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지혁은 이한을 힐끗 본 후에 이한은 주위에 어떤 양집의 규수가 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소리로,“어머나, 흰 눈이 저렇게 예쁘게 뒤집다니!” 이렇게 말했다.“…….”이한은 순간 토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강지혁은 그저 눈만 뒤집었을 뿐인데, 저 상사병을 앓는 여자들이 감탄할 만한 가치가 있긴 한 걸까?’강지혁이 장갑을 벗었을 때, 이한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문득 강지혁의 손에서 장갑을 움켜쥐었다. “어? 이 장갑은 손으로 짠 것 같은데, 뜨개질 솜씨가 별로야.”이한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이 장갑을 평가했다.“그리고 이 털실은 아무리 봐도 낡은 털실 같은데, 이 장갑은 어느 매장에서 속아서 산 거 아니야? 이런 장갑을 너한테 팔다니?”“누가 샀다고 했어.” 강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이한은 턱이 갑자기 땅에 떨어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산 것이 아니라면 설마.’“설마 다른 사람이 짜서 너에게 선물로 준 건 아니겠지?”강지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표정은 부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이한은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정말 다른 사람이 준 거야? 강지혁의 성격으로는 이런 것을 아예 안 차고 다니잖아.’‘하지만 오늘 착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이런 걸 착용하다니.’‘도대체 누가 짠 거야?! 어떤 사람이 이렇게 뜨개질을…… 어, 어떻게 이렇게 별로인 목도리와 장갑을 낄 수 있는 거지?’이한의 머릿속에는 소문으로만 듣던 섣달그믐날 저녁에, 친구가 김문철을 버리고 S시 근처의 작은 마을로 달려가 구해낸 그 여인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갔다.심지어 그 여자를 위해 현지 경찰서에까지 대동했었다.‘설마 그 여자인가?!’한창 생각하고 있을 때 강지혁은 이미 이한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돌려줘.”“아!”이한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장갑을 강지혁에게 돌려주려 할 때 옆에서 소리 하나가 울렸다.“이 장갑은?” 이한은 먼저 제대로 말했다.“이것은 지혁이 오늘 낀 장갑인데, 아니면.”다만 그의 말이 아직
이한는 농담을 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그는 친구가 여자 친구를 바꾸는 데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였다.만약 시간이 지나도 여자 친구를 바꾸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할 것만 같았다.다만 지금 사귀는 이 어린 아이돌은 헤어진다면 현수 곁에서 가장 짧은 시간을 보낸 여자 친구가 될 것으로 보였다.“응, 마음에 들었어.” 강현수는 장난처럼 말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강지혁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이한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강지혁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고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아이고, 지혁, 너는 왜 그래? 표정이 이렇게 심각해졌어?”이한은 이유도 모른 채 그에게 물었다. 다만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 것을 느꼈다.강지혁은 이한을 무시했고 검은 눈동자는 강현수를 쳐다봤다. 그러다 갑자기 입꼬리를 가볍게 치켜세웠다.“그 배우가, 설마 네 여자 친구의 누나는 아니겠지?”“그래, 공교롭게도 맞아.” 강현수이 말했다.강지혁의 입꼬리는 더욱 심하게 올라갔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그래, 정말 공교롭네.”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몸을 돌려 회의장 출구 방향으로 걸어갔다.이한은 알 수 없는 얼굴로 곁에 서 있는 강현수를 보았다.“지혁이는 갔어?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강현수는 강지혁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의 안색도 똑같이 굳어 있는 거 같았다.“너희들 방금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했지?”이한이 물었다. 방금 이 두 친구가 한 말을 분명히 한마디 한마디 다 알아들었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들의 반응을 이해 못 할 수 있을까?“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일이 좀 있었어. 정말 우연한 일치야.” 강현수는 눈을 가리고 이렇게 말했다.‘그도 예전에 이한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지혁이 한 여자를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다고. 다만 지혁이 신경을 쓰는 그 여자가 임무진이라고는 생각 못했다.’임유진은 이때 배달 음식을 먹으면서 휴대전화를 켜 마음대로 프로그램을 뒤져
바로 이때 그 사람이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그의 실루엣도 카메라 앵글에서 점점 더 선명해졌다. 임유진은 화면 속의 그 사람을 보자 미처 삼키지 못했던 밥이 하마터면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강, 강지혁이다! 카메라 속의 강지혁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꼿꼿한 몸매와 단정한 헤어 스타일은 마치 고귀한 도련님처럼 보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그가 목에 두른 목도리와 손에 착용한 장갑이었다. 그것은 전혀 양복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인플루언서의 생방송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미 미친 듯이 열광하며 스크린을 댓글로 도배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누구야?][연예인은 아닌 것 같은데, 멋있다. 세상에, 나는 그의 양복바지 핏에 취할 것 같아.][세상에, 이 사람이 정말 연예인이 아니라고? 만약 그가 데뷔한다면 난 반드시 그의 열렬한 팬이 될 거야!] [빨리 가서 인터뷰 좀 해! 답답해 죽겠다고!]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루언서는 휴대폰 카메라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 한번 인터뷰하러 가볼까요? 저분께서 저의 인터뷰에 응해줬으면 좋겠네요!” 그 사람을 향해 몇 걸음 나아갔을 뿐인데 핸드폰을 들고 촬영을 하던 촬영사는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러자 인플루언서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가요, 설마 지쳐서 걷지 못하는 건 아니죠?” “강, 강지혁입니다. 저 사람은 강지혁이라고요.”핸드폰에서는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분명 핸드폰을 들고 촬영하던 사람이 낸 소리였다. “뭐라고?” 인플루언서는 깜짝 놀라 전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즉시 강지혁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녹화 중지하고 영상 당장 삭제해!” 그러나 상황은 이미 늦어버렸다. 촬영사는 이미 강지혁을 찍어버렸고 구경하던 시청자들은 발칵 뒤집혀 버렸다. 강지혁이 누구인지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 평소 그들이 먹고 입고 자는 것 모두 GH 그룹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강지혁이 떠난 것이 다른 사람과 말다툼하고 화가 나서 그런거다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고 오늘 현장에 적지 않은 유명 인사들이 그를 둘러싸 너무 귀찮아서 미리 자리를 떠났다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난무했다. 임유진은 가십거리를 보는 것처럼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녀도 도대체 강지혁이 왜 떠났는지에 대해 추측하고 있었다. 이때 임유진이 갑자기 들리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뜻밖에 문 앞에 서 있는 강지혁의 모습을 봤다. 그 순간 임유진은 사레가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콜록, 콜록.” 임유진은 참지 못하고 기침을 했고 순간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한참 동안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하던 사람이 지금 그녀의 앞에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강지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손으로 임유진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웬일이야? 사레를 이렇게 심하게 다 하고 뭐 감기라도 걸렸어?” 임유진은 콜록대면서 고개를 저었는데 그녀는 감기에 걸린 게 아니라 강지혁이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것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임유진은 가까스로 숨을 돌렸고 그제야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너, 너 왜 왔어?” “왜? 나 오면 안 돼?” 강지혁이 되물었다. 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렸다. 강지혁이 여기를 오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강지혁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좁은 방에 그가 들어오자 방은 더욱 좁아 보였다. 강지혁의 시선은 눈에 띄게 빨갛게 부어오른 왼손으로 향했다. “이 손은 왜 다친 거야? 엑스트라 할 때 다친 거야?” 강지혁은 말하면서 그녀의 손목을 당겨 왼손을 잡았다. 강지혁의 손가락이 임유진의 부어오른 손등에 닿자 그녀는 소리쳤다. “손대지 마. 연고 발랐어!” 강지혁은 자신의 손가락을 살짝 치웠지만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부은 손등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지혁은 전에 이한에게서 임유진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아가며 절을 했다는 말만 들었
임유진이 오늘 촬영장에서 억울하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되자 강지혁의 마음에 화가 나 당장이라도 그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 나니 오히려 기분이 더욱 안 좋아졌다! 강지혁은 손끝으로 그녀의 멍든 이마를 쳤다. “아파!” 임유진은 참지 못하고 아프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강지혁은 냉랭하게 말했다. “너도 아픈 건 아네?” 당연했다! 그녀의 머리는 돌로 만든 것도 아닌데 맞으면 당연히 아팠다. 심지어 강지혁이 다친 곳을 때렸으니 말이다. 임유진은 눈을 부릅뜨고 강지혁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강지혁은 오히려 화를 내며 말했다. “임유진, 너 아주 잘하는 짓이야. 내 곁에 있기를 거절하고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러 갔나 했더니, 고작 엑스트라를 하러 가서 동생한테 당해 머리나 땅에 박고, 넌 이게 재밌어?” 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때 임유진은 왠지 강지혁이 조금 두렵게 느껴졌다.그러나 임유진이 한 걸음 물러서자 강지혁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는 줄곧 벽 쪽으로 물러섰고 등은 이미 벽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강지혁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두 손을 벽 쪽에 얹더니 그녀를 거의 품 안에 가둬 버렸다. “재밌냐고 물어봤잖아?” 강지혁은 뚫어지게 임유진을 쳐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았는데 분노를 억누르는 것 같았다. 오늘 다치고 괴롭힘당한 사람은 그녀인데 도대체 왜 강지혁이 더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나, 나도 재밌지 않아.” 한참 후에야 임유진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왜 촬영장에 갔는데? 엑스트라 하러? 아님 스타라도 되고 싶었던 거야? 그럼 진작에 말하지. 나에게 부탁하면 내가 도와 줄 수도 있었잖아. 그럼 남한테 가서 머리 박아가며 무릎 꿇어 절하고 손도 이렇게 다칠 필요 없었잖아?” 강지혁은 냉담하게 말했다. 만약 강지혁의 이성이 그를 억누르고 있지만 않았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아무 데도 못 가게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그래서 내가 널 무섭게 했어?”지혁이 묻자 유진은 잠시 머뭇거렸다.“난 네가 나를 단지 장난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는 거 잘 알아. 지금의 너는 그저 재미있으니까 나에 대한 흥미가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 흥미가 사라진다면 난 아무런 가치가 없어질 거고 만약 내가 실수로라도 널 화나게 한다면 난 예전에 감옥에 있었던 그 꼴이 나게 될 거라는 것도 잘 알아.”그녀는 더 이상 그런 암울하고 참혹한 날들을 다시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럼 지금 네가 하는 이런 말들이 나를 화나게 할까 두렵진 않아?”그녀의 몸이 갑자기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두려웠지만 그냥 말하는 걸 선택을 했을 뿐이었고 현재의 모습이 이미 모든 걸 설명하고 있었다.주위는 조용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지금 들리는 것은 오직 자신의 호흡과 심장 박동 소리뿐이다. 비록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시선이 줄곧 그녀의 몸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그가 갑작스럽게 뱉은 목소리를 들었다.“만약 내가 장난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내 곁에 계속 머물러 줄 거야?”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고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그럴 거야?” 그는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네 곁에서 뭘 할 수 있는데? 계속 너의 누나로 있을까? 아니면 네 장난의 상대? 그게 뭐가 됐든 그 어느 쪽도 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지혁이 입술을 오므렸고 눈빛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아내라는 두 글자가 그의 목구멍에서 걸렸다. 만약 유진이 입을 열었다면, 그녀를 아내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동안 지혁은 누군가에게 아내가 되어달라 청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갑자기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허리를 굽히고는 그녀의 뺨을 살짝 스쳤다.“누나가 이리 말하니 그럼 계속 이렇게 지내면서 누가 더 인내심이 강한지 겨뤄봐요. 내가 먼저 누나를 내 곁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앉아 다치지 않은 오른손으로 젓가락을 들고선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곁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불빛 아래 그녀의 속눈썹은 자연스럽게 올라가 있었고 눈을 감으면 눈꺼풀이 내려오면서 더 두드러져 보였다. 손바닥만큼 작은 얼굴은 그의 한 손으로도 완전히 감쌀 수 있어 보였다.작고 귀여운 코와 음식을 씹어 먹을 때 움직이는 두 볼은 마치 조그만 동물이 먹이를 먹는 것처럼 보였고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귀여웠다. 과거에 그였다면 여자가 음식을 먹는 것에 이렇게 빠져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녀를 볼 때면 그녀를 숨기고 싶은 욕망이 더욱 커져 누구도 볼 수 없는 그런 곳에 그녀를 숨겨두고 오직 자신만이 그녀를 보거나 다가갈 수 있게 만들고 싶어졌다.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며 밥을 먹고 있었지만 지혁이 계속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기 중에는 어색함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음식을 삼키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이상하게 예전에는 그가 밥을 같이 먹어주었을 때는 그가 따뜻하게 느껴졌을 뿐 그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상했다. 유진은 무의식적으로 먹는 속도를 높여 빨리 밥을 다 먹으려고 했고 바로 이때,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누나 강현수 좋아해요?”풋!그녀의 입에서 미처 삼키지 못한 음식이 뿜어져 나왔고 그녀는 한바탕 기침을 하며 앞의 탁자와 그의 몸에 튄 밥알을 보았다.“미, 미안해.”그녀는 얼른 휴지를 뽑고는 그의 옷에 튄 밥알들을 급하게 닦았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조금도 개의치 않다는 듯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누나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강현수 좋아해요?”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강현수를 좋아하냐고? 이걸 왜 물어보는 거지?’게다가 지혁이 유진이가 현수를 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그녀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의문들
그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그의 입술은 그녀의 입술과 더욱 가까워져 거의 입술과 입술이 맞닿았다.임유진의 얼굴은 자신도 모르게 상기되었다.“하지 마…….그녀는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 했다.그는 잠시 멈추고 시선을 고정한 채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럼 누나 그와 어떻게 만났는지 얘기해 봐.”“한 번은 누군가 그의 팔찌를 훔쳤는데 도둑이 마침 나오면서 나랑 부딪혔고, 팔찌가 내 옷 주머니에 떨어졌어. 그에게 팔찌를 돌려주면서 알게 된 거야.”임유진이 황급히 설명했다.“그래?”그는 중얼거리며 말했다.“그러고 나서 두 사람 또 몇 번 만났어?”그녀가 그걸 어떻게 세어 본 적이 있겠는가! 그러나 강지혁의 다가오는 얼굴을 보고 임유진은 재빨리 마음속으로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네…… 네 번. 한 번은 그가 팔찌를 주워준 게 고마워서 밥이라도 사 주면서 감사를 표하고 싶다고 했어. 또 한번은 마을에 있을 때 우리 외할머니가 입원한 병원에서 우연히 마주쳤고, 그리고 이번 엑스트라 촬영 때 다시 한번 또 만난 거야.”그의 눈동자가 번쩍였다. 현수에 대해 잘 아는 그는 현수가 만약 정말 그녀가 팔찌를 주워준 데 대해 감사를 표하고 싶다면 돈을 줬으면 됐을 텐데 왜 굳이 그녀에게 밥까지 샀는지 모르겠다고 생각했다.그러니까, 그때 이미 현수는 그녀에게 마음이 있었단 말인가?왜 임유진일까? 현수는 임유라와 사귄 지 얼마 안 되지 않았나? 예전 같았으면 현수는 여자를 사귀고 있는 상황에서는 다른 여자에게 흥미를 느끼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지금은…… 뭔가 예외인 것 같았다!“누나 그 사람을 좋아해?”그는 여전히 똑같은 질문을 했다.“말했잖아, 나는 그와 아무 사이도 아니야. 하물며 그는 연예계의 태자야, 나는 보잘것없는 환경미화원일 뿐이고.”분명 하나도 어울리지 않는 두 사람인데 그는 계속해서 그녀에게 강현수를 좋아하느냐고 묻고 있다. 그녀가 보기에 이건 정말 아무런 의미가 없다!“나도 누나한테 반했잖아?”강지혁은 가볍게 웃었다. 입술을 그녀의 입꼬
별채로 가는 길에는 늘 조명이 켜져 있기에 어두운 저녁이라도 전혀 무섭지 않았다.임유진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 보니 강지혁이 방 한가운데 멀뚱히 서 있는 것이 보였다.강지혁은 불빛을 받으며 시선을 내린 채 바로 앞에 있는 냉동관을 그저 가만히 바라만 보고 있었다.“혁아.”임유진은 그를 부르며 천천히 옆으로 다가갔다.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강지혁은 상념에서 빠져나와 고개를 돌렸다.“오지 말라니까. 여기는 나 혼자 있으면 돼.”“너랑 같이 있고 싶어서 왔어.”임유진은 강지혁의 바로 앞에 서서 그의 볼을 매만졌다.지금은 1월이라 날씨가 무척이나 추웠다. 게다가 지금은 밤이고 별채 쪽에는 보일러도 없었기에 바깥과 거의 비슷할 정도로 추웠다.“오늘 밤도 여기 있을 거야?”임유진이 물었다.“응. 그래도 날 키워주셨으니 할 도리는 다해야지.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사람들 많이 올 거야. 너는 몸이 불편하니까 가지 말고 그냥 집에 있어.”“출산할 시기가 임박한 것도 아닌데 뭐. 내일 할아버지 장례식에 나도 참석할 거야. 만약 몸이 불편하거나 하면 바로 너한테 얘기할게.”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의 손을 살짝 잡았다.“너한테는 좋은 기억 하나 없는 사람이잖아. 그런데 왜...”“네 할아버지잖아. 네 유일한 가족이잖아. 그러니까 아무리 나를 마음에 들지 않아 했어도, 아무리 끝까지 나를 손주며느리로 받아들이지 않았어도 나는 할아버지 가시는 길을 너와 같이 보내드려야 할 의무가 있어.”다른 건 없었다.그저 강지혁의 어린 시절을 곁에서 지켜줬다는 사실만으로도 임유진은 충분히 감사했다.강지혁은 그 말에 그녀의 손을 조금 세게 쥐었다.“할아버지가 마지막에 한 말은 신경 쓰지 마. 그 말은 그냥...”“알아. 네 할아버지는 그저 누군가를 깊게 사랑하는 것으로 행복한 결과를 낳을 거라는 걸 믿지 못하시는 분이었던 거지. 네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 일도 있고 네 아버지 일도 있어서 많이 무서우셨을 거야. 너도 나중에 불행하게 될까 봐.”임유진이 말했
강지혁은 마치 강문철에게 자신이 임유진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보여주려는지 조금 격앙된 목소리로 얘기했다.강문철은 그 말에 눈동자를 돌려 자신의 유일한 손주를 노려보았다. 그러다 몇 초 후 이제는 모든 게 다 피곤한 듯 천천히 눈을 감으며 입을 열었다.“우리 집안에서... 여자한테 미친 인간 치고... 멀쩡한 사람을 못 봤다. 네가... 계속해서 이러면 너도 언젠가는...”강문철의 목소리가 점점 작아지는가 싶더니 이내 옆에 있던 종합모니터에서 삐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임유진은 그 소리에 강문철이 세상을 떠났다는 것을 바로 알았다.누군가의 생명이 바로 눈앞에서 멎었다.조금은 무서웠던 노인이, 강지혁의 유일한 가족이었던 노인이 이렇게 세상에서 사라졌다고 생각하니 어쩐지 모든 게 다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강지혁은 삐 소리가 들린 뒤로 임유진의 손을 꽉 잡았다. 그렇게 계속 힘을 주다가 임유진의 입에서 아프다는 소리가 들리고서야 비로소 정신을 차리며 손을 놓아주었다.“미안. 아팠지?”강지혁은 어느새 빨개진 그녀의 손을 다시 잡으며 초조한 눈길로 물었다.“괜찮아. 그것보다 할아버지...”“응. 가셨어.”강지혁의 얼굴은 가족을 잃은 사람 같지 않게 무척이나 평온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정말 아무런 감정도 없는 게 아니라는 걸 임유진은 알고 있다.아무리 살가운 사이가 아니었어도 강문철은 강지혁의 할아버지고 유일한 가족이었다. 강선우가 죽은 뒤로 그의 곁을 지켜줬던 유일한 사람이었다.강지혁은 몸을 돌려 편히 잠든 강문철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그리고 임유진은 그런 강지혁의 옆에 서서 그의 손을 꽉 잡아주었다....강문철의 장례식은 3일 뒤로 정했다.그 3일 동안 시신은 냉동관에 넣은 채 강씨 저택의 별채에 두기로 했다.그리고 그 3일 동안 강지혁은 그 어떤 외부인도 별채에 들이지 않았다.별채는 강씨 가문 사람 외에는 허락하지 않는 특별한 곳이었으니까.강선우가 죽었을 때도 그의 시신은 잠시 이 별채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지금은 그의
강지혁은 임유진의 고집에 결국 알겠다며 그녀와 함께 집에서 나와 병원으로 향했다.병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은 뒤따라온 경호원에게 임유진의 곁을 맡기고 혼자 병실로 들어갔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빼빼 마른 강문철이 흰색 병상 위에 가만히 누워있는 것이 보였다.한 시대를 주름잡았던 남자도 병마와 세월 앞에서는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었다.강문철은 강지혁이 안으로 들어온 것을 보더니 마지막 힘을 쥐어짜 입을 움직였다.“왔... 니...”“네, 저 왔어요.”강지혁이 곁으로 다가오며 대답했다.사실 강지혁은 강문철에게 대단한 가족 간의 정은 느끼지 못했다.실제로 강문철은 강지혁이 할아버지에 대한 애정을 느낄만한 행동을 보여주지 않았으니까.강문철은 언제나 강지혁을 자신의 뒤를 이어 강씨 가문의 모든 것을 물려받을 하나의 장기 말로 여겨왔다. 물론 그 장기 말도 쓸모가 없었다면 진작 버렸을 것이다.“이제는... 강씨 가문의 모든 게 네 손에... 달렸다. 만약... 네가 가문을 망하게 하면... 가만두지 않을 거야.”강문철이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말을 내뱉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에요?”강지혁이 강문철을 빤히 바라보았다.이에 강문철은 탁한 눈동자를 옆으로 굴려 병실 문 쪽을 바라보며 말했다.“임유진... 그 아가씨... 밖에 있지? 들어오라고 해...”그 말에 강지혁의 눈썹이 꿈틀거렸다.“유진이 건드릴 생각하지 마세요.”“이 꼴로... 내가 뭘 할 수 있을 것 같으냐? 어차피... 그 아가씨 옆에는... 네 사람 천지일 텐데.”강지혁은 그가 두 손으로 직접 키운 손주이자 가문의 후계자이기에 강지혁의 생각 같은 건 이미 훤히 꿰고 있었다.강지혁이 움직이지 않고 가만히 있자 강문철이 다시 입을 열었다.“그저... 마지막으로 해줄 얘기가... 있어서 그러는 것뿐이다...”호흡이 점점 가빠지고 안색도 창백해진 것이 정말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듯했다.강지혁은 잠깐 고민하다가 결국 발걸음을 옮겨 병실 밖으로 나갔다. 그러고는 곧바로 임유진의 손을
“그래? 그럼 만약... 내가 너한테 상처를 줘도 너도 똑같이 나 안 볼 거야? 내가 아무리 용서해달라고 빌어도 나 용서 안 해줄 거야?”강지혁은 목구멍을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한마디 한마디 힘겹게 내뱉었다.이에 임유진은 몸을 돌려 이해가 안 간다는 얼굴로 강지혁을 바라보았다.“혁아, 너 대체 왜 그래? 요즘 따라 너무 불안해 보여. 무슨 일 있는 거야?”강지혁은 자신의 불안해 보인다는 말에 고개를 푹 숙였다.확실히 그는 요 며칠 줄곧 불안해하고 있었다.탁유미와 이경빈의 일을 가까이에서 지켜보며 자신과 임유진의 결말도 그들과 똑같을까 봐 불안해하고 있었다.“혹시 방금 내가 한 말이 널 불안하게 만들었어? 혁아, 내가 언니를 이해한다고 했던 건 소민준과의 일이 생각나서 그랬던 거야. 네가 괜한 생각을 할 게 아니라고. 네가 나한테 상처 줄 리가 없잖아. 그리고...”임유진은 손을 들어 조금 우울해 보이는 강지혁의 눈가를 부드럽게 매만졌다.“전에 내가 말했잖아. 네가 정말 나한테 미안해야 할 일을 했다고 해도 울면 봐주겠다고.”그녀는 강지혁의 눈에 담긴 우울함이 사라질 수 있게 일부러 환히 웃으며 얘기했다.그러자 그 말을 들은 강지혁의 눈에 조금씩 빛이 들어오기 시작했다.“유진아, 너를 향한 내 감정은 언제나 그대로일 거야. 앞으로 무슨 일이 생기든 절대 변하지 않을 거야.”강지혁은 임유진의 오른손을 들어 자신의 심장에 가져갔다.“그러니까 너도 약속해. 날 영원히 사랑하겠다고. 절대 변하지 않을 거라고. 약속해.”임유진은 그 말에 눈을 깜빡였다.탁유미와의 대화에서 사람의 감정은 언젠가는 변한다는 말에 깊이 공감했는데 눈앞에 있는 남자는 자신의 감정은 변하지 않을 거라고 하고 있다.소민준과의 관계에서 질릴 대로 질려 그에게 모든 감정이 사라진 건 사실이다. 하지만 지금 눈앞에 있는 남자를 사랑하고 있고 그와 영원히 하고 싶은 것 또한 사실이다.“응, 영원히 너만 사랑할게. 절대 변하지 않을게. 약속해.”임유진은 진지한 얼굴로 그에
임유진은 한지영이 정신을 차린 모습을 떠올리면 마음이 아프다가도 그녀가 활기를 되찾아줘서 참으로 고마웠다.한지영은 백연신과 그렇게 헤어진 후 자포자기하는 것이 아닌 적극적으로 치료에 임하며 회복에 힘썼다. 심지어 며칠 전에는 미소를 지으며 이런 말까지 했다.“고작 남자랑 헤어진 것뿐인데 뭐. 연애가 다 이런 거 아니겠어? 사랑했다가 또 헤어졌다가. 그래서 결혼까지 가는 게 기적이라는 말도 있잖아. 열렬히 사랑했으니 그거로 난 됐어. 혹시 알아? 퇴원한 뒤에 진정한 내 운명이 나를 찾아올지.”“다행이네요.”탁유미는 한지영의 말을 전해 듣고 잔잔한 미소를 지었다.“유진 씨랑 지영 씨는 나처럼 이러지 말고 정말 행복했으면 좋겠어요.”그녀는 자신의 인생에서 더 이상의 사랑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다.대화를 나누던 임유진과 탁유미는 병실 밖의 누군가가 그들의 대화를 다 듣고 있는 것을 몰랐다....임유진은 탁유미에게 인사한 후 강지혁과 함께 강씨 저택으로 돌아왔다.찌뿌둥한 몸을 이끌고 2층으로 올라가려는데 강지혁이 뒤에서 그녀를 품에 끌어안았다.“왜 그래?”갑작스러운 포옹에 임유진이 물었다.사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강지혁은 오늘따라 말수가 무척이나 적었고 시선은 거의 창밖에 고정하다시피 했다.그 모습에 임유진이 몇 번이나 무슨 일 때문에 그러는지 물었지만 강지혁은 그때마다 아무것도 아니라며 대답을 피했다.“그냥... 갑자기 안고 싶어져서.”강지혁은 낮게 중얼거리며 아까 병원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렸다.그는 이경빈을 따라 탁유미의 병실 앞으로 왔다가 비스듬히 열린 문틈 사이로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 내용을 들었다.탁유미가 자신에게 상처 준 사람은 다시 받아줄 생각이 없다고 했을 때 이경빈은 휘청하며 그대로 주저앉았고 입을 틀어막으며 흐느끼는 소리가 새어나가지 않게 했다.그 순간만큼은 우는 것조차도 그에게는 허락되지 않았다.“맨날 안으면서 아직도 부족해?”임유진이 실소하며 물었다.“응. 부족해.”강지혁에게는 어쩌면 평생 부족할지도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무의식 속에서 그 언젠가 임유진이 모든 진실을 알게 되고 그를 떠나면 그때 누군가가 이렇게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줬으면 해서 일지도 모른다....탁유미는 이틀 정도 중환자실에 있다가 모든 수치가 안정된 후 바로 일반 병실로 옮겨졌다.다만 수술은 성공적이었지만 앞으로 정기적으로 검진을 받아야만 했다.탁유미는 간호사가 들어와 약을 갈아줄 때마다 보이는 수술 자국을 보면서 조금 복잡한 마음이 들었다.그녀가 아무리 원치 않았다고 해도 지금 그녀의 몸 안에 있는 간은 이경빈의 간이었다.어쩌면 하늘이 조금은 그녀를 가엽게 여겨준 걸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런 방식으로 살게 된 건지도 모른다.윤이와 김수영은 요 며칠 거의 탁유미 곁에서 떨어지지 않다시피 했고 임유진도 자주 탁유미를 보러 병원에 왔다.“유진 씨, 미안해요. 괜히 나 때문에 힘들게 왔다 갔다 하고...”탁유미는 미안한 얼굴로 임유진의 큰 배를 바라보았다.지금쯤 집에서 태교나 들으며 휴식을 취해도 모자란 데 괜히 자신 때문에 임유진이 고생하고 있는 것 같았다.“언니, 그게 무슨 말이에요. 언니가 나였으면 안 이랬을까요? 그러니까 너무 그러지 않아도 돼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의자에 앉았다.“나 윤이 데리고 나갈 테니까 둘이서 얘기하고 있어.”김수영이 꾸벅꾸벅 졸고 있는 윤이를 안아 들며 보호자가 쉴 수 있는 방으로 들어갔다.임유진은 두 사람이 들어간 것을 확인한 후 탁유미를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물었다.“혁이가 그러는데 이경빈 씨도 며칠 전부터는 걸어 다닐 수 있게 됐대요. 그런데... 언니 병실까지 왔다가 매번 들어오지는 못하고 다시 돌아가나 봐요.”그 말에 탁유미는 담담하게 대꾸했다.“이경빈과의 인연은 여기서 끝이에요. 어차피 이경빈도 몸이 다 나아지면 원래 있던 곳으로 돌아갈 거고 나는 계속 여기서 살게 되겠죠. 물론 나랑은 끝이라도 윤이랑은 부자간의 정이 있으니까 둘이서는 만나게 될지도 모르겠네요.”“이경빈 씨와는 정말 일말의 가능성도 없는 거예요?”임유진의
다시 눈을 뜬 이경빈이 보게 된 건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강지혁이었다.마취가 아직 완전히 풀리지 않아서 그런지 통증 같은 건 없었다.“유미는... 어떻게 됐습니까?”이경빈이 힘겹게 입을 열며 물었다.“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났고 탁유미 시는 지금 중환자실에 있어요. 이틀 정도 경과를 지켜봐야 한대요.”그의 말에 대답해준 건 강지혁이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안도의 한숨을 쉬며 입꼬리를 살짝 올렸다.수술이 무사히 끝났으니 된 거다.앞으로 두 번 다시 탁유미 곁에 모습을 드러낼 수는 없지만 적어도 그녀의 몸 안에 그의 일부가 살아 숨 쉬고 있으니까, 그녀가 죽을 때까지 줄곧 함께하게 될 거니까 그것으로 됐다.그리고 그녀가 준 골수도 평생 그와 함께 할 테니 그 역시 이것으로 그녀와 평생 함께하고 있다고 생각하면 된다.이경빈은 탁유미의 상태 외에 아무런 질문도 하지 않았다. 마치 자기 몸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였다.의사가 수술 후 주의사항과 나타날 수 있는 증상들에 관해 설명해주는데도 그는 시큰둥한 얼굴로 침묵만 고수할 뿐이었다.강지혁은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다가 의사와 간호사가 전부 다 나간 뒤 천천히 입을 열었다.“탁유미 씨 사건을 뒤엎으려고 한다고 들었는데 그렇게 되면 이강 그룹이 큰 타격을 입게 될 겁니다. 어쩌면 판결 결과에 따라 이경빈 씨는 감방살이하게 될지도 모르고요.”“알고 있어요.”이경빈이 담담하게 말했다.자신의 결정으로 그룹에 어떤 파문이 일지 그는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 역시 그가 받아야 할 벌이다.복수하겠다는 생각에 매몰돼 공수진의 말만 믿고 거짓 증언한 그의 업보다.탁유미가 형을 살게 된 것에 제일 큰 공헌을 한 건 바로 그의 증언이었다.그러니 그녀를 감옥으로 보낸 건 그나 다름없었다.“정말 앞으로는 탁유미 씨 앞에 나타나지 않을 생각입니까?”강지혁이 물었다.“내가 유미를 위해 해줄 수 있는 건 많지 않아요. 그런데 유미가 그걸 원한다고 하니 나로서는 들어줄 수밖에요.”그 소원을
“임유진 씨한테 맡기려고 했는데 너를 설득하지 못할까 봐... 그래서 너와 직접 얘기하려고 들어왔어. 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내 간이 너한테는 달갑게 느껴지지 않을 거라는 것도 알아. 하지만...”이경빈은 주먹을 꽉 말아쥐더니 탁유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그래도 수술은 받아줘. 네가 수술을 받으면 그때는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줄게.”이경빈은 지금 오직 그녀가 살기만을 바랐다.그녀만 살 수 있다면 뭐든 좋았다.탁유미는 그런 그를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만약 나한테 간을 기증해주면 수술 후에 후유증 같은 게 생길 수도 있어. 그래도 괜찮아?”평온한 그녀의 말투에 이경빈은 잠시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수, 수술받으려고?!”“...응.”윤이와 김수영을 위해 그녀는 한번 희망을 걸어보고 싶었다.“간을 기증해주는 대신에 뭐 바라는 거 있으면 지금 여기서 확실하게 얘기해. 너한테 빚지는 건 싫으니까. 물론 내가 수술대 위에서 죽게 되면 그때는 네가 바라는 게 뭐든 간에 들어줄 수 없게 되겠지만.”“아니! 넌 죽지 않아!”이경빈이 흥분해서 외쳤다.“분명히 괜찮을 거야. 네 골수를 이식받았을 때 나는 아무런 거부반응도 없었어. 그러니까 내가 너한테 주는 것도 괜찮을 거야. 걱정하지 마!”이경빈은 확신에 찬 얼굴로 그녀를 바라보았다.“그래서 조건은? 그것부터 말해.”탁유미의 말에 이경빈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조건이라니, 그녀에게 간을 기증해주는 대신 바라는 게 있다고 하면 그녀가 멀쩡히 살아 숨 쉬는 것밖에 없다.그녀가 살 수 있다면 간 따위 몇 번이고 더 기증해줄 수 있다.“바라는 거 없어. 그리고 나한테 빚진다고 생각하지 않아도 돼. 오히려 지금은 내가 너한테 빚진 걸 갚는 거니까. 너도 그때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잖아.”“그래? 그럼 서로 빚진 게 없는 거네? 알았어. 수술 무사히 끝나면... 우리 더는 보지 말자. 나는 더 이상 너랑
“유진 씨? 유진 씨가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탁유미가 깜짝 놀라며 임유진에게 물었다.“이경빈 씨 전화를 받고 왔어요.”임유진은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언니, 수술해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 기회를 포기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져요.”“유진 씨!”탁유미는 갑작스러운 임유진의 말에 당황해하며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고는 서둘러 윤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윤이가 바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태연한 표정이었다.“언니가 남은 시간을 편히 보내고 싶은 건 알겠어요. 그리고 수술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남은 시간마저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언니... 만약 수술에 성공하면 그때는 윤이가 어른이 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어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언니, 만약 그때 내가 배 속의 아이를 한 명 지우는 걸 택했으면 어쩌면 아이들이나 나나 조금 더 안전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랬으면 결코 지금 같은 행복감은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때 의사 선생님들의 권고에도, 혁이의 반대에도 결국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함께 이겨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언니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쉽게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이도 언니가 그러기를 바랄 거예요. 세상에 엄마를 일찍 보내고 싶어 하는 자식은 없으니까요. 윤이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말아줘요.”탁유미는 그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시선을 돌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들을 바라보았다.윤이는 임유진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본능적으로 알아들었다.“엄마, 윤이는 엄마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윤이랑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윤이가 키도 크고 힘도 세지면 그때는 윤이가 엄마를 지켜줄게요!”탁유미는 그 말에 결국 눈물을 보였다.윤이는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앙증맞은 손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그때 병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