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음식 재료를 냉장고에 넣은 후 몸을 돌려 보니 거기에는 강지혁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던 임유진은 애써 그의 눈길을 피하며 부엌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강지혁에 의해 팔을 붙잡혔고 그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굿나잇 인사는?""잘 자."임유진의 짤막한 인사에 강지혁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누나, 왜 이렇게 점점 성의가 없어지는 것 같지?""..."임유진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누가 그러는데 누나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려면 내가 누나한테 철저하게 잘 보여야 한대."강지혁이 허리를 숙여 임유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래서 누나 의견도 듣고 싶은데. 내가 그렇게만 하면 진짜로 나를 좋아해 줄 거야?"임유진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방금 저 말 진짜 강지혁의 입에서 나온 거 맞아?’임유진의 기겁한 듯한 표정에 강지혁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왜? 내가 누나한테 잘 보이겠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임유진은 목구멍에 뭔가가 막힌 것처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강지혁이 그런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이제는 내가 얼마나 누나의 애정을 바라고 있는지 알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어떻게 잘 보여야 누나는 나를 좋아해 줄 거야?"임유진은 강지혁이 지금 매만지고 있는 자신의 입술이 점점 더 뜨거워 나는 것만 같았다. 또한, 심장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이런 말까지 내뱉을 줄은 몰랐다.강지혁은 진짜로 그녀를 좋아하는 걸까?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싶을 만큼? 어디까지가 진심인 거야, 대체?임유진은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추석 점심, 강지혁은 강문철이 있는 병원에 들렀다."너희 아버지 산소는 잘 다녀왔니?"강문철이 물었다.한때 잘
"네 아버지가 어떤 꼴이 났는지 벌써 잊은 거냐?"강문철은 또다시 했던 말을 반복했다."잊은 적 없어요. 그리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을 거라고."강지혁 역시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그럼 지금 당장 그 임유진이라는 아가씨 집에서 내보내거라. 그리고 다시는 네 앞에 얼씬도 못 하게 멀리 치워버려."강문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그건 안 될 것 같아요, 할아버지."강지혁은 아까 강문철이 임유진을 치워버리라고 했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머리보다 몸이 본능적으로 그 제안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너!"강문철은 단호한 손자의 말에 눈을 부릅뜨고 강지혁을 노려보았다."할아버지, 전 아버지 전철을 밟을 생각 같은 거 없어요. 난 모든 걸 내 손아귀에 쥐고 있을 거예요. 누나도 나라는 존재 없이는 못 살아가게끔 만들 거고요."강지혁은 무섭게 웃었다."그러니까 할아버지도 인제 내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만약 여기서 더 간섭하려 든다면 저도 그때는 아무리 할아버지라고 해도 가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강문철은 그 말에 화가 단단히 났는지 빨개진 얼굴로 연신 기침을 해댔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주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너 지금, 이 할애비를 협박하는 거냐?""설마요. 그냥 잘 알아두시라고요."강지혁은 강문철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 여자 털끝이라도 건드리면 저 진짜 가만 안 있을 겁니다, 할아버지."강문철은 강지혁의 경고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도대체 그 아가씨 어디가 그렇게 좋더냐? 뭐가 널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었냔 말이다."강문철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전 임유진을 병원까지 데려와서 봤을 때 그녀는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자였고 자신이 마음속에 있는 며느리 상하고는 거리가 멀었다."처음으로 나한테 자신을 누나라 부르라고 했던 여자니까요."강지혁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에게 앞으로 둘이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자고 했었다.임유진이 있어
매번 산소로 가는 길이 너무 힘들었을뿐더러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이곳저곳 성한 곳이 없었다. 보수공사를 진행하려고 했었지만 그럴 바에는 아예 묘원으로 옮겨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다만 그렇게 마음먹고 난 후 갑자기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렇게 3년 동안 성묘하러 가지도 못한 채 묘원으로 옮기는 생각은 꾹꾹 묵혀두었다. 3년 뒤 드디어 출소를 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돈이 없었다. 묘원으로 옮기는 돈은 물론이었고 무덤을 옮겨주는 일꾼들에게 줄 돈조차도 없었다.임유진이 어머니 산소가 있는 산 아래까지 와보니 거기에는 이미 성묘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묘지로 들어가기 전 수첩에 묘의 고유번호를 기재했다.어느덧 임유진의 차례가 다가왔고 그녀가 익숙하게 번호를 적고 묘지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담당자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아가씨, 이 번호는 이제 여기 없어. 옮겨간 지가 언젠데.""옮겨 갔다니요?"임유진이 깜짝 놀라 물었다."몰랐어? 여기 보면 임정호라는 사람이 옮겨 갔는데? 산소 주인 남편 맞지?"직원이 수첩을 보여주며 말했다.그에 임유진이 일전 임정호가 무덤을 옮기는 일로 자신을 불렀던 일이 떠올랐다. 무덤을 옮긴다는 임정호의 말에 집으로 찾아가 보니 임정호와 계모는 무덤을 옮기는 말보다 강현수에 대해 더 많이 캐물었고 그녀는 그렇게 무덤을 옮기는 일이 흐지부지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아무런 말도 없이 옮겨버리다니."혹시 어디로 옮겼는지는 아세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그거야 나는 모르지."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역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봐야겠는지 직원에게 부탁했다."그럼... 그럼 제가 잠깐만 올라갔다 오면 안 될까요? 진짜 옮겨간 게 맞는지 확인만 되면 금방 다시 내려올게요."임유진의 모습에 직원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허락해 주었다.임유진은 거의 뛰어가다시피 산을 올랐다. 그렇게 힘겹게 산을 올라 어머니가 묻혀 있는 자리에 도착해보니 그곳은 어느새 평지가 되어 있었고 아무것도 없었다.‘진짜 옮긴 거야.
그때 옆에 있던 이웃이 그녀에게 다가와 아빠와 새엄마가 여행을 가서 지금 집에 없다고 했다. 임유라 같은 경우는 이웃의 말에 따르면 밖에서 큰 집을 사서 이젠 집에 돌아오는 횟수가 드물다고 한다.임유진은 문득 아빠와 새엄마가 일부러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 그녀가 돌아와 엄마에게 성묘할 걸 알고 일부러 집을 비워둔 게 뻔했다.백억이라, 아빠가 요구한 금액만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아찔해 났다.지금의 임유진이 대체 무슨 수로 아빠에게 백억을 줄 수 있겠는가!그녀는 이웃들과 작별한 뒤 임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야? 한번 만나, 너한테 할 얘기 있어.”“미안한데 나 지금 시간 없어.”임유라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그럼 이것만 대답해. 아빠가 우리 엄마 무덤을 어디로 옮겼어?”임유진이 물었다.“그건 나야 모르지.”임유라는 실실 비꼬면서 대답했다.“그럼 두 분 지금 어디로 여행 갔는지는 알고 있겠지?”“정말 미안한데 나 진짜 몰라. 나중에 돌아오시거든 네가 찾는다고 말씀드릴게. 그럼 됐지?”임유라가 말했다.곧이어 전화기 너머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립스틱 색상 유라 씨한테 안 어울려요.”임유진은 흠칫 놀랐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강현수였다.이어서 임유라가 애교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난 또 현수 씨가 이 색상 좋아하는 줄 알았죠. 나중에 다른 컬러로 바꿀게요.”그녀는 뒤늦게 휴대폰에 대고 임유진에게 말했다.“이만 끊을게. 나 지금 좀 바쁘거든.”곧이어 통화가 끊겼다.임유진은 손에 쥔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며칠 전에 강현수를 만났을 때,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과 지금 임유라에게 립스틱 색상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둥 이런 얘기는 너무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강현수 같은 남자는 아무래도 그저 신선감 때문에 임유진에게 그런 말을 한 듯싶다. 마치 그녀에게만 특별한 감정이 있을 줄 알았는데 실은 수많은 여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전
문득 아무런 립스틱도 바르지 않은 자연스러운 입술 컬러가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은은한 핑크빛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상이었다.“지워요.”강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네?”임유라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립스틱 당장 지우라고요.”강현수가 말했다.임유라는 어안이 벙벙했다. 당장 지우라니... 지금은 연회장으로 가는 차 안인데, 오늘 연회에서 가장 눈부신 여자가 되려고 화려하게 차려입었는데 립스틱을 지우면 메이크업 전체가 무너질 것이고 그때 가서 눈부시기는커녕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게 뻔하다.“지금요? 하지만 이제 곧 연회장에 도착하는데요...”“당장 지워요.”강현수는 그녀의 말을 자르고 날카로운 눈길로 째려봤다.임유라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현수를 감히 건드릴 엄두가 안 나니까.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티슈를 꺼내 립스틱을 지우기 시작했다.한편 강현수는 옆에서 또다시 은팔찌를 더듬더니 고개 숙여 살며시 어루만졌다. 마치 연인을 바라보듯이 한없이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적어도 임유라는 그의 이런 자상한 눈빛을 마주한 적이 없다.그녀는 립스틱을 닦으며 손거울에 비친 강현수의 부드러운 눈길을 바라보자 질투가 저절로 밀려왔다.그녀는 그제야 그 팔찌가 뭘 의미하는지 알게 됐다. 강현수의 그림 속 어린 소녀가 손목에 은팔찌 두 개를 착용하고 있었다.그러니까 지금 저 은팔찌가 바로 그 소녀의 팔찌란 말인가?요 몇 년간 연예계에서 강현수가 사람 한 명 찾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그를 위해 이 사람을 찾아준다면 추후 작품활동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임유라는 처음에 이 소문이 단지 찌라시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 바닥엔 근거 없는 어수선한 소문들이 만무하니까.다만 인제 보니 그런 것만은 같지 않았다.강현수가 찾는 사람은 바로 그림 속 소녀일 것이다! 임유라는 그에게 물은 적도 없고, 자신이 그 그림을 봤다는 걸 얘기하지도 않았다. 그날 강현수 몰래 화실에 들어간 거니까.하지만 그가 찾는 사람
임유진은 어두운 걸 싫어해 잘 때도 불을 켜고 자는 걸 강지혁은 잘 알고 있다.예전에 월세방에 지낼 때 그녀는 뒤로 가면서 한동안 불을 끄고 잘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 또다시 불을 켜고 자는 습관으로 돌아간 듯싶었다.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방에 없나?’막 자리를 뜨려는데 무거운 한숨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있어!’강지혁은 불쑥 걸음을 멈추고 벽을 쓰다듬으며 스위치를 켰다. 순간 방 안이 환하게 빛났다.임유진은 가녀린 체구로 방 안의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얼굴을 다리 사이에 파묻고는 어깨를 들썩거렸는데 침울한 흐느낌이 간혹 들려왔다.그녀가 지금 우는 걸까?강지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재빨리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서 그녀를 바라봤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임유진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머리를 살짝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를 쳐다봤다.두 눈이 빨갛게 부은 걸 보니 한참 운 듯싶었다.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으로 돼버렸고 가냘프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순간 강지혁은 심장을 쿡쿡 찌르듯이 아파졌다.임유진은 좀처럼 울지 않는데 매번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강지혁은 어쩔 바를 몰랐다.“말해, 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한참 후에야 제 목소리를 찾았다.임유진은 코를 훌쩍거리며 겨우 말했다.“엄마가... 엄마가 어디 있는지 못 찾겠어. 찾을 수가 없어...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고...”그녀는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집에 돌아온 후 한참 동안 생각해봤지만 아빠가 엄마 무덤을 대체 어디로 옮긴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묘원? 아니면 다른 어떤 매장 가능한 곳이 있을까?찾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두서가 안 잡혔다.나중에 아빠와 새엄마, 그리고 임유라까지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해답을 얻지 못했다.그녀는 더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백억을 달라고? 저 자신을 팔아도 백억은 안 될 텐데!임유진은 문득 강지혁을 빤히 쳐다봤다.
“알아.”임유진은 울먹이며 대답했다. 지금으로선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백억을 구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이때 강지혁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내가 싫어.”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김빠진 공처럼 축 처지고 눈가에 남은 마지막 생기도 사라졌다.당연히 싫겠지. 그녀가 뭐라고 옆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강지혁이 선뜻 백억을 내놓겠는가.임유진은 속으로 자신을 맹비난했다. 강지혁이 그녀에 대한 호감이 백억 가치나 된다고 여기다니, 그녀는 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강지혁을 잡았던 손도 무기력하게 내려놓았다.강지혁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누나 일단 좀 쉬어야겠어. 사용인한테 먹을 것 좀 가져오라고 할 테니 뭐라도 좀 먹고 자.”말을 마친 강지혁은 방에서 나왔다.커다란 방안에 임유진만 덩그러니 남았다.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을 꼭 감싸 안았다.‘역시... 또 나 혼자야.’외로움과 무기력함은 한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저 자신을 팔겠다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니, 세상 참....강지혁은 곧게 서재로 들어가 고이준에게 전화했다.“오늘 유진의 행적 조사해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토록 힘들어하는 건지.”“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대답을 마치고 한 시간 만에 조사를 마치더니 그에게 전화해 보고드렸다.“무덤을 옮겨?”강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네, 일주일 전에 임유진 씨 아버님이 유진 씨 어머님 무덤을 옮겼어요. 오늘 유진 씨가 성묘하러 갔다가 허탕 쳤다고 합니다. 그 마을 성묘 등록 담당자가 말하기를 유진 씨는 오늘 어머님 무덤을 옮긴 사실을 알게 된 후 매우 격분하며 기어코 산에 오르겠다고 하시더니 하산 후 급히 스쿠터를 타고 떠나갔대요...”고이준은 이어서 임유진이 임씨 일가에 찾아가 이웃들과 나눈 대화를 모조리 강지혁에게 알렸고 또한 그녀가 오늘 아빠와 임유라와 통화한 기록도 알려주었다.“통화목록을 보면 임유진 씨가 가족들에게 무려 38번이나 전화했지만
강지혁은 음식을 들고 그녀 앞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누나, 어머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정말 알고 싶다면 지금 바로 이 음식들 먹는 게 좋을 거야.”임유진은 머리를 번쩍 들고 빨갛게 부은 두 눈으로 그를 의아하게 쳐다봤다.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설마...“우리 엄마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아?”“이거 다 먹으면 알려줄게.”강지혁이 대답했다.임유진은 곧바로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하듯 음식을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었다.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허겁지겁 음식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완전히 달랐으니까.다만 이로써 그녀에게 엄마 무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또 더 울었는지 얼굴에 눈물 자국이 흥건했고 두 눈도 아까보다 더 빨갛게 부어올랐다.방금 그가 떠난 후 그녀는 또 울었단 말인가?“천천히 먹어. 누나 아버님이 오늘 어머님 무덤을 남북극에 옮겼다 해도 내가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강지혁이 말했다.“그런데 누나 먹다가 체하면 괜히 시간만 더 낭비할 거야.”임유진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수저를 쥔 손을 머뭇거리다가 확연히 속도를 늦추고 침착하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강지혁은 그녀가 다 먹은 후에야 티슈 한 장 뽑아서 자상하게 입 주변을 닦아주었다.“나... 다 먹었어. 엄마 무덤 어디 있대? 얼른 말해줘.”임유진은 초조하고 기대 어린 눈길로, 또 살짝 걱정이 휩싸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마치 이 기대가 무산될까 봐, 실은 그가 엄마 무덤이 어디 있는지 모를까 봐 두려움에 떠는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다가 채 마르지 않은 눈물도 닦아주었다.“가서 얼굴부터 씻어. 누나 이런 모습을 어머님이 보시면 분명 속상해하실 거야.”강지혁이 말했다.“하지만...”“왜? 내가 어머님 무덤에 안 데리고 갈까 봐?”강지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렇지만 누난 지금 믿을 사람이 나밖에 없어. 오직 나만 누나를 데리고 어머님 무덤에 찾아갈수 있으니까.”그녀는 강지혁을
그런데 아직 스킨십이든 뭐든 하기도 전에 강지혁의 입에서 냉랭한 말이 흘러나왔다.“난 누가 멋대로 내 몸 만지는 거 질색이야. 만약 거기서 한 걸음만 더 가까이 다가와 기어코 내 몸에 손을 대면 그때는 두 번 다시 그 손을 볼 수 없을 거야.”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고 경고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인 말투인데 내용이 너무 소름 끼쳐 저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그리고 그때 그의 눈빛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옮겨지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일에만 몰두해있었다. 마치 그녀에게는 1초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소민아는 당시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하루아침에 손이 없어지는 경험은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히 농담이었겠지만 상대는 강지혁이라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그랬던 강지혁이 여자가 앞으로 바짝 다가와 말을 건 것도 모자라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볼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고 있다.소민아는 그 모습에 질투와 분노가 동시에 치솟았고 강지혁에게 속으로 얼른 그 여자의 손을 자르라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그때 들려온 고이준의 한마디에 그녀는 그만 생각이 멈춰버렸다.“사모님!”소민아는 얼이 빠진 얼굴로 고이준을 바라보았다.사모님이라니? 누가? 강지혁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그때 소민아의 머릿속으로 눈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이 강지혁의 죽은 아내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이 떠올랐다.‘서, 설마 사모님이라는게... 아니... 설마...’소민아가 경악하며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아니야. 아닐 거야! 말이 안 되잖아!’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고이준을 바라보았다.“고 비서님! 오랜만이에요!”이건 분명히 아까 고이준이 불렀던 ‘사모님’에 대한 대답이었다.고이준은 잔뜩 격앙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계셨군요! 저희가 얼마나 사모님께서 살아계시길 바랐는지 아십니까! 5년이나 지나서 드디어... 드디어 실현되었네요!”“
아이의 얼굴은 얼마 전에 봤던 사진 속 여자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게다가 아빠라니, 그 여자를 쏙 빼닮은 얼굴로 아빠라니.강지혁과 현이는 그렇게 서로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그시각 놀란 건 비난 강지혁뿐만이 아니었다. 고이준은 거의 넋을 잃은 채로 아이를 바라보았다.아이는 완전히 리틀 임유진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자세히 보면 어딘가 강지혁의 느낌도 있었다.‘이 아이 설마...!’그때 아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임유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엄마, 아빠가 나 좋아할 거라며? 왜 현이 안 안아줘? 아빠 정말 엄마 좋아했던 거 맞아? 정말 엄마 때문에 울었던 거 맞아?”아이는 진지하게 임유진이 해줬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임유진은 아이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오로지 강지혁만 바라보고 있었다.자신이 무슨 이유로 강지혁의 곁을 떠났는지, 왜 S 시에서는 죽은 상태가 되어 있는 건지, 그녀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둘이 어떻게 사랑했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어떤 맹세를 하고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났다.임유진은 눈물을 가득 맺힌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강지혁에게로 걸어갔다.지난날의 두 사람이 어땠는지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강지혁을 월세방에 데리고 와 그에게 라면을 끓여줬던 것도, 친척들이 그녀를 바보에게 팔아넘기려 했을 때 강지혁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도,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결혼하자고 했던 것도, 그가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지 말라는 말을 했던 것도 전부 다 떠올랐다.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5년이나 그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지금 5년 만에 드디어 그의 앞에 서게 되었다.“혁아, 나 돌아왔어.”임유진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네고는 손을 들어 강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아, 조금 차가운 이 체온은 확실히 그의 체온이 맞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고 또 세상에서 그녀를
임유진은 기억을 다 잃어버렸지만 그간 축적해온 지식은 아직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변호사였다는 걸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을 잃고도 그녀는 또다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택했고 자격증 시험도 단번에 통과했다.“네, 오랜만이네요...”이현우는 인사를 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바꿨다.‘혹시 소민아 씨와 싸웠다는 여자가 유진 씨인 건가?’이현우는 순간 이길 자신이 먼지 사라지듯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게 임유진을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그 유명한 승률 99%를 자랑하는 법조계의 대선배 변호사였으니까.그리고 임유진은 그 대선배 변호사의 그냥 제자도 아니고 애제자였다. 지난번 행사에서 그는 임유진을 마지막으로 더는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이현우는 자신만만한 임유진의 얼굴을 보고는 머리가 다 지끈해 났다.“꼴에 진짜 변호사였네?”그때 소민아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이 변호사님, 불편하시면 의뢰 거절하셔도 되죠. 하지만 이 여자가 건드린 건 내가 아니라 강 회장님이세요. 자기 딸한테 강 회장님 사진 보여주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니까요? 이거 소문 잘못 나면 사생아다 뭐다 엄청난 스캔들 되는 거 아시죠? 만약 정말 스캔들 터지면 그때는 회장님 사업 전체에 영향이 갈 겁니다.”소민아는 일부러 강지혁을 끌어들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이현우의 표정은 한순간에 흙빛이 되었다.임유진이 결혼은 안 했지만 딸이 하나 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딸에게 강지혁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라고 하라니?!아무리 딸에게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어도 그렇지 강지혁의 사진을 이용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혹시 S 시에서 강지혁 회장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모르나? 아니면... 그냥 딸이 너무 아빠를 찾아서 인터넷에서 아무 남자 사진이나 보여준 건가?’이현우가 조용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임유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딸은 사생아 따위가 아닌 강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에요.”“하, 유일한 딸? 강씨 가문
레스토랑은 계속 영업을 해야 하기에 경찰들은 도착한 후 그대로 소씨 모녀와 임유진 쪽의 세 사람을 경찰서에 태웠다.차 안에서 임유진이 경찰에게 이름을 얘기할 때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와이프와 똑같은 이름이었으니까.하지만 소민아는 아주 잠깐 놀라기만 했을 뿐 눈앞에 있는 임유진과 죽은 강지혁의 와이프를 굳이 연결 지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강지혁의 와이프가 5년 전에 죽었다는 것을 S 시의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까.‘이제 알겠네. 이름이 같다고 자기가 회장님 와이프인 줄 아는 리플리증후군 환자였잖아?’강지혁과 엮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소민아는 임유진이 아이까지 이용해 이러는 게 무척이나 같잖았다.이 세상에서 강지혁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인 강선율을 제외하고 그녀의 딸인 소안나밖에 없었다.한편 현이는 아직도 찢어진 반쪽짜리 사진이 신경 쓰였다. 이건 어렵게 구한 아빠의 사진이었으니까.“현아, 괜찮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이따 엄마랑 같이 아빠 보러 가면 그때 마음껏 사진 찍어.”그 말에 현이는 일리가 있다며 금방 활짝 웃었다.“그건 네 아빠 아니고 내 아빠야! 그리고 아빠는 사진 찍는 거 싫어해!”소안나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흥! 엄마가 그랬어.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아서 분명히 날 좋아할 거라고!”현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그러자 그걸 들은 한지영이 임유진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네가 정말 현이한테 그랬어?”“응.”임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사실 이 말을 한 건 아빠가 자리를 안 좋아하면 어떡하냐고 현이가 너무 걱정하고 있길래 뻔뻔하게 해본 말이었다.“5년 만에 아주 사람이 달라졌어? 응?”한지영이 능글거리며 임유진의 옆꾸리를 툭툭 쳤다.그러자 옆에 있던 소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뻔뻔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네. 회장님이 당신 같은 여자를 왜 좋아해? 웃기고 있어!”“남의 말 엿듣는 게 취미인가 봐요?”한지영이 가볍게
매니저는 소민아가 강지혁과 연관 있는 여자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최근에는 에스테 삽까지 열었다고 했으며 상류층 귀부인들과도 사이가 매우 좋다고 했다. 그러니 만약 이런 사람을 건드리면 장사는 거의 접어야 한다고 봐도 무방했다.‘안돼! 어떻게 버텨낸 건데 이럴 순 없어!’매니저는 얼른 소민아에게로 다가갔다.“괜찮으십니까?”그러자 소민아가 레스토랑이 다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대체 손님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내 딸이 여기서 다쳤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우리 딸의 아빠가 누군지 몰라?!”매니저는 이에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연신 사과해댔다.한편 현이는 고개를 들어 임유진과 한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랑 이모는 왜 싸웠어? 싸우는 건 나쁜 거라고 했잖아.”현이는 아까 임유진이 다가왔을 때 여자아이랑 싸운 것으로 꾸중을 들을 줄 알았다.그런데 갑자기 어른들 셋이서 싸움을 해댔다.임유진은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우리 현이, 엄마가 한 말 기억하고 있었구나? 싸우는 게 나쁜 건 맞지만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해. 그리고 우리는 이걸 정당방위라고 해.”“정당방위!”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정당방위?”그런데 그때 소민아가 그걸 듣더니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오늘 제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잔뜩 있는 데서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일부러 더 큰소리로 외쳤다.“난 절대 이대로 안 넘어가. 변호사 고용해서 오늘 나한테 이딴 짓 한 거 후회하게 해줄 거야!”소민아의 말에 소안나가 턱을 치켜 든 채 현이 쪽으로 다가갔다.“우리 엄마가 변호사 아저씨 부르면 너랑 너희 엄마는 아주 큰 벌이 내려질 거야!”이에 현이는 소안나보다 더 고개를 치켜들며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엄마는 변호사 아저씨를 불러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엄마가 변호사야!”“우리 엄마 엄청 돈 많아서
현이를 거칠게 밀어버린 건 소민아였고 나머지 반쪽짜리 사진을 손에 꽉 쥐고 있는 건 그녀의 딸이자 강씨 가문의 양녀인 소안나였다.임유진은 인터넷에서 해당 모녀를 본 적이 있기에 그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그때 임유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소민아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아빠? 기가 막혀서!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누구더러 아빠래?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리고 당장 내 딸한테 사과해! 내 딸이 누군 줄 알고 감히 손을 올려?!”소민아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마치 사과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사실 이곳은 소안나가 티비에서 보고 가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온 곳이었다. 만약 소안나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따위 곳에는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서민 레스토랑은 그녀와 그녀의 딸 급과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그런데 이런 수준 낮은 곳에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갑자기 딸이 웬 이상한 여자애랑 싸우고 게다가 그 싸움의 원인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강지혁의 사진이었다.소민아는 단호한 눈으로 아빠라고 외치는 아이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강지혁에게는 소안나라는 딸밖에 없고 그건 앞으로도 그러할 게 분명했다.임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쪽 딸이 누군지 당연히 알죠. 강씨 가문의 양녀 잖아요. 안 그래요? 그리고 내 딸의 주제는 내가 판단해요.”임유진은 레스토랑이기도 하고 아이들도 있었기에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얘기했다.하지만 그녀가 입밖에 내뱉은 ‘양녀’라는 두 글자가 소민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소민아는 다른 사람들이 소안나를 양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민아에게 아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그녀가 딸의 호칭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항상 ‘아가씨’라고 불렀다.“이봐, 미친 거야?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안 돼? 고작 이딴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네가 뭐 진짜 이 남자 와이프라도 된 것 같아? 그리고 이 사진은 또 어디서 났어? 음습하고 음침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응, 기사로 봤어.”임유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만약 혁이가 정말 날 잊고 그 여자를 좋아한다면 나도 깨끗하게 포기할 거야. 하지만... 만약 혁이가 여전히 내가 알던 혁이고 나만 사랑해주는 혁이면 나는 절대 포기 안 해.”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녀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강지혁이 정말 이제는 그녀를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별한 아내를 위해 아무도 만나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하지만 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강지혁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처럼 딱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기억을 잃은 요 몇 년간 임유진에게 들이대는 남자는 꽤 많았다. 심지어 하나같이 스펙이 좋고 얼굴도 훈훈했으며 다정다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심장이 떨리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그러다 기억이 차츰 회복되고 나서야 임유진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강지혁이라는 남자에게 줘버려서 더 이상 나눌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참, 지영이 너는? 남자친구 생겼어?”임유진이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없어. 안 그래도 노처녀라면서 엄마가 얼마나 재촉을 해대는지.”한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쓰게 웃었다.지난 5년간 오로지 백연신만 떠올리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멀리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백연신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이따금 나타나 있었다.그리고 백연신과 함께 있었을 때가 너무 행복해서 이제는 그 어떤 남자를 봐도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소개팅은 볼 때마다 큰 수확이 없었다.“아직 마음을 접지 못한 거구나...”임유진이 한지영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접으려고 노력해야지.”한지영이 웃었다.“만약 노력했는데도 정 안되면 그때는 그냥 혼자 살지 뭐! 아니지. 우리 현이랑 선율이 둘을 보고 살면 되지.”한지영은 말을 내뱉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아니나
“하지만 나는 임현이 좋아. 엄마, 나 계속 임현 할래. 그렇게 해줘.”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임유진에게 말했다.“오빠는 강선율이고 현이는 강선현이면 얼마나 좋아. 사람들이 오빠랑 남매인 거 바로 알게 될걸? 현이 오빠 갖고 싶어 했잖아.”임유진이 아이를 설득했다.“그럼 오빠한테 임율로 바꾸라고 하면 안 돼?”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럼 오빠 만나고 현이가 직접 물어봐. 어때?”“좋아!”현이는 뭔가를 굳게 결심한 듯 이를 앙다물고 눈을 부릅떴다.한지영은 아이의 표정과 행동에 소리 내 웃었다.“현이는 임현이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좋아?”“네, 좋아요!”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왜? 엄마가 계속 그렇게 불러줘서 그게 더 좋은 거야?”한지영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그러자 임유진이 딸 대신 대답했다.“아니, 두 글자 이름이 더 멋있다고 생각해서 임현이 더 좋다고 하는 거야. 만약 강현으로 하라고 했으면 바로 동의했을걸?”“뭐? 하하하. 그런데 강현은 조금 남자애 이름 같잖아.”“현이는 그런 거 상관 안 해. 오히려 멋있다면서 좋아할걸? 그냥 두 글자 이름이 더 좋은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크게 웃으면 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때 음식이 도착하고 세 사람은 식사부터 했다.현이는 밥을 먹은 후 키즈 존으로 달려가 신나게 놀았다. 이곳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레스토랑이라 다른 곳보다 놀 수 있는 공간이 크고 그 덕에 또래 아이들도 더 많았다.키즈 존은 테이블과 멀리 않은 곳에 있어 임유진과 한지영은 편하게 식사를 하며 이따금 시선을 옆으로 돌려 한번씩 확인만 했다.“이따 현이 데리고 강지혁 만나러 갈 거야?”한지영이 물었다.“응, 먼저 집으로 가보려고.”사실 임유진은 기억을 회복한 다음 바로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두 개의 번호 중 하나는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이 흘러나왔고 다른 한 개 번호는 아예 신호음조차 가지 않았다.아무래도 낯선 번호는 걸려오지 못하게 제안해 놓은 것 같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차라
“아니야. 아빠가 그간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았던 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임유진이 말했다.“현이 보게 되면 아마 엄청 좋아할 거야!”‘날 찾지 않은 이유는 아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겠지?’임유진은 강지혁을 기억해낸 후 그의 기사를 찾아보다 그녀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로 나온 것을 봤었다.열차가 S 시에 도착하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출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렇게 걸어 나가보니 가장 먼저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한지영이었다.임유진은 그녀를 본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다.그간 기억을 아예 통째로 잃었던 터라 그녀는 한지영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기억이 회복된 후에야 급하게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한지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덜덜 떨었던 것을 말이다.그러다 영상 통화를 걸고서야 한지영은 그녀가 정말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지영아!”임유진이 큰소리로 외치자 한지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한지영은 임유진을 보자마자 눈가가 빨개지더니 눈물을 글썽였다.임유진이 딸의 손을 잡고 그녀 앞에 섰을 때 한지영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너 진짜... 살아있었어. 네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거 난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유진아!!”한지영은 임유진을 와락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그리고 임유진도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미안해... 많이 걱정했지.”“그걸 말이라고!”한지영은 울먹거리며 말하다가 이내 임유진의 옆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판박이였지만 언뜻 강지혁의 모습도 보였다.일전 영상 통화로 이미 얼굴을 봤었지만 실물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이모, 안녕하세요!”현이가 똘망한 눈으로 한지영을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이에 한지영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걸 느끼며 아이의 말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