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그래요. 반가워요."한지영의 부모님은 백연신의 말에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인사를 했다.한지영의 아버지는 백연신을 거실로 안내했고 한지영의 어머니는 한지영을 불러세우더니 낮게 속삭였다."진짜 너 남자친구 맞아? 어디 업체에 부탁해서 데려온 거 아니야?"그러자 한지영이 째려보며 말했다."그럼 그렇게 생각하시던가요.""어머, 얘 말하는 것 좀 봐. 됐고, 얼른 가서 차나 내와."한지영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을 주방으로 보낸 후 친절한 얼굴을 하고 백연신이 앉아 있는 쪽으로 다가갔다.한지영은 군말 없이 주방으로 가서 분부대로 차를 탔다. 그렇게 거실로 차를 내오니 세 사람은 어느새 화기애애하게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었다."우리 지영이하고는 해외에 있을 때 알게 됐다고 했는데 그럼 계속 연락을 하고 지낸 건가?"한지영 엄마가 물었다."아니요. 제가 얼마 전에 한국에 귀국하고 우연히 만나게 됐어요. 그때부터 다시 연락하게 된 거고요."백연신은 한지영 쪽을 슬쩍 보더니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사실은 꽤 오랫동안 지영이를 찾고 있었어요. 그런데 어떻게 우연히 만나게 됐네요."한지영의 부모님은 백연신의 말에 감동한 얼굴을 했고 한지영은 소름이 돋았다."그것 참 인연이로구먼, 허허허."한지영의 아버지가 웃으며 말했다."헌데, 해외에서 만난 지 며칠밖에 안 됐을 텐데 그 짧은 시간 동안 어떻게 우리 딸아이를 좋아하게 됐는가?"한지영의 아버지는 자신이 딸이 고작 해외에 있던 그 며칠 새에 이런 남자를 3년이나 목매게 했다는 사실에 호기심이 일었다. 백연신은 태어나서부터 지금까지 여자가 끊이지 않았을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으니까."지영이랑 같이 있으면 마냥 즐거웠어요. 하루는 제가 술에 취해서..."백연신이 두 사람의 스토리를 얘기하려고 하자 한지영이 당황한 듯 손을 떨더니 이내 찻물을 손에 쏟고 말았다."앗!"그녀가 얼른 찻잔을 내려놓았지만, 손등은 이미 빨갛게 부어올랐다. 백연신은 그 모습에 얼굴을 찌푸리더니 얼른 그녀를 일으켜
"해달라는 거 다 해줄게요."한지영은 어차피 자신이 뭘 줘도 백연신의 성에는 차지 않을 거라며 배 째라는 식으로 말했다."그럼 그러지."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은 그가 이렇게 쉽게 수락할 줄은 몰랐는지 어찌 됐든 간에 다행이라며 안심했다."손은 어때? 아직도 따가워?"백연신이 그녀의 손을 바라보며 물었다."아니요. 이제 좀 괜찮아진 것 같아요."한지영이 괜찮다고 대답을 하고 나서야 백연신은 수도꼭지를 잠그고 몸에 지니고 있던 손수건으로 그녀의 손에 남아있는 물기를 닦아주었다."아직도 조금 빨갛게 달아올랐네, 바르는 약은 있어?""아, 있어요.""그럼 지금 가서 약 가지고 와."백연신의 말에 한지영이 쪼르르 자신의 방으로 달려가 바르는 약을 집어 들었다. 그러고는 자신이 마치 말 잘 듣는 어린애가 된 것만 같은 기분에 머리를 한번 긁적이다 이내 생각을 멈추고 방에서 나왔다.한지영이 약을 가지고 나와보니 백연신은 어느새 거실에 앉아 자신의 부모님과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그녀가 세 사람 쪽으로 가까이 다가가자 마침 그녀의 엄마가 말을 했다."그렇구나, 술에 취해서 우리 지영이가 자네를 밤새 돌봐줬었구나. 우리 지영이 얘가 어릴 때부터 마음이 착하고 여려서 꼭 그렇게 힘든 사람을 보면 도와줘야 직성이 풀리곤 했어. 호호호."한지영은 그 말에 하마터면 발을 접지를 뻔했다. 마음이 착하고 여려? 힘든 사람을 보면 꼭 도와줘야 직성이 풀린다고?한지영은 진실을 모른 채 백연신이 들려주는 얘기에 그녀를 잘 포장하고 있는 자신의 엄마를 보며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네, 그때 지영이가 옆에서 절 밤새 돌봐주지 않았더라면 술 취한 제가 어디 길가에 널브러져 그대로 나쁜 사람들한테 시비라도 당했을 거예요."백연신은 말을 한 후 한지영을 쳐다보며 살인미소를 날렸다."지금도 그때 생각만 하면 얼마나 고마운지 몰라요."한지영은 양심을 콕콕 찌르는 그의 말에 차마 그쪽으로 고개를 돌릴 수가 없었다.하지만 한지영의 부모님은 자신의 딸이 대견한지 거기에 한 술
"배다른 형제자매들이 있습니다."백연신이 담담하게 얘기했다."저희 아버지가 생전에 여자가 좀 많았었어요. 그래서 자식들도 따라서 많아졌죠."한지영의 부모님은 이런 대답이 나올 줄을 예상 못 했는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어색해 하고 있었다.그때 한지영이 자신도 모르게 한마디 했다."엄마, 아빠. 연신 씨 부모님 일은 연신 씨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고 생각해, 난."백연신은 한지영의 말에 의외라는 듯 그녀를 바라보고는 곧 자신도 모르게 따뜻한 눈빛을 보냈다.그녀의 단호한 목소리에 한지영의 아버지가 먼저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그래, 그건 지영이 네 말이 맞다. 그럼 자네는 지금 어떤 일을 하고 있는가?""회사를 책임지고 운영하고 있습니다.""회사를... 운영하고 있다고?"백연신의 답에 한지영 아버지는 자신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하는 표정을 지었다."이제 29살이라고 하지 않았나? 그런데 무슨 회사를 운영한다는 건가?"한지영의 아버지는 고작 29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회사를 운영한다는 게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그는 기껏해야 자신의 동창 자식들처럼 회사에서 대리나 혹은 팀장직을 맡고 있을 거로만 생각했다."백선 그룹이라고, 혹시 들어보신 적 있으실지 모르겠습니다."한지영의 아버지 같은 소시민들에게 백선 그룹이라고 말을 해 봤자 아마 잘 모를 것이다.그래서 한지영의 아버지는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글쎄... 들어본 적 없는 것 같네. 스타트업 이런 건가?"한지영 아버지는 대기업이라고는 전혀 생각도 안 했는지 당연히 작은 회사인 줄로만 알았다.한지영은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옆에서 민망한 듯 다른 곳을 보고 있었고 백연신은 그저 옅게 웃을 뿐이었다.그렇게 한참을 더 얘기하다가 한지영은 슬슬 타이밍을 보며 백연신을 데리고 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때 한지영의 부모님이 같이 식사라도 하지 않겠냐고 제안해왔다."회사에 급한 일이 아직 남아 있다고 하지 않았어요?"한지영이 눈을 깜빡이며 백연신에게 사인을 주었다."그렇다고 어머님
"그래?"백연신은 시선을 피하는 그녀의 볼이 희미하게 붉어진 것을 보고 의미심장하게 웃었다.그때 엘리베이터가 1층에 도착했고 두 사람은 천천히 백연신이 차를 주차해 둔 곳까지 걸어갔다.한지영은 한시라도 빨리 백연신을 보내고 싶었는지 주차장에 다다르자 얼른 그를 향해 손을 흔들며 인사했다."그럼 잘 가요."한지영이 뒤도 안 돌아보고 다시 집으로 가려고 몸을 돌리자 백연신이 한발 빨리 한지영의 팔을 낚아채 그녀를 자신의 품에 끌어안았다."아!"한지영은 그의 가슴께에 코를 부딪치고 많이 아픈지 소리까지 냈다. 이런 식으로 갑자기 부딪힌 게 이번 한 번이 아니었지만, 매번 적응되지 않았다.백연신은 허리를 숙여 입술을 그녀의 귓가로 가져가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아까 호텔에서 있었던 일을 비밀로 해주면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해준다고 약속했었지?""뭐... 뭐 해줄까요?"한지영은 침을 한번 삼키며 당황한 듯한 목소리로 물었다."지금 나한테 키스해. 그리고 내가 제일 좋다고 말해."백연신의 요구에 한지영이 눈을 깜빡이며 재차 물었다."여기서요?""응, 여기서."지금은 8시도 채 안 된 시간이었기에 아파트 단지를 걸어 다니고 있는 주민들이 꽤 많이 있었다. 두 사람이 있는 주차장에는 그나마 사람들이 적은 편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없는 건 아니었다.한지영은 입술을 깨물고는 물었다."장소만 좀 바꾸면 안 될까요?""왜? 내가 창피해? 그래서 그래?"백연신이 눈썹까지 치켜들며 물었다."그게 아니라, 이런 곳에서 하다 누가 보기라도 하면 어떡해요... 뒤에서 수군거릴 게 뻔한데.""뭐가 문제지?"백연신이 이해가 안 된다는 표정으로 물었다."우리는 지금 애인 사이 아닌가? 커플이 키스하는 건 당연한 거야. 마음대로 수군대라고 해."‘하지만 우리는 얼마 안 가 곧 헤어질 거잖아요!’한지영은 다행히 속으로만 내뱉었다. 이런 ‘끝’은 서로가 알고 있음에도 굳이 꺼내지 않는 것이 예의이니까. 한지영은 백연신을 바라보았다.그는 달빛을
퇴근 시간이 되고 임유진은 탁유미를 불렀다."언니, 저 내일 오후 반 차 좀 쓸 수 있을까요? 엄마 산소에 가야 할 것 같아서요."추석은 공휴일이 맞지만, 요식업계는 그런 날이면 더 바빴기에 휴가를 쓰려면 미리 말을 해줘야 했다.탁유미는 임유진의 말에 얼른 대답했다."당연하죠. 그렇게 해요. 오후에 갈 거면 내가 음식이라도 몇 가지 만들어 줄까요?""아니요, 제가 준비할 수 있어요. 감사합니다."임유진은 자신이 직접 요리를 해드리고 싶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그녀는 아직 어렸고 이제는 다 컸으니 직접 요리해서 어머니께 대접해 드리고 싶었다."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조심해서 가요."탁유미는 퇴근하는 임유진을 보며 뭐라고 말을 하고 싶었지만 끝내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탁유미는 임유진이 자기 입으로 강현수와 친한 사이는 아니라고 했으니 임유진에게 굳이 이런 부탁을 하면 그녀가 곤란해질 수도 있겠다 생각했다. 그리고 어차피 이건 자신의 문제이기 때문에 자신이 직접 강현수를 찾아가 얘기를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다.임유진은 가게에서 나온 후 바로 강씨 저택으로 가지 않고 마트에 들러 음식 재료를 산 후 성묘에 필요한 준비물들을 구매하러 스쿠터를 타고 어떤 작은 가게로 향했다."할머니, 저 왔어요."임유진은 익숙한 듯 80대쯤 되어 보이는 장 할머니를 향해 말했다. 그녀는 매년 산소로 가기 전에 꼭 이곳에 와 준비 물품들을 구매하곤 했었다. 감옥에 있는 3년은 예외였지만."유진이구나. 내일 어머니 산소로 가는 거야?"장 할머니는 오랜만에 찾아온 임유진을 향해 웃어 보였다."네."장 할머니는 임유진이 아무 말도 하지 않았음에도 익숙한 듯 봉투에 물건들을 담아 넘겨주었다."2, 3년은 여기로 안 왔던 것 같은데. 난 그래서 올해도 안 오는 줄 알았어.""그때는 음... 제가 좀 일이 있어서요. 다른 곳에서 샀어요."임유진은 물건을 받아 들며 대충 얼버무렸다."유진이 어머니는 좋겠네. 유진이처럼 효녀를 둬서."그 말에 임유진
임유진은 음식 재료를 냉장고에 넣은 후 몸을 돌려 보니 거기에는 강지혁이 무슨 할 말이라도 있는 사람처럼 그녀를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그의 시선이 조금 부담스러웠던 임유진은 애써 그의 눈길을 피하며 부엌을 빠져나가려고 했다. 하지만 이내 강지혁에 의해 팔을 붙잡혔고 그는 그녀를 보며 말했다."굿나잇 인사는?""잘 자."임유진의 짤막한 인사에 강지혁이 그녀를 뚫어지게 바라보더니 이내 웃음을 터트렸다."누나, 왜 이렇게 점점 성의가 없어지는 것 같지?""..."임유진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그저 가만히 서 있었다."누가 그러는데 누나가 나를 좋아하게 만들려면 내가 누나한테 철저하게 잘 보여야 한대."강지혁이 허리를 숙여 임유진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래서 누나 의견도 듣고 싶은데. 내가 그렇게만 하면 진짜로 나를 좋아해 줄 거야?"임유진은 하마터면 혀를 깨물 뻔했다. 그녀는 눈을 동그랗게 뜬 채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방금 저 말 진짜 강지혁의 입에서 나온 거 맞아?’임유진의 기겁한 듯한 표정에 강지혁이 웃음을 지으며 말했다."왜? 내가 누나한테 잘 보이겠다는 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임유진은 목구멍에 뭔가가 막힌 것처럼 말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그러자 강지혁이 그런 그녀의 입술을 매만지더니 나지막이 속삭였다."이제는 내가 얼마나 누나의 애정을 바라고 있는지 알 것 같아? 그래서 내가 어떻게 잘 보여야 누나는 나를 좋아해 줄 거야?"임유진은 강지혁이 지금 매만지고 있는 자신의 입술이 점점 더 뜨거워 나는 것만 같았다. 또한, 심장도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임유진은 강지혁이 이런 말까지 내뱉을 줄은 몰랐다.강지혁은 진짜로 그녀를 좋아하는 걸까? 그녀에게 잘 보이려고 노력하고 싶을 만큼? 어디까지가 진심인 거야, 대체?임유진은 묻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지만 결국에는 아무것도 묻지 못했다....추석 점심, 강지혁은 강문철이 있는 병원에 들렀다."너희 아버지 산소는 잘 다녀왔니?"강문철이 물었다.한때 잘
"네 아버지가 어떤 꼴이 났는지 벌써 잊은 거냐?"강문철은 또다시 했던 말을 반복했다."잊은 적 없어요. 그리고 말씀 드렸을 텐데요. 아버지처럼은 되지 않을 거라고."강지혁 역시 똑같은 말을 되풀이했다."그럼 지금 당장 그 임유진이라는 아가씨 집에서 내보내거라. 그리고 다시는 네 앞에 얼씬도 못 하게 멀리 치워버려."강문철이 화를 내며 말했다."그건 안 될 것 같아요, 할아버지."강지혁은 아까 강문철이 임유진을 치워버리라고 했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머리보다 몸이 본능적으로 그 제안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이었다."너!"강문철은 단호한 손자의 말에 눈을 부릅뜨고 강지혁을 노려보았다."할아버지, 전 아버지 전철을 밟을 생각 같은 거 없어요. 난 모든 걸 내 손아귀에 쥐고 있을 거예요. 누나도 나라는 존재 없이는 못 살아가게끔 만들 거고요."강지혁은 무섭게 웃었다."그러니까 할아버지도 인제 내 일에 신경 쓰지 마세요. 만약 여기서 더 간섭하려 든다면 저도 그때는 아무리 할아버지라고 해도 가만 있지는 않을 거예요."강문철은 그 말에 화가 단단히 났는지 빨개진 얼굴로 연신 기침을 해댔다. 그러고는 자신의 손주를 보며 차갑게 말했다."너 지금, 이 할애비를 협박하는 거냐?""설마요. 그냥 잘 알아두시라고요."강지혁은 강문철의 두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 여자 털끝이라도 건드리면 저 진짜 가만 안 있을 겁니다, 할아버지."강문철은 강지혁의 경고에 손으로 이마를 짚으며 물었다."도대체 그 아가씨 어디가 그렇게 좋더냐? 뭐가 널 이렇게까지 하게 만들었냔 말이다."강문철은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일전 임유진을 병원까지 데려와서 봤을 때 그녀는 정말 평범하기 그지없는 여자였고 자신이 마음속에 있는 며느리 상하고는 거리가 멀었다."처음으로 나한테 자신을 누나라 부르라고 했던 여자니까요."강지혁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녀는 그에게 앞으로 둘이서 서로의 버팀목이 되어주자고 했었다.임유진이 있어
매번 산소로 가는 길이 너무 힘들었을뿐더러 시간이 너무 오래되어 이곳저곳 성한 곳이 없었다. 보수공사를 진행하려고 했었지만 그럴 바에는 아예 묘원으로 옮겨버리는 것이 낫겠다 싶었다.다만 그렇게 마음먹고 난 후 갑자기 감옥에 들어가게 되었고 그렇게 3년 동안 성묘하러 가지도 못한 채 묘원으로 옮기는 생각은 꾹꾹 묵혀두었다. 3년 뒤 드디어 출소를 하게 되었지만, 이제는 돈이 없었다. 묘원으로 옮기는 돈은 물론이었고 무덤을 옮겨주는 일꾼들에게 줄 돈조차도 없었다.임유진이 어머니 산소가 있는 산 아래까지 와보니 거기에는 이미 성묘하러 온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묘지로 들어가기 전 수첩에 묘의 고유번호를 기재했다.어느덧 임유진의 차례가 다가왔고 그녀가 익숙하게 번호를 적고 묘지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담당자가 그녀를 불러세웠다."아가씨, 이 번호는 이제 여기 없어. 옮겨간 지가 언젠데.""옮겨 갔다니요?"임유진이 깜짝 놀라 물었다."몰랐어? 여기 보면 임정호라는 사람이 옮겨 갔는데? 산소 주인 남편 맞지?"직원이 수첩을 보여주며 말했다.그에 임유진이 일전 임정호가 무덤을 옮기는 일로 자신을 불렀던 일이 떠올랐다. 무덤을 옮긴다는 임정호의 말에 집으로 찾아가 보니 임정호와 계모는 무덤을 옮기는 말보다 강현수에 대해 더 많이 캐물었고 그녀는 그렇게 무덤을 옮기는 일이 흐지부지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갑자기 이렇게 아무런 말도 없이 옮겨버리다니."혹시 어디로 옮겼는지는 아세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물었다."그거야 나는 모르지."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역시 자신의 눈으로 직접 봐야겠는지 직원에게 부탁했다."그럼... 그럼 제가 잠깐만 올라갔다 오면 안 될까요? 진짜 옮겨간 게 맞는지 확인만 되면 금방 다시 내려올게요."임유진의 모습에 직원이 머리를 긁적이더니 허락해 주었다.임유진은 거의 뛰어가다시피 산을 올랐다. 그렇게 힘겹게 산을 올라 어머니가 묻혀 있는 자리에 도착해보니 그곳은 어느새 평지가 되어 있었고 아무것도 없었다.‘진짜 옮긴 거야.
“응, 안 아파. 그러니까 그만해도 돼.”여자아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하겸은 몇 초간 가만히 있더니 서서히 힘을 풀고 여자아이의 품에 몸을 맡겼다.“세상에! 너 또 싸웠니? 애들 얼굴 좀 봐. 네가 이랬어? 미친 망아지도 아니고 대체 왜 이러는 거야?! 너 나랑 전생에 무슨 원수라도 졌니?”새엄마인 정가연이 다가와 눈을 부라리며 하겸을 노려보았다. 잠깐 한눈 판 사이에 이런 일이 벌어졌으니 머리가 아플 만도 했다.하승찬은 엄마가 오자 바로 상황을 일러바치며 하겸이 어떻게 다른 아이들을 때려눕혔는지 아주 자세하게 얘기해주었다.여자아이는 정가연의 한마디로 시작된 사람들의 질책에 품에 있는 남자아이를 더 꽉 끌어안았다.“괜찮아. 누나가 지켜줄게. 무서워하지 마.”임유진은 아이의 말에 코끝이 시큰해져 얼른 두 아이를 돕기 위해 입을 열었다.하지만 막 말을 내뱉으려는 순간, 강지혁이 아이 둘을 데리고 다급하게 그녀 앞으로 뛰어왔다.“유진아, 지금 당장 가봐야 할 것 같아. 김재호를 찾았어.”“뭐?”임유진이 깜짝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김재호를 찾았다고?!”“그래. 고 비서가 확인했어.”임유진은 저도 모르게 다리에 힘이 풀려 휘청거렸다.김재호를 찾았다는 건 세쌍둥이 중 나머지 한 아이의 행방을 드디어 알 수 있게 된다는 뜻이었다.임유진은 정신을 차린 후 곧바로 강지혁의 손목을 덥석 잡았다.“빨리... 빨리 가자!”“그래, 알았어.”강지혁은 고개를 끄덕인 후 시선을 내려 아이 둘을 바라보았다.“엄마랑 아빠가 급한 일 때문에 당장 가봐야 해. 놀이공원은 다음에 다시 데려와 줄게.”강선율은 의젓한 얼굴로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선현 역시 분위기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깨달은 건지 떼 한번 쓰지 않고 알겠다고 했다.놀이공원에서 나와 차에 올라탄 후 현이는 많이 궁금했던 건지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엄마, 김재호가 누구야? 중요한 사람이야?”“응... 엄청 중요한 사람이야.”임유진은 떨리는 손을 애써 진정시키며 차분하게 답해
“흠... 그럼 내가 심심하지 않게 바로 옆에 붙어만 있어 주면 안 돼? 나도 저기서 놀고 싶단 말이야.”여자아이는 아주 자연스럽게 설득 방법을 바꿨다.“알았어.”남자아이는 이제껏 가만히 있었던 게 무색할 만큼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누나 곁에 있을게.”‘누나’라는 말에 임유진은 또다시 움찔하고 말았다. 남자아이는 눈빛만 닮은 게 아니라 조금 아련한 목소리로 ‘누나’라고 부르는 것까지 강지혁과 아주 많이 닮아있었다.여자아이는 환한 미소를 짓더니 곧바로 남자아이의 손을 잡고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이제 막 두 걸음 정도 움직였을 때 아까 바이킹 줄에서 봤던 승찬이라는 남자아이가 자기보다 한두 살 더 많아 보이는 형들을 데리고 다가왔다.승찬은 손가락으로 겸이란 남자아이를 가리키며 옆에 있는 형들에게 말했다.“내가 말했던 애가 바로 쟤야. 쟤가 진짜 싸움을 잘하거든. 여태 지는 걸 못 봤어. 아마 형들이라도 상대가 안 될걸?”“하승찬, 지금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여자아이가 화를 내며 말했다.“왜? 내 말 맞잖아. 하겸 싸움 잘하는 거 맞잖아.”하승찬은 피식 웃으며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답했다.누가 봐도 일부러 형들을 도발하기 위해 이런 말을 하는 게 분명했다.아니나 다를까 하승찬과 함께 온 아이들은 담방이라도 하겸과 싸울 듯 거리를 좁혀왔다.여자아이는 분위기가 이상하게 돌아가자 얼른 하겸을 제 뒤에 숨기고 큰소리로 외쳤다.“내 동생은 싸움 같은 거 안 해. 그리고 우리는 놀러 온 거지 싸움하러 온 게 아니야. 그러니까 저리 가! 계속 다가오면... 그때는 내가 혼내줄 거야!”용기는 가상했지만 수적으로나 힘적으로나 우위에 있는 아이들에게 여자아이의 협박이 통할 리가 만무했다.하승찬이 데리고 온 아이들 중에서 키가 제일 큰 남자아이는 아무런 거리낌 없이 여자아이를 옆으로 밀어버렸다.여자아이는 중심을 잃은 채 휘청거리다 그대로 바닥에 넘어졌고 머리는 바로 옆 기둥에 부딪히고 말았다.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임유진은 반응조
점심이 되고 임유진 일행은 놀이공원 안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현이와 율이는 노느라 에너지를 많이 써서 식욕이 도는지 음식이 나오자마자 한마디 말도 없이 아주 순식간에 먹어치웠다. 그리고 다 먹은 뒤에는 금방 다시 키즈 코너로 가 놀겠다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나 애들 데리고 놀고 있을게.”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강지혁에게 말했다.“그래.”강지혁은 서로의 손을 꼭 잡고 가는 세 사람의 뒷모습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이제 그에게는 그들이 바로 세상에서 제일 소중한 보물이다.하지만 이러한 행복한 순간에도 불안감은 여전히 마음 한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만약 임유진이 그를 떠난 이유가 정말 더 이상 그를 사랑할 수 없어서인 거라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 거지? 그녀의 기억이 영원히 돌아오지 않도록 조치를 취해야 하나?조금 전까지만 해도 따뜻했던 강지혁의 눈빛에 일말의 어둠이 스쳐 갔다.한편, 임유진은 아이들을 안쪽으로 들여보낸 후 입구 쪽 벤치에 앉아 두 아이를 지켜보았다.현이와 율이는 이제 만난 지 한 달도 채 안 됐지만 제법 남매 느낌이 많이 났다. 두 아이 모두 서로가 무척이나 마음에 드는 듯했다.임유진은 미소를 지은 채 아이들을 바라보다 이내 시선을 돌려 키즈 코너를 쭉 훑어보았다. 그러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두 명의 아이를 발견하고는 곧바로 시선을 멈췄다.아까 바이킹 줄을 섰을 때 봤었던 바로 그 아이들이었다.여자아이는 눈높이를 맞추려는 듯 무릎을 살짝 구부려 앞에 있는 남자아이에게 뭐라고 얘기하고 있었고 남자아이는 그런 그녀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임유진은 남자아이의 얼굴을 본 순간 마치 머리를 세게 한 대 맞은 것 같았다.무척이나 예쁘게 생긴 남자아이였다. 또래 아이들보다 체구도 작고 영양 불균형인지 얼굴이 조금 노랗긴 했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너무나도 조화로운 얼굴을 하고 있었다.지나치게 예쁜 얼굴이어서일까, 임유진은 아이의 얼굴을 꼭 어디에선가 본 적이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그
“딸 관리 좀 제대로 해! 유산은 무슨 얼어 죽을! 당신 나랑 분명히 약속했어. 집안의 모든 건 다 우리 승찬이 거라고! 어차피 딸은 출가외인이니까 지금부터 제대로 교육해. 재산 같은 건 꿈도 꾸지 말라고!”“알았어. 알았으니까 이제 그만해. 사람들이 자꾸 쳐다보잖아.”남자는 여자의 어깨를 끌어안으며 계속해서 달랬다.여자아이는 싸움이 일단락되자 빠르게 뒤로 돌았다. 그러고는 고사리 같은 손으로 남자아이의 뺨을 매만지며 울상이 된 얼굴로 물었다.“많이 아파?”임유진은 남자아이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고개를 도리도리 젓는 걸 보면 괜찮다고 한 것 같았다.임유진은 서로 많이 의지하고 있는 듯한 남매를 보며 괜스레 마음이 아팠다.방금 있었던 대화로 추측해보건대 표독스러운 여자는 새엄마인 듯했고 세 명의 아이 중 살이 통통한 아이만이 그녀의 친아들인 듯했다.그리고 야윈 남자아이와 당찬 여자아이의 엄마는 이미 세상에 없는 듯하고 말이다.남매끼리라도 사이가 좋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솔직히 임유진은 뺨을 맞고서도 아무런 반응이 없던 아이가 누나가 맞을 것 같으니 바로 몸을 던지려 하는 모습이 매우 놀라웠다.그저 뒷모습만 보였을 뿐이지만 아이는 아까 진심으로 여자를 때려눕히려 했다.‘하필이면 저런 여자가 새엄마라니... 안 됐네. 아직 어린 것 같은데.’사람들 많은 곳에서도 아무런 거리낌 없이 손을 올리는데 집에서라고 가만히 있을 리가 만무했다. 더했으면 더했지 절대 덜하지는 않을 거라고 임유진은 확신할 수 있었다.게다가 입고 있는 옷만 봐도 그랬다. 통통한 남자아이의 옷은 새것인 것에 반해 남매의 옷은 몇 년은 입은 것 같은 헌 옷이었으니까.왜소한 체구의 남자아이는 기껏해야 4, 5살쯤 돼 보이고 여자아이는 그보다 3살 정도 더 많아 보이는데 아직 어린 나이에 제대로 돌봐줄 보호자가 없다는 건 무척이나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임유진은 아이들을 보며 저도 모르게 어릴 적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당시 그녀
한편 멀지 않은 곳에서 네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경호원들은 처음 보는 광경에 입을 떡 벌린 채 서로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강선현이 돌아온 뒤로 강지혁은 확실히 전과 많이 달라져 있었다.놀이공원에 입장한 후, 임유진은 강지혁에게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현이가 하는 말을 전부 다 받아줄 필요는 없어.”“왜? 우리는 가족이잖아. 나는 현이 아빠고.”임유진은 예상외의 대답에 조금 놀란 듯 눈을 두어 번 깜빡였다. 강지혁의 눈빛이 다정하다 못해 그 이상의 애정까지 흘러넘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게다가 갓 재회했을 때와 달리 그는 마치 두 눈에 그녀밖에 안 보인다는 듯이, 꼭 그녀가 세상의 전부라는 듯한 시선을 보내고 있었다.“그렇지. 우리는 가족이지.”임유진은 간신히 정신을 차리며 미소를 지었다.놀이공원 안내인 역을 맡은 사람은 일전에 한 번 와본 적이 있는 강선율이었다. 율이는 현이가 좋아할 만한 것들을 이것저것 가리키며 조금 들뜬 얼굴로 얘기했다.율이는 아주 이상하게도 전에 왔을 때와는 차원이 다른 감정이 솟구치는 것이 느껴졌다.사람이 많아 이리저리 부대끼기도 하고 길게 늘어진 줄도 서야 하는데 율이는 그것들이 싫지 않았다.지겹도록 탄 놀이 기구도 현이와 함께 하니 새롭게 느껴지고 그때는 느끼지 못했던 즐겁다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네 사람은 이리저리 구경하다 현이가 제일 좋아하는 바이킹을 타기 위해 줄을 섰다.그런데 긴 줄을 서며 차례를 기다리고 있던 그때, 어디선가 날카로운 마찰음 소리가 들려왔다. 그리고 곧이어 경멸이 한가득 담긴 여자의 표독스러운 음성도 들려왔다.“이게 감히 우리 찬이를 할퀴어?!”임유진은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비싸 보이는 옷을 입고 유명한 브랜드의 가방을 손에 든 여자가 눈을 무섭게 부릅뜬 채 바로 앞에 있는 남자아이를 노려보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임유진의 시야에서는 아이의 뒷모습밖에 보이지 않았다.키는 율이와 언뜻 비슷해 보였지만 눈에 띄게 야위어 보였고 옷은 색이 다 바래 있었다.
지난 5년간, 그는 그저 살아지는 대로 살뿐 삶에 큰 의미를 느끼지 못했다.그래서 임유진이 다시 돌아와 줘서 참으로 다행이었다. 그녀가 있는 것만으로도 인생이 다시 원래 있어야 할 궤도 위에서 흘러가는 것 같았으니까.지금의 강지혁에게 유일한 불안요소가 있다면 그건 바로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를 아직 모른다는 것뿐이다.“혁아.”놀이공원 입구에 다다랐을 때 임유진은 다급하게 강지혁을 부르며 신신당부했다.“안으로 들어가서도 꼭 현이 손 잘 잡고 있어야 해, 알겠지? 아니면 눈 깜짝하는 사이 사라져버릴 거야. 율이는... 괜찮네.”임유진은 율이의 모습을 확인하고는 새삼 신기한 듯 속으로 감탄했다. 그도 그럴 것이 또래 아이들과 달리 너무나도 순하고 심지어는 듬직해 보이기까지 했으니까.반대로 현이는 벌써 강지혁의 손을 잡은 채 이곳저곳을 끌고 다니며 쉴 틈 없이 재잘거렸다.“걱정하지 마. 설사 놓쳤다고 해도 금방 다시 우리 곁으로 다시 돌아올 테니까.”강지혁의 담담한 말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다 혹시 하는 얼굴로 물었다.“설마 지금 우리 주위에 경호원분들이 있어?”“응. 적당한 인원을 배치해뒀어. 그리고 놀이공원 CCTV 쪽에도 사람을 보냈고.”임유진은 그가 말한 적당한 인원이라는 게 정확히 몇 명인지 굳이 물어보지는 않았다. 강지혁이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과 그녀가 생각하는 적당한 인원은 분명히 다를 테니까.강지혁은 임유진의 표정을 보더니 눈썹을 살짝 위로 올리며 물었다.“왜? 누가 따라다니는 거 싫어?”“그렇지는 않아.”경호원들의 삼엄한 경호라면 임신했을 당시 이미 톡톡히 맛본 적이 있기에 새삼 불편하거나 하지는 않았다.“그냥 놀이공원에서 노는 것뿐인데 이럴 필요까지 있나 싶어서.”임유진은 경호원까지 따라붙는 게 조금 유난이라고 생각하는 듯했지만 강지혁은 전혀 아니었다. 그는 그녀와 아이들을 한번 잃어봤기에 아주 조금도 그들을 다시 잃게 될 빌미를 만들고 싶지 않았다.“나는 그냥 너랑 아이들을 제대로 보호해주고 싶은 것뿐이야
“우리 현이는 어쩜 기억력도 좋아... 하하.”임유진은 어색하게 웃더니 곧바로 율이를 바라보며 화제를 돌려버렸다.“그런데 율아, 정말 아빠랑 놀이공원에 간 적 없어?”“네, 아빠랑 같이 간 적은 없어요.”강선율의 대답에 임유진은 고개를 돌려 강지혁을 바라보았다.“율이랑 같이 안 가줬어?”“도우미들이 함께 가줬어.”“같이 가주지. 그러다 율이 잃어버리면 어쩌려고. 너는 걱정도 안 됐어?”임유진은 자기가 다 서운한 듯 강지혁에게 바짝 가까이 다가가며 추궁 아닌 추궁을 했다.놀이공원 자체가 즐거운 곳인 건 맞지만 그래도 아이들은 부모와 함께 가는 걸 더 좋아할 것이 분명했으니까.“안 잃어버려.”강지혁이 단호하게 대답했다.“어떻게 그렇게 확신해?”“그야...”임유진은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답변에 금세 수긍하고 말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애초에 놀이공원 전체를 하루 대관한 거라 사람이라고는 아이 한 명과 직원들, 그리고 율이 곁을 지켜주는 도우미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그리고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지혁은 10명의 경호원을 아들과 조금 멀리 떨어진 곳에 배치하기도 했다.이 정도의 정성이라면 무슨 일이 생겨날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울 수밖에 없다.하지만 안전은 확보가 됐지만 그런 식의 놀이공원이라면 줄을 설 때의 미묘한 기대감도 설렘으로 가득한 사람들의 북적거림도 느낄 수 없게 된다.“율아, 놀이공원 갔을 때 어땠어? 좋았어?”임유진이 물었다.그러자 아니나 다를까 율이는 고개를 저었다.“재미없었어요.”재미있어 보이던 놀이 기구도 두어 번 타보니 금세 흥미가 떨어졌다.“놀이공원이 얼마나 재미있는데!”강선현이 눈을 동그랗게 뜨며 외쳤다.“나랑 엄마는 엄청 자주 갔어. 바이킹도 타고 회전목마도 타고 대관람차도 타고. 그런데 매번 사람이 너무 많아서 바이킹 같은 건 두 번 밖에 못 탔어...”현이는 말을 하다 당시 기억이 떠올랐는지 조금 아쉬운 듯한 눈빛을 보냈다.‘그게 재밌다고?’강선율은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고개를
고이준은 이도 저도 못 하게 된 상황에 머리가 다 지끈해졌다.“이만 나가봐.”“네, 알겠습니다...”고이준이 나간 후 강지혁은 의자에 힘없이 기대더니 이내 눈을 감고 조용히 중얼거렸다.“살아있었어... 죽은 게 아니었어...”그는 말을 마치고는 갑자기 미친 사람처럼 웃기 시작했다. 하지만 커지는 웃음소리와 반대로 그의 눈가에는 점점 눈물이 맺혀 올랐다. 그리고 그 눈물은 매끈한 볼을 타고 힘없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는 임유진과의 첫 만남은 어땠는지, 그녀와 어떤 사랑을 했는지, 또 그녀와 어떻게 헤어졌다가 어떻게 다시 결혼까지 하게 됐는지까지 전부 다 떠올랐다.그리고 그녀를 지독하게 사랑한 덕에 배웠던 후회감과 두려움, 그리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던 무력감까지도 다시 한번 느낄 수 있게 되었다.임유진이 모든 걸 알게 된 그 날, 강지혁도 그녀 못지않게 심장이 철렁하고 고통으로 사뭇 쳤다. 자신만 입을 닫고 진실을 감춰버리면 그녀는 영원히 모를 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오만함을 고배로 돌려받는 느낌이었다.세상에는 영원히 발각되지 않는 비밀이란 있을 수 없고 그가 통제할 수 없는 변수 또한 얼마든지 있다는 걸 그때의 그는 몰랐다.기억을 되찾은 강지혁은 지금 겪고 있는 모든 게 꼭 꿈만 같았다. 그녀가 다시 돌아와 사랑을 속삭이는 게 꼭 언젠가는 다시 사라질 꿈처럼 느껴졌다.그래서일까, 그날 밤 이후부터 그는 임유진이 깊은 수면에 든 후면 어김없이 조용히 눈을 뜨고 자는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며 아주 조심스럽게 그녀의 얼굴을 만지곤 했다.마치 이렇게 해야만 그녀가 곁에 있다는 것을 실감할 수 있고 그녀가 자신을 거부하는 게 아니라는 걸 확인할 수 있는 것처럼.“날 싫어하지 마. 내 곁을 떠나지 마. 제발...”힘없이 가라앉은 목소리는 매일 밤 그들의 침실에 아주 조용히 울려 퍼졌다....주말.임유진과 강지혁은 강선율과 강선현을 데리고 놀이공원으로 향했다.놀이공원에 가게 된 계기는 며칠 전의 어느 날 현이가
그도 그럴 게 강지혁의 부름으로 사무실에 왔다가 벌써 10분째 아무런 지시도 없이 그의 눈빛만 받고 있었기 때문이다.‘혹시 사모님과 다투신 건가? 아니면 또 두통 때문에...?’강지혁은 계속해서 눈치만 보고 있는 고이준을 빤히 바라보다 드디어 천천히 입을 열었다.“임유진이 내 곁을 떠난 이유가 정확히 뭔지, 정말 몰라?”고이준은 갑작스러운 질문에 심장이 철렁했다.“갑자기 그건 왜요...?”“진애령 사건 때문에 도저히 날 용서할 수가 없어 결국에는 내 곁을 떠난 거라고, 너나 한 집사나 두 사람 다 나한테 그렇게 얘기했어.”“네, 그랬죠. 하지만... 어디까지나 저희 추측일 뿐입니다. 사모님의 마음이 어땠는지는 사모님밖에 모르시니까요...”고이준은 당황한 얼굴로 계속해서 말을 이어갔다.“그런데 지금에 와서 다시 생각해보면 어쩌면 저희 추측이 틀렸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요. 5년 만에 돌아오시고 나서 진애령 씨 사건에 관해 얘기했을 때 사모님은 회장님을 다 용서했다고 하셨거든요.”“용서?”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조금만 살이 맞닿아도 얼굴이 하얗게 질리고 토까지 했는데 그게 과연 용서한 사람의 행동일까?용서했다고 한 말도 어쩌면 기억을 잃은 것 때문에 자신이 용서했다고 착각하는 것일 수도 있다.“해외에 있는 요셉 선생한테 연락해서 들어오라고 해. 유진이한테는 아무 얘기도 하지 말고.”고이준은 강지혁의 말에 깜짝 놀랐다.요셉은 유명한 신경외과 전문의로 특히 기억 관련해서는 영향력 있는 논문을 다수 발표한 바 있다.‘회장님 설마...’“혹시 기억을 완전히 찾으실 생각이십니까?”“그래.”강지혁이 담담하게 대꾸했다.사실 그날 밤의 극심한 두통으로 그의 기억은 아주 세세한 부분을 제외하고는 거의 다 돌아온 상태다.하지만 그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건 바로 그 세세한 기억이었다. 거기에 그녀가 떠난 진짜 이유가 들어있었으니까.“하지만 박 선생도 전에 말했다시피 갑자기 모든 기억을 다 찾으려고 하면 회장님의 멘탈이 감당해내지 못할 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