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요."한지영은 어차피 자신이 뭘 줘도 백연신의 성에는 차지 않을 거라며 배 째라는 식으로 말했다."그럼 그러지."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은 그가 이렇게 쉽게 수락할 줄은 몰랐는지 어찌 됐든 간에 다행이라며 안심했다."손은 어때? 아직도 따가워?"백연신이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니요.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한지영이 괜찮다고 대답을 하고 나서야 백연신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몸에 지니고 있던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 물기를 닦아주었다."아직도 조금 빨갛게 달아올랐네, 바르는 약은 있어?""아, 있어요.""그럼 지금 가서 약 가지고 와."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이 쪼르르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바르는 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마치 말 잘 듣는 어린애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머리를 한번 긁적이다 이내 생각을 멈추고 방에서 나왔다.한지영이 약을 가지고 나와보니 백연신은 어느새 거실에 앉아 자신의 부모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그녀가 세 사람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마침 그녀의 엄마가 말을 했다."그렇구나, 술에 취해서 우리 지영이가 자네를 밤새 돌봐줬었구나. 우리 지영이 얘가 어릴 때부터 마음이 착하고 여려서 꼭 그렇게 힘든 사람을 보면 도와줘야 직성이 풀리곤 했어. 호호호."한지영은 그 말에 하마터면 발을 접지를 뻔했다. 마음이 착하고 여려? 힘든 사람을 보면 꼭 도와줘야 직성이 풀린다고?한지영은 진실을 모른 채 백연신이 들려주는 얘기에 그녀를 잘 포장하고 있는 자신의 엄마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네, 그때 지영이가 옆에서 절 밤새 돌봐주지 않았더라면 술 취한 제가 어디 길가에 널브러져 그대로 나쁜 사람들한테 시비라도 당했을 거예요."백연신은 말을 한 후 한지영을 쳐다보며 살인미소를 날렸다."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한지영은 양심을 콕콕 찌르는 그의 말에 차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하지만 한지영의 부모님은 자신의 딸이 대견한지 거기에 한 술
"배다른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백연신이 담담하게 얘기했다."저희 아버지가 생전에 여자가 좀 많았었어요. 그래서 자식들도 따라서 많아졌죠."한지영의 부모님은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을 예상 못 했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해 하고 있었다.그때 한지영이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엄마, 아빠. 연신 씨 부모님 일은 연신 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 난."백연신은 한지영의 말에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는 곧 자신도 모르게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한지영의 아버지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그래, 그건 지영이 네 말이 맞다. 그럼 자네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회사를 책임지고 운영하고 있습니다.""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백연신의 답에 한지영 아버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제 29살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무슨 회사를 운영한다는 건가?"한지영의 아버지는 고작 2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회사를 운영한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기껏해야 자신의 동창 자식들처럼 회사에서 대리나 혹은 팀장직을 맡고 있을 거로만 생각했다."백선 그룹이라고,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한지영의 아버지 같은 소시민들에게 백선 그룹이라고 말을 해 봤자 아마 잘 모를 것이다.그래서 한지영의 아버지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글쎄... 들어본 적 없는 것 같네. 스타트업 이런 건가?"한지영 아버지는 대기업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안 했는지 당연히 작은 회사인 줄로만 알았다.한지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옆에서 민망한 듯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백연신은 그저 옅게 웃을 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얘기하다가 한지영은 슬슬 타이밍을 보며 백연신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한지영의 부모님이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겠냐고 제안해왔다."회사에 급한 일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한지영이 눈을 깜빡이며 백연신에게 사인을 주었다."그렇다고 어머님
"그래?"백연신은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볼이 희미하게 붉어진 것을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그때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고 두 사람은 천천히 백연신이 차를 주차해 둔 곳까지 걸어갔다.한지영은 한시라도 빨리 백연신을 보내고 싶었는지 주차장에 다다르자 얼른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그럼 잘 가요."한지영이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집으로 가려고 몸을 돌리자 백연신이 한발 빨리 한지영의 팔을 낚아채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아!"한지영은 그의 가슴께에 코를 부딪치고 많이 아픈지 소리까지 냈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부딪힌 게 이번 한 번이 아니었지만, 매번 적응되지 않았다.백연신은 허리를 숙여 입술을 그녀의 귓가로 가져가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아까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비밀로 해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준다고 약속했었지?""뭐... 뭐 해줄까요?"한지영은 침을 한번 삼키며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나한테 키스해. 그리고 내가 제일 좋다고 말해."백연신의 요구에 한지영이 눈을 깜빡이며 재차 물었다."여기서요?""응, 여기서."지금은 8시도 채 안 된 시간이었기에 아파트 단지를 걸어 다니고 있는 주민들이 꽤 많이 있었다. 두 사람이 있는 주차장에는 그나마 사람들이 적은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다.한지영은 입술을 깨물고는 물었다."장소만 좀 바꾸면 안 될까요?""왜? 내가 창피해? 그래서 그래?"백연신이 눈썹까지 치켜들며 물었다."그게 아니라, 이런 곳에서 하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뒤에서 수군거릴 게 뻔한데.""뭐가 문제지?"백연신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우리는 지금 애인 사이 아닌가? 커플이 키스하는 건 당연한 거야. 마음대로 수군대라고 해."‘하지만 우리는 얼마 안 가 곧 헤어질 거잖아요!’한지영은 다행히 속으로만 내뱉었다. 이런 ‘끝’은 서로가 알고 있음에도 굳이 꺼내지 않는 것이 예의이니까. 한지영은 백연신을 바라보았다.그는 달빛을
퇴근 시간이 되고 임유진은 탁유미를 불렀다."언니, 저 내일 오후 반 차 좀 쓸 수 있을까요? 엄마 산소에 가야 할 것 같아서요."추석은 공휴일이 맞지만, 요식업계는 그런 날이면 더 바빴기에 휴가를 쓰려면 미리 말을 해줘야 했다.탁유미는 임유진의 말에 얼른 대답했다."당연하죠. 그렇게 해요. 오후에 갈 거면 내가 음식이라도 몇 가지 만들어 줄까요?""아니요, 제가 준비할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임유진은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는 아직 어렸고 이제는 다 컸으니 직접 요리해서 어머니께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조심해서 가요."탁유미는 퇴근하는 임유진을 보며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탁유미는 임유진이 자기 입으로 강현수와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했으니 임유진에게 굳이 이런 부탁을 하면 그녀가 곤란해질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건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강현수를 찾아가 얘기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임유진은 가게에서 나온 후 바로 강씨 저택으로 가지 않고 마트에 들러 음식 재료를 산 후 성묘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구매하러 스쿠터를 타고 어떤 작은 가게로 향했다."할머니, 저 왔어요."임유진은 익숙한 듯 80대쯤 되어 보이는 장 할머니를 향해 말했다. 그녀는 매년 산소로 가기 전에 꼭 이곳에 와 준비 물품들을 구매하곤 했었다. 감옥에 있는 3년은 예외였지만."유진이구나. 내일 어머니 산소로 가는 거야?"장 할머니는 오랜만에 찾아온 임유진을 향해 웃어 보였다."네."장 할머니는 임유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익숙한 듯 봉투에 물건들을 담아 넘겨주었다."2, 3년은 여기로 안 왔던 것 같은데. 난 그래서 올해도 안 오는 줄 알았어.""그때는 음... 제가 좀 일이 있어서요. 다른 곳에서 샀어요."임유진은 물건을 받아 들며 대충 얼버무렸다."유진이 어머니는 좋겠네. 유진이처럼 효녀를 둬서."그 말에 임유진
임유진은 음식 재료를 냉장고에 넣은 후 몸을 돌려 보니 거기에는 강지혁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던 임유진은 애써 그의 눈길을 피하며 부엌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강지혁에 의해 팔을 붙잡혔고 그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굿나잇 인사는?""잘 자."임유진의 짤막한 인사에 강지혁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누나, 왜 이렇게 점점 성의가 없어지는 것 같지?""..."임유진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누가 그러는데 누나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려면 내가 누나한테 철저하게 잘 보여야 한대."강지혁이 허리를 숙여 임유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래서 누나 의견도 듣고 싶은데. 내가 그렇게만 하면 진짜로 나를 좋아해 줄 거야?"임유진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방금 저 말 진짜 강지혁의 입에서 나온 거 맞아?’임유진의 기겁한 듯한 표정에 강지혁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왜? 내가 누나한테 잘 보이겠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임유진은 목구멍에 뭔가가 막힌 것처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강지혁이 그런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이제는 내가 얼마나 누나의 애정을 바라고 있는지 알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어떻게 잘 보여야 누나는 나를 좋아해 줄 거야?"임유진은 강지혁이 지금 매만지고 있는 자신의 입술이 점점 더 뜨거워 나는 것만 같았다. 또한, 심장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이런 말까지 내뱉을 줄은 몰랐다.강지혁은 진짜로 그녀를 좋아하는 걸까?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싶을 만큼? 어디까지가 진심인 거야, 대체?임유진은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추석 점심, 강지혁은 강문철이 있는 병원에 들렀다."너희 아버지 산소는 잘 다녀왔니?"강문철이 물었다.한때 잘
"네 아버지가 어떤 꼴이 났는지 벌써 잊은 거냐?"강문철은 또다시 했던 말을 반복했다."잊은 적 없어요. 그리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을 거라고."강지혁 역시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그럼 지금 당장 그 임유진이라는 아가씨 집에서 내보내거라. 그리고 다시는 네 앞에 얼씬도 못 하게 멀리 치워버려."강문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그건 안 될 것 같아요, 할아버지."강지혁은 아까 강문철이 임유진을 치워버리라고 했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머리보다 몸이 본능적으로 그 제안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너!"강문철은 단호한 손자의 말에 눈을 부릅뜨고 강지혁을 노려보았다."할아버지, 전 아버지 전철을 밟을 생각 같은 거 없어요. 난 모든 걸 내 손아귀에 쥐고 있을 거예요. 누나도 나라는 존재 없이는 못 살아가게끔 만들 거고요."강지혁은 무섭게 웃었다."그러니까 할아버지도 인제 내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만약 여기서 더 간섭하려 든다면 저도 그때는 아무리 할아버지라고 해도 가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강문철은 그 말에 화가 단단히 났는지 빨개진 얼굴로 연신 기침을 해댔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주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너 지금, 이 할애비를 협박하는 거냐?""설마요. 그냥 잘 알아두시라고요."강지혁은 강문철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 여자 털끝이라도 건드리면 저 진짜 가만 안 있을 겁니다, 할아버지."강문철은 강지혁의 경고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도대체 그 아가씨 어디가 그렇게 좋더냐? 뭐가 널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었냔 말이다."강문철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전 임유진을 병원까지 데려와서 봤을 때 그녀는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자였고 자신이 마음속에 있는 며느리 상하고는 거리가 멀었다."처음으로 나한테 자신을 누나라 부르라고 했던 여자니까요."강지혁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에게 앞으로 둘이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자고 했었다.임유진이 있어
매번 산소로 가는 길이 너무 힘들었을뿐더러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이곳저곳 성한 곳이 없었다. 보수공사를 진행하려고 했었지만 그럴 바에는 아예 묘원으로 옮겨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다만 그렇게 마음먹고 난 후 갑자기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렇게 3년 동안 성묘하러 가지도 못한 채 묘원으로 옮기는 생각은 꾹꾹 묵혀두었다. 3년 뒤 드디어 출소를 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돈이 없었다. 묘원으로 옮기는 돈은 물론이었고 무덤을 옮겨주는 일꾼들에게 줄 돈조차도 없었다.임유진이 어머니 산소가 있는 산 아래까지 와보니 거기에는 이미 성묘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묘지로 들어가기 전 수첩에 묘의 고유번호를 기재했다.어느덧 임유진의 차례가 다가왔고 그녀가 익숙하게 번호를 적고 묘지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담당자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아가씨, 이 번호는 이제 여기 없어. 옮겨간 지가 언젠데.""옮겨 갔다니요?"임유진이 깜짝 놀라 물었다."몰랐어? 여기 보면 임정호라는 사람이 옮겨 갔는데? 산소 주인 남편 맞지?"직원이 수첩을 보여주며 말했다.그에 임유진이 일전 임정호가 무덤을 옮기는 일로 자신을 불렀던 일이 떠올랐다. 무덤을 옮긴다는 임정호의 말에 집으로 찾아가 보니 임정호와 계모는 무덤을 옮기는 말보다 강현수에 대해 더 많이 캐물었고 그녀는 그렇게 무덤을 옮기는 일이 흐지부지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아무런 말도 없이 옮겨버리다니."혹시 어디로 옮겼는지는 아세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그거야 나는 모르지."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역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봐야겠는지 직원에게 부탁했다."그럼... 그럼 제가 잠깐만 올라갔다 오면 안 될까요? 진짜 옮겨간 게 맞는지 확인만 되면 금방 다시 내려올게요."임유진의 모습에 직원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허락해 주었다.임유진은 거의 뛰어가다시피 산을 올랐다. 그렇게 힘겹게 산을 올라 어머니가 묻혀 있는 자리에 도착해보니 그곳은 어느새 평지가 되어 있었고 아무것도 없었다.‘진짜 옮긴 거야.
그때 옆에 있던 이웃이 그녀에게 다가와 아빠와 새엄마가 여행을 가서 지금 집에 없다고 했다. 임유라 같은 경우는 이웃의 말에 따르면 밖에서 큰 집을 사서 이젠 집에 돌아오는 횟수가 드물다고 한다.임유진은 문득 아빠와 새엄마가 일부러 그랬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오늘 그녀가 돌아와 엄마에게 성묘할 걸 알고 일부러 집을 비워둔 게 뻔했다.백억이라, 아빠가 요구한 금액만 생각하면 그녀는 머리가 아찔해 났다.지금의 임유진이 대체 무슨 수로 아빠에게 백억을 줄 수 있겠는가!그녀는 이웃들과 작별한 뒤 임유라에게 전화를 걸었다.“어디야? 한번 만나, 너한테 할 얘기 있어.”“미안한데 나 지금 시간 없어.”임유라의 시큰둥한 목소리가 휴대폰 너머로 들려왔다.“그럼 이것만 대답해. 아빠가 우리 엄마 무덤을 어디로 옮겼어?”임유진이 물었다.“그건 나야 모르지.”임유라는 실실 비꼬면서 대답했다.“그럼 두 분 지금 어디로 여행 갔는지는 알고 있겠지?”“정말 미안한데 나 진짜 몰라. 나중에 돌아오시거든 네가 찾는다고 말씀드릴게. 그럼 됐지?”임유라가 말했다.곧이어 전화기 너머로 한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이 립스틱 색상 유라 씨한테 안 어울려요.”임유진은 흠칫 놀랐다. 이 목소리의 주인공은 바로 강현수였다.이어서 임유라가 애교 섞인 말투로 대답했다.“난 또 현수 씨가 이 색상 좋아하는 줄 알았죠. 나중에 다른 컬러로 바꿀게요.”그녀는 뒤늦게 휴대폰에 대고 임유진에게 말했다.“이만 끊을게. 나 지금 좀 바쁘거든.”곧이어 통화가 끊겼다.임유진은 손에 쥔 휴대폰을 멍하니 바라보며 말로 이루 표현할 수 없는 감정에 휩싸였다.며칠 전에 강현수를 만났을 때, 그가 그녀에게 했던 말과 지금 임유라에게 립스틱 색상이 어울리지 않는다는 둥 이런 얘기는 너무 선명한 대비를 이뤘다.강현수 같은 남자는 아무래도 그저 신선감 때문에 임유진에게 그런 말을 한 듯싶다. 마치 그녀에게만 특별한 감정이 있을 줄 알았는데 실은 수많은 여자에게 호감을 느끼고 있었다.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