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끝내 거절하지 못했고 정신을 차려보니 이미 강지혁과 같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그녀는 한숨을 짧게 내쉬며 전에도 같이 잔 적이 있는데 이 정도는 아무것도 아니라며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하지만 강지혁이 옆에 누워있다는 게 의식이 되지 않을 리가 없었고 그녀는 한참을 뒤척이다가 결국에는 아무 화제나 던졌다."그런데 너는 왜 계속 누나라고 부르는 거야?""이렇게 부르는 게 싫어?"강지혁의 반문에 그녀는 잠깐 뜸을 들이다 대답했다."그건 아닌데, 뭐랄까... 음, 연인 사이에 이렇게 부르는 게 좀 이상해."‘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진짜 내가 누나인 줄 알 거 아니야...’하지만 어느샌가 그녀도 이 호칭이 익숙해진 듯 보였다. 강지혁이 처음부터 그녀를 ‘누나’라고 불렀으니까."그럼, 사람들 앞에서는 유진이라고 부를까? 둘이 있을 때만 누나라고 부를게."누나라는 호칭을 버리지 않으려는 강지혁에 임유진이 말했다."너 누나라고 하는 거 되게 좋아하는 것 같아.""응 맞아."강지혁이 순순히 인정했다."처음이었거든, 누나라고 부르라고 한 사람이."임유진이 강지혁 쪽을 바라보았다."누나라고 부르면 우리가 절대 끊을 수 없는 견고한 무언가에 의해 연결된 것만 같은 느낌이 들어."임유진은 대체 그가 말하는 견고한 무언가가 뭔지 잘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강지혁은 그 이상을 설명할 생각은 없었는지 대화를 끝내려고 했다."이제 자."임유진은 알겠다고 하고 천천히 눈을 감았다. 하지만 그녀는 침대 옆에 켜진 작은 스탠드 불빛을 끌 생각이 없는 듯 보였다.강지혁은 스탠드를 보며 복잡한 표정을 지었다. 셋방에서 살았을 때도 임유진은 불을 켜야만 잠이 들었고 불이 꺼지면 안 좋은 기억들이 되살아나 무섭다고 했었다.강지혁도 그 안 좋은 기억들이 감옥에서 지내면서 겪었던 일들이라는 걸 어렴풋이 눈치챌 수 있었다.하지만 한동안 임유진도 불을 끄고도 잘 수 있었는데 이유를 물었더니 ‘혁이 네가 옆에 있으니까 무서운 것도 사라졌어’ 라고 대답했었다.
간밤에 임유진은 강지혁 때문에 쉽게 잠을 이루지 못하리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도 그녀는 눈을 감은 뒤로 금방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마치 강지혁이 있어서 안심하고 잘 수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다음 날, 임유진이 일어나보니 강지혁이 흰 셔츠에 손목 단추를 채우며 그녀에게 다가왔다."깼어?""응."임유진은 자신이 아직 씻지도 않는 얼굴에 잔뜩 헝클어진 머리를 하고 있다는 걸 인지했는지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잘 잤어? 난 되게 잘 잤는데."강지혁은 몸을 숙여 양손으로 침대를 짚으며 그녀의 얼굴 가까이에 다가갔다.공중에서 시선이 얽히자 임유진은 어쩔 줄을 몰라 몸을 뒤로하며 둘 사이의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강지혁이 그녀의 허리를 잡아 다시 앞으로 끌고 왔고 인제 두 사람의 거리는 더 가까이 좁혀졌다."잘 못 잤어?"강지혁은 그녀의 대답을 요구했다."아, 아니."임유진은 버벅대며 대답했다."그럼 됐어."강지혁은 너무 자연스럽게 그녀의 볼에 뽀뽀하고 말했다."씻고 아침 먹게 내려와.""응."임유진은 두근거리는 심장을 가라앉히고 욕실로 들어가 씻은 후 아래로 내려갔다. 그러자 강지혁은 그녀가 오기만을 기다렸는지 수저에 손도 대지 않고 가만히 앉아 있었다.강씨 저택 아침은 한식뿐만 아니라 양식도 있었다."뭐 먹을래?"강지혁이 물었다."나는 호박죽."임유진의 말에 사용인이 호박죽과 샌드위치를 그녀의 앞에 대령했다.임유진은 밥을 먹다 잠깐 고개를 들었고 마침 강지혁과 눈이 마주쳤다. 그는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보고 있었다."왜?""그냥, 먹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강지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입가에 묻은 호박죽을 쓱 닦아 주었다. 그러고는 손을 다시 가져가 손가락에 묻은 호박죽을 자신의 입안에 가져갔다.그 모습에 임유진의 얼굴이 또다시 빨갛게 달아올랐다. 그러고는 요즘 따라 얼굴이 붉어지는 빈도가 점점 늘어가고 있다는 것을 느끼며 남자의 이러한 행동이 이렇게까지 야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것도 처
이제는 또 다른 남자가 자신에게 넥타이를 매달라고 한다. 이 남자와는 얼마나 오래 갈 수 있을까?두 사람의 마음이 같다고 해도, 강지혁이 아이를 낳을 수 없는 자신의 몸을 개의치 않아 해도 임유진은 두 사람 사이의 미래가 머릿속에서 그려지지 않았다. 아니, 감히 상상할 수가 없었다. 애초부터 두 사람은 다른 세계 사람이었고 지금은 서로 연인이라고 해도 과연 미래에는 어떻게 될지..."왜 그래?"강지혁의 말이 그녀를 잡념에서 끄집어냈다."아니야. 좀... 숙여 봐."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은 순순히 허리를 숙이며 그녀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가까이 가져갔다.임유진은 먼저 셔츠의 카라를 세운 후 넥타이를 그의 목에 두르고 매기 시작했다."그거 알아? 나 지금 내 목숨줄을 누나한테 쥐여준 거."강지혁의 낮은 목소리가 임유진의 귓가에서 울려 퍼졌고 그녀는 손을 멈추며 강지혁의 얼굴을 쳐다보았다."내 목숨을 원한다면 누나는 지금 손에 든 넥타이를 꽉 조이면 돼."강지혁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그러니까 내 넥타이를 맬 수 있는 여자는 평생 누나밖에 없어."임유진은 가게로 출근을 해서도 아까 강지혁이 지었던 미소와 그가 했던 말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았다.자신의 넥타이를 맬 수 있는 여자는 평생 임유진밖에 없다는 말이 진짜 실현될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지금 강지혁은 그녀에게 진심이라는 것이다. 또한, 미래를 상상조차 못 하는 임유진과 달리 강지혁은 두 사람의 미래를 머릿속에서 그리고 있었던 것이 분명했다.오후 1시, 가게에 주문이 하나 들어왔는데 20인분이라는 큰 주문이었다. 근처는 아니었고 갔다 왔다 하면 대충 40분 정도가 소요됐다.임유진이 목적지에 도착해보니 거기는 촬영 현장이었고 20인분은 여기 있는 스태프들이 주문한 듯 보였다. 그리고 마침 촬영팀도 휴식시간이었는지 여기저기서 식사하고 있었다. 물론 대다수 스태프는 적당한 곳에 앉아 밥을 먹었고 배우들은 따로 휴식룸에 들어가 식사했다.임유진이 배달음식을 내려놓고 막 촬영
아니나 다를까, 상대방이 이어서 하는 말이 그녀의 추측을 확신으로 바꿔주었다."저희도 일을 크게 키우고 싶진 않으니까 이 20인분의 음식값은 다시 환불해 주시고 추가로 100만 원을 배상해 주세요. 지금 도시락을 먹고 있는 사람도 있는데 나머지 도시락에도 벌레가 들어 있을지 누가 알겠어요. 안 그래요?"그때 자리에 앉아 있던 몇 명이 일어서더니 임유진을 둘러쌌고 그들은 그녀를 머릿수로 압박하려는 듯 보였다.임유진은 빠르게 주위를 스캔했다. 이곳은 제작팀이 촬영을 위해 빌린 반은 뚫려있는 작은 카페였다. 임유진이 서 있는 왼쪽에 CCTV가 있긴 했지만 촬영하는 날까지 켜져 있는지는 불확실한 상황이었다.그리고 카페에서 조금 떨어져 있는 곳에는 팬들을 제지하려고 만들어둔 펜스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바닥에 앉아 휴식하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자신의 연예인이 나오는 순간을 캐치하려고 카메라를 들고 있는 사람들도 있었다."이렇게 하죠. 이런 건 일개 배달원인 제가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어서요. 제가 사장님에게 연락해 볼게요."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전화를 걸어 이 상황을 대충 설명했다. 탁유미는 빨리 상황을 파악하고는 그녀에게 말했다."알겠어요. 유진 씨는 일단 돌아오세요. 그쪽에서 내민 요구는 오늘 영업을 마치고 내가 다시 얘기해볼게요."임유진은 스피커폰으로 통화한 게 아니라서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은 탁유미가 어떤 말을 했는지 들을 수가 없었다."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그들 몰래 핸드폰 녹음 버튼을 켜두었다. 그러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그들 쪽을 바라보았다."뭐래요? 돈은 언제쯤 줄 수 있대요?"주동자로 보이는 사람이 물었다. 그러자 임유진이 가볍게 웃으며 답했다."100만 원이면 소액사기를 넘어선 건 아시죠? 재판까지 가면 3년 이하의 징역을 살게 될 수도 있어요."그러자 임유진을 둘러싼 사람들의 얼굴이 갑자기 돌변했다."뭐? 내가 지금 사기를 치고 있다는 말이야?""맞는지 아닌지는 증거가 설명해주겠죠. 저기 보이
임유진은 탁유미가 어렵게 차린 이 가게를 이런 사람들이 망치게 두고 싶지 않았다. 또한, 그녀의 몸속 뿌리 깊이 박혀있는 ‘정의감’이 이런 상황을 그냥 지나치도록 내버려 두지 않았다. 애초에 변호사가 된 것도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였으니까.그 말에 그녀를 둘러싼 사람들이 주위를 둘러보며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그렇게 일단락된 듯하여 임유진이 그만 자리를 뜨려고 할 때, 갑자기 그중 한 사람이 그녀의 팔을 거세게 잡아당겼고 그로 인해 그녀의 손에 들린 핸드폰이 힘없이 바닥에 떨어졌다.그때 누군가가 임유진 핸드폰 화면을 보고 말았고 임유진은 녹음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들켜버렸다."형님, 이 여자 녹음하고 있었어요!""와, 이 미친X이 우리 몰래 이런 수작질을 하고 있었어?"그중 한 명이 화가 잔뜩 났는지 욕을 해대며 임유진에게 손을 올리려고 했다. 그 남자는 이곳이 다 뚫려있는 곳이고 주위에는 연예인과 그의 팬들이 있다는 걸 까먹은 듯했다.임유진은 눈을 꽉 감은 채 가드를 올려 남자의 공격을 방어하려고 했다. 그때 주위 사람들의 감탄사가 흘러나왔다.임유진이 기다렸던 공격은 들어오지 않았고 대신 한 손이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아 그녀를 조금은 차가운 듯한 품속으로 데려갔다.임유진이 눈을 떠보니 거기에는 한 남자의 잘생긴 얼굴이 있었고 항상 담담했던 그의 얼굴에 지금은 일말의 분노가 서려 있었다."이게 뭐 하는 짓이지?"강현수는 한 손으로 임유진을 자신의 품에 끌어안고 다른 한 손으로는 그녀를 때리려고 했던 남자의 손목을 잡았다. 그의 목소리는 한기를 내뿜고 있었다.임유진을 때리려고 했던 남자는 손목이 끊어질 듯한 고통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 고통보다 더 무서웠던 것이 있었으니, 그건 바로 눈앞에 있는 강현수라는 남자였다.연예계의 황태자!‘설마... 이 여자 배달원의 편을 들려는 건가?’가까스로 정신을 차린 나머지 사람들은 얼른 강현수의 옆으로 다가가서 다급하게 해명했다."이 여자가 배달한 음식에 벌레가 있었어요. 그런데 말하다 보니까 감정이
"어떻게 된 일이에요?"강현수는 아까 다른 사람이 얘기했음에도 임유진 말만 믿겠다는 듯이 다정한 목소리로 그녀에게 물었다."오늘 이곳에 도시락 배달을 하러 왔어요. 그런데 음식에서 벌레가 나왔다면서 오늘 밥값을 전부 환불해 달라고, 거기에 더해 100만 원까지 배상하라고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일은 경찰에 맡기는 게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아까 몰래 녹음하고 있는 걸 들켜서 이런 사태에 이르게 됐어요."임유진은 침착하게 상황을 서술했다."녹음이요? 괜찮다면 저도 좀 들어볼 수 있을까요?"일당은 강현수가 녹음 내용을 듣겠다고 하자 얼굴이 사색이 되었다. 스태프 중 몇 명이 돈을 뜯어낼 목적으로 일부러 이런 상황을 만들었다는 것을 깨닫고는 얼굴을 무섭게 굳혔다.강현수 뒤에 있던 감독들도 대충 어떤 상황인지 깨닫고 하나같이 난감한 얼굴을 했다. 만약 이 사실이 인터넷에 올라가기라도 하면 욕을 먹게 되는 건 전체 제작팀이었다. 감독들은 일단 말썽을 일으킨 장본인들을 이따가 처리하기로 하고 지금은 임유진에게 사과하는 것이 급선무라고 생각했다."아가씨, 이건 전적으로 저희 제작팀 실수입니다. 아무리 임시 아르바이트생이라고 해도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저희가 제대로 관리했어야 했는데. 제가 제작팀 전체를 대표해서 사과드리겠습니다. 원하시면 피해보상도 해드리겠습니다.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아니요. 피해보상은 됐습니다. 다만 혹시나 저 사람들이 앙심을 품고 저희 가게에 보복하는 일은 없게 해주셨으면 좋겠네요."임유진은 사건을 괜히 공론화 해봤자 윤이 식당에 좋을 것이 하나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하여 이렇게 사건을 마무리하는 것이 서로에게 제일 좋은 선택이었다."그럼요. 당연히 그래야죠!"감독들은 임유진에게 약속하고 이렇게 처리하는 것이 마음에 드나 싶어 강현수의 눈치를 봤다.임유진은 드디어 사건이 해결되자 이곳을 떠나려고 몸을 돌렸다. 너무 오랜 시간을 이곳에 소비했고 지금쯤이면 가게에 그녀가 배달해야 할 주문들이 산더미처럼 쌓여있을
이 황태자는 예전에 모든 계층의 여자친구를 다 만나봤었다. 물론 그녀들의 결말은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기 마련이다.하지만 어찌 됐든 여전히 수많은 여자들이 강현수 여자친구가 되고 싶어서 안달이다.심지어 누군가는 인터넷에서 설사 강현수가 황태자가 아니더라도, 빈털터리가 될지언정 평생 그와 함께하겠다고 한다. 그러게 누가 이토록 잘생기라고 했냐고!지금 이 순간, 강현수가 몸을 쪼그리고 앉아 한 여자를 위해 신발 끈을 묶어주는 모습에 주위 공기가 얼어붙을 것만 같았다. 놀라움에 숨을 몰아쉬는 소리 말곤 아무 소리도 안 들렸다.신발 끈을 다 묶은 후에야 강현수는 아쉬움을 뒤로한 채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고마워요.”임유진은 살짝 어색한 듯 말하곤 머리를 푹 숙인 채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그 시각 촬영장 커피숍에서 임유라가 유리창을 사이에 두고 이 장면을 뚫어지라 쳐다보며 정성껏 다듬은 손톱이 살을 파고 들어갈 듯이 주먹을 꽉 쥐었다.왜... 임유진이 대체 왜 또 강현수 앞에 나타난 걸까? 게다가 강현수는 선뜻 그녀 앞에 쪼그리고 앉아서... 이건 마치 임유진을 섬기는 거나 다름없었다!임유라는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질투가 활활 차올랐다.‘임유진이 바로 현수 씨가 찾고 있는 그 소녀란 사실을 절대 알려선 안 돼! 난 현수 씨를 잃을 수 없어. 절대 용납할 수 없다고!”한편 밖에서 임유진이 떠난 후 강현수는 입술을 앙다물고는 옆에 있는 감독과 스텝들을 힐긋 쳐다봤다.“이런 일은 두 번 다시 보고 싶지 않네요. 이 사람들 오늘부로 제작팀에서 해고해요.”그의 말이 떨어진 순간, 앞서 돈을 뜯어내려던 그 사람들은 자리에서 펄쩍 뛰어오르며 당장이라도 실랑이를 벌일 것만 같았다.하지만 강현수의 싸늘한 시선을 마주한 순간 금세 겁에 질렸다.“유진 씨가 이번 일을 크게 키우고 싶어하지 않으니 소원대로 해 줘야죠. 다들 유진 씨한테 고마워해야 해요. 앞으로 두 번 다시 유진 씨를 찾아가서 소란 피우면 당신들 평생 감방에서 보낼 줄 알아요!”어두
“아니요, 그냥 제작팀에서 마침... 아는 분을 만났는데 그분이 일을 해결해줬어요.”임유진이 잠깐 망설이다가 대답했다.“유진 씨 친구분이요? 그럼 제대로 감사의 인사를 드려야겠네요! 나중에 선물 사 올 테니 유진 씨가 대신 친구분께 드릴래요?”탁유미가 말했다.“괜찮아요.”임유진은 대답을 마치고 재빨리 화제를 돌려 윤이의 인공와우에 관해 물었다.“이틀 뒤면 병원 쪽에서 윤이의 건강검진 결과서가 나올 게예요. 그때 아무 문제 없으면 바로 인공와우를 착용할 수 있어요.”탁유미는 말하면서 얼굴에 희열을 금치 못했다.“병원 측에서 내 형편이 어려우니 비용을 일부 감면 신청할 수 있대요.”“정말 잘됐네요.”임유진이 말했다. 병원 측은 강지혁이 말을 꺼낸 덕분에 비용을 감면하는 게 틀림없다. 윤이가 이제 곧 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생각에 임유진도 매우 기뻤다.점심 배달 사건은 작은 에피소드처럼 지나가 버리는 듯했지만 저녁 무렵, 임유진이 배달을 마치고 가게에 돌아오자 탁유미가 그녀를 붙잡고 물었다.“오늘 우리 가게를 도와 공갈 사건을 해결한 사람이 강현수 씨인가요?”임유진은 꿈에도 예상치 못한 질문에 화들짝 놀라서 탁유미를 멍하니 바라봤다. 그녀가 대체 어떻게 이 일을 알게 된 걸까?탁유미는 임유진의 반응을 살피더니 전부 사실이란 걸 알아챘다.“방금 가게에서 식사하던 손님이 오늘 점심 유진 씨가 배달 나갔다가 돈 뜯어내려던 사람들과 다투는 장면을 영상으로 보더라고요. 뒤에 강현수 씨도 나오던데 나한테도 보여줬어요.”탁유미가 말하면서 살짝 의심 섞인 눈초리로 임유진을 쳐다봤다.비록 전에 강현수가 가게로 찾아와 임유진을 기다릴 때부터 둘 사이를 의심했지만 오늘 영상에서 강현수가 무릎 꿇고 그녀의 신발 끈을 묶어주는 장면에 여전히 경악을 금치 못했다.그녀의 인상 속에서 강현수는 차갑고 매정한 사람이라 여자친구도 수없이 바꿔가며 무자비함을 한껏 드러내는 사람이었다.만났던 여자친구마다 전부 ‘살갑게’ 대해준다고는 하지만 고작 금전적인 방면이나 후원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