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옆에 있던 이웃이 그녀에게 다가와 아빠와 새엄마가 여행을 가서 지금 집에 없다고 했다. 임유라 같은 경우는 이웃의 말에 따르면 밖에서 큰 집을 사서 이젠 집에 돌아오는 횟수가 드물다고 한다.임유진은 문득 아빠와 새엄마가 일부러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 그녀가 돌아와 엄마에게 성묘할 걸 알고 일부러 집을 비워둔 게 뻔했다.백억이라, 아빠가 요구한 금액만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아찔해 났다.지금의 임유진이 대체 무슨 수로 아빠에게 백억을 줄 수 있겠는가!그녀는 이웃들과 작별한 뒤 임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야? 한번 만나, 너한테 할 얘기 있어.”“미안한데 나 지금 시간 없어.”임유라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그럼 이것만 대답해. 아빠가 우리 엄마 무덤을 어디로 옮겼어?”임유진이 물었다.“그건 나야 모르지.”임유라는 실실 비꼬면서 대답했다.“그럼 두 분 지금 어디로 여행 갔는지는 알고 있겠지?”“정말 미안한데 나 진짜 몰라. 나중에 돌아오시거든 네가 찾는다고 말씀드릴게. 그럼 됐지?”임유라가 말했다.곧이어 전화기 너머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립스틱 색상 유라 씨한테 안 어울려요.”임유진은 흠칫 놀랐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강현수였다.이어서 임유라가 애교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난 또 현수 씨가 이 색상 좋아하는 줄 알았죠. 나중에 다른 컬러로 바꿀게요.”그녀는 뒤늦게 휴대폰에 대고 임유진에게 말했다.“이만 끊을게. 나 지금 좀 바쁘거든.”곧이어 통화가 끊겼다.임유진은 손에 쥔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며칠 전에 강현수를 만났을 때,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과 지금 임유라에게 립스틱 색상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둥 이런 얘기는 너무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강현수 같은 남자는 아무래도 그저 신선감 때문에 임유진에게 그런 말을 한 듯싶다. 마치 그녀에게만 특별한 감정이 있을 줄 알았는데 실은 수많은 여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전
문득 아무런 립스틱도 바르지 않은 자연스러운 입술 컬러가 그의 머릿속을 스쳤다.은은한 핑크빛은 자연스러우면서도 입술에 가장 잘 어울리는 색상이었다.“지워요.”강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네?”임유라는 미처 반응하지 못했다.“립스틱 당장 지우라고요.”강현수가 말했다.임유라는 어안이 벙벙했다. 당장 지우라니... 지금은 연회장으로 가는 차 안인데, 오늘 연회에서 가장 눈부신 여자가 되려고 화려하게 차려입었는데 립스틱을 지우면 메이크업 전체가 무너질 것이고 그때 가서 눈부시기는커녕 사람들의 웃음거리로 전락할 게 뻔하다.“지금요? 하지만 이제 곧 연회장에 도착하는데요...”“당장 지워요.”강현수는 그녀의 말을 자르고 날카로운 눈길로 째려봤다.임유라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강현수를 감히 건드릴 엄두가 안 나니까. 그녀는 입술을 꼭 깨물고 티슈를 꺼내 립스틱을 지우기 시작했다.한편 강현수는 옆에서 또다시 은팔찌를 더듬더니 고개 숙여 살며시 어루만졌다. 마치 연인을 바라보듯이 한없이 다정한 눈길로 바라보았다.적어도 임유라는 그의 이런 자상한 눈빛을 마주한 적이 없다.그녀는 립스틱을 닦으며 손거울에 비친 강현수의 부드러운 눈길을 바라보자 질투가 저절로 밀려왔다.그녀는 그제야 그 팔찌가 뭘 의미하는지 알게 됐다. 강현수의 그림 속 어린 소녀가 손목에 은팔찌 두 개를 착용하고 있었다.그러니까 지금 저 은팔찌가 바로 그 소녀의 팔찌란 말인가?요 몇 년간 연예계에서 강현수가 사람 한 명 찾는다는 소문이 돌고 있다. 만약 누군가가 그를 위해 이 사람을 찾아준다면 추후 작품활동이 끊이지 않을 것이라고도 했다.임유라는 처음에 이 소문이 단지 찌라시일 거라고 생각했다. 이 바닥엔 근거 없는 어수선한 소문들이 만무하니까.다만 인제 보니 그런 것만은 같지 않았다.강현수가 찾는 사람은 바로 그림 속 소녀일 것이다! 임유라는 그에게 물은 적도 없고, 자신이 그 그림을 봤다는 걸 얘기하지도 않았다. 그날 강현수 몰래 화실에 들어간 거니까.하지만 그가 찾는 사람
임유진은 어두운 걸 싫어해 잘 때도 불을 켜고 자는 걸 강지혁은 잘 알고 있다.예전에 월세방에 지낼 때 그녀는 뒤로 가면서 한동안 불을 끄고 잘 수 있었지만 그 이후로 또다시 불을 켜고 자는 습관으로 돌아간 듯싶었다.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방에 없나?’막 자리를 뜨려는데 무거운 한숨 소리가 안에서 들려왔다.‘있어!’강지혁은 불쑥 걸음을 멈추고 벽을 쓰다듬으며 스위치를 켰다. 순간 방 안이 환하게 빛났다.임유진은 가녀린 체구로 방 안의 구석에 움츠리고 앉아 벽에 등을 기대고 얼굴을 다리 사이에 파묻고는 어깨를 들썩거렸는데 침울한 흐느낌이 간혹 들려왔다.그녀가 지금 우는 걸까?강지혁은 눈을 가늘게 뜨고 재빨리 앞으로 다가가 쪼그리고 앉아서 그녀를 바라봤다.“왜 그래? 무슨 일이야?”그의 목소리에 화들짝 놀란 임유진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머리를 살짝 들고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로 그를 쳐다봤다.두 눈이 빨갛게 부은 걸 보니 한참 운 듯싶었다.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으로 돼버렸고 가냘프고 괴로운 표정을 짓고 있는데 순간 강지혁은 심장을 쿡쿡 찌르듯이 아파졌다.임유진은 좀처럼 울지 않는데 매번 그녀의 우는 모습을 볼 때마다 강지혁은 어쩔 바를 몰랐다.“말해, 대체 무슨 일이야?”그는 한참 후에야 제 목소리를 찾았다.임유진은 코를 훌쩍거리며 겨우 말했다.“엄마가... 엄마가 어디 있는지 못 찾겠어. 찾을 수가 없어... 도무지 찾을 수가 없다고...”그녀는 이 말을 내뱉는 순간 또다시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집에 돌아온 후 한참 동안 생각해봤지만 아빠가 엄마 무덤을 대체 어디로 옮긴 건지 도통 알 수 없었다. 묘원? 아니면 다른 어떤 매장 가능한 곳이 있을까?찾고 싶어도 어디서부터 어떻게 찾아야 할지 두서가 안 잡혔다.나중에 아빠와 새엄마, 그리고 임유라까지 아무리 전화를 걸어도 해답을 얻지 못했다.그녀는 더이상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백억을 달라고? 저 자신을 팔아도 백억은 안 될 텐데!임유진은 문득 강지혁을 빤히 쳐다봤다.
“알아.”임유진은 울먹이며 대답했다. 지금으로선 이렇게 하는 것 말고는 백억을 구할 다른 방법이 없으니까.이때 강지혁이 가볍게 웃으며 말했다.“하지만 내가 싫어.”그녀는 몸을 움찔거리더니 김빠진 공처럼 축 처지고 눈가에 남은 마지막 생기도 사라졌다.당연히 싫겠지. 그녀가 뭐라고 옆에 있어 주기만 한다면 강지혁이 선뜻 백억을 내놓겠는가.임유진은 속으로 자신을 맹비난했다. 강지혁이 그녀에 대한 호감이 백억 가치나 된다고 여기다니, 그녀는 저 자신을 너무 과대평가했다.그녀는 고개를 푹 숙인 채 강지혁을 잡았던 손도 무기력하게 내려놓았다.강지혁은 그녀를 지그시 바라보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누나 일단 좀 쉬어야겠어. 사용인한테 먹을 것 좀 가져오라고 할 테니 뭐라도 좀 먹고 자.”말을 마친 강지혁은 방에서 나왔다.커다란 방안에 임유진만 덩그러니 남았다.그녀는 두 손으로 자신을 꼭 감싸 안았다.‘역시... 또 나 혼자야.’외로움과 무기력함은 한 사람의 영혼을 갉아먹기에 충분했다. 저 자신을 팔겠다는 것조차 쉬운 일이 아니었다니, 세상 참....강지혁은 곧게 서재로 들어가 고이준에게 전화했다.“오늘 유진의 행적 조사해봐.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저토록 힘들어하는 건지.”“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은 대답을 마치고 한 시간 만에 조사를 마치더니 그에게 전화해 보고드렸다.“무덤을 옮겨?”강지혁은 미간을 찌푸렸다.“네, 일주일 전에 임유진 씨 아버님이 유진 씨 어머님 무덤을 옮겼어요. 오늘 유진 씨가 성묘하러 갔다가 허탕 쳤다고 합니다. 그 마을 성묘 등록 담당자가 말하기를 유진 씨는 오늘 어머님 무덤을 옮긴 사실을 알게 된 후 매우 격분하며 기어코 산에 오르겠다고 하시더니 하산 후 급히 스쿠터를 타고 떠나갔대요...”고이준은 이어서 임유진이 임씨 일가에 찾아가 이웃들과 나눈 대화를 모조리 강지혁에게 알렸고 또한 그녀가 오늘 아빠와 임유라와 통화한 기록도 알려주었다.“통화목록을 보면 임유진 씨가 가족들에게 무려 38번이나 전화했지만
강지혁은 음식을 들고 그녀 앞에 다가가 조심스럽게 내려놓았다.“누나, 어머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정말 알고 싶다면 지금 바로 이 음식들 먹는 게 좋을 거야.”임유진은 머리를 번쩍 들고 빨갛게 부은 두 눈으로 그를 의아하게 쳐다봤다.이게 대체 무슨 말이지? 설마...“우리 엄마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아?”“이거 다 먹으면 알려줄게.”강지혁이 대답했다.임유진은 곧바로 누가 뺏어 먹기라도 하듯 음식을 허겁지겁 입에 쑤셔 넣었다.강지혁은 미간을 살짝 구겼다. 허겁지겁 음식을 삼키는 그녀의 모습은 평소와 완전히 달랐으니까.다만 이로써 그녀에게 엄마 무덤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그녀는 또 더 울었는지 얼굴에 눈물 자국이 흥건했고 두 눈도 아까보다 더 빨갛게 부어올랐다.방금 그가 떠난 후 그녀는 또 울었단 말인가?“천천히 먹어. 누나 아버님이 오늘 어머님 무덤을 남북극에 옮겼다 해도 내가 반드시 찾아낼 테니까!”강지혁이 말했다.“그런데 누나 먹다가 체하면 괜히 시간만 더 낭비할 거야.”임유진은 몸을 움찔거리더니 수저를 쥔 손을 머뭇거리다가 확연히 속도를 늦추고 침착하게 음식을 먹기 시작했다.강지혁은 그녀가 다 먹은 후에야 티슈 한 장 뽑아서 자상하게 입 주변을 닦아주었다.“나... 다 먹었어. 엄마 무덤 어디 있대? 얼른 말해줘.”임유진은 초조하고 기대 어린 눈길로, 또 살짝 걱정이 휩싸인 눈빛으로 그를 바라보았다.마치 이 기대가 무산될까 봐, 실은 그가 엄마 무덤이 어디 있는지 모를까 봐 두려움에 떠는 것만 같았다.강지혁은 손을 들어 그녀의 얼굴을 가볍게 쓰다듬다가 채 마르지 않은 눈물도 닦아주었다.“가서 얼굴부터 씻어. 누나 이런 모습을 어머님이 보시면 분명 속상해하실 거야.”강지혁이 말했다.“하지만...”“왜? 내가 어머님 무덤에 안 데리고 갈까 봐?”강지혁은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그렇지만 누난 지금 믿을 사람이 나밖에 없어. 오직 나만 누나를 데리고 어머님 무덤에 찾아갈수 있으니까.”그녀는 강지혁을
“나한테 백억을 요구하면서도 왜 직접 내게 어머님 무덤을 찾아달라고 말할 생각은 안 했지?”강지혁이 질문을 이어갔다.임유진은 그의 말을 듣고 흠칫 놀라더니 그제야 자신이 얼마나 바보 같은지 깨달았다. 아빠에게 진짜 백억을 준다 해도 과연 만족할까? 더 욕심부리면서 또 돈을 요구하는 건 아닐까?강지혁의 말처럼 그에게 백억원을 요구하는 것보다 그의 도움을 빌려 엄마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아내는 게 훨씬 더 현명한 선택이다.아까는 마음이 조급하다 보니 이렇게 단순한 일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그럼 지금 날 데리고 가줄 수 있어?”임유진이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 엄마의 무덤이 어디 있는지 알아야만 그녀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급할 거 없어. 일단 좀 쉬어. 졸리면 한잠 자던가.”강지혁이 말했다.다만 임유진이 지금 잘 마음이 있을까! 그녀는 강지혁만 뚫어지라 쳐다봤다.또 15분 남짓 지난 후 강지혁의 휴대폰이 울렸다. 그는 전화를 받고 잠시 뒤 말했다.“그래, 알았어. 거기서 기다려. 전에 분부했던 일도 가능한 한 빨리 준비해.”말을 마친 강지혁은 휴대폰을 거둬들이고 자리에서 일어나며 임유진에게 말했다.“가자, 이젠.”임유진은 순간 그가 지금 엄마 무덤으로 데려갈 거란 예감이 들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쪼르르 따라갔다.다만 그녀가 탄 차는 S 시 몇몇 묘원 방향으로 가는 게 아니라 되레 시내의 대형 아파트 단지 쪽으로 질주했다.차가 멈춰선 후 임유진은 주변을 둘러보다가 어리둥절한 눈길로 강지혁을 바라봤다.그의 차는 도심 구역의 철거되지 않은 어느 한 마을에 도착했다.“가자.”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잡고 안으로 걸어갔다.임유진은 멍하니 그의 발자취를 따라 들어갔고 어느 한 집 앞에 강지혁의 비서 고이준이 서 있었다.고이준 외에도 경호원 같아 보이는 몇몇 사람이 서 있었다.고이준은 강지혁을 보자 재빨리 다가왔다.“대표님, 여기에요.”강지혁은 그녀를 이끌고 그 집 안으로 들어갔다.고이준이 사전에 이 집을 정리했다고는 하지만
“조사에 따르면 임유진 씨 아버님은 임유진 씨 어머님 유골함을 꺼낸 후 이곳에 와서 3개월 치 집세를 냈습니다. 그 뒤로 바로 다음 날 얼핏 와본 이후로 더는 이곳에 온 적이 없어요.”고이준이 말했다.“또한 임유진 씨 아버님은 어떠한 묘원에도 연락한 적 없고 묘지를 새로 산 적도 없어요.”임유진은 고개를 푹 떨구고 유골함만 빤히 쳐다봤다.아빠는... 애초에 엄마의 무덤을 옮길 생각이 없었다. 오직 이걸로 그녀를 협박할 의도였다.그녀를 협박해 충분한 이득을 갈취하면 아마도 이 유골함을 돌려줄지도 모른다.그렇게 되면 아빠도 묘지 살 돈이 생기니까!돌아가신 엄마는 한때 사랑했던 남자가 자신이 죽은 후 이런 식으로 자신을 대한 걸 알았다면 어떤 심정일까?죽은 사람마저... 이용하려 하다니!임유진은 그 순간 가소롭기도 하고 한없이 슬플 따름이었다.코끝이 시큰했지만 이번엔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전에 너무 많이 울어서 눈물이 고갈된 듯싶었다.“고마워요.”그녀는 고개 들어 강지혁에게 말했다.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그녀는 엄마의 유골함을 못 찾았을 테니까.“아직은 고맙다고 말하기 일러.”강지혁이 옆에 있는 고이준에게 머리를 돌렸다.“다 준비됐어?”“네.”고이준이 대답했다.강지혁은 다시 그녀에게 말했다.“어머님 유골함 챙겨. 지금 가장 먼저 해야 할 건 어머님을 편히 땅에 묻어두시는 거야.”그녀는 흠칫 놀라더니 강지혁을 멍하니 바라봤다.“가자, 내가 다 준비해놨어.”짤막한 한마디지만 그녀 마음이 훨씬 안정되었다.마치 강지혁만 있으면 그녀는 아무것도 걱정할 필요가 없는 것만 같았다.임유진은 강지혁을 따라 임대 주택에서 나와 차에 탔다.차는 다시 S 시의 꽤 유명한 묘원에 도착했다.이곳은 위치도 좋고 교통도 편리하며 설계가 잘 되어 있어서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려웠다.강지혁은 그녀와 함께 그중 한 빈 묘지 앞에 도착했고 유니폼을 입은 몇몇 직원들이 이미 그곳에서 대기하고 있었다. 그밖에도 일꾼으로 보이는 몇몇 사람들도 있었다.임유진
“아니야, 여기도 너무 좋아!”임유진이 서둘러 대답했다. 그가 임유진 엄마를 위해 마련한 묘지는 이 묘원에서 단독으로 있는 곳이지 다른 묘지와 나란히 있는 곳이 아니다.만약 집으로 표현한다면 나란히 있는 묘지는 아파트 단지에 가깝고 그가 지금 선택한 이 묘지는 단독주택과 같다.이곳은 나무들이 줄지은 독립적인 작은 공간이고 묘지 앞 몇 미터 떨어진 곳에는 심지어 돌을 쌓아 만든 스톤 탁자와 의자가 놓여 있어 성묘객들이 휴식을 취할 수 있다.“다행이네.”강지혁이 말했다.“그럼 어머님 유골함을 여기 넣어둬.”임유진은 머리를 끄덕이고는 쪼그리고 앉아 엄마 유골함을 묘비 앞에 있는 유골 전용 공간에 넣어두었다. 이어서 일꾼들이 슬레이트를 덮고 시멘트를 부어 꼼꼼하게 밀봉했다.한편 묘원의 직원들은 계약서 한 부를 임유진에게 건넸는데 이 묘지에 관한 계약서였다.계약 시간은 50년이고 위에 적힌 비용을 본 순간 그녀는 입이 쩍 벌어졌다. 설사 그 사고가 일어나지 않았어도 그녀의 능력으론 평생 벌어도 지급할 수 없는 금액이었다.“비용은 강지혁 씨께서 이미 지급하셨으니 임유진 씨는 이 계약서에 사인만 하시면 됩니다.”묘원 직원이 말했다.그녀는 강지혁에게 또 한 번 큰 신세를 졌다.임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고 펜을 들어 계약서에 서명했다. 지금으로선 그 미약한 자존심을 챙길 때가 아니니까.묘원 직원과 일꾼들이 떠난 후 강지혁은 고이준에게 국화꽃과 제사 지낼 음식, 과일을 꺼내라고 했다.“아직 어머님께 인사도 못 드렸겠는데 지금 인사드려.”그는 말하면서 몸을 움츠리고 앉아 음식과 과일을 가지런히 내려놓고 생화도 조심스럽게 꺼내 그녀에게 건넸다.임유진은 생화를 안고 눈앞의 묘비를 빤히 쳐다보았다. 엄마가 이젠 이곳에서 편히 쉴 수 있으니 그녀도 드디어 마음이 놓였다.비록 엄마가 돌아가셨지만 고이 잠드실 안식처가 있으니 그녀도 정신적인 의지가 생긴 것 같았다.임유진은 묘비 앞에서 공손하게 세 번 큰절을 올린 후 엄마에 대한 그리움을 가슴속 깊이 간직해
강현수는 강지혁에게는 시선 한번 주지 않고 임유진만 바라보았다.“만약 그 어느 날 강지혁이 네가 생각하는 그런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게 되면, 더 이상 강지혁 곁에 있을 수 없다는 걸 알게 되면 그때는... 내 곁으로 와줄래? 내가 널 돌 볼 수 있게 해줄래?”강현수의 목소리는 미세하게 떨려 있었다.이 말을 입 밖으로 내뱉기까지 상당히 많은 고민을 하고 또 용기를 낸 듯했다.어쩌면 지금이 그의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강현수는 말을 마친 후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고 아래로 내린 두 손도 덜덜 떨고 있었다.그의 얼굴에 어린 긴장감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임유진은 그 얼굴에 잠깐 넋을 잃었다가 이내 자신의 손을 잡고 있던 강지혁의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또 불안해하는 건가?임유진은 강지혁의 손을 꽉 맞잡고 강현수에게 말했다.“아니요. 그럴 일은 없을 거예요. 지금이든 앞으로든 내가 함께하고 싶은 사람은 혁이일 테니까요.”그녀의 단호한 말에 강현수의 눈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어쩌면 흔들릴지도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마음이 아주 손쉽게 저 먼 곳으로 내던져졌다.대체 뭘 기대한 걸까?강현수가 쓰게 웃었다.“혁아, 이만 가자.”이번에는 임유진이 강지혁의 손을 잡고 앞으로 걸어갔다.그리고 곁에 있던 경호원들도 두 사람의 뒤를 따랐다.강현수는 제자리에 가만히 선 채 미동도 없었다. 임유진을 태운 차량이 서서히 멀어져 가는데도 그는 여전히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한편 임유진은 강지혁과 차에 올라탄 다음 곧바로 그의 볼을 매만졌다.“혁아, 너 얼굴이 왜 그래?”강지혁은 그녀의 손길에 움찔하더니 이제야 정신을 차린 듯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내 얼굴이 왜?”“안색이 안 좋아 보여. 꼭 무슨 일 있는 것처럼. 혹시 할아버지가 돌아가신 것 때문에 회사에 무슨 문제라도 생긴 거야?”조금 얼이 빠진 듯하고 아까보다 확 어두워진 얼굴을 한 강지혁의 모습은 좀처럼 볼 수 없는 모습이기에 임유진은 무척이나 걱정스러웠다.“아무것도 아니야
소민영은 이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리며 외쳤다.“고작 그때 손톱 좀 뜯기고 3년밖에 안 되는 감옥 생활한 거 가지고 우리 집안이 무너져야 해? 네가 뭔데? 네가 뭔데!”그녀는 줄곧 임유진을 무시했었다. 임유진이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 된 지금도 역시 그녀는 임유진을 당시 함부로 자신의 집안 며느리 자리를 탐냈던 주제넘은 여자로 보고 있다.소민영의 말에 임유진이 뭐라 하려는데 둔탁한 마찰음 소리와 함께 소민영의 머리가 힘껏 옆으로 돌아갔다.“임유진이 뭐냐고 했지. 임유진은 감히 너희 같은 인간들이 함부로 쳐다볼 수 없는 내 아내야.”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강지혁은 모든 걸 다 얼려버릴 것 같은 눈으로 소씨 가문의 두 남매를 쳐다보았다.소민영은 그 눈빛에 손바닥으로 볼을 감싼 채로 그만 굳어버리고 말았다.그녀는 자신이 꼭 한낱 개미 같은 존재가 된 듯했다. 여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영원히 입을 열지 못하게 될 것만 같았다.소민영은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진심으로 두려워하고 있다. 아무리 사람을 홀릴 정도의 잘생긴 남자라고 해도 그녀에게는 그런 것보다 두려움이 더 컸다.그래서 그녀는 입을 꾹 닫은 채 곧바로 소민준의 뒤로 숨었다.그리고 소민준은 이렇게 된 거 제대로 말은 해보려고 강지혁을 바라보았다.“강지혁 씨, 우리 집안은 늘 GH 그룹과 강씨 가문에 우호적이었어요. 앞으로도 그럴 거고요. 그러니까 이번 한 번만 제발 봐주세요.”강지혁은 그런 그를 그저 담담하게 쳐다볼 뿐이었다.“진씨 가문과 소씨 가문 모두 그때 내 아내를 벼랑 끝까지 몰고 가며 놓아주지 않았는데 나는 왜 당신들을 용서해야 하지?”그 말에 소민준의 얼굴이 당황으로 빨갛게 달아올랐다.“그... 그건 진씨 가문의 뜻이었어요. 저, 저희 집안은 그 일에 그 어떤 의견도 내지 않았어요.”“의견을 냈든 안 냈든 결과적으로 진씨 가문을 도와준 덕에 재미 좀 봤을 텐데? 그런데 이제 와서 자신은 그저 시키는 대로만 했다?”강지혁의 빈정거림에 소민준은 이를 꽉 깨물
임유진은 갑작스러운 소민준의 등장에 깜짝 놀랐다.오늘 장례식 참석 목록에 소씨 가문은 없었다. 그런데도 소민준이 이렇게 들어와 있다는 건 이곳 직원을 매수했던가 참석 인원에게 간절히 부탁한 게 틀림없다.소민준의 뒤로 소민영도 다리를 절룩거리며 다가왔다.“그런데 솔직히 우리 오빠한테 감사해야 하는 거 알죠? 오빠가 헤어져 주지 않았으면 강지혁 씨랑 결혼하지도 못했을 거 아니에요. 안 그래...”“소민영!”소민준은 소민영이 쓸데없는 소리로 임유진의 심기를 건드릴까 봐 크게 호통쳤다.“빨리 유진이한테 사과해!”그러고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유진아, 미안해. 민영이가 철이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리고 다시 한번 사과할게. 정말 미안해. 나나 우리 집안이나 너한테는 미안한 마음뿐이야. 한 번만 봐주라... 제발...”임유진은 그 말에 문득 일전 강지혁이 진씨 가문을 상대하려 했던 것이 떠올랐다.소민준이 장례식까지 찾아와 이렇게 비는 걸 보면 아마 진씨 가문을 건드리는 동시에 소씨 가문도 건드린 것 같다.“사실 나도 그때 너 그렇게 보내고 마음이 편치 않았어. 특히 네가 억울했다는 게 밝혀진 뒤로는 더더욱. 만약 내가 그때 널 위해서 진실을 밝히려고 했으면 네가 그런 고생은 하지 않아도 됐을 거야. 정말... 너를 볼 면목이 없어.”소민준의 얼굴에는 후회의 감정이 잔뜩 서려 있었다. 게다가 눈시울까지 붉어진 것이 아마 다른 여성들이 봤으면 그가 잘못한 게 무엇이든 바로 용서해주려고 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임유진은 아니었다. 그녀는 그의 열연에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다.그녀는 당시 진세령의 옆에 딱 붙어 서서 그녀의 손톱이 하나하나 뽑히는 걸 그저 지켜봤을 뿐만 아니라 피가 흥건한데도 표정 하나 변하지 않았던 소민준의 모습이 여전히 눈앞에 선했다.심지어 그는 고통스러워하는 그녀를 보며 제일 후회되는 일이 바로 그녀와 함께했었던 일이라고까지 했다.그렇게도 차갑고 태도가 손바닥 뒤집듯 바뀌는 남자인데 임유진이 지금 그의 아련한 얼굴을 좀
강현수의 시선이 너무 지독하게 한곳에 꽂혀있던 탓인지 조문객들이 하나둘 이쪽을 쳐다보며 수군거리기 시작했다.“강현수, 뭐 할 말 있어?”그때 강지혁이 임유진의 손을 잡으며 강현수를 노려보았다. 꼭 이 여자는 내 것이니 이만 꺼지라는 것 같았다.강현수는 잘 포개져 있는 두 사람의 손을 가만히 바라보더니 결국 끝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리고 시선을 떼고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한은정은 그 광경에 그제야 안도한 듯 표정이 풀어졌다.물론 안도한 건 한은정뿐만이 아니었다. 임유진 역시 다행이라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걱정하지 마. 아무 일도 없을 거야.”강지혁의 목소리가 귓가에 낮게 울려 퍼졌다. 그 소리에 임유진이 고개를 옆으로 돌리자 강지혁이 그녀의 두 눈을 바라보며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오늘은 할아버지 장례식이라 강현수도 뭔 짓을 하지는 않을 거야. 여기서 일을 벌이면 그건 집안 간의 대립으로 이어질 테니까.”강지혁은 잠깐 머뭇거리더니 이내 임유진의 손을 더 꽉 잡았다.“강현수도 알 거야. 자기한테는 이제 그 어떤 기회도 없다는 걸.”그 뒤로 장례식은 순탄하게 진행됐다.임유진은 큰 배를 손으로 지탱하며 계속해서 강지혁의 곁을 지키다 조문객들이 조금 빠지고 나서야 밖에 있는 휴식 구역으로 가 휴식을 취했다.배 속의 아이들도 오늘은 분위기가 무거운 날인 걸 아는지 작은 태동만 있을 뿐 크게 그녀를 불편하게 만들지는 않았다.임유진은 의자에 앉아 습관적으로 자신의 배를 어루만지며 아이들에게 오늘 있었던 일들을 얘기해주었다.그때 그녀의 곁을 지키고 있던 경호원 몇몇이 부산스럽게 움직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멀지 않은 곳에 강현수가 서 있는 것이 보였다.경호원은 그가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오지 못하게 적당히 거리를 두고 그를 제지했다.“나한테 뭐 할 말 있어요?”임유진이 먼저 물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의 얼굴을 보며 방금 그녀가 배 속의 아이들과 다정하게 얘기를 나누던 장면을 떠올렸다.무척이나 낯선 모습이었지만 그
게다가 이제는 강문철도 없으니 임유진이 강씨 가문이 안주인이라는 건 그 누구도 반박할 수 없는 사실이 되었다.또한 임유진은 임신까지 했으니 아이들이 무사히 태어나면 그때는 그 누구도 그 자리를 감히 탐낼 수 없게 된다.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모두 그 사실을 인지하고 있기에 강지혁을 대하는 것처럼 그녀를 대했다.임유진은 강지혁의 아내로서 줄곧 강지혁의 곁에 있었다.강씨 가문은 S 시에서 가장 뿌리가 깊고 또 유명한 가문이라 장례식장도 컸고 조문객들도 훨씬 많았다.강지혁은 임유진이 무리라도 할까 봐 몇 번이나 그녀에게 이만 쉬라고 했지만 임유진은 고개를 저으며 계속해서 그의 곁을 지켰다.“나 아직 괜찮아. 진짜 힘들면 너한테 얘기할게. 나도 내 몸 귀한 줄 알아.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임유진도 자신이 아이셋을 가진 임산부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었다.그때 조문객들이 입구를 바라보며 강현수의 이름을 불렀다.이에 임유진은 살짝 움찔하더니 저도 모르게 시선을 돌려 입구 쪽을 바라보았다.그러자 익숙한 남자의 실루엣이 천천히 이쪽으로 다가오고 있는 것이 보였다.강현수와 마지막으로 본 것도 이제는 몇 달 전이었다.한때는 생사를 함께 했던 친구였는데 결국에는 썩 유쾌하지 않은 방식으로 헤어지게 되었다.강현수는 오늘 부모님과 함께 장례식에 참석했다.임유진이 그를 바라봤을 때 그의 시선 역시 임유진에게 닿아있었다.강현수는 임유진을 보자마자 옆으로 늘어트린 손을 살짝 움켜쥐었다.그토록 오래 찾아 헤맸던 사람을, 오랜 기간 마치 습관처럼 떠올렸던 사람을 그는 번번이 놓쳐버렸다.임유진과 다른 방식으로 다시 시작할 수도 있었는데 그는 그 가능성마저도 자기 손으로 부숴버렸다.그 결과 그녀는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되었고 다른 남자의 아이를 임신했으며 지금 그 남자의 곁에 서 있게 되었다.강현수는 이제 영원히 그녀 곁에는 있을 수 없게 되었다.강현수네 가족이 강지혁과 임유진의 앞으로 다가왔을 때 강현수는 위로의 말을 건네는 부모님과 달리 아무 말도 하지
어쩌면 강지혁은 줄곧 할아버지의 사랑을 받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그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고 돌아온 그에게 유일한 버팀목이라고는 강문철밖에 없었으니까.“나는 솔직히 네 할아버지가 고마워. 혁이 너를 이렇게 멋있게 키워줬잖아. 그리고 나랑 만나게 해줬고.”임유진은 계속해서 그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말을 이어갔다.“혁아, 네가 원하는 가족 간의 사랑은 앞으로 내가 줄게. 그리고 우리 아이들도 줄 거야.”그 말에 강지혁의 눈동자가 흔들렸다.임유진은 모든 걸 알고 있었다. 그가 무엇을 가장 원하는지 이미 다 알고 있었다.“아까 네가 그랬지? 사람마다 중요하게 여기는 게 다 다르다고. 그럼 너는? 네가 중요하게 여기는 건 뭔데?”강지혁이 임유진의 체향을 들이마시며 물었다.그녀의 냄새를 맡고 있으면 늘 이렇게 마음이 진정되고 몸이 편안해졌다.“나?”임유진은 그 말에 잠시 생각하다가 답했다.“내가 가장 중요하게 여기는 건 혁이 너랑 우리 아이들이야.”“유진아, 나는 욕심이 많아. 나는 너를 그 누구와도 나누고 싶지 않아. 그게 우리 아이들이라고 해도 나는 싫어. 나는 내가 네 마음속 1순위였으면 좋겠고 너한테 가장 중요한 사람이었으면 좋겠어.”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이 눈을 깜빡였다.설마 아직 태어나지도 않은 아이들을 질투하는 건가?“혁아, 너는 내 마음속 1순위야. 물론 아이들도 너무 중요하고 소중하지만 너랑은 결이 조금 달라. 혁이 너는 나한테 유일무이한 존재잖아.”임유진은 두 손을 둘러 가볍게 강지혁을 끌어안았다.이미 배가 불러올 대로 불러와 완전히 꼭 끌어안지는 못했지만 싸늘한 방 공기를 녹이기에는 충분했다.“내가 너한테 유일무이한 존재라고?”“응. 널 대신할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어. 물론 아이들을 낳고 진정한 엄마가 되면 어쩔 수 없이 아이들에게 더 신경을 쓰고 더 관심을 쏟을 수밖에 없겠지.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네가 중요하지 않은 건 아니야. 이건 장담해. 그리고 네가 원하면 네가 원하는 방식대로 더 많이 널 사랑해줄게. 혁아,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