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만 임유진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강지혁은 혼잣말을 계속했다.“나는 한 사람을 미워한 적이 있어. 아주 증오했어. 만약 어느 날, 그녀를 찾으면 어떻게 복수할 거라고 수천 번 생각했어. 하지만 그녀의 생일이 되니 마음이 너무 불편해. 누나한테 와야만 마음이 편해지는 거 같아.”유진은 눈을 감고 잠든 것처럼 말하지 않았다.사실 지혁은 유진이 잠들기를 바라고 유진에게 이런 말들을 안 들려주고 싶을 수도 있지 않을까? 유진은 마음속으로 추측했다. 그렇게 되면 더 잠든 척해야 한다.“아마 난 조금이라도 그녀를 빨리 만나고 싶은 거 같아. 그래야 내가 빨리 복수할 수 있잖아? 그녀가 어디에 숨었든 언젠가는 그녀를 찾아내 가족에게 배신당하고 괴롭히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느끼게 하고 싶어.”지혁의 목소리는 계속 그윽하게 울려 퍼졌다. 다만 지혁의 말은 아주 흉악했다.유진의 몸은 저도 모르게 떨렸다. 가족…… 설마 지혁이 미워하고 복수하려는 사람이 지혁의 어머니일까?유진은 지혁의 어머니가 지혁과 지혁의 아버지를 버리고 떠났다고 말한 것을 기억한다.만약 지혁이 그때 한 말이 사실이라면…… 앞으로 지혁의 어머니는…….강지혁은 S시의 황제와도 같은 사람이다. 지혁의 보복을 누가 감당할 수 있을까?유진은 자기도 모르게 감옥에 있던 그 3년을 생각했다.“누나는 절대 내가 미워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줄래?”지혁의 목소리가 거친 바람처럼 들렸다.유진은 온몸의 피가 갑자기 굳는 것 같았다.사실…… 지혁은 유진이 줄곧 자지 않았다는 걸 알았을까?…….하룻밤을 이렇게 보냈다. 유진이 이튿날 새벽 4시가 넘어 일어나 출근하려 할 때 지혁은 이미 집에 없었다.유진은 좀 이상했다. 도대체 지혁은 언제 갔을까?그러나 유진도 한숨을 돌렸다. 적어도 어색하게 마주할 필요는 없었다.아직 완성하지 않은 그 장갑을 보니 유진은 빨리 장갑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다.장갑이 완성되면 좀 더 빨리 지혁과의 관계를 끊을 수도 있다.한편 지혁은 차의 뒷좌석에 앉아 의자에 기대어
기사는 즉시 방향을 바꾸어 병원으로 향했다.강지혁이 병원에 도착할 때도 강문철의 응급처치는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지혁은 응급실 밖에서 서 있었는데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이런 시기가 되면 겨우 목숨을 부지하고 있을 뿐이다.한때 할아버지는 지혁이 보기에 강하고 모질고 냉혹했다. 할아버지의 유일한 가족 간의 정은 아마 일찍 하늘나라로 간 아들에게만 준 것 같았다.문철의 손자 지혁을 포함한 다른 사람은 문철에게 모두 바둑돌일 뿐이다!문철은 항상 지혁을 손자가 아니라 강씨 가문의 상속자로만 여겼기에 그들 사이에는 사실 아무런 정도 없다.2시간이 지나서야 응급실 문이 열렸다. 의사가 걸어 나오더니 지혁에게 말했다.“목숨은 구했지만 어르신의 연세가 많은 데다 몇 차례 수술까지 한 적 있어 이제는 시간을 얼마나 끌 수 있냐에 달렸어요. 잘하면 몇 년, 못하면 몇 개월일 거예요.”지혁은 생로병사는 아무리 많은 돈이 있어도 통제할 수 없다는 것을 자연히 알고 있다.문철은 수술 후 관찰을 위해 ICU로 옮겨졌다.이틀 후, 할아버지는 ICU를 나왔고 지혁은 또다시 할아버지와 만날 수 있었다.“내가 응급처치를 받을 때 네가 응급실 밖에서 기다리고 있었다며?”문철이 말문을 열었다. 하지만 예전과 비교하면 목소리가 낮았고 수술로 인해 힘이 없는 것 같았다.“네.”지혁이 담담하게 대답했다.“이 늙은이 때문에 병실 밖까지 지키고 용썼네.”문철이 말했다.지혁은 담담하게 할아버지를 바라보았다.“할아버지, 저를 만나겠다고 연락준 게 이런 말을 하려는 건 아니잖아요?”문철은 간병인에게 물을 달라고 하여 마신 뒤 병실에 있는 사람을 모두 내보내고 지혁에게 말했다.“내가 임유진이라는 여자를 잘 알아봤는데, 그녀는 너에게 어울리지 않아. S시의 수많은 가문에서 어울리는 영애를 고를 수 있잖아.”“저한테 어울리는지 안 어울리는지는 할아버지가 판단할 것이 아니라 제가 판단해요.”지혁이 곧바로 대답했다.두 사람이 마주 보자 공기마저 싸늘해지
강씨 가문의 남자는 영원히 여자를 사랑해서는 안 된다.“너!”강문철의 얼굴에는 분노가 물들었다. 며칠 전 구급치료를 겪은 사람의 건강에는 아주 해롭다.그러나 강지혁은 할아버지를 말릴 생각은 없고 오히려 담담하게 말했다.“할아버지, 제가 오늘 할아버지에게 이렇게 말한 이상 제가 그녀를 보호할 절대적인 능력이 있다는 것을 의미해요. 의사가 치료를 잘하면 할아버지는 몇 년 더 살 수 있다고 했어요.”문철은 너무 화가 난 나머지 웃음이 나왔다.“그래, 내 손자가 틀림없네. 보아하니 이미 그 여자에게 마음이 갔구나. 넌 네 아버지의 일을 잊은 거야? 네 아버지의 뒤를 밟을 작정이냐?”“잊지 않았어요. 저는 아무리 그녀를 사랑한다고 해도 그 여자가 제 일생을 지배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거예요.”지혁이 대답했다.하지만 문철은 조롱했다.“그때 네 아버지도 이렇게 말했지만, 결국 어떻게 됐어? 결국 그는 한 여자 때문에 목숨을 잃었어!”“저는 아버지가 아니에요!”지혁은 차갑게 말하더니 천천히 일어나 할아버지의 곁으로 걸어갔다. 지혁은 몸을 기울여 칠흑 같은 눈동자로 할아버지를 똑바로 쳐다보았다.“할아버지, 저는 아버지가 아니에요. 저희 두 사람을 같다고 생각하지 마세요!”두 눈이 가까이서 마주하자 긴장된 분위기가 다시 맴돌았고 심지어 일촉즉발의 느낌이 들었다.그때 문철이 침묵을 깼다.“그럼 그녀와 결혼할 작정이야?”“불가능한 것도 아니죠.”지혁은 어차피 한 여자와 결혼할 것이다. 어차피 강씨 가문의 상속자에게 엄마를 찾아주는 것뿐이니 예전에는 누구와 결혼하든 아무런 의견이 없었다.그러나 지금 지혁은 여생을 한 여자와 살아야 한다면 유진이 제일 좋은 선택이라고 생각한다. 적어도 유진은 질리지 않을 것 같다. 심지어 유진과 함께 지내는 것이 아주 좋다.지혁은 유진을 갖고 싶고 유진을 숨겨두고 아무도 유진의 미소와 부드러움을 보지 못하게 하고 싶다.다른 여자에게는 느껴본 적 없는 독점 하고 싶은 마음이 생겼다.심지어 지혁은 유진이 다른 남자
“만약 임유진이 진상을 알게 되면 어떻게 생각할 거 같아?”강문철이 말했다.강지혁은 차가운 눈빛을 한 채 갑자기 입꼬리를 씩 올렸다.“그녀는 영원히 그 일의 진상을 알지 못할 거예요.”문철은 콧방귀를 뀌었다.“가능하다고 생각해? 지금 내가 알 수 있는 이상 언젠가는 그녀도…….”다만 문철의 말이 채 끝나기도 전에 지혁이 말을 끊었다.“그녀는 반드시 알지 못할 거예요. 할아버지, 맞죠?”차갑고 맑은 목소리는 두 사람만 들을 수 있었지만 문철은 손자의 눈에서 위협적인 빛을 보았다.자신의 손자가 한 여자를 위해 협박도 마다하지 않는다? 문철의 마음속에 불안감이 솟구쳤다.손자는 정말 한 여자에 의해 통제되지 않을 것인가?아니면…… 더 참혹하게 될까?…….주말이 되자 임유진은 버스를 타고 외할머니가 계신 병원으로 달려갔다.외할머니의 병실에는 이미 친척들이 가득했다. 사람들은 유진을 보더니 각양각색의 표정을 지었다.특히 큰삼촌, 둘째 삼촌, 셋째 이모 그 몇 가족은 유진을 보자 무섭기도 하고 밉다고 하기도 했다.유진은 그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신경 쓰지 않는다. 유진이 신경 쓰는 것은 단지 외할머니의 병일 뿐이다.“유진아.”할머니는 유진을 보자 힘겹게 한마디 말했다. "가까이 와. 할머니가 좀 보자.”유진은 병상 옆으로 가서 외할머니의 손을 잡고 말했다.“할머니.”“할머니는 알아. 이번 일로 네가 정말 속상했을 거야.”할머니의 눈시울이 촉촉해졌다.“저는 단지 할머니의 건강이 좋아지기를 바랄 뿐이에요.”유진이 말했다.옆에 있던 셋째 이모는 참지 못하고 불평했다.“엄마, 걔가 왜 속상해. 억울한 건 우리야. 그렇게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데…….”“정말 뻔뻔스럽게 말하네!”할머니는 셋째 이모를 노려보았다.셋째 이모는 내키지 않아 더 말하고 싶었지만 다른 친척들이 셋째 이모를 말렸다. 그리고 다른 친척들이 원만하게 수습해 줘 이 일은 원만하게 지나갔다.할머니는 유진에게 몇 마디 더 말했다. 하지만 아직 병이 낫지 않았
임유진은 그제야 눈치챘다. 그들은 병원비를 내게 하려고 유진을 부른 것이다.그리고 만약 유진의 짐작이 틀리지 않았다면 그들은 이미 말을 맞췄을 것이다.아니나 다를까 노준태가 입을 열자 큰삼촌이 즉시 말했다.“아버지, 우리가 무슨 돈이 있어요. 지금 저는 아들을 결혼시킬 돈도 없어요. 그렇지 않으면 우리 명휘가 지금까지 결혼도 안 했겠어요?”“맞아요. 아버지, 저희는 진짜 돈이 없어요!”둘째 삼촌도 재빨리 맞장구를 치고는 유진을 향해 머리를 돌렸다.“유진아, 애초에 우리가 가난하지 않았으면 널 박씨 가문에 시집보낼 생각도 하지 않았을 거야.”“가난하면 저를 바보에게 시집보낼 수 있어요? 가난하면 죄가 없는 게 돼요?”유진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둘째 삼촌이 순간 할 말을 잃자 큰삼촌은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네 두 사촌오빠는 지금까지 결혼도 못 했어. 그들은 우리 노씨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해. 그리고 네 할머니가 평소 널 그렇게 잘해 주셨는데 설마 너는 보답할 생각을 하지 않는 거야? 하물며 감옥에 간 적 있는 너와 결혼하려고 하는 것만 해도 괜찮은 거지!”“할머니가 저한테 잘해준 거지, 삼촌들이 저한테 잘해준 거예요? 왜 제가 삼촌들에게 보답해야 해요?”유진은 너무 어이가 없었다.정말 너무 이기적이다. 오직 다른 사람이 삼촌에게 이득을 주어야 하고 삼촌이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주었는지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말 잘했어. 네가 방금 말했잖아. 네 할머니가 너한테 잘해 주셨으니까 지금 네 할머니가 입원해서 병원비가 많이 드니 네가 부담해야지.”셋째 이모는 득의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마치 이 말 한마디로 유진을 설득한 것 같았다.유진은 셋째 이모가 이렇게 말할 줄 알았다. 유진은 조용히 서서 셋째 이모가 무슨 말을 하는지 지켜보았다.그때 셋째 이모가 계속하여 말했다.“유진아, 사실 그때 네가 먼저 우리에게 대단한 사람과 만난다고 말해줬으면 그런 오해는 일어나지 않았을 거야. 우리는 단지 너에게 의지할 가정을 만들어 주고 싶었을
그 순간 사람들의 난색이 어두워졌다.그때 셋째 이모가 곧바로 말문을 열었다.“그게 무슨 뜻이야?”“저는 4천만을 낼 생각이 없다는 뜻이에요!”유진이 차갑게 말했다.“저는 단 한 번도 대단한 사람과 만난다는 말을 한 적이 없어요. 그리고 할머니는 셋째 이모의 엄마이기도 하잖아요. 할머니를 돌보는 건 당연한 일이에요. 그런데 손녀인 저에게 차비와 노동비를 내라고 하는 게 너무 어이없지 않아요?”“유진아, 그렇게 말하면 안 되지. 네 큰삼촌, 둘째 삼촌이 그날 그 대단한 인물이 널 안고 박씨 저택을 나오는 걸 두 눈으로 똑똑히 봤어.”“저는 아무것도 몰라요. 저는 큰삼촌이 탄 약을 먹고 정신을 잃은 것밖에 기억나지 않아요.”유진이 콧방귀를 뀌었다.“아마 남을 돕는 것을 낙으로 삼는 사람이 조카를 그렇게 괴롭히는 게 눈에 거슬렸겠죠. 아니면 큰삼촌, 둘째 삼촌이 그 대단한 인물이 누군지 알려줘요. 가서 인사라도 하게.”노준태는 그의 자식들과 서로 마주 보고 있다.모르는 사람? 그게 가능할까?“유진아, 어쨌든 이 돈은 네가 내. 네 할머니는 네가 경찰서에 큰삼촌, 둘째 삼촌을 신고해 화병이 나서 이렇게 된 거야.”노준태가 말했다.“할아버지, 틀렸어요. 저는 피해자예요. 경찰은 법에 따라 일을 한 것뿐이에요. 만약 애초에 큰삼촌, 둘째 삼촌, 셋째 이모가 저를 바보에게 시집보내는 걸 계획하지 않았다면 이런 일은 없었을 거예요. 만약 할아버지가 제가 그들을 해쳤다고 생각한다면 저와 같이 경찰서에 가서 제대로 알아봐요.”유진은 나긋나긋하게 말했다. 하지만 할아버지의 낯색이 변했고 얼마 전까지만 해도 경찰서에 갇힌 다른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몸을 떨었다.겨우 나왔는데 다시 들어가서 제대로 알아본다? 만약 또 갇히면 언제 나올지 아무도 모른다.“그럼 넌 한 푼도 안 내겠다는 거야?”노준태는 어두운 표정으로 말했다. “너희 할머니가 병을 고칠 돈이 없어서 병원에서 쫓겨나는 것이 두렵지 않니?”“정말 삼촌들이 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할머니는 건물
“그럼 우리가 병을 고칠 돈이 없어 네 엄마를 집에 데리고 간다고 하면 돼. 유진이가 감히 병원비를 안 내?”노준태가 화를 내며 말했다.“만약 진짜 저희를 고소하면 어떻게 해요?”큰삼촌은 걱정하며 말했다.그러자 둘째 삼촌이 곧바로 말했다.“맞아요. 유진이는 법학과의 수재였고 변호사까지 했잖아요. 그리고 유진이를 보호하는 대단한 사람이 있을 거예요. 진짜 우리를 고소하면 승소할 가능성이 희박해요.”노준태는 턱을 쓰다듬으며 보기 흉한 표정을 지었다.“그럼 너희 셋이 나머지 병원비를 내.”“저희가 내라고요?”셋째 이모가 다급히 말했다.“그렇지 않으면? 그 계집애가 고소할 때까지 기다릴까?”노준태는 딸을 노려보았다.“병원비를 내지 않으면 철거 보상금은 건드릴 생각조차 하지 마!”셋째 이모는 순간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비록 셋째 이모는 시집간 딸이지만 애당초 아버지가 셋째 이모에게도 보상금을 나눠줄 것이라고 했다.지금 온 가족이 철거 보상금에 기대를 걸고 있다!만약 정말 임유진이 고소를 한다면 유진과도 철거 보상금을 나누게 될 것이다.한 무리의 사람들은 서로 눈치 보기 바빴고 결국 세 집이 함께 돈을 모으기로 결정할 수밖에 없었다.…….유진은 할머니의 병실로 돌아왔다. 할머니가 이미 잠들어 유진은 침대 옆에 앉아 조용히 외할머니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예전에는 항상 외할머니가 자신을 보호해 주셨는데 지금은 늙어서 유진이 할머니를 보호해야 한다.사실 만약 유진이 정말 돈이 있다면 유진은 혼자 할머니의 병원비를 전부 부담할 것이지만 현재의 유진은 생활이 어려워 할머니의 병원비를 혼자 부담할 수가 없다.그리고 유진이 철거 보상금 얘기를 했으니 할아버지와 삼촌들이 할머니에게 잘 치료해 줄 것이다.설사 만약 병원비가 정말 부족하더라도 유진은 되도록 외할머니를 도와 권익을 쟁취할 것이고 보상금으로 할머니의 남은 생을 보장할 수 있도록 할 것이다.지금 유진은 외할머니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너무 적다.얼마나 지났는지 날도 점점 어두
“그냥 그렇게 됐어요. 그런 일을 했으니 당연히 자신이 한 짓에 책임져야죠.”강현수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것처럼 덤덤하게 말했다. 하지만 임유진은 흠칫 놀랐다. 설마…… 김선아는 연예계에서 매장당한 것일까? 심지어 강제로 은퇴했을 수도 있다.그 후로 화려함은 사라지고 평범해야 한다.다만 이 세상에 평범함을 달가워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특히 화려함을 맛본 적 있는 사람은 평범한 일반인이 되는 것을 견디지 못할 것이다.“왜 그래요? 지금 그녀를 동정하는 거예요?”현수는 유진을 바라보며 말했다.“그날, 김선아가 유진 씨에게 예의 없게 굴었잖아요.”“동정하지 않아요. 그녀는 아마 내 동정이 필요하지 않을 거예요.”유진이 말했다.“그리고 그쪽도 사과의 의미로 밥을 살 필요 없어요. 저는 빨리 S시로 가는 버스를 타야 해요.”“그런데 제가 하필 밥을 사주고 싶은데 어떡하죠?”현수가 말했다.그러자 유진이 덤덤하게 말했다.“밥 사는 것도 억지를 부릴 수 있어요?”“평소엔 억지를 부르는 것을 좋아하지 않지만 가끔은 나쁘지 않아요.”현수는 말하며 유진의 손을 잡고 주차장 방향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강현수 씨, 뭐 하는 거예요?”유진이 소리 질렀다.“단지 유진 씨와 밥을 먹고 싶을 뿐이에요.”현수가 담담하게 말했다.진짜 밥만 먹으려는 걸까? 현수 같은 남자가 여자와 같이 식사를 하고 싶다면 같이 할 여자가 넘칠 것이다. 이렇게 억지로 싫다는 유진과 식사 할 필요는 전혀 없다.유진이 생각을 하는 사이 두 사람은 이미 현수의 차 앞에 왔다.현수가 조수석의 차문을 열고 유진에게 말했다.“강현수 씨, 전 정말 같이 식사할 시간이 없어요. 마지막 버스 시간이 제한되어 있어요. 그 시간을 놓치면 오늘 밤 S시로 돌아갈 수 없어요.”칠흑 같은 눈동자가 유진을 뚫어지게 쳐다보며 말했다.“만약 당신이 정말 저와 밥을 먹기 싫다면 당신은 어떻게 해도 그 버스에 탈 수 없을 거예요. 장담해요.”유진은 어이가 없었다. 현수의 능력으로 전혀 어려운
“네.”한지영은 고개를 끄덕이며 연우진을 보냈다.가만히 서서 기다리고 있자니 갑자기 속이 울렁거려 그녀는 근처 쓰레기통 앞으로 가 음식물을 게워냈다.그렇게 한참을 토하던 그녀는 오늘 먹었던 것을 다 비우고서야 주섬주섬 가방을 더듬으며 티슈를 찾았다.하지만 아무리 찾아도 티슈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그때 웬 손수건 하나가 그녀의 눈앞에 나타났다.“고마워요.”한지영은 눈을 게슴츠레 뜬 채 그것이 손수건인지 티슈인지 확인도 하지 않고 입가를 쓱 닦았다.야무지게 다 닦고서야 그녀는 손에 든 것이 티슈가 아닌 손수건이었다는 것을 알아챘다.“어... 이거는 내가 내일 세탁해서 다시 줄게요.”한지영은 말을 하면서 서서히 고개를 들었다.당연히 연우진이 건넨 손수건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다. 눈앞에 있는 사람은 너무나도 익숙한, 5년간 틈틈이 그녀의 꿈에 나타나던 남자의 얼굴이었다.슈트 차림의 남자는 머리를 완전히 빗어 올린 채 훤한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환한 달빛 때문인지 원래부터 예뻤던 얼굴이 오늘따라 더더욱 예뻐 보였다.세월의 흔적 같은 게 존재하지 않는 남자의 얼굴을 한지영은 말없이 가만히 바라보았다.“끅...”술 냄새를 가득 담은 딸꾹질과 함께 조용했던 침묵이 깨졌다.“오랜... 만이에요.”한지영의 입에서 먼저 말이 흘러나왔다. 술을 마셨던 터라 말이 느려지고 또 버벅거렸다.“너 취했어.”백연신이 눈을 가늘게 뜨며 말했다.“술을 좀 마셨어요.”한지영은 눈앞의 남자를 두 눈에 똑바로 담으려는 듯 눈을 크게 뜨기 위해 노력했다.“아까 그 남자는... 남자친구야?”백연신이 물었다.“남자친구?”한지영은 눈을 깜빡이다 갑자기 피식 웃었다. 술에 취해있어 그런지 그 웃음이 어쩐지 바보 같아 보였다.“아... 우진 씨는 오늘 소개팅한 남자예요. 괜찮은 사람이었어요. 첫 만남인데도 대화도 잘 통하고...”한지영은 말을 하며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술기운 때문인지 두 눈이 심하게 요동치고 있었다.그간 백연신을 향한 마음을 접으려고
“그건 아니고 이제껏 설렌다는 느낌이 들었던 여성분이 없었어요.”설레는 느낌이라는 걸 누군가는 부질없는 감정이라고 할지 몰라도 적어도 한지영은 그 말을 쉽게 지나칠 수 없었다.이제껏 많은 아이돌과 배우들을 좋아해 왔지만 진정으로 마음이 설레었던 사람은 백연신 한 사람뿐이었으니까.아무리 소개팅을 해봐도 같이 있으면 가슴이 뛴다고 느껴지는 남자는 없었다.“설렌다는 느낌... 중요하죠. 쉽게 느끼기 어려운 감정이잖아요. 그리고 그런 느낌이 들었던 상대를 놓치고 다시 찾으려고 하면 더 힘들고요.”한지영의 말에 연우진이 조금 흠칫했다.“지영 씨는 그런 사람을 만난 적이 있나 봐요?”“네, 딱 한 번 있었어요.”한지영은 솔직하게 대답했다.연우진은 분명히 소개팅 상대였지만 그녀는 얘기를 나누면서 그가 남자로 보이는 것이 아닌 묘하게 친구 같이 느껴졌다.“어떤 사람이었어요?”연우진이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었다.“그 사람은 일단 너무 예쁜 사람이었어요. 그리고 내 말이라면 뭐든 다 들어주는 그런 착한 사람이었죠.”백연신 얘기에 한지영의 입꼬리가 저도 모르게 위로 말려 올라갔다.이미 헤어졌음에도 백연신과 함께 했던 나날은 여전히 그녀의 마음속에 제일 소중했던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연우진이 생각보다 편한 말 상대였기 때문인지 아니면 오늘 우연히 백연신의 소식을 들어서인지 한지영은 평소보다 훨씬 더 감정적이고 말이 많았다.그녀는 술을 연거푸 마시며 얘기를 이어갔고 연우진은 그런 그녀의 얘기를 그저 가만히 들어주고만 있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한지영이 앉아있는데도 휘청거리자 연우진은 그제야 술잔을 들어 올리려는 그녀의 손을 제지했다.“이제 그만 마셔요. 이러다 취하겠어요.”“취하는 게 뭐가 나빠요?”한지영이 웅얼거렸다.“지영 씨랑 나 오늘 첫 만남 아닌가요? 내가 어떤 사람인지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이렇게 무방비한 모습을 막 보여줘도 돼요? 내가 나쁜 마음이라도 먹으면 어쩌려고?”연우진의 말에 한지영이 피식 웃었다.“정말 그럴 생각
한지영은 손가락을 억지로 움직이며 소개팅 상대에게 메시지를 보냈다.그녀가 지금 신경 써야 할 사람은 백연신이 아니라 소개팅 상대였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진정으로 그녀를 좋아하고 그녀도 좋아하는 남자가 나올지도 모른다.저녁.한지영은 약속 시간에 맞춰 번화가의 한 카페로 들어섰다.창가 쪽으로 향하니 소개팅 상대가 앉아있는 것이 보였다. 남자의 이름은 연우진이었고 현재 대기업에서 팀장직을 맡고 있는 유능한 사람이었다.한지영은 남자의 겉모습을 확인하고는 저도 모르게 속으로 감탄했다. 스펙이 좋은 사람이라는 건 프로필을 통해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외모까지 훌륭할 줄은 몰랐다.연우진은 깔끔한 정장 차림에 안경을 쓰고 있었다. 지적인 분위기에 앉아있는 자세까지 바른 것이 상당히 인기가 많을 것 같았다. 게다가 35살이라고 들었는데 막상 보니 이제 막 30대가 된 듯한 얼굴이었다.“안녕하세요. 한지영 씨 맞으시죠? 만나서 반가워요.”한지영이 자리에 앉기도 전에 남자가 먼저 인사를 건네왔다.“네, 안녕하세요.”한지영은 서둘러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 앉았다.두 사람은 첫 만남에 할법한 얘기를 서로 두어 마디 주고받은 후 곧바로 근처 레스토랑으로 향했다.사실 한지영은 그저 아무런 고깃집이나 들어가 대충 식사를 하고 만남을 끝내려고 했는데 연우진은 원래 성격이 그런 건지 아니면 소개팅하는 여자들과는 항상 레스토랑을 가는 건지 아주 자연스럽게 그녀를 데리고 비싼 레스토랑으로 왔다.메뉴판을 들어 가격을 보니 헙 하는 소리가 절로 나왔다.“드시고 싶은 거 마음껏 주문하세요.”연우진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한지영은 잠깐 고민하더니 결국에는 상대적으로 저렴한 음식들을 주문했다.이에 연우진은 그녀를 잠시 바라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다른 음식도 주문한 다음 웨이터에게 메뉴판을 건넸다.“실례가 안 된다면 지영 씨가 소개팅에 나온 이유를 물어도 될까요? 혹시 나이 압박 때문에 결혼을 서두르고 싶은 건가요?”음식을 먹던 중에 연우진이 먼저 질문을 건네왔다.“그렇지
설마 재벌과 사귀었던 신데렐라가 주변에 있을 거라고는 생각도 못 했으니까.한지영은 천천히 정신을 차리고 조나연을 바라보았다. 조나연이 무슨 의도로 이런 말을 하는지 생각해볼 필요도 없었다. 이 번기 회에 자신을 깎아내리며 조롱하려는 게 분명했으니까.조나연은 예전에도 이런 식으로 묘하게 그녀를 깎아내렸다. 게다가 한지영이 없을 때면 다른 동료에게 두 사람은 얼마 안 가 반드시 헤어지게 될 거라며 저주 아닌 저주를 퍼붓기도 했다.그러다 정말 헤어졌을 때는 한껏 기분 좋은 얼굴로 한지영에게 이런 말을 건넸다.“나는 두 사람 오래 못 갈 줄 알았어요. 솔직히 백연신 씨가 아무것도 없는 지영 씨와 진심으로 사귈 리가 없잖아요. 요즘은 남자들도 여자 배경을 본다고요.”진심이 아니었다고? 그럴 리는 없다.한지영과 사귀었을 당시 백연신은 늘 그녀에게 진심을 다해 행동했고 자신의 사랑을 가감 없이 보여주었다. 그러니 진심이 아니었다는 말은 틀렸다.하지만 조나연의 말에 맞는 말도 있었다. 결과적으로 한지영은 백연신이 원하는 것을 주지 못했으니까.“지금 돌이켜봐도 참 안타까워요. 만약 헤어지지 않았으면 지금쯤 사모님 소리 들으며 편히 살고 있을 텐데.”조나연이 안타까운 척 그녀를 비꼬았다.한지영은 그런 그녀를 차가운 눈길로 빤히 바라보더니 갑자기 피식 웃었다.“그렇게 안타까우면 백연신 씨와 나 사이에 다리 좀 놔주지 그래요? 말로만 계속 안타깝다고 하니까 괜히 놀림 받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물론 제 착각이겠죠, 안 그래요?”한지영의 뼈 있는 말에 조나연의 얼굴이 한순간에 일그러졌다.그리고 가만히 구경하던 동료들 역시 그제야 분위기를 파악한 듯 이상한 눈길로 조나연을 바라보았다.조나연은 조금 머쓱한 얼굴로 웃더니 별다른 대답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한지영은 자리로 돌아간 후 소개팅 상대와 약속 시간을 잡으려고 휴대폰을 집어 들었다가 잠깐 멈칫하더니 저도 모르게 백연신의 기사를 검색했다.지난 5년간 그녀는 백연신을 완전히 내려놓을 작정으로 그와 관련
한지영은 한숨을 한번 내뱉더니 이내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엄마, 소개팅 같은 거 하기 싫다고 내가 분명히 말했잖아요. 남자는 내가 알아서 찾을 테니까 나 좀 가만히 내버려 둬요. 이게 대체 몇 번째야.”“네가 어련히 알아서 잘하면 내가 이러지 않겠지. 너 이제 20대 아니고 30대야. 34살이나 돼서 남자친구 한 명 없다는 게 말이 돼? 내일모레면 당장 노산에 진입하는데 그때 되면 점점 더 좋은 남자 찾는 게 어려워져!”이해영이 속사포로 말을 뱉어냈다.한지영도 그녀가 왜 이렇게까지 소개팅을 주선하는지 잘 알고 있다. 34살이나 된 딸이 이대로 계속 남자와의 교제를 피하다 결국에는 남자도 자식도 없이 홀로 인생을 마감할까 봐 걱정되고 또 불안한 거겠지.사실 한지영은 혼자서도 얼마든지 잘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주의였다. 게다가 요즘은 실버타운도 잘 되어있어 정말 혼자가 된다고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었다.하지만 부모님들은 그런 걸 바라지도 않거나와 그래도 결혼은 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분들이었다.그래서 한지영은 결국 오늘도 소개팅을 수락하고 말았다.더 이상 부모님께 걱정을 끼쳐드리고 싶지 않았기도 했고 말이다.“아, 알겠어요. 만나면 되잖아요. 톡으로 연락처 보내세요. 이따 연락할게요.”이해영은 딸의 말에 그제야 만족하며 전화를 끊었다.몇 초 후 한지영의 휴대폰에 메시지 하나가 도착했다. 보낸 사람은 이해영이었고 내용은 소개팅할 남자의 프로필과 연락처였다.한지영은 메시지를 보고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었다. 이해영의 말대로 그녀도 이제는 34살로 절대 마냥 어리기만 한 나이는 아니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그녀는 백연신을 천천히 마음속에서 내려놓았다....정말?문득 마음속 깊은 속에서 이러한 의문이 떠올랐다.정말 백연신을 향한 마음을 완전히 접어버린 게 맞나?한지영은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이내 잡생각을 털어버리듯 머리를 흔들며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자리로 돌아가려는데 웬 동료 한 명이 그녀를 불렀다.“지영 씨,
얘기가 일단락되자 강지혁은 아들의 손을 잡고, 임유진은 딸의 손을 잡고, 그리고 두 아이는 서로의 손을 꼭 잡은 채 유치원 안으로 들어갔다.소민아는 그런 네 사람의 뒤를 따라 딸과 함께 조용히 앞으로 걸어갔다.만약 전이였다면 어떻게 해서든지 강지혁의 옆에 서며 사람들의 뇌리에 그 모습을 각인하려고 했을 텐데 지금은 그럴 수가 없어 그저 고개를 푹 숙인 채 얼굴을 가릴 수밖에 없었다.소민아의 손을 잡고 안으로 들어가던 소안나는 강선현과 강선율이 맞잡고 있는 손을 빤히 바라보며 미간을 찡그렸다.강선율이 그녀의 손을 잡아준 건 첫 만남뿐으로 그 뒤로는 한번도 손을 잡아주려고 하지 않았다. 분명히 전보다 훨씬 예뻐지고 공주 옷도 입고 머리도 예쁘게 했는데 강선율은 다른 이들처럼 그녀에게 예쁘다고 칭찬해주기는커녕 점점 더 거리를 두며 이제는 말도 잘 섞으려고 하지 않았다.소안나는 그런 강선율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왜 자신의 손은 잡아주려 하지 않는 거지?결국에는 양녀라 정을 주지 않는 건가?경찰서 앞에서의 일이 있고 난 뒤 소민아는 강지혁의 사진을 들고 있던 여자아이가 바로 강씨 가문의 진정한 딸이고 강선율의 친여동생이라는 것을 소안나에게 얘기해주었다.소안나는 그 말을 듣고는 더욱더 기분이 나빠졌다. 갑자기 나타난 강선현에게 아빠와 오빠를 빼앗기는 것 같았으니까.유치원 입구에 다다른 임유진은 먼저 아이들을 안으로 들여보내고 선생님들과 얘기를 나눴다. 그리고 강지혁은 그런 그녀의 옆에 선 채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었다.강선율은 안으로 들어간 후에도 강선현의 손을 꼭 잡은 채 자리까지 이동했다. 그러고는 듬직한 오빠의 얼굴로 동생의 가방을 직접 옆에 내려놓아 주기도 했다.그 장면을 바라보던 소안나는 질투심에 씩씩거렸다.‘나한테는 한번도 그렇게 해주지 않았으면서! 오빠랑 먼저 알게 된 건 쟤가 아니라 안나잖아!’“엄마, 나도 율이 오빠 친동생 하면 안 돼요?”소안나가 고개를 홱 들며 소민아에게 물었다.소민아는 딸의 말에 서둘러 주위
소씨 모녀의 등장에 사람들의 두 눈은 금세 흥미로움으로 가득 찼다. 그도 그럴 것이 강지혁이 또다시 결혼하게 된다면 그 상대는 분명히 양녀의 어머니인 소민아라고 생각했으니까.임유진은 포르쉐에서 내린 소민아를 발견하고는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간 집사와 고이준으로부터 전해 들은 말에 의하면 소민아는 소소하게 인기를 얻고 있던 인플루언서였다가 재벌 2세의 아이를 배고 그 집의 며느리로 들어가려다가 철저하게 버림을 받고 홀로 아이를 키우며 그간 힘든 나날을 보냈다고 한다.소안나가 강씨 가문에 입양된 건 2년 전의 일로 강지혁은 소안나와 소민아를 위해 집도 주고 생활비도 다달이 보내주며 그 외의 큰 지출도 부담해주었다고 한다. 즉 소씨 모녀는 하루아침에 강지혁이라는 든든한 백을 둔 신데렐라 모녀가 됐다는 뜻이었다.지금 소민아가 입고 있는 옷이나 타고 있는 차량만 봐도 그간 얼마나 호의호식하며 지냈는지 충분히 알 수 있었다.임유진이 소민아를 훑어보고 있을 때 소민아도 마찬가지로 임유진을 훑어보고 있었다. 설마 레스토랑에서 언쟁을 벌였던 별 볼 일 없는 여자가 강지혁의 사망한 아내라고 그 누가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소민아는 강지혁과 함께 나란히 서 있는 임유진을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질투의 감정이 몸 곳곳에 퍼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하지만 그 감정을 겉으로 내비칠 수는 없었기에 소민아는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임유진 씨 맞으시죠? 그날은 죄송했어요. 딸 일이라 괜히 흥분해서 언성을 좀 높였어요. 용서해주세요...”그 말에 임유진이 뭐라 대꾸하려는데 강지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호칭 똑바로 해. 임유진 씨가 아니라 사모님.”차가운 그의 말에 주변 공기가 한순간에 얼어붙었다. 임유진이 강지혁의 아내였다는 것을 알고 있던 사람들은 임유진의 위치를 똑똑히 전하고자 하는 강지혁의 의도를 바로 알아챘다.5년 만에 돌아왔어도 임유진은 여전히 강지혁의 아내였고 강씨 가문의 안주인이었다.하지만 임유진이 누군지 모르고 있는 사람들은 강지혁의 말에
게다가 5년 만에 돌아온 거라 그간 많이 변한 저택의 상황도 알아야 했고 새로운 사람들과도 익숙해져야만 했다.그래서 아이들 일에는 조금 소홀해졌다. 딸이 아버지를 원했던 만큼 아들도 마찬가지로 엄마를 원했을 텐데 말이다.저택 고용인들에게 듣기로 강지혁은 매일 아침 율이와 함께 저택을 나서기는 하지만 나가서는 서로 다른 차를 타고 각자의 목적지로 향한다고 한다.즉, 강선율은 그간 아버지가 아닌 도우미나 기사의 보호 아래 유치원에 갔다는 소리였다.임유진은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또다시 죄책감이 피어올랐다. 또한 바쁘다는 이유로 율이에게 소홀했던 자신에게 화가 나기도 했다.강선율은 임유진의 팔이 더 세게 자신을 끌어안자 조금 움찔했다. 여전히 누군가에게 안기는 일은 익숙지 않았지만 상대가 엄마라서 그런지 이런 식의 포옹도 이제는 받아들일 수 있을 것 같았다. 아니, 솔직히 말하면 기분이 좋았다.게다가 앞으로는 하루도 빠짐없이 함께 유치원으로 가주겠다는 말 또한 기분 좋게 귓가에서 맴돌았다....다음날.강선현이 유치원으로 가는 날, 임유진은 율이와 현이에게 똑같은 옷을 입혔다. 다른 점이 있다면 강선율은 바지고 강선현은 치마라는 것이다. 엇비슷한 키의 두 아이가 똑같은 옷에 똑같은 신발을 신은 채 가방을 메고 있는 모습을 보니 절로 마음이 녹는 기분이었다.임유진은 결국 참지 못하고 두 아이를 품에 끌어안고 뽀뽀 세례를 퍼부었다.강선현은 그녀의 이런 행동에 이미 습관이 되었던 터라 꺄르르 웃으며 뽀뽀로 회답했지만 강선율은 별다른 반응 없이 그저 그녀의 행동을 받고만 있었다. 분명히 무표정한 얼굴이었지만 귀가 살짝 빨개진 것을 보니 기분이 나쁜 건 아닌 듯했다.강지혁은 세 사람이 다정하게 스킨십하는 걸 보면서 저도 모르게 슬쩍 입꼬리를 위로 올렸다.유치원에 도착한 후, 강지혁과 임유진은 각자 아이의 손을 잡고 차에서 내렸다. 아이를 등원시키러 온 학부모들은 네 사람의 등장에 입을 떡 벌리며 그대로 굳어버렸다.강지혁은 좀처럼 유치원에 얼굴을 내비치
하지만 남매 사이가 하루가 다르게 좋은 것 같아 보이니 임유진은 괜히 뿌듯해 나며 기분이 좋았다.“내일 유치원 갈 때 아빠도 엄마랑 함께 현이 데려다주면 안 돼?”현이가 눈을 반짝이며 강지혁을 바라보았다. 어지간히도 같이 가고 싶은 듯했다.강지혁은 아이가 이런 요구를 해올 줄은 몰랐는지 미간을 살짝 꿈틀거렸다.“유치원에 같이 가달라고?”“응! 원래 유치원 가는 첫날은 엄마랑 아빠가 함께 가줘야 하는 거야!”현이는 이번이 첫 유치원은 아니었지만 이제는 아빠도 찾았으니 강지혁과 함께 등원하고 싶었다. 아빠가 있다는 기분을 마음껏 누리고 싶었다.사실 지금껏 아빠의 부재에도 잘 자라왔던 아이였지만 아무래도 아빠의 빈자리가 꽤 컸던 모양이다.“그래, 그럼 내일 유치원에 같이 가줄게.”강지혁의 말에 현이는 활짝 웃더니 곧바로 팔을 쭉 내밀었다. 품에 안기고 싶다는 뜻이었다.강지혁은 스킨십 많은 딸이 아직도 잘 적응이 되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아들인 율이는 이제껏 이런 식의 요구를 해오지 않았으니까.하지만 임유진과 쏙 빼닮은 두 눈을 보고 있자니 저도 모르게 아이에게로 팔이 뻗어졌다.현이는 강지혁에게 안긴 후 그의 목을 꼭 끌어안으며 지난번 서재에서처럼 볼에 쪽 하고 뽀뽀를 했다.“아빠가 최고야!”진심으로 기뻐 보이는 딸의 모습에 임유진은 괜스레 코끝이 찡해 났다.딸이 아빠의 존재를 그리워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새삼 이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조금 더 빨리 기억을 회복하지 못했던 것에 죄책감이 일었다.임유진은 눈물을 감추기 위해 서둘러 시선을 돌렸다. 그러다 바로 옆에 서 있는 아들을 발견했다.혹시 율이도 엄마를 그리워하고 있지는 않았을까? 엄마가 있어야 하는 상황에 항상 없었던 것에 쓸쓸해 하지는 않았을까?“율아.”임유진은 그 생각에 강선율을 향해 팔을 활짝 열었다.“엄마가 안아줄까?”아이는 그 말에 어색해하며 답했다.“전 어린애가 아니에요. 동생이나 안아주세요.”말은 이렇게 하지만 은근히 원하고 있다는 눈빛을 보냈다.임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