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끝내 거절하지 못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강지혁과 같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짧게 내쉬며 전에도 같이 잔 적이 있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강지혁이 옆에 누워있다는 게 의식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고 그녀는 한참을 뒤척이다가 결국에는 아무 화제나 던졌다."그런데 너는 왜 계속 누나라고 부르는 거야?""이렇게 부르는 게 싫어?"강지혁의 반문에 그녀는 잠깐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그건 아닌데, 뭐랄까... 음, 연인 사이에 이렇게 부르는 게 좀 이상해."‘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진짜 내가 누나인 줄 알 거 아니야...’하지만 어느샌가 그녀도 이 호칭이 익숙해진 듯 보였다. 강지혁이 처음부터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으니까."그럼, 사람들 앞에서는 유진이라고 부를까? 둘이 있을 때만 누나라고 부를게."누나라는 호칭을 버리지 않으려는 강지혁에 임유진이 말했다."너 누나라고 하는 거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응 맞아."강지혁이 순순히 인정했다."처음이었거든, 누나라고 부르라고 한 사람이."임유진이 강지혁 쪽을 바라보았다."누나라고 부르면 우리가 절대 끊을 수 없는 견고한 무언가에 의해 연결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임유진은 대체 그가 말하는 견고한 무언가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지혁은 그 이상을 설명할 생각은 없었는지 대화를 끝내려고 했다."이제 자."임유진은 알겠다고 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녀는 침대 옆에 켜진 작은 스탠드 불빛을 끌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강지혁은 스탠드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셋방에서 살았을 때도 임유진은 불을 켜야만 잠이 들었고 불이 꺼지면 안 좋은 기억들이 되살아나 무섭다고 했었다.강지혁도 그 안 좋은 기억들이 감옥에서 지내면서 겪었던 일들이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하지만 한동안 임유진도 불을 끄고도 잘 수 있었는데 이유를 물었더니 ‘혁이 네가 옆에 있으니까 무서운 것도 사라졌어’ 라고 대답했었다.
간밤에 임유진은 강지혁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눈을 감은 뒤로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마치 강지혁이 있어서 안심하고 잘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다음 날, 임유진이 일어나보니 강지혁이 흰 셔츠에 손목 단추를 채우며 그녀에게 다가왔다."깼어?""응."임유진은 자신이 아직 씻지도 않는 얼굴에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다는 걸 인지했는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잘 잤어? 난 되게 잘 잤는데."강지혁은 몸을 숙여 양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갔다.공중에서 시선이 얽히자 임유진은 어쩔 줄을 몰라 몸을 뒤로하며 둘 사이의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강지혁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 다시 앞으로 끌고 왔고 인제 두 사람의 거리는 더 가까이 좁혀졌다."잘 못 잤어?"강지혁은 그녀의 대답을 요구했다."아, 아니."임유진은 버벅대며 대답했다."그럼 됐어."강지혁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의 볼에 뽀뽀하고 말했다."씻고 아침 먹게 내려와.""응."임유진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욕실로 들어가 씻은 후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강지혁은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는지 수저에 손도 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강씨 저택 아침은 한식뿐만 아니라 양식도 있었다."뭐 먹을래?"강지혁이 물었다."나는 호박죽."임유진의 말에 사용인이 호박죽과 샌드위치를 그녀의 앞에 대령했다.임유진은 밥을 먹다 잠깐 고개를 들었고 마침 강지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왜?""그냥,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강지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입가에 묻은 호박죽을 쓱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손을 다시 가져가 손가락에 묻은 호박죽을 자신의 입안에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진의 얼굴이 또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고는 요즘 따라 얼굴이 붉어지는 빈도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남자의 이러한 행동이 이렇게까지 야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도 처
이제는 또 다른 남자가 자신에게 넥타이를 매달라고 한다. 이 남자와는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두 사람의 마음이 같다고 해도, 강지혁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신의 몸을 개의치 않아 해도 임유진은 두 사람 사이의 미래가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아니,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두 사람은 다른 세계 사람이었고 지금은 서로 연인이라고 해도 과연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왜 그래?"강지혁의 말이 그녀를 잡념에서 끄집어냈다."아니야. 좀... 숙여 봐."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순순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임유진은 먼저 셔츠의 카라를 세운 후 넥타이를 그의 목에 두르고 매기 시작했다."그거 알아? 나 지금 내 목숨줄을 누나한테 쥐여준 거."강지혁의 낮은 목소리가 임유진의 귓가에서 울려 퍼졌고 그녀는 손을 멈추며 강지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내 목숨을 원한다면 누나는 지금 손에 든 넥타이를 꽉 조이면 돼."강지혁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내 넥타이를 맬 수 있는 여자는 평생 누나밖에 없어."임유진은 가게로 출근을 해서도 아까 강지혁이 지었던 미소와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자신의 넥타이를 맬 수 있는 여자는 평생 임유진밖에 없다는 말이 진짜 실현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강지혁은 그녀에게 진심이라는 것이다. 또한, 미래를 상상조차 못 하는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두 사람의 미래를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오후 1시, 가게에 주문이 하나 들어왔는데 20인분이라는 큰 주문이었다. 근처는 아니었고 갔다 왔다 하면 대충 40분 정도가 소요됐다.임유진이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거기는 촬영 현장이었고 20인분은 여기 있는 스태프들이 주문한 듯 보였다. 그리고 마침 촬영팀도 휴식시간이었는지 여기저기서 식사하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 스태프는 적당한 곳에 앉아 밥을 먹었고 배우들은 따로 휴식룸에 들어가 식사했다.임유진이 배달음식을 내려놓고 막 촬영
아니나 다를까, 상대방이 이어서 하는 말이 그녀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저희도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진 않으니까 이 20인분의 음식값은 다시 환불해 주시고 추가로 100만 원을 배상해 주세요. 지금 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나머지 도시락에도 벌레가 들어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안 그래요?"그때 자리에 앉아 있던 몇 명이 일어서더니 임유진을 둘러쌌고 그들은 그녀를 머릿수로 압박하려는 듯 보였다.임유진은 빠르게 주위를 스캔했다. 이곳은 제작팀이 촬영을 위해 빌린 반은 뚫려있는 작은 카페였다. 임유진이 서 있는 왼쪽에 CCTV가 있긴 했지만 촬영하는 날까지 켜져 있는지는 불확실한 상황이었다.그리고 카페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는 팬들을 제지하려고 만들어둔 펜스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바닥에 앉아 휴식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자신의 연예인이 나오는 순간을 캐치하려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이렇게 하죠. 이런 건 일개 배달원인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요. 제가 사장님에게 연락해 볼게요."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전화를 걸어 이 상황을 대충 설명했다. 탁유미는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알겠어요. 유진 씨는 일단 돌아오세요. 그쪽에서 내민 요구는 오늘 영업을 마치고 내가 다시 얘기해볼게요."임유진은 스피커폰으로 통화한 게 아니라서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탁유미가 어떤 말을 했는지 들을 수가 없었다."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그들 몰래 핸드폰 녹음 버튼을 켜두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들 쪽을 바라보았다."뭐래요? 돈은 언제쯤 줄 수 있대요?"주동자로 보이는 사람이 물었다. 그러자 임유진이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100만 원이면 소액사기를 넘어선 건 아시죠? 재판까지 가면 3년 이하의 징역을 살게 될 수도 있어요."그러자 임유진을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돌변했다."뭐? 내가 지금 사기를 치고 있다는 말이야?""맞는지 아닌지는 증거가 설명해주겠죠. 저기 보이
임유진은 탁유미가 어렵게 차린 이 가게를 이런 사람들이 망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녀의 몸속 뿌리 깊이 박혀있는 ‘정의감’이 이런 상황을 그냥 지나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애초에 변호사가 된 것도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였으니까.그 말에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렇게 일단락된 듯하여 임유진이 그만 자리를 뜨려고 할 때, 갑자기 그중 한 사람이 그녀의 팔을 거세게 잡아당겼고 그로 인해 그녀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그때 누군가가 임유진 핸드폰 화면을 보고 말았고 임유진은 녹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켜버렸다."형님, 이 여자 녹음하고 있었어요!""와, 이 미친X이 우리 몰래 이런 수작질을 하고 있었어?"그중 한 명이 화가 잔뜩 났는지 욕을 해대며 임유진에게 손을 올리려고 했다. 그 남자는 이곳이 다 뚫려있는 곳이고 주위에는 연예인과 그의 팬들이 있다는 걸 까먹은 듯했다.임유진은 눈을 꽉 감은 채 가드를 올려 남자의 공격을 방어하려고 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의 감탄사가 흘러나왔다.임유진이 기다렸던 공격은 들어오지 않았고 대신 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그녀를 조금은 차가운 듯한 품속으로 데려갔다.임유진이 눈을 떠보니 거기에는 한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있었고 항상 담담했던 그의 얼굴에 지금은 일말의 분노가 서려 있었다."이게 뭐 하는 짓이지?"강현수는 한 손으로 임유진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를 때리려고 했던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임유진을 때리려고 했던 남자는 손목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고통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눈앞에 있는 강현수라는 남자였다.연예계의 황태자!‘설마... 이 여자 배달원의 편을 들려는 건가?’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머지 사람들은 얼른 강현수의 옆으로 다가가서 다급하게 해명했다."이 여자가 배달한 음식에 벌레가 있었어요. 그런데 말하다 보니까 감정이
"어떻게 된 일이에요?"강현수는 아까 다른 사람이 얘기했음에도 임유진 말만 믿겠다는 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오늘 이곳에 도시락 배달을 하러 왔어요. 그런데 음식에서 벌레가 나왔다면서 오늘 밥값을 전부 환불해 달라고, 거기에 더해 100만 원까지 배상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일은 경찰에 맡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아까 몰래 녹음하고 있는 걸 들켜서 이런 사태에 이르게 됐어요."임유진은 침착하게 상황을 서술했다."녹음이요? 괜찮다면 저도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일당은 강현수가 녹음 내용을 듣겠다고 하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스태프 중 몇 명이 돈을 뜯어낼 목적으로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강현수 뒤에 있던 감독들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깨닫고 하나같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만약 이 사실이 인터넷에 올라가기라도 하면 욕을 먹게 되는 건 전체 제작팀이었다. 감독들은 일단 말썽을 일으킨 장본인들을 이따가 처리하기로 하고 지금은 임유진에게 사과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아가씨, 이건 전적으로 저희 제작팀 실수입니다. 아무리 임시 아르바이트생이라고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저희가 제대로 관리했어야 했는데. 제가 제작팀 전체를 대표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원하시면 피해보상도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아니요. 피해보상은 됐습니다. 다만 혹시나 저 사람들이 앙심을 품고 저희 가게에 보복하는 일은 없게 해주셨으면 좋겠네요."임유진은 사건을 괜히 공론화 해봤자 윤이 식당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이렇게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이 서로에게 제일 좋은 선택이었다."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죠!"감독들은 임유진에게 약속하고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마음에 드나 싶어 강현수의 눈치를 봤다.임유진은 드디어 사건이 해결되자 이곳을 떠나려고 몸을 돌렸다. 너무 오랜 시간을 이곳에 소비했고 지금쯤이면 가게에 그녀가 배달해야 할 주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이 황태자는 예전에 모든 계층의 여자친구를 다 만나봤었다. 물론 그녀들의 결말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기 마련이다.하지만 어찌 됐든 여전히 수많은 여자들이 강현수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다.심지어 누군가는 인터넷에서 설사 강현수가 황태자가 아니더라도, 빈털터리가 될지언정 평생 그와 함께하겠다고 한다. 그러게 누가 이토록 잘생기라고 했냐고!지금 이 순간, 강현수가 몸을 쪼그리고 앉아 한 여자를 위해 신발 끈을 묶어주는 모습에 주위 공기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놀라움에 숨을 몰아쉬는 소리 말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신발 끈을 다 묶은 후에야 강현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고마워요.”임유진은 살짝 어색한 듯 말하곤 머리를 푹 숙인 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시각 촬영장 커피숍에서 임유라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이 장면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정성껏 다듬은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왜... 임유진이 대체 왜 또 강현수 앞에 나타난 걸까? 게다가 강현수는 선뜻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이건 마치 임유진을 섬기는 거나 다름없었다!임유라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질투가 활활 차올랐다.‘임유진이 바로 현수 씨가 찾고 있는 그 소녀란 사실을 절대 알려선 안 돼! 난 현수 씨를 잃을 수 없어.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한편 밖에서 임유진이 떠난 후 강현수는 입술을 앙다물고는 옆에 있는 감독과 스텝들을 힐긋 쳐다봤다.“이런 일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네요. 이 사람들 오늘부로 제작팀에서 해고해요.”그의 말이 떨어진 순간, 앞서 돈을 뜯어내려던 그 사람들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당장이라도 실랑이를 벌일 것만 같았다.하지만 강현수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한 순간 금세 겁에 질렸다.“유진 씨가 이번 일을 크게 키우고 싶어하지 않으니 소원대로 해 줘야죠. 다들 유진 씨한테 고마워해야 해요. 앞으로 두 번 다시 유진 씨를 찾아가서 소란 피우면 당신들 평생 감방에서 보낼 줄 알아요!”어두
“아니요, 그냥 제작팀에서 마침... 아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일을 해결해줬어요.”임유진이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유진 씨 친구분이요? 그럼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나중에 선물 사 올 테니 유진 씨가 대신 친구분께 드릴래요?”탁유미가 말했다.“괜찮아요.”임유진은 대답을 마치고 재빨리 화제를 돌려 윤이의 인공와우에 관해 물었다.“이틀 뒤면 병원 쪽에서 윤이의 건강검진 결과서가 나올 게예요. 그때 아무 문제 없으면 바로 인공와우를 착용할 수 있어요.”탁유미는 말하면서 얼굴에 희열을 금치 못했다.“병원 측에서 내 형편이 어려우니 비용을 일부 감면 신청할 수 있대요.”“정말 잘됐네요.”임유진이 말했다. 병원 측은 강지혁이 말을 꺼낸 덕분에 비용을 감면하는 게 틀림없다. 윤이가 이제 곧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임유진도 매우 기뻤다.점심 배달 사건은 작은 에피소드처럼 지나가 버리는 듯했지만 저녁 무렵, 임유진이 배달을 마치고 가게에 돌아오자 탁유미가 그녀를 붙잡고 물었다.“오늘 우리 가게를 도와 공갈 사건을 해결한 사람이 강현수 씨인가요?”임유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질문에 화들짝 놀라서 탁유미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가 대체 어떻게 이 일을 알게 된 걸까?탁유미는 임유진의 반응을 살피더니 전부 사실이란 걸 알아챘다.“방금 가게에서 식사하던 손님이 오늘 점심 유진 씨가 배달 나갔다가 돈 뜯어내려던 사람들과 다투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더라고요. 뒤에 강현수 씨도 나오던데 나한테도 보여줬어요.”탁유미가 말하면서 살짝 의심 섞인 눈초리로 임유진을 쳐다봤다.비록 전에 강현수가 가게로 찾아와 임유진을 기다릴 때부터 둘 사이를 의심했지만 오늘 영상에서 강현수가 무릎 꿇고 그녀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장면에 여전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녀의 인상 속에서 강현수는 차갑고 매정한 사람이라 여자친구도 수없이 바꿔가며 무자비함을 한껏 드러내는 사람이었다.만났던 여자친구마다 전부 ‘살갑게’ 대해준다고는 하지만 고작 금전적인 방면이나 후원
김재호의 말대로 강지혁은 지금 두려워하고 있다.물론 아이도 너무 중요하지만 임유진이 아이보다 몇 배는 더 중요했으니까.만약 임유진이 또다시 사라져버린다면 그때는 정말 삶의 이유를 완전히 잃어버릴지도 모른다.강지혁은 힘겹게 고개를 돌리고는 세 걸음 정도 떨어진 곳에 있는 그녀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의 얼굴도 강지혁 못지않게 하얗게 질려있었고 두 눈은 지진이라도 난 듯이 흔들리고 있었다.“유진아, 안 돼... 내가, 내가 어떻게 해서든지 찾아낼게. 그러니까... 그러니까 김재호가 아닌 날 믿어줘. 제발... 부탁이야...”초조함으로 덜덜 떨리고 있는 입술과 금방이라도 부서질 것 같은 얼굴, 임유진은 마치 심장을 누군가가 난도질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다시는 강지혁이 이런 표정을 짓게 하지 않겠다고 다짐했는데 또다시 그를 불안하게 하고야 말았다.임유진은 숨을 한번 깊게 들이켜고는 강지혁을 향해 말했다.“응, 널 믿을게.”그녀의 말이 떨어진 순간 강지혁의 두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흘러나왔다.김재호는 임유진의 말에 빈정거리며 웃었다.“역시 임유진 씨도 이기적인 사람이었네요. 아이를 위해서라면 뭐든지 다 할 것처럼 굴더니 지금의 생활을 포기하지 못하겠나 보죠?”임유진은 앞으로 걸어가 강지혁의 얼굴을 손으로 감쌌다. 그러고는 조심스럽게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혁아, 울지 마. 나는 네가 울면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그녀는 강지혁의 예쁜 눈에서 눈물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질 때마다 심장이 찌릿하고 아파 났다.그래서 한시라도 빨리 이 눈물을 멈추게 하고 강지혁이 더 이상 불안해하고 무서워하지 않게 해주고 싶었다.강지혁은 김재호의 멱살을 스르르 놓고는 임유진의 손을 잡았다.“내 곁을 떠나지 않겠다고 약속해...”“약속할게. 난 네 곁을 떠나지 않아.”임유진이 단호하게 대답했다.김재호는 그 말에 코웃음을 치며 또다시 비아냥거렸다.“아이의 생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나 보네요. 엄마가 돼서.”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물을 어느 정도 닦아준 후
“저는 어르신께 은혜를 입은 몸입니다. 이제 이 세상 분이 아니라고 해도 저는 기꺼이 그분의 충견으로 남을 겁니다.”김재호가 단호하게 말했다.“그럼 질문을 바꾸지. 대체 5년 전에 무슨 일이 있었길래 유진이가 사라진 뒤에 네가 아이를 데려온 거지? 너는 우리 둘 사이에서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네가 움직인 건 전부 다 노인네 지시인 건가?”강지혁이 손에 힘을 가하며 그를 압박했다.김재호는 목이 서서히 졸려오는데도 여전히 아무런 표정 변화도 없었다. 그저 시선을 고정한 채 강지혁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강지혁이 지금 이런 질문을 한다는 건 당시 최면으로 봉인됐던 기억이 아직 완전히 돌아온 건 아니라는 소리나 마찬가지다.기억이 모두 회복됐으면 애초에 이런 질문은 하지도 않을 테니까.임유진 역시 다시 강지혁 곁으로 돌아온 걸 보면 어느 정도 기억을 회복한 것으로 보인다. 전부 다 회복한 건 아닐 테지만 아마 사라진 그 날의 기억은 고이준을 통해 어느 정도 알게 됐을 수 있다.하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걸 보면 그 사실을 강지혁에게는 얘기해주지 않았다는 뜻이다. 이유는 강지혁의 멘탈이 완전히 부서질까 봐.김재호는 강지혁의 말로 아주 많은 것을 파악했다.그는 강지혁의 최면에 직접 개입한 사람이기에 강제로 기억을 자극하는 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 누구보다 잘 알고 있다.절벽에서의 일을 강지혁 스스로가 기억해낸 게 아니면 얘기조차 꺼내지 말라고 고이준에게 신신당부했던 것도 다 이유 때문이다.‘당부한 대로 그간 아주 잘 지키고 있었나 보네.’“제가 무엇을 했는지 정말 알고 싶으세요?”김재호의 입꼬리가 미세하게 위로 올라갔다.임유진은 그 말에 뭔가 떠오른 듯 다급하게 외쳤다.“안 돼!”그녀의 외침에 강지혁과 김재호의 고개가 그녀 쪽으로 돌아갔다.강지혁은 의혹 가득한 눈빛으로 그녀를 보고 있었고 김재호는 예상했다는 듯한 태연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보았다.“널 속이기 위해 거짓말을 할 수도 있어.”“제가
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의 손을 꽉 잡으며 말했다.“너무 걱정하지 마. 무슨 수를 써서라도 꼭 아이의 행방을 알아내고 말 테니까.”“응.”두 사람은 어딘가 결연한 얼굴로 빠르게 안으로 들어갔다.방 안에는 경호원 세 명과 중년남성 한 명이 있었다.임유진은 몇 초과량 흐르고 나서야 그 중년남성이 바로 김재호라는 것을 알아챘다. 5년이나 지나 있어 그런지 그는 그녀의 기억 속 모습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주름은 그다지 많지 않았지만 전과 달리 흰머리도 나고 수염도 생겼으며 못 보던 안경까지 쓰고 있었다. 겉모습은 영락없는 일반 시민이었다.만약 이렇게 보는 것이 아닌 길거리에서 스치듯 만났다면 아마 김재호인 걸 인지도 못 하고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김재호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조금 놀란 듯 흠칫했다. 하지만 이내 다시 태연하게 미소를 띄웠다.“역시 회장님 곁으로 돌아오셨네요.”임유진은 천천히 자리에 멈춰서며 답했다.“네, 돌아왔어요.”5년이라는 시간 끝에 그녀는 드디어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왔다.“나가봐.”강지혁의 말에 경호원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전부 방에서 나갔다.“아이는 어디 있지?”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물었다.“아이라면 보내드렸잖아요. 한 명은 회장님 곁으로, 그리고 또 한 명은 임유진 씨 곁으로.”“내가 어떤 아이를 얘기하는지 잘 알고 있을 텐데? 유진이 배 속에 있었던 건 세쌍둥이였어. 우리한테 한 명씩 보냈으면 나머지 한 명 또한 당연히 있어야지.”“회장님, 세쌍둥이 중에 두 명이나 생존했는데 그거로는 만족이 안 되세요? 실제로 세쌍둥이 중에 세 명 다 태어나는 경우는 적어요.”김재호의 빈정거림에 임유진은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느낌이 들었다.“우리 아이... 살아있는 거죠? 그렇죠?”임유진의 눈가는 어느새 빨개져 있었다. 솟구쳐오르는 감정을 간신히 억누르고 있는 듯했다.설령 김재호의 입에서 나오는 말이 원하는 대답이 아니라 하더라도 그녀는 엄마로서 아이의 행방을 들어야만 했다.하지만 김재호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런
“응, 안 아파.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여자아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하겸은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서서히 힘을 풀고 여자아이의 품에 몸을 맡겼다.“세상에! 너 또 싸웠니? 애들 얼굴 좀 봐. 네가 이랬어? 미친 망아지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니?”새엄마인 정가연이 다가와 눈을 부라리며 하겸을 노려보았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머리가 아플 만도 했다.하승찬은 엄마가 오자 바로 상황을 일러바치며 하겸이 어떻게 다른 아이들을 때려눕혔는지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주었다.여자아이는 정가연의 한마디로 시작된 사람들의 질책에 품에 있는 남자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괜찮아. 누나가 지켜줄게. 무서워하지 마.”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얼른 두 아이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막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강지혁이 아이 둘을 데리고 다급하게 그녀 앞으로 뛰어왔다.“유진아,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아. 김재호를 찾았어.”“뭐?”임유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김재호를 찾았다고?!”“그래. 고 비서가 확인했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김재호를 찾았다는 건 세쌍둥이 중 나머지 한 아이의 행방을 드디어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임유진은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강지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빨리... 빨리 가자!”“그래, 알았어.”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내려 아이 둘을 바라보았다.“엄마랑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당장 가봐야 해. 놀이공원은 다음에 다시 데려와 줄게.”강선율은 의젓한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현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떼 한번 쓰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놀이공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후 현이는 많이 궁금했던 건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엄마, 김재호가 누구야? 중요한 사람이야?”“응... 엄청 중요한 사람이야.”임유진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답해
“흠... 그럼 내가 심심하지 않게 바로 옆에 붙어만 있어 주면 안 돼? 나도 저기서 놀고 싶단 말이야.”여자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설득 방법을 바꿨다.“알았어.”남자아이는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게 무색할 만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곁에 있을게.”‘누나’라는 말에 임유진은 또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눈빛만 닮은 게 아니라 조금 아련한 목소리로 ‘누나’라고 부르는 것까지 강지혁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여자아이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 아까 바이킹 줄에서 봤던 승찬이라는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형들을 데리고 다가왔다.승찬은 손가락으로 겸이란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옆에 있는 형들에게 말했다.“내가 말했던 애가 바로 쟤야. 쟤가 진짜 싸움을 잘하거든. 여태 지는 걸 못 봤어. 아마 형들이라도 상대가 안 될걸?”“하승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여자아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왜? 내 말 맞잖아. 하겸 싸움 잘하는 거 맞잖아.”하승찬은 피식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답했다.누가 봐도 일부러 형들을 도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아니나 다를까 하승찬과 함께 온 아이들은 담방이라도 하겸과 싸울 듯 거리를 좁혀왔다.여자아이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얼른 하겸을 제 뒤에 숨기고 큰소리로 외쳤다.“내 동생은 싸움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우리는 놀러 온 거지 싸움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러니까 저리 가! 계속 다가오면... 그때는 내가 혼내줄 거야!”용기는 가상했지만 수적으로나 힘적으로나 우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여자아이의 협박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하승찬이 데리고 온 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큰 남자아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자아이를 옆으로 밀어버렸다.여자아이는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머리는 바로 옆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임유진은 반응조
점심이 되고 임유진 일행은 놀이공원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현이와 율이는 노느라 에너지를 많이 써서 식욕이 도는지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아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 먹은 뒤에는 금방 다시 키즈 코너로 가 놀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 애들 데리고 놀고 있을게.”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래.”강지혁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들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이다.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만약 임유진이 그를 떠난 이유가 정말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어서인 거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의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나?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강지혁의 눈빛에 일말의 어둠이 스쳐 갔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낸 후 입구 쪽 벤치에 앉아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현이와 율이는 이제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 됐지만 제법 남매 느낌이 많이 났다. 두 아이 모두 서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키즈 코너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멈췄다.아까 바이킹 줄을 섰을 때 봤었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여자아이는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무릎을 살짝 구부려 앞에 있는 남자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남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무척이나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영양 불균형인지 얼굴이 조금 노랗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너무나도 조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지나치게 예쁜 얼굴이어서일까, 임유진은 아이의 얼굴을 꼭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