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밤 연회에는 톱스타들도 참석했지만 강지혁은 그들 못지않게 멋진 아우라를 뿜어냈다.그는 예쁜 얼굴과 고혹적인 꽃사슴 같은 눈동자를 가지고 있다. 활짝 웃으며 사람을 바라보면서 입가에 잔잔한 미소가 번진 모습은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화려하고 남녀를 불문하고 그에게 빠져들게 만들었다.하지만 이 눈동자에 차가운 기운이 돌 때는 사람들로 하여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묘한 압박감을 느끼게 한다.강지혁은 눈을 반쯤 늘어뜨린 채 경호원과 경비원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잘 재단된 검은 슈트는 늘씬하고 긴 몸을 감싸고 있어 비율이 좋아 보였고 온몸에는 우아함이 묻어났다.강지혁은 기자들이 인정하는 패니스트이다.그러나 오늘은 예외였다.다른 건 아무 문제 없지만 강지혁이 두른 연보라색 목도리와 손에 낀 같은 색 계열의 장갑은 아무리 봐도 이상한 것 같았다.“저 목도리와 장갑은 강지혁 씨의 평소 스타일이 아닌 것 같네요.”기자들은 속삭이기 시작했다.“좀 거칠어 보이기도 하고 낡아 보이네요, 혹시 어느 브랜드에서 새로 나온 빈티지 스타일인가?”“연보라색은 웬만한 남자와 어울리지 않는데, 강지혁 씨가 하니까 정말 잘 어울리는 것 같네요.”그가 사진 찍히는 것을 싫어한다는 걸 대부분 알고 있었지만 몰래 찍는 기자들도 있었다.그러나 더 수상한 건, 사진을 찍는 것을 본 경호원이 기자에게 다가가려고 할 때 강지혁이 슬쩍 뭐라고 하니 경호원이 다시 걸음을 멈춘 것이었다.강지혁이 회의장에 들어서자 몰래 찍던 기자는 숨을 돌렸다.그는 방금 경호원이 자기 앞으로 다가와 핸드폰에 있는 사진을 삭제해 달라고 할 줄 알았다.강지혁이 회의장에 들어서니 자연히 이슈가 되었고, 굉장히 많은 유명 인사들이 그에게 다가가려고 안간힘을 썼다.이한은 강지혁의 곁으로 다가와 그의 옷차림을 살폈다.“옷은 정말 눈에 띄네, 근데 목도리와 장갑은 너의 스타일이 아닌 것 같네?”강지혁은 눈썹을 치켜세웠다.“내 스타일이 어떤 건데?”‘아무튼 이런 부드러운 색상의 목도리와 장갑은 절대 하지
강지혁은 이한을 힐끗 본 후에 이한은 주위에 어떤 양집의 규수가 숨을 내쉬며 중얼거리는 소리로,“어머나, 흰 눈이 저렇게 예쁘게 뒤집다니!” 이렇게 말했다.“…….”이한은 순간 토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강지혁은 그저 눈만 뒤집었을 뿐인데, 저 상사병을 앓는 여자들이 감탄할 만한 가치가 있긴 한 걸까?’강지혁이 장갑을 벗었을 때, 이한은 갑자기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문득 강지혁의 손에서 장갑을 움켜쥐었다. “어? 이 장갑은 손으로 짠 것 같은데, 뜨개질 솜씨가 별로야.”이한은 의심스러운 표정으로 이 장갑을 평가했다.“그리고 이 털실은 아무리 봐도 낡은 털실 같은데, 이 장갑은 어느 매장에서 속아서 산 거 아니야? 이런 장갑을 너한테 팔다니?”“누가 샀다고 했어.” 강지혁은 담담하게 말했다.이한은 턱이 갑자기 땅에 떨어진 것 같은 표정을 지었다. ‘산 것이 아니라면 설마.’“설마 다른 사람이 짜서 너에게 선물로 준 건 아니겠지?”강지혁은 대답하지 않았지만 그 표정은 부정하는 표정은 아니었다.이한은 머리가 좀 어지러웠다.‘정말 다른 사람이 준 거야? 강지혁의 성격으로는 이런 것을 아예 안 차고 다니잖아.’‘하지만 오늘 착용했을 뿐만 아니라 이렇게 공개된 자리에서 이런 걸 착용하다니.’‘도대체 누가 짠 거야?! 어떤 사람이 이렇게 뜨개질을…… 어, 어떻게 이렇게 별로인 목도리와 장갑을 낄 수 있는 거지?’이한의 머릿속에는 소문으로만 듣던 섣달그믐날 저녁에, 친구가 김문철을 버리고 S시 근처의 작은 마을로 달려가 구해낸 그 여인이 한순간에 스쳐 지나갔다.심지어 그 여자를 위해 현지 경찰서에까지 대동했었다.‘설마 그 여자인가?!’한창 생각하고 있을 때 강지혁은 이미 이한을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돌려줘.”“아!”이한은 그제야 정신을 차렸다. 장갑을 강지혁에게 돌려주려 할 때 옆에서 소리 하나가 울렸다.“이 장갑은?” 이한은 먼저 제대로 말했다.“이것은 지혁이 오늘 낀 장갑인데, 아니면.”다만 그의 말이 아직
이한는 농담을 하고 있었지만 어차피 그는 친구가 여자 친구를 바꾸는 데는 이미 익숙해진 상태였다.만약 시간이 지나도 여자 친구를 바꾸지 않았다면, 그게 오히려 더 이상할 것만 같았다.다만 지금 사귀는 이 어린 아이돌은 헤어진다면 현수 곁에서 가장 짧은 시간을 보낸 여자 친구가 될 것으로 보였다.“응, 마음에 들었어.” 강현수는 장난처럼 말했지만, 눈빛은 여전히 강지혁의 시선을 마주하고 있었다.이한은 아무렇지도 않았는데, 강지혁의 얼굴이 갑자기 어두워졌고 주변 공기마저 얼어붙는 것 같았다.“아이고, 지혁, 너는 왜 그래? 표정이 이렇게 심각해졌어?”이한은 이유도 모른 채 그에게 물었다. 다만 분위기가 조금 이상한 것을 느꼈다.강지혁은 이한을 무시했고 검은 눈동자는 강현수를 쳐다봤다. 그러다 갑자기 입꼬리를 가볍게 치켜세웠다.“그 배우가, 설마 네 여자 친구의 누나는 아니겠지?”“그래, 공교롭게도 맞아.” 강현수이 말했다.강지혁의 입꼬리는 더욱 심하게 올라갔지만 그의 눈빛은 여전히 차가웠다.“그래, 정말 공교롭네.”이 말을 마치자마자 그는 몸을 돌려 회의장 출구 방향으로 걸어갔다.이한은 알 수 없는 얼굴로 곁에 서 있는 강현수를 보았다.“지혁이는 갔어? 온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강현수는 강지혁의 뒷모습을 쳐다보고 있었는데 그의 안색도 똑같이 굳어 있는 거 같았다.“너희들 방금 내가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했지?”이한이 물었다. 방금 이 두 친구가 한 말을 분명히 한마디 한마디 다 알아들었지만 그는 알아듣지 못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그렇지 않으면 어떻게 그들의 반응을 이해 못 할 수 있을까?“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일이 좀 있었어. 정말 우연한 일치야.” 강현수는 눈을 가리고 이렇게 말했다.‘그도 예전에 이한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지혁이 한 여자를 신경을 쓰고 있는 것 같다고. 다만 지혁이 신경을 쓰는 그 여자가 임무진이라고는 생각 못했다.’임유진은 이때 배달 음식을 먹으면서 휴대전화를 켜 마음대로 프로그램을 뒤져
바로 이때 그 사람이 점점 가까워짐에 따라 그의 실루엣도 카메라 앵글에서 점점 더 선명해졌다. 임유진은 화면 속의 그 사람을 보자 미처 삼키지 못했던 밥이 하마터면 입에서 튀어나올 뻔했다. 강, 강지혁이다! 카메라 속의 강지혁은 검은색 양복을 입고 있었는데 꼿꼿한 몸매와 단정한 헤어 스타일은 마치 고귀한 도련님처럼 보였다. 그리고 유일하게 눈에 띄는 것은 바로 그가 목에 두른 목도리와 손에 착용한 장갑이었다. 그것은 전혀 양복과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그리고 이 인플루언서의 생방송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이미 미친 듯이 열광하며 스크린을 댓글로 도배하기 시작했다. [저 사람은 누구야?][연예인은 아닌 것 같은데, 멋있다. 세상에, 나는 그의 양복바지 핏에 취할 것 같아.][세상에, 이 사람이 정말 연예인이 아니라고? 만약 그가 데뷔한다면 난 반드시 그의 열렬한 팬이 될 거야!] [빨리 가서 인터뷰 좀 해! 답답해 죽겠다고!] 부추기는 사람들도 있었다. 인루언서는 휴대폰 카메라를 향해 환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우리 한번 인터뷰하러 가볼까요? 저분께서 저의 인터뷰에 응해줬으면 좋겠네요!” 그 사람을 향해 몇 걸음 나아갔을 뿐인데 핸드폰을 들고 촬영을 하던 촬영사는 그녀를 따라가지 않았다. 그러자 인플루언서는 고개를 돌려 말했다. “가요, 설마 지쳐서 걷지 못하는 건 아니죠?” “강, 강지혁입니다. 저 사람은 강지혁이라고요.”핸드폰에서는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는데 분명 핸드폰을 들고 촬영하던 사람이 낸 소리였다. “뭐라고?” 인플루언서는 깜짝 놀라 전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지으며 즉시 강지혁 쪽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당황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녹화 중지하고 영상 당장 삭제해!” 그러나 상황은 이미 늦어버렸다. 촬영사는 이미 강지혁을 찍어버렸고 구경하던 시청자들은 발칵 뒤집혀 버렸다. 강지혁이 누구인지는 많은 사람들이 잘 알고 있었다. 평소 그들이 먹고 입고 자는 것 모두 GH 그룹과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강
심지어 어떤 사람들은 강지혁이 떠난 것이 다른 사람과 말다툼하고 화가 나서 그런거다라고 추측하는 사람도 있었고 오늘 현장에 적지 않은 유명 인사들이 그를 둘러싸 너무 귀찮아서 미리 자리를 떠났다는 사람도 있었다. 아무튼, 여러 가지 추측들이 난무했다. 임유진은 가십거리를 보는 것처럼 이 모든 상황을 지켜보고 있었고 그녀도 도대체 강지혁이 왜 떠났는지에 대해 추측하고 있었다. 이때 임유진이 갑자기 들리는 문 두드리는 소리에 일어나 문을 열었다. 그리고 뜻밖에 문 앞에 서 있는 강지혁의 모습을 봤다. 그 순간 임유진은 사레가 들리는 느낌이 들었다. “콜록, 콜록.” 임유진은 참지 못하고 기침을 했고 순간 얼굴은 빨갛게 달아올랐다. 사람들이 인터넷에서 한참 동안 어디로 갔는지 궁금해하던 사람이 지금 그녀의 앞에 나타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강지혁은 눈살을 살짝 찌푸리더니 손으로 임유진의 등을 두드려주며 말했다. “웬일이야? 사레를 이렇게 심하게 다 하고 뭐 감기라도 걸렸어?” 임유진은 콜록대면서 고개를 저었는데 그녀는 감기에 걸린 게 아니라 강지혁이 갑작스러운 등장에 놀란 것이었다. 한참이 지나서야 임유진은 가까스로 숨을 돌렸고 그제야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너, 너 왜 왔어?” “왜? 나 오면 안 돼?” 강지혁이 되물었다. 임유진은 입술을 오므렸다. 강지혁이 여기를 오면 안 되는 건 아니었다. 그렇지만. 강지혁은 방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좁은 방에 그가 들어오자 방은 더욱 좁아 보였다. 강지혁의 시선은 눈에 띄게 빨갛게 부어오른 왼손으로 향했다. “이 손은 왜 다친 거야? 엑스트라 할 때 다친 거야?” 강지혁은 말하면서 그녀의 손목을 당겨 왼손을 잡았다. 강지혁의 손가락이 임유진의 부어오른 손등에 닿자 그녀는 소리쳤다. “손대지 마. 연고 발랐어!” 강지혁은 자신의 손가락을 살짝 치웠지만 시선은 여전히 그녀의 부은 손등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지혁은 전에 이한에게서 임유진이 무릎을 꿇고 머리를 박아가며 절을 했다는 말만 들었
임유진이 오늘 촬영장에서 억울하게 괴롭힘을 당했다는 걸 알게 되자 강지혁의 마음에 화가 나 당장이라도 그녀를 보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녀를 보고 나니 오히려 기분이 더욱 안 좋아졌다! 강지혁은 손끝으로 그녀의 멍든 이마를 쳤다. “아파!” 임유진은 참지 못하고 아프다고 소리쳤다. 그러자 강지혁은 냉랭하게 말했다. “너도 아픈 건 아네?” 당연했다! 그녀의 머리는 돌로 만든 것도 아닌데 맞으면 당연히 아팠다. 심지어 강지혁이 다친 곳을 때렸으니 말이다. 임유진은 눈을 부릅뜨고 강지혁을 노려보았다. 그러나 강지혁은 오히려 화를 내며 말했다. “임유진, 너 아주 잘하는 짓이야. 내 곁에 있기를 거절하고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하러 갔나 했더니, 고작 엑스트라를 하러 가서 동생한테 당해 머리나 땅에 박고, 넌 이게 재밌어?” 임유진은 입술을 깨물며 무의식적으로 한 걸음 뒤로 물러났다. 이때 임유진은 왠지 강지혁이 조금 두렵게 느껴졌다.그러나 임유진이 한 걸음 물러서자 강지혁은 한 걸음 다가섰다. 그녀는 줄곧 벽 쪽으로 물러섰고 등은 이미 벽에 닿아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었다. 강지혁은 그녀의 앞으로 다가와 두 손을 벽 쪽에 얹더니 그녀를 거의 품 안에 가둬 버렸다. “재밌냐고 물어봤잖아?” 강지혁은 뚫어지게 임유진을 쳐다보았다. 그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더 낮았는데 분노를 억누르는 것 같았다. 오늘 다치고 괴롭힘당한 사람은 그녀인데 도대체 왜 강지혁이 더 화가 났는지 알 수 없었다! “나, 나도 재밌지 않아.” 한참 후에야 임유진은 나지막이 대답했다. “그래? 그럼 왜 촬영장에 갔는데? 엑스트라 하러? 아님 스타라도 되고 싶었던 거야? 그럼 진작에 말하지. 나에게 부탁하면 내가 도와 줄 수도 있었잖아. 그럼 남한테 가서 머리 박아가며 무릎 꿇어 절하고 손도 이렇게 다칠 필요 없었잖아?” 강지혁은 냉담하게 말했다. 만약 강지혁의 이성이 그를 억누르고 있지만 않았다면 그는 당장이라도 그녀를 아무 데도 못 가게 자신의 곁에 묶어두고
“그래서 내가 널 무섭게 했어?”지혁이 묻자 유진은 잠시 머뭇거렸다.“난 네가 나를 단지 장난 대상으로만 생각한다는 거 잘 알아. 지금의 너는 그저 재미있으니까 나에 대한 흥미가 있는 거겠지. 하지만 그 흥미가 사라진다면 난 아무런 가치가 없어질 거고 만약 내가 실수로라도 널 화나게 한다면 난 예전에 감옥에 있었던 그 꼴이 나게 될 거라는 것도 잘 알아.”그녀는 더 이상 그런 암울하고 참혹한 날들을 다시 보내고 싶지 않았다.“그럼 지금 네가 하는 이런 말들이 나를 화나게 할까 두렵진 않아?”그녀의 몸이 갑자기 뻣뻣해지기 시작했다. 당연히 두려웠지만 그냥 말하는 걸 선택을 했을 뿐이었고 현재의 모습이 이미 모든 걸 설명하고 있었다.주위는 조용하다 못해 무서울 정도로 고요했다. 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었고 지금 들리는 것은 오직 자신의 호흡과 심장 박동 소리뿐이다. 비록 지혁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그의 시선이 줄곧 그녀의 몸에 머물고 있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그녀는 그가 갑작스럽게 뱉은 목소리를 들었다.“만약 내가 장난치는 대상으로 여기지 않는다면 내 곁에 계속 머물러 줄 거야?”그가 이런 말을 할 줄은 생각지도 못했는지 그녀는 고개를 번쩍 들고 깜짝 놀라 그를 바라보았다.“그럴 거야?” 그는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쳐다보았고 그녀는 쓴웃음을 지었다.“네 곁에서 뭘 할 수 있는데? 계속 너의 누나로 있을까? 아니면 네 장난의 상대? 그게 뭐가 됐든 그 어느 쪽도 난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아.”지혁이 입술을 오므렸고 눈빛은 점점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아내라는 두 글자가 그의 목구멍에서 걸렸다. 만약 유진이 입을 열었다면, 그녀를 아내로 만들려고 했을 것이다. 그동안 지혁은 누군가에게 아내가 되어달라 청할 필요가 없었다. 그는 갑자기 가볍게 웃으며 천천히 허리를 굽히고는 그녀의 뺨을 살짝 스쳤다.“누나가 이리 말하니 그럼 계속 이렇게 지내면서 누가 더 인내심이 강한지 겨뤄봐요. 내가 먼저 누나를 내 곁
그녀는 입술을 살짝 깨물고 앉아 다치지 않은 오른손으로 젓가락을 들고선 밥을 먹었다. 그리고 그는 조용히 곁에 앉아 한 손으로 턱을 괴고 그녀를 바라보았다.불빛 아래 그녀의 속눈썹은 자연스럽게 올라가 있었고 눈을 감으면 눈꺼풀이 내려오면서 더 두드러져 보였다. 손바닥만큼 작은 얼굴은 그의 한 손으로도 완전히 감쌀 수 있어 보였다.작고 귀여운 코와 음식을 씹어 먹을 때 움직이는 두 볼은 마치 조그만 동물이 먹이를 먹는 것처럼 보였고 말로 설명하기 힘들 정도로 귀여웠다. 과거에 그였다면 여자가 음식을 먹는 것에 이렇게 빠져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런 식으로 그녀를 볼 때면 그녀를 숨기고 싶은 욕망이 더욱 커져 누구도 볼 수 없는 그런 곳에 그녀를 숨겨두고 오직 자신만이 그녀를 보거나 다가갈 수 있게 만들고 싶어졌다.유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며 밥을 먹고 있었지만 지혁이 계속 쳐다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공기 중에는 어색함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얼굴이 점점 뜨거워지는 것을 느꼈고 음식을 삼키는 것조차 어려워졌다. 이상하게 예전에는 그가 밥을 같이 먹어주었을 때는 그가 따뜻하게 느껴졌을 뿐 그 어떤 불편함도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은 이상했다. 유진은 무의식적으로 먹는 속도를 높여 빨리 밥을 다 먹으려고 했고 바로 이때, 그가 갑자기 입을 열었다.“누나 강현수 좋아해요?”풋!그녀의 입에서 미처 삼키지 못한 음식이 뿜어져 나왔고 그녀는 한바탕 기침을 하며 앞의 탁자와 그의 몸에 튄 밥알을 보았다.“미, 미안해.”그녀는 얼른 휴지를 뽑고는 그의 옷에 튄 밥알들을 급하게 닦았다. 하지만 그는 오히려 조금도 개의치 않다는 듯 그녀의 손을 잡고 물었다.“누나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잖아. 강현수 좋아해요?”그녀는 멍하니 그를 바라봤다. ‘강현수를 좋아하냐고? 이걸 왜 물어보는 거지?’게다가 지혁이 유진이가 현수를 안다는 걸 어떻게 알았을까?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는데 말이었다. 찰나의 순간에 그녀의 머릿속은 여러 가지 의문들
“아니야. 아빠가 그간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았던 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임유진이 말했다.“현이 보게 되면 아마 엄청 좋아할 거야!”‘날 찾지 않은 이유는 아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겠지?’임유진은 강지혁을 기억해낸 후 그의 기사를 찾아보다 그녀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로 나온 것을 봤었다.열차가 S 시에 도착하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출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렇게 걸어 나가보니 가장 먼저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한지영이었다.임유진은 그녀를 본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다.그간 기억을 아예 통째로 잃었던 터라 그녀는 한지영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기억이 회복된 후에야 급하게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한지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덜덜 떨었던 것을 말이다.그러다 영상 통화를 걸고서야 한지영은 그녀가 정말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지영아!”임유진이 큰소리로 외치자 한지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한지영은 임유진을 보자마자 눈가가 빨개지더니 눈물을 글썽였다.임유진이 딸의 손을 잡고 그녀 앞에 섰을 때 한지영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너 진짜... 살아있었어. 네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거 난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유진아!!”한지영은 임유진을 와락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그리고 임유진도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미안해... 많이 걱정했지.”“그걸 말이라고!”한지영은 울먹거리며 말하다가 이내 임유진의 옆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판박이였지만 언뜻 강지혁의 모습도 보였다.일전 영상 통화로 이미 얼굴을 봤었지만 실물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이모, 안녕하세요!”현이가 똘망한 눈으로 한지영을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이에 한지영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걸 느끼며 아이의 말랑한
아니, 꼭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게 그녀의 정보만 아니었지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L 시의 또 다른 ‘임유진’의 정보는 맞았기 때문이다.다만 그 ‘임유진’은 부모도 친인척도 없는 천애 고아였다.임유진은 당시 기억을 잃은 상태이기에 그 ‘임유진’의 모든 정보가 바로 그녀의 것이라고 하는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다.그도 그럴 게 ‘임유진’의 집에 있던 사진이나 옷이나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임유진의 것이었으니까.그래서 그녀는 ‘임유진’으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를 아이를 키우며 그렇게 살고 있었다.하지만 분명히 아무것도 기억이 나는 게 없는데 아이의 아빠를 정말 많이 사랑했던 그런 느낌은 확실하게 들었다.게다가 아이도 여자아이 한 명이 다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 뒤로 계속해서 ‘임유진’의 신분으로 살아가다 그녀는 근 2년간 꿈속에서 웬 남자와 웃기도 하고 포옹도 하고 서로 달콤한 말도 속삭이는 광경이 자꾸 보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은 직감으로 그 남자가 바로 현이의 아빠라고 확신했다.하지만 얼굴이 줄곧 모호했기에 그녀는 어떤 얼굴이 자기 남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체격이 비슷하거나 얼굴 윤곽이 비슷한 남자만 보면 바로 달려가서 질문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찾을 리가 없었고 그녀는 번번이 실망만 했다.가끔 나쁜 마음을 먹고 다가오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꿈 얘기를 물어보면 하나같이 대답을 하지 못했기에 금방 쳐낼 수 있었다.그러다 드디어 일주일 전의 꿈에서 남자의 얼굴이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얼굴이 선명해 짐과 동시에 남자의 신분 역시 서서히 기억나기 시작했다.“강지혁!”그녀와 꿈에서 결혼하고 사랑을 속삭인 남자는 S 시에서 제일 유명한 강지혁이었다.기억을 잃은 채 라온시에서 살았어도 강지혁의 이름과 GH 그룹의 기사는 항상 메인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다만 강지혁은 매스컴에 얼굴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 정면 사진을 찾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지금 딸이 보고 있는 사진
그리고 예쁜 눈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이렇게도 예쁜 눈인데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니, 감정이 담겨있지도 않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아들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선율의 입에서 이런 헛소리가 나왔다는 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런 얘기를 흘리고 있기 때문임이 틀림없었다.“아니.”강지혁이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네, 알겠어요.”아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그리고 이것으로 부자의 대화는 끝이었다.도우미가 강선율을 씻겨주기 위해 방으로 들어오자 강지혁은 발걸음을 옮겨 서재로 향했다.그는 한 서랍 앞에 멈춰서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안에는 당시 강지혁과 임유진이 혼인 신고하고 갔을 때 포토 부스에서 찍었던 사진이 들어있었다.강지혁은 사진 속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청초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옅게 지은 미소는 온갖 짜증도 다 날려줄 만큼 온화하고 또 부드러웠다.다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녀의 얼굴이 단지 편안하게만 다가올 뿐이지 심장이 뛸 만큼의 느낌은 전해져오지 않았다.게다가 깜짝 놀랄 만큼의 미모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무난하게만 느껴졌다.그런데 기억을 잃기 전의 그는 이토록 평범한 여자를 사랑까지 했고 심지어 이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나았다.사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따랐으면 이름 있는 가문의 여자와 결혼을 했어야 했다. 이런 집안도 변변찮고 심지어 옥살이까지 하고 나온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매번 이렇게 사진을 볼 때면 강지혁의 머릿속으로 파편 같은 짤막한 기억들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파편 속 여자의 얼굴은 언제나 모호했다.고이준은 그 여자가 바로 임유진이고 강선율의 엄마라고 했다.강지혁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작은 기억의 파편들과 고이준이 그에게 얘기해준 그가 잊은 것들을 조합해 당시 그와 임유진이 어떤 사이였는지 대충 파악은 했다.하지만 그저 파악만 했을 뿐 여전히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사람들이
“나가봐.”강지혁의 말에 선생님은 물건을 챙기고 방을 나갔다.그렇게 방안에는 오직 강지혁과 강선율 두 부자만 남게 되었다.강지혁은 천 피스는 족히 넘어 보이는 퍼즐을 하나하나 묵묵히 맞춰나가는 아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이렇게 큰 퍼즐은 어른이라도 최소 열흘을 있어야 맞출 수 있다. 그런데 강선율을 마치 생각을 하지 않고도 아는 것처럼 퍼즐을 놓고 맞추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다만 강지혁은 거의 다 완성되어 가는 퍼즐을 보고 잠깐 흠칫했다.퍼즐의 그림이 두 명의 남자아이와 한 명의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혹시 동생들이 보고 싶어서 이 퍼즐을 고른 걸까?강지혁은 당시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후 고이준에게서 그에게는 임유진이라는 아내가 있고 그녀의 뱃속에 세쌍둥이가 들어있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임유진이 절벽에서 떨어진 바람에 안타깝게도 세쌍둥이 중 오직 한 명만 살아남았다는 것도 들었다.그 뒤로 몇 년이 지나고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됐을 무렵, 강선율은 세쌍둥이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이에 아들에게 물었다.“그런데 왜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이라고 하는 거지? 두 동생 모두 남동생일 수도 있고 여동생 두 명일 수도 있잖아.”“이유는 없어요.”아이는 강지혁의 의문에 이렇게만 대답해주었다.꼭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인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강지혁은 강선율의 옆에 앉아 아이가 퍼즐을 완성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남동생이 필요하면 아빠가 남동생도 입양해 올게.”애초에 소안나를 입양한 건 강선율이 길에서 괴롭힘당하고 있는 소씨 모녀를 보고 갑자기 여동생이 갖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강지혁은 아들의 한마디에 바로 사람을 시켜 소씨 모녀를 데려왔다. 그러고는 소민아에게 만약 딸을 양녀로 삼게 해주면 앞으로 소안나가 성인이 될 때까지에 필요한 모든 금전적인 지원을 다 해주겠
그래서 소민아는 어떻게든 그 전에 강지혁의 마음을 잡아야만 했다.소민아는 남자들을 꼬실 때 쓰던 청순한 미소를 지으며 강지혁을 맞이했다. 그녀는 원체 얼굴도 예쁘고 또 몸매도 좋았다.만약 예쁜 얼굴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돈 많은 남자의 시선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시선을 끈 것까지는 좋았지만 혼전임신으로 부잣집에 시집가려 했던 그녀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남자 쪽 집안에서 그녀의 배가 잔뜩 불러있는데도 그녀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으니까.소민아는 당시 아이를 이미 밴 상태였기에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반드시 돌아봐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어코 아이까지 낳았다.하지만 그럼에도 남자 쪽 집안은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녀의 딸까지도 모른 척했다.“회장님, 오셨어요? 안나가 회장님 보고 싶다고 계속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어요. 얘도 참, 나한테는 안 이러면서 회장님은 엄청 좋아한다니까요.”소민아가 말했다.그리고 소민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안나가 강지혁에게 안기려는 듯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쌀쌀맞은 강지혁의 눈빛에 소안나는 결국 겁을 먹고 중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고는 조금 눈치 보는 말투로 얘기했다.“아빠, 보고 싶었어요...”강지혁은 소씨 모녀를 한번 훑더니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한마디 했다.“늦었으니 이만 가봐.”“하지만... 안나는 아빠랑 여기서 같이 자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소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민아가 가르쳐줬던 그대로 얘기했다.소민아는 아이에게 반드시 양부인 강지혁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하며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어야만 앞으로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먹고 예쁜 옷도 입으며 마치 공주님처럼 살 수 있다고 했다.아이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일단은 소민아가 시키는 건 뭐든 하기로 했다.아이는 공주가 되고 싶었고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지혁은 아
아마 지금의 강지혁이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의 아들인 강선율일 것이다.물론 겉으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말이다.고이준은 두 부자지간의 평소 모습을 떠올리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만약 임유진이 살아있었다면, 만약 강지혁이 그녀를 향한 감정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강지혁은 아마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표현도 하며 더 많이 사랑해줬을 것이다. 보통의 아버지들처럼 그렇게 아들과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분위기가 아니라 말이다.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고 강지혁은 임유진을 잊어버린 대가로 살 수 있게 됐으니 여러모로 다행인 결과였다.“회장님은 사모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셨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내가?”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주위에서 임유진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는 마치 책이라도 읽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히 자기 얘기인데도 전혀 다가오는 바가 없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만약 내가 정말 그 여자를 그토록 사랑했다면 이렇게도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겠지. 그런데 난 그 여자와의 모든 기억을 다 잊었어. 그렇다는 건 내 기억에 남을 만한 여자는 아니었다는 소리야.”강지혁이 차갑게 말했다.고이준은 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의 기억이 사라진 게 김재호 때문이라는 걸 그는 말할 수 없었다.기억을 잃은 것으로 그때의 감정을 다 지울 수 있게 됐는데 만약 다시 기억이라도 났다가는 강지혁이 또다시 무너질 테니까.차량이 강씨 저택에 멈춰서고 강지혁이 차 안에서 내렸다.그리고 집사는 그런 강지혁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건넸다.“소안나 아가씨와 소민아 씨가 와 계십니다.”집사가 말한 소안나가 바로 강지혁이 입양한 딸이었다. 그런데 입양이라고는 하나 생모가 살아있어 합법적인 입양절차는 밟지 못했다. 그러나 강씨 가문은 대외적으로 소안나를 입양했다고 얘기했기에 사람들은 입양절차 같은 것이 없어도 그녀가 강씨 저택에 양녀인 것을
“강지혁, 너...!”강현수가 뭐라 말하려는데 이한이 다급하게 달려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지혁아, 신경 쓰지 마. 현수 이놈이 아까 술을 좀 많이 마셔서 헛소리하는 것뿐이야.”이한은 말을 마친 후 얼른 강현수의 손을 잡으며 옆으로 잡아당겼다.하지만 그의 손에 끌려갈 강현수가 아니었다.“놔. 강지혁한테 확실하게 물어야 할 게 있으니까.”“현수야. 너 오랜만에 돌아온 거잖아. 안 그래도 너랑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데 지금 갈까? 기왕이면 다른 애들도 부르자, 어때?”이한이 필사적으로 화제를 바꾸며 강현수를 설득했다.그런데 그때 가만히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한아, 현수 놔줘. 나 때문에 일부러 왔다는데 궁금한 거 다 해결하게 하고 보내야지 않겠어?”이한은 그 말에 속으로 제발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빌며 강현수의 손을 놓아주었다.강현수는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지혁을 보며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강지혁이 맞나 싶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어쩌면 이런 느낌이 드는 게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연락 한번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강현수는 지난 5년간 일부러 더 강지혁과 만나는 것을 피했고 그에게 먼저 연락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임유진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강지혁과 만나면 더 고통스러워질 게 뻔했으니까.“유진이를 아직도 사랑해?”강현수가 물었다.“아니. 안 사랑해.”시원하고도 명쾌한 대답이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대답 들었으니 이제 만족해?”강현수는 그의 대답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강지혁의 두 눈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정말 아무런 동요도 없었으니까.정말 더 이상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강현수는 좀처럼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강지혁한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강지혁이 파티장에서 나오자 고이준이 예를 갖춰 차량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고이준은 오늘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강
이한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하지만 되도록 강지혁 앞에서 유진 씨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더 이상 유진 씨에게 별다른 마음이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들 입에서 유진 씨 이름이 나오는 걸 썩 좋아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강지혁이 정말 유진이를 잊었다고...?”강현수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그럼 뭐 이미 죽은 사람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까? 현수야, 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잖아. 물론 강지혁의 아들까지 낳은 여자는 흔하지 하지만...”이한은 강지혁의 아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는 이제 고작 5살밖에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강지혁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그런지 머리는 지나치게 똑똑하고 또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냉랭한 구석이 있었다.실제로 이한은 강지혁의 아들과 한번 만났다가 뼈도 못 추리고 벙찐 얼굴로 5살짜리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만 했다.그리고 그날 그는 그 꼬맹이가 제 아들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아들이 있었으면 아마 평생을 아들에게 잔뜩 눌린 채로 살았을 테니까.강지혁의 아들을 제압할 수 있는 건 강지혁뿐이었다.강현수는 이한의 말에 표정이 점점 급격히 어두워졌다.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라고?그 여자 때문에 강지혁은 하마터면 미친놈이 될 뻔했는데 그렇게도 사랑했던 여자를 고작 5년도 안 돼서 잊어버렸다고?강현수는 와인을 한입에 마셔버리더니 이내 잔을 내려놓고 강지혁 쪽으로 걸어갔다.“야, 현수야!”이한이 뒤에서 강현수를 불렀다.‘저 녀석 설마 지혁이 앞에서 유진 씨 얘기를 꺼낼 생각인가? 설마... 저 녀석이야말로 아직도 유진 씨를 잊지 못한 거 아니야?!’이한은 즐거운 파티장에서 임유진 때문에 두 사람이 괜한 소란이 일으킬까 봐 얼른 강현수의 뒤를 따라갔다.실제로 두 사람은 임유진 때문에 하마터면 치고받고 싸울 뻔하기도 했으니까.강현수가 강지혁의 앞에 멈춰 서자 강지혁과 얘기를 나누던 남자가 얼
강지혁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또 이렇게 마치 임유진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울분과 속상함을 잔뜩 털어놓았다.그런 그를 보며 강현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을 결국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 뒤로 강현수는 해외 시장을 넓히는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며 S 시를 떠났다. 사실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는 일이었지만 그는 당시 S 시에 있는 게 숨이 막히고 또 너무 고통스러워 자신이 직접 가기로 했다.하지만 해외로 가서도 그는 여전히 임유진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다. 그는 당시 질투 때문에 그녀를 모른 척했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지속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 만약 그때 차에서 내려 그녀의 사정을 들어줬으면 그녀가 강지혁과 결혼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그리고 차라리 그때 임유진이 아무리 원치 않아도, 아무리 강지혁을 사랑한다며 버텨도 억지로라도 그녀를 데리고 갔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렇게 했으면 임유진은 꽤 오랜 시간 그를 미워했을 테지만 적어도 이 세상과 완전히 작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강현수가 시선을 내리며 조금 어두운 얼굴로 과거를 회상하던 그때 익숙한 누군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강현수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 남자는 다름 아닌 그와 강지혁의 오랜 친구인 이한이었다.이한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언제 돌아온 거야?”“며칠 전에.”강현수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답했다.“돌아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해줬어야지. 오늘 파티에 참석 안 했으면 너 왔는지도 몰랐을 거 아니야.”이한이 불만인 듯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이제 알았잖아.”강현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강지혁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딸을 하나 입양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그리고 그 딸의 친모랑 꽤 사이가 가깝다지?”강현수는 줄곧 해외에만 있었지만 강지혁의 소식은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그래서 강지혁이 2년 전에 웬 여자아이를 한 명 입양하고 그 아이의 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