임유진은 강지혁과 관계를 끊기를 간절히 바랐던 것이 아닌가? 지혁의 존재가 한때 유진에게 악몽과도 같았다. 하지만 방금…… 유진은 지혁이 구하러 오기를 바랐다!“왜 여기 있었던 거예요?”갑자기 차 안에 강현수의 목소리가 울렸다.“외할머니가 아프셔서 병문안을 왔어요.”유진이 말했다. 어차피 유진이 말하지 않아도 현수는 조금만 조사해도 알아낼 수 있다.“할머니가 이 마을에 살아요?”현수가 물었다.“네.”“그럼 유진 씨도…… 여기에서 살았어요?”현수의 목소리는 머뭇거리는 듯했다.“어렸을 때 이곳에서 잠시 살았지만, 나중에는 S시로 돌아갔어요.”유진이 말했다.“그래요? 그럼 유진 씨가 여기 살았을 때 특별한 일이 있었어요?”현수는 질문을 하면서 운전대를 잡은 손가락에 힘을 주었다.“현수 씨가 말한 특별한 일이 뭘 얘기하는지 모르겠네요.”유진이 대답했다.“게다가 제가 여기에 살았을 때는 나이가 어려서 정말 특별한 일이 있었더라도 아마 기억하지 못할 거예요.”현수는 침묵하며 더 이상 말을 하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차가 식당 입구에 도착하자 차가 멈추었다.유진이 그 식당을 보자 그 마을에서 유명한 아주 작은 식당이었다. 보통 현지인들만 그곳을 찾았고 외지인들은 그곳을 아예 몰랐다.그리고 그 마을은 관광지가 아니다. 자연히 관광업이 발달한 곳처럼 외지인이 특별히 찾는 식당이 아니다.유진도 어렸을 때 이곳에 여러 해 머물렀기에 알게 되었다. 이 작은 가게는 문을 연 지도 아주 오래되었다. 그 당시 유진이 외갓집에 살았을 때도 이 식당이 있었다. 외할머니가 가끔 유진을 데리고 이곳에 와서 한 끼 먹었다.유진은 다소 의외였다. 현수가 이곳을 알고 있을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여기는 음식이 괜찮은데, 환경이 좀 누추해요.”차에서 내린 후 현수가 무심코 다시 말했다.“유진 씨도 이곳에서 잠시 살았다고 했잖아요. 이 식당에서 먹어 본 적 있어요?”“먹어봤어요.”유진이 말했다.“여기 음식 좋아해요?”현수가 물었다.“괜찮았어요.
“그렇군요.”임유진은 대답을 하면서 강현수가 일부러 자신에게 들려주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강현수는 칠흑 같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저는 그 병원에서 한 사람과 헤어졌어요. 그 사람이 나한테 이 식당 음식을 좋아한다고 말해 저는 매년 그녀와 헤어지던 날만 되면 여기에 와서 밥을 먹어요.”“그럼 그 사람은 현수 씨에게 아주 중요한 사람이겠네요.”현수의 말투를 들으니 아주 그리워하는 것 같았다.“맞아요, 중요해요. 나한텐 그녀는 목숨처럼 중요해요.”현수는 아주 자연스러운 일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하게 말했다.하지만 유진은 깜짝 놀랐다.현수가 헤어진 사람을 이토록 신경 쓸까? 현수는 여자친구를 자주 바꾸고 헤어질 때면 조금의 미련도 남기지 않기에 감정 면에서 아주 무관심한 사람 같았다.현수의 마음속에서 감정은 아주 잔잔한 물결처럼 흘러가고 흘러간 뒤에는 흔적도 찾을 수 없는 것 같았다.하지만 지금 현수는 헤어진 그녀가 자신의 목숨처럼 중요하다고 한다. 만약 기자들이 그 말을 들었으면 어떻게 생각할까.“그렇게 중요하면 왜 찾지 않았어요?”유진이 물었다.그러자 현수는 싱긋 웃으며 유진의 반응을 관찰하는 것처럼 유진을 바라보았다.“찾았어요. 당연히 찾았죠. 하지만 그 시대에는 병원과 이 작은 마을에 CCTV가 설치되지 않았고 게다가 저는 며칠이 지나서야 그녀를 찾기 시작해 결국 찾을 수 없었어요.”현수의 말투에는 아쉬움이 있다. 몇 년 동안 현수는 줄곧 찾고 있지만 시간이 지나 점점 가능성이 희박해졌다.심지어 현수는 가끔 영원히 그녀를 찾을 수 없는 것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했다.“그럼 빨리 그 사람을 찾았으면 좋겠어요.”유진이 말했다.“맞아요. 저도 빨리 찾았으면 좋겠어요.”그때 그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그럼 유진 씨는 그때 이 마을에서 특별한 경험을 한 적 있어요? 예를 들면…… 사람을 구한 적 있다든지, 누구에게 이 식당의 음식이 맛있다고 했던지.”유진이 피식 웃었다.“저는 그때 아마 많은 사람에게 이 식당의 요리
그 당시 강현수가 이 작은 마을에서 그 사람을 만났기 때문이다.다만 지금 이렇게 물어보니 오히려 현수가 생각이 많았던 것 같다.“아니에요.”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 임유진은 그 사람이 아니다.뭐가 아니라는 걸까?유진은 조금 당황스러웠다.그때 가게 주인이 음식을 올리자 현수가 말했다.“드세요. 술 먹을래요?”유진은 강지혁 앞에서 취했던 생각이 떠올라 얼른 고개를 저었다.“아니에요, 난 음료수를 마시면 돼요.”하여 현수는 사장에게 음료수 두 병을 가져오라고 했다.“현수 씨도 술 안 마셔요?”유진은 눈썹을 치켜세웠다.“이따가 운전해야 하니 안 마실래요.”현수가 말했다.그때 갑자기 유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유진이 판결받을 때 음주운전이었지만 유진은 술을 전혀 마시지 않았다!“참, 유진 씨도 음주운전 때문에 사고가 났죠.”갑자기 현수의 목소리가 울렸다.“그래서 환경미화원이라는 일을 찾은 거예요?”“적어도 일할 수는 있잖아요.”유진이 씁쓸하게 말했다.“제가 환경위생과에 얘기해서 좀 편한 자리로 조정해 줄까요?”“아니에요.”유진은 곧바로 거절했다. 현수의 호의를 쉽게 받을 수가 없다.현수는 미간을 찌푸렸다. 처음으로 자신이 주는 걸 거절하는 사람이다. 만약 유진의 얼굴이 기억 속의 사람과 닮지 않았다면 주동적으로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유진은 고개를 숙이고 그릇에 있는 음식을 먹고 있다. 고개를 숙이고 있어도 현수가 가끔씩 자신을 보고 있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마치 무엇을 연구하고 있는 것 같았다.마침내 식사가 끝나자 현수가 말문을 열었다.“내가 데려다줄게요.”“아니에요, 버스 타고 가면 돼요.”유진이 말했다.“이 시간에 버스 정류장에 가더라도 S시로 가는 버스를 탈 수 있을 거 같아요?”유진은 시간을 보니 이미 8시 반이었다. 설령 유진이 지금 택시를 타고 달려간다 하더라도 마지막 버스를 놓칠 것이다.그리고 기차는 내일 아침이 되어야 있다.“내가 데려다줄게요.”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싫으면 스
최근 며칠, 임유진은 낮에는 일을 해야 하고, 밤에는 장갑을 짜는 것을 연구하느라 바빠 매일 자는 시간이 매우 적다. 그리고 오늘 이른 아침부터 버스를 타고 왔고 하루 종일 바쁘게 움직였다.그래서 얼마 지나지 않아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잠이 들었다.강현수는 유진이 잠든 것을 힐끗 보고 음악 소리를 줄였다.유진이 잠들자 오히려 기억 속의 그녀와 더 닮은 것 같았다. 사실 유진이 눈을 뜨고 있을 때도 닮았다. 다만 눈을 뜨고 있을 때는 산전수전 다 겪은 것 같은 느낌이 있어 기억 속의 그녀와 조금 차이가 있었다.그 사람의 눈빛은 맑고 투명하여 마치 끝없는 희망으로 가득 찬 것 같았다.유진이 깨어나자 차는 이미 유진의 월세방 앞에 세워졌다.유진은 갑자기 난감한 표정으로 서둘러 안전벨트를 풀었다.“제가 얼마나 잤어요?“괜찮아요. 얼마 되지 않았어요.”현수가 말했다.유진은 서둘러 차에서 내린 다음 자신의 좌석 옆에 놓은 가방을 들려고 했다. 하지만 실수로 가방 안의 물건이 모두 차 안에 쏟아졌다.유진은 땀을 뻘뻘 흘리며 얼른 가방에서 쏟아진 물건을 주웠다.갑자기 한 손이 유진보다 빠르게 유진이 짠 장갑을 집어 들었다.“장갑을 만들고 있어요?”현수는 의외라는 듯한 표정으로 말했다.“네 심심해서 만드는 거예요.”유진은 아무렇게나 핑계를 대고 재빨리 그 장갑을 가져오고 한마디 했다. “고마워요.”그러고는 차문을 닫고 황급히 집으로 들어갔다.현수는 창문을 통해 점차 사라지는 모습을 바라보았다.방금 그 장갑, 크기를 보니 남자의 손 크기 같은데, 설마 유진은 남자에게 선물하려고 짜는 것일까?한 여자가 한 남자를 위해 뜨개질을 한다. 가족이 아니라면 한 가지 가능성밖에 없다.그러나 그 털실은 낡은 털실이어서 유진이 도대체 누구를 위해 짜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현수는 다시 시동을 걸고 동네를 떠났다…….…….유진은 집으로 돌아와 휴대전화를 꺼내 자신의 계좌에 있는 돈을 살펴봤다.지금의 유진은 출소 후 지금까지 백만 원밖에
그리고 너의 의미를 부르는 것이 들렸다.“만약 우리…… 또 잡히면 어떡하지?”남자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바보야, 내가 있는데 어떻게 도망가지 못하겠어? 내가 반드시 너를 데리고 도망갈 거야!”“나를 버리면 너는 반드시 도망갈 수 있을 거야.”“난 절대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내가 너를 보호할 거라고 말했으니 너를 보호할 거야! 난 나쁜 사람들이 두렵지 않아!”“넌 왜 날 버리지 않는 거야?”“우리는 친구니까!”“악!”임유진이 눈을 번쩍 뜨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희미한 조명이 보였다.여기는 유진의 월세방이다!유진은 한숨을 내쉬고 시간을 보니 이제 새벽 3시였다.유진이 꿈을 꿨다? 꿈에서 어렸을 때 자신이 한 남자아이와 대화하는 것 같았고 게다가 자신이 너의 의미를 불렀다.맙소사, 자신이 어떻게 이런 꿈을 꾼 것일까? 설마 오늘 강현수의 차에서 너의 의미를 너무 많이 들어 자신이 노래하는 꿈을 꾸었단 말인가?하지만…… 꿈속 상황이 마치 정말 일어났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리고 그 시각 강씨 저택에 있는 방 하나에 불이 켜져 있었다. 현수는 의자에 앉아 그 그림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그림에는 한 소녀가 한 남자아이를 업고 가시나무 숲을 걷고 있다.현수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그 소녀의 얼굴을 스치며 속삭였다.“도대체 난 언제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중얼거리는 소리는 그리워하는 것 같고, 아쉬워하는 것 같고, 실망한 것 같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인 것 같았다.어떤 사람, 어떤 일은 시간으로 인해 잊히지 않고, 오히려 시간에 따라 더욱 선명해져 결국 일종의 집념이 된다.…….이틀이 지나자 큰삼촌이 유진에게 전화를 걸어 4분의 1의 병원비를 지급하라고 재촉했다. 유진은 고민을 하다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영아, 150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 급히 쓸 곳이 있어. 바로 갚을 수는 없고 매달 조금씩 갚을게.”유진은 지영에게 신세 지기 싫어 난감해하며 말했다.지영은 유진을 너무 많이 도와줬지만 유진은 보답할 방
서미옥이 말한 아르바이트는 엑스트라이다. 이름과 전화번호만 남기면 되고 유진의 이력을 볼 필요도 없다.일당이 2만 원이고 점심 한 끼를 제공한다. 만약 촬영 시간을 연장해야 하면 저녁밥을 주지만 연장 비용은 없다.미옥의 말에 의하면 어차피 휴일이 비니 엑스트라를 해 돈을 벌면 된다. 그리고 일당은 그날 바로 지급한다.한 달 내내 쉬는 날마다 일이 있다면 대충 계산해도 몇 십만 원은 될 것이다.몇 십만 원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유진에게는 아주 짭짤한 수입이다.퇴근할 때 유진은 이미 완성된 장갑을 보고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장갑을 다 만들었어. 내가 가져다줄까, 아니면 네가 사람을 보낼래?”“내가 찾으러 가면 돼.”지혁이 대답했다.“그래.”유진은 대답하고 월세방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 장갑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이전에 지영이 유진에게 준 교통사고에 관한 서류의 복사본을 꺼냈다. 그 안에는 당시 증인의 진술서와 각종 물증의 사진 복사본이 있었다.그 내용을 보자 유진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물증에는 유진이 당시 술을 마셨던 술병과 술잔, 그리고 술잔에 유진의 DNA까지 있었다.정말 어이가 없다. 유진이 마시지 않은 술잔에 유진의 DNA가 검출되었지만, 유진은 이 증거를 뒤집을 방법이 없었다.유진은 도대체 누가 본인을 이렇게 해치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진애령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면서 유진을 해치려고 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진애령을 해치려는 사람이 엉뚱한 곳에 죄를 덮어쓴 것일까?아무튼 3년이 지났다. 유진은 감옥에서 도대체 누가 본인과 이렇게 깊은 원한을 가졌는지 수없이 생각했지만 결국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리고 진애령과 원한이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당연히 찾아낼 수 없다!바로 이때 유진의 핸드폰에 공지가 올라왔다.바로 오늘 추가한 엑스트라 단톡방이었다. 담당자가 다음 촬영 시간, 장소, 지점 그리고 필요 인원과 요구 등을 통지하고 있다.유진이 시간을 보자 마침 유진의 휴
“왔어?”임유진은 덤덤하게 말문을 열고는 강지혁이 들어오기 편하게 자리를 비켰다.“누나, 오래 기다렸지.”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그는 테이블에 널려있는 미처 미처 정리하지 못한 사건 서류를 보았다.지혁은 아무렇지 않게 그 중의 자료를 들고 몇 번 훑어보았다.“왜 누나는 또 그때 사건을 보고 있는 거야?”유진의 몸이 굳었다. 예전에도 유진은 지혁에게 그 사건을 말한 적 있다. 하지만 그때 유진은 지혁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 사건에 대해 말하자니 오히려 난감하고 어색했다.유진이 아무리 무죄라고 생각하더라도 그 교통사고는 실제로 발생한 일이고,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은 지혁의 약혼녀이다!“누나, 왜 그래요?”유진이 꾸물거리며 대답하지 않자 지혁이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그냥…… 심심해서 보는 거야.”유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참, 누나는 전에도 억울하다고 말했잖아. 지금 이 자료들을 다시 보는 게 판결을 뒤집기 위한 거야?”지혁은 잡담처럼 말했지만 기이한 눈빛을 비쳤다.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판결을 뒤집다, 유진은 당연히 뒤집고 싶다! 하지만 그때의 증인을 찾을 수 없고 그 물증들은 절대 번복할 수 없이 뚜렷했다.유진이 감옥에 갇힌 3년 동안 지영은 판결을 뒤집기 위해 수많은 돈과 시간, 정력을 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하여 유진이 출소한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수중에 돈이 없고 200만 원도 안 되는 병원비조차도 친구에게 빌려야 한다.유진은 변호사를 한 적이 있으니 판결을 뒤집으려면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고 재수사하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 알 수 있다.확실한 유력한 새로운 증거가 없기 전에 경찰은 경찰력을 낭비하여 재수사할 수 없다. 하여 모든 조사는 자신이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진은 이런 경제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문득 유진은 지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럼 너는? 너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싶지 않아? 너의 약혼녀가 왜 운전을 하고 내 차를 박았는지 알아내고 싶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해?”강지혁이 반문했다.“어차피 이번 생에 여자와 결혼해야 해. 그럼 조금 늦거나 조금 빠른 게 차이가 있어? 진애령은 조용하고 말을 잘 들어. 진씨 가문과의 혼인은 강씨 가문의 사업에도 도움이 돼. 왜 마다하겠어?”지혁은 비즈니스 계약을 말하는 것처럼 아주 덤덤하게 말해 임유진은 조금 소름이 돋았다.이 남자에게는 사랑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결혼조차도 사업인 것 같았다.이런 사람에게 도대체 무엇이 중요할까?“하지만 지금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지혁은 유진을 빤히 쳐다보며 입가에 웃음기가 돌았다.유진은 어색하여 시선을 피했다. 마치 유진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유진은 자신에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지혁과 유진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고 여태껏 같은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장갑만 주면 이제는 더 이상 마주칠 기회가 없을 것이다.“장갑 받아.”유진은 다급히 장갑을 가지러 가려고 했다.“급하지 않아.”지혁은 유진의 팔을 잡아당기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유진과 눈을 마주쳤다.“누나는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누나는 판결을 뒤집고 싶어?”뒤집고 싶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판결을 뒤집지 않으면 유진은 평생 그 죄명을 짊어지고 고개를 들 수조차 없다.하지만…….“뒤집고 싶다고 한들 어떻게 할 수 있겠어?”유진이 되물었다.“만약 누나가 정말 판결을 뒤집고 싶다면, 내가 도울 수 있어.”지혁이 말했다.그러자 유진은 깜짝 놀랐다.“너는 내가 그 당시에 음주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걸 믿어?”“누나가 음주운전을 했든 안 했든 나한테는 상관없어.”지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단지 누나가 음주운전을 했다는 죄명을 벗기는 것에 불과해. 그 점을 뒤집으려면 내가 가장 좋은 변호사를 선임해 당시 사건의 허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 그러면 사건을 뒤집을 수 있을 거야.”유진의 반짝이던 눈빛은 순간 암울함으로 대체되었다. 유진은 지혁의 뜻을 이해했다.
“유진 씨? 유진 씨가 여기는 어떻게 왔어요?”탁유미가 깜짝 놀라며 임유진에게 물었다.“이경빈 씨 전화를 받고 왔어요.”임유진은 탁유미의 곁으로 다가가며 말했다.“언니, 수술해요. 지금이 마지막 기회예요. 이 기회를 포기하면 그때는 정말 돌이킬 수 없어져요.”“유진 씨!”탁유미는 갑작스러운 임유진의 말에 당황해하며 그녀의 이름을 크게 불렀다. 그러고는 서둘러 윤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은 윤이가 바로 그녀의 마음을 돌릴 수 있는 마지막 희망이라는 것을 알기에 태연한 표정이었다.“언니가 남은 시간을 편히 보내고 싶은 건 알겠어요. 그리고 수술 결과가 안 좋으면 그 남은 시간마저 사라지게 될까 봐 두려워하는 것도 알겠고요. 하지만 언니... 만약 수술에 성공하면 그때는 윤이가 어른이 되는 모습까지 볼 수 있어요.”임유진은 말을 하며 자신의 복부를 쓰다듬었다.“언니, 만약 그때 내가 배 속의 아이를 한 명 지우는 걸 택했으면 어쩌면 아이들이나 나나 조금 더 안전했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그랬으면 결코 지금 같은 행복감은 느끼지 못했을 거예요. 나는 그때 의사 선생님들의 권고에도, 혁이의 반대에도 결국 아이를 포기하지 않았어요. 아이들과 함께 이겨내고 싶었어요. 그러니까 언니도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으면 좋겠어요. 쉽게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윤이도 언니가 그러기를 바랄 거예요. 세상에 엄마를 일찍 보내고 싶어 하는 자식은 없으니까요. 윤이를 위해서라도 포기하지 말아줘요.”탁유미는 그 말에 몸을 움찔하더니 시선을 돌려 어리둥절한 표정의 아들을 바라보았다.윤이는 임유진의 말을 다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본능적으로 알아들었다.“엄마, 윤이는 엄마가 아무 데도 가지 말고 윤이랑 함께 있었으면 좋겠어요. 이제 윤이가 키도 크고 힘도 세지면 그때는 윤이가 엄마를 지켜줄게요!”탁유미는 그 말에 결국 눈물을 보였다.윤이는 서둘러 침대 위로 올라가더니 앙증맞은 손으로 하염없이 흐르는 그녀의 눈물을 부드럽게 닦아주었다.그때 병실
임유진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얼른 답했다.“알겠어요. 지금 당장 병원으로 갈게요!”“임유진 씨...”전화를 끊으려던 그때 기어들어 갈 듯한 이경빈의 목소리가 들려왔다.“내가 웬만하면 이런 부탁을 하지 않는데 지금은 임유진 씨 말고는 부탁할 사람이 없어서 이렇게 부탁 좀 할게요. 제발... 제발 유미 좀 설득해주세요. 유미가 내 간을 받고 수술할 수 있게 제발 도와주세요...”임유진은 그의 간절한 부탁에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그간 자주는 아니지만 그래도 이경빈과는 몇 번 만난 적이 있다. 그래서 그가 얼마나 자존심이 강한 남자인지 임유진은 아주 잘 알고 있다.그런데 그런 남자가 지금 탁유미의 목숨 때문에 제발이라는 말까지 하며 그녀에게 간절히 부탁하고 있다.만약 이대로 탁유미가 죽게 되면 이경빈은 어쩌면 평생 지옥 속에서 살지도 모른다.“알겠어요.”“무슨 일이야?”전화를 끊자마자 옆에 있던 강지혁이 물었다.“유미 언니 지금 병원에 있대. 지금 바로 간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언니가 위험하대.”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외투를 챙겼다.“언니가 수술받을 수 있게 설득하러 가야겠어.”“같이 가.”“너는 아직 처리해야 할 일이...”“저녁에 다시 하면 돼. 너 혼자 보내는 게 걱정돼서 그래.”“내가 왜 혼자야. 네가 붙여둔 경호원분들이 있는데. 걱정하지 마.”“그래도 걱정돼.”강지혁이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솔직히 그는 마음 같아서는 외딴 섬을 하나 사들여 임유진을 그 섬에 데리고 가 자신의 시야 안에서만 있게 하고 싶었다.임유진은 그의 고집스러운 말에 결국 알겠다며 같이 밖으로 향했다.병원.탁유미가 있는 병실 앞으로 뛰어와 보니 문밖 의자에 앉아 고개를 푹 숙인 채 머리를 꽉 쥐고 있는 이경빈의 모습이 보였다.“언니는 어떻게 됐어요?”임유진이 다가와 물었다.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번쩍 들고 임유진을 쳐다보았다.임유진은 이경빈과 눈이 마주친 순간 몸이 움찔했다.이경빈이 지독하게 고통스러운 표정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이경빈은 더 이상 시간을 지체할 수 없어 그대로 탁유미를 안아 들고 윤이에게 말했다.“지금 당장 엄마 데리고 병원으로 갈 거야. 윤이도 엄마 아픈 거 싫지?”윤이는 그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이경빈을 따라 차량 쪽으로 달려갔다.차 문이 열린 후 이경빈은 탁유미를 조수석에 내려놓았고 윤이는 아무 말 없이 서둘러 뒷좌석에 올라탔다.아이는 시트에 편히 등을 기대는 것이 아닌 몸을 앞으로 하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탁유미를 바라보며 말했다.“엄마, 조금만 참아요. 병원에 가면 의사 선생님들이 엄마 구해줄 거예요. 그러면 하나도 안 아플 거예요!”탁유미는 그 말에 남은 힘을 끌어다 애써 웃어 보였다. 아들의 걱정 가득한 얼굴을 보고 싶지 않았다.“엄마는 괜찮아... 조금만 있으면 금방 괜찮아져.”모자의 대화에 이경빈은 가슴이 미어져 서둘러 시동을 걸고 병원으로 향했다.가는 길 그는 혹여 아픈 소리를 내면 윤이가 걱정할까 봐 이를 꽉 깨물고 참는 그녀를 보며 문득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그날 탁유미는 그와 나란히 걷던 도중 울퉁불퉁한 바닥에 그만 넘어지고 말았다. 분명히 아플 텐데도 그녀는 괜찮다며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서더니 아무렇지도 않은 척 다시 걸었다.그러다 날이 어두워지고 집에 거의 도착할 때쯤 그녀의 발걸음은 티가 나게 느려졌고 이에 이상함은 여긴 이경빈은 그녀의 발을 힐끔 봤다가 그제야 퍼렇게 멍든 그녀의 발목을 발견했다.“바보야? 왜 아프다고 말을 안 해?”이경빈의 추궁에 탁유미는 그의 눈빛을 피하며 우물쭈물 답했다.“아프다 그러면 또 걱정할 거잖아. 그리고 솔직히 이 정도는 집에 가서 약 바르면 금방 나아.”탁유미는 늘 이랬다. 늘 이렇게 자기보다는 옆에 사람을 더 위하며 자기가 받는 고통은 아무렇지 않은 것으로 치부해버렸다.그녀는 그런 여자였다.이경빈은 차량이 빨간 불에 멈출 틈을 타 티슈를 꺼내 탁유미의 땀을 닦아주었다.많이 아픈 건지 그녀의 얼굴은 어느새 땀 범벅이 되었고 고통을 참느라 이빨에게 혹사당한 입술은 빨갛
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에 별다른 감흥이 없는 듯 평온한 얼굴로 물었다.“할 말은 그게 끝이야? 그럼 비켜. 이만 집으로 가야 하니까.”“내 얼굴 보고 싶지 않다는 거 알아. 그래서 나도... 최대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으려고 했어. 하지만 나를 거부하지는 말아줘. 아니, 최소한 내 간만은 거부하지 말아줘. 너 계속 이대로 수술하지 않으면 그때는 정말...”“입 다물어!”탁유미는 이경빈의 말을 자르며 잔뜩 긴장한 얼굴로 윤이를 바라보았다.그녀는 자신이 아프다는 걸 윤이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평소 약을 먹을 때도 일부러 윤이가 없을 때를 봐가면서 먹었다.이제 남은 시간도 얼마 없는데 그 시간 동안 윤이의 걱정스러운 눈빛만 보는 건 사양이었다. 이경빈은 탁유미의 표정에 그제야 이 일은 아직 윤이에게는 비밀이라는 것을 깨달았다.“엄마 아파요? 수술해야 해요?”윤이가 눈을 깜빡이며 물었다.“아니, 엄마 너무 건강한데? 아빠가 뭘 잘못 알고 있는 거야.”타이밍도 참 얄궂게 이 말이 내뱉어진 다음 순간 탁유미는 또다시 간이 아파 나기 시작했다.탁유미는 고통을 참으며 다시 윤이 손을 잡았다.‘빨리 집으로 가서 약을 먹어야 해.’“자, 빨리 가자.”탁유미는 애써 고통을 참으며 발걸음을 옮겼다.하지만 그때 이경빈의 큰손이 다가와 그녀의 팔을 덥석 잡았다.“너 지금 또 아픈 거지?”다급한 그의 질문에 탁유미는 미간을 찌푸리며 그를 노려보았다.“이거 놔.”“대답해. 너 지금 또 진통 시작된 거지?!”이경빈은 그녀의 진통이 빈번하게 일어날수록 그녀의 몸이 점점 더 유약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다.“안 되겠다. 지금 당장 나랑 병원 가자!”“이경빈, 쓸데없는 짓 하지 마! 병원은 무슨, 나는...”탁유미는 이경빈에게 쏘아붙이려다가 진통이 심해져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윤이는 이경빈이 탁유미의 팔을 우악스럽게 잡는 것을 보며 지난번 이경빈이 자신을 떼어내고 탁유미를 억지로 데려간 것이 생각났다.그 일이 있고 난 뒤 다시 만난 탁
만약 이경빈이 정말 탁유미 모자를 위해 뭔가를 하게 되면 여자의 집안은 아마 뭘 할 수 없이 무너지고 말 것이다. 남편이 제아무리 대기업 과장이라고 해도 이경빈과 비교하면 하늘과 땅 차이일 테니까.원래는 다른 학부모들의 시선을 끌어 탁유미가 스스로 아이의 유치원을 옮기게 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이경빈이 등장한 지금 그 시선에 난감해진 건 오히려 자기 자신이었다.여자는 창피하기도 하고 또 이가 갈리기도 했지만 어쩔 수 없이 사과의 말을 건넸다.“죄, 죄송해요. 아까는 말 헛나온 거예요.”“사과는 내가 아닌 내 아들한테 해야지. 그리고...”이경빈은 잠시 멈칫하다가 다시 말을 이었다.“그리고 아이 엄마한테도.”그는 자신과 탁유미 사이를 뭐라고 얘기하면 좋을지 몰랐다.여자는 그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지만 지금은 빨리 이 자리를 벗어나는 게 현명하다고 판단해 얼른 탁유미와 윤이에게도 사과를 했다.“미안해요. 내가 그런 말을 해서는 안 됐었는데... 아줌마가 미안해. 다시는 그런 말 안 할 테니까 용서해줘.”여자는 말을 마친 후 아들의 손을 잡고 빠르게 뛰어갔다.탁유미는 고개를 숙여 윤이에게 말했다.“이제 가자. 할머니가 집에서 기다리겠다.”“엄마, 사생아가 뭐예요?”그때 윤이가 갑자기 이런 질문을 했다.이에 탁유미는 몸이 뻣뻣하게 굳어버렸고 옆에 있던 이경빈도 고통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뭐라 대답하기 전에 앞으로 한발 다가가 자신이 대답했다.“윤아, 미안해. 다 아빠 잘못이야. 넌 절대 사생아가 아니야. 아빠의 유일한 아들이야.”윤이는 그의 대답에 조그마한 입술을 깨물며 그를 노려보았다.지난번 이경빈이 했던 말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자신을 적대시하는 아들의 태도에 이경빈은 저도 모르게 또 한 걸음 앞으로 다가갔다.“윤아...”“엄마, 우리 이만 집으로 가요.”윤이는 고개를 홱 돌리며 이경빈의 시선을 피했다.윤이의 존재를 부정했던 말과 탁유미에게 상처를 줬던 말을 그렇게도
“그건 그쪽 마음대로 결정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닙니다.”탁유미는 말을 마친 후 이곳에서 벗어나려는 듯 윤이의 손을 꽉 잡았다.여기서 더 언쟁을 높이게 되면 일이 더 커질 뿐만이 아니라 윤이도 겁을 먹을 테니까.그런데 그때 여자가 갑자기 언성을 높였다.“나는 내 아들을 형을 살고 나온 전과자의 자식과 같은 유치원을 다니게 하고 싶지 않아. 범죄를 저지른 부모 아래에서 얼마나 정상적인 아이가 나오겠어? 범죄도 유전이야!”그녀의 목적은 아주 간단했다. 주변 학부모들의 이목을 이쪽으로 집중시켜 탁유미를 곤란하게 하려는 것이었다.탁유미는 가려던 발걸음을 멈추고 고개를 돌려 분노 어린 눈빛으로 여자를 노려보았다.“말 가려서 해. 나이를 그만큼 먹었으면 어른답게 행동해야지. 아이들 앞에서 이게 지금 무슨 짓이야? 그리고 우리 윤이는 당신이 멋대로 판단해도 될 애가 아니야. 당장 내 아들한테 사과해!”여자는 탁유미의 기세에 눌려 흠칫하더니 이내 다시 정신을 차리고 소리를 질렀다.“사과하라고? 당신 아들한테? 내가 왜? 뭐, 사과하지 않으면 이번에는 나를 밀어버리게? 또 콩밥 먹게 해줘?!”탁유미는 그녀의 말에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 눈앞에 있는 여자는 정말 그녀의 아픈 구석을 칼로 난도질하듯 후벼팠다.탁유미는 손을 부들부들 떨더니 어차피 이렇게 된 이상 제대로 대응하지 않으면 윤이에게 평생의 트라우마로 남을 것 같아 마음을 다잡고 여자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사과하지 않으면 당신 고소할 거야.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지 상관없어. 당신이 우리 애한테 사과할 때까지 나는 끝까지 갈 테니까!”갈 땐 가더라도 윤이가 앞으로 괴롭힘당하지 않게는 해줘야만 한다.엄마로서 좋은 건 못 해줘도 이것만큼은 해줘야 한다.“고소? 하하하! 감방살이하고 나온 주제에 어디서 고소를 들먹여?”하지만 여자는 가소롭게 웃으며 탁유미의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았다.그때 뒤에서 웬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지금 당장 사과하지 않으면 내일 바로 소장 받게 될 거야. 그리고
탁유미는 깨끗이 청소를 마친 후 슬슬 윤이를 데리러 갈 시간이 되자 김수영에게 얘기한 후 곧바로 집을 나섰다.탁유미가 밖으로 나온 순간, 멀지 않은 곳에 정차된 차량이 그녀의 움직임을 따라 몰래 따라붙기 시작했다.이경빈은 잔뜩 마른 탁유미의 뒷모습을 보며 가슴이 욱신거려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탁유미는 그가 눈앞에 나타나는 걸 좋아하지 않기에 이경빈은 이런 식으로밖에 그녀를 지켜볼 수 없었다.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어떻게 하면 그녀가 간을 받아들일 수 있을지 그 방법을 알지 못했다.“유미 언니는 이미 마음을 굳힌 것 같아요. 아마 당분간은 그 결정을 돌리는 게 쉽지 않겠죠. 하지만 사람 일은 어떻게 될지 모르니까 언제든지 언니한테 간을 기증할 수 있게 준비해줘요. 이경빈 씨가 언니를 정말 사랑하는 거라면요.”며칠 전 임유진이 건넨 이 말에 이경빈은 바로 술을 끊었고 간을 최상의 상태로 유지하기 위해 엄격하게 식단관리도 하고 몸 관리도 했다.이경빈은 탁유미가 유치원 앞에 멈춰서자 이내 조금 떨어진 곳에 차를 세웠다.유치원 앞에는 그녀 말고 다른 학부모들도 기다리고 있었다.그중에서 그녀는 유독 더 말라보였고 얼굴은 가뜩이나 작은데 병세로 인해 더 수척해 보였다.하지만 이상하게도 그녀의 옷만큼은 무척이나 단정하고 또 깔끔했다.탁유미는 아무리 아파도 윤이를 데려올 때만큼은 늘 자신의 겉모습을 신경 썼다.화려하게 치장하지는 못해도 적어도 타인이 윤이를 낮잡아 보지는 못하게 최대한 깔끔하게 자신을 꾸몄다.이경빈은 그녀의 생각을 눈치채고는 조금 웃기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쓸쓸하기도 했다.자신의 아들을 낮잡아 볼 수 있는 사람은 그 어디에도 없지만 그런 빌미를 만들어 준 사람은 결과적으로 그였으니까.만약 당시 탁유미를 감옥으로 보내지 않았으면 윤이가 감옥에서 태어나는 일도 없었을 거고 청력을 잃게 되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윤이는 누구보다 풍족한 생활을 누렸을 것이다.얼마나 지났을까, 드디어 유치원 문이 열리고 아이들이 밖으로 나오기 시작했다.학
“나는 더 이상 이경빈과 엮이고 싶지 않아요. 그리고 간이식 수술을 받는다고 해서 결과가 좋을 거라는 보장도 없고요. 알아보니 실패한 사례들이 꽤 많더라고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사실 1기나 2기 정도였으면 간이식 수술을 생각해봤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녀는 발견 당시 벌써 3기였고 몸도 하루가 다르게 나빠져 가고 있었기에 수술에 대한 큰 희망을 품을 수가 없었다.“혁이한테 부탁해서 이쪽으로 제일 유명한 교수님을 찾아올게요. 분명히 성공할 수 있을 거예요!”임유진이 다급하게 말하자 탁유미가 가볍게 웃었다.“유진 씨, 고마워요. 하지만 이제는 됐어요. 나는 나머지 몇 개월을 병상 위에서 보내고 싶지 않아요. 만약 수술하게 되면 계속 병원에만 있게 되잖아요.”“하지만...!”“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 있는 시간을 큰 의미 없는 수술에 쓰고 싶지 않아요.”탁유미의 몸은 지금 이 순간에도 빠르게 나빠지고 있다. 그리고 그 변화를 가장 잘 알고 있는 사람은 탁유미였다.그래서 그녀는 무의미한 노력을 하고 싶지 않았다.임유진은 죽음을 받아들인 것 같은 탁유미를 빤히 바라보았다.탁유미가 이토록 쉽게 포기하는 건 수술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경빈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언니한테는 윤이도 있고 아주머니도 있잖아요. 언니가 이대로 포기해버리면 두 사람은 어떡해요? 남게 될 사람도 생각해야죠.”“유진 씨, 나는 이미 마음을 정했어요. 마지막 몇 개월을 수술 하나에 의존하는 거, 나는 못 해요.”그 말에 임유진은 고개를 푹 숙였다.탁유미가 현재 어떤 마음인지 사실 이해를 할 수 없는 것도 아니었다.수술이 백 퍼센트 성공적으로 끝난다는 보장도 없고 설사 성공적으로 끝났다고 해도 재발하지 않을 거라는 보장은 그 어디에도 없으며 후유증 같은 것도 생길 수 있으니까.임유진이 떠난 후 김수영이 다가와 말했다.“유미야, 그냥 이경빈이 간을 기증한다고 할 때 받는 게 어때? 그러면 살 수 있는 희망이라도 생기잖아.”방금 임유진과 탁유미의 대화로 김수영은 일전 간
그때 강지혁이 다가와 뒤에서 임유진을 감싸며 그녀의 목에 얼굴을 묻었다.“만약 그 어느 날 내가 너한테 큰 잘못을 저질러서 방금 이경빈이 그랬던 것처럼 울어버리면 너는 어떡할 거야? 용서해줄 거야?”임유진은 그 말에 실소를 터트렸다.“무슨 소리야. 갑자기 그런 가정을 왜 해. 그리고 네가 나한테 잘못할 질을 할 리가 없잖아.”“그냥 만약에... 만약에 내가 그러면 어떡할 거야?”강지혁은 고개를 살짝 들어 입술로 그녀의 귓불을 간지럽혔다.그는 임유진을 너무나도 많이 사랑해 그녀가 너무나도 무서웠다.임유진은 그의 뜨거운 숨결과 입술 촉감이 그대로 전해져 저도 모르게 얼굴이 빨개졌다.그녀는 진지한 얘기 중에 은근히 스킨십을 해오는 그가 괘씸한데도 또 그게 너무나도 유혹적이라 괜히 심술이 나 몸을 돌리고 그를 노려보았다.“용서해줄 거야? 아니면 탁유미 씨처럼 더 이상...”강지혁은 ‘더 이상 나와 엮이고 싶어 하지 않아 할 거야?’라는 말을 하려다가 그 말을 입 밖으로 내뱉고 나면 정말 그렇게 될 것 같아 결국 입을 다물었다.이딴 사소한 것을 신경 쓸 정도로 그는 임유진과 관련된 일이면 늘 이렇게 겁쟁이가 되고 만다.임유진은 강지혁의 눈빛을 마주 보고는 저도 모르게 심장이 아련해졌다.임신하고 난 뒤 모성애가 폭발하기라도 한 건지 귀가 축 처진 강아지 같은 그의 모습을 보고 있자니 마음이 찡해 나며 당장이라도 끌어안아 주고 싶었다.“못 살아 진짜. 너 이러다 나중에 아주 조금이라도 잘못하면 바로 울겠다? 그래도 아빠가 될 사람인데 그렇게 쉽게 눈물을 보이면 안 되지.”임유진은 두 손을 들어 그의 얼굴을 매만지며 다정한 목소리로 얘기했다.“하지만 만약 네가 정말 이경빈처럼 그렇게 울어버린다면 나는 아마... 매우 속상해할 거야. 어쩌면 그때는 네가 무슨 짓을 하든 간에 다 용서해주겠다고 할지도 모르지.”강지혁은 그 말에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더니 이내 그녀의 손을 잡고 손바닥에 가벼운 입맞춤을 했다.“응, 꼭 용서해줘야 해. 약속한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