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말을 안 했다고?”강지혁이 비아냥거리며 웃었다.“그럼 강현수 앞에서 네가 사랑하는 사람이 나뿐이라는 것도 다 진짜라는 소리네? 줄곧 날 마음속에 두고 있었다는 것도 진짜고?”“맞아.”임유진이 대답에 강지혁이 말도 안 되는 헛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피식 웃었다.“그럼 어디 증명해봐. 네 마음속에 정말 내가 있는지, 나를 어떻게, 얼마만큼 사랑하는지.”임유진은 눈앞에 있는 남자를 빤히 바라보았다.사실 그녀도 오늘 강현수의 손에 이끌려 별장으로 와 입 밖으로 강지혁을 향한 감정을 내뱉고서야 지금도 여전히 강지혁이라는 남자를 좋아하고 또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임유진이 강현수에게 품은 감정은 어릴 때 함께 했던 그 짧은 시간의 우정과 목숨을 살려준 것에 대한 고마움 그리고 감동뿐이지 거기에 사랑은 없었다.하지만 강지혁에게는 달랐다. 그와 함께 하기로 한 이유가 뱃속 아이들과 한지영 때문인 것도 있지만 자기 자신을 위한 것도 있었다.만약 강지혁을 향한 마음이 없었더라면 이 결혼생활에 충실해지려는 마음도 없었을 것이고 그와 앞으로 좋은 관계가 되면 좋을 것 같다는 바람도 품지 않았을 것이며 강현수가 ‘만약’이라고 가정까지 해가며 애절하게 마음을 고백했을 때 망설임 없이 거절하지도 못했을 것이다.강현수 같은 남자가 줄곧 너 하나만 생각하며 찾아 헤맸다고 하는데 심장이 떨리지 않을 여자가 세상에 어디 있을까.그런데도 임유진의 심장에 아무런 변화가 없었다는 건 이미 그 심장의 주인이 다른 사람에게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임유진은 손을 들어 천천히 강지혁의 얼굴을 감쌌다.강지혁을 보는 그녀의 눈빛에 뭔가 결심한 듯한 결연함이 묻어있었다.임유진은 서서히 자신의 얼굴을 가져가더니 다시 한번 먼저 그에게 입을 맞췄다.강현수에게 보여주기 위해 했던 키스와 달리 지금 하고 있는 키스는 조금 더 농밀하고 부드러우며 강지혁의 분노를 잠재울만한 그런 키스였다.강지혁은 다시 한번 입을 맞춰온 그녀의 행동에 몸이 움찔 떨리며 눈이 조금 커졌다.하지만 임유
조수석에 앉아 있던 여자 경호원이 강지혁에게 전화를 걸어 상황을 보고하는 걸 바로 뒤에서 들었음에도, 강지혁이라면 분명히 임유진을 무사히 데리고 올 것을 알고 있음에도 임유진의 목소리를 직접 들어야만 걱정이 가실 것 같았다.“난 괜찮아요, 언니. 걱정하지 마세요.”“그럼 다행이고요.”임유진의 말에 탁유미는 그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참, 윤이는 요즘 어때요? 다음에 시간 있을 때 윤이 보러 가고 싶은데.”윤이를 못 본 지 꽤 되었기에 임유진이 조금 들뜬 목소리로 물었다.이에 탁유미는 조금 멈칫하다가 웃으며 말했다.“윤이는 잘 있어요. 안 그래도 유진 씨 엄청 보고 싶어하더라고요. 아, 손님 왔다. 그럼 먼저 끊을게요.”그녀는 서둘러 전화를 끊고 휴대폰을 주머니 속에 집어넣었다.하지만 말과는 달리 새 손님 같은 건 없었다.아까는 그저 임유진에게 뭐라 해야 할지 몰라 아무렇게나 둘러댄 것뿐이다.요 며칠 일이 많기도 했고 현재 임신 중인 사람에게 괜한 말로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으니까.사실 윤이는 퇴원한 후 여전히 자주 몸에 멍과 자잘한 상처를 달고 집으로 왔다.유치원 선생님은 윤이가 다른 아이들과 하루가 멀다고 자주 다툰다고 하며 그 이유에 관해서 조금 난감한 얼굴로 탁유미의 일 때문이라고 했다.그 말에 탁유미는 바로 깨달았다. 자신이 감옥살이하다 나온 경력 때문에 윤이가 친구들과 다툰다는 것을 말이다.감옥살이한 그 일은 그녀에게 지우지 못할 낙인이 됐을 뿐만이 아니라 윤이의 상처가 되기도 했다.그녀는 그저 다른 엄마들이 그러하듯 윤이가 다른 아이들처럼 건강하게 잘 자라기를 바라는 것뿐인데 그 소원이 그녀에게는 왜 그렇게도 어려운 걸까.그리고 양육권 분쟁에서는 정말 이길 수 있을까?탁유미의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한편, 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고개를 돌려 집사를 바라보았다.“혁이는요?”“별채에 계십니다.”그 말에 임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 쪽으로 걸어갔다.하지만 문을 열고 막 나가려는 그때 집사가 그녀를 불러
“무슨 일 있었어?”임유진이 물었다.“다시 한번 말해봐. 아까 차 안에서 나한테 했던 말, 다시 한번 말해봐.”강지혁의 낮은 목소리에 임유진은 눈을 두어 번 깜빡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혁아, 나는 널 사랑해. 네가 그럴 생각 아니면 오해 살 행동하지 말라고 했는데 나는 지금 너한테 닿고 싶어. 이 말, 말하는 거야?”“응, 한 번 더 해봐.”강지혁이 다시 한번 요구했다.이에 임유진은 거절하지 않고 또다시 같은 말을 반복했다.게다가 그 뒤로도 몇 번을 더 반복했다.강지혁은 그녀가 하는 말을 줄곧 듣기만 하다가 한참 뒤에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너는 아직도 나를 좋아하고, 아직도 나를 사랑해. 한 번도 나에 대한 마음을 접은 적이 없어. 맞아?”“응. 네가 나한테 키스했을 때 싫지 않았던 것도... 아니, 가슴이 뛰었던 것도 다 너를 여전히 사랑하고 있어서였어. 솔직히 내가 널 아직 사랑하는 게 맞는지 직접 내 입으로 얘기하기 전까지는 나도 잘 몰랐었어. 그런데 입 밖에 내고 보니 알겠더라. 내 마음속에는 여전히 네가 있었다는 걸.”임유진은 담담하게 자신의 본심을 늘어놓았다.“혁아, 우리는 그간 너무 많은 일이 있었고 서로에게 실망도 하고 마음도 많이 다쳤어. 솔직히 아무 일도 없었던 그때처럼 다시 돌아갈 수 있을지는 아직 의문이야. 하지만 나는 노력해보고 싶고 이 감정에 최선을 다하고 싶어. 너는? 너는 어떻게 생각해?”그 말에 강지혁의 몸이 조금 굳었다.“네 말은 나도 널 사랑하기를 바란다는 말이야?”“응.”임유진이 고개를 끄덕였다.그녀가 그에게 품은 감정이 사랑이기에 그가 그녀에게 품은 감정도 사랑이기를 바라는 건 아주 당연한 일이었다.강지혁은 천천히 몸을 바로 세우더니 짙은 눈동자로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았다.“물론 전처럼 나를 사랑할 수는 없겠지. 이해해. 하지만 네가 나한테 품고 있는 감정 중에 사랑이 아예 없다고는 생각 안 해. 나한테 먼저 키스한 게 바로 그 증거일 테니까.”임유진은 강지혁의 시선에 조금 긴장한
강지혁은 지금 자신이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알기나 할까?가뜩이나 올곧게 마주쳐 오는 눈빛 때문에 심장이 남아나지 않는데 입다 만 셔츠 사이로 보이는 탄탄한 몸이 웬만한 광고보다 더 자극적이라 이대로 눈앞에 있는 남자를 침대에 눕혀 제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나... 아직 임신 중이야.”임유진이 침을 꼴깍 삼키며 말했다.즉 아무리 네가 매력적이어도 지금은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그럼 지금부터 계속해서 나에 대한 사랑을 더 키워봐. 아이 낳고 나면 마음대로 하게 해줄 테니까.”강지혁의 말에 임유진은 순간 코피를 쏟을 뻔했다.대체 이 요망한 말은 뭐란 말인가.하지만 그만큼 가슴이 설레고 마음이 들떴다. 마음속에 있던 말을 입 밖으로 전부 내뱉고 나니 강지혁과의 사이가 많이 풀어진 듯했다....요 며칠 미처 마무리 짓지 못했던 일을 하나하나 다 하고 보니 이제는 탁유미의 양육권 싸움만 남아 있었다.솔직히 감옥살이 경력 때문에 질 가능성이 현저히 더 큰 싸움이었지만 그렇다고 쉽게 포기할 수는 없기에 끝까지 싸워야만 했다.임유진은 지금 임신 중이고 강지혁이 붙여둔 경호원도 있는 탓에 사무소 쪽은 그녀에게 작은 사무실을 내줬다.어차피 임유진은 탁유미의 재판만 끝이 나면 회사를 그만둘 것이기에 잠깐이라면 사무소 쪽에서도 흔쾌히 내어줄 수 있었다.물론 사무소 대표의 본심은 임유진을 계속 회사에 붙잡아 두고 싶었다. 자기 회사 직원의 남편이 강지혁이었으니까.임유진이 한창 일을 하고 있던 그때, 갑자기 탁유미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전화를 받아보자 다급한 탁유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유진 씨, 우리 윤이 좀 같이 찾아주면 안 될까요? 얘가 어디로 갔는지... 갑자기 사라졌어요!”“네? 윤이가 사라져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오늘 유치원에서 나들이를 갔는데 친구랑 싸우고 어디론가 사라져버렸대요. 얘기를 듣고 바로 달려갔는데 아무리 찾아봐도 보이지 않았고 지금은 경찰에 신고까지 한 상태예요. 선생님도 윤이가
하지만 그 부탁이 통할 리가 없었다.“이 대표님이 당신 같은 여자가 만나고 싶어 한다고 쉽게 만나줄 분인 줄 알아요? 자꾸 이러면 신고합니다?”경비원이 짜증을 내며 탁유미를 쫓았다.하지만 그때 누군가가 두 사람 곁으로 다가와 말했다.“그 여자 풀어주세요. 대표님께서 허락하셨습니다.”탁유미는 조금 놀란 얼굴로 눈앞에 있는 사람을 바라보았다. 이 사람은 이경빈의 비서 중 한 명으로 한때는 탁유미의 직장동료이기도 했었다.당시 두 사람은 사이가 좋았던 직장동료이자 친구였기에 비서는 몇 번이나 탁유미에게 경고했었다. 이경빈이 진짜로 좋아하는 사람은 따로 있으니 절대 진심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적당히 헤어지라고 말이다.하지만 탁유미는 그 경고를 무시했고 온 마음을 다해 이경빈을 사랑해 결국 비참한 끝을 맺었다.사랑에 미쳐 이성적인 판단이 아예 되지 않았던 것이다.탁유미를 막고 있던 경비원은 비서의 말에 어리둥절한 채로 일단 뒤로 물러섰다.그러다 탁유미가 비서와 함께 자리를 떠나고서야 다른 경비원과 함께 수군거렸다.엘리베이터를 타고 대표이사실로 향하는 길, 두 사람은 아무 말도 주고받지 않았다. 그러다 문 앞까지 다 와서야 비서가 한마디 했다.“대표님께 부탁할 일이 있으면 대표님 성질 긁는 일 없게 말조심해.”그러고는 대답을 듣지도 않고 문을 두드린 후 말했다.“들어가세요.”탁유미는 그게 자신을 도와주기 위해 한 말이라는 걸 알기에 들어가기 전 비서에게 작게 속삭였다.“고마워.”아마 그때도 비서의 말을 새겨들었으면 지금쯤 다른 인생을 살고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그렇게 되면 사랑해 마지않는 윤이의 존재를 보지도 못했을 테지...이경빈은 그녀에게 제일 큰 고통도 줬지만 제일 큰 행복도 줬다.탁유미가 안으로 들어가 보자 이경빈이 의자에 앉은 채 서류를 훑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날 만나러 온 이유는?”이경빈이 시선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며 물었다.아까 그는 비서에게서 탁유미가 1층 로비에서 자신을 만나고 싶어 한다는 얘기를 듣고 몇
“당연히 믿어야 하는 거 아닌가? 공수진은 내 아내가 될 사람이고 내가 평생에 거쳐 지켜줘야 하는 사람이야. 그런데 걔를 믿지 않으면 누구를 믿어? 설마 널 믿을까?”이경빈이 차갑게 말했다.그의 말은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탁유미의 심장을 쿡쿡 찔렀다.이경빈의 독설쯤은 이제 아무렇지도 않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마음속이 따끔하며 아파 났다.“알겠어. 알겠는데 제발 확인 전화만 해줘. 난 그냥 공수진이 윤이를 데리고 갔는지 알고 싶은 것뿐이야. 만약 아니라고 하면 바로 나갈게. 절대 거슬리게 하지 않을게!”“확인? 탁유미, 네가 뭔데 내가 확인까지 해줘?”이경빈은 여전히 차갑기 그지없었다.탁유미의 얼굴은 이미 창백하게 질렸고 이 이상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눈앞에 있는 남자는 그녀가 바로 앞에서 쓰러지고 죽어버린다고 해도 전혀 신경 쓰지 않을 것 같았다.“우리가 지금 윤이를 두고 양육권 싸움 하고 있는 건 맞는데 그래도 윤이 일이잖아. 내가 아무리 싫어도 너는 윤이 좋아하잖아. 그러니까 제발 확인만 해줘.”탁유미가 그에게 간절히 빌었다.이경빈은 그 모습을 보더니 얼굴이 어두워졌다.얼마 전에는 죽을 때까지 다시는 보지 말자고 하며 망설임 없이 유리 조각을 복부에 찔러넣더니 지금은 아들을 위해 너무나도 쉽게 비굴해졌다.대체 그가 모르는 그녀의 모습은 얼마나 더 있는 걸까.“제발... 제발 부탁이야.”탁유미의 눈가에 어느새 눈물이 한층 맺혔다.꼭 이대로 한 번만 더 말로 공격했다가는 유리처럼 깨질 것 같았다.“내가 무릎이라도 꿇을까? 네가 머리를 숙이라고 하면 그렇게 할게. 그러니까 제발... 제발 한 번만 내 부탁 들어줘...”탁유미가 진짜로 무릎을 꿇으려 하자 이경빈이 그대로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그만해!”그가 호통을 쳤다.탁유미가 비굴한 모습을 보이는 게 어쩐지 무척이나 마음에 들지 않았다.이경빈은 휴대폰을 집어 들어 누군가에게 연락해 뭐라고 지시를 내렸다. 그러고는 다시 휴대폰을 내려놓고 탁유미에게 말했다.“조금만 기
“윤이는 내 아들이기도 해. 네가 혼자 해결해야 할 일이 아니야.”이경빈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언제 어떻게 없어진 건데?”그는 중요한 정보들을 묻더니 곧바로 다시 휴대폰을 집어 들고 부하에게 지시를 내렸다.탁유미는 그 모습을 보며 어딘가 든든하다는 느낌이 들고 안심이 되었다.정말 우스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이경빈이야말로 그녀의 일상을 엉망진창으로 만들어 놓은 장본인인데 말이다.어쩌면 이제껏 누구에게도 기대지 않고 혼자 묵묵히 책임지느라 상대가 이경빈이라도 안심이 되는 건지도 모르겠다.그때 탁유미의 휴대폰이 울렸고 탁유미는 전화를 받더니 바로 사무실을 뛰쳐나갔다.이경빈도 이에 서둘러 그녀를 쫓아 사무실을 나왔고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는 그녀 쪽으로 뛰어가 물었다.“무슨 일이야? 왜 그래?”“찾았어. 윤이 찾았다고! 지금 병원에 있대.”탁유미가 잔뜩 흥분하며 말했다.방금 그녀에게 전화를 건 사람은 임유진이었고 강지혁의 도움으로 윤이를 찾았다고 했다. 다만 몸에 상처가 있어 지금은 병원에 있다고 했다.“병원?”이경빈이 미간을 찌푸렸다.“알았어. 내 차 타고 같이 가.”“괜찮아. 나 혼자...”“탁유미, 윤이는 내 아들이야.”이경빈은 말을 마친 후 마침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탁유미는 입술을 살짝 깨물더니 마찬가지로 엘리베이터 안으로 들어갔다.병원.이경빈의 차로 병원에 도착한 탁유미는 윤이를 본 순간 참아 왔던 눈물이 그대로 뚝뚝 떨어졌다.그녀는 윤이 앞으로 달려가 물었다.“윤이 너 괜찮아? 대체 어디 있었던 거야? 상처는 많이 아파?”윤이는 그녀의 질문에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손을 들어 탁유미의 눈물을 계속 닦아 주었다.그러자 임유진이 대신 답했다.“아이들끼리 싸우다 생긴 거라 심각한 상처는 아니에요. 그런데 싸우다가 인공와우가 바닥에 떨어져서 고장이 났어요. 언니가 알면 화를 낼까 봐 혼자 계속 수리하려고 했대요.”이건 고사리 같은 손으로는 절대 수리할 수 없다는 것도 모르고 말이다.
“정말 알고 싶어요?”임유진이 불만 가득한 눈으로 이경빈을 노려보았다.“언니가 윤이한테 왜 친구랑 싸웠냐고 물었고 윤이가 유치원 친구들이 엄마를 범죄자라고, 나쁜 사람이라고 해서 싸웠다고 답했어요. 윤이가 왜 그 사실을 알게 됐는지는 이경빈 씨 약혼녀이신 공수진 씨 때문이고요. 전에 유치원에 찾아와서 아이들과 학부모들이 다 있는 데서 아주 대놓고 언니를 범죄자 취급했거든요.”그 말에 이경빈의 얼굴이 굳더니 복잡한 눈으로 통곡하고 있는 탁유미를 바라보았다.“이경빈 씨, 하나 물어보죠. 유미 언니 사건 정말 제대로 조사한 거 맞아요? 이경빈 씨는 감옥살이해 본 적이 없어 그게 얼마나 고통스럽고 힘든 일인지 잘 모르나 본데 이경빈 씨가 가볍게 내뱉은 그 증언으로 언니는 영원히 지울 수 없는 인생의 오점을 남겼어요.”임유진은 이경빈의 대답은 애초부터 들을 생각조차 없었는지 자기 할 말만 하고 탁유미 쪽으로 걸어가 두 사람을 위로했다.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탁유미의 눈물이 드디어 서서히 멈췄다.“언니, 윤이 인공와우는 걱정하지 마세요. 의사 선생님께 얘기해서 겉에 보이는 장치만 새것으로 바꾸기로 혁이랑 얘기했어요. 재수술받을 필요 없어요.”“그럴 필요 없습니다. 내 아들의 일이니 내가 알아서 합니다.”임유진의 말에 이경빈이 앞으로 나서며 단호하게 얘기했다.이에 탁유미는 조금 놀라고 임유진은 미간을 찌푸렸다.이경빈이 괘씸했지만 친아버지가 자기가 알아서 하겠다는데 가족도 아닌 사람이 거절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탁유미는 울고 난 후 마음이 많이 가라앉았는지 자리에서 일어나 임유진을 보며 말했다.“윤이 찾아줘서 고마워요. 인공와우 문제는 저희가 알아서 할게요.”여기서 이경빈을 거절하면 또 큰소리가 나올 것 같아 임유진과 강지혁의 호의를 거절했다.임유진은 그녀의 마음을 이해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그럼 이제 집으로 가요. 데려다줄게요.”하지만 그 말 뒤에 이경빈이 또다시 나섰다.“그것도 내가 알아서 합니다. 신경 쓰지 마세요.”그는 말을 마
“그래...”강지혁이 낮게 읊조렸다.“그래야 할 거야.”고이준은 저도 모르게 소민준이 매우 가엽게 느껴졌다. 만약 임유진이 정말 소민준을 동정하면 그때는 지금 하고 있는 택배 기사 일도 못 하게 될지도 모르니까.“고 비서, 누가 저 여자한테 돈을 쥐여주고 유진이를 해할 계획을 세운 건지 알아내.”강지혁이 차가운 목소리로 지시했다.“네, 회장님.”고이준이 얼른 답했다.“그리고 S 시에서 제일 실력 좋은 변호사를 고용해서 유진이와 권건우 변호사 고소 건에 붙여. 김승수한테 지시를 내리는 다른 누군가가 있는 건 아닌지도 한번 알아보고.”고이준에게 김승수의 뒷조사를 맡긴 건 이유가 있었다.임유진이 강지혁의 와이프고 현 강씨 가문의 유일한 안주인인 걸 알고도 고소를 한 건 누가 봐도 이상했으니까. 상식적인 인간이라면 강씨 가문을 상대로 덤빌 리가 없다.게다가 김승수가 억울하다는 당시의 사건을 강지혁도 한번 훑어봤지만 임유진의 말대로 증거가 확실했고 결과 역시 납득 가능한 결과였다.즉 그렇다는 건 김승수에게 다른 목적이 있다는 것이다. 또 혹은 김승수를 뒤에서 조종하고 있는 누군가에게 다른 목적이 있을 수도 있고 말이다.하지만 이유가 뭐가 됐든 임유진을 건드린 이상 강지혁이 손을 놓고 있을 리가 없다. 그에게는 임유진이 목숨줄과도 같은 존재니까.“네, 알겠습니다.”임유진이 강지혁에게 있어 얼마나 중요한 사람인지 고이준은 너무나도 잘 알고 있다. 다만 요즘 따라 부쩍 이상한 위화감 같은 것이 느껴졌다.임유진을 대하는 강지혁의 태도가 꼭 기억을 잃기 전의 강지혁 같았기 때문이다. 꼭 기억을 다 되찾은 것처럼 말이다.강씨 저택.강지혁은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가 마침 임유진과 두 아이들이 거실에서 동요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모습을 보게 되었다.현이는 흥분한 건지 얼굴이 빨개진 채로 깔깔거리며 춤을 추고 있었고 무뚝뚝하던 율이도 볼을 살짝 붉히며 어색하게 몸을 좌우로 흔들고 있었다.몸만 보면 썩 내키지 않아 하는 것 같지만 미소를 띠고
강지혁은 여자를 무섭게 노려보더니 이내 곁에 있는 경호원에게 지시를 내렸다.“두 번 다시 손에 뭘 들 수 없게 만들어놓고 경찰에 넘겨.”“네, 알겠습니다.”청소부는 그들의 대화에 얼굴이 새하얗게 질려버렸다.‘지, 지금 내 손을 부러트리려는 건가?’그녀는 이런 무서운 인간을 만날 줄 알았으면 차라리 경찰에게 잡히는 것이 더 나았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었다.“잘못했습니다! 다시는 안 그럴게요! 제가... 제가 알아서 경찰서로 가서 자수하겠습니다. 그러니까 제발...!”하지만 간절한 그녀의 부탁에도 강지혁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얼굴이 차가워지기만 할 뿐이었다.사실 청소부는 양손만 부러지는 것에 감사해야 한다. 만약 그녀가 던진 화분으로 임유진이 큰 상처를 입었으면 그때는 양손은 물론이고 몸 전체가 너덜너덜해진 채 죽으니만 못한 삶은 살았을 테니까.“으아아악!!”그녀의 절규와 함께 강지혁은 유유히 현장을 빠져나왔다. 그리고 고이준도 곧바로 그의 뒤를 따라나섰다.바로 앞에 세워진 차량에 올라탄 후 고이준은 곧바로 강지혁에게 자료 하나를 건넸다.“소민준 씨의 지난 5년간 행적입니다. 몇 년 전부터 배달 기사 일을 하는 것으로 확인이 됐고 오늘은 우연히 건물 앞을 지나가다 사모님을 구한 것으로 보입니다. 사모님께서는 감사의 뜻으로 소민준 씨를 병원에 보냈고 손목 골절로 인한 치료 비용을 전액 다 부담해주셨습니다.”강지혁은 어둡게 가라앉은 얼굴로 수중의 자료를 훑어보았다. 차 안의 분위기는 그야말로 얼음장 같았다.“참 기막힌 우연이야. 안 그래?”그때 줄곧 입을 다물고 있던 강지혁의 입에서 뜬금없는 한마디가 흘러나왔다.“네... 네.”고이준은 식은땀을 흘리며 룸미러로 강지혁의 눈치를 봤다. ‘혹시 소민준이 사모님을 구해준 것에 질투라도 하는 건가...?’“CCTV는?”“네, 여기 있습니다.”고이준은 얼른 휴대폰을 꺼내 경호원이 보내준 CCTV 영상의 일부를 틀어 강지혁에게 건넸다.영상 속 소민준은 화분이 떨어짐과 동시에
경비원은 그 말에 시선을 내려 바닥에 떨어진 산산조각이 난 화분을 보고는 그제야 얼른 손을 놓아주었다.임유진은 경호원에게 소민준의 손목을 봐달라고 했고 경호원은 알겠다며 그의 손목을 자세히 살폈다.“사모님, 아무래도 골절인 것 같습니다.”“그럼 지금 당장 병원으로 데려가 치료를 받게 하세요.”“네, 알겠습니다.”그때 휴대폰이 울렸고 임유진은 경호원에게 가보라는 손짓을 한 후 이내 전화를 받았다.무슨 얘기를 들은 건지 그녀는 전화를 받은 지 얼마 안 돼 곧바로 심각한 얼굴을 했다.“네,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통화를 마친 후 임유진은 건물이 아닌 법원으로 향했다.잠시 후, 임유진이 법원에서 나왔을 때 마침 소민준을 병원으로 데려간 경호원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검사를 받아본 결과 다행히 심각한 상처는 아니고 한 달 정도면 완전히 회복될 거라는 내용이었다.“알겠어요. 치료비는 다 제가 책임진다고 하고 혹시 다른 무언가의 보상을 원하면 저한테 따로 연락 주세요.”“네, 사모님.”임유진은 전화를 끊은 후 휴대폰을 집어넣는 것이 아닌 권건우에게 전화를 걸었다.“스승님, 죄송해요. 아무래도 당분간은 좀 시끄러워질 것 같아요.”“들었다. 김승수가 우리 둘을 고소했다지? 걱정할 것 없어. 우리는 그 사건에 한 점 부끄럼 없이 임했으니까. 그보다 요즘 인터넷에 떠드는 루머 말인데 나야 다 늙어서 그런 건 전혀 신경이 안 쓰인다고 하지만 너는 남편과 재회한 지도 얼마 안 됐는데...”“걱정하지 마세요. 혁이는 스승님과 제 사이 오해 안 해요.”임유진의 말에 권건우는 안심한 듯 미소를 지었다.“그럼 다행이고.”그날 저녁, 임유진이 집에 돌아오자마자 집사가 다가와 말했다.“회장님은 오늘 일 때문에 조금 늦으신다고 먼저 아이들과 식사를 하시라고 하셨습니다.”“네, 알겠어요.”임유진은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끄덕이며 아이들과 밥 먹을 준비를 했다. 일 때문에 늦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니까.그 시각, 강지혁은 냉기를 풍기며 차가운 시선으로 눈앞
“위험해!”등 뒤로 누군가의 다급한 외침이 들려왔다.임유진은 미처 상황을 파악하지도 못한 채 누군가의 품에 안겨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녀를 구해준 누군가는 쓰러지는 그 순간에도 양손으로 그녀를 지켜주고 있었다.“사모님!”“사모님!”다급한 발걸음 소리와 함께 경호원과 기사들이 큰소리로 외치며 다가왔다.임유진은 그들의 소리에 그제야 정신을 차렸고 경호원의 부축으로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난 괜찮아요.”그녀는 말을 마치고는 고개를 옆으로 돌려 고개를 숙인 채 자리에서 일어나며 몸에 묻은 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괜찮으세요? 구해주셔서 정말 감사...”임유진은 말을 하다가 남자가 고개를 드는 것을 보고 저도 모르게 흠칫하며 말을 멈추고 말았다.그녀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소민준이었다.소씨 가문의 장남이자 한때는 그녀의 남자친구였으며 진세령의 약혼자이기도 했던 그 소민준 말이다.하지만 지금의 그는 5년 전과는 완전히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색이 다 바랜 낡아빠진 옷에 더러운 운동화, 세월을 정통으로 맞은 것 같은 얼굴에 새치 가득한 머리까지, 지금의 그는 도무지 30대 중반이라고는 믿기지 않는 모습을 하고 있었다.그래도 한때는 상류층에 있었던 사람인데 지금은 일반 시민도 아닌 제일 아래 계층에 있는 사람처럼 보였다.고개를 든 소민준은 눈앞에 있는 사람이 임유진이라는 것을 보고는 마찬가지로 조금 놀란 듯 움찔했다. 그러고는 곧바로 쓴웃음을 지었다.“너였구나.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다는 기사를 봤어.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몰랐는데.”“너...”임유진은 뭐라 말을 하고 싶었지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소민준은 당시 그녀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줬고 그녀가 절망의 끝에 자살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궁지까지 몰아붙였으며 두 번 다시 사랑 같은 건 하고 싶지 않게끔 만들어놓기도 했다.아마 강지혁이 아니었다면 임유진은 지금도 여전히 과거의 상처에 매달려 스스로를 고립시키며 살았을 것이다.하지만...하지만
직장 동료들은 한지영에게 위로를 건네며 은근히 그녀에게 잘 보이려는 듯한 말투로 얘기했다.심지어 어떤 사람은 아예 대놓고 그녀에게 백연신과의 사이를 묻기도 했다.“그럼 지영 씨는 백연신 씨랑 다시 만나는 거예요?”“그날 기자들 무리에서 지영 씨 손을 덥석 잡고 차로 끌고 가는데 내가 다 설렜지 뭐예요? 완전 현실판 왕자님 아니에요?”“그럼 앞으로 지영 씨를 뭐라 불러야 하나?”“백연신 씨가 회장님이니 당연히 회장 사모님 아니겠어요?”한지영은 직원들의 태도가 바뀐 게 전부 백연신 때문이라는 걸 알고 있다. 이런 상황을 처음 겪는 것도 아니었으니까.“아니요. 백연신 씨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괜한 추측은 하지 말아주세요. 그리고 저, 사귀는 사람 따로 있어요.”한지영은 차가운 목소리로 대꾸했고 이에 사람들은 어색하게 웃으며 서로 눈빛을 주고받더니 금방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옆에서 떠드는 사람들이 없으니 이제야 살 것 같았다.어제 집으로 돌아갔을 때 백연신은 끝까지 나타나지 않았다. 그저 경호원을 통해 그녀에게 전언만 남겼다.“회장님께서 더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된다고, 앞으로도 쭉 전과 같이 아무 일도 없을 거라고 하셨습니다.”전과 같다는 건 백연신 역시 더는 그녀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라는 건가?한지영은 그 생각에 갑자기 울컥하며 눈물이 차오르려는 것이 느껴졌다. 하지만 그녀는 곧바로 다시 마음을 다잡으며 스스로에게 되뇌었다.이건 자신이 바란 거라고, 그러니 아무것도 슬퍼할 것 없다고 말이다.‘그래, 잘 된 거야. 이게 제일 좋은 결말이야. 증오도 없고 더 이상의 미움도 없는... 그냥 좋은 추억만 간직한 지금이 제일 좋은 끝이야.’다시 그와 연인이 되었다가 또다시 고난에 부딪혀 헤어지게 되면 그때는 완전히 원수지간이 될지도 모르니 차라리 아무것도 시작하지 않는 게 백배는 더 나았다.한지영은 더 이상 백연신과 함께 할 용기가 없었다. 아무리 그가 사랑을 외쳐도 아무리 줄곧 그녀만 사랑해왔다고 해도 이제는 그 마음을
연우진은 그 어느 날 자신이 백연신의 질투 대상이 될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지영 씨한테 마음이 남은 거라면 내가 아닌 지영 씨와 얘기를 하세요.”연우진이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그리고 내가 지영 씨와 만나고 싶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함께 하지 못해요. 이건 백연신 씨도 마찬가지고요. 백연신 씨가 여전히 지영 씨를 좋아한다고 해도 지영 씨가 받아주지 않으면 두 사람 역시 함께 못해요. 선택권은 지영 씨한테 있으니까.”백연신은 주먹을 말아쥐며 다시 물었다.“지영이와 만날 건지에 대한 대답만 해.”연우진은 한숨을 한번 내쉬었다. 아무래도 대답을 해주지 않으면 순순히 보내주지 않을 듯하다.“지영 씨는 좋은 사람입니다. 이대로 감정이 싹트면 나로서는 당연히 지영 씨와 함께하고 싶겠죠.”“한지영의 곁에 있을 수 있는 남자는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한지영을 사랑하는 사람이 아니면 안 돼.”백연신이 경고하듯 낮게 읊조렸다.“어째 내가 모든 걸 다 내어줄 정도로 한지영 씨를 사랑하지 않으면 우리 둘이 함께하는 걸 방해하겠다는 얘기로 들립니다만?”연우진의 질문에 백연신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냉랭하고 차가운 눈빛을 보면 그 대답이 뭔지 알 수 있을 것도 같았다.“백연신 씨는 지영 씨를 위해 모든 걸 다 내어줄 수 있습니까? 그 정도로 사랑한다면 여기서 나한테 이러지 말고 다시 한번 지영 씨 마음에 들기 위해 노력을 해보는 게 어떨까요?”백연신은 그의 말이 끝난 순간 갑자기 손을 뻗어 연우진의 멱살을 잡았다. 그러고는 이대로 갈기갈기 찢어버릴 듯한 눈빛으로 그를 노려보았다.“너는 아무것도 몰라. 나라고...”하지만 그는 말을 다 잇지 못했다. 또한 멱살을 잡았던 손도 힘없이 풀었다.질투와 분노로 가득했던 눈동자가 한순간에 어둠에 잠겨버린 듯 시들어졌다.“한지영한테 잘해. 만약 지영이한테 상처를 주면 그때는 사는 게 사는 것 같지 않다는 게 뭔지 똑똑히 알려주지. 내 말 허투루 듣지 마.”말을 마친 후
백연신은 그 생각에 얼굴을 한껏 일그러트렸다. 질투와 분노, 슬픔과 고통의 감정들이 소용돌이치며 그의 얼굴에 담겼다.한지영의 집에서 나왔을 때 연우진은 꽤 편안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그는 몇 시간 전에 한지영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무사히 집에 도착했다는 말을 듣고 바로 그녀를 찾으러 집까지 왔다.다행히 사건은 무사히 일단락되었고 한지영도 예전의 일상을 다시 되찾은 것처럼 보였다.“우진 씨, 그... 나랑 더는 연락하고 싶지 않으면 언제든지 말해줘요. 난 괜찮으니까.”연우진은 한지영의 집에 도착하자마자 들은 그녀의 말을 떠올리고는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가끔 보면 한지영은 꼭 34살이 아닌 4살짜리 아이 같았다. 이런 상황에서도 마음속의 말을 솔직하게 전하며 상대방에게 선택권을 주니 말이다.하지만 그런 투명한 여자이기에 연우진도 그녀와 함께 있으면 더 즐겁고 자꾸 그녀와 연락을 이어나가게 되는 걸 것이다.“나는 지영 씨랑 계속 연락하고 싶은데. 지영 씨는 그저 피해자일 뿐이었잖아요. 그러니까 죄라도 지은 사람처럼 말하지 말아요.”“내가 백연신 씨와 호텔에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하면 믿을 수 있어요?”“네, 지영 씨가 그렇다고 하면 그렇게 믿을게요.”연우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진심이었으니까.만약 정말 뭔 일이 있었으면 한지영 쪽에서 먼저 솔직하게 얘기를 해줬을 것이다. 한지영은 그런 여자니까.연우진은 엘리베이터 안에서 문득 백연신의 얼굴을 떠올렸다. 확실히 한지영은 백연신과의 인연을 이미 지난 과거로만 보고 있는 듯했다.하지만 백연신은? 그 역시 그럴까? 이제는 고은채와의 결혼도 파기됐는데?생각에 잠긴 채 엘리베이터에서 나오던 연우진은 아파트 입구에 서 있는 남자를 보고 멈칫하며 발걸음을 멈췄다.잘 뻗은 기럭지에 고고해 보이는 눈앞의 남자는 다름 아닌 백연신이었다.‘이 사람이 왜 여기에...’연우진과 백연신은 어느 정도 거리를 둔 채 서로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그렇게 침묵이 계속되다 연우진은 놀란 마
한지영의 말대로 백연신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다른 여자를 곁에 둘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예쁜 여자를 곁에 둔다고 해도 그는 그녀가 아니면 안 되는 남자였다. 꼭 한지영이여야만 하는 남자였다.처음 본 순간부터 줄곧 한지영만을 사랑해왔으니까, 이미 모든 마음을 다 그녀에게 줘버렸으니까.사실 5년 전에 한지영이 아닌 고은채의 손을 잡았을 때 속으로 판을 짜고 있었다고는 하나 앞으로가 어떨지는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그때는 자신에게 미래가 있을지도 없을지도 확신하지 못했거니와 백씨 가문의 모든 걸 되찾고 고씨 가문을 무너뜨리는 데 성공할 수 있을지 말지도 미지수였으니까.당시의 그에게는 한 걸음 한 걸음이 다 깨진 얼음판을 걷는 것 같았다. 그래서 섣불리 한지영에게 약속을 건넬 수도 없었다.지난 5년이라는 시간 동안 백연신은 사람을 은밀히 붙이는 것으로 한지영의 소식을 접할 뿐 그녀의 앞에 나서지는 못했다. 그때는 아무리 보고 싶어도 참아야만 했으니까.그런데 인내의 시간을 겪고 드디어 그녀의 앞에 나설 자격을 갖췄는데 한지영의 마음은 그사이 식어버렸다.백연신은 그 생각에 또 한 번 쓴 미소를 지었다.그녀와 함께하고 싶어 한 선택이, 그녀를 되찾기 위한 인내가 한지영이 거부함으로써 완전히 물거품이 되어버렸다.‘한지영을 살려주는 것만으로도 만족해라 이건가...?’백연신은 어쩌면 당시 한지영을 살려달라고 간절하게 외쳤을 때 모든 소원권을 다 써버린 걸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그는 운전석에 앉은 채 한지영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아니, 사라진 뒤에도 여전히 그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며 가만히 바라보고 있었다.그러다 얼마나 지났을까, 휴대폰 진동이 울려댔다.“회장님, 고은채 씨가 방금 S 시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매스컴 쪽에도 더는 한지영 씨의 일상을 방해하지 않게 조치를 해뒀습니다.”“고씨 가문 쪽은 계속해서 지켜봐. 손 내밀어주는 가문이 있나.”“네, 알겠습니다.”백연신은 통화를 마친 후 휴대폰을 다시 집어넣었다.고씨 가문에게
“그럼 어떻게 하면 끝내줄 건데요? 뭐 하룻밤 같이 자 줘요? 아니면 백연신 씨가 만족할 만큼 다시 연애하는 것처럼 연기라도 해줘요?”한지영이 비아냥거리며 말을 이어갔다.“백연신 씨 좋다는 여자들 많잖아요. 그런데 왜 꼭 나여야 해요? 아니, 그건 또 아니었지. 꼭 나여야 하는 사람이었으면 애초에 헤어지자고도 안 했을 테니까.”“너한테 나라는 인간은 대체 뭐야?”백연신이 한지영의 눈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자 한지영 역시 그 눈빛을 피하지 않으며 답했다.“한때 사랑했던 사람, 그리고 더는 사랑할 수 없는 사람. 나한테 백연신 씨는 딱 그 정도의 사람이에요. 우리 두 사람은 가는 길이 다른 사람이고 인생관도 너무 다른 사람이에요. 당신은 제일 중요한 게 사업이고 가문이지만 나는 결혼해서 아이를 낳고 평범하고 단란하게 사는 게 더 좋은 사람이에요. 그리고 나는 백연신 씨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더 나약한 사람이라 같은 고통을 두 번은 못 겪어요.”두 사람은 살아온 환경, 그리고 그로 인한 인생을 대하는 태도, 이런 것들이 너무나도 다르기에 어쩌면 처음부터 이어지지 않을 인연이었는지도 모른다.백연신은 천천히 몸을 일으켜 일어나더니 한 걸음 두 걸음 뒤로 물러섰다. 달빛 아래의 그의 얼굴은 무척이나 창백하고 또 어두웠다.“네 말이 맞아... 나 좋다는 여자들도 많고 꼭 너여야 하는 것도 아니야.”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입꼬리를 조금씩 위로 올렸다.5년이다. 5년을 숨죽이고 드디어 고씨 가문을 사지까지 내몰았는데 그 시간 동안 한지영은 서서히 그의 존재를 지워가고 있었다.백연신은 분명히 웃고 있었지만 한지영은 그가 꼭 울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서 마음 한구석이 욱신거리며 숨이 가빠왔다.‘아파하지 마. 백연신 때문에 아파하지 마! 잊기로 했잖아. 이제는 다 잊기로 했잖아. 그러니까 흔들리지 마!’한지영은 속으로 끊임없이 이렇게 되뇌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에게서 두 눈을 떼지 못했고 심장은 계속해서 아파 났다.백연신은 시선을 내린 채 끝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