도 있다.“정말 내가 좋아해 주길 원해?”임유진이 나지막이 물었다.“응.”강지혁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그럼 넌? 넌 대체 나한테 무슨 감정이야? 내가 신선해 보여서? 꽤 재미있을 것 같은 게임 상대로 느껴져서 이러는 거야?”임유진은 용기 내어 마음속 깊숙이 담아뒀던 질문을 건넸다.강지혁은 어두운 눈빛으로 변하더니 돌연 싸늘하게 웃었다.“단순한 게임 상대로 여겼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그는 임유진의 머리를 확 잡아당겨 둘 사이의 거리를 더욱 좁혔다.“난 이번 생에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많지 않아. 어쩌면 아버지 말고는 누나가 유일한 사람일지도 몰라. 이런 내가 누나한테 어떤 감정일 것 같아?”쿵쾅! 쿵쾅!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임유진은 살며시 두 손 들어 그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이렇게 하면 그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강지혁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살짝 놀란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또한 그의 눈빛 속에 은은한 설레임과 갈망이 담겨 있는 듯싶었다.“혁아, 널 좋아해.”임유진은 자신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그녀는 강지혁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처음
어쩌면 어젯밤에 했던 말은 살짝 흥분되어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사실인 것을, 그녀는 정말... 어느샌가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강지혁이란 남자를...임유진은 그에게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났다. 분명 확연히 다른 두 개의 감정인데 이토록 모순적이면서도 함께 뒤엉켜 있다.“그럼 나랑 사귀겠다고 한 것도 진심이지?”강지혁이 또 물었다.“뭐?!”임유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젯밤에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강지혁은 곧장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누난 대체 어떻게 하면 나만 좋아할 건데? 더는 딴 남자한테 한눈팔지 말란 말이야!”그 당시 임유진은 그의 이 말을 듣고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내뱉었다.“너만 좋아하라는 건...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강지혁은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남자친구? 누나 나랑 사귈 거야?”사귄다고? 임유진은 그의 질문에 머릿속이 백지장으로 돼버렸다. 어쩌면 그와 사귀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인 듯싶다.강지혁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럼 사귀어. 누난 어떻게 생각해?”임유진도 감정에 이끌려 금세 대답했다.“좋아.”그리고 지금, 강지혁의 질문을 마주한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사귄다고? 그녀와 강지혁이?!임유진에겐 아예 불가능한 일인 듯싶었다.“누나, 번복하면 안 돼.”강지혁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 닿을 것만 같았다. 그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속삭였다.“어젯밤 그 말들, 누나가 직접 한 거야. 번복하고 싶어도 내가 그렇게 안 둬.”그가 확고한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랬다, 절대 그녀를 번복하게 놔둘 리 없다. 마치 한때 이미 그의 손에 잡혔던 황홀함처럼 어찌 또다시 돌려줄 수 있겠는가?임유진은 순간 마음이 엉망진창으로 돼버렸다....사귄다고? 정말 강지혁과 사귄다고?그녀는 식당에 출근했을 때까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한편 식당에 들어서자 사장 탁유미는 안 보이고 그녀의
“내가 그날 사람을 제대로 봤나 봐요. 역시 당신이었군요.”강현수는 담담한 눈길로 탁유미를 바라봤다.“날 찾아온 이유는 이경빈한테 당신을 만났단 얘기를 하지 말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죠?”‘이경빈’ 이 세 글자를 듣는 순간 탁유미는 온몸이 움찔거렸다. 얼마 만인가, 다른 사람에게 이 이름을 전해 들은 지가...뼛속 깊이 사랑했고 또 원망했던 그 이름.다만 이젠 그 이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맞아요.”탁유미는 이를 악물었다.“대표님한테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요. 단지 대표님이 저를 가엽게 봐주시고 아예 저를 못 본 거로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그녀의 말투는 비굴하기 그지없었다. 강현수가 무릎을 꿇으라고 해도 망설임 없이 꿇을 정도였다.“그쪽도 알다시피 요 몇 년간 이경빈이 사람을 시켜서 그쪽을 찾고 있어요.”강현수가 말했다.탁유미는 입을 앙다물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 남자가 탁유미를 찾는 이유는 단지 그녀가 받고 있는 고통이 아직 많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고, 그가 정해준 비참한 노선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그녀가 뜻밖에 ‘실종’ 됐기 때문에 이토록 찾아 헤매고 있다.“대표님, 제발 부탁드려요. 저랑 경빈이 사이의 일은 대표님도 조금은 알고 계시잖아요. 저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을 뿐, 아무도 해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피해받고 싶지 않아요.”탁유미가 애원했다.“해치지 않는다고요?”강현수가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쪽 때문에 경빈의 여자친구가 유산해서 한 사람의 목숨이 사라진 게 된 거잖아요?”탁유미는 이를 악물고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은 그녀에게 강제로 낙인된 죄명이다. 그해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강조했건만 아무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았다.그리고 그녀가 제일 사랑했던 남자가 친히 그녀를 감방에 들여보냈다. 경찰들에게 끌려갈 때 탁유미가 물었다.“이경빈, 날 사랑하긴 했니?”“그럴 리가. 처음부터 너한테는 원망뿐이었어.
그해의 교통사고는... 임유진에게도 말하지 못할 속사정이 있는 걸까? 강현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은 강지혁의 약혼녀 진애령이고 임유진은 현재 강지혁과 함께 있다.설사 그해 교통사고에 또 다른 속내가 있다고 해도 강지혁이 알아서 조사할 일이지 그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하지만...“임유진 씨는 언제부터 그쪽 가게로 출근했어요?”강현수가 뜬금없이 물었다.“네?”탁유미는 놀란 기색이 역력하여 잠시 후에야 대답했다.“보름 정도 됐어요. 우리 가게에서 배달 일을 맡고 있어요.”“평소 가게에서 표현이 어때요?”강현수가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아주 잘하고 있어요. 부지런하고 배달 효율도 엄청 높아요. 힘든 내색을 안 해요...”탁유미는 임유진의 가게 근황을 얘기했고 강현수는 한 손으로 한쪽 얼굴을 받치고 흥미진진하게 들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싸늘하던 그의 얼굴이 살짝 온화해졌다.탁유미는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강현수가 설마 임유진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강현수는 연예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황태자라 주변에 갖은 미녀가 넘실거릴 테지만 임유진은 평소 출근할 때 수수한 옷차림에 민낯으로 길거리를 누볐고 두 손엔 심지어 굳은살이 많이 박혀 딱 봐도 막노동을 많이 한 사람인 게 티가 났다.이런 두 사람이 어떻게? 탁유미가 애초에 이 둘이 윤이 식당에서 대화를 나눴던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강현수가 임유진에게 호감이 있을 거라고 어찌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탁유미가 임유진이 가게에서 있은 일을 전부 얘기한 후 강현수는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방금 임유진 씨가 그쪽 가게에 지원하러 왔을 때 감방 생활을 한 적이 있다고 했는데 왜 그럼에도 채용한 거죠? 이후에 무슨 일 생기면 가게에 피해가 갈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탁유미는 쓴웃음을 지었다.“아마 저도 같은 경력이 있어서 측은지심에 그랬나 봐요.”처지를 바꾸어 생각해보면 그녀는 그 당시 임유진이 직업을 간절하게
임정호는 화가 나 다시 집주인에게 따져 물으려 했지만 상대가 이미 전화를 꺼버렸다.“어떻게 된 일이에요? 누가 유골함을 건드렸어요?”옆에 있던 방미령이 재빨리 남편에게 물었다.“집주인이 어젯밤에 누군가가 그쪽으로 찾아가서 유골함을 가져갔대!”임정호가 대답했다.“가져가다니요? 그럼 우리 백억은 어떡해요? 유골함이 없으면 그 계집애도 백억을 안 줄 거라고요!”방미령도 안달이 났다.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아 참, 설마 그 계집애가 사람을 시켜서 유골함을 가져간 게 아닐까요...”임정호는 미간을 구기더니 냉큼 휴대폰을 꺼내 임유진에게 전화했다.잠시 후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죠?”“저기 유진아, 나도 생각해봤는데 어쨌거나 난 네 아비잖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어제 말한 백억 말이야, 네가 한꺼번에 내놓기 힘들면 일단 절반만 줘도 돼. 그럼 내가 너희 엄마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려줄게. 너 한창 강지혁과 뜨겁게 불타오를 단계잖아? 이 액수는 강지혁에게 별문제 되지 않을 거야.”임정호가 말했다. 비록 지금 유골함이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딸에게 돈을 갈취하고 있었다.만약 어젯밤 유골함을 유진이가 가져간 게 아니라면 50억도 좋으니 나중에 대충 유골함 하나 사서 가짜 유골을 넣어두고 속이면 그뿐이다.다만 아쉽게도 그는 전화기 너머의 싸늘한 임유진의 표정을 볼 수가 없다.친아빠라는 자가 엄마의 유골을 이용해서 돈이나 뜯어내려고 하다니, 어찌 엄마가 죽었음에도 이용하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그럴 필요 없어요. 어제 이미 엄마 유골을 가져와서 안장했어요.”임유진이 대답했다.이 말을 들은 임정호는 버럭 화냈다.“진짜 너였네. 네가 무슨 권리로 내 월세방에 쳐들어가 네 어미 유골함을 가져가? 게다가 이미 안장을 해? 내가 남편인데 대체 내 허락 없이 어디에 묻은 거야?”“남편인 걸 알긴 해요? 엄마가 살아계시면 아빠를 남편으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임유진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너... 지금 아빠한테 그게 무
그런데 아직 스킨십이든 뭐든 하기도 전에 강지혁의 입에서 냉랭한 말이 흘러나왔다.“난 누가 멋대로 내 몸 만지는 거 질색이야. 만약 거기서 한 걸음만 더 가까이 다가와 기어코 내 몸에 손을 대면 그때는 두 번 다시 그 손을 볼 수 없을 거야.”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고 경고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인 말투인데 내용이 너무 소름 끼쳐 저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그리고 그때 그의 눈빛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옮겨지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일에만 몰두해있었다. 마치 그녀에게는 1초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소민아는 당시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하루아침에 손이 없어지는 경험은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히 농담이었겠지만 상대는 강지혁이라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그랬던 강지혁이 여자가 앞으로 바짝 다가와 말을 건 것도 모자라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볼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고 있다.소민아는 그 모습에 질투와 분노가 동시에 치솟았고 강지혁에게 속으로 얼른 그 여자의 손을 자르라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그때 들려온 고이준의 한마디에 그녀는 그만 생각이 멈춰버렸다.“사모님!”소민아는 얼이 빠진 얼굴로 고이준을 바라보았다.사모님이라니? 누가? 강지혁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그때 소민아의 머릿속으로 눈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이 강지혁의 죽은 아내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이 떠올랐다.‘서, 설마 사모님이라는게... 아니... 설마...’소민아가 경악하며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아니야. 아닐 거야! 말이 안 되잖아!’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고이준을 바라보았다.“고 비서님! 오랜만이에요!”이건 분명히 아까 고이준이 불렀던 ‘사모님’에 대한 대답이었다.고이준은 잔뜩 격앙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계셨군요! 저희가 얼마나 사모님께서 살아계시길 바랐는지 아십니까! 5년이나 지나서 드디어... 드디어 실현되었네요!”“
아이의 얼굴은 얼마 전에 봤던 사진 속 여자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게다가 아빠라니, 그 여자를 쏙 빼닮은 얼굴로 아빠라니.강지혁과 현이는 그렇게 서로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그시각 놀란 건 비난 강지혁뿐만이 아니었다. 고이준은 거의 넋을 잃은 채로 아이를 바라보았다.아이는 완전히 리틀 임유진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자세히 보면 어딘가 강지혁의 느낌도 있었다.‘이 아이 설마...!’그때 아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임유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엄마, 아빠가 나 좋아할 거라며? 왜 현이 안 안아줘? 아빠 정말 엄마 좋아했던 거 맞아? 정말 엄마 때문에 울었던 거 맞아?”아이는 진지하게 임유진이 해줬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임유진은 아이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오로지 강지혁만 바라보고 있었다.자신이 무슨 이유로 강지혁의 곁을 떠났는지, 왜 S 시에서는 죽은 상태가 되어 있는 건지, 그녀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둘이 어떻게 사랑했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어떤 맹세를 하고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났다.임유진은 눈물을 가득 맺힌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강지혁에게로 걸어갔다.지난날의 두 사람이 어땠는지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강지혁을 월세방에 데리고 와 그에게 라면을 끓여줬던 것도, 친척들이 그녀를 바보에게 팔아넘기려 했을 때 강지혁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도,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결혼하자고 했던 것도, 그가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지 말라는 말을 했던 것도 전부 다 떠올랐다.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5년이나 그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지금 5년 만에 드디어 그의 앞에 서게 되었다.“혁아, 나 돌아왔어.”임유진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네고는 손을 들어 강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아, 조금 차가운 이 체온은 확실히 그의 체온이 맞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고 또 세상에서 그녀를
임유진은 기억을 다 잃어버렸지만 그간 축적해온 지식은 아직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변호사였다는 걸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을 잃고도 그녀는 또다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택했고 자격증 시험도 단번에 통과했다.“네, 오랜만이네요...”이현우는 인사를 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바꿨다.‘혹시 소민아 씨와 싸웠다는 여자가 유진 씨인 건가?’이현우는 순간 이길 자신이 먼지 사라지듯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게 임유진을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그 유명한 승률 99%를 자랑하는 법조계의 대선배 변호사였으니까.그리고 임유진은 그 대선배 변호사의 그냥 제자도 아니고 애제자였다. 지난번 행사에서 그는 임유진을 마지막으로 더는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이현우는 자신만만한 임유진의 얼굴을 보고는 머리가 다 지끈해 났다.“꼴에 진짜 변호사였네?”그때 소민아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이 변호사님, 불편하시면 의뢰 거절하셔도 되죠. 하지만 이 여자가 건드린 건 내가 아니라 강 회장님이세요. 자기 딸한테 강 회장님 사진 보여주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니까요? 이거 소문 잘못 나면 사생아다 뭐다 엄청난 스캔들 되는 거 아시죠? 만약 정말 스캔들 터지면 그때는 회장님 사업 전체에 영향이 갈 겁니다.”소민아는 일부러 강지혁을 끌어들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이현우의 표정은 한순간에 흙빛이 되었다.임유진이 결혼은 안 했지만 딸이 하나 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딸에게 강지혁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라고 하라니?!아무리 딸에게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어도 그렇지 강지혁의 사진을 이용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혹시 S 시에서 강지혁 회장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모르나? 아니면... 그냥 딸이 너무 아빠를 찾아서 인터넷에서 아무 남자 사진이나 보여준 건가?’이현우가 조용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임유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딸은 사생아 따위가 아닌 강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에요.”“하, 유일한 딸? 강씨 가문
레스토랑은 계속 영업을 해야 하기에 경찰들은 도착한 후 그대로 소씨 모녀와 임유진 쪽의 세 사람을 경찰서에 태웠다.차 안에서 임유진이 경찰에게 이름을 얘기할 때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와이프와 똑같은 이름이었으니까.하지만 소민아는 아주 잠깐 놀라기만 했을 뿐 눈앞에 있는 임유진과 죽은 강지혁의 와이프를 굳이 연결 지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강지혁의 와이프가 5년 전에 죽었다는 것을 S 시의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까.‘이제 알겠네. 이름이 같다고 자기가 회장님 와이프인 줄 아는 리플리증후군 환자였잖아?’강지혁과 엮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소민아는 임유진이 아이까지 이용해 이러는 게 무척이나 같잖았다.이 세상에서 강지혁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인 강선율을 제외하고 그녀의 딸인 소안나밖에 없었다.한편 현이는 아직도 찢어진 반쪽짜리 사진이 신경 쓰였다. 이건 어렵게 구한 아빠의 사진이었으니까.“현아, 괜찮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이따 엄마랑 같이 아빠 보러 가면 그때 마음껏 사진 찍어.”그 말에 현이는 일리가 있다며 금방 활짝 웃었다.“그건 네 아빠 아니고 내 아빠야! 그리고 아빠는 사진 찍는 거 싫어해!”소안나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흥! 엄마가 그랬어.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아서 분명히 날 좋아할 거라고!”현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그러자 그걸 들은 한지영이 임유진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네가 정말 현이한테 그랬어?”“응.”임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사실 이 말을 한 건 아빠가 자리를 안 좋아하면 어떡하냐고 현이가 너무 걱정하고 있길래 뻔뻔하게 해본 말이었다.“5년 만에 아주 사람이 달라졌어? 응?”한지영이 능글거리며 임유진의 옆꾸리를 툭툭 쳤다.그러자 옆에 있던 소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뻔뻔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네. 회장님이 당신 같은 여자를 왜 좋아해? 웃기고 있어!”“남의 말 엿듣는 게 취미인가 봐요?”한지영이 가볍게
매니저는 소민아가 강지혁과 연관 있는 여자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최근에는 에스테 삽까지 열었다고 했으며 상류층 귀부인들과도 사이가 매우 좋다고 했다. 그러니 만약 이런 사람을 건드리면 장사는 거의 접어야 한다고 봐도 무방했다.‘안돼! 어떻게 버텨낸 건데 이럴 순 없어!’매니저는 얼른 소민아에게로 다가갔다.“괜찮으십니까?”그러자 소민아가 레스토랑이 다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대체 손님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내 딸이 여기서 다쳤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우리 딸의 아빠가 누군지 몰라?!”매니저는 이에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연신 사과해댔다.한편 현이는 고개를 들어 임유진과 한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랑 이모는 왜 싸웠어? 싸우는 건 나쁜 거라고 했잖아.”현이는 아까 임유진이 다가왔을 때 여자아이랑 싸운 것으로 꾸중을 들을 줄 알았다.그런데 갑자기 어른들 셋이서 싸움을 해댔다.임유진은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우리 현이, 엄마가 한 말 기억하고 있었구나? 싸우는 게 나쁜 건 맞지만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해. 그리고 우리는 이걸 정당방위라고 해.”“정당방위!”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정당방위?”그런데 그때 소민아가 그걸 듣더니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오늘 제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잔뜩 있는 데서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일부러 더 큰소리로 외쳤다.“난 절대 이대로 안 넘어가. 변호사 고용해서 오늘 나한테 이딴 짓 한 거 후회하게 해줄 거야!”소민아의 말에 소안나가 턱을 치켜 든 채 현이 쪽으로 다가갔다.“우리 엄마가 변호사 아저씨 부르면 너랑 너희 엄마는 아주 큰 벌이 내려질 거야!”이에 현이는 소안나보다 더 고개를 치켜들며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엄마는 변호사 아저씨를 불러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엄마가 변호사야!”“우리 엄마 엄청 돈 많아서
현이를 거칠게 밀어버린 건 소민아였고 나머지 반쪽짜리 사진을 손에 꽉 쥐고 있는 건 그녀의 딸이자 강씨 가문의 양녀인 소안나였다.임유진은 인터넷에서 해당 모녀를 본 적이 있기에 그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그때 임유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소민아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아빠? 기가 막혀서!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누구더러 아빠래?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리고 당장 내 딸한테 사과해! 내 딸이 누군 줄 알고 감히 손을 올려?!”소민아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마치 사과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사실 이곳은 소안나가 티비에서 보고 가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온 곳이었다. 만약 소안나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따위 곳에는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서민 레스토랑은 그녀와 그녀의 딸 급과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그런데 이런 수준 낮은 곳에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갑자기 딸이 웬 이상한 여자애랑 싸우고 게다가 그 싸움의 원인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강지혁의 사진이었다.소민아는 단호한 눈으로 아빠라고 외치는 아이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강지혁에게는 소안나라는 딸밖에 없고 그건 앞으로도 그러할 게 분명했다.임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쪽 딸이 누군지 당연히 알죠. 강씨 가문의 양녀 잖아요. 안 그래요? 그리고 내 딸의 주제는 내가 판단해요.”임유진은 레스토랑이기도 하고 아이들도 있었기에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얘기했다.하지만 그녀가 입밖에 내뱉은 ‘양녀’라는 두 글자가 소민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소민아는 다른 사람들이 소안나를 양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민아에게 아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그녀가 딸의 호칭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항상 ‘아가씨’라고 불렀다.“이봐, 미친 거야?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안 돼? 고작 이딴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네가 뭐 진짜 이 남자 와이프라도 된 것 같아? 그리고 이 사진은 또 어디서 났어? 음습하고 음침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응, 기사로 봤어.”임유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만약 혁이가 정말 날 잊고 그 여자를 좋아한다면 나도 깨끗하게 포기할 거야. 하지만... 만약 혁이가 여전히 내가 알던 혁이고 나만 사랑해주는 혁이면 나는 절대 포기 안 해.”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녀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강지혁이 정말 이제는 그녀를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별한 아내를 위해 아무도 만나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하지만 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강지혁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처럼 딱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기억을 잃은 요 몇 년간 임유진에게 들이대는 남자는 꽤 많았다. 심지어 하나같이 스펙이 좋고 얼굴도 훈훈했으며 다정다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심장이 떨리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그러다 기억이 차츰 회복되고 나서야 임유진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강지혁이라는 남자에게 줘버려서 더 이상 나눌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참, 지영이 너는? 남자친구 생겼어?”임유진이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없어. 안 그래도 노처녀라면서 엄마가 얼마나 재촉을 해대는지.”한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쓰게 웃었다.지난 5년간 오로지 백연신만 떠올리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멀리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백연신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이따금 나타나 있었다.그리고 백연신과 함께 있었을 때가 너무 행복해서 이제는 그 어떤 남자를 봐도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소개팅은 볼 때마다 큰 수확이 없었다.“아직 마음을 접지 못한 거구나...”임유진이 한지영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접으려고 노력해야지.”한지영이 웃었다.“만약 노력했는데도 정 안되면 그때는 그냥 혼자 살지 뭐! 아니지. 우리 현이랑 선율이 둘을 보고 살면 되지.”한지영은 말을 내뱉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아니나
“하지만 나는 임현이 좋아. 엄마, 나 계속 임현 할래. 그렇게 해줘.”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임유진에게 말했다.“오빠는 강선율이고 현이는 강선현이면 얼마나 좋아. 사람들이 오빠랑 남매인 거 바로 알게 될걸? 현이 오빠 갖고 싶어 했잖아.”임유진이 아이를 설득했다.“그럼 오빠한테 임율로 바꾸라고 하면 안 돼?”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럼 오빠 만나고 현이가 직접 물어봐. 어때?”“좋아!”현이는 뭔가를 굳게 결심한 듯 이를 앙다물고 눈을 부릅떴다.한지영은 아이의 표정과 행동에 소리 내 웃었다.“현이는 임현이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좋아?”“네, 좋아요!”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왜? 엄마가 계속 그렇게 불러줘서 그게 더 좋은 거야?”한지영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그러자 임유진이 딸 대신 대답했다.“아니, 두 글자 이름이 더 멋있다고 생각해서 임현이 더 좋다고 하는 거야. 만약 강현으로 하라고 했으면 바로 동의했을걸?”“뭐? 하하하. 그런데 강현은 조금 남자애 이름 같잖아.”“현이는 그런 거 상관 안 해. 오히려 멋있다면서 좋아할걸? 그냥 두 글자 이름이 더 좋은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크게 웃으면 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때 음식이 도착하고 세 사람은 식사부터 했다.현이는 밥을 먹은 후 키즈 존으로 달려가 신나게 놀았다. 이곳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레스토랑이라 다른 곳보다 놀 수 있는 공간이 크고 그 덕에 또래 아이들도 더 많았다.키즈 존은 테이블과 멀리 않은 곳에 있어 임유진과 한지영은 편하게 식사를 하며 이따금 시선을 옆으로 돌려 한번씩 확인만 했다.“이따 현이 데리고 강지혁 만나러 갈 거야?”한지영이 물었다.“응, 먼저 집으로 가보려고.”사실 임유진은 기억을 회복한 다음 바로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두 개의 번호 중 하나는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이 흘러나왔고 다른 한 개 번호는 아예 신호음조차 가지 않았다.아무래도 낯선 번호는 걸려오지 못하게 제안해 놓은 것 같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차라
“아니야. 아빠가 그간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았던 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임유진이 말했다.“현이 보게 되면 아마 엄청 좋아할 거야!”‘날 찾지 않은 이유는 아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겠지?’임유진은 강지혁을 기억해낸 후 그의 기사를 찾아보다 그녀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로 나온 것을 봤었다.열차가 S 시에 도착하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출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렇게 걸어 나가보니 가장 먼저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한지영이었다.임유진은 그녀를 본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다.그간 기억을 아예 통째로 잃었던 터라 그녀는 한지영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기억이 회복된 후에야 급하게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한지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덜덜 떨었던 것을 말이다.그러다 영상 통화를 걸고서야 한지영은 그녀가 정말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지영아!”임유진이 큰소리로 외치자 한지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한지영은 임유진을 보자마자 눈가가 빨개지더니 눈물을 글썽였다.임유진이 딸의 손을 잡고 그녀 앞에 섰을 때 한지영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너 진짜... 살아있었어. 네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거 난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유진아!!”한지영은 임유진을 와락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그리고 임유진도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미안해... 많이 걱정했지.”“그걸 말이라고!”한지영은 울먹거리며 말하다가 이내 임유진의 옆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판박이였지만 언뜻 강지혁의 모습도 보였다.일전 영상 통화로 이미 얼굴을 봤었지만 실물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이모, 안녕하세요!”현이가 똘망한 눈으로 한지영을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이에 한지영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걸 느끼며 아이의 말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