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누나 때문에 옥살이까지 했는데 지금 풀려나면 그들이 누나한테 원한을 품고 심지어 더 심하게 괴롭힐까 봐 걱정되지 않아?”강지혁이 물었다.임유진은 침묵하고 있었다. 당연히 알고 있다. 이번 일로 큰삼촌은 유진이 그들을 풀어준 것에 감사하지 않고 오히려 유진에게 더 큰 원한을 가질 것이다.“그들은 내가 신경 쓰는 사람이 아니야. 그러니 그들이 날 얼마나 미워하고 어떻게 생각할지는 나랑 상관없어.”유진은 눈을 지그시 감고 덤덤하게 말했다.그러나 유진의 덤덤한 모습에 지혁은 오히려 괴로웠다.“그럼 나는?”지혁이 불쑥 물었다.“뭘?”유진은 순간 반응하지 못하고 멍때렸다.지혁은 두 손으로 침대 머리를 잡고 유진에게 다가가 물었다.“난? 누나는 날 신경 써? 내가 누나를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있어?”유진은 멍해졌다. 만약 그가 혁이라면 유진은 당연히 신경 쓰지만, 지금의 그는 강지혁이다…….“내가 신경 쓰든 말든 너에게는 전혀 상관없잖아.”유진이 말했다.“만약 내가 하필 상관이 있다고 생각한다면?”지혁이 말했다.유진은 입술을 깨물고 한숨을 쉬었다.“신경 쓰여.”유진이 곧바로 대답하자 지혁은 조금 의외였다.“이유는?”“넌 강지혁이니까. S시에서 아주 대단한 사람이니까. 네 말 한마디로 다른 사람의 생각을 바꿀 수 있으니 난 당연히 네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신경 쓸 수밖에 없어. 난 네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없어.”지혁의 기분을 상하게 해 감옥에서 수없는 고통을 받았다. 유진은 무서웠다. 너무 무서웠다!지금의 유진은 사실 지혁에게 미움을 살 아무런 자격도 없다.지혁의 기분은 삽시에 나빠졌다.“내 기분을 상하게 할 수 없다고? 그러면 애초에 누나가 내 곁에 남지 않겠다고 했을 때 이미 내 기분을 상하게 했다고 생각 안 해?”지혁이 차갑게 말했다.그러자 유진의 몸이 움츠러들었다.지혁은 갑자기 손을 들어 유진의 얼굴을 잡더니 아주 따뜻한 말투로 말했다.“어젯밤 내가 누나를 이곳에 데려온 뒤 이 방에서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알
임유진은 다급히 침대에서 내려오더니 한마디 말하고 황급히 화장실로 달려갔다.“난 좀 씻을게.”강지혁은 도망치는 듯한 유진의 뒷모습을 보자 낯색이 더 어두워졌다.화장실에서 유진은 거울에 비친 자신의 새빨간 얼굴을 보며 숨을 헐떡였다.유진은 도무지 방금 지혁이 말한 것을 믿을 수 없다. 유진이…… 주동적으로 지혁에게 키스했다.어떻게 그런 일이 생길 수 있을까!하지만…… 유진은 조금 망설였다. 정말 불가능할까? 유진은 자신이 술에 취한 줄도 몰랐다. 무슨 짓을 했을까?만약…… 지혁의 말이 사실이면? 그럼 유진은…….그런 가능성을 생각하면 유진은 자신을 매장하고 싶은 충동이 든다.황급히 세수를 마치고 화장실을 나오자 지혁은 여전히 집에 있었다.지금 지혁은 의자에 앉아 물 한 잔을 들고 홀짝거리고 있다.핸드메이드 정장, 넓은 어깨와 두 긴 다리가 우아하게 겹쳐 있다. 아름다운 얼굴, 입체적이고 깊은 윤곽, 오밀조밀한 이목구비 그리고 지혁이 눈을 반쯤 깔고 있을 때, 긴 속눈썹은 부채 같았고 두 눈을 완전히 떴을 때는 아주 분위기 있고 우아했다.지혁이 앉아 있기만 해도 마치 그림 한 폭을 보는 것처럼 눈과 마음을 즐겁게 한다.비록 지금 지혁이 들고 있는 것은 싸구려 찻잔이지만 지혁의 몸에서 풍기는 귀티는 여전하다.왜 그전에는 눈치채지 못했을까!유진은 마음속으로 자신을 욕하고 있다. 사실 지혁이 유진과 지낼 때도 유진은 지혁의 습관적인 동작과 식사 예절, 그리고 자세에서 교양이 드러났고 노숙자 같지 않다고 생각했다.그때 지혁이 고개를 돌려 복숭아 같은 눈동자로 유진을 바라보았다. 그순간 유진은 지혁의 눈빛에 빠진 것 같았다.“난…… 나 출근해야 돼.”유진은 가까스로 이성을 되찾았다. 이미 오전 9시가 넘은 시간이라 몇 시간이나 지각했다. 또 돈이 깎이고 혼날 것이다.“조급해하지 마. 내가 이미 휴가 신청을 했어.”지혁이 말했다.유진은 멍하니 지혁의 말을 듣고 있었다.“참, 내가 쓰던 물건이랑 옷은 다 버린 거야?”유진은 입술을 오므
강지혁 같은 사람은 평소 명품 브랜드의 특별제작한 장갑만 착용할 것이다.지혁은 임유진의 멍한 모습을 보고 한마디 더 보탰다.“내가 누나의 친척을 풀어줬으니 감사의 표시를 해야잖아?”유진은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하지만…… 이미 그때 적어둔 치수가 없어.”그때 유진은 장갑을 만들기 위해 줄자로 한참 동안 지혁의 손바닥 치수를 재었다.나중에는 장갑을 만들 필요가 없어 치수가 적힌 종이도 버렸다.“치수가 없으면 다시 재봐.”지혁이 곧바로 말했다.유진은 어쩔 수 없이 다시 줄자를 꺼낸 다음 지혁의 옆에 앉아 줄자를 들고 지혁의 손 치수를 측정했다.자연히 유진의 손은 어쩔 수 없이 지혁의 손에 닿았다.유진의 손끝이 지혁의 손에 닿을 때마다 유진은 가능한 한 조심스럽게 피했다. 줄자조차도 두 손가락의 가장자리로 잡고 치수를 재고 있었다.지혁은 비웃는 듯 유진의 행동을 바라보았다.“어젯밤에는 그렇게 대담하게 나를 안고 키스하고 뽀뽀했는데, 지금은 날 만지기도 싫어하네. 왜 날 만지는 게 누나한테는 너무 어려운 일이야?”유진의 얼굴은 갑자기 다시 붉어졌다.“난…… 난 그때 술에 취했어…….”“그러니까 술에 취하지 않으면 날 만지기도 싫어?”지혁은 유진을 빤히 쳐다보며 물었다.유진은 지혁의 비웃는 듯한 눈빛에 숨이 막혀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지혁은 가볍게 눈을 감았다.“누나, 난 언젠가 누나가 날 주동적으로 만지게 할 거야. 지금은 누나를 강제로 내 곁에 남게 하지 않을 거야. 그러나 언젠가 누나가 내 곁에 남고 싶어서 나한테 부탁할 거야.”차가운 목소리는 잡담을 말하는 것처럼 담담했다. 하지만 유진은 그 말을 들은 순간 벼락을 맞은 것처럼 갑자기 마음이 혼란스러워졌다.주동적으로 지혁을 만지고 자발적으로 지혁의 곁에 남아 있으려 한다.그게 말이 될까?유진과 지혁은 다른 세계의 사람이다. 하물며…… 유진에게 강지혁 세 글자를 대표하는 상처가…… 너무너무 많다.…….유진은 오후에 환경위생과로 왔다.서미옥은 유진의 초췌한
빨리 만들기 위해 임유진은 절반을 짠 장갑과 털실을 직장에 가져가 점심 휴식 시간에도 짰다.서미옥은 유진이 장갑을 짜는 것을 보자 궁금해졌다.“네가 착용할 거야? 좀 커 보이는데.”“선물할 거야?”미옥이 물었다.“네.”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설마 남자친구 생긴 거야?”미옥이 또 물었다.“아니에요.”유진이 얼른 부인했다.“없는데 왜 그렇게 열심히 만드는 거야? 점심 휴식 시간까지 만들 필요가 있어?”미옥은 유진의 말을 믿지 않는 것 같았다.유진은 할 말이 없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설마 지혁에게 선물할 거라고 말할 것인가? 빨리 주고 일을 끝내기 위해 점심 휴식 시간까지 이용한다고?만약 정말 그렇게 말한다면 아마 미옥은 유진의 머리가 어떻게 되었다고 생각할 것이다.“정말 아쉬워. 동현 씨가 실연한 거 같아.”미옥은 조금 아쉬웠다.“사실 동현 씨는 형편도 괜찮고 사람도 좋아. 집까지 마련했잖아. 그런 남자에게 시집가면 한평생 편안하게 지낼 수 있을 건데.”확실히 만약 정말 곽동현에게 시집간다면 한평생 안정될 수 있다.다만 그 당시 교통사고가 났을 때부터 유진은 한평생 안정될 수 없다.유진은 동현이 진정 평생 사랑할 수 있는 여자를 찾기 바란다.“소문을 들었는데 동현 씨 사직할 거래. 비록 환경위생과에서 일하는 게 조금 부끄럽지만 그래도 동현 씨는 공무원이잖아. 공무원이 되는 게 얼마나 힘든데.”유진은 흠칫 놀랐다.“곽동현 씨가 사직한대요?”“나도 들은 거야.”미옥이 중얼중얼 말했다.“다른 사람은 원해도 못 가지는 직장을 자진해서 사직한다니, 그럴 리가요.”유진은 생각이 많아졌다.동현이 사직하는 게 자기 때문일까? 설마 그날 밤 유진의 말 때문에? 동현이 가난해서 싫다고 해서 그런 걸까?유진은 단지 동현이 더 이상 자기에게 시간을 낭비하는 게 싫어서 그렇게 말했다. 하지만 만약 동현이 진짜 사직한다면…….유진은 더 이상 고민하지 않고 곧바로 사무실로 들어갔다.동현을 찾았을 때 동현은 인수인계하고 있었
“하지만 경력을 쌓아도 유진 씨의 마음에는 들지 않을 거잖아요.”곽동현이 말했다.순간 임유진은 할 말이 없었다.그때 동현은 씩 웃으며 말했다.“사실 그 전부터 직장을 바꿀 생각이었어요. 환경위생과에서 일하면 한눈에 인생을 볼 수 있잖아요. 30살이 되기 전에 도전해 보고 싶어요.”도전? 만약 이전의 유진에게 도전으로 가득 찬 인생과 한눈에 미래를 볼 수 있는 안정된 생활 중 어떤 것을 선택할지 묻는다면 전자를 선택할 것이다.다만 그렇게 많은 일을 겪은 뒤 유진은 안정이 사실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알았다.유진은 숨을 깊게 들이쉬며 말했다.“정말 그날 제가 했던 말을 신경 쓸 필요 없어요. 단지 저는 동현 씨가 저에게 시간 낭비를 하지 않았으면 해요. 동현 씨에게 설레는 느낌을 받지 못했어요. 그러니 우리는 같이 할 수 없어요.”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 진지하게 말했다.“만약 제가 진짜 동현 씨를 사랑한다면 당신이 아주 초라하더라도 같이 할 것이고 사랑하지 않는다면 부자라 할지라도 같이 할 수 없을 거예요.”동현은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그래요? 그럼 제가 사람을 잘못 보지 않았네요.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어떻게 돈에 끌려다니겠어요?”“그럼 여전히 사직할 거예요?”유진은 자신 때문에 상대가 안정된 직장을 잃는 것이 싫다.“밖에 나가서 부딪쳐 보는 게 내 소원이에요.”동현은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성공하든 실패하든 적어도 후회는 하지 않을 거예요. 그렇죠?”유진은 동현의 단호한 태도를 보고는 더 이상 말려도 소용없다고 생각했다.“그럼…… 성공을 기원할게요.”“고마워요!”동현이 말했다.유진이 떠나려 할 때 동현이 말했다.“유진 씨는 좋은 여자예요. 내가 복이 없어 날 좋아하게 만들지 못했어요. 죄책감을 느낄 필요 없어요. 사직하는 건 유진 씨와 상관없어요. 앞으로 내가 사랑하는 사람에게 더 좋은 삶을 주고 싶어 사직하는 거예요.”한편 동현과 얘기를 끝낸 유진은 돌멩이에 가슴이 막힌 것처럼 설명하기 힘든 기분이었다.이틀 후
그 남자, 임유진이 사랑하는 사람일까?결국 곽동현은 이 질문을 하지 못했다.지금의 동현은 그럴 자격이 없다. 아마 앞으로 정말 성공할 수 있다면 다시 한번 유진의 앞에 설 자격이 있을 것이다…….동현은 운전을 하고 떠났고 유진은 한 걸음 한 걸음 월세방으로 걸어갔다. 다만 문을 열기도 전에 방안에서 밝은 빛이 새어 나왔다.유진이 외출하기 전에 분명히 불을 끄고 나갔는데, 설마…….유진이 흠칫 놀라 재빨리 문을 열자 조명아래 의자에 앉아있는 강지혁이 눈에 들어왔다.“너…….”유진이 집으로 들어갔다.“이렇게 늦은 밤에 왜 여기에 온 거야?”“내가 누나한테 물어봐야 하잖아? 오늘 야간근무도 아니고 당직도 설 필요가 없는데 왜 이렇게 늦게 들어왔어?”지혁이 고개를 살짝 들고 유진을 훑어보며 말했다.“회사에 사직한 동료가 있어서 같이 나가서 밥을 먹었어.”유진이 말했다.“어느 동료?”지혁이 물었다.그러자 유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말했다.“곽동현.”어차피 유진이 말하지 않아도 지혁은 알아낼 수 있다.지혁은 눈썹을 치켜올렸다.“설마 오늘도 누나를 데려다준 건 아니겠지?”유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유진의 표정을 보니 맞는 것 같다.“누나는 아직도 그를 신경 안 쓴다고 할 거야? 신경 안 쓰면 몇 번이나 집에 데려다주는 걸 승낙해?”지혁은 일어서서 한 걸음 한 걸음 유진에게 다가갔다.유진이 지혁의 눈을 마주쳤다.“난 단지 그를 평범한 동료라고 생각해. 그리고 오늘 이후로 동료도 아니야. 네가 믿든 안 믿든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여기까지야.”지혁의 발걸음은 유진의 앞에 멈추었고, 검은 눈동자로 유진의 말이 진짜인지 아닌지 심문하는 것 같았다.지혁이 빤히 바라보자 유진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죽이고 있다. 지혁의 눈빛은 마치 압박하는 것처럼 손바닥마저 식은땀이 스며들었다.유진은 자신이 동현을 신경 쓰면 안 된다는 것을 알고 있다. 만약 유진이 동현을 신경 쓴다면 오히려 동현에게 더 불리하다.동현을 무시할수록 더 좋다.갑자
“예전에 나도 여기 살았잖아? 매일 밤, 같은 방에서 같이 자지 않았어?”강지혁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그 말을 듣자니 너무 다정했던 것 같았다!임유진은 입술을 깨물었다.“하지만 지금은…….”“지금 왜?”지혁이 되물었다.“여기는 여분의 침구가 없고 네가 썼던 것들은 모두 치웠어. 씻지도 않았고 말리지도 않아서 꺼내도 냄새가 날 거야.”“그거는 아주 간단해.”지혁은 말하면서 휴대전화를 꺼내 어딘가로 몇 마디 분부했다.그리고 잠시 후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유진이 문을 열자 고이준과 유진이 병원에서 본 적이 있는 지혁을 따라다니던 경호원 몇 명이 이불 세트를 가져왔다.그들은 들어오면서 유진에게 한마디 했다.“임유진 씨, 실례합니다.”들어오는 사람마다 이렇게 말했다.유진은 황당했다. 하지만 지금 할 수 있는 말은 하나밖에 없는 것 같다.“괜찮아요.”물건을 유진의 방에 세팅한 뒤 그 사람들은 또 줄지어 나갔다.잠시 사이에 방안에는 또 유진과 지혁 두 사람만 남았다.유진은 침대 밑에 잘 펴진 이불을 바라보았다. 또 전에 그랬던 것처럼 되었다. 그때도 지혁은 유진의 침대 밑에 이불을 폈다.“정말 여기서 자려고?”유진은 망설이며 말했다.“그럼 가짜일 리가 있어?”지혁이 우스꽝스럽게 반문했다.지금 이렇게 하는 것도 게임일까? 그렇지 않으면 지혁은 분명히 쉴 수 있는 편안한 곳이 있는데 왜 하필 유진의 좁은 월세방에서 자는 것일까?가난을 계속 느끼고 싶어서 그런 걸까?그리고 유진은…… 묵묵히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유진은 시선을 거두고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갈아입을 옷을 가지고 화장실에 들어가려고 했다.갑자기 지혁이 유진에게 백허그했다.“단지 오늘 여기서 하룻밤을 보내고 싶어. 오늘, 그녀의 생일이야.”유진은 흠칫 놀랐다.“그녀가 누구인데?”그러나 지혁은 대답하지 않고 유진의 어깨에 머리를 깊이 묻고 부탁하는 듯 중얼중얼 말했다.“오늘 밤만 여기에서 지내게 해줘. 예전처럼 그렇게 자자. 어때, 누나?”
예전에 잘 살 때는 살이 찌면 옷 핏이 보기 싫을까 봐 두려워 하루 종일 다이어트를 하겠다고 외쳤다.하지만 지금은 다이어트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지금 임유진은 아주 말랐지만 옷 입은 모습을 생각할 겨를이 없고 옷의 가격, 옷의 실용성, 그리고 오래 입을 수 있는지만 고려한다.가끔 생각해 보면 정말 우습다.무언가를 얻으려고 필사적으로 노력하지만 막상 이루고 보면 자신이 필사적으로 가지려고 했던 게 전혀 쓸모없게 되었다.유진은 자신을 비웃었다. 강지혁은 왜 말끝마다 유진을 누나라고 부르는 것일까? 마치 유진을 아주 신경 쓰고 그들이 함께했던 그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 같다.지혁이 유진에게 관심이 있는 걸까?가끔씩 지혁의 표현을 보면 유진을 매우 좋아하는 것 같지만 유진은 오히려 다른 생각이 든다. 그것도 연기일까?유진은 더 이상 이런 생각을 하지 않으려고 머리를 흔들었다. 유진은 미래를 생각할 겨를이 없고 당장 지금의 상황만 보면 된다.황급히 세수를 마치고 화장실을 나오자 지혁은 이불을 편 바닥에 앉아 예전처럼 굿나잇 인사를 하고 잠을 자려고 했다.유진은 어색한 표정으로 다가가서 말했다.“굿나잇.”유진은 말하고 얼른 침대에 올라가 이불 속으로 들어갔다.유진은 빨리 잠이 들어 빨리 이 밤을 보낼 생각만 했다.그러나 유진이 눈을 감기도 전에 지혁은 몸을 기울여 유진에게 다가갔다.“누나, 여태껏 내 이름을 한 번도 부르지 않았어. 누나가 내 이름을 부르는 걸 듣고 싶어.”유진은 흠칫 놀랐다. 지금 몸을 등지고 눈을 감는다면 너무 티가 난다.하지만 그를 마주하면…….“왜, 아까 예전처럼 지내기로 약속했잖아?”지혁이 말했다.유진은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예전에는 지혁만 연기했는데 지금은 두 사람이 같이 연기해야 하는 걸까?“혁아, 굿나잇.”유진은 마침내 그 이름을 말했다.분명 그가 강지혁이라는 걸 안 것이 한 달의 시간밖에 안 되었지만 유진은 아주 오래된 것 같았고 마치 전생과 현생인 것 같았다.지혁은 가볍게 웃은 뒤 머리를 살짝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