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고 너의 의미를 부르는 것이 들렸다.“만약 우리…… 또 잡히면 어떡하지?”남자아이의 목소리가 울렸다.“바보야, 내가 있는데 어떻게 도망가지 못하겠어? 내가 반드시 너를 데리고 도망갈 거야!”“나를 버리면 너는 반드시 도망갈 수 있을 거야.”“난 절대 너를 버리지 않을 거야! 내가 너를 보호할 거라고 말했으니 너를 보호할 거야! 난 나쁜 사람들이 두렵지 않아!”“넌 왜 날 버리지 않는 거야?”“우리는 친구니까!”“악!”임유진이 눈을 번쩍 뜨고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자 희미한 조명이 보였다.여기는 유진의 월세방이다!유진은 한숨을 내쉬고 시간을 보니 이제 새벽 3시였다.유진이 꿈을 꿨다? 꿈에서 어렸을 때 자신이 한 남자아이와 대화하는 것 같았고 게다가 자신이 너의 의미를 불렀다.맙소사, 자신이 어떻게 이런 꿈을 꾼 것일까? 설마 오늘 강현수의 차에서 너의 의미를 너무 많이 들어 자신이 노래하는 꿈을 꾸었단 말인가?하지만…… 꿈속 상황이 마치 정말 일어났던 것 같은 느낌이었다.그리고 그 시각 강씨 저택에 있는 방 하나에 불이 켜져 있었다. 현수는 의자에 앉아 그 그림을 조용히 보고 있었다.그림에는 한 소녀가 한 남자아이를 업고 가시나무 숲을 걷고 있다.현수는 손가락으로 천천히 그 소녀의 얼굴을 스치며 속삭였다.“도대체 난 언제 너를 다시 볼 수 있을까?”중얼거리는 소리는 그리워하는 것 같고, 아쉬워하는 것 같고, 실망한 것 같았다. 이루 말할 수 없는 고통인 것 같았다.어떤 사람, 어떤 일은 시간으로 인해 잊히지 않고, 오히려 시간에 따라 더욱 선명해져 결국 일종의 집념이 된다.…….이틀이 지나자 큰삼촌이 유진에게 전화를 걸어 4분의 1의 병원비를 지급하라고 재촉했다. 유진은 고민을 하다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지영아, 150만 원만 빌려줄 수 있어? 급히 쓸 곳이 있어. 바로 갚을 수는 없고 매달 조금씩 갚을게.”유진은 지영에게 신세 지기 싫어 난감해하며 말했다.지영은 유진을 너무 많이 도와줬지만 유진은 보답할 방
서미옥이 말한 아르바이트는 엑스트라이다. 이름과 전화번호만 남기면 되고 유진의 이력을 볼 필요도 없다.일당이 2만 원이고 점심 한 끼를 제공한다. 만약 촬영 시간을 연장해야 하면 저녁밥을 주지만 연장 비용은 없다.미옥의 말에 의하면 어차피 휴일이 비니 엑스트라를 해 돈을 벌면 된다. 그리고 일당은 그날 바로 지급한다.한 달 내내 쉬는 날마다 일이 있다면 대충 계산해도 몇 십만 원은 될 것이다.몇 십만 원은 다른 사람에게는 아무것도 아니지만 유진에게는 아주 짭짤한 수입이다.퇴근할 때 유진은 이미 완성된 장갑을 보고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장갑을 다 만들었어. 내가 가져다줄까, 아니면 네가 사람을 보낼래?”“내가 찾으러 가면 돼.”지혁이 대답했다.“그래.”유진은 대답하고 월세방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은 후 장갑을 책상 위에 내려놓고 이전에 지영이 유진에게 준 교통사고에 관한 서류의 복사본을 꺼냈다. 그 안에는 당시 증인의 진술서와 각종 물증의 사진 복사본이 있었다.그 내용을 보자 유진은 답답한 기분이 들었다. 심지어 물증에는 유진이 당시 술을 마셨던 술병과 술잔, 그리고 술잔에 유진의 DNA까지 있었다.정말 어이가 없다. 유진이 마시지 않은 술잔에 유진의 DNA가 검출되었지만, 유진은 이 증거를 뒤집을 방법이 없었다.유진은 도대체 누가 본인을 이렇게 해치려고 하는지 모른다. 그런데 진애령은 도대체 어떻게 된 것일까? 자신의 목숨까지 바치면서 유진을 해치려고 했다는 말인가? 아니면 진애령을 해치려는 사람이 엉뚱한 곳에 죄를 덮어쓴 것일까?아무튼 3년이 지났다. 유진은 감옥에서 도대체 누가 본인과 이렇게 깊은 원한을 가졌는지 수없이 생각했지만 결국 생각해 내지 못했다. 그리고 진애령과 원한이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당연히 찾아낼 수 없다!바로 이때 유진의 핸드폰에 공지가 올라왔다.바로 오늘 추가한 엑스트라 단톡방이었다. 담당자가 다음 촬영 시간, 장소, 지점 그리고 필요 인원과 요구 등을 통지하고 있다.유진이 시간을 보자 마침 유진의 휴
“왔어?”임유진은 덤덤하게 말문을 열고는 강지혁이 들어오기 편하게 자리를 비켰다.“누나, 오래 기다렸지.”지혁은 웃으며 말했다. 그는 테이블에 널려있는 미처 미처 정리하지 못한 사건 서류를 보았다.지혁은 아무렇지 않게 그 중의 자료를 들고 몇 번 훑어보았다.“왜 누나는 또 그때 사건을 보고 있는 거야?”유진의 몸이 굳었다. 예전에도 유진은 지혁에게 그 사건을 말한 적 있다. 하지만 그때 유진은 지혁의 정체를 알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다시 그 사건에 대해 말하자니 오히려 난감하고 어색했다.유진이 아무리 무죄라고 생각하더라도 그 교통사고는 실제로 발생한 일이고, 교통사고로 죽은 사람은 지혁의 약혼녀이다!“누나, 왜 그래요?”유진이 꾸물거리며 대답하지 않자 지혁이 고개를 들어 유진을 바라보았다.“그냥…… 심심해서 보는 거야.”유진은 침을 꿀꺽 삼키며 대답했다.“참, 누나는 전에도 억울하다고 말했잖아. 지금 이 자료들을 다시 보는 게 판결을 뒤집기 위한 거야?”지혁은 잡담처럼 말했지만 기이한 눈빛을 비쳤다.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 판결을 뒤집다, 유진은 당연히 뒤집고 싶다! 하지만 그때의 증인을 찾을 수 없고 그 물증들은 절대 번복할 수 없이 뚜렷했다.유진이 감옥에 갇힌 3년 동안 지영은 판결을 뒤집기 위해 수많은 돈과 시간, 정력을 썼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하여 유진이 출소한 지금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수중에 돈이 없고 200만 원도 안 되는 병원비조차도 친구에게 빌려야 한다.유진은 변호사를 한 적이 있으니 판결을 뒤집으려면 변호사를 선임해야 하고 재수사하려면 얼마의 돈이 필요한지 알 수 있다.확실한 유력한 새로운 증거가 없기 전에 경찰은 경찰력을 낭비하여 재수사할 수 없다. 하여 모든 조사는 자신이 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유진은 이런 경제력을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문득 유진은 지혁을 똑바로 바라보았다.“그럼 너는? 너는 사건의 진상을 밝히고 싶지 않아? 너의 약혼녀가 왜 운전을 하고 내 차를 박았는지 알아내고 싶지 않아?
“왜 그렇게 생각해?”강지혁이 반문했다.“어차피 이번 생에 여자와 결혼해야 해. 그럼 조금 늦거나 조금 빠른 게 차이가 있어? 진애령은 조용하고 말을 잘 들어. 진씨 가문과의 혼인은 강씨 가문의 사업에도 도움이 돼. 왜 마다하겠어?”지혁은 비즈니스 계약을 말하는 것처럼 아주 덤덤하게 말해 임유진은 조금 소름이 돋았다.이 남자에게는 사랑이 전혀 없는 것 같다. 결혼조차도 사업인 것 같았다.이런 사람에게 도대체 무엇이 중요할까?“하지만 지금은 재미있다고 생각하는 여자와 결혼하고 싶어.”지혁은 유진을 빤히 쳐다보며 입가에 웃음기가 돌았다.유진은 어색하여 시선을 피했다. 마치 유진을 가리키는 것 같았다.유진은 자신에게 쓸데없는 생각을 하지 말라고 말했다. 지혁과 유진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고 여태껏 같은 세계의 사람이 아니었다. 그리고 장갑만 주면 이제는 더 이상 마주칠 기회가 없을 것이다.“장갑 받아.”유진은 다급히 장갑을 가지러 가려고 했다.“급하지 않아.”지혁은 유진의 팔을 잡아당기고 천천히 허리를 굽혀 유진과 눈을 마주쳤다.“누나는 아직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았어. 누나는 판결을 뒤집고 싶어?”뒤집고 싶다. 어떻게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있을까? 판결을 뒤집지 않으면 유진은 평생 그 죄명을 짊어지고 고개를 들 수조차 없다.하지만…….“뒤집고 싶다고 한들 어떻게 할 수 있겠어?”유진이 되물었다.“만약 누나가 정말 판결을 뒤집고 싶다면, 내가 도울 수 있어.”지혁이 말했다.그러자 유진은 깜짝 놀랐다.“너는 내가 그 당시에 음주운전을 하지 않았다는 걸 믿어?”“누나가 음주운전을 했든 안 했든 나한테는 상관없어.”지혁이 나지막하게 말했다.“단지 누나가 음주운전을 했다는 죄명을 벗기는 것에 불과해. 그 점을 뒤집으려면 내가 가장 좋은 변호사를 선임해 당시 사건의 허점을 찾을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어. 그러면 사건을 뒤집을 수 있을 거야.”유진의 반짝이던 눈빛은 순간 암울함으로 대체되었다. 유진은 지혁의 뜻을 이해했다.
임유진은 더없이 확신했다.“나에게는 무엇보다도 중요해!”“그 일은 이미 3년이 지났어. 그 당시 CCTV가 있다고 하더라도 이미 사라진 지 오래일 거야. 판결을 뒤집는 것만 해도 어려운 일인데 진상을 찾는 건 더 말할 것도 없지.”유진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유진은 지혁의 뜻을 이해했다. 지혁은 단지 유진을 도와 사건을 뒤집는 것이다. 지혁에게 사실의 진상은 결코 중요하지 않다. 그날 진애령이 왜 자살하는 방식으로 차를 박았는지, 진애령이 도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전혀 중요하지 않다.지혁은 애령에게 아무런 감정이 없기에 애령이 죽어도 단지 혼인에 적합한 사람이 한 명 적어진 것에 불과하다.“강지혁, 넌 조금도 진애령을 사랑하지 않아.”유진은 확신에 찬 말투로 말했다.그러자 지혁은 눈을 가볍게 떴다.“난 단 한 번도 그녀를 사랑한다고 말한 적이 없어.”“그럼 넌 누구를 사랑해?”그 순간 그 답이 지혁의 머릿속에 떠올랐다.지혁은 유진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한참 뒤에야 정신을 차리고 말했다.“누나는 내가 누구를 사랑했으면 좋겠어?”유진은 갑자기 자신이 바보 같은 질문을 했다고 생각했다. 유진이 왜 그걸 물은 것일까? 게다가 지혁은 결혼을 거래처럼 말한다. 아마 지혁은 평생 누구도 사랑하지 않을 것이다.“미안해, 내가 묻지 말았어야 했어.”유진이 눈살을 찌푸리며 말했다.“날 도와 사건을 뒤집을 필요 없어. 내 사건은 내가 스스로 방법을 찾아볼게.”유진은 자신의 방식으로 진상을 찾아낼 것이다. 시간이 오래 걸릴지도 모르지만 가능성이 전혀 없는 건 아니다.“그래?”지혁이 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좋아, 누나가 어떤 방법을 생각해 낼지 보고 싶네. 하지만 만약 누나가 생각을 바꾸어 사건을 뒤집으려고 한다면, 언제든지 나를 찾아와. 내가 누나를 도와 사건을 뒤집을 거야.”“왜 사건을 뒤집는 것을 도와주는 거야?”유진은 의심스럽게 지혁을 바라보았다. 지혁의 표정을 보니 말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진짜 유진을 위해 사건을 뒤집을
마치 인생의 우스개처럼 느껴졌다.그녀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서랍 쪽으로 걸어가서 이미 짜놓은 장갑을 꺼내 그에게 건네주었다.“이것은 약속했던 대로 너에게 주는 장갑이야.”그는 이 장갑을 자세히 들여다본 다음 다시 끼려고 했다.“잘 짰네, 게다가 아주 따뜻해. 누나가 짠 목도리처럼, 따뜻하고 편해.”“사실 너 그 목도리 할 필요 없어. 다른 사람이 보면 오히려 네 옷이랑 어울리지 않는다고 느낄 거야.”그녀가 말했다. 그의 이 고급스러운 옷은 오히려 목도리를 더 낡고 저렴해 보이게 만들 뿐이다.“안 어울려?”그는 눈썹을 살짝 치켜뜨고 가볍게 웃었다.“누나, 나한테 이 목도리가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를 다른 사람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없어, 내가 좋기만 하면 돼. 이 목도리처럼, 내가 어울린다고 느껴지면 어울리는 거야!”잠시 멈칫하던 그는 목도리를 만졌다.“하물며, 누나가 짠 것이라면, 어떤 옷이든, 다 잘 어울려!”그녀의 심장은 갑자기 심하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런 말이 다른 사람의 입에서 나오면 우습다고만 생각할 텐데 그가 뱉으니 진심처럼 느껴졌다.그의 잘생긴 얼굴이 진지한 표정을 짓고 있다.마치 그녀가 짠 이 목도리가 값을 매길 수 없는 보물인 것처럼 말이다.“하지만 누나…….”그는 손에 끼워 본 장갑을 벗고 아무렇게나 의자를 당겨 앉더니 웃으며 그녀를 바라보았다.“나는 다른 사람과 똑같은 물건을 사용하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아. 누나가 나를 위해 목도리랑 장갑을 짜줘서 정말 고마운데 앞으로 다른 사람한테는 이런 것들을 만들어주면 안 돼. 알겠지?”그의 미소는 정말 깨끗하고 맑았다. 마치 이른 아침의 햇빛과도 같아서 자신도 모르게 웃음 짓게 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그녀의 마음 다른 한구석을 씁쓸하게도 만들었다.‘이건 경고인가?’그는 그녀에게 앞으로 다른 사람에게 목도리 장갑을 짜 주지 말라고 경고하고 있다.S시에서 그의 경고를 거역할 사람이 또 몇 명이나 되겠는가?————엑스트라 신이 있던 날, 임유진은 그룹
임유진이 오늘 할 엑스트라 배역은 시녀였고 감독이 요구하는 지정된 위치에 서서 머리를 숙이기만 하면 됐다. 게다가 오늘 시녀 배역은 한 명이 아니라 여러 명이였다. 주요배역이 지나가는 앞에서 감독의 명령에 따라 다 같이 무릎을 꿇고 절을 하며 대사 한마디만 하면 됐다.“나리께 인사드리옵니다, 부인께 인사드리옵니다.”무릎을 꿇는 장면이 있어서 이쪽에서 페이를 만원 정도 더 준다고 했는데 그걸 합치면 2만 6천 원이었다.임유진은 고민해 보더니 무릎 꿇는 건 사실 별거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차피 연기일 뿐이니까. 아무리 인기 있는 연예인이라도 무릎을 꿇는 장면 한 번씩은 다 있지 않가. 게다가 생업으로 연기를 하는 사람들에게 무릎 까짓것 그렇게 중요하지 않은 경우가 많다.엑스트라의 분장실은 하나의 방이고 여기에는 여러 명의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있다. 그리고 남자배우와 여자배우 모두 여기서 줄을 서고 메이크업 아티스트들이 메이크업해 주는 걸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메이크업 아티스트 모두 속도가 빨라서 기본적으로 5, 6분에 한 명씩 화장을 완성했다.임유진의 차례가 되었을 때,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의아해하며 말했다.“이마에 흉터가 있네요!”임유진은 몸을 약간 떨면서 그렇다고 대답했다. 흉터는 두피에 가까운 곳에 있었기에 자세히 보지 않으면 사실 전혀 알아볼 수 없었다.이 흉터는 감옥에 있을 당시 다른 사람으로 인해 다쳐 생겼고 후에 잘 관리하지 못해 남은 흉터였다.임유진도 왜 메이크업 아티스트가 이 흉터를 언급했는지 알고 있다. 오늘 시녀의 헤어스타일은 앞머리를 모두 빗어 올려야 하므로 상처가 가려지지 않으니 흉터가 보일락말락 하게 드러날 것이다.“괜찮아요? 연기 계속할 수 있겠어요?”그녀가 불안하게 물었다. 처음에는 진세령에게 괴롭힘을 당할까 봐 걱정했지만, 지금은 이 배역을 계속할 수 있을지가 걱정됐다.“괜찮아요, 파우더로 살짝 두껍게 가리면 돼요.”메이크업 아티스트는 신속하게 임유진에게 메이크업을 완성했다.임유진이 거울을 보니 정말
어쨌든 이 일은 훔친 것도 빼앗은 것도 아닌, 오직 본인의 노동력만으로 얻은 것이다.“엑스트라를 하려던 거였으면 날 찾아오지 그랬어? 대사를 몇 마디 더 만들어 줄 수도 있는데. 그럼 단순 엑스트라보다 훨씬 돈을 벌 수 있어.”임유라는 이 말을 할 때 일부러 손을 들어 자신의 머리카락을 귓등으로 넘기며 손목에 찬 명품 시계를 과시했다.임유진은 임유라의 이 행동이 가소롭다고만 생각했다.“몇 마디 대사를 더 따내려고 자신의 언니를 속여 술자리에 데려갈 줄은 몰랐네.”“너-”임유라의 표정이 변했다. 임유진이 지난번 조감독과 술을 마시게 한 일을 저격 하는 걸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곧 그녀는 마치 무슨 생각이 떠오른 듯 임유진을 훑어보며 물었다.“너 지금 돈이 많이 부족해? 단역 할래? 설마 아무도 너에게 돈을 주지 않는 거야? 그래서 네가 이렇게 고생하면서 돈을 버는 거야?”“너에게 보고할 필요가 없지 않아?”임유진은 임유라를 무시했다. 그녀의 옆을 스쳐 지나가 엑스트라들이 대기하는 곳으로 걸어갔다.임유라는 눈살을 찌푸리고 잠시 뜸을 들이다가 옆에 있는 비서에게 말했다.“방금 만난 저 여자는 임유진이라고 하는데 네가 좀 알아봐. 그녀가 지금 도대체 어떤 상황인지 말이야. 그녀를 여기에 데려온 사람이 그녀의 정보를 어느 정도 알고 있을 거야. 가서 전부 알아봐. 자세할수록 좋아.”‘도대체 강지혁과 임유진은 무슨 사이일까?’임유라는 마음속으로 추측하고는 있었지만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다.만약 그날 강지혁이 안고 차에 태운 여자가 정말 임유진이라면 임유진은 엑스트라로 나올 필요가 전혀 없었다. 임유진은 연예계에 흥미가 있는 사람이 아니니까. 돈이 부족하면 직접 강지혁에게 한마디 하면 되는 일이 아닌가?더군다나 엑스트라를 해서 돈을 몇 푼이나 벌겠는가!임유라가 화장할 때 알아보러 갔던 비서가 마침내 돌아와 임유라에게 보고를 했다.“뭐? 지금도 환경미화원 일을 한다고? 게다가 다른 환경미화원이 그녀를 소개하여 엑스트라로 나온 거라고?”
“아니야. 아빠가 그간 우리를 찾으러 오지 않았던 건 분명히 이유가 있어서일 거야.”임유진이 말했다.“현이 보게 되면 아마 엄청 좋아할 거야!”‘날 찾지 않은 이유는 아마... 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겠지?’임유진은 강지혁을 기억해낸 후 그의 기사를 찾아보다 그녀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로 나온 것을 봤었다.열차가 S 시에 도착하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출구 쪽으로 천천히 걸어 나갔다.그렇게 걸어 나가보니 가장 먼저 조금은 초조한 얼굴로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리고 있는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한지영이었다.임유진은 그녀를 본 순간 눈시울이 빨개졌다.그간 기억을 아예 통째로 잃었던 터라 그녀는 한지영도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그러다 최근 기억이 회복된 후에야 급하게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임유진은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그날 기억이 돌아오자마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을 때 한지영이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목소리를 덜덜 떨었던 것을 말이다.그러다 영상 통화를 걸고서야 한지영은 그녀가 정말 살아있다는 것을 실감했다.“지영아!”임유진이 큰소리로 외치자 한지영이 고개를 홱 돌렸다. 한지영은 임유진을 보자마자 눈가가 빨개지더니 눈물을 글썽였다.임유진이 딸의 손을 잡고 그녀 앞에 섰을 때 한지영의 얼굴은 이미 눈물범벅이었다.“너 진짜... 살아있었어. 네가 그렇게 쉽게 죽지 않을 거라는 거 난 알고 있었어. 알고 있었다고! 유진아!!”한지영은 임유진을 와락 끌어안으며 엉엉 울었다.그리고 임유진도 그녀를 꽉 끌어안으며 눈물을 글썽였다.“미안해... 많이 걱정했지.”“그걸 말이라고!”한지영은 울먹거리며 말하다가 이내 임유진의 옆에 있는 아이를 바라보았다.임유진과 판박이였지만 언뜻 강지혁의 모습도 보였다.일전 영상 통화로 이미 얼굴을 봤었지만 실물로 보니 또 느낌이 달랐다.“이모, 안녕하세요!”현이가 똘망한 눈으로 한지영을 바라보며 예의 바르게 인사를 건넸다.이에 한지영은 마음이 사르르 녹는 걸 느끼며 아이의 말랑한
아니, 꼭 그렇게 말할 수도 없는 게 그녀의 정보만 아니었지 임유진이라는 이름을 가진 L 시의 또 다른 ‘임유진’의 정보는 맞았기 때문이다.다만 그 ‘임유진’은 부모도 친인척도 없는 천애 고아였다.임유진은 당시 기억을 잃은 상태이기에 그 ‘임유진’의 모든 정보가 바로 그녀의 것이라고 하는 말을 아무런 의심 없이 믿었다.그도 그럴 게 ‘임유진’의 집에 있던 사진이나 옷이나 그 모든 것들이 전부 다 임유진의 것이었으니까.그래서 그녀는 ‘임유진’으로 누구의 아이인지도 모를 아이를 키우며 그렇게 살고 있었다.하지만 분명히 아무것도 기억이 나는 게 없는데 아이의 아빠를 정말 많이 사랑했던 그런 느낌은 확실하게 들었다.게다가 아이도 여자아이 한 명이 다가 아닌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그 뒤로 계속해서 ‘임유진’의 신분으로 살아가다 그녀는 근 2년간 꿈속에서 웬 남자와 웃기도 하고 포옹도 하고 서로 달콤한 말도 속삭이는 광경이 자꾸 보이기 시작했다.임유진은 직감으로 그 남자가 바로 현이의 아빠라고 확신했다.하지만 얼굴이 줄곧 모호했기에 그녀는 어떤 얼굴이 자기 남편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길을 가다가 체격이 비슷하거나 얼굴 윤곽이 비슷한 남자만 보면 바로 달려가서 질문하고는 했다. 하지만 그렇게 쉽게 찾을 리가 없었고 그녀는 번번이 실망만 했다.가끔 나쁜 마음을 먹고 다가오는 남자들도 있었지만 꿈 얘기를 물어보면 하나같이 대답을 하지 못했기에 금방 쳐낼 수 있었다.그러다 드디어 일주일 전의 꿈에서 남자의 얼굴이 점점 선명하게 보였다. 그리고 얼굴이 선명해 짐과 동시에 남자의 신분 역시 서서히 기억나기 시작했다.“강지혁!”그녀와 꿈에서 결혼하고 사랑을 속삭인 남자는 S 시에서 제일 유명한 강지혁이었다.기억을 잃은 채 라온시에서 살았어도 강지혁의 이름과 GH 그룹의 기사는 항상 메인을 차지하고 있었기에 모를 수가 없었다.다만 강지혁은 매스컴에 얼굴을 거의 드러내지 않는 편이라 정면 사진을 찾는 게 하늘의 별 따기였다.지금 딸이 보고 있는 사진
그리고 예쁜 눈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분명히 이렇게도 예쁜 눈인데 그 눈동자 속에 담긴 감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아니, 감정이 담겨있지도 않는 것 같았다.강지혁은 아들의 말에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강선율의 입에서 이런 헛소리가 나왔다는 건 누군가가 의도적으로 이런 얘기를 흘리고 있기 때문임이 틀림없었다.“아니.”강지혁이 단호한 얼굴로 답했다.“네, 알겠어요.”아이는 이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입을 열지 않았다.그리고 이것으로 부자의 대화는 끝이었다.도우미가 강선율을 씻겨주기 위해 방으로 들어오자 강지혁은 발걸음을 옮겨 서재로 향했다.그는 한 서랍 앞에 멈춰서고는 잠시 생각하는 듯하다가 이내 천천히 서랍을 열었다.안에는 당시 강지혁과 임유진이 혼인 신고하고 갔을 때 포토 부스에서 찍었던 사진이 들어있었다.강지혁은 사진 속 여자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청초하고 깨끗한 느낌을 주는 여자였다. 옅게 지은 미소는 온갖 짜증도 다 날려줄 만큼 온화하고 또 부드러웠다.다만 지금의 그에게는 그녀의 얼굴이 단지 편안하게만 다가올 뿐이지 심장이 뛸 만큼의 느낌은 전해져오지 않았다.게다가 깜짝 놀랄 만큼의 미모도 아니었기에 더더욱 무난하게만 느껴졌다.그런데 기억을 잃기 전의 그는 이토록 평범한 여자를 사랑까지 했고 심지어 이 여자와 결혼해 아이까지 나았다.사실 정상적이고 이성적인 사고방식을 따랐으면 이름 있는 가문의 여자와 결혼을 했어야 했다. 이런 집안도 변변찮고 심지어 옥살이까지 하고 나온 여자와 결혼하는 것이 아니라 말이다.매번 이렇게 사진을 볼 때면 강지혁의 머릿속으로 파편 같은 짤막한 기억들이 떠오르곤 한다. 하지만 파편 속 여자의 얼굴은 언제나 모호했다.고이준은 그 여자가 바로 임유진이고 강선율의 엄마라고 했다.강지혁은 머릿속으로 떠오르는 작은 기억의 파편들과 고이준이 그에게 얘기해준 그가 잊은 것들을 조합해 당시 그와 임유진이 어떤 사이였는지 대충 파악은 했다.하지만 그저 파악만 했을 뿐 여전히 특별한 느낌은 없었다.사람들이
“나가봐.”강지혁의 말에 선생님은 물건을 챙기고 방을 나갔다.그렇게 방안에는 오직 강지혁과 강선율 두 부자만 남게 되었다.강지혁은 천 피스는 족히 넘어 보이는 퍼즐을 하나하나 묵묵히 맞춰나가는 아들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았다.이렇게 큰 퍼즐은 어른이라도 최소 열흘을 있어야 맞출 수 있다. 그런데 강선율을 마치 생각을 하지 않고도 아는 것처럼 퍼즐을 놓고 맞추는 것에 망설임이 없었다.다만 강지혁은 거의 다 완성되어 가는 퍼즐을 보고 잠깐 흠칫했다.퍼즐의 그림이 두 명의 남자아이와 한 명의 여자아이가 손을 잡고 있는 그림이었기 때문이다.혹시 동생들이 보고 싶어서 이 퍼즐을 고른 걸까?강지혁은 당시 병원에서 정신을 차린 후 고이준에게서 그에게는 임유진이라는 아내가 있고 그녀의 뱃속에 세쌍둥이가 들어있었다는 것을 전해 들었다. 그리고 임유진이 절벽에서 떨어진 바람에 안타깝게도 세쌍둥이 중 오직 한 명만 살아남았다는 것도 들었다.그 뒤로 몇 년이 지나고 아이가 말을 할 수 있게 됐을 무렵, 강선율은 세쌍둥이 얘기를 어디서 들은 것인지 어느 순간부터 자신에게는 남동생과 여동생이 있다는 말을 하기 시작했다.강지혁은 이에 아들에게 물었다.“그런데 왜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이라고 하는 거지? 두 동생 모두 남동생일 수도 있고 여동생 두 명일 수도 있잖아.”“이유는 없어요.”아이는 강지혁의 의문에 이렇게만 대답해주었다.꼭 남동생 한 명과 여동생 한 명인 것이 당연하다는 듯이 말이다.강지혁은 강선율의 옆에 앉아 아이가 퍼즐을 완성하는 걸 가만히 지켜보다 한참 뒤에야 입을 열었다.“남동생이 필요하면 아빠가 남동생도 입양해 올게.”애초에 소안나를 입양한 건 강선율이 길에서 괴롭힘당하고 있는 소씨 모녀를 보고 갑자기 여동생이 갖고 싶다고 했기 때문이었다. 당시 강지혁은 아들의 한마디에 바로 사람을 시켜 소씨 모녀를 데려왔다. 그러고는 소민아에게 만약 딸을 양녀로 삼게 해주면 앞으로 소안나가 성인이 될 때까지에 필요한 모든 금전적인 지원을 다 해주겠
그래서 소민아는 어떻게든 그 전에 강지혁의 마음을 잡아야만 했다.소민아는 남자들을 꼬실 때 쓰던 청순한 미소를 지으며 강지혁을 맞이했다. 그녀는 원체 얼굴도 예쁘고 또 몸매도 좋았다.만약 예쁜 얼굴이 아니었으면 애초에 돈 많은 남자의 시선을 끌지도 못했을 것이다.하지만 시선을 끈 것까지는 좋았지만 혼전임신으로 부잣집에 시집가려 했던 그녀의 계획은 이루어지지 못했다.남자 쪽 집안에서 그녀의 배가 잔뜩 불러있는데도 그녀에게 그 어떤 기회도 주지 않았으니까.소민아는 당시 아이를 이미 밴 상태였기에 자신이 조금만 더 노력하면 반드시 돌아봐 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기어코 아이까지 낳았다.하지만 그럼에도 남자 쪽 집안은 그녀를 받아주지 않았고 그녀의 딸까지도 모른 척했다.“회장님, 오셨어요? 안나가 회장님 보고 싶다고 계속 졸라서 어쩔 수 없이 데리고 왔어요. 얘도 참, 나한테는 안 이러면서 회장님은 엄청 좋아한다니까요.”소민아가 말했다.그리고 소민아의 말이 끝나자마자 소안나가 강지혁에게 안기려는 듯 활짝 웃으며 그에게 다가왔다. 하지만 지나치게 쌀쌀맞은 강지혁의 눈빛에 소안나는 결국 겁을 먹고 중간에 발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그러고는 조금 눈치 보는 말투로 얘기했다.“아빠, 보고 싶었어요...”강지혁은 소씨 모녀를 한번 훑더니 별다른 감정이 섞이지 않은 말투로 한마디 했다.“늦었으니 이만 가봐.”“하지만... 안나는 아빠랑 여기서 같이 자고 싶어요... 그래도 돼요?”소안나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소민아가 가르쳐줬던 그대로 얘기했다.소민아는 아이에게 반드시 양부인 강지혁에게 잘 보여야 한다고 하며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어야만 앞으로도 이렇게 맛있는 음식도 먹고 예쁜 옷도 입으며 마치 공주님처럼 살 수 있다고 했다.아이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기는 했지만 어떻게 해야 그를 진짜 아빠로 만들 수 있을지 몰랐다. 그래서 일단은 소민아가 시키는 건 뭐든 하기로 했다.아이는 공주가 되고 싶었고 그 누구에게도 무시당하고 싶지 않았으니까.강지혁은 아
아마 지금의 강지혁이 유일하게 신경을 쓰는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바로 그의 아들인 강선율일 것이다.물론 겉으로는 그런 모습이 전혀 드러나지 않지만 말이다.고이준은 두 부자지간의 평소 모습을 떠올리면 한숨밖에 나오지 않았다.만약 임유진이 살아있었다면, 만약 강지혁이 그녀를 향한 감정을 잊어버리지 않았다면 강지혁은 아마 아들에게 사랑한다는 표현도 하며 더 많이 사랑해줬을 것이다. 보통의 아버지들처럼 그렇게 아들과 친밀한 사이가 되어 있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찬 바람이 쌩쌩 부는 듯한 분위기가 아니라 말이다.하지만 얻는 게 있으면 잃는 것도 있다고 강지혁은 임유진을 잊어버린 대가로 살 수 있게 됐으니 여러모로 다행인 결과였다.“회장님은 사모님을... 정말 많이 사랑하셨습니다.”고이준이 답했다.“내가?”강지혁이 코웃음을 쳤다. 주위에서 임유진과 그에 관한 이야기를 전해 들었을 때 그는 마치 책이라도 읽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분명히 자기 얘기인데도 전혀 다가오는 바가 없었다. 아무런 느낌도 들지 않았다.“만약 내가 정말 그 여자를 그토록 사랑했다면 이렇게도 쉽게 잊어버리지 않았겠지. 그런데 난 그 여자와의 모든 기억을 다 잊었어. 그렇다는 건 내 기억에 남을 만한 여자는 아니었다는 소리야.”강지혁이 차갑게 말했다.고이준은 그 말에 입술을 꽉 깨물었다.그의 기억이 사라진 게 김재호 때문이라는 걸 그는 말할 수 없었다.기억을 잃은 것으로 그때의 감정을 다 지울 수 있게 됐는데 만약 다시 기억이라도 났다가는 강지혁이 또다시 무너질 테니까.차량이 강씨 저택에 멈춰서고 강지혁이 차 안에서 내렸다.그리고 집사는 그런 강지혁에게 고개를 숙이며 말을 건넸다.“소안나 아가씨와 소민아 씨가 와 계십니다.”집사가 말한 소안나가 바로 강지혁이 입양한 딸이었다. 그런데 입양이라고는 하나 생모가 살아있어 합법적인 입양절차는 밟지 못했다. 그러나 강씨 가문은 대외적으로 소안나를 입양했다고 얘기했기에 사람들은 입양절차 같은 것이 없어도 그녀가 강씨 저택에 양녀인 것을
“강지혁, 너...!”강현수가 뭐라 말하려는데 이한이 다급하게 달려와 두 사람 사이에 끼어들었다.“지혁아, 신경 쓰지 마. 현수 이놈이 아까 술을 좀 많이 마셔서 헛소리하는 것뿐이야.”이한은 말을 마친 후 얼른 강현수의 손을 잡으며 옆으로 잡아당겼다.하지만 그의 손에 끌려갈 강현수가 아니었다.“놔. 강지혁한테 확실하게 물어야 할 게 있으니까.”“현수야. 너 오랜만에 돌아온 거잖아. 안 그래도 너랑 가고 싶었던 곳이 있는데 지금 갈까? 기왕이면 다른 애들도 부르자, 어때?”이한이 필사적으로 화제를 바꾸며 강현수를 설득했다.그런데 그때 가만히 있던 강지혁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한아, 현수 놔줘. 나 때문에 일부러 왔다는데 궁금한 거 다 해결하게 하고 보내야지 않겠어?”이한은 그 말에 속으로 제발 싸움이 일어나지 않게 빌며 강현수의 손을 놓아주었다.강현수는 웃는 듯 마는듯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는 강지혁을 보며 눈앞에 있는 사람이 정말 강지혁이 맞나 싶은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어쩌면 이런 느낌이 드는 게 5년이라는 시간 동안 서로 연락 한번 주고받지 않았기 때문일 수도 있다.강현수는 지난 5년간 일부러 더 강지혁과 만나는 것을 피했고 그에게 먼저 연락도 하지 않았다. 가뜩이나 임유진의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한데 강지혁과 만나면 더 고통스러워질 게 뻔했으니까.“유진이를 아직도 사랑해?”강현수가 물었다.“아니. 안 사랑해.”시원하고도 명쾌한 대답이 강지혁의 입에서 흘러나왔다.“대답 들었으니 이제 만족해?”강현수는 그의 대답에 뭐라고 해야 할지 몰랐다.사랑하지 않는다고 하는 강지혁의 두 눈이 말도 안 될 정도로 정말 아무런 동요도 없었으니까.정말 더 이상 임유진을 사랑하지 않는다고?강현수는 좀처럼 이 상황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다.‘대체... 뭐가 어떻게 된 거지? 강지혁한테 그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강지혁이 파티장에서 나오자 고이준이 예를 갖춰 차량 뒷좌석 문을 열어주었다.고이준은 오늘 처리해야 할 일 때문에 강
이한이 계속해서 말을 이었다.“하지만 되도록 강지혁 앞에서 유진 씨 얘기는 하지 않는 게 좋을 거야. 더 이상 유진 씨에게 별다른 마음이 없는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남들 입에서 유진 씨 이름이 나오는 걸 썩 좋아하는 눈치는 아닌 것 같았으니까.”“강지혁이 정말 유진이를 잊었다고...?”강현수의 표정이 완전히 일그러졌다.“그럼 뭐 이미 죽은 사람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을까? 현수야, 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잖아. 물론 강지혁의 아들까지 낳은 여자는 흔하지 하지만...”이한은 강지혁의 아들을 떠올리며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아이는 이제 고작 5살밖에 안 됐음에도 불구하고 강지혁의 유전자를 물려받아 그런지 머리는 지나치게 똑똑하고 또 또래 아이들답지 않게 냉랭한 구석이 있었다.실제로 이한은 강지혁의 아들과 한번 만났다가 뼈도 못 추리고 벙찐 얼굴로 5살짜리가 하는 말을 가만히 듣고 있어야만 했다.그리고 그날 그는 그 꼬맹이가 제 아들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으로 느껴졌다. 만약 자신에게 그런 아들이 있었으면 아마 평생을 아들에게 잔뜩 눌린 채로 살았을 테니까.강지혁의 아들을 제압할 수 있는 건 강지혁뿐이었다.강현수는 이한의 말에 표정이 점점 급격히 어두워졌다.고작 여자 하나가 곁에서 사라진 것뿐이라고?그 여자 때문에 강지혁은 하마터면 미친놈이 될 뻔했는데 그렇게도 사랑했던 여자를 고작 5년도 안 돼서 잊어버렸다고?강현수는 와인을 한입에 마셔버리더니 이내 잔을 내려놓고 강지혁 쪽으로 걸어갔다.“야, 현수야!”이한이 뒤에서 강현수를 불렀다.‘저 녀석 설마 지혁이 앞에서 유진 씨 얘기를 꺼낼 생각인가? 설마... 저 녀석이야말로 아직도 유진 씨를 잊지 못한 거 아니야?!’이한은 즐거운 파티장에서 임유진 때문에 두 사람이 괜한 소란이 일으킬까 봐 얼른 강현수의 뒤를 따라갔다.실제로 두 사람은 임유진 때문에 하마터면 치고받고 싸울 뻔하기도 했으니까.강현수가 강지혁의 앞에 멈춰 서자 강지혁과 얘기를 나누던 남자가 얼
강지혁은 모든 것을 체념한 듯한 태도를 보이다가도 또 이렇게 마치 임유진이 바로 눈앞에 있는 것처럼 울분과 속상함을 잔뜩 털어놓았다.그런 그를 보며 강현수는 하고 싶었던 말들을 결국 다시 삼킬 수밖에 없었다.그 뒤로 강현수는 해외 시장을 넓히는 프로젝트에 직접 참여하며 S 시를 떠났다. 사실 충분히 다른 사람에게 맡겨도 되는 일이었지만 그는 당시 S 시에 있는 게 숨이 막히고 또 너무 고통스러워 자신이 직접 가기로 했다.하지만 해외로 가서도 그는 여전히 임유진 생각밖에 머릿속에 없었다. 그는 당시 질투 때문에 그녀를 모른 척했던 자신의 모습이 자꾸 떠올라 지속해서 죄책감에 시달렸다. 만약 그때 차에서 내려 그녀의 사정을 들어줬으면 그녀가 강지혁과 결혼할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녀가 절벽에서 떨어지는 일도 없었을 테니까.그리고 차라리 그때 임유진이 아무리 원치 않아도, 아무리 강지혁을 사랑한다며 버텨도 억지로라도 그녀를 데리고 갔어야 했다는 생각도 들었다. 물론 그렇게 했으면 임유진은 꽤 오랜 시간 그를 미워했을 테지만 적어도 이 세상과 완전히 작별하지는 않았을 테니까.강현수가 시선을 내리며 조금 어두운 얼굴로 과거를 회상하던 그때 익숙한 누군가가 그의 옆으로 다가왔다.강현수의 바로 옆으로 다가온 남자는 다름 아닌 그와 강지혁의 오랜 친구인 이한이었다.이한은 조금 의외라는 얼굴로 강현수를 바라보았다.“언제 돌아온 거야?”“며칠 전에.”강현수가 술을 한 모금 마시며 답했다.“돌아왔으면 왔다고 얘기를 해줬어야지. 오늘 파티에 참석 안 했으면 너 왔는지도 몰랐을 거 아니야.”이한이 불만인 듯 볼을 부풀리며 말했다.“이제 알았잖아.”강현수는 대수롭지 않게 대답하더니 다시 시선을 돌려 강지혁이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딸을 하나 입양했다고 하던데... 정말이야? 그리고 그 딸의 친모랑 꽤 사이가 가깝다지?”강현수는 줄곧 해외에만 있었지만 강지혁의 소식은 계속해서 듣고 있었다.그래서 강지혁이 2년 전에 웬 여자아이를 한 명 입양하고 그 아이의 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