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강지혁은 임유진의 팔을 잡더니 강한 힘으로 끌어당겨 자신의 품에 넣었다.임유진은 무의식적으로 그의 품에서 벗어나려고 했지만, 그의 두 손은 더욱 힘을 주어 더 꽉 껴안았다.“잘 자라는 인사가 너무 성의 없잖아!”강지혁은 임유진의 귓가에 대고 나지막이 말했다.임유진은 몸이 약간 떨렸다. 남자의 호흡 소리가 자신의 귓가에 떨어지는 것이 느껴졌고, 마치 온몸이 그의 숨결에 휩싸인 것 같았다.“이거... 놔.”임유진은 말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첫 출근이 어땠는지 좀 말해줄래?”“그냥 음식 배달이지 뭐. 손님이 주문하면 갖다주고.”임유진은 심장박동이 점점 빨라지고, 혈액의 흐름도 훨씬 빨라지는 것 같았다.“그래? 그럼, 밥은 잘 챙겨 먹었어?”그의 목소리는 또다시 임유진의 귓전에 울렸다.“응, 사장님이랑 같이 먹었어. 하루 두 끼는 챙겨주시거든.”얼굴이 너무 뜨거워 타오를 것 같은 이상한 느낌에 임유진은 크게 당황했다. 강지혁이 빨리 그녀를 놓아주기를 원하고 있었다.하지만 강지혁은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얼굴을 그녀 앞에 갖다 댔다.“긴장하고 있어?”강지혁이 불쑥 물었다.“아... 아니.”임유진은 단박에 부인했다.“하지만 누나 얼굴이 너무 빨개.”그는 미소를 짓더니 허리를 굽히고 임유진의 볼에 가볍게 키스했다.“나 때문에 얼굴이 빨개진 거야?”“아.... 아니라고.”그녀의 몸이 뻣뻣해지더니 말까지 더듬었다.“거짓말.”임시혁은 가볍게 꾸짖었지만, 사랑스러움이 묻어 있었다.임유진은 입술을 깨물고 그를 밀어내려고 했지만, 그의 가슴에 닿은 손은 힘을 쓸 수 없었다.두려워서일까? 강지혁을 밀어낸 후과를 과연 그녀는 감당할 수 있을까? 아니면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일까?순간, 임유진도 자기 마음을 잘 알지 못했고 머릿속이 복잡했다.한참 후에야 강지혁은 그녀를 풀어주었고, 그녀의 입술을 가볍게 만지며 웃었다.“잘자, 누나...”임유진은 황급히 도망갔다.자신의 방으로 돌아온 그녀는 자신의 볼을
새벽, 임유진이 침대에서 깊이 잠들었을 때, 두 방 사이의 문이 천천히 열리더니, 한 줄기의 긴 그림자가 들어섰다.평소 차갑던 눈동자에는 침대 위의 여자를 바라보며 애틋함이 가득했다.“잘자, 누나.”그의 목소리에는 사랑과 갈증이 가득했다....임유진이 다음날 출근했을 때, 점심에 가게에는 무려 30인분이나 되는 단체 주문이 들어왔다.평소 임유진은 한 번에 7~8인분의 음식을 배달하는데, 단번에 30인분이라니. 거의 식당 점심 풀타임에 달하는 양에 가까웠다.탁유미는 서둘러 배달 음식을 준비한 다음 이유진을 보고 말했다.“이따가 수고해 줘요.”“그럼 다른 주문들은 어떡하죠?”임유진이 이걸 배달하면, 다른 작은 주문들은 배달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괜찮아요. 이따가 저희 어머니한테 윤이를 재우고 카운터를 봐달라고 하고, 내가 직접 배달하면 돼요. 어차피 차가 한 대 더 있어요.”탁유미가 말했다. 그녀에게 이 주문은 오늘의 큰 매출이었다. 완성하면 십여만 원을 벌 수 있으니, 그녀는 아주 기뻤다.임유진은 배달 주소를 받은 후 침묵했다... 바로 GH 그룹이었다.하지만 주문서에 적힌 이름과 휴대폰은 강지혁이 아닌 모르는 사람이었다.그녀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도 우연의 일치일 것이다.탁유미가 포장을 마치고, 임유진은 음식을 싣고 GH 그룹으로 향했다.30인분을 배달하는 것은 절대 가볍지 않았다. 한꺼번에 30인분을 들 수 없었기 때문에 차를 밑에 세운 다음 몇 번에 나눠서 올릴 생각이었다.하지만 그녀가 차를 멈추었을 때, 경비원이 다가와 물었다.“혹시 임유진 씨인가요?”“네, 맞는데요.”임유진은 경비원이 바로 자신의 이름을 부를 줄 몰라 멍했다.“이 배달 음식을 카트에 올려놓으면 편하실 거예요.”경비원은 말하면서 또 다른 경비원 두 명을 불렀다.두 경비원은 이동식 스테인리스 스틸 카트를 밀고 임유진의 옆에 다가와 자연스럽게 30인분의 음식을 카트에 옮겼다.임유진은 여전히 멍한 표정이었다. 경비원들은 분명 그녀가 배달하
한편, 임유진은 카트를 밀고 빌딩 안으로 들어섰고, 프런트 직원은 이름을 묻더니 방문 등록 절차까지 생략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러주었다.이 모든 상황에 임유진은 점점 자신의 추측을 확신하게 되었다. 배달 주소에 적힌 주소에 도착하자 늘씬하고 커리어룩을 입은 여성이 다가왔다.“임유진 씨죠? 배달은 제가 시켰어요. 여기 두고 가시면 돼요. 이건 대표님 사무실로 갖다주세요.”임유진은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그녀의 추측이 거의 확실시되는 순간이었다.대표 사무실... 강지혁은 GH 그룹의 대표이다. 그러니 이 음식을 강지혁의 사무실로 갖다주라는 것이다.임유진은 배달 음식 두 봉지를 들고 강지혁의 사무실로 향했다. 어두운 통나무 문 앞에 서서 숨을 크게 들이마신 후에야 노크했다.“들어와요.”안에서 소리가 들려왔고, 임유진은 문을 열고 들어갔다. 강지혁은 사무실 책상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서류를 보고 있었다.“주문한 배달 음식 찻상에 올려놓겠습니다.”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리고 말했다.강지혁은 고개를 들어 그녀가 올려놓은 찻상의 음식을 보았다.“벌써 가려고?”그는 말하면서 몸을 일으켜 책상을 돌아 그녀 앞으로 다가갔다.“다시 가게 가서 배달해야 해.”“점심은 먹었어?”강지혁의 갑작스러운 물음에 임유진은 눈을 깜박이며 잠시 반응하지 못했다.“안 먹었나 보네. 나랑 같이 먹자. 누나가 일하는 집 식당 맛이 어떤지 궁금했어.”강지혁은 말하면서 그녀의 손을 끌어당기고, 두 손으로 그녀의 어깨를 누르며 소파에 앉혔다.그녀는 무의식적으로 일어서려고 했지만, 어깨에 눌린 힘 때문에 전혀 일어날 수 없었다.“너...”그녀는 고개를 들고 강지혁을 쳐다보았다.“왜? 나랑 밥 먹기 싫어?”강지혁은 활짝 웃으며 물었다.“나 진짜 가봐야 해.”“그래?”그의 눈동자는 점점 어두워졌다.“그렇다면, 배달 음식 전부 환불할 거야.”임유진은 순간 눈앞에 있는 사람은 강지혁이라는 것이 생각났다.강지혁과 같은 사람이 어떻게 다른 사람의 거절을 쉽게 받아들일
임유진은 도시락을 받아 들고 고개를 숙이고 허겁지겁 먹었다. 빨리 다 먹고 이곳을 벗어나고 싶은 생각뿐이었다.“빨리 가고 싶어서 허겁지겁 먹는 거야?”강지혁의 목소리는 사무실에 은은하게 울려 퍼졌다.“콜록...”임유진은 사레에 걸려 하마터면 입에 있는 음식을 내뿜을 뻔했다. 손을 가리고 계속 기침을 했고 급기야 얼굴이 빨개졌다.겨우 기침을 그쳤지만, 입을 가리고 있던 손에 사레가 들린 쌀알이 묻어 있었기 때문에, 그녀는 휴지로 손바닥을 닦으려고 했다.다만, 그녀가 휴지를 집기도 전에, 강지혁은 그녀의 손을 끌어당겼다.임유진은 손목을 비틀었지만 빠져나올 수 없었다.“더러워. 내가 닦을게.”“더럽다고?”강지혁은 가볍게 웃었다.“하나도 안 더러운데?”강지혁은 말하면서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그녀의 손바닥에 대고는 쌀알들을 하나하나 핥았다.임유진은 순간 온몸이 굳었다.“됐네.”그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서운함까지 묻어났다.임유진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손안의 쌀알이 이미 강지혁에 의해 핥아 없어진 것을 발견했다.강지혁은 여전히 그녀의 손을 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아름다운 눈동자로 그윽하게 그녀를 바라보았다. “누나 손바닥에 있는 밥 너무 맛있다. 좀 더 많았으면 좋았을 텐데.”강지혁의 말에는 마치 무언가를 암시하고 있는 것 같았고, 그의 눈빛에는 욕망이 가득했다.임유진은 눈을 늘어뜨리고 그의 시선을 피했다. 강지혁의 눈은 마력이 있는 것처럼 끊임없이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다행히 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계속 잡고 있지 않았다. 강지혁의 손가락에 힘이 풀리는 순간, 임유진의 손도 마침내 자유를 얻었다.임유진은 식사를 이어갔다.잠시 후, 그녀의 귓가에는 강지혁의 목소리가 들렸다.“누나랑 같이 밥 먹고 있으니까, 꼭 예전으로 돌아간 것 같네.”임유진은 순간 움찔했다.옛날, 꿈만 같던 그 ‘옛날’, 어쩌면 다시는 돌아가지 못할 것이다. ‘강지혁’에 관한 모든 것도 그녀의 마음속 깊은 곳에 묻혀 있었다....임유진이 식당으로
그 모습을 본 탁유미가 물었다."왜 이렇게 적게 먹어요? 음식이 입에 안 맞아요?"소규모 가게에서는 손님이 없는 시간을 이용해 주방장이 대충 요리를 만들어서 직원들끼리 같이 식사를 한다."아니요. 오늘 아침을 좀 많이 먹었나 봐요."그러다 임유진은 옆에 앉아있는 윤이를 보더니 말했다."그럼 맛있게 식사하세요. 저는 윤이 과일 먹이고 있을게요."그렇게 임유진은 사과 한 알을 가져와 껍질을 벗기고 먹기 좋게 썬 후 윤이 입에 넣어주었다. 윤이는 음식을 받아먹는 아기 새처럼 임유진이 주는 족족 작은 입을 오물거리며 맛있게 먹었다.과일을 다 먹은 윤이는 졸음이 밀려오는지 하품을 하고는 임유진을 향해 양팔을 벌리며 안아달라는 자세를 취했다. 그에 임유진은 너무 자연스럽게 아이를 품에 안고 재우기 시작했다.윤이는 임유진이 흥얼거리는 자장가 소리가 들릴 리가 없는데도 자그마한 손으로 그녀의 입술을 천천히 어루만졌다. 마치 그녀의 목소리를 들으려고 노력하는 것처럼.그렇게 한참이 지나고 윤이는 임유진의 품에 안겨 잠이 들었다. 곤히 잠든 아이를 보며 임유진은 이처럼 사랑스러운 아이가 아무런 소리도 안 들리는 세상에 갇혀버렸다는 사실에 마음이 아파져 왔다.그녀는 윤이가 인공와우를 착용한 후 더는 그 어떤 불편함 없이 세상을 살아갔으면 좋겠다고 바랐다."이제 방으로 데려가서 재울게요."탁유미의 엄마가 임유진에게로 다가오더니 조심스럽게 윤이를 안아 들었다. 가게의 뒤편에는 작은 집이 있었는데 거기에는 탁유미와 그녀의 엄마 그리고 윤이까지 이렇게 세 명이 모여 살았다.탁유미는 임유진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유진 씨는 꼭 좋은 엄마가 될 거예요."좋은 엄마라... 임유진은 씁쓸한 마음을 뒤로하고 탁유미를 향해 그저 옅게 웃어 보였다.임유진에게 엄마가 될 기회 같은 건 이제 없다. 그녀가 교도소에 있을 때 다른 죄수에 의해 자궁 쪽을 가격당하게 된 사건이 있었는데, 당시 의사의 말에 의하면 그녀는 평생 임신을 못 하게 될 것이라고 했다. 가령 임신이 됐다고
"다들 유진 씨 엄청 보고 싶어 했는데, 이제는 자주 얼굴 볼 수 있겠네요?"정한나는 임유진의 팔을 슬쩍 당기며 말을 이었다."여기까지 왔는데 얼굴이라도 비추고 가지 그래요?"정한나의 속이 훤히 보이는 말에 임유진은 잠시 고민하다 어차피 이대로 가도 웃음거리가 될 것이 분명했기에 그럴 바에는 정면돌파 하기로 했다."그럼 그럴까요?"임유진의 당당한 태도에 정한나는 자신이 예상했던 반응이 아니었던지 살짝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그녀를 사무실로 안내했다.사무실로 임유진을 데리고 들어간 정한나는 손뼉을 치며 사람들의 주의를 끌었다."여러분, 유진 씨가 저희 보러 왔어요."그 말에 사무실에 있던 사람들 시선이 모두 임유진을 향했다. 임유진이 주위를 둘러보니 옛 동료들도 많았지만, 처음 보는 사람들도 많이 있었다."선배님, 이 분도 전에 여기서 근무하셨어요? 지금은 어느 로펌에서 근무하세요?"젊은 신임 변호사가 눈을 반짝이며 물었고 악의 없는 이 질문이야말로 정한나가 원하는 거였다. 정한나는 안타까운 얼굴을 하며 그녀에 대해 구구절절 얘기하기 시작했다."유진 씨는 당시 우리 로펌 신입 중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였어요. 그때는 유진 씨가 얼마 안 가 분명히 에이스 변호사로 활약하며 곧 대형 로펌으로 이직할 거라고 다들 믿어 의심치 않았었죠.""그럼 지금은 어떤 로펌을 택하신 거예요?""그게..."정한나는 그 뒤론 입을 꾹 다물고 안타까운 표정으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 마치 네 입으로 너의 처지를 얘기해 보라는 듯했다. 차라리 정한나가 대놓고 조롱이라도 했으면 임유진은 그녀를 상대하기 더 쉬웠을 것이다. 하지만..."저 지금 윤이 식당에서 배달 일 하고 있어요. 저희 가게 맛있으니까 많이 찾아주세요."임유진은 전혀 주눅들지 않은 채 당당한 얼굴을 하고 여유롭게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자신이 원했던 임유진의 초라한 모습이 보이지 않자 정한나는 속으로 이를 갈았다."그러고 보니 유진 씨, 전에 한 번 우연히 마주쳤을 때 옆에 있던 남자가 돈이
정한나는 비단 신입들뿐만 아니라 사무실에 있는 모든 사람이 들을 수 있게 목소리를 높여 그녀가 음주운전으로 사람을 치어 감옥에 가게 됐다는 사실을 얘기했다.정한나는 임유진이라는 그림자에 늘 가려져 있었던 자신의 설움을 다 토해내려는 사람처럼 신이 나서 얘기를 했다. 사무실을 나와서도 들리는 목소리에 임유진은 잘나갈 때는 보이지 않던 주위 사람들의 진심이 자신이 밑바닥으로 떨어졌을 때야 비로소 보이게 됐다는 사실에 마음이 씁쓸해졌다.임유진이 한참 엘리베이터를 기다리고 있을 때, 그녀의 뒤편에서 다급한 발걸음 소리가 들려오더니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유진 씨, 잠깐만요!"임유진이 고개를 돌려보니 한 남성이 그녀를 향해 달려왔다. 그 남성은 그녀의 앞에 도착한 후 복잡미묘한 표정을 지었다.30대쯤 되어 보이는 그 남성은 깔끔한 정장 차림에 도시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엘리트 같은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무슨 일이세요?"남자의 이름은 하진우로 임유진의 옛 동료이자 그녀의 파트너 변호사이기도 했었다. 당시 사무실에는 하진우가 임유진을 좋아하고 있다는 소문까지 돌았었다. 하지만 임유진은 그때 소민준과 연인사이었고 진짜인지도 모르는 소문 따위는 그녀의 관심사 밖이었다.하진우는 전과는 전혀 다른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임유진을 보며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하진우의 기억 속 임유진은 늘 당당하고 멋있었고 너무나도 눈이 부셨는데 지금의 그녀는 어딘가 억압받는 사람처럼 얼굴에 생기라고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혹시... 힘든 일 있으면 언제든지 찾아와요. 내가 도울 수 있는 부분이라면 꼭 도울게요."하진우는 진지한 얼굴로 그녀를 향해 말했지만, 임유진은 그 모습이 그저 우습게만 느껴졌다. 당시 그녀의 사건을 선뜻 받겠다고 나선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었다. 한지영이 임유진의 옛 동료들에게 도움을 청하러 몇 번이나 사무실로 갔었지만, 번번이 허탕만 쳤다."내가 지금은 하진우 씨 도움이 필요 없어서요."임유진의 말에 하진우가 다시 다급한 목소리로 말했다."배달 일
매번 회식이 끝날 때쯤이면 임유진은 한 번도 빼먹지 않고 동료들을 향해 운전하면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한 후 직접 대리기사님을 불러주곤 했었다. 그런 그녀가 음주운전에 사람을 죽였다니.하진우는 임유진만큼은 절대 그런 짓을 했을 리가 없다고 굳게 믿었었다.하지만 그의 확고한 믿음도 강지혁이라는 두려움을 이기진 못했고 구린 냄새를 풀풀 풍기는 사건에 자신마저 휘말리게 될까 봐 끝내는 몸을 사렸다. 그러고는 S 시에서 강지혁을 건드릴 사람이 누가 있겠냐고, 임유진이 잘 못 걸린 것뿐이라고 자기합리화를 했다....요 며칠 동안 점심시간만 되면 강지혁네 회사의 비서는 윤이 식당에서 음식을 시켰고 그걸 임유진이 배달을 했다. 그러고는 매번 강지혁과 함께 점심을 먹었다.임유진은 이미 몇 번이나 강지혁한테 이러지 말아 달라고 눈치를 줬지만, 강지혁은 그럴 때면 그녀를 향해 예쁜 얼굴을 들이밀고는 물었다."누나는 나와 같이 점심을 먹는 게 싫어? 난 우리가 같이 식사할 수 있어서 너무 좋은데.""..."사람을 홀리는 듯한 얼굴로 저런 말을 내뱉는 건 반칙이었다.임유진은 요즘 강지혁을 보면 자신의 의지가 자신의 것이 아닌 것만 같은 느낌이 들 때가 많았다. 이런 마음을 메시지로 한지영한테 토로했더니 한지영이 곰곰이 생각하다 이내 결론을 내렸다.「그야 당연히 네가 강지혁 씨의 플러팅에 넘어가서 그런 거겠지.」「플러팅이라고?」임유진이 얼굴을 찌푸리며 한지영을 향해 되물었다.「그게 무슨 말이야?」「지금 연예계를 봐봐. 솔직히 강지혁 씨처럼 잘생긴 남자가 몇 명이나 될 것 같아? 그런데 너는 매일매일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는 거잖아. 당연히 홀릴 수밖에 없지.」임유진이 가만히 생각해보더니 틀린 말이 하나도 없었다.「그보다 너 대체 강지혁 씨랑 지금 어떤 관계인 건데? 난 왜 자꾸 강지혁 씨가 너한테 진심인 것처럼 느껴지지? 단순히 너랑 누나 동생 놀이를 하려는 거면 네 말 한마디에 그 난리를 치며 나를 찾겠다고 나서지는 않았을 거잖아. 백연신 씨하고도 부딪
강지혁은 수저를 들고 그녀가 해준 음식을 하나둘 입에 넣었다.분명히 흔히 볼 수 있는 가정 요리고 손에 들고 있는 것도 포크나 나이프가 아닌 그저 숟가락과 젓가락일 뿐인데 상대가 강지혁이라 그런지 꼭 고급스러운 레스토랑에서 식사하고 있는 것 같았다.임유진은 원래 강지혁이 밥을 다 먹은 뒤에 오늘 있었던 일을 얘기하려고 했다. 하지만 강지혁이 밥을 먹으며 먼저 선수를 쳐버렸다.“오늘 하마터면 떨어지는 화분에 다칠 뻔했다는 얘기 들었어. 무사해서 다행이야. 내일부터는 경호원을 두 명 더 붙여줄게.”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두어 번 깜빡이며 어리둥절해 하다 이내 남편이 강지혁이라는 것을 깨닫고 납득했다는 표정을 지었다.아마 일이 터지고 5분도 안 돼 바로 강지혁에게 보고가 들어갔을 테니까.“응, 알겠어.”임유진은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누가 화분을 떨어트린 건지 알아봐 달라고 했어. 아직 따로 연락이 오지는 않았지만.”“청소부가 한 짓이야.”“청소부?”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벌써 조사를 마쳤어?”“당연한 거 아니야? 네 일인데.”만약 임유진의 몸에 생채기라도 났으면 강지혁은 아마 이성을 잃고 건물 전체를 폭파하고 관계자들까지 다 처리해버렸을 것이다.강지혁은 갑자기 젓가락을 내려놓더니 임유진의 양손을 덥석 잡았다.그녀의 손가락은 여전히 삐뚤빼뚤했다.임유진의 손을 이렇게 만든 사람은 진세령이고 소민준은 당시 진세령의 곁에서 가만히 구경만 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다 문득 1시간 전에 봤던 청소부의 피범벅이 된 두 손을 떠올렸다.그는 다른 사람의 손은 피가 나든 잔인하게 잘리든 아주 조금의 연민도 들지 않았다. 하지만 임유진의 손은 볼 때마다 가슴이 아프고 또 울컥했다.“왜? 왜 그렇게 봐?”임유진은 강지혁이 손가락을 뚫어지게 보는 게 불편한지 손을 뒤로 빼며 거두어들이려고 했다.그녀 역시 다를 것 없는 여자라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는 자신의 좋은 것만 보여주고 싶었다.“내 손 안 예뻐... 보지 마.”임유진의 손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