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강지혁을 쳐다보는 눈빛은 어느 한순간 그에게 푹 빠져들고 더없이 가깝게 느껴지다가도 금세 또 애써 그에게서 멀어지려는 듯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예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지금은 어떤 이유로 갈등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그녀는 한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의 뜨거운 시선 속에서 얼굴만 점점 더 빨개졌다.“왜 날 안 봐? 나 좀 봐줘, 누나!”강지혁이 가까이 다가오며 뜨거운 숨결을 내뿜었다. 그녀는 마치 그의 목소리에 홀린 듯 저도 모르게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강지혁은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는데 갈증과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는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훤칠한 이마를 드러냈지만 그녀 머릿속엔 여전히 기억 속의 ‘혁이’가 끊임없이 겹쳐졌다.애초의 혁이도 이런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으니.“누나는 날 조금이라도 좋아해?”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임유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가슴이 찔린 듯 입을 열고 부인하려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또다시 꽉 막혀버렸다.‘난... 지혁이를 좋아할까?’임유진이 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만약 그가 그저 혁이였다면 동생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진짜 좋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강지혁이라면...“누난 날 좋아해.”그는 단호한 말투로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그녀의 표정은 이미 그에게 원하는 대답을 준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고 두 눈에도 흡족한 듯한 미소가 번졌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미소가 너무 예뻐 보였다....강씨 저택에 돌아간 후 그녀는 강지혁을 따라 거실로 들어가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저기... 오늘 나를 이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내가 어떻게 보답했으면 좋겠어?”세상이 늘 그렇듯 얻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기에 그가 진짜 어떠한 보답을 원해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강지혁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어떻게 보답해줄 건데? 영원히 내 옆에 있어 줄래?”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처음부터 그가 원하는 건 그녀의 진심이다.그리고 시간이 흐르면서 욕심이 점점 더 커졌다.그녀가 자신을 더 많이 좋아해 줬으면 좋겠고 딴 남자는 거들떠보지도 말았으면 하는 바람이다.심지어 그녀의 미래에 자신이 아닌 딴 남자가 나타나는 걸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는그런 생각을 할 때마다 금세 질투의 화신으로 돌변했다.질투라... 그녀 때문에 강지혁은 그제야 질투가 어떤 느낌인지 알게 됐다.임유진은 시선을 올리고 강지혁을 지그시 바라봤다. 그녀 얼굴에 닿은 그의 손은 뜨겁기 그지없었다. 요 며칠 동안 그와 함께 지낸 순간순간들이 파노라마처럼 그녀의 뇌리를 스쳤다.물론 아직도 그에게 모종의 공포가 남아있지만 방금 차에서 강지혁이 했던 말처럼 그녀는 이미 그를 좋아하게 된 듯싶다.애초에 그가 혁이였을 때부터 좋아했을 수도 있다.“정말 내가 좋아해 주길 원해?”임유진이 나지막이 물었다.“응.”강지혁은 일 초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그럼 넌? 넌 대체 나한테 무슨 감정이야? 내가 신선해 보여서? 꽤 재미있을 것 같은 게임 상대로 느껴져서 이러는 거야?”임유진은 용기 내어 마음속 깊숙이 담아뒀던 질문을 건넸다.강지혁은 어두운 눈빛으로 변하더니 돌연 싸늘하게 웃었다.“단순한 게임 상대로 여겼다면 내가 이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그는 임유진의 머리를 확 잡아당겨 둘 사이의 거리를 더욱 좁혔다.“난 이번 생에 사랑하고 싶은 사람이 많지 않아. 어쩌면 아버지 말고는 누나가 유일한 사람일지도 몰라. 이런 내가 누나한테 어떤 감정일 것 같아?”쿵쾅! 쿵쾅!그녀의 심장이 미친 듯이 요동쳤다!임유진은 살며시 두 손 들어 그의 얼굴을 감싸 안았다. 이렇게 하면 그의 존재를 더 선명하게 느낄 수 있으니까.강지혁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살짝 놀란 듯한 눈빛으로 그녀를 쳐다봤다. 또한 그의 눈빛 속에 은은한 설레임과 갈망이 담겨 있는 듯싶었다.“혁아, 널 좋아해.”임유진은 자신의 목소리가 또렷하게 들렸다.그녀는 강지혁의 정체를 알게 된 후 처음
어쩌면 어젯밤에 했던 말은 살짝 흥분되어 그랬을 수도 있지만... 이 또한 사실인 것을, 그녀는 정말... 어느샌가 이 남자를 좋아하게 됐을지도 모른다. 강지혁이란 남자를...임유진은 그에게 공포감을 느끼면서도 좋아하는 감정이 생겨났다. 분명 확연히 다른 두 개의 감정인데 이토록 모순적이면서도 함께 뒤엉켜 있다.“그럼 나랑 사귀겠다고 한 것도 진심이지?”강지혁이 또 물었다.“뭐?!”임유진은 정신이 번쩍 들었다. 어젯밤에 그에게 좋아한다고 고백했고 강지혁은 곧장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누난 대체 어떻게 하면 나만 좋아할 건데? 더는 딴 남자한테 한눈팔지 말란 말이야!”그 당시 임유진은 그의 이 말을 듣고 뜬금없이 이런 질문을 내뱉었다.“너만 좋아하라는 건... 남자친구를 말하는 거야?”강지혁은 그녀의 말을 들은 순간 사랑스러운 눈길로 그녀를 바라보며 속삭였다.“남자친구? 누나 나랑 사귈 거야?”사귄다고? 임유진은 그의 질문에 머릿속이 백지장으로 돼버렸다. 어쩌면 그와 사귀겠다는 생각을 단 한 번도 해본 적이 없어서인 듯싶다.강지혁은 입가에 미소가 번졌다.“그럼 사귀어. 누난 어떻게 생각해?”임유진도 감정에 이끌려 금세 대답했다.“좋아.”그리고 지금, 강지혁의 질문을 마주한 그녀는 어떻게 대답해야 좋을지 몰랐다. 사귄다고? 그녀와 강지혁이?!임유진에겐 아예 불가능한 일인 듯싶었다.“누나, 번복하면 안 돼.”강지혁의 입술이 그녀의 귓가에 닿을 것만 같았다. 그는 뜨거운 숨결을 내뿜으며 속삭였다.“어젯밤 그 말들, 누나가 직접 한 거야. 번복하고 싶어도 내가 그렇게 안 둬.”그가 확고한 눈빛으로 쏘아붙였다.그랬다, 절대 그녀를 번복하게 놔둘 리 없다. 마치 한때 이미 그의 손에 잡혔던 황홀함처럼 어찌 또다시 돌려줄 수 있겠는가?임유진은 순간 마음이 엉망진창으로 돼버렸다....사귄다고? 정말 강지혁과 사귄다고?그녀는 식당에 출근했을 때까지 여전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한편 식당에 들어서자 사장 탁유미는 안 보이고 그녀의
“내가 그날 사람을 제대로 봤나 봐요. 역시 당신이었군요.”강현수는 담담한 눈길로 탁유미를 바라봤다.“날 찾아온 이유는 이경빈한테 당신을 만났단 얘기를 하지 말라고 부탁하기 위해서죠?”‘이경빈’ 이 세 글자를 듣는 순간 탁유미는 온몸이 움찔거렸다. 얼마 만인가, 다른 사람에게 이 이름을 전해 들은 지가...뼛속 깊이 사랑했고 또 원망했던 그 이름.다만 이젠 그 이름에서 완전히 벗어나 평범한 삶을 살고 싶었다.“맞아요.”탁유미는 이를 악물었다.“대표님한테 이런 말 할 자격이 없다는 걸 알아요. 단지 대표님이 저를 가엽게 봐주시고 아예 저를 못 본 거로 해주셨으면 하는 바람이에요!”그녀의 말투는 비굴하기 그지없었다. 강현수가 무릎을 꿇으라고 해도 망설임 없이 꿇을 정도였다.“그쪽도 알다시피 요 몇 년간 이경빈이 사람을 시켜서 그쪽을 찾고 있어요.”강현수가 말했다.탁유미는 입을 앙다물고 더는 말하지 않았다. 그 남자가 탁유미를 찾는 이유는 단지 그녀가 받고 있는 고통이 아직 많지 않다고 생각되기 때문이고, 그가 정해준 비참한 노선에서 벗어났기 때문이다.그녀가 뜻밖에 ‘실종’ 됐기 때문에 이토록 찾아 헤매고 있다.“대표님, 제발 부탁드려요. 저랑 경빈이 사이의 일은 대표님도 조금은 알고 계시잖아요. 저는 그저 평범한 삶을 살고 싶을 뿐, 아무도 해치지 않고 그 누구에게도 피해받고 싶지 않아요.”탁유미가 애원했다.“해치지 않는다고요?”강현수가 느긋하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다들 알다시피 그쪽 때문에 경빈의 여자친구가 유산해서 한 사람의 목숨이 사라진 게 된 거잖아요?”탁유미는 이를 악물고 괴로운 표정을 지으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이것은 그녀에게 강제로 낙인된 죄명이다. 그해 자신이 한 일이 아니라고 그렇게 강조했건만 아무도 그녀를 믿어주지 않았다.그리고 그녀가 제일 사랑했던 남자가 친히 그녀를 감방에 들여보냈다. 경찰들에게 끌려갈 때 탁유미가 물었다.“이경빈, 날 사랑하긴 했니?”“그럴 리가. 처음부터 너한테는 원망뿐이었어.
그해의 교통사고는... 임유진에게도 말하지 못할 속사정이 있는 걸까? 강현수는 잠시 생각하다가 실소를 터트렸다. 그해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은 강지혁의 약혼녀 진애령이고 임유진은 현재 강지혁과 함께 있다.설사 그해 교통사고에 또 다른 속내가 있다고 해도 강지혁이 알아서 조사할 일이지 그가 굳이 신경 쓸 필요가 있을까?하지만...“임유진 씨는 언제부터 그쪽 가게로 출근했어요?”강현수가 뜬금없이 물었다.“네?”탁유미는 놀란 기색이 역력하여 잠시 후에야 대답했다.“보름 정도 됐어요. 우리 가게에서 배달 일을 맡고 있어요.”“평소 가게에서 표현이 어때요?”강현수가 계속 질문을 이어갔다.“아주 잘하고 있어요. 부지런하고 배달 효율도 엄청 높아요. 힘든 내색을 안 해요...”탁유미는 임유진의 가게 근황을 얘기했고 강현수는 한 손으로 한쪽 얼굴을 받치고 흥미진진하게 들으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 싸늘하던 그의 얼굴이 살짝 온화해졌다.탁유미는 속으로 적잖게 놀랐다. 강현수가 설마 임유진에게... 어떻게 이럴 수가?!강현수는 연예계에서 명성이 자자한 황태자라 주변에 갖은 미녀가 넘실거릴 테지만 임유진은 평소 출근할 때 수수한 옷차림에 민낯으로 길거리를 누볐고 두 손엔 심지어 굳은살이 많이 박혀 딱 봐도 막노동을 많이 한 사람인 게 티가 났다.이런 두 사람이 어떻게? 탁유미가 애초에 이 둘이 윤이 식당에서 대화를 나눴던 광경을 목격하지 않았다면 강현수가 임유진에게 호감이 있을 거라고 어찌 감히 상상이나 했겠는가?!탁유미가 임유진이 가게에서 있은 일을 전부 얘기한 후 강현수는 그제야 정신을 가다듬고 그녀에게로 시선을 옮겼다.“방금 임유진 씨가 그쪽 가게에 지원하러 왔을 때 감방 생활을 한 적이 있다고 했는데 왜 그럼에도 채용한 거죠? 이후에 무슨 일 생기면 가게에 피해가 갈 거라는 생각은 안 해봤나요?”탁유미는 쓴웃음을 지었다.“아마 저도 같은 경력이 있어서 측은지심에 그랬나 봐요.”처지를 바꾸어 생각해보면 그녀는 그 당시 임유진이 직업을 간절하게
임정호는 화가 나 다시 집주인에게 따져 물으려 했지만 상대가 이미 전화를 꺼버렸다.“어떻게 된 일이에요? 누가 유골함을 건드렸어요?”옆에 있던 방미령이 재빨리 남편에게 물었다.“집주인이 어젯밤에 누군가가 그쪽으로 찾아가서 유골함을 가져갔대!”임정호가 대답했다.“가져가다니요? 그럼 우리 백억은 어떡해요? 유골함이 없으면 그 계집애도 백억을 안 줄 거라고요!”방미령도 안달이 났다.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아 참, 설마 그 계집애가 사람을 시켜서 유골함을 가져간 게 아닐까요...”임정호는 미간을 구기더니 냉큼 휴대폰을 꺼내 임유진에게 전화했다.잠시 후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죠?”“저기 유진아, 나도 생각해봤는데 어쨌거나 난 네 아비잖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어제 말한 백억 말이야, 네가 한꺼번에 내놓기 힘들면 일단 절반만 줘도 돼. 그럼 내가 너희 엄마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려줄게. 너 한창 강지혁과 뜨겁게 불타오를 단계잖아? 이 액수는 강지혁에게 별문제 되지 않을 거야.”임정호가 말했다. 비록 지금 유골함이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딸에게 돈을 갈취하고 있었다.만약 어젯밤 유골함을 유진이가 가져간 게 아니라면 50억도 좋으니 나중에 대충 유골함 하나 사서 가짜 유골을 넣어두고 속이면 그뿐이다.다만 아쉽게도 그는 전화기 너머의 싸늘한 임유진의 표정을 볼 수가 없다.친아빠라는 자가 엄마의 유골을 이용해서 돈이나 뜯어내려고 하다니, 어찌 엄마가 죽었음에도 이용하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그럴 필요 없어요. 어제 이미 엄마 유골을 가져와서 안장했어요.”임유진이 대답했다.이 말을 들은 임정호는 버럭 화냈다.“진짜 너였네. 네가 무슨 권리로 내 월세방에 쳐들어가 네 어미 유골함을 가져가? 게다가 이미 안장을 해? 내가 남편인데 대체 내 허락 없이 어디에 묻은 거야?”“남편인 걸 알긴 해요? 엄마가 살아계시면 아빠를 남편으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임유진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너... 지금 아빠한테 그게 무
임유진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걸 알았더라면 애초에 잘 대해 줄 걸 그랬다며 임정호는 후회했다. 방미령은 임정호의 말에 배가 아팠는지 화를 냈다."강지혁은 감방까지 갔다 온 여자가 뭐가 좋다고 그런대요? 그리고 강지혁의 약혼녀를 차로 치어 죽인 것도 임유진이잖아요!""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임정호도 짜증을 냈다."하지만 뭐 어찌 됐든 그렇게 당당하지는 못할 거예요. 우리 유라처럼 모든 면에서 걸릴 것이 없어야 이제 강현수랑 결혼도 하고 강씨 집안의 안주인이 될 수 있죠. 우리 이번 여행 다녀온 것도 다 유라 덕이잖아요."임정호는 자신의 작은딸을 떠올리며 그제야 기분이 나아진 듯 보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희망은 임유라뿐이었다.한편,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누나 아버지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강지혁은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위험한 뜻을 임유진은 단번에 알아챘다. 또한, 알아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었다면 분노에 차서 내뱉은 한마디를 강지혁이 그대로 들어줄 것 같았으니까."아니야. 이제 아빠와는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으니까 이거로 된 거야."임정호가 이번에 한 일은 그저 임유진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일말의 부녀의 정을 끊어놓았을 뿐이었다. 임유진은 이때까지 임정호가 그래도 자신의 어머니에게 조금은 감정이 남아있을 줄 알았다. 두 사람은 연애결혼이었고 자신의 어머니는 임정호가 제일 힘들고 제일 형편없었을 때 결혼을 결심했으니까.하지만 이제는 임유진도 깨달았다. 그건 단지 자신의 일방적인 희망일 뿐이었다는 것을. 또한, 제일 무서운 건 시간이고 예전에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했어도 시간에 따라 그 감정은 옅어지고 또 옅어져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강지혁은 눈앞에서 초연한 얼굴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약간의 슬픔과 허탈함까지 보이는 임유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고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강
지금의 강지혁은... 자신을 좋아하는 거겠지? 다만 이 좋아하는 감정이 언제까지 갈까?임유진은 걱정부터 앞섰다. 자신의 어머니도 임정호에게 시집을 갈 때 임정호가 평생 자신만 바라보며 사랑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보면 임정호의 마음에 어머니의 자리는 더는 없어 보였다. 영원한 사랑도 세월이 흐르면 그저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임유진 자신 또한 소민준과 뜨거운 사랑을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자신이 평생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민준은 그런 기대가 우습게 단번에 그녀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누나도 내가 이러는 게 장난 같아 보여?"그때 강지혁이 갑자기 질문을 해왔고 임유진은 움찔하며 거기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강지혁이 일개 장난으로 자신에게 이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품고 있는 이 감정이 얼마나 지속이 될지, 임유진은 거기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아마 1년, 2년... 혹은 고작 몇 개월일지도 모르니까."누나가 말해 봐. 내가 진심이라는 걸 어떻게 해야 믿어 줄래?"강지혁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다음 한마디에 임유진은 하마터면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우리 결혼할까? 이러면 내 진심을 믿어 줄 수 있겠어?"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결혼?"결혼이라는 두 글자가 이토록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단어였나?"그래, 결혼."강지혁은 임유진이 잘 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 한 번 더 강조했다."난 이번 생에 누나 말고 다른 여자를 내 옆에 둘 생각 같은 거 없어. 그러니까 내 곁에는 평생 누나라는 여자만 있게 되겠지. 그래서 결혼하고 싶다는데 뭐가 잘못됐어?""하지만...""아니면 누나는 나랑 결혼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거야?"강지혁의 손가락이 임유진의 볼을 스쳤다. 임유진은 지금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부분은 뜨거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임유진이 어떻게
“응, 안 아파.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여자아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하겸은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서서히 힘을 풀고 여자아이의 품에 몸을 맡겼다.“세상에! 너 또 싸웠니? 애들 얼굴 좀 봐. 네가 이랬어? 미친 망아지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니?”새엄마인 정가연이 다가와 눈을 부라리며 하겸을 노려보았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머리가 아플 만도 했다.하승찬은 엄마가 오자 바로 상황을 일러바치며 하겸이 어떻게 다른 아이들을 때려눕혔는지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주었다.여자아이는 정가연의 한마디로 시작된 사람들의 질책에 품에 있는 남자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괜찮아. 누나가 지켜줄게. 무서워하지 마.”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얼른 두 아이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막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강지혁이 아이 둘을 데리고 다급하게 그녀 앞으로 뛰어왔다.“유진아,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아. 김재호를 찾았어.”“뭐?”임유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김재호를 찾았다고?!”“그래. 고 비서가 확인했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김재호를 찾았다는 건 세쌍둥이 중 나머지 한 아이의 행방을 드디어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임유진은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강지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빨리... 빨리 가자!”“그래, 알았어.”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내려 아이 둘을 바라보았다.“엄마랑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당장 가봐야 해. 놀이공원은 다음에 다시 데려와 줄게.”강선율은 의젓한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현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떼 한번 쓰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놀이공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후 현이는 많이 궁금했던 건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엄마, 김재호가 누구야? 중요한 사람이야?”“응... 엄청 중요한 사람이야.”임유진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답해
“흠... 그럼 내가 심심하지 않게 바로 옆에 붙어만 있어 주면 안 돼? 나도 저기서 놀고 싶단 말이야.”여자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설득 방법을 바꿨다.“알았어.”남자아이는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게 무색할 만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곁에 있을게.”‘누나’라는 말에 임유진은 또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눈빛만 닮은 게 아니라 조금 아련한 목소리로 ‘누나’라고 부르는 것까지 강지혁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여자아이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 아까 바이킹 줄에서 봤던 승찬이라는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형들을 데리고 다가왔다.승찬은 손가락으로 겸이란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옆에 있는 형들에게 말했다.“내가 말했던 애가 바로 쟤야. 쟤가 진짜 싸움을 잘하거든. 여태 지는 걸 못 봤어. 아마 형들이라도 상대가 안 될걸?”“하승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여자아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왜? 내 말 맞잖아. 하겸 싸움 잘하는 거 맞잖아.”하승찬은 피식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답했다.누가 봐도 일부러 형들을 도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아니나 다를까 하승찬과 함께 온 아이들은 담방이라도 하겸과 싸울 듯 거리를 좁혀왔다.여자아이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얼른 하겸을 제 뒤에 숨기고 큰소리로 외쳤다.“내 동생은 싸움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우리는 놀러 온 거지 싸움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러니까 저리 가! 계속 다가오면... 그때는 내가 혼내줄 거야!”용기는 가상했지만 수적으로나 힘적으로나 우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여자아이의 협박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하승찬이 데리고 온 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큰 남자아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자아이를 옆으로 밀어버렸다.여자아이는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머리는 바로 옆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임유진은 반응조
점심이 되고 임유진 일행은 놀이공원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현이와 율이는 노느라 에너지를 많이 써서 식욕이 도는지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아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 먹은 뒤에는 금방 다시 키즈 코너로 가 놀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 애들 데리고 놀고 있을게.”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래.”강지혁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들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이다.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만약 임유진이 그를 떠난 이유가 정말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어서인 거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의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나?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강지혁의 눈빛에 일말의 어둠이 스쳐 갔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낸 후 입구 쪽 벤치에 앉아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현이와 율이는 이제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 됐지만 제법 남매 느낌이 많이 났다. 두 아이 모두 서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키즈 코너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멈췄다.아까 바이킹 줄을 섰을 때 봤었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여자아이는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무릎을 살짝 구부려 앞에 있는 남자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남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무척이나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영양 불균형인지 얼굴이 조금 노랗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너무나도 조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지나치게 예쁜 얼굴이어서일까, 임유진은 아이의 얼굴을 꼭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우리 현이는 어쩜 기억력도 좋아... 하하.”임유진은 어색하게 웃더니 곧바로 율이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런데 율아, 정말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 적 없어?”“네, 아빠랑 같이 간 적은 없어요.”강선율의 대답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랑 같이 안 가줬어?”“도우미들이 함께 가줬어.”“같이 가주지. 그러다 율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걱정도 안 됐어?”임유진은 자기가 다 서운한 듯 강지혁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며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놀이공원 자체가 즐거운 곳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걸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안 잃어버려.”강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야...”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에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놀이공원 전체를 하루 대관한 거라 사람이라고는 아이 한 명과 직원들, 그리고 율이 곁을 지켜주는 도우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지혁은 10명의 경호원을 아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기도 했다.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전은 확보가 됐지만 그런 식의 놀이공원이라면 줄을 설 때의 미묘한 기대감도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느낄 수 없게 된다.“율아, 놀이공원 갔을 때 어땠어? 좋았어?”임유진이 물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이는 고개를 저었다.“재미없었어요.”재미있어 보이던 놀이 기구도 두어 번 타보니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놀이공원이 얼마나 재미있는데!”강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나랑 엄마는 엄청 자주 갔어.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대관람차도 타고. 그런데 매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 같은 건 두 번 밖에 못 탔어...”현이는 말을 하다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재밌다고?’강선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고이준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해졌다.“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나간 후 강지혁은 의자에 힘없이 기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살아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지는 웃음소리와 반대로 그의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맺혀 올랐다. 그리고 그 눈물은 매끈한 볼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는 임유진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녀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 또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그리고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 덕에 배웠던 후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까지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하고 고통으로 사뭇 쳤다. 자신만 입을 닫고 진실을 감춰버리면 그녀는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고배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세상에는 영원히 발각되지 않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또한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기억을 되찾은 강지혁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게 꼭 꿈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게 꼭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일까, 그날 밤 이후부터 그는 임유진이 깊은 수면에 든 후면 어김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곤 했다.마치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날 싫어하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제발...”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일 밤 그들의 침실에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주말.임유진과 강지혁은 강선율과 강선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놀이공원에 가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어느 날 현이가
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부름으로 사무실에 왔다가 벌써 10분째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의 눈빛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혹시 사모님과 다투신 건가? 아니면 또 두통 때문에...?’강지혁은 계속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내 곁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뭔지, 정말 몰라?”고이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철렁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진애령 사건 때문에 도저히 날 용서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내 곁을 떠난 거라고, 너나 한 집사나 두 사람 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네, 그랬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추측일 뿐입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사모님밖에 모르시니까요...”고이준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희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년 만에 돌아오시고 나서 진애령 씨 사건에 관해 얘기했을 때 사모님은 회장님을 다 용서했다고 하셨거든요.”“용서?”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조금만 살이 맞닿아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토까지 했는데 그게 과연 용서한 사람의 행동일까?용서했다고 한 말도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자신이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해외에 있는 요셉 선생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유진이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요셉은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로 특히 기억 관련해서는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회장님 설마...’“혹시 기억을 완전히 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강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의 기억은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돌아온 상태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세세한 기억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하지만 박 선생도 전에 말했다시피 갑자기 모든 기억을 다 찾으려고 하면 회장님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할 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