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걸 알았더라면 애초에 잘 대해 줄 걸 그랬다며 임정호는 후회했다. 방미령은 임정호의 말에 배가 아팠는지 화를 냈다."강지혁은 감방까지 갔다 온 여자가 뭐가 좋다고 그런대요? 그리고 강지혁의 약혼녀를 차로 치어 죽인 것도 임유진이잖아요!""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임정호도 짜증을 냈다."하지만 뭐 어찌 됐든 그렇게 당당하지는 못할 거예요. 우리 유라처럼 모든 면에서 걸릴 것이 없어야 이제 강현수랑 결혼도 하고 강씨 집안의 안주인이 될 수 있죠. 우리 이번 여행 다녀온 것도 다 유라 덕이잖아요."임정호는 자신의 작은딸을 떠올리며 그제야 기분이 나아진 듯 보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희망은 임유라뿐이었다.한편,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누나 아버지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강지혁은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위험한 뜻을 임유진은 단번에 알아챘다. 또한, 알아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었다면 분노에 차서 내뱉은 한마디를 강지혁이 그대로 들어줄 것 같았으니까."아니야. 이제 아빠와는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으니까 이거로 된 거야."임정호가 이번에 한 일은 그저 임유진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일말의 부녀의 정을 끊어놓았을 뿐이었다. 임유진은 이때까지 임정호가 그래도 자신의 어머니에게 조금은 감정이 남아있을 줄 알았다. 두 사람은 연애결혼이었고 자신의 어머니는 임정호가 제일 힘들고 제일 형편없었을 때 결혼을 결심했으니까.하지만 이제는 임유진도 깨달았다. 그건 단지 자신의 일방적인 희망일 뿐이었다는 것을. 또한, 제일 무서운 건 시간이고 예전에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했어도 시간에 따라 그 감정은 옅어지고 또 옅어져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강지혁은 눈앞에서 초연한 얼굴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약간의 슬픔과 허탈함까지 보이는 임유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고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강
지금의 강지혁은... 자신을 좋아하는 거겠지? 다만 이 좋아하는 감정이 언제까지 갈까?임유진은 걱정부터 앞섰다. 자신의 어머니도 임정호에게 시집을 갈 때 임정호가 평생 자신만 바라보며 사랑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보면 임정호의 마음에 어머니의 자리는 더는 없어 보였다. 영원한 사랑도 세월이 흐르면 그저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임유진 자신 또한 소민준과 뜨거운 사랑을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자신이 평생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민준은 그런 기대가 우습게 단번에 그녀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누나도 내가 이러는 게 장난 같아 보여?"그때 강지혁이 갑자기 질문을 해왔고 임유진은 움찔하며 거기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강지혁이 일개 장난으로 자신에게 이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품고 있는 이 감정이 얼마나 지속이 될지, 임유진은 거기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아마 1년, 2년... 혹은 고작 몇 개월일지도 모르니까."누나가 말해 봐. 내가 진심이라는 걸 어떻게 해야 믿어 줄래?"강지혁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다음 한마디에 임유진은 하마터면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우리 결혼할까? 이러면 내 진심을 믿어 줄 수 있겠어?"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결혼?"결혼이라는 두 글자가 이토록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단어였나?"그래, 결혼."강지혁은 임유진이 잘 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 한 번 더 강조했다."난 이번 생에 누나 말고 다른 여자를 내 옆에 둘 생각 같은 거 없어. 그러니까 내 곁에는 평생 누나라는 여자만 있게 되겠지. 그래서 결혼하고 싶다는데 뭐가 잘못됐어?""하지만...""아니면 누나는 나랑 결혼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거야?"강지혁의 손가락이 임유진의 볼을 스쳤다. 임유진은 지금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부분은 뜨거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임유진이 어떻게
"헤어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는 게 좋을 거야."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두 눈은 집요하게 그녀를 쫓아다녔다."나와 연인이 되겠다고 한 건 누나니까 앞으로 연애는 나랑만 해야 해. 나도 누나밖에 없으니까."강지혁의 말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그녀를 천천히 감싸왔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대표이사실에서 점심을 먹은 후 시간을 확인하고는 황급히 정리하고 자리를 떴다. 대표이사실을 막 나왔을 때 그녀는 고이준과 마주쳤고 그는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임유진 씨, 안녕하세요. 이제 막 가시는 겁니까?""네.""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임유진은 엘리베이터에 탔고, 고이준 옆에 있던 회사 직원은 그녀를 뚫어지게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고 비서님, 저분은... 누구세요?"누가 봐도 임유진의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회사 직원은 더더욱 아닌 듯 보였다. 하지만 강지혁의 가장 측근인 고이준이 그녀에게 이토록 예의를 갖춰 인사했으니. 회사를 통털어 봐도 고이준이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러니 해당 직원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저 분은..."고이준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건드려서는 안 될 분이죠."임유진은 강지혁이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녀를 건드리는 사람들에게는 아마 다시는 내일이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임유진은 윤이 식당으로 돌아가서는 쉴 틈도 없이 또다시 배달을 가야 했다. 매번 강지혁이 많은 양의 배달을 시켜 GH그룹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올 때면 임유진은 출근 시간에 혼자 농땡이를 피우는 듯한 죄책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렇다고 강지혁의 주문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매일 오는 이런 대량의 주문은 가게 수입에 너무 큰 도움이 됐으니까."어? 언니는 아직 안 왔어요?"몇 개의 배달을 다녀와 봐도 여전히 탁유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항상 계산대를 지키고 있던 탁유미 자리에는 탁유미 엄마가 자리하고 있었다."윤이가 감기에 걸려서요. 근처 보건소에
"꼭 그럴 거예요. 그리고 언니 인생도 이제부터 시작인데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더 좋은 일만 벌어질지 누가 알아요."탁유미는 조금은 신기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 씨 뭔가 변한 것 같아요.""제가요?"임유진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네, 저희 가게에 처음 왔을 때 솔직히 유진 씨 억압받은 사람처럼 어두운 표정만 짓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면 그때 생각이 전혀 안 들 정도로 미래가 기대되는 사람처럼 보여요."탁유미가 보기 좋다는 듯 웃었다.미래가 기대되는 사람 같다고...? 임유진은 그 말에 멈칫했다. 한지영이 그녀의 사건을 열심히 알아보고 있어 줘서 그런가? 아니면... 강지혁과의 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생겨서 그런 걸까?저녁, 임유진이 퇴근하고 윤이 식당에서 나오자 가게 근처에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바로 강지혁의 차였다. 임유진이 그쪽으로 걸어가자 차 문이 열렸고 뒷좌석에 앉아 있던 강지혁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타.""나 스쿠터 타고 가야 해. 아니면 내일 아침 여기로 올 때 너무 불편해."강지혁의 저택 근처는 모두 강씨 일가의 땅이었기에 버스정류장까지 가려면 꽤 시간이 걸려야 했다.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이 웃었다."내일 아침도 내가 데려다주면 되지."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대로 뒷좌석에 태웠다.임유진은 고작 80만 원을 벌면서 굳이 페라리로 출퇴근을 하게 된 상황에 마치 자신이 서민들 세상을 구경하러 일부러 아르바이트하는 부잣집 아가씨가 된 기분이었다."언제 왔어?"임유진은 조용한 분위기에 어색했는지 아무 화제나 던졌다. 강지혁과 연인이 됐다고는 하나 뭔지 모르게 그랑 있으면 어쩔 줄 모르겠는 임유진이었다."아마 6시 반쯤?"강지혁의 태연한 말에 임유진은 깜짝 놀랐다. 6시 반이라니. 현재 시각이 9시인데, 그러면 밖에서 2시간 반을 이러고 있었다는 거잖아?"계속 여기서 나 기다린 거야?"임유진이 놀라 물었다."응."강지혁은 대답한 후 임유진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며 비
뼈아픈 경험 때문에 임유진은 더더욱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생활을 꺼리는 걸지도 모른다. 또 한 번 기댈 곳을 잃어버리면 그때는 임유진의 정신력이 드디어 버티지 못하게 될 거니까.강지혁은 그녀를 꿰뚫어 보듯 보다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은 거면 그렇게 해. 하지만 언제든 다른 일을 하고 싶으면 제일 먼저 나한테 얘기해 줘.""응, 알겠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참, 여기서 계속 나 기다린 거면 저녁은?"임유진이 물었다."아직 안 먹었어.""가게로 들어와서 먹지 그랬어!"작은 가게이긴 했지만, 종류가 다양해 선택범위가 넓었다. 임유진은 가게의 음식이 강지혁의 입맛에 안 맞을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은 듯싶다. 전에 강지혁과 셋방에서 살았을 때 아무리 조촐한 식사여도 강지혁이 싫은 티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그럼 다음에는 가게로 들어갈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자신이 괜한 소리를 한 건 아닌가 싶었다. 강지혁이 가게로 들어가면 아마 분위기가 달라질 테니까.어느새 두 사람은 강씨 저택에 도착했고 안으로 들어가자 저택에 있는 요리사가 강지혁을 위해 저녁을 준비해 두었다. 임유진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식사하게 됐다.식사하면서 임유진은 가게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 배달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었다. 피크타임인 점심과 저녁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내가 휴가를 쓰겠다고 하면 언니는 아무 말 없이 허락해줘. 정말 고마운 분이지. 내 과거를 듣고도 나를 채용한 것부터가 너무 좋은 사람이야, 언니는."임유진은 말을 끝내고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왜 그래? 사건이라도 떠오른 거야?"강지혁이 바로 그녀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고 물었다."그 사건 내가 알아봐 줄까?""지영이가 증거를 찾고 있으니까 아직은 괜찮아."임유진은 수저를 내려놓고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진지하게 물었다."나 정말 음주운전 한 거 아니고
임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줄곧 마음속에 있던 어두운 장막이 걷힌 것처럼 좋아했다. 강지혁이 자신을 믿는다는 소리에 이렇게나 기뻐하게 될 줄 몰랐다.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말했다."단, 누나도 나를 믿어줘. 내가 누나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누나를 이렇게나 사랑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난 절대 누나가 그런 고통을 받게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라고."그의 말에 임유진은 눈을 깜빡였다. 강지혁은 지금 그녀가 도움 하나 받지 못하게 주변에 압박을 넣어 그녀를 감방에 보내버린 일을 말하는 것일까?"응."임유진은 가볍게 대답했다. 과거에 두 사람 사이가 어떻든 강지혁과 잘 지내보려고 결심을 한 이상 그를 향한 공포감과 두려움, 그리고 미움까지도 서서히 내려놔야 한다고 생각했다.식사를 끝마친 후 임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강지혁을 향해 물었다."너 혹시 인공와우 전문가 중에 아는 사람 있어?""그건 왜?"강지혁이 뜬금없는 임유진의 말에 되물었다."그게 언니 아들인 윤이가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인공와우를 착용하게 될지도 모르거든. 그래서 미리 그쪽 전문가를 알아두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언니의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현재 제일 저렴한 모델밖에 구할 수가 없어. 그래서 혹시 가능하면 윤이에게 조금만 더 좋은 모델로 바꿔줄 수 있을까 해서."임유진은 조금은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인터넷에서 알아본 바로는 인공와우 좋은 모델과 제일 저렴한 모델의 가격 차이가 꽤 컸다. 그리고 탁유미가 생각하는 가격에 따르면 아마 윤이에게는 일단 한쪽만 착용하게 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기왕이면 두 개를 다 착용하는 것이 효과도 더 좋을 것이다."누나가 다른 사람 때문에 나한테 부탁을 다 하네. 자기 일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강지혁이 웃으며 말했다."윤이한테는 나조차도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신경을 많이 쓰게 돼. 윤이가 지금은 소리 내 말을 못 하지만 인공와우만 착용하게 되면 윤이도 평범한 아이들처럼 자랄 수 있을
강지혁은 강씨 가문을 이어갈 사람이고 앞으로 그의 자식이 그의 뒤를 잇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임유진이 어떻게 자신 하나 때문에 강지혁에게 대를 끊으란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이제 이런 중요한 일도 까먹고 덥석 그와 사귀겠다는 말을 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이런 사이를 얼마나 더 지속할 수 있을까?심지어 그녀가 변호사로 있었을 때 처리했던 사건을 보면 부잣집일수록 자식을 향한 집착이 더 컸었다."그게 무슨 말이야?"강지혁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묻자 임유진이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때... 자... 자궁 쪽을 심하게 맞게 된 적이 있었어. 다행히 빨리 병원에 이송이 됐는데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라고. 다친 곳이 심하게 손상을 입어서 앞으로 임신은 어려울 거라고..."이건 임유진이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런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그것도 강지혁 앞에서 그녀는 이 말을 입에 올렸다.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갔다.심하게 맞았다고? 누가 때렸는데? 언제? 설마 감옥에 있었을 때? 그럼 그때 대체 얼마나 아팠다는 거야?!임유진이 겪었던 고통 하나하나가 강지혁을 무겁게 짓눌렀고 그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의 모든 고통이 현재 고스란히 강지혁의 후회로 바뀌고 있었다.만약 그때 당시 강지혁이 임유진에게 조금이라도 자비를 베풀었더라면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다뤄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혹시... 혹시 지금이라도 헤어지고 싶은 거면, 나는..."강지혁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내가 말했지. 헤어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강지혁은 말이 끝나자마자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아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아!"임유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강지혁의 칠흑 같은 어두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내가 원하는 사람은 누나뿐이고, 제일 사랑하는 사람도 누나뿐이야. 아이를 가질 수 없다 해도 상관없어. 난 누나를 놓치지
임유진을 사랑하고 나서 깨달은 것이 있다면 어떤 일은 그녀가 아니면 안 된다는 것이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얼굴을 가까이에서 뚫어지게 쳐다보며 그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그러니까 이번 생에서 누나가 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은 나뿐이야."강지혁은 말을 마치고 천천히 그녀에게 키스했다. 부드럽게 감싸오는 그의 입술에 그녀는 반항할 의지조차 없었다.유일하게 기댈 수 있는 사람... 정말 가능한 걸까?...강지혁과의 진정한 의미에서의 연애는 임유진이 전에 상상도 못 해본 일이지만 불편하거나 싫지 않았다. 오히려 가끔은 셋방에서 그와 지냈던 시절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 들어 좋기도 했다. 그리고 마치 ‘혁이’때로 돌아간 것만 같은 강지혁에 임유진은 그의 앞에서는 자신의 마음의 짐과 아픔, 상처 이 모든 것들을 다 꺼내 보일 수도 있을 것만 같았다."정말요?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탁유미의 통화 소리에 임유진이 그녀 쪽을 바라보았다. 언제나 침착한 얼굴이던 탁유미였는데 지금은 무슨 일인지 잔뜩 흥분해서는 눈가도 약간 촉촉해진 것 같았다."언니, 무슨 일이에요?"임유진이 묻자 탁유미가 그녀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이번에 병원에서 가정환경이 어려운 청각장애 아이들을 대상으로 헬프 플랜이라는 걸 기획했대요. 그래서 방금 전화 왔는데 우리 윤이에 도움을 주고 싶다는 거예요! 그리고 인공와우 전문 의사 선생님은 꼭 한 번 만나 뵙고 싶었는데 전에는 예약도 매번 실패했거든요. 그런데 이번 헬프 플랜에서 그 전문가 선생님이 우리 윤이를 봐준대요. 또 윤이가 면제조건에 해당이 되면 저렴한 인공와우를 제일 좋은 거로 바꿔줄 수도 있고요!"탁유미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만 같았다. 이렇게 좋은 일이 자신에게 차려질 줄은 몰랐으니까.임유진은 그 말을 듣고 단번에 강지혁이 한 일이라는 걸 알았다.탁유미의 즐거워 보이는 모습에 임유진은 윤이는 앞으로 더 좋은 치료를 받게 될 거고 꼭 선천적인 아픔을 이겨내고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라고 믿어 의심치 않았
“응, 안 아파.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여자아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하겸은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서서히 힘을 풀고 여자아이의 품에 몸을 맡겼다.“세상에! 너 또 싸웠니? 애들 얼굴 좀 봐. 네가 이랬어? 미친 망아지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니?”새엄마인 정가연이 다가와 눈을 부라리며 하겸을 노려보았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머리가 아플 만도 했다.하승찬은 엄마가 오자 바로 상황을 일러바치며 하겸이 어떻게 다른 아이들을 때려눕혔는지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주었다.여자아이는 정가연의 한마디로 시작된 사람들의 질책에 품에 있는 남자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괜찮아. 누나가 지켜줄게. 무서워하지 마.”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얼른 두 아이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막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강지혁이 아이 둘을 데리고 다급하게 그녀 앞으로 뛰어왔다.“유진아,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아. 김재호를 찾았어.”“뭐?”임유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김재호를 찾았다고?!”“그래. 고 비서가 확인했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김재호를 찾았다는 건 세쌍둥이 중 나머지 한 아이의 행방을 드디어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임유진은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강지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빨리... 빨리 가자!”“그래, 알았어.”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내려 아이 둘을 바라보았다.“엄마랑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당장 가봐야 해. 놀이공원은 다음에 다시 데려와 줄게.”강선율은 의젓한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현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떼 한번 쓰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놀이공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후 현이는 많이 궁금했던 건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엄마, 김재호가 누구야? 중요한 사람이야?”“응... 엄청 중요한 사람이야.”임유진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답해
“흠... 그럼 내가 심심하지 않게 바로 옆에 붙어만 있어 주면 안 돼? 나도 저기서 놀고 싶단 말이야.”여자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설득 방법을 바꿨다.“알았어.”남자아이는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게 무색할 만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곁에 있을게.”‘누나’라는 말에 임유진은 또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눈빛만 닮은 게 아니라 조금 아련한 목소리로 ‘누나’라고 부르는 것까지 강지혁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여자아이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 아까 바이킹 줄에서 봤던 승찬이라는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형들을 데리고 다가왔다.승찬은 손가락으로 겸이란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옆에 있는 형들에게 말했다.“내가 말했던 애가 바로 쟤야. 쟤가 진짜 싸움을 잘하거든. 여태 지는 걸 못 봤어. 아마 형들이라도 상대가 안 될걸?”“하승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여자아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왜? 내 말 맞잖아. 하겸 싸움 잘하는 거 맞잖아.”하승찬은 피식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답했다.누가 봐도 일부러 형들을 도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아니나 다를까 하승찬과 함께 온 아이들은 담방이라도 하겸과 싸울 듯 거리를 좁혀왔다.여자아이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얼른 하겸을 제 뒤에 숨기고 큰소리로 외쳤다.“내 동생은 싸움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우리는 놀러 온 거지 싸움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러니까 저리 가! 계속 다가오면... 그때는 내가 혼내줄 거야!”용기는 가상했지만 수적으로나 힘적으로나 우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여자아이의 협박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하승찬이 데리고 온 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큰 남자아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자아이를 옆으로 밀어버렸다.여자아이는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머리는 바로 옆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임유진은 반응조
점심이 되고 임유진 일행은 놀이공원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현이와 율이는 노느라 에너지를 많이 써서 식욕이 도는지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아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 먹은 뒤에는 금방 다시 키즈 코너로 가 놀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 애들 데리고 놀고 있을게.”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래.”강지혁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들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이다.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만약 임유진이 그를 떠난 이유가 정말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어서인 거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의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나?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강지혁의 눈빛에 일말의 어둠이 스쳐 갔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낸 후 입구 쪽 벤치에 앉아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현이와 율이는 이제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 됐지만 제법 남매 느낌이 많이 났다. 두 아이 모두 서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키즈 코너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멈췄다.아까 바이킹 줄을 섰을 때 봤었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여자아이는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무릎을 살짝 구부려 앞에 있는 남자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남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무척이나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영양 불균형인지 얼굴이 조금 노랗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너무나도 조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지나치게 예쁜 얼굴이어서일까, 임유진은 아이의 얼굴을 꼭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우리 현이는 어쩜 기억력도 좋아... 하하.”임유진은 어색하게 웃더니 곧바로 율이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런데 율아, 정말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 적 없어?”“네, 아빠랑 같이 간 적은 없어요.”강선율의 대답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랑 같이 안 가줬어?”“도우미들이 함께 가줬어.”“같이 가주지. 그러다 율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걱정도 안 됐어?”임유진은 자기가 다 서운한 듯 강지혁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며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놀이공원 자체가 즐거운 곳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걸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안 잃어버려.”강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야...”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에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놀이공원 전체를 하루 대관한 거라 사람이라고는 아이 한 명과 직원들, 그리고 율이 곁을 지켜주는 도우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지혁은 10명의 경호원을 아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기도 했다.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전은 확보가 됐지만 그런 식의 놀이공원이라면 줄을 설 때의 미묘한 기대감도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느낄 수 없게 된다.“율아, 놀이공원 갔을 때 어땠어? 좋았어?”임유진이 물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이는 고개를 저었다.“재미없었어요.”재미있어 보이던 놀이 기구도 두어 번 타보니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놀이공원이 얼마나 재미있는데!”강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나랑 엄마는 엄청 자주 갔어.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대관람차도 타고. 그런데 매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 같은 건 두 번 밖에 못 탔어...”현이는 말을 하다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재밌다고?’강선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고이준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해졌다.“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나간 후 강지혁은 의자에 힘없이 기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살아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지는 웃음소리와 반대로 그의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맺혀 올랐다. 그리고 그 눈물은 매끈한 볼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는 임유진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녀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 또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그리고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 덕에 배웠던 후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까지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하고 고통으로 사뭇 쳤다. 자신만 입을 닫고 진실을 감춰버리면 그녀는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고배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세상에는 영원히 발각되지 않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또한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기억을 되찾은 강지혁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게 꼭 꿈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게 꼭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일까, 그날 밤 이후부터 그는 임유진이 깊은 수면에 든 후면 어김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곤 했다.마치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날 싫어하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제발...”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일 밤 그들의 침실에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주말.임유진과 강지혁은 강선율과 강선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놀이공원에 가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어느 날 현이가
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부름으로 사무실에 왔다가 벌써 10분째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의 눈빛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혹시 사모님과 다투신 건가? 아니면 또 두통 때문에...?’강지혁은 계속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내 곁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뭔지, 정말 몰라?”고이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철렁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진애령 사건 때문에 도저히 날 용서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내 곁을 떠난 거라고, 너나 한 집사나 두 사람 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네, 그랬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추측일 뿐입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사모님밖에 모르시니까요...”고이준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희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년 만에 돌아오시고 나서 진애령 씨 사건에 관해 얘기했을 때 사모님은 회장님을 다 용서했다고 하셨거든요.”“용서?”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조금만 살이 맞닿아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토까지 했는데 그게 과연 용서한 사람의 행동일까?용서했다고 한 말도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자신이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해외에 있는 요셉 선생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유진이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요셉은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로 특히 기억 관련해서는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회장님 설마...’“혹시 기억을 완전히 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강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의 기억은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돌아온 상태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세세한 기억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하지만 박 선생도 전에 말했다시피 갑자기 모든 기억을 다 찾으려고 하면 회장님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할 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