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어두운 걸 싫어해 잘 때도 불을 켜고 자는 걸 강지혁은 잘 알고 있다.예전에 월세방에 지낼 때 그녀는 뒤로 가면서 한동안 불을 끄고 잘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 또다시 불을 켜고 자는 습관으로 돌아간 듯싶었다.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방에 없나?’막 자리를 뜨려는데 무거운 한숨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있어!’강지혁은 불쑥 걸음을 멈추고 벽을 쓰다듬으며 스위치를 켰다. 순간 방 안이 환하게 빛났다.임유진은 가녀린 체구로 방 안의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얼굴을 다리 사이에 파묻고는 어깨를 들썩거렸는데 침울한 흐느낌이 간혹 들려왔다.그녀가 지금 우는 걸까?강지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재빨리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서 그녀를 바라봤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임유진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머리를 살짝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를 쳐다봤다.두 눈이 빨갛게 부은 걸 보니 한참 운 듯싶었다.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으로 돼버렸고 가냘프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순간 강지혁은 심장을 쿡쿡 찌르듯이 아파졌다.임유진은 좀처럼 울지 않는데 매번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강지혁은 어쩔 바를 몰랐다.“말해, 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한참 후에야 제 목소리를 찾았다.임유진은 코를 훌쩍거리며 겨우 말했다.“엄마가... 엄마가 어디 있는지 못 찾겠어. 찾을 수가 없어...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고...”그녀는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집에 돌아온 후 한참 동안 생각해봤지만 아빠가 엄마 무덤을 대체 어디로 옮긴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묘원? 아니면 다른 어떤 매장 가능한 곳이 있을까?찾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두서가 안 잡혔다.나중에 아빠와 새엄마, 그리고 임유라까지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해답을 얻지 못했다.그녀는 더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백억을 달라고? 저 자신을 팔아도 백억은 안 될 텐데!임유진은 문득 강지혁을 빤히 쳐다봤다.
“알아.”임유진은 울먹이며 대답했다. 지금으로선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백억을 구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이때 강지혁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내가 싫어.”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김빠진 공처럼 축 처지고 눈가에 남은 마지막 생기도 사라졌다.당연히 싫겠지. 그녀가 뭐라고 옆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강지혁이 선뜻 백억을 내놓겠는가.임유진은 속으로 자신을 맹비난했다. 강지혁이 그녀에 대한 호감이 백억 가치나 된다고 여기다니, 그녀는 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강지혁을 잡았던 손도 무기력하게 내려놓았다.강지혁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누나 일단 좀 쉬어야겠어. 사용인한테 먹을 것 좀 가져오라고 할 테니 뭐라도 좀 먹고 자.”말을 마친 강지혁은 방에서 나왔다.커다란 방안에 임유진만 덩그러니 남았다.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을 꼭 감싸 안았다.‘역시... 또 나 혼자야.’외로움과 무기력함은 한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저 자신을 팔겠다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니, 세상 참....강지혁은 곧게 서재로 들어가 고이준에게 전화했다.“오늘 유진의 행적 조사해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토록 힘들어하는 건지.”“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대답을 마치고 한 시간 만에 조사를 마치더니 그에게 전화해 보고드렸다.“무덤을 옮겨?”강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네, 일주일 전에 임유진 씨 아버님이 유진 씨 어머님 무덤을 옮겼어요. 오늘 유진 씨가 성묘하러 갔다가 허탕 쳤다고 합니다. 그 마을 성묘 등록 담당자가 말하기를 유진 씨는 오늘 어머님 무덤을 옮긴 사실을 알게 된 후 매우 격분하며 기어코 산에 오르겠다고 하시더니 하산 후 급히 스쿠터를 타고 떠나갔대요...”고이준은 이어서 임유진이 임씨 일가에 찾아가 이웃들과 나눈 대화를 모조리 강지혁에게 알렸고 또한 그녀가 오늘 아빠와 임유라와 통화한 기록도 알려주었다.“통화목록을 보면 임유진 씨가 가족들에게 무려 38번이나 전화했지만
강지혁은 음식을 들고 그녀 앞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누나, 어머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정말 알고 싶다면 지금 바로 이 음식들 먹는 게 좋을 거야.”임유진은 머리를 번쩍 들고 빨갛게 부은 두 눈으로 그를 의아하게 쳐다봤다.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설마...“우리 엄마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아?”“이거 다 먹으면 알려줄게.”강지혁이 대답했다.임유진은 곧바로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하듯 음식을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었다.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허겁지겁 음식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완전히 달랐으니까.다만 이로써 그녀에게 엄마 무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또 더 울었는지 얼굴에 눈물 자국이 흥건했고 두 눈도 아까보다 더 빨갛게 부어올랐다.방금 그가 떠난 후 그녀는 또 울었단 말인가?“천천히 먹어. 누나 아버님이 오늘 어머님 무덤을 남북극에 옮겼다 해도 내가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강지혁이 말했다.“그런데 누나 먹다가 체하면 괜히 시간만 더 낭비할 거야.”임유진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수저를 쥔 손을 머뭇거리다가 확연히 속도를 늦추고 침착하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강지혁은 그녀가 다 먹은 후에야 티슈 한 장 뽑아서 자상하게 입 주변을 닦아주었다.“나... 다 먹었어. 엄마 무덤 어디 있대? 얼른 말해줘.”임유진은 초조하고 기대 어린 눈길로, 또 살짝 걱정이 휩싸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마치 이 기대가 무산될까 봐, 실은 그가 엄마 무덤이 어디 있는지 모를까 봐 두려움에 떠는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다가 채 마르지 않은 눈물도 닦아주었다.“가서 얼굴부터 씻어. 누나 이런 모습을 어머님이 보시면 분명 속상해하실 거야.”강지혁이 말했다.“하지만...”“왜? 내가 어머님 무덤에 안 데리고 갈까 봐?”강지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렇지만 누난 지금 믿을 사람이 나밖에 없어. 오직 나만 누나를 데리고 어머님 무덤에 찾아갈수 있으니까.”그녀는 강지혁을
“나한테 백억을 요구하면서도 왜 직접 내게 어머님 무덤을 찾아달라고 말할 생각은 안 했지?”강지혁이 질문을 이어갔다.임유진은 그의 말을 듣고 흠칫 놀라더니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깨달았다. 아빠에게 진짜 백억을 준다 해도 과연 만족할까? 더 욕심부리면서 또 돈을 요구하는 건 아닐까?강지혁의 말처럼 그에게 백억원을 요구하는 것보다 그의 도움을 빌려 엄마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게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다.아까는 마음이 조급하다 보니 이렇게 단순한 일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그럼 지금 날 데리고 가줄 수 있어?”임유진이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 엄마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만 그녀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급할 거 없어. 일단 좀 쉬어. 졸리면 한잠 자던가.”강지혁이 말했다.다만 임유진이 지금 잘 마음이 있을까! 그녀는 강지혁만 뚫어지라 쳐다봤다.또 15분 남짓 지난 후 강지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잠시 뒤 말했다.“그래, 알았어. 거기서 기다려. 전에 분부했던 일도 가능한 한 빨리 준비해.”말을 마친 강지혁은 휴대폰을 거둬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임유진에게 말했다.“가자, 이젠.”임유진은 순간 그가 지금 엄마 무덤으로 데려갈 거란 예감이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쪼르르 따라갔다.다만 그녀가 탄 차는 S 시 몇몇 묘원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되레 시내의 대형 아파트 단지 쪽으로 질주했다.차가 멈춰선 후 임유진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리둥절한 눈길로 강지혁을 바라봤다.그의 차는 도심 구역의 철거되지 않은 어느 한 마을에 도착했다.“가자.”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걸어갔다.임유진은 멍하니 그의 발자취를 따라 들어갔고 어느 한 집 앞에 강지혁의 비서 고이준이 서 있었다.고이준 외에도 경호원 같아 보이는 몇몇 사람이 서 있었다.고이준은 강지혁을 보자 재빨리 다가왔다.“대표님, 여기에요.”강지혁은 그녀를 이끌고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고이준이 사전에 이 집을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조사에 따르면 임유진 씨 아버님은 임유진 씨 어머님 유골함을 꺼낸 후 이곳에 와서 3개월 치 집세를 냈습니다. 그 뒤로 바로 다음 날 얼핏 와본 이후로 더는 이곳에 온 적이 없어요.”고이준이 말했다.“또한 임유진 씨 아버님은 어떠한 묘원에도 연락한 적 없고 묘지를 새로 산 적도 없어요.”임유진은 고개를 푹 떨구고 유골함만 빤히 쳐다봤다.아빠는... 애초에 엄마의 무덤을 옮길 생각이 없었다. 오직 이걸로 그녀를 협박할 의도였다.그녀를 협박해 충분한 이득을 갈취하면 아마도 이 유골함을 돌려줄지도 모른다.그렇게 되면 아빠도 묘지 살 돈이 생기니까!돌아가신 엄마는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자신이 죽은 후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한 걸 알았다면 어떤 심정일까?죽은 사람마저... 이용하려 하다니!임유진은 그 순간 가소롭기도 하고 한없이 슬플 따름이었다.코끝이 시큰했지만 이번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전에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이 고갈된 듯싶었다.“고마워요.”그녀는 고개 들어 강지혁에게 말했다.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엄마의 유골함을 못 찾았을 테니까.“아직은 고맙다고 말하기 일러.”강지혁이 옆에 있는 고이준에게 머리를 돌렸다.“다 준비됐어?”“네.”고이준이 대답했다.강지혁은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어머님 유골함 챙겨.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어머님을 편히 땅에 묻어두시는 거야.”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강지혁을 멍하니 바라봤다.“가자, 내가 다 준비해놨어.”짤막한 한마디지만 그녀 마음이 훨씬 안정되었다.마치 강지혁만 있으면 그녀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을 따라 임대 주택에서 나와 차에 탔다.차는 다시 S 시의 꽤 유명한 묘원에 도착했다.이곳은 위치도 좋고 교통도 편리하며 설계가 잘 되어 있어서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웠다.강지혁은 그녀와 함께 그중 한 빈 묘지 앞에 도착했고 유니폼을 입은 몇몇 직원들이 이미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일꾼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도 있었다.임유진
“아니야, 여기도 너무 좋아!”임유진이 서둘러 대답했다. 그가 임유진 엄마를 위해 마련한 묘지는 이 묘원에서 단독으로 있는 곳이지 다른 묘지와 나란히 있는 곳이 아니다.만약 집으로 표현한다면 나란히 있는 묘지는 아파트 단지에 가깝고 그가 지금 선택한 이 묘지는 단독주택과 같다.이곳은 나무들이 줄지은 독립적인 작은 공간이고 묘지 앞 몇 미터 떨어진 곳에는 심지어 돌을 쌓아 만든 스톤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어 성묘객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다.“다행이네.”강지혁이 말했다.“그럼 어머님 유골함을 여기 넣어둬.”임유진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쪼그리고 앉아 엄마 유골함을 묘비 앞에 있는 유골 전용 공간에 넣어두었다. 이어서 일꾼들이 슬레이트를 덮고 시멘트를 부어 꼼꼼하게 밀봉했다.한편 묘원의 직원들은 계약서 한 부를 임유진에게 건넸는데 이 묘지에 관한 계약서였다.계약 시간은 50년이고 위에 적힌 비용을 본 순간 그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설사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녀의 능력으론 평생 벌어도 지급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비용은 강지혁 씨께서 이미 지급하셨으니 임유진 씨는 이 계약서에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묘원 직원이 말했다.그녀는 강지혁에게 또 한 번 큰 신세를 졌다.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펜을 들어 계약서에 서명했다. 지금으로선 그 미약한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니까.묘원 직원과 일꾼들이 떠난 후 강지혁은 고이준에게 국화꽃과 제사 지낼 음식, 과일을 꺼내라고 했다.“아직 어머님께 인사도 못 드렸겠는데 지금 인사드려.”그는 말하면서 몸을 움츠리고 앉아 음식과 과일을 가지런히 내려놓고 생화도 조심스럽게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임유진은 생화를 안고 눈앞의 묘비를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가 이젠 이곳에서 편히 쉴 수 있으니 그녀도 드디어 마음이 놓였다.비록 엄마가 돌아가셨지만 고이 잠드실 안식처가 있으니 그녀도 정신적인 의지가 생긴 것 같았다.임유진은 묘비 앞에서 공손하게 세 번 큰절을 올린 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속 깊이 간직해
어두운 밤, 달빛이 드리운 강지혁의 실루엣은 은은한 빛을 내뿜었다. 아름다운 윤곽의 목선과 얼굴 옆 라인, 그리고 선명한 귀까지 그에게서 도저히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임유진은 심지어 그의 귀마저 보통 사람들보다 훨씬 예뻐 보였다.강지혁이 허리를 곧게 펴고 그녀를 마주 보자 임유진은 순간 무언가로 가슴을 망치질하듯이 움찔했다.달빛에 드리워진 그의 눈동자는 마치 한 나무를 가득 채운 복숭아 꽃잎이 연못에 우수수 떨어져 잔잔한 은빛 물결을 일으키는 것만 같았고 입술을 움직일 때마다 거문고의 현이 사람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것만 같았다.순간 임유진의 머릿속이 새하얀 백지장으로 돼버렸고 두 눈엔 오직 강지혁만 가득 찼다.황홀한 그 얼굴이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왔고 조각 같은 이목구비는 하느님이 정성을 기울인 걸작과도 같았다.“왜 그래?”그녀의 귓가에 드디어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려왔다.화들짝 놀란 임유진은 재빨리 정신을 가다듬었다. 그녀는 방금 강지혁에게 홀딱 반해버렸다.“아니야... 아무것도.”임유진은 횡설수설 대답했다.“그래, 그럼 이만 돌아가자. 앞으로 어머님 보고 싶을 때 언제든지 보러 와. 누나 아버님이 이곳을 알게 된다 해도 더는 유골함을 딴 곳에 못 가져가.”강지혁은 말하면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임유진은 자신에게 선뜻 내민 손을 보더니 잠시 망설이다가 결국 그 손을 맞잡았다.“고마워.”그녀는 오늘 밤 두 번째로 그에게 고마움을 표했다.처음엔 강지혁이 그녀 엄마의 유골함이 어디 있는지 찾아줘서 고맙다고 말했고 두 번째는 엄마의 유골함을 고이 모실 묘지를 마련해줘서 감사의 뜻을 표했다.“정말 그렇게 고맙다면 날 좀 더 좋아해 주던가.”강지혁이 말했다.순간 임유진은 숨이 멎을 것 같고 얼굴이 살짝 빨개졌다. 그녀는 머리를 숙이고 강지혁을 따라 묘원에서 나왔다.두 사람이 나란히 차에 탄 후 임유진은 창밖의 멀어져가는 묘원을 바라보며 줄곧 마음을 짓눌렀던 큰 바위도 드디어 내려놓을 수 있을 것 같았다.오늘부로 엄마는 고이 잠드실
그녀가 강지혁을 쳐다보는 눈빛은 어느 한순간 그에게 푹 빠져들고 더없이 가깝게 느껴지다가도 금세 또 애써 그에게서 멀어지려는 듯한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간 것 같았다.예전과 다른 점이 하나 있다면 지금은 어떤 이유로 갈등하고 있다는 걸 느낄 수 있다는 것이었다.그녀는 한순간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의 뜨거운 시선 속에서 얼굴만 점점 더 빨개졌다.“왜 날 안 봐? 나 좀 봐줘, 누나!”강지혁이 가까이 다가오며 뜨거운 숨결을 내뿜었다. 그녀는 마치 그의 목소리에 홀린 듯 저도 모르게 다시 그의 얼굴을 바라봤다.강지혁은 한없이 다정한 눈빛으로 그녀를 바라봤는데 갈증과 애틋함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그는 앞머리를 뒤로 넘기고 훤칠한 이마를 드러냈지만 그녀 머릿속엔 여전히 기억 속의 ‘혁이’가 끊임없이 겹쳐졌다.애초의 혁이도 이런 눈길로 그녀를 쳐다봤으니.“누나는 날 조금이라도 좋아해?”그의 목소리가 또다시 임유진의 귓가에 울려 퍼졌다.임유진은 가슴이 찔린 듯 입을 열고 부인하려 했지만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이 또다시 꽉 막혀버렸다.‘난... 지혁이를 좋아할까?’임유진이 속으로 자신에게 물었다. 만약 그가 그저 혁이였다면 동생으로만 생각한 게 아니라 진짜 좋아할 수도 있다. 하지만 강지혁이라면...“누난 날 좋아해.”그는 단호한 말투로 그녀의 귓가를 간지럽혔다.그녀의 표정은 이미 그에게 원하는 대답을 준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입꼬리를 씩 올렸고 두 눈에도 흡족한 듯한 미소가 번졌다.임유진은 그런 그의 미소가 너무 예뻐 보였다....강씨 저택에 돌아간 후 그녀는 강지혁을 따라 거실로 들어가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저기... 오늘 나를 이렇게 많이 도와줬는데... 내가 어떻게 보답했으면 좋겠어?”세상이 늘 그렇듯 얻는 게 있으면 주는 것도 있어야 하기에 그가 진짜 어떠한 보답을 원해도 지극히 당연한 일이다.강지혁은 걸음을 멈추고 몸을 돌려 그녀를 바라봤다.“어떻게 보답해줄 건데? 영원히 내 옆에 있어 줄래?”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그런데 아직 스킨십이든 뭐든 하기도 전에 강지혁의 입에서 냉랭한 말이 흘러나왔다.“난 누가 멋대로 내 몸 만지는 거 질색이야. 만약 거기서 한 걸음만 더 가까이 다가와 기어코 내 몸에 손을 대면 그때는 두 번 다시 그 손을 볼 수 없을 거야.”화를 내는 것도 아니었고 경고하는 말투도 아니었다. 그저 일상적인 말투인데 내용이 너무 소름 끼쳐 저도 모르게 손이 덜덜 떨렸다.그리고 그때 그의 눈빛은 단 한 번도 그녀에게 옮겨지지 않았다. 그저 고개를 숙인 채 일에만 몰두해있었다. 마치 그녀에게는 1초라도 허비하고 싶지 않다는 것처럼 말이다.소민아는 당시 그 말을 듣고 조용히 방에서 나왔다. 하루아침에 손이 없어지는 경험은 겪고 싶지 않았으니까. 만약 다른 사람이 그런 말을 했다면 분명히 농담이었겠지만 상대는 강지혁이라 농담이라고 생각할 수가 없었다.그런데 그랬던 강지혁이 여자가 앞으로 바짝 다가와 말을 건 것도 모자라 사람들 다 보는 앞에서 볼까지 만지작거리고 있는데 아무런 위협도 가하지 않고 있다.소민아는 그 모습에 질투와 분노가 동시에 치솟았고 강지혁에게 속으로 얼른 그 여자의 손을 자르라는 신호를 보냈다.하지만 그때 들려온 고이준의 한마디에 그녀는 그만 생각이 멈춰버렸다.“사모님!”소민아는 얼이 빠진 얼굴로 고이준을 바라보았다.사모님이라니? 누가? 강지혁의 아내는 이미 오래전에 죽었는데?그때 소민아의 머릿속으로 눈앞에 있는 여자의 이름이 강지혁의 죽은 아내의 이름과 똑같다는 것이 떠올랐다.‘서, 설마 사모님이라는게... 아니... 설마...’소민아가 경악하며 손바닥으로 입을 틀어막았다.‘아니야. 아닐 거야! 말이 안 되잖아!’임유진은 시선을 돌려 고이준을 바라보았다.“고 비서님! 오랜만이에요!”이건 분명히 아까 고이준이 불렀던 ‘사모님’에 대한 대답이었다.고이준은 잔뜩 격앙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살아계셨군요! 저희가 얼마나 사모님께서 살아계시길 바랐는지 아십니까! 5년이나 지나서 드디어... 드디어 실현되었네요!”“
아이의 얼굴은 얼마 전에 봤던 사진 속 여자의 얼굴과 너무나도 닮아있었다.게다가 아빠라니, 그 여자를 쏙 빼닮은 얼굴로 아빠라니.강지혁과 현이는 그렇게 서로의 눈을 계속해서 바라보고 있었다.그시각 놀란 건 비난 강지혁뿐만이 아니었다. 고이준은 거의 넋을 잃은 채로 아이를 바라보았다.아이는 완전히 리틀 임유진이었으니까. 하지만 다시 자세히 보면 어딘가 강지혁의 느낌도 있었다.‘이 아이 설마...!’그때 아이가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돌려 임유진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엄마, 아빠가 나 좋아할 거라며? 왜 현이 안 안아줘? 아빠 정말 엄마 좋아했던 거 맞아? 정말 엄마 때문에 울었던 거 맞아?”아이는 진지하게 임유진이 해줬던 말을 의심하기 시작했다.하지만 임유진은 아이의 질문에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오로지 강지혁만 바라보고 있었다.자신이 무슨 이유로 강지혁의 곁을 떠났는지, 왜 S 시에서는 죽은 상태가 되어 있는 건지, 그녀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나도 많았지만 둘이 어떻게 사랑했는지, 어떤 사랑을 했는지, 어떤 맹세를 하고 어떤 약속을 했는지는 하나하나 다 기억이 났다.임유진은 눈물을 가득 맺힌 채로 한 걸음 한 걸음 강지혁에게로 걸어갔다.지난날의 두 사람이 어땠는지 마치 파노라마처럼 그녀의 머리를 스쳤다.강지혁을 월세방에 데리고 와 그에게 라면을 끓여줬던 것도, 친척들이 그녀를 바보에게 팔아넘기려 했을 때 강지혁이 그녀를 구하기 위해 찾아왔던 것도, 그녀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알고 결혼하자고 했던 것도, 그가 영원히 내 곁에서 떠나지 말라는 말을 했던 것도 전부 다 떠올랐다.곁에 있어 주겠다고 약속했는데 5년이나 그를 떠나버렸다. 그리고 지금 5년 만에 드디어 그의 앞에 서게 되었다.“혁아, 나 돌아왔어.”임유진은 울먹거리는 목소리로 그에게 말을 건네고는 손을 들어 강지혁의 볼을 쓰다듬었다.아, 조금 차가운 이 체온은 확실히 그의 체온이 맞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남자고 또 세상에서 그녀를
임유진은 기억을 다 잃어버렸지만 그간 축적해온 지식은 아직 그녀의 머릿속에 남아있었다.그녀는 자신이 변호사였다는 걸 아예 기억하지 못했다. 하지만 기억을 잃고도 그녀는 또다시 변호사라는 직업을 택했고 자격증 시험도 단번에 통과했다.“네, 오랜만이네요...”이현우는 인사를 하다가 뭔가를 깨달은 듯 표정을 바꿨다.‘혹시 소민아 씨와 싸웠다는 여자가 유진 씨인 건가?’이현우는 순간 이길 자신이 먼지 사라지듯 사라졌다. 그도 그럴 게 임유진을 가르쳤던 사람은 바로 그 유명한 승률 99%를 자랑하는 법조계의 대선배 변호사였으니까.그리고 임유진은 그 대선배 변호사의 그냥 제자도 아니고 애제자였다. 지난번 행사에서 그는 임유진을 마지막으로 더는 제자를 받지 않겠다는 선언까지 했다.이현우는 자신만만한 임유진의 얼굴을 보고는 머리가 다 지끈해 났다.“꼴에 진짜 변호사였네?”그때 소민아가 한껏 비아냥거리며 말했다.“이 변호사님, 불편하시면 의뢰 거절하셔도 되죠. 하지만 이 여자가 건드린 건 내가 아니라 강 회장님이세요. 자기 딸한테 강 회장님 사진 보여주고 아빠라고 부르라고 했다니까요? 이거 소문 잘못 나면 사생아다 뭐다 엄청난 스캔들 되는 거 아시죠? 만약 정말 스캔들 터지면 그때는 회장님 사업 전체에 영향이 갈 겁니다.”소민아는 일부러 강지혁을 끌어들였고 아니나 다를까 그 말을 들은 이현우의 표정은 한순간에 흙빛이 되었다.임유진이 결혼은 안 했지만 딸이 하나 있다는 건 이미 들어서 알고 있다. 그런데 그 딸에게 강지혁의 사진을 보여주며 아빠라고 하라니?!아무리 딸에게 아빠를 만들어주고 싶어도 그렇지 강지혁의 사진을 이용하면 안 되는 것이었다.‘혹시 S 시에서 강지혁 회장이 어느 정도 위치에 있는지 모르나? 아니면... 그냥 딸이 너무 아빠를 찾아서 인터넷에서 아무 남자 사진이나 보여준 건가?’이현우가 조용히 머리를 굴리고 있던 그때 임유진이 입을 열었다.“우리 딸은 사생아 따위가 아닌 강씨 가문의 유일한 딸이에요.”“하, 유일한 딸? 강씨 가문
레스토랑은 계속 영업을 해야 하기에 경찰들은 도착한 후 그대로 소씨 모녀와 임유진 쪽의 세 사람을 경찰서에 태웠다.차 안에서 임유진이 경찰에게 이름을 얘기할 때 소민아는 저도 모르게 흠칫했다.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와이프와 똑같은 이름이었으니까.하지만 소민아는 아주 잠깐 놀라기만 했을 뿐 눈앞에 있는 임유진과 죽은 강지혁의 와이프를 굳이 연결 지으려고 하지는 않았다. 강지혁의 와이프가 5년 전에 죽었다는 것을 S 시의 모두가 다 알고 있으니까.‘이제 알겠네. 이름이 같다고 자기가 회장님 와이프인 줄 아는 리플리증후군 환자였잖아?’강지혁과 엮이는 게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알기에 소민아는 임유진이 아이까지 이용해 이러는 게 무척이나 같잖았다.이 세상에서 강지혁을 아빠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은 그의 아들인 강선율을 제외하고 그녀의 딸인 소안나밖에 없었다.한편 현이는 아직도 찢어진 반쪽짜리 사진이 신경 쓰였다. 이건 어렵게 구한 아빠의 사진이었으니까.“현아, 괜찮아. 너무 속상해하지 마. 이따 엄마랑 같이 아빠 보러 가면 그때 마음껏 사진 찍어.”그 말에 현이는 일리가 있다며 금방 활짝 웃었다.“그건 네 아빠 아니고 내 아빠야! 그리고 아빠는 사진 찍는 거 싫어해!”소안나가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흥! 엄마가 그랬어. 아빠는 내가 엄마를 쏙 빼닮아서 분명히 날 좋아할 거라고!”현이가 지지 않고 대꾸했다.그러자 그걸 들은 한지영이 임유진의 귓가에 대고 물었다.“네가 정말 현이한테 그랬어?”“응.”임유진의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사실 이 말을 한 건 아빠가 자리를 안 좋아하면 어떡하냐고 현이가 너무 걱정하고 있길래 뻔뻔하게 해본 말이었다.“5년 만에 아주 사람이 달라졌어? 응?”한지영이 능글거리며 임유진의 옆꾸리를 툭툭 쳤다.그러자 옆에 있던 소민아가 콧방귀를 뀌었다.“그 엄마에 그 딸이라고 뻔뻔함이 아주 하늘을 찌르네. 회장님이 당신 같은 여자를 왜 좋아해? 웃기고 있어!”“남의 말 엿듣는 게 취미인가 봐요?”한지영이 가볍게
매니저는 소민아가 강지혁과 연관 있는 여자라는 걸 아주 잘 알고 있었다. 그녀의 기사가 한두 개가 아니었으니까. 심지어 최근에는 에스테 삽까지 열었다고 했으며 상류층 귀부인들과도 사이가 매우 좋다고 했다. 그러니 만약 이런 사람을 건드리면 장사는 거의 접어야 한다고 봐도 무방했다.‘안돼! 어떻게 버텨낸 건데 이럴 순 없어!’매니저는 얼른 소민아에게로 다가갔다.“괜찮으십니까?”그러자 소민아가 레스토랑이 다 떠나가라 소리를 질러댔다.“대체 손님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내 딸이 여기서 다쳤으면 당신이 책임질 거야? 우리 딸의 아빠가 누군지 몰라?!”매니저는 이에 허리가 부러질 정도로 연신 사과해댔다.한편 현이는 고개를 들어 임유진과 한지영을 바라보며 물었다.“엄마랑 이모는 왜 싸웠어? 싸우는 건 나쁜 거라고 했잖아.”현이는 아까 임유진이 다가왔을 때 여자아이랑 싸운 것으로 꾸중을 들을 줄 알았다.그런데 갑자기 어른들 셋이서 싸움을 해댔다.임유진은 딸의 머리를 다정하게 쓰다듬어 주었다.“우리 현이, 엄마가 한 말 기억하고 있었구나? 싸우는 게 나쁜 건 맞지만 괴롭힘을 당했을 때는 당당하게 맞서 싸워야 해. 그리고 우리는 이걸 정당방위라고 해.”“정당방위!”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세게 끄덕였다.“정당방위?”그런데 그때 소민아가 그걸 듣더니 기가 찬다는 표정을 지었다.그녀는 오늘 제대로 개망신을 당했다. 그것도 사람들이 잔뜩 있는 데서 말이다.그래서 그녀는 자신의 체면을 다시 주워 담으려고 일부러 더 큰소리로 외쳤다.“난 절대 이대로 안 넘어가. 변호사 고용해서 오늘 나한테 이딴 짓 한 거 후회하게 해줄 거야!”소민아의 말에 소안나가 턱을 치켜 든 채 현이 쪽으로 다가갔다.“우리 엄마가 변호사 아저씨 부르면 너랑 너희 엄마는 아주 큰 벌이 내려질 거야!”이에 현이는 소안나보다 더 고개를 치켜들며 더 큰 목소리로 말했다.“너희 엄마는 변호사 아저씨를 불러야 하지만 우리는 우리 엄마가 변호사야!”“우리 엄마 엄청 돈 많아서
현이를 거칠게 밀어버린 건 소민아였고 나머지 반쪽짜리 사진을 손에 꽉 쥐고 있는 건 그녀의 딸이자 강씨 가문의 양녀인 소안나였다.임유진은 인터넷에서 해당 모녀를 본 적이 있기에 그들이 누군지 바로 알아보았다.그때 임유진이 뭐라 하기도 전에 소민아가 표독스러운 눈으로 그녀를 쏘아보았다.“아빠? 기가 막혀서! 대체 애 교육을 어떻게 하는 거야? 누구더러 아빠래? 감히 주제도 모르고! 그리고 당장 내 딸한테 사과해! 내 딸이 누군 줄 알고 감히 손을 올려?!”소민아는 고개를 빳빳이 치켜들고 마치 사과를 받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했다.사실 이곳은 소안나가 티비에서 보고 가고 싶다고 하도 졸라서 온 곳이었다. 만약 소안나가 아니었으면 애초에 이따위 곳에는 발을 들이지도 않았다.서민 레스토랑은 그녀와 그녀의 딸 급과 전혀 맞지 않았으니까.그런데 이런 수준 낮은 곳에 온 것도 마음에 안 드는데 갑자기 딸이 웬 이상한 여자애랑 싸우고 게다가 그 싸움의 원인은 다른 것도 아닌 바로 강지혁의 사진이었다.소민아는 단호한 눈으로 아빠라고 외치는 아이가 기가 차고 어이가 없었다.강지혁에게는 소안나라는 딸밖에 없고 그건 앞으로도 그러할 게 분명했다.임유진은 차가운 눈빛으로 소민아를 바라보며 말했다.“그쪽 딸이 누군지 당연히 알죠. 강씨 가문의 양녀 잖아요. 안 그래요? 그리고 내 딸의 주제는 내가 판단해요.”임유진은 레스토랑이기도 하고 아이들도 있었기에 최대한 차분한 말투로 얘기했다.하지만 그녀가 입밖에 내뱉은 ‘양녀’라는 두 글자가 소민아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소민아는 다른 사람들이 소안나를 양녀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그래서 소민아에게 아부하고 싶어 안달이 난 사람들은 그녀가 딸의 호칭에 예민하다는 것을 알고 항상 ‘아가씨’라고 불렀다.“이봐, 미친 거야? 아니면 상황 파악이 안 돼? 고작 이딴 사진을 가지고 있으면 네가 뭐 진짜 이 남자 와이프라도 된 것 같아? 그리고 이 사진은 또 어디서 났어? 음습하고 음침하게 이게 뭐 하는 짓이야?
“응, 기사로 봤어.”임유진이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만약 혁이가 정말 날 잊고 그 여자를 좋아한다면 나도 깨끗하게 포기할 거야. 하지만... 만약 혁이가 여전히 내가 알던 혁이고 나만 사랑해주는 혁이면 나는 절대 포기 안 해.”지금은 거의 모든 사람이 다 그녀가 다 죽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니 만약 강지혁이 정말 이제는 그녀를 잊고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됐다고 하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사별한 아내를 위해 아무도 만나지 말라고 강요하는 건 이상한 일이니까.하지만 임유진은 왜인지 모르겠지만 강지혁은 쉽게 다른 사람에게 흔들릴 것 같지 않았다. 여전히 그녀처럼 딱 한 사람만 바라보고 있을 것 같았다.기억을 잃은 요 몇 년간 임유진에게 들이대는 남자는 꽤 많았다. 심지어 하나같이 스펙이 좋고 얼굴도 훈훈했으며 다정다감했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람을 만나도 심장이 떨리는 느낌은 받지 못했다.그러다 기억이 차츰 회복되고 나서야 임유진은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녀의 심장은 이미 강지혁이라는 남자에게 줘버려서 더 이상 나눌 것이 없다는 것을 말이다.“참, 지영이 너는? 남자친구 생겼어?”임유진이 화제를 바꾸며 물었다.“없어. 안 그래도 노처녀라면서 엄마가 얼마나 재촉을 해대는지.”한지영이 어깨를 으쓱하며 조금 쓰게 웃었다.지난 5년간 오로지 백연신만 떠올리며 일부러 다른 사람을 멀리했던 건 아니었다. 그저 백연신은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그녀의 머릿속에 이따금 나타나 있었다.그리고 백연신과 함께 있었을 때가 너무 행복해서 이제는 그 어떤 남자를 봐도 연애하고 싶은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래서 소개팅은 볼 때마다 큰 수확이 없었다.“아직 마음을 접지 못한 거구나...”임유진이 한지영의 손을 잡아주며 말했다.“접으려고 노력해야지.”한지영이 웃었다.“만약 노력했는데도 정 안되면 그때는 그냥 혼자 살지 뭐! 아니지. 우리 현이랑 선율이 둘을 보고 살면 되지.”한지영은 말을 내뱉었다가 아차 싶은 마음에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아니나
“하지만 나는 임현이 좋아. 엄마, 나 계속 임현 할래. 그렇게 해줘.”아이가 눈을 반짝이며 임유진에게 말했다.“오빠는 강선율이고 현이는 강선현이면 얼마나 좋아. 사람들이 오빠랑 남매인 거 바로 알게 될걸? 현이 오빠 갖고 싶어 했잖아.”임유진이 아이를 설득했다.“그럼 오빠한테 임율로 바꾸라고 하면 안 돼?”아이가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그럼 오빠 만나고 현이가 직접 물어봐. 어때?”“좋아!”현이는 뭔가를 굳게 결심한 듯 이를 앙다물고 눈을 부릅떴다.한지영은 아이의 표정과 행동에 소리 내 웃었다.“현이는 임현이라는 이름이 그렇게도 좋아?”“네, 좋아요!”현이가 고개를 끄덕였다.“왜? 엄마가 계속 그렇게 불러줘서 그게 더 좋은 거야?”한지영이 궁금하다는 듯 물었다.그러자 임유진이 딸 대신 대답했다.“아니, 두 글자 이름이 더 멋있다고 생각해서 임현이 더 좋다고 하는 거야. 만약 강현으로 하라고 했으면 바로 동의했을걸?”“뭐? 하하하. 그런데 강현은 조금 남자애 이름 같잖아.”“현이는 그런 거 상관 안 해. 오히려 멋있다면서 좋아할걸? 그냥 두 글자 이름이 더 좋은 거야.”한지영은 그 말에 크게 웃으면 현이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그때 음식이 도착하고 세 사람은 식사부터 했다.현이는 밥을 먹은 후 키즈 존으로 달려가 신나게 놀았다. 이곳은 어린아이들을 위한 레스토랑이라 다른 곳보다 놀 수 있는 공간이 크고 그 덕에 또래 아이들도 더 많았다.키즈 존은 테이블과 멀리 않은 곳에 있어 임유진과 한지영은 편하게 식사를 하며 이따금 시선을 옆으로 돌려 한번씩 확인만 했다.“이따 현이 데리고 강지혁 만나러 갈 거야?”한지영이 물었다.“응, 먼저 집으로 가보려고.”사실 임유진은 기억을 회복한 다음 바로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하지만 두 개의 번호 중 하나는 전원이 꺼져있다는 음성이 흘러나왔고 다른 한 개 번호는 아예 신호음조차 가지 않았다.아무래도 낯선 번호는 걸려오지 못하게 제안해 놓은 것 같았다.그래서 임유진은 차라
“아니야. 아빠가 그간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았던 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임유진이 말했다.“현이 보게 되면 아마 엄청 좋아할 거야!”‘날 찾지 않은 이유는 아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겠지?’임유진은 강지혁을 기억해낸 후 그의 기사를 찾아보다 그녀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로 나온 것을 봤었다.열차가 S 시에 도착하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출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렇게 걸어 나가보니 가장 먼저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한지영이었다.임유진은 그녀를 본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다.그간 기억을 아예 통째로 잃었던 터라 그녀는 한지영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기억이 회복된 후에야 급하게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한지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덜덜 떨었던 것을 말이다.그러다 영상 통화를 걸고서야 한지영은 그녀가 정말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지영아!”임유진이 큰소리로 외치자 한지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한지영은 임유진을 보자마자 눈가가 빨개지더니 눈물을 글썽였다.임유진이 딸의 손을 잡고 그녀 앞에 섰을 때 한지영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너 진짜... 살아있었어. 네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거 난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유진아!!”한지영은 임유진을 와락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그리고 임유진도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미안해... 많이 걱정했지.”“그걸 말이라고!”한지영은 울먹거리며 말하다가 이내 임유진의 옆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판박이였지만 언뜻 강지혁의 모습도 보였다.일전 영상 통화로 이미 얼굴을 봤었지만 실물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이모, 안녕하세요!”현이가 똘망한 눈으로 한지영을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이에 한지영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걸 느끼며 아이의 말랑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