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 경호원이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하는 걸 바로 뒤에서 들었음에도, 강지혁이라면 분명히 임유진을 무사히 데리고 올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임유진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만 걱정이 가실 것 같았다.“난 괜찮아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그럼 다행이고요.”임유진의 말에 탁유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윤이는 요즘 어때요? 다음에 시간 있을 때 윤이 보러 가고 싶은데.”윤이를 못 본 지 꽤 되었기에 임유진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이에 탁유미는 조금 멈칫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윤이는 잘 있어요. 안 그래도 유진 씨 엄청 보고 싶어하더라고요. 아, 손님 왔다. 그럼 먼저 끊을게요.”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하지만 말과는 달리 새 손님 같은 건 없었다.아까는 그저 임유진에게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아무렇게나 둘러댄 것뿐이다.요 며칠 일이 많기도 했고 현재 임신 중인 사람에게 괜한 말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사실 윤이는 퇴원한 후 여전히 자주 몸에 멍과 자잘한 상처를 달고 집으로 왔다.유치원 선생님은 윤이가 다른 아이들과 하루가 멀다고 자주 다툰다고 하며 그 이유에 관해서 조금 난감한 얼굴로 탁유미의 일 때문이라고 했다.그 말에 탁유미는 바로 깨달았다. 자신이 감옥살이하다 나온 경력 때문에 윤이가 친구들과 다툰다는 것을 말이다.감옥살이한 그 일은 그녀에게 지우지 못할 낙인이 됐을 뿐만이 아니라 윤이의 상처가 되기도 했다.그녀는 그저 다른 엄마들이 그러하듯 윤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것뿐인데 그 소원이 그녀에게는 왜 그렇게도 어려운 걸까.그리고 양육권 분쟁에서는 정말 이길 수 있을까?탁유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한편, 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고개를 돌려 집사를 바라보았다.“혁이는요?”“별채에 계십니다.”그 말에 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문을 열고 막 나가려는 그때 집사가 그녀를 불러
“무슨 일 있었어?”임유진이 물었다.“다시 한번 말해봐. 아까 차 안에서 나한테 했던 말, 다시 한번 말해봐.”강지혁의 낮은 목소리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네가 그럴 생각 아니면 오해 살 행동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지금 너한테 닿고 싶어. 이 말, 말하는 거야?”“응, 한 번 더 해봐.”강지혁이 다시 한번 요구했다.이에 임유진은 거절하지 않고 또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게다가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반복했다.강지혁은 그녀가 하는 말을 줄곧 듣기만 하다가 한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는 아직도 나를 좋아하고, 아직도 나를 사랑해. 한 번도 나에 대한 마음을 접은 적이 없어. 맞아?”“응. 네가 나한테 키스했을 때 싫지 않았던 것도... 아니, 가슴이 뛰었던 것도 다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서였어. 솔직히 내가 널 아직 사랑하는 게 맞는지 직접 내 입으로 얘기하기 전까지는 나도 잘 몰랐었어. 그런데 입 밖에 내고 보니 알겠더라.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네가 있었다는 걸.”임유진은 담담하게 자신의 본심을 늘어놓았다.“혁아, 우리는 그간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서로에게 실망도 하고 마음도 많이 다쳤어. 솔직히 아무 일도 없었던 그때처럼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야. 하지만 나는 노력해보고 싶고 이 감정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 너는? 너는 어떻게 생각해?”그 말에 강지혁의 몸이 조금 굳었다.“네 말은 나도 널 사랑하기를 바란다는 말이야?”“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그에게 품은 감정이 사랑이기에 그가 그녀에게 품은 감정도 사랑이기를 바라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강지혁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우더니 짙은 눈동자로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물론 전처럼 나를 사랑할 수는 없겠지. 이해해. 하지만 네가 나한테 품고 있는 감정 중에 사랑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 안 해. 나한테 먼저 키스한 게 바로 그 증거일 테니까.”임유진은 강지혁의 시선에 조금 긴장한
강지혁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가뜩이나 올곧게 마주쳐 오는 눈빛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데 입다 만 셔츠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몸이 웬만한 광고보다 더 자극적이라 이대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침대에 눕혀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나... 아직 임신 중이야.”임유진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즉 아무리 네가 매력적이어도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그럼 지금부터 계속해서 나에 대한 사랑을 더 키워봐. 아이 낳고 나면 마음대로 하게 해줄 테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순간 코피를 쏟을 뻔했다.대체 이 요망한 말은 뭐란 말인가.하지만 그만큼 가슴이 설레고 마음이 들떴다. 마음속에 있던 말을 입 밖으로 전부 내뱉고 나니 강지혁과의 사이가 많이 풀어진 듯했다....요 며칠 미처 마무리 짓지 못했던 일을 하나하나 다 하고 보니 이제는 탁유미의 양육권 싸움만 남아 있었다.솔직히 감옥살이 경력 때문에 질 가능성이 현저히 더 큰 싸움이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는 없기에 끝까지 싸워야만 했다.임유진은 지금 임신 중이고 강지혁이 붙여둔 경호원도 있는 탓에 사무소 쪽은 그녀에게 작은 사무실을 내줬다.어차피 임유진은 탁유미의 재판만 끝이 나면 회사를 그만둘 것이기에 잠깐이라면 사무소 쪽에서도 흔쾌히 내어줄 수 있었다.물론 사무소 대표의 본심은 임유진을 계속 회사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자기 회사 직원의 남편이 강지혁이었으니까.임유진이 한창 일을 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탁유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전화를 받아보자 다급한 탁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 씨, 우리 윤이 좀 같이 찾아주면 안 될까요? 얘가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사라졌어요!”“네? 윤이가 사라져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늘 유치원에서 나들이를 갔는데 친구랑 싸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대요. 얘기를 듣고 바로 달려갔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고 지금은 경찰에 신고까지 한 상태예요. 선생님도 윤이가
하지만 그 부탁이 통할 리가 없었다.“이 대표님이 당신 같은 여자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쉽게 만나줄 분인 줄 알아요? 자꾸 이러면 신고합니다?”경비원이 짜증을 내며 탁유미를 쫓았다.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그 여자 풀어주세요. 대표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탁유미는 조금 놀란 얼굴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이경빈의 비서 중 한 명으로 한때는 탁유미의 직장동료이기도 했었다.당시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던 직장동료이자 친구였기에 비서는 몇 번이나 탁유미에게 경고했었다. 이경빈이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절대 진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적당히 헤어지라고 말이다.하지만 탁유미는 그 경고를 무시했고 온 마음을 다해 이경빈을 사랑해 결국 비참한 끝을 맺었다.사랑에 미쳐 이성적인 판단이 아예 되지 않았던 것이다.탁유미를 막고 있던 경비원은 비서의 말에 어리둥절한 채로 일단 뒤로 물러섰다.그러다 탁유미가 비서와 함께 자리를 떠나고서야 다른 경비원과 함께 수군거렸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대표이사실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러다 문 앞까지 다 와서야 비서가 한마디 했다.“대표님께 부탁할 일이 있으면 대표님 성질 긁는 일 없게 말조심해.”그러고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문을 두드린 후 말했다.“들어가세요.”탁유미는 그게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걸 알기에 들어가기 전 비서에게 작게 속삭였다.“고마워.”아마 그때도 비서의 말을 새겨들었으면 지금쯤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랑해 마지않는 윤이의 존재를 보지도 못했을 테지...이경빈은 그녀에게 제일 큰 고통도 줬지만 제일 큰 행복도 줬다.탁유미가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경빈이 의자에 앉은 채 서류를 훑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날 만나러 온 이유는?”이경빈이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아까 그는 비서에게서 탁유미가 1층 로비에서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듣고 몇
“당연히 믿어야 하는 거 아닌가? 공수진은 내 아내가 될 사람이고 내가 평생에 거쳐 지켜줘야 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걔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어? 설마 널 믿을까?”이경빈이 차갑게 말했다.그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탁유미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이경빈의 독설쯤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마음속이 따끔하며 아파 났다.“알겠어. 알겠는데 제발 확인 전화만 해줘. 난 그냥 공수진이 윤이를 데리고 갔는지 알고 싶은 것뿐이야. 만약 아니라고 하면 바로 나갈게. 절대 거슬리게 하지 않을게!”“확인? 탁유미, 네가 뭔데 내가 확인까지 해줘?”이경빈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탁유미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렸고 이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가 바로 앞에서 쓰러지고 죽어버린다고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우리가 지금 윤이를 두고 양육권 싸움 하고 있는 건 맞는데 그래도 윤이 일이잖아. 내가 아무리 싫어도 너는 윤이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제발 확인만 해줘.”탁유미가 그에게 간절히 빌었다.이경빈은 그 모습을 보더니 얼굴이 어두워졌다.얼마 전에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하며 망설임 없이 유리 조각을 복부에 찔러넣더니 지금은 아들을 위해 너무나도 쉽게 비굴해졌다.대체 그가 모르는 그녀의 모습은 얼마나 더 있는 걸까.“제발... 제발 부탁이야.”탁유미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한층 맺혔다.꼭 이대로 한 번만 더 말로 공격했다가는 유리처럼 깨질 것 같았다.“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까? 네가 머리를 숙이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한 번만 내 부탁 들어줘...”탁유미가 진짜로 무릎을 꿇으려 하자 이경빈이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그만해!”그가 호통을 쳤다.탁유미가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게 어쩐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경빈은 휴대폰을 집어 들어 누군가에게 연락해 뭐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는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탁유미에게 말했다.“조금만 기
“윤이는 내 아들이기도 해. 네가 혼자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야.”이경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언제 어떻게 없어진 건데?”그는 중요한 정보들을 묻더니 곧바로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고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탁유미는 그 모습을 보며 어딘가 든든하다는 느낌이 들고 안심이 되었다.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이경빈이야말로 그녀의 일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인데 말이다.어쩌면 이제껏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혼자 묵묵히 책임지느라 상대가 이경빈이라도 안심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그때 탁유미의 휴대폰이 울렸고 탁유미는 전화를 받더니 바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이경빈도 이에 서둘러 그녀를 쫓아 사무실을 나왔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녀 쪽으로 뛰어가 물었다.“무슨 일이야? 왜 그래?”“찾았어. 윤이 찾았다고! 지금 병원에 있대.”탁유미가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방금 그녀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임유진이었고 강지혁의 도움으로 윤이를 찾았다고 했다. 다만 몸에 상처가 있어 지금은 병원에 있다고 했다.“병원?”이경빈이 미간을 찌푸렸다.“알았어. 내 차 타고 같이 가.”“괜찮아. 나 혼자...”“탁유미, 윤이는 내 아들이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탁유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병원.이경빈의 차로 병원에 도착한 탁유미는 윤이를 본 순간 참아 왔던 눈물이 그대로 뚝뚝 떨어졌다.그녀는 윤이 앞으로 달려가 물었다.“윤이 너 괜찮아?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상처는 많이 아파?”윤이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들어 탁유미의 눈물을 계속 닦아 주었다.그러자 임유진이 대신 답했다.“아이들끼리 싸우다 생긴 거라 심각한 상처는 아니에요. 그런데 싸우다가 인공와우가 바닥에 떨어져서 고장이 났어요. 언니가 알면 화를 낼까 봐 혼자 계속 수리하려고 했대요.”이건 고사리 같은 손으로는 절대 수리할 수 없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정말 알고 싶어요?”임유진이 불만 가득한 눈으로 이경빈을 노려보았다.“언니가 윤이한테 왜 친구랑 싸웠냐고 물었고 윤이가 유치원 친구들이 엄마를 범죄자라고,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싸웠다고 답했어요. 윤이가 왜 그 사실을 알게 됐는지는 이경빈 씨 약혼녀이신 공수진 씨 때문이고요. 전에 유치원에 찾아와서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다 있는 데서 아주 대놓고 언니를 범죄자 취급했거든요.”그 말에 이경빈의 얼굴이 굳더니 복잡한 눈으로 통곡하고 있는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이경빈 씨, 하나 물어보죠. 유미 언니 사건 정말 제대로 조사한 거 맞아요? 이경빈 씨는 감옥살이해 본 적이 없어 그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인지 잘 모르나 본데 이경빈 씨가 가볍게 내뱉은 그 증언으로 언니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인생의 오점을 남겼어요.”임유진은 이경빈의 대답은 애초부터 들을 생각조차 없었는지 자기 할 말만 하고 탁유미 쪽으로 걸어가 두 사람을 위로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탁유미의 눈물이 드디어 서서히 멈췄다.“언니, 윤이 인공와우는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께 얘기해서 겉에 보이는 장치만 새것으로 바꾸기로 혁이랑 얘기했어요. 재수술받을 필요 없어요.”“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 아들의 일이니 내가 알아서 합니다.”임유진의 말에 이경빈이 앞으로 나서며 단호하게 얘기했다.이에 탁유미는 조금 놀라고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이경빈이 괘씸했지만 친아버지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가족도 아닌 사람이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탁유미는 울고 난 후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임유진을 보며 말했다.“윤이 찾아줘서 고마워요. 인공와우 문제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여기서 이경빈을 거절하면 또 큰소리가 나올 것 같아 임유진과 강지혁의 호의를 거절했다.임유진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 집으로 가요. 데려다줄게요.”하지만 그 말 뒤에 이경빈이 또다시 나섰다.“그것도 내가 알아서 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그는 말을 마
“그런데 이제는 그런 감정도 쓸모가 없어졌네. 결국에는 다른 여자랑 결혼하니까. 게다가 그때 직접 자기 입으로 언니를 감옥에 보내기도 했고. 언젠가 후회하며 잘못했다고 빌어도 언니는 아마 받아주지 않을 거야. 다 망가트려 놓고 사과해봤자 가소롭기만 할 테니까.”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 같은 남자를 사랑했다는 것이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아이 같은 건 필요 없다고 할 때는 언제고 이제 와서 양육권이라니, 뻔뻔하기 그지없는 남자가 아닐 수 없었다.강지혁은 찬 바람이 쌩쌩 부는 임유진의 말에 몸이 굳어버렸다.“만약 이경빈이 정말 잘못했다고, 무릎까지 꿇고 진심으로 용서를 빌어도, 그래도 받아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 너는?”“모르겠어. 나는 언니가 아니잖아.”임유진의 말에 강지혁이 계속해서 물었다.“만약... 네가 그 상황에 처해 있다면?”“만약 나라면 용서 안 하겠지. 세상에는 용서해줄 수 있는 잘못과 그렇지 못하는 잘못이 있어. 물론 시간이 흐르면 그 감정이 옅어지겠지만 그때는 용서보다는 더 이상 그 사람의 모든 것에 관심이 없어질지도 몰라. 꼭 타인처럼 분노도 뭣도 느끼지 못하는 거지.”강지혁은 순간 심장이 무언가에 꽉 눌린 것처럼 답답하고 먹먹해졌다.“우리도 이만 가자.”임유진이 말을 하며 앞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바로 옆에서 함께 따라와야 할 사람의 인기척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이에 고개를 돌려보자 강지혁이 제 자리에 가만히 멈춰 서 있었다.“혁아? 왜 그래?”그 말에 강지혁은 그제야 정신을 차린 듯 옅게 웃었다.“아무것도 아니야. 가자.”집으로 돌아가는 길, 강지혁은 먼저 말을 거는 법 없이 가만히 앉아만 있었다. 중간중간 임유진이 뭐라 물어도 짧게 대답하고는 다시 창밖을 바라보았다.그렇게 조금 불편한 분위기 속에 차량이 드디어 강씨 저택 앞에 멈춰 섰다.안전벨트를 풀고 차에서 내리려는데 갑자기 두 인영이 차량 앞으로 뛰어들었다.물론 차량에 접근하기도 전에 경비원에 의해 막혀버렸지만 말이다.두 사람은 차량을 향해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
탁유미는 차갑게 말을 내뱉은 후 이경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옷을 반대로 잡아당겼다.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겨도 도저히 잡아당겨 지지를 않았다.이경빈은 이대로 그녀의 옷을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손이 하얘질 때까지 꽉 쥐고 놓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경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놔. 손 다치고 싶지 않으면.”경호원은 그녀의 눈빛에 얼른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의 옷을 꽉 잡고 있는 이경빈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이경빈은 경호원의 엄청난 손아귀 힘에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나 원망하는 거 알아. 당연해. 네가 날 싫어하는 것도, 날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내 말 좀 들어줘. 너랑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난 너랑 할 얘기 없어.”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이경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옷을 꽉 잡은 손이 경호원의 힘으로 하나둘 펴지며 서서히 고통이 일고 있는데도,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이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꺾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옷을 놓아주지 않았다.이대로 놓아주면 다시는 그녀 가까이 갈 수조차 없을까 봐, 그녀와는 이로써 모든 게 다 끝이 날까 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탁유미는 제 옷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그를 보며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너는 항상 이런 식이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너는 네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었다면 억지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짓은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항상 네 기분만 중요하고 네 생각만 중요한 사람이었어! 존중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마치 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크나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손아귀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탁유미는 옷을 정
이경빈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인수로만 놓고 보면 이경빈 쪽이 훨씬 우세였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의 경호원들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특정 인원들의 출입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라는 강지혁의 명령을 받았으니까.“비켜드릴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긴장감이 흐르고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탁유미가 걸어 나왔다.강지혁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소란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경빈 대표님은 저희가 금방 되돌려보내겠습니다.”그들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며 경계태세를 갖췄다.탁유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달리 깔끔한 차림이기는 했으나 턱 쪽에 수염이 까끌까끌 나 있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으며 다크서클은 물론이고 눈가도 엄청 빨개 있었다.이제껏 줄곧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세팅하고 다니던 남자였는데 말이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부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며칠 만에 보는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더 야위어 있었으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유독 더 힘이 없어 보였다.게다가 이마에는 까진 상처가 있었는데 복도 조명 때문에 더 잘 보였다.이경빈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심장에 마치 칼에 찔린 듯한 고통이 일었다.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는 그날 그의 명령으로 머리가 조아려졌을 때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그렇게도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는 억지로 그녀의 무릎을 꿇리고 강제로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이경빈은 그날 경호원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박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왜 바보같이 그녀에게 그런 수모를 줬을까.왜 등신처럼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고 공수진에게 사과하게 했을까.이경빈이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던 그때 탁유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은 시간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왜, 또
주원호의 말에 이경빈의 몸이 움찔 떨렸다.탁유미는 그저 복수대상일 뿐이라고?아니. 탁유미는 그에게 단지 복수대상뿐인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였다.이경빈은 심장이 점점 더 세게 아파 와 이윽고 벽에 몸을 기댔다.꼭 이 통증에 잠식되어가는 듯한 기분이다.그는 멀고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자신이 탁유미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한때는 고작 원수 집안의 딸일 뿐인 여자라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 따위는 금방 지워질 줄 알았다. 그녀를 감옥에 보내 복수를 하고 나면 아주 손쉽게 그녀를 마음속에서 떨쳐낼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희망했을 뿐 그는 줄곧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만약 탁유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허름한 모습으로 있는 게 신경이 쓰일 리도 없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질투 날 리도 없다.또한 상처만 줬던 그녀에게 배신감이 들 리도 없다.이경빈은 항상 공수진의 편에만 서고 한 번도 탁유미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는 것에서 늘 도망쳐왔다.죽도록 미운 원수의 딸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이경빈은 몸 옆으로 축 늘어진 자신의 두 손에 서서히 힘을 가했다.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뚫어버리고 이내 바닥으로 피까지 뚝뚝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고통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텅 비어 버린 얼굴로 탁유미의 병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탁유미를 만나 그간 상처를 줘서 미안했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멍청하게 굴어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를 해야만 한다.그녀의 아버지를 향한 증오를 그따위 비열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화풀이해서는 안 됐다고 사과해야만 한다.또한 앞으로는 정말 잘 해주겠다고, 지금까지의 고통을 전부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잘해주겠다고 말을 해야만 한다.이경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놓고는 막상 탁유미의 병실에 점점 가까워지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탁유미가 전과 같은 원망과 증오가 서
이경빈은 말 그대로 공수진에게 생지옥이라는 게 무엇인지 맛보게 해줄 생각이다.그와 탁유미의 인생을 가지고 논 대가를 평생에 걸쳐 갚게 할 생각이다....병실에서 나온 이경빈은 심장께가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는 탁유미를 모함하려고 한 공수진도 물론 증오스러웠지만 그녀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여자에게 무자비했던 자신이 더 증오스러웠다.아까 병실로 들어간 순간 이경빈은 억지로 탁유미의 무릎을 꿇리고 그녀에게 머리까지 조아리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바닥에 쿵쿵 부딪히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정말 공수진을 위해서였을까?사실은 그저 그런 방식으로 탁유미에게 상처를 줘 그녀를 향한 마음을 애써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윤이를 이용해 이씨 집안 재산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공수진이 어렵게 생긴 아이를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자꾸 상처받은 듯한 탁유미의 얼굴들이 떠올라 더 모질게 굴었던 건 아닐까?탁유미는 그에게 등신이라고 했다.맞는 말이다.그는 정말 구제 불능의 등신이었다.“저... 저기, 저는 그저 공수진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에요. 제가 아는 건 다 털어놨으니 이제 그만 저 풀어주세요...”주원호가 이경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몇십 분 전 그는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찰나 검은색 정장의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병원으로 데려와 졌고 이경빈의 앞에서 공수진에 관한 모든 얘기를 실토하라는 협박을 받았다.만약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평생 감방에서 썩게 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주원호는 솔직히 그저 공수진에게 돈만 조금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돈이고 뭐고 공수진 근처로는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대체 누가 날 데리고 온 거지? 상황을 볼 때 이경빈은 아닌 것 같은데.’“풀어달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헛웃음을 쳤다.공수진을 도와 진실을 덮어버린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