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어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는 게 좋을 거야."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두 눈은 집요하게 그녀를 쫓아다녔다."나와 연인이 되겠다고 한 건 누나니까 앞으로 연애는 나랑만 해야 해. 나도 누나밖에 없으니까."강지혁의 말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그녀를 천천히 감싸왔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대표이사실에서 점심을 먹은 후 시간을 확인하고는 황급히 정리하고 자리를 떴다. 대표이사실을 막 나왔을 때 그녀는 고이준과 마주쳤고 그는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임유진 씨, 안녕하세요. 이제 막 가시는 겁니까?""네.""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임유진은 엘리베이터에 탔고, 고이준 옆에 있던 회사 직원은 그녀를 뚫어지게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고 비서님, 저분은... 누구세요?"누가 봐도 임유진의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회사 직원은 더더욱 아닌 듯 보였다. 하지만 강지혁의 가장 측근인 고이준이 그녀에게 이토록 예의를 갖춰 인사했으니. 회사를 통털어 봐도 고이준이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러니 해당 직원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저 분은..."고이준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건드려서는 안 될 분이죠."임유진은 강지혁이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녀를 건드리는 사람들에게는 아마 다시는 내일이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임유진은 윤이 식당으로 돌아가서는 쉴 틈도 없이 또다시 배달을 가야 했다. 매번 강지혁이 많은 양의 배달을 시켜 GH그룹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올 때면 임유진은 출근 시간에 혼자 농땡이를 피우는 듯한 죄책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렇다고 강지혁의 주문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매일 오는 이런 대량의 주문은 가게 수입에 너무 큰 도움이 됐으니까."어? 언니는 아직 안 왔어요?"몇 개의 배달을 다녀와 봐도 여전히 탁유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항상 계산대를 지키고 있던 탁유미 자리에는 탁유미 엄마가 자리하고 있었다."윤이가 감기에 걸려서요. 근처 보건소에
"꼭 그럴 거예요. 그리고 언니 인생도 이제부터 시작인데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더 좋은 일만 벌어질지 누가 알아요."탁유미는 조금은 신기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 씨 뭔가 변한 것 같아요.""제가요?"임유진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네, 저희 가게에 처음 왔을 때 솔직히 유진 씨 억압받은 사람처럼 어두운 표정만 짓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면 그때 생각이 전혀 안 들 정도로 미래가 기대되는 사람처럼 보여요."탁유미가 보기 좋다는 듯 웃었다.미래가 기대되는 사람 같다고...? 임유진은 그 말에 멈칫했다. 한지영이 그녀의 사건을 열심히 알아보고 있어 줘서 그런가? 아니면... 강지혁과의 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생겨서 그런 걸까?저녁, 임유진이 퇴근하고 윤이 식당에서 나오자 가게 근처에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바로 강지혁의 차였다. 임유진이 그쪽으로 걸어가자 차 문이 열렸고 뒷좌석에 앉아 있던 강지혁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타.""나 스쿠터 타고 가야 해. 아니면 내일 아침 여기로 올 때 너무 불편해."강지혁의 저택 근처는 모두 강씨 일가의 땅이었기에 버스정류장까지 가려면 꽤 시간이 걸려야 했다.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이 웃었다."내일 아침도 내가 데려다주면 되지."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대로 뒷좌석에 태웠다.임유진은 고작 80만 원을 벌면서 굳이 페라리로 출퇴근을 하게 된 상황에 마치 자신이 서민들 세상을 구경하러 일부러 아르바이트하는 부잣집 아가씨가 된 기분이었다."언제 왔어?"임유진은 조용한 분위기에 어색했는지 아무 화제나 던졌다. 강지혁과 연인이 됐다고는 하나 뭔지 모르게 그랑 있으면 어쩔 줄 모르겠는 임유진이었다."아마 6시 반쯤?"강지혁의 태연한 말에 임유진은 깜짝 놀랐다. 6시 반이라니. 현재 시각이 9시인데, 그러면 밖에서 2시간 반을 이러고 있었다는 거잖아?"계속 여기서 나 기다린 거야?"임유진이 놀라 물었다."응."강지혁은 대답한 후 임유진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며 비
뼈아픈 경험 때문에 임유진은 더더욱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생활을 꺼리는 걸지도 모른다. 또 한 번 기댈 곳을 잃어버리면 그때는 임유진의 정신력이 드디어 버티지 못하게 될 거니까.강지혁은 그녀를 꿰뚫어 보듯 보다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은 거면 그렇게 해. 하지만 언제든 다른 일을 하고 싶으면 제일 먼저 나한테 얘기해 줘.""응, 알겠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참, 여기서 계속 나 기다린 거면 저녁은?"임유진이 물었다."아직 안 먹었어.""가게로 들어와서 먹지 그랬어!"작은 가게이긴 했지만, 종류가 다양해 선택범위가 넓었다. 임유진은 가게의 음식이 강지혁의 입맛에 안 맞을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은 듯싶다. 전에 강지혁과 셋방에서 살았을 때 아무리 조촐한 식사여도 강지혁이 싫은 티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그럼 다음에는 가게로 들어갈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자신이 괜한 소리를 한 건 아닌가 싶었다. 강지혁이 가게로 들어가면 아마 분위기가 달라질 테니까.어느새 두 사람은 강씨 저택에 도착했고 안으로 들어가자 저택에 있는 요리사가 강지혁을 위해 저녁을 준비해 두었다. 임유진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식사하게 됐다.식사하면서 임유진은 가게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 배달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었다. 피크타임인 점심과 저녁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내가 휴가를 쓰겠다고 하면 언니는 아무 말 없이 허락해줘. 정말 고마운 분이지. 내 과거를 듣고도 나를 채용한 것부터가 너무 좋은 사람이야, 언니는."임유진은 말을 끝내고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왜 그래? 사건이라도 떠오른 거야?"강지혁이 바로 그녀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고 물었다."그 사건 내가 알아봐 줄까?""지영이가 증거를 찾고 있으니까 아직은 괜찮아."임유진은 수저를 내려놓고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진지하게 물었다."나 정말 음주운전 한 거 아니고
임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줄곧 마음속에 있던 어두운 장막이 걷힌 것처럼 좋아했다. 강지혁이 자신을 믿는다는 소리에 이렇게나 기뻐하게 될 줄 몰랐다.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말했다."단, 누나도 나를 믿어줘. 내가 누나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누나를 이렇게나 사랑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난 절대 누나가 그런 고통을 받게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라고."그의 말에 임유진은 눈을 깜빡였다. 강지혁은 지금 그녀가 도움 하나 받지 못하게 주변에 압박을 넣어 그녀를 감방에 보내버린 일을 말하는 것일까?"응."임유진은 가볍게 대답했다. 과거에 두 사람 사이가 어떻든 강지혁과 잘 지내보려고 결심을 한 이상 그를 향한 공포감과 두려움, 그리고 미움까지도 서서히 내려놔야 한다고 생각했다.식사를 끝마친 후 임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강지혁을 향해 물었다."너 혹시 인공와우 전문가 중에 아는 사람 있어?""그건 왜?"강지혁이 뜬금없는 임유진의 말에 되물었다."그게 언니 아들인 윤이가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인공와우를 착용하게 될지도 모르거든. 그래서 미리 그쪽 전문가를 알아두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언니의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현재 제일 저렴한 모델밖에 구할 수가 없어. 그래서 혹시 가능하면 윤이에게 조금만 더 좋은 모델로 바꿔줄 수 있을까 해서."임유진은 조금은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인터넷에서 알아본 바로는 인공와우 좋은 모델과 제일 저렴한 모델의 가격 차이가 꽤 컸다. 그리고 탁유미가 생각하는 가격에 따르면 아마 윤이에게는 일단 한쪽만 착용하게 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기왕이면 두 개를 다 착용하는 것이 효과도 더 좋을 것이다."누나가 다른 사람 때문에 나한테 부탁을 다 하네. 자기 일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강지혁이 웃으며 말했다."윤이한테는 나조차도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신경을 많이 쓰게 돼. 윤이가 지금은 소리 내 말을 못 하지만 인공와우만 착용하게 되면 윤이도 평범한 아이들처럼 자랄 수 있을
강지혁은 강씨 가문을 이어갈 사람이고 앞으로 그의 자식이 그의 뒤를 잇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임유진이 어떻게 자신 하나 때문에 강지혁에게 대를 끊으란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이제 이런 중요한 일도 까먹고 덥석 그와 사귀겠다는 말을 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이런 사이를 얼마나 더 지속할 수 있을까?심지어 그녀가 변호사로 있었을 때 처리했던 사건을 보면 부잣집일수록 자식을 향한 집착이 더 컸었다."그게 무슨 말이야?"강지혁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묻자 임유진이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때... 자... 자궁 쪽을 심하게 맞게 된 적이 있었어. 다행히 빨리 병원에 이송이 됐는데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라고. 다친 곳이 심하게 손상을 입어서 앞으로 임신은 어려울 거라고..."이건 임유진이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런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그것도 강지혁 앞에서 그녀는 이 말을 입에 올렸다.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갔다.심하게 맞았다고? 누가 때렸는데? 언제? 설마 감옥에 있었을 때? 그럼 그때 대체 얼마나 아팠다는 거야?!임유진이 겪었던 고통 하나하나가 강지혁을 무겁게 짓눌렀고 그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의 모든 고통이 현재 고스란히 강지혁의 후회로 바뀌고 있었다.만약 그때 당시 강지혁이 임유진에게 조금이라도 자비를 베풀었더라면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다뤄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혹시... 혹시 지금이라도 헤어지고 싶은 거면, 나는..."강지혁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내가 말했지. 헤어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강지혁은 말이 끝나자마자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아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아!"임유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강지혁의 칠흑 같은 어두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내가 원하는 사람은 누나뿐이고, 제일 사랑하는 사람도 누나뿐이야. 아이를 가질 수 없다 해도 상관없어. 난 누나를 놓치지
임유진을 사랑하고 나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어떤 일은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러니까 이번 생에서 누나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강지혁은 말을 마치고 천천히 그녀에게 키스했다. 부드럽게 감싸오는 그의 입술에 그녀는 반항할 의지조차 없었다.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 정말 가능한 걸까?...강지혁과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애는 임유진이 전에 상상도 못 해본 일이지만 불편하거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셋방에서 그와 지냈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어 좋기도 했다. 그리고 마치 ‘혁이’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강지혁에 임유진은 그의 앞에서는 자신의 마음의 짐과 아픔, 상처 이 모든 것들을 다 꺼내 보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정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탁유미의 통화 소리에 임유진이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침착한 얼굴이던 탁유미였는데 지금은 무슨 일인지 잔뜩 흥분해서는 눈가도 약간 촉촉해진 것 같았다."언니, 무슨 일이에요?"임유진이 묻자 탁유미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이번에 병원에서 가정환경이 어려운 청각장애 아이들을 대상으로 헬프 플랜이라는 걸 기획했대요. 그래서 방금 전화 왔는데 우리 윤이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거예요! 그리고 인공와우 전문 의사 선생님은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는데 전에는 예약도 매번 실패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헬프 플랜에서 그 전문가 선생님이 우리 윤이를 봐준대요. 또 윤이가 면제조건에 해당이 되면 저렴한 인공와우를 제일 좋은 거로 바꿔줄 수도 있고요!"탁유미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좋은 일이 자신에게 차려질 줄은 몰랐으니까.임유진은 그 말을 듣고 단번에 강지혁이 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탁유미의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임유진은 윤이는 앞으로 더 좋은 치료를 받게 될 거고 꼭 선천적인 아픔을 이겨내고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
강지혁은 빨갛게 달아오른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재밌다는 듯 웃었다."맞다. 누나 토요일 오후는 휴식이라고 했지?""응, 왜?"임유진이 대답했다."그럼 토요일 오후 누나 건강검진 받으러 갈 거니까 시간 비워 둬.""건강검진?"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건강검진 안 받은 지 몇 년 되지 않았어? 그러니까 토요일에 한 번 받으라고. 그리고 앞으로는 1년에 한 번씩 계속 받게 될 거야."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고개를 끄덕였다."알겠어."로펌에서 근무할 때는 건강검진을 1년에 한 번은 꼭 받았었는데 감옥에 들어간 이후로는 거의 4년 동안 받은 적이 없으니 지금쯤 한 번 받아보는 것도 좋았다.저녁, 임유진이 막 잠자리에 들려고 침대에 눕자 강지혁이 다가와서는 그녀와 같이 자겠다고 했다. 그에 놀란 임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여, 여기서 같이?""뭐, 문제 있어? 셋방에서 살았을 때는 한 침대에서 잘만 잤었잖아."강지혁은 전혀 문제없다는 듯 당당하게 말했다.‘그때와 지금이 어떻게 같냐고?!’그때의 임유진은 그저 그를 귀여운 동생 정도로만 생각했었고 지금은 동생이 아니라 남자친구잖아!임유진은 볼을 살짝 물들이며 강지혁에게 말했다."나는... 혼자 자는 게 편해.""거짓말. 그때는 내가 옆에 있어 주면 안심되고 좋다며?"임유진의 거짓말은 단번에 들켰고 그녀는 과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그런 말은 내뱉은 자신의 입을 닫아버리고 싶었다.임유진은 어쩔 줄 몰라 하다가 또다시 핑계를 댔다."우리... 우리 지금 사귄 지도 얼마 안 됐고, 그러니까... 그러니까 역시..."그 말에 강지혁이 못 참고 웃음을 터트렸다."걱정하지마 아무 짓도 안 할 거니까."강지혁은 몸을 숙이고는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 댔다. 그에 임유진의 얼굴은 곧 터질 것처럼 빨갛게 달아올랐고 목구멍에 뭐가 막힌 듯 말도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강지혁은 손끝으로 천천히 그녀의 볼을 매만지며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임유진은 끝내 거절하지 못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강지혁과 같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짧게 내쉬며 전에도 같이 잔 적이 있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강지혁이 옆에 누워있다는 게 의식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고 그녀는 한참을 뒤척이다가 결국에는 아무 화제나 던졌다."그런데 너는 왜 계속 누나라고 부르는 거야?""이렇게 부르는 게 싫어?"강지혁의 반문에 그녀는 잠깐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그건 아닌데, 뭐랄까... 음, 연인 사이에 이렇게 부르는 게 좀 이상해."‘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진짜 내가 누나인 줄 알 거 아니야...’하지만 어느샌가 그녀도 이 호칭이 익숙해진 듯 보였다. 강지혁이 처음부터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으니까."그럼, 사람들 앞에서는 유진이라고 부를까? 둘이 있을 때만 누나라고 부를게."누나라는 호칭을 버리지 않으려는 강지혁에 임유진이 말했다."너 누나라고 하는 거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응 맞아."강지혁이 순순히 인정했다."처음이었거든, 누나라고 부르라고 한 사람이."임유진이 강지혁 쪽을 바라보았다."누나라고 부르면 우리가 절대 끊을 수 없는 견고한 무언가에 의해 연결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임유진은 대체 그가 말하는 견고한 무언가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지혁은 그 이상을 설명할 생각은 없었는지 대화를 끝내려고 했다."이제 자."임유진은 알겠다고 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녀는 침대 옆에 켜진 작은 스탠드 불빛을 끌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강지혁은 스탠드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셋방에서 살았을 때도 임유진은 불을 켜야만 잠이 들었고 불이 꺼지면 안 좋은 기억들이 되살아나 무섭다고 했었다.강지혁도 그 안 좋은 기억들이 감옥에서 지내면서 겪었던 일들이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하지만 한동안 임유진도 불을 끄고도 잘 수 있었는데 이유를 물었더니 ‘혁이 네가 옆에 있으니까 무서운 것도 사라졌어’ 라고 대답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