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정호는 화가 나 다시 집주인에게 따져 물으려 했지만 상대가 이미 전화를 꺼버렸다.“어떻게 된 일이에요? 누가 유골함을 건드렸어요?”옆에 있던 방미령이 재빨리 남편에게 물었다.“집주인이 어젯밤에 누군가가 그쪽으로 찾아가서 유골함을 가져갔대!”임정호가 대답했다.“가져가다니요? 그럼 우리 백억은 어떡해요? 유골함이 없으면 그 계집애도 백억을 안 줄 거라고요!”방미령도 안달이 났다. 그녀는 문득 이런 생각이 떠올랐다.“아 참, 설마 그 계집애가 사람을 시켜서 유골함을 가져간 게 아닐까요...”임정호는 미간을 구기더니 냉큼 휴대폰을 꺼내 임유진에게 전화했다.잠시 후 그녀가 전화를 받았다.“무슨 일이죠?”“저기 유진아, 나도 생각해봤는데 어쨌거나 난 네 아비잖니. 피는 물보다 진하다고 어제 말한 백억 말이야, 네가 한꺼번에 내놓기 힘들면 일단 절반만 줘도 돼. 그럼 내가 너희 엄마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려줄게. 너 한창 강지혁과 뜨겁게 불타오를 단계잖아? 이 액수는 강지혁에게 별문제 되지 않을 거야.”임정호가 말했다. 비록 지금 유골함이 사라졌지만 그는 여전히 딸에게 돈을 갈취하고 있었다.만약 어젯밤 유골함을 유진이가 가져간 게 아니라면 50억도 좋으니 나중에 대충 유골함 하나 사서 가짜 유골을 넣어두고 속이면 그뿐이다.다만 아쉽게도 그는 전화기 너머의 싸늘한 임유진의 표정을 볼 수가 없다.친아빠라는 자가 엄마의 유골을 이용해서 돈이나 뜯어내려고 하다니, 어찌 엄마가 죽었음에도 이용하지 못해 안달이란 말인가?“그럴 필요 없어요. 어제 이미 엄마 유골을 가져와서 안장했어요.”임유진이 대답했다.이 말을 들은 임정호는 버럭 화냈다.“진짜 너였네. 네가 무슨 권리로 내 월세방에 쳐들어가 네 어미 유골함을 가져가? 게다가 이미 안장을 해? 내가 남편인데 대체 내 허락 없이 어디에 묻은 거야?”“남편인 걸 알긴 해요? 엄마가 살아계시면 아빠를 남편으로 인정하고 싶지도 않을 거예요.”임유진이 차갑게 쏘아붙였다.“너... 지금 아빠한테 그게 무
임유진에게 이런 재주가 있는 걸 알았더라면 애초에 잘 대해 줄 걸 그랬다며 임정호는 후회했다. 방미령은 임정호의 말에 배가 아팠는지 화를 냈다."강지혁은 감방까지 갔다 온 여자가 뭐가 좋다고 그런대요? 그리고 강지혁의 약혼녀를 차로 치어 죽인 것도 임유진이잖아요!""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임정호도 짜증을 냈다."하지만 뭐 어찌 됐든 그렇게 당당하지는 못할 거예요. 우리 유라처럼 모든 면에서 걸릴 것이 없어야 이제 강현수랑 결혼도 하고 강씨 집안의 안주인이 될 수 있죠. 우리 이번 여행 다녀온 것도 다 유라 덕이잖아요."임정호는 자신의 작은딸을 떠올리며 그제야 기분이 나아진 듯 보였다. 이제 그에게 남은 희망은 임유라뿐이었다.한편, 강지혁은 임유진에게 핸드폰을 돌려주었다."누나 아버지 내가 어떻게 해줬으면 좋겠어?"강지혁은 웃으면서 얘기했지만, 그 안에 숨겨진 위험한 뜻을 임유진은 단번에 알아챘다. 또한, 알아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니었다면 분노에 차서 내뱉은 한마디를 강지혁이 그대로 들어줄 것 같았으니까."아니야. 이제 아빠와는 아무런 연결고리도 없으니까 이거로 된 거야."임정호가 이번에 한 일은 그저 임유진의 마음속에 남아있던 일말의 부녀의 정을 끊어놓았을 뿐이었다. 임유진은 이때까지 임정호가 그래도 자신의 어머니에게 조금은 감정이 남아있을 줄 알았다. 두 사람은 연애결혼이었고 자신의 어머니는 임정호가 제일 힘들고 제일 형편없었을 때 결혼을 결심했으니까.하지만 이제는 임유진도 깨달았다. 그건 단지 자신의 일방적인 희망일 뿐이었다는 것을. 또한, 제일 무서운 건 시간이고 예전에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했어도 시간에 따라 그 감정은 옅어지고 또 옅어져 결국에는 아무것도 남지 않는다는 것을.강지혁은 눈앞에서 초연한 얼굴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약간의 슬픔과 허탈함까지 보이는 임유진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뭔가가 그녀의 몸에서 빠져나가는 듯한 느낌이었고 자신은 아무리 노력해도 그것을 잡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강
지금의 강지혁은... 자신을 좋아하는 거겠지? 다만 이 좋아하는 감정이 언제까지 갈까?임유진은 걱정부터 앞섰다. 자신의 어머니도 임정호에게 시집을 갈 때 임정호가 평생 자신만 바라보며 사랑할 줄 알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보면 임정호의 마음에 어머니의 자리는 더는 없어 보였다. 영원한 사랑도 세월이 흐르면 그저 웃음거리가 될 뿐이다.임유진 자신 또한 소민준과 뜨거운 사랑을 하지 않았던가. 그녀는 자신이 평생 기댈 수 있는 사람을 드디어 찾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소민준은 그런 기대가 우습게 단번에 그녀와의 모든 관계를 끊어버렸다."누나도 내가 이러는 게 장난 같아 보여?"그때 강지혁이 갑자기 질문을 해왔고 임유진은 움찔하며 거기에 어떻게 대답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그녀는 강지혁이 일개 장난으로 자신에게 이런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가 품고 있는 이 감정이 얼마나 지속이 될지, 임유진은 거기에 대한 자신이 없었다. 아마 1년, 2년... 혹은 고작 몇 개월일지도 모르니까."누나가 말해 봐. 내가 진심이라는 걸 어떻게 해야 믿어 줄래?"강지혁은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며 말했다. 그리고 그가 내뱉은 다음 한마디에 임유진은 하마터면 소파에서 떨어질 뻔했다."우리 결혼할까? 이러면 내 진심을 믿어 줄 수 있겠어?"임유진은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결혼?"결혼이라는 두 글자가 이토록 쉽게 입에 담을 수 있는 단어였나?"그래, 결혼."강지혁은 임유진이 잘 못 들은 것이 아니라는 듯 한 번 더 강조했다."난 이번 생에 누나 말고 다른 여자를 내 옆에 둘 생각 같은 거 없어. 그러니까 내 곁에는 평생 누나라는 여자만 있게 되겠지. 그래서 결혼하고 싶다는데 뭐가 잘못됐어?""하지만...""아니면 누나는 나랑 결혼 같은 건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거야?"강지혁의 손가락이 임유진의 볼을 스쳤다. 임유진은 지금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그의 손가락이 닿은 부분은 뜨거운 불에 덴 것처럼 뜨거웠다.임유진이 어떻게
"헤어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안 하는 게 좋을 거야."강지혁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이며 두 눈은 집요하게 그녀를 쫓아다녔다."나와 연인이 되겠다고 한 건 누나니까 앞으로 연애는 나랑만 해야 해. 나도 누나밖에 없으니까."강지혁의 말은 마치 보이지 않는 거미줄처럼 그녀를 천천히 감싸왔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대표이사실에서 점심을 먹은 후 시간을 확인하고는 황급히 정리하고 자리를 떴다. 대표이사실을 막 나왔을 때 그녀는 고이준과 마주쳤고 그는 예의를 갖춰 인사했다."임유진 씨, 안녕하세요. 이제 막 가시는 겁니까?""네.""그럼 조심히 들어가십시오."그렇게 짧은 대화를 나눈 후 임유진은 엘리베이터에 탔고, 고이준 옆에 있던 회사 직원은 그녀를 뚫어지게 보더니 조심스럽게 물었다."고 비서님, 저분은... 누구세요?"누가 봐도 임유진의 행색은 초라하기 짝이 없었고 회사 직원은 더더욱 아닌 듯 보였다. 하지만 강지혁의 가장 측근인 고이준이 그녀에게 이토록 예의를 갖춰 인사했으니. 회사를 통털어 봐도 고이준이 이렇게 대하는 사람은 몇 없었다. 그러니 해당 직원이 이상하게 여기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저 분은..."고이준은 잠깐 뜸을 들이다가 말했다."건드려서는 안 될 분이죠."임유진은 강지혁이 좋아하는 사람이니까. 그녀를 건드리는 사람들에게는 아마 다시는 내일이 찾아오지 않을 수도 있다.임유진은 윤이 식당으로 돌아가서는 쉴 틈도 없이 또다시 배달을 가야 했다. 매번 강지혁이 많은 양의 배달을 시켜 GH그룹에서 점심을 먹고 돌아올 때면 임유진은 출근 시간에 혼자 농땡이를 피우는 듯한 죄책감이 들었다.하지만 그렇다고 강지혁의 주문을 거절할 수도 없었다. 매일 오는 이런 대량의 주문은 가게 수입에 너무 큰 도움이 됐으니까."어? 언니는 아직 안 왔어요?"몇 개의 배달을 다녀와 봐도 여전히 탁유미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항상 계산대를 지키고 있던 탁유미 자리에는 탁유미 엄마가 자리하고 있었다."윤이가 감기에 걸려서요. 근처 보건소에
"꼭 그럴 거예요. 그리고 언니 인생도 이제부터 시작인데 그런 말 하지 마세요. 앞으로는 더 좋은 일만 벌어질지 누가 알아요."탁유미는 조금은 신기한 눈빛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유진 씨 뭔가 변한 것 같아요.""제가요?"임유진이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네, 저희 가게에 처음 왔을 때 솔직히 유진 씨 억압받은 사람처럼 어두운 표정만 짓고 있었거든요. 그런데 지금 보면 그때 생각이 전혀 안 들 정도로 미래가 기대되는 사람처럼 보여요."탁유미가 보기 좋다는 듯 웃었다.미래가 기대되는 사람 같다고...? 임유진은 그 말에 멈칫했다. 한지영이 그녀의 사건을 열심히 알아보고 있어 줘서 그런가? 아니면... 강지혁과의 관계에 새로운 변화가 생겨서 그런 걸까?저녁, 임유진이 퇴근하고 윤이 식당에서 나오자 가게 근처에 차 한 대가 세워져 있었다. 바로 강지혁의 차였다. 임유진이 그쪽으로 걸어가자 차 문이 열렸고 뒷좌석에 앉아 있던 강지혁이 그녀를 향해 말했다."타.""나 스쿠터 타고 가야 해. 아니면 내일 아침 여기로 올 때 너무 불편해."강지혁의 저택 근처는 모두 강씨 일가의 땅이었기에 버스정류장까지 가려면 꽤 시간이 걸려야 했다.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이 웃었다."내일 아침도 내가 데려다주면 되지."그러고는 그녀의 손을 잡고 그대로 뒷좌석에 태웠다.임유진은 고작 80만 원을 벌면서 굳이 페라리로 출퇴근을 하게 된 상황에 마치 자신이 서민들 세상을 구경하러 일부러 아르바이트하는 부잣집 아가씨가 된 기분이었다."언제 왔어?"임유진은 조용한 분위기에 어색했는지 아무 화제나 던졌다. 강지혁과 연인이 됐다고는 하나 뭔지 모르게 그랑 있으면 어쩔 줄 모르겠는 임유진이었다."아마 6시 반쯤?"강지혁의 태연한 말에 임유진은 깜짝 놀랐다. 6시 반이라니. 현재 시각이 9시인데, 그러면 밖에서 2시간 반을 이러고 있었다는 거잖아?"계속 여기서 나 기다린 거야?"임유진이 놀라 물었다."응."강지혁은 대답한 후 임유진의 손을 자신의 두 손으로 감싸며 비
뼈아픈 경험 때문에 임유진은 더더욱 다른 사람에게 의지해서 살아가는 생활을 꺼리는 걸지도 모른다. 또 한 번 기댈 곳을 잃어버리면 그때는 임유진의 정신력이 드디어 버티지 못하게 될 거니까.강지혁은 그녀를 꿰뚫어 보듯 보다가 천천히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말했다."여기서 계속 일하고 싶은 거면 그렇게 해. 하지만 언제든 다른 일을 하고 싶으면 제일 먼저 나한테 얘기해 줘.""응, 알겠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말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참, 여기서 계속 나 기다린 거면 저녁은?"임유진이 물었다."아직 안 먹었어.""가게로 들어와서 먹지 그랬어!"작은 가게이긴 했지만, 종류가 다양해 선택범위가 넓었다. 임유진은 가게의 음식이 강지혁의 입맛에 안 맞을 거라는 생각은 아예 하지도 않은 듯싶다. 전에 강지혁과 셋방에서 살았을 때 아무리 조촐한 식사여도 강지혁이 싫은 티를 낸 적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그럼 다음에는 가게로 들어갈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자신이 괜한 소리를 한 건 아닌가 싶었다. 강지혁이 가게로 들어가면 아마 분위기가 달라질 테니까.어느새 두 사람은 강씨 저택에 도착했고 안으로 들어가자 저택에 있는 요리사가 강지혁을 위해 저녁을 준비해 두었다. 임유진도 어쩔 수 없이 같이 식사하게 됐다.식사하면서 임유진은 가게에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 배달일이라고는 하지만 그렇게 힘든 것도 아니었다. 피크타임인 점심과 저녁을 제외하고는 상당히 시간에 여유가 있었다."내가 휴가를 쓰겠다고 하면 언니는 아무 말 없이 허락해줘. 정말 고마운 분이지. 내 과거를 듣고도 나를 채용한 것부터가 너무 좋은 사람이야, 언니는."임유진은 말을 끝내고 갑자기 얼굴을 굳혔다."왜 그래? 사건이라도 떠오른 거야?"강지혁이 바로 그녀의 표정 변화를 알아차리고 물었다."그 사건 내가 알아봐 줄까?""지영이가 증거를 찾고 있으니까 아직은 괜찮아."임유진은 수저를 내려놓고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진지하게 물었다."나 정말 음주운전 한 거 아니고
임유진은 환하게 웃으며 줄곧 마음속에 있던 어두운 장막이 걷힌 것처럼 좋아했다. 강지혁이 자신을 믿는다는 소리에 이렇게나 기뻐하게 될 줄 몰랐다.강지혁은 그런 임유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다 말했다."단, 누나도 나를 믿어줘. 내가 누나를 조금만 더 일찍 만났더라면, 누나를 이렇게나 사랑하게 될 줄 알았더라면 난 절대 누나가 그런 고통을 받게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았을 거라고."그의 말에 임유진은 눈을 깜빡였다. 강지혁은 지금 그녀가 도움 하나 받지 못하게 주변에 압박을 넣어 그녀를 감방에 보내버린 일을 말하는 것일까?"응."임유진은 가볍게 대답했다. 과거에 두 사람 사이가 어떻든 강지혁과 잘 지내보려고 결심을 한 이상 그를 향한 공포감과 두려움, 그리고 미움까지도 서서히 내려놔야 한다고 생각했다.식사를 끝마친 후 임유진은 뭔가 떠오른 듯 강지혁을 향해 물었다."너 혹시 인공와우 전문가 중에 아는 사람 있어?""그건 왜?"강지혁이 뜬금없는 임유진의 말에 되물었다."그게 언니 아들인 윤이가 이제 조금만 있으면 인공와우를 착용하게 될지도 모르거든. 그래서 미리 그쪽 전문가를 알아두면 좋지 않을까 싶어서. 그리고... 언니의 수중에 있는 돈으로는 현재 제일 저렴한 모델밖에 구할 수가 없어. 그래서 혹시 가능하면 윤이에게 조금만 더 좋은 모델로 바꿔줄 수 있을까 해서."임유진은 조금은 긴장한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녀가 인터넷에서 알아본 바로는 인공와우 좋은 모델과 제일 저렴한 모델의 가격 차이가 꽤 컸다. 그리고 탁유미가 생각하는 가격에 따르면 아마 윤이에게는 일단 한쪽만 착용하게 할 것으로 보였다. 하지만 기왕이면 두 개를 다 착용하는 것이 효과도 더 좋을 것이다."누나가 다른 사람 때문에 나한테 부탁을 다 하네. 자기 일은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면서."강지혁이 웃으며 말했다."윤이한테는 나조차도 왜 이러나 싶을 정도로 신경을 많이 쓰게 돼. 윤이가 지금은 소리 내 말을 못 하지만 인공와우만 착용하게 되면 윤이도 평범한 아이들처럼 자랄 수 있을
강지혁은 강씨 가문을 이어갈 사람이고 앞으로 그의 자식이 그의 뒤를 잇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 그런데 임유진이 어떻게 자신 하나 때문에 강지혁에게 대를 끊으란 소리를 할 수 있겠는가. 그녀는 이제 이런 중요한 일도 까먹고 덥석 그와 사귀겠다는 말을 한 자신이 후회스러웠다.이런 사이를 얼마나 더 지속할 수 있을까?심지어 그녀가 변호사로 있었을 때 처리했던 사건을 보면 부잣집일수록 자식을 향한 집착이 더 컸었다."그게 무슨 말이야?"강지혁이 눈썹을 치켜세우며 묻자 임유진이 자신의 배를 바라보며 말했다."그때... 자... 자궁 쪽을 심하게 맞게 된 적이 있었어. 다행히 빨리 병원에 이송이 됐는데 의사 선생님이 그러더라고. 다친 곳이 심하게 손상을 입어서 앞으로 임신은 어려울 거라고..."이건 임유진이 절대 말하고 싶지 않은, 생각조차 하기 싫은 그런 일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먼저, 그것도 강지혁 앞에서 그녀는 이 말을 입에 올렸다.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갔다.심하게 맞았다고? 누가 때렸는데? 언제? 설마 감옥에 있었을 때? 그럼 그때 대체 얼마나 아팠다는 거야?!임유진이 겪었던 고통 하나하나가 강지혁을 무겁게 짓눌렀고 그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게 만들었다. 그녀의 모든 고통이 현재 고스란히 강지혁의 후회로 바뀌고 있었다.만약 그때 당시 강지혁이 임유진에게 조금이라도 자비를 베풀었더라면 그녀가 다른 사람들에게 함부로 다뤄지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혹시... 혹시 지금이라도 헤어지고 싶은 거면, 나는..."강지혁은 그녀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내가 말했지. 헤어질 수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말라고."강지혁은 말이 끝나자마자 임유진의 허리를 감싸 안아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아!"임유진이 깜짝 놀라 고개를 들자 강지혁의 칠흑 같은 어두운 눈동자와 눈이 마주쳤다."내가 원하는 사람은 누나뿐이고, 제일 사랑하는 사람도 누나뿐이야. 아이를 가질 수 없다 해도 상관없어. 난 누나를 놓치지
눈물을 보이고 싶지 않았는데 고이준은 말을 하면서 자꾸 목이 메고 코가 찡해 났다.“난 고이준 아저씨야. 아빠의 부하직원이지. 자, 그럼 이제 아저씨한테 이름이 뭔지 알려줄래?”“원래는 임현이었는데 엄마가 강선현으로 바꾸라고 했어요. 그래서 지금은 강선현이에요.”아이가 똘망똘망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답했다.‘이름을 일부러 선율 도련님과 비슷하게 맞춘 건가? 그리고 현... 혁이... 늘 회장님을 부르시던 호칭이 생각나 아이의 이름을 이렇게 지으신 건가?’임유진이 돌아온 건 무척 다행스러운 일이지만 강지혁은 지금 임유진과의 모든 걸 다 잊어버렸다. 심지어 그들은 당시 임유진의 사망을...고이준은 갑자기 마음이 무거워졌다.‘사모님이 돌아왔으니 이제 회장님도 모든 걸 다 기억할 수 있는 건가? 드디어 그 묵은 상처에 매듭이 지어지는 건가?’고이준은 강지혁과 임유진의 사이를 처음부터 지켜봐 온 사람이기에 두 사람이 느끼는 감정도 두 사람이 느끼지 못하는 감정도 그는 알 수 있었다. 또한 곁에서 계속 지켜봤었기에 두 사람이 함께 있는 지금이 얼마나 값진 순간인지 알 수 있었다.한편 소민아는 고이준과 얘기하는 현이를 질투와 분노가 가득한 눈빛으로 쏘아보았다.강지혁을 멋대로 아빠라고 불렀던 주제도 모르는 어린애가 정말 강지혁의 친딸일 줄은 아주 조금도 상상하지 못했다.이제 그녀의 딸은 상황이 무척이나 난처해졌다.강씨 가문에 진정한 친딸이 돌아왔는데 누가 과연 입양 딸 따위를 신경 쓸까.소민아는 순간 자신의 딸이 마땅히 누려야 하는 모든 게 갑자기 튀어나온 진짜 딸 때문에 빼앗겨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리고 더 불안한 건 언젠가는 그녀의 것이어야 하는 것들이 점점 더 멀어져가는 게 느껴졌다.임유진은 죽었을 때나 살아있는 지금이나 여전히 강지혁의 아내였으니까.그녀는 그 강지혁의 두 눈에서 눈물까지 보이게 한 여자였으니까.이제 그녀가 꿈꾸던 재벌가의 안주인이 되는 꿈은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같은 시각, 벤틀리 안.강지혁은 빨개진
그건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그의 목소리였다.예전에 이 여자에게 해줬던 말인가?순간 강지혁의 두 눈에서 아무런 예고도 없이 눈물이 떨어져나왔다.이에 임유진은 깜짝 놀라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강지혁이 설마 만나자마자 이렇게 울 줄 몰랐으니까.그녀는 허둥지둥하며 자신의 손으로 그의 눈물을 닦아주었다.“울지 마. 혁아, 뚝. 울지 마.”하지만 그녀가 눈물을 닦아내면 닦아낼수록 그의 눈에서는 더 많은 눈물이 쏟아져나왔다.사람들은 조금 전 상황으로 이미 충분히 놀라고 충격을 받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또다시 놀라고 말았다.그 강지혁이 울다니, 그것도 길 한복판에서!지금껏 강지혁이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될까? 아마 오늘 전까지는 아무도 없었을 거라고 사람들은 자신할 수 있었다.그리고 오늘 본 이 광경을 멋대로 떠벌리고 다녀도 누구 하나 믿어주는 사람이 없을 게 분명했다.강지혁 스스로도 자신이 이렇게 눈물을 흘리게 될 줄은 몰랐다. 머리는 분명히 이만 눈물을 멈추라고 하는데 몸은 통제를 잃은 건지 말을 듣지 않았다. 멈추려고 하면 할수록 더 심해져만 갈 뿐이었다.왜일까...대체 왜 이 여자의 한마디에 이렇게도 눈물이 흐르는 걸까.왜 이 여자의 손길이 이렇게도 그립고 가슴이 아픈 걸까.이 여자가 바로 임유진이라서?이미 세상에 없는 줄 알았는데 다시 돌아온 그의 아내라서?한때 그가 사랑했던 사람이라서?사랑했다고 한들 그는 결국 그녀의 모든 걸 잊어버렸다. 그렇다는 건 고작 그만큼일 뿐인 사랑이라는 게 아닐까?강지혁은 갑자기 임유진의 손을 덥석 잡더니 이내 빠른 걸음으로 옆에 주차된 차량으로 향했다.그리고 문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임유진과 강지혁은 검은색 벤틀리 속으로 몸을 숨겨버렸다.두 사람이 차에 타는 걸 봤음에도 그 누구도 차량 가까이 다가가려고 하는 사람은 없었다.“엄마랑 아빠는 왜 둘이서만 차에 탔어요?”순수한 호기심이 묻은 아이의 목소리에 사람들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고이준은 눈앞에 서 있는 귀여운
그런데 아직 스킨십이든 뭐든 하기도 전에 강지혁의 입에서 냉랭한 말이 흘러나왔다.“난 누가 멋대로 내 몸 만지는 거 질색이야. 만약 거기서 한 걸음만 더 가까이 다가와 기어코 내 몸에 손을 대면 그때는 두 번 다시 그 손을 볼 수 없을 거야.”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고 경고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인 말투인데 내용이 너무 소름 끼쳐 저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그리고 그때 그의 눈빛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옮겨지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일에만 몰두해있었다. 마치 그녀에게는 1초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소민아는 당시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하루아침에 손이 없어지는 경험은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히 농담이었겠지만 상대는 강지혁이라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그랬던 강지혁이 여자가 앞으로 바짝 다가와 말을 건 것도 모자라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볼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고 있다.소민아는 그 모습에 질투와 분노가 동시에 치솟았고 강지혁에게 속으로 얼른 그 여자의 손을 자르라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그때 들려온 고이준의 한마디에 그녀는 그만 생각이 멈춰버렸다.“사모님!”소민아는 얼이 빠진 얼굴로 고이준을 바라보았다.사모님이라니? 누가? 강지혁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그때 소민아의 머릿속으로 눈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이 강지혁의 죽은 아내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이 떠올랐다.‘서, 설마 사모님이라는게... 아니... 설마...’소민아가 경악하며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아니야. 아닐 거야! 말이 안 되잖아!’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고이준을 바라보았다.“고 비서님! 오랜만이에요!”이건 분명히 아까 고이준이 불렀던 ‘사모님’에 대한 대답이었다.고이준은 잔뜩 격앙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계셨군요! 저희가 얼마나 사모님께서 살아계시길 바랐는지 아십니까! 5년이나 지나서 드디어... 드디어 실현되었네요!”“
아이의 얼굴은 얼마 전에 봤던 사진 속 여자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게다가 아빠라니, 그 여자를 쏙 빼닮은 얼굴로 아빠라니.강지혁과 현이는 그렇게 서로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그시각 놀란 건 비난 강지혁뿐만이 아니었다. 고이준은 거의 넋을 잃은 채로 아이를 바라보았다.아이는 완전히 리틀 임유진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자세히 보면 어딘가 강지혁의 느낌도 있었다.‘이 아이 설마...!’그때 아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임유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엄마, 아빠가 나 좋아할 거라며? 왜 현이 안 안아줘? 아빠 정말 엄마 좋아했던 거 맞아? 정말 엄마 때문에 울었던 거 맞아?”아이는 진지하게 임유진이 해줬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임유진은 아이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오로지 강지혁만 바라보고 있었다.자신이 무슨 이유로 강지혁의 곁을 떠났는지, 왜 S 시에서는 죽은 상태가 되어 있는 건지, 그녀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둘이 어떻게 사랑했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어떤 맹세를 하고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났다.임유진은 눈물을 가득 맺힌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강지혁에게로 걸어갔다.지난날의 두 사람이 어땠는지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강지혁을 월세방에 데리고 와 그에게 라면을 끓여줬던 것도, 친척들이 그녀를 바보에게 팔아넘기려 했을 때 강지혁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도,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결혼하자고 했던 것도, 그가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지 말라는 말을 했던 것도 전부 다 떠올랐다.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5년이나 그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지금 5년 만에 드디어 그의 앞에 서게 되었다.“혁아, 나 돌아왔어.”임유진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네고는 손을 들어 강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아, 조금 차가운 이 체온은 확실히 그의 체온이 맞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고 또 세상에서 그녀를
임유진은 기억을 다 잃어버렸지만 그간 축적해온 지식은 아직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변호사였다는 걸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을 잃고도 그녀는 또다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택했고 자격증 시험도 단번에 통과했다.“네, 오랜만이네요...”이현우는 인사를 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바꿨다.‘혹시 소민아 씨와 싸웠다는 여자가 유진 씨인 건가?’이현우는 순간 이길 자신이 먼지 사라지듯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게 임유진을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그 유명한 승률 99%를 자랑하는 법조계의 대선배 변호사였으니까.그리고 임유진은 그 대선배 변호사의 그냥 제자도 아니고 애제자였다. 지난번 행사에서 그는 임유진을 마지막으로 더는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이현우는 자신만만한 임유진의 얼굴을 보고는 머리가 다 지끈해 났다.“꼴에 진짜 변호사였네?”그때 소민아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이 변호사님, 불편하시면 의뢰 거절하셔도 되죠. 하지만 이 여자가 건드린 건 내가 아니라 강 회장님이세요. 자기 딸한테 강 회장님 사진 보여주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니까요? 이거 소문 잘못 나면 사생아다 뭐다 엄청난 스캔들 되는 거 아시죠? 만약 정말 스캔들 터지면 그때는 회장님 사업 전체에 영향이 갈 겁니다.”소민아는 일부러 강지혁을 끌어들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이현우의 표정은 한순간에 흙빛이 되었다.임유진이 결혼은 안 했지만 딸이 하나 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딸에게 강지혁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라고 하라니?!아무리 딸에게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어도 그렇지 강지혁의 사진을 이용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혹시 S 시에서 강지혁 회장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모르나? 아니면... 그냥 딸이 너무 아빠를 찾아서 인터넷에서 아무 남자 사진이나 보여준 건가?’이현우가 조용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임유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딸은 사생아 따위가 아닌 강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에요.”“하, 유일한 딸? 강씨 가문
레스토랑은 계속 영업을 해야 하기에 경찰들은 도착한 후 그대로 소씨 모녀와 임유진 쪽의 세 사람을 경찰서에 태웠다.차 안에서 임유진이 경찰에게 이름을 얘기할 때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와이프와 똑같은 이름이었으니까.하지만 소민아는 아주 잠깐 놀라기만 했을 뿐 눈앞에 있는 임유진과 죽은 강지혁의 와이프를 굳이 연결 지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강지혁의 와이프가 5년 전에 죽었다는 것을 S 시의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까.‘이제 알겠네. 이름이 같다고 자기가 회장님 와이프인 줄 아는 리플리증후군 환자였잖아?’강지혁과 엮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소민아는 임유진이 아이까지 이용해 이러는 게 무척이나 같잖았다.이 세상에서 강지혁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인 강선율을 제외하고 그녀의 딸인 소안나밖에 없었다.한편 현이는 아직도 찢어진 반쪽짜리 사진이 신경 쓰였다. 이건 어렵게 구한 아빠의 사진이었으니까.“현아, 괜찮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이따 엄마랑 같이 아빠 보러 가면 그때 마음껏 사진 찍어.”그 말에 현이는 일리가 있다며 금방 활짝 웃었다.“그건 네 아빠 아니고 내 아빠야! 그리고 아빠는 사진 찍는 거 싫어해!”소안나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흥! 엄마가 그랬어.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아서 분명히 날 좋아할 거라고!”현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그러자 그걸 들은 한지영이 임유진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네가 정말 현이한테 그랬어?”“응.”임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사실 이 말을 한 건 아빠가 자리를 안 좋아하면 어떡하냐고 현이가 너무 걱정하고 있길래 뻔뻔하게 해본 말이었다.“5년 만에 아주 사람이 달라졌어? 응?”한지영이 능글거리며 임유진의 옆꾸리를 툭툭 쳤다.그러자 옆에 있던 소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뻔뻔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네. 회장님이 당신 같은 여자를 왜 좋아해? 웃기고 있어!”“남의 말 엿듣는 게 취미인가 봐요?”한지영이 가볍게
매니저는 소민아가 강지혁과 연관 있는 여자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최근에는 에스테 삽까지 열었다고 했으며 상류층 귀부인들과도 사이가 매우 좋다고 했다. 그러니 만약 이런 사람을 건드리면 장사는 거의 접어야 한다고 봐도 무방했다.‘안돼! 어떻게 버텨낸 건데 이럴 순 없어!’매니저는 얼른 소민아에게로 다가갔다.“괜찮으십니까?”그러자 소민아가 레스토랑이 다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대체 손님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내 딸이 여기서 다쳤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우리 딸의 아빠가 누군지 몰라?!”매니저는 이에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연신 사과해댔다.한편 현이는 고개를 들어 임유진과 한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랑 이모는 왜 싸웠어? 싸우는 건 나쁜 거라고 했잖아.”현이는 아까 임유진이 다가왔을 때 여자아이랑 싸운 것으로 꾸중을 들을 줄 알았다.그런데 갑자기 어른들 셋이서 싸움을 해댔다.임유진은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우리 현이, 엄마가 한 말 기억하고 있었구나? 싸우는 게 나쁜 건 맞지만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해. 그리고 우리는 이걸 정당방위라고 해.”“정당방위!”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정당방위?”그런데 그때 소민아가 그걸 듣더니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오늘 제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잔뜩 있는 데서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일부러 더 큰소리로 외쳤다.“난 절대 이대로 안 넘어가. 변호사 고용해서 오늘 나한테 이딴 짓 한 거 후회하게 해줄 거야!”소민아의 말에 소안나가 턱을 치켜 든 채 현이 쪽으로 다가갔다.“우리 엄마가 변호사 아저씨 부르면 너랑 너희 엄마는 아주 큰 벌이 내려질 거야!”이에 현이는 소안나보다 더 고개를 치켜들며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엄마는 변호사 아저씨를 불러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엄마가 변호사야!”“우리 엄마 엄청 돈 많아서
현이를 거칠게 밀어버린 건 소민아였고 나머지 반쪽짜리 사진을 손에 꽉 쥐고 있는 건 그녀의 딸이자 강씨 가문의 양녀인 소안나였다.임유진은 인터넷에서 해당 모녀를 본 적이 있기에 그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그때 임유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소민아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아빠? 기가 막혀서!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누구더러 아빠래?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리고 당장 내 딸한테 사과해! 내 딸이 누군 줄 알고 감히 손을 올려?!”소민아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마치 사과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사실 이곳은 소안나가 티비에서 보고 가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온 곳이었다. 만약 소안나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따위 곳에는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서민 레스토랑은 그녀와 그녀의 딸 급과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그런데 이런 수준 낮은 곳에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갑자기 딸이 웬 이상한 여자애랑 싸우고 게다가 그 싸움의 원인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강지혁의 사진이었다.소민아는 단호한 눈으로 아빠라고 외치는 아이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강지혁에게는 소안나라는 딸밖에 없고 그건 앞으로도 그러할 게 분명했다.임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쪽 딸이 누군지 당연히 알죠. 강씨 가문의 양녀 잖아요. 안 그래요? 그리고 내 딸의 주제는 내가 판단해요.”임유진은 레스토랑이기도 하고 아이들도 있었기에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얘기했다.하지만 그녀가 입밖에 내뱉은 ‘양녀’라는 두 글자가 소민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소민아는 다른 사람들이 소안나를 양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민아에게 아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그녀가 딸의 호칭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항상 ‘아가씨’라고 불렀다.“이봐, 미친 거야?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안 돼? 고작 이딴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네가 뭐 진짜 이 남자 와이프라도 된 것 같아? 그리고 이 사진은 또 어디서 났어? 음습하고 음침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응, 기사로 봤어.”임유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만약 혁이가 정말 날 잊고 그 여자를 좋아한다면 나도 깨끗하게 포기할 거야. 하지만... 만약 혁이가 여전히 내가 알던 혁이고 나만 사랑해주는 혁이면 나는 절대 포기 안 해.”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녀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강지혁이 정말 이제는 그녀를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별한 아내를 위해 아무도 만나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하지만 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강지혁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처럼 딱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기억을 잃은 요 몇 년간 임유진에게 들이대는 남자는 꽤 많았다. 심지어 하나같이 스펙이 좋고 얼굴도 훈훈했으며 다정다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심장이 떨리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그러다 기억이 차츰 회복되고 나서야 임유진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강지혁이라는 남자에게 줘버려서 더 이상 나눌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참, 지영이 너는? 남자친구 생겼어?”임유진이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없어. 안 그래도 노처녀라면서 엄마가 얼마나 재촉을 해대는지.”한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쓰게 웃었다.지난 5년간 오로지 백연신만 떠올리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멀리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백연신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이따금 나타나 있었다.그리고 백연신과 함께 있었을 때가 너무 행복해서 이제는 그 어떤 남자를 봐도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소개팅은 볼 때마다 큰 수확이 없었다.“아직 마음을 접지 못한 거구나...”임유진이 한지영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접으려고 노력해야지.”한지영이 웃었다.“만약 노력했는데도 정 안되면 그때는 그냥 혼자 살지 뭐! 아니지. 우리 현이랑 선율이 둘을 보고 살면 되지.”한지영은 말을 내뱉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아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