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방금까지만 해도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는데 눈 깜짝할 사이에 갑자기 로맨스 분위기가 되어버렸다.물론 이 자리에 있는 모두가 다 깜짝 놀랐지만 배여진은 특히 더 했다.강지혁이 왜 임유진과 함께 있는 거지?두 사람 진작에 헤어진 거 아니었나?강지혁이 차가운 눈빛으로 경호원에게 제압당한 배여진을 바라보았다.“저거 내가 대신 처리해줘?”임유진에게 한 그 말에 배여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강, 강지혁 씨는 지금 유진이한테 속고 있는 거예요. 유진이는 강지혁 씨가 아닌 곽동현이라는 남자를 좋아하고 있어요. 범죄를 저지른 그 남자를 변호하겠다고 했다니까요? 게다가 얼마 전에는 그 남자 때문에 현수 씨 별장 앞에서 밤새 서 있기도 했어요!”배여진은 지금 강지혁과 임유진의 사이를 갈라놓기 급급했다.임유진은 그녀의 말에 절망으로 가득했던 그날 밤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주먹을 꽉 말아쥐었다.한편 직원들은 배여진의 입에서 나온 강지혁이라는 이름에 또 한 번 놀라버렸다.물론 배여진의 옆에 찰싹 달라붙어 임유진을 비난하던 두 여자는 강지혁이 들어온 순간부터 그가 누군지 알아보았기에 아까부터 얼굴이 새하얗게 질린 채 몸을 덜덜 떨고 있었다.강지혁은 임유진의 손을 매만지던 것을 멈추더니 차가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대체 언제부터 내 아내의 이름이 너 따위의 입에 오르기 시작했지? 다시는 그 입을 열지 못하게 해야 정신을 차리려나?”아내?!배여진의 눈이 곧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임유진이 언제부터 강지혁의 아내가 된 거지? 대체 뭐가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거지?!하지만 배여진이 뭔가 생각하기도 전에 강지혁과 함께 안으로 들어온 남자 경호원이 그녀의 앞으로 다가가 별다른 말 없이 뺨을 내리치기 시작했다.한 번, 두 번.고요한 샵 안에는 오직 뺨을 때리는 소리만 울려 퍼졌다.배여진은 용서를 구할 기회조차 없이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계속해서 뺨을 맞았다.그리고 옆에 있는 사람들은 그 누구 하나 나서지 못했다.몇 분 후, 경호원의 손이 드디어 멈
“물론 버려지는 것뿐만이 아니라 끔찍한 최후를 맞이하게 되겠지. 배여진이 그렇게 되면 너는 어떻게 할 거야? 도와줄 거야?”강지혁이 임유진을 빤히 바라보며 물었다.“아니.”임유진은 담담하게 고개를 저었다.“왜? 배여진이 곽동현을 음해해서?”언뜻 가볍게 말하는 것 같지만 그의 두 눈은 집요하게 임유진의 얼굴을 쫓았다. 그녀의 표정 하나하나 놓치고 싶지 않다는 듯이 말이다.“그것도 있고.”임유진은 솔직하게 대답했다.“나는 몇 번이고 나를 해하려 한 것에 더해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까지 끌어들인 인간을 도와줄 정도로 착하지 않아. 배여진은 내가 있는 한 앞으로도 계속 나를 제거하려고 들 거야. 물론 그날 강현수한테 모든 걸 다 얘기해줬으니 앞으로는 강현수가 알아서 하겠지.”“아무런 죄가 없다고?”강지혁이 피식 웃었다.“너는 정말 곽동현이 결백하다고 믿어? 너 변호사잖아. 변호사면 증거로 말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런데 지금은 모든 증거가 다 곽동현을 가리키고 있어.”“나는 동현 씨 믿어.”임유진이 담담하게 말했다.“증거라는 게 억울한 사람을 도와주는 방패막이 되기도 하지만 가끔은 그 사람을 찌르는 흉기가 되기도 해. 지나치게 증거에만 연연하면 자칫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들어버리게 될 수도 있어. 내 사건도 그랬잖아.”그 말에 강지혁이 흠칫하더니 입을 꾹 닫았다.그는 여전히 그녀의 사건에 깊은 죄책감을 이고 있었다.“동현 씨는 정말 좋은 사람이야. 이런 상황을 겪어도 되는 사람이 아니라고. 게다가 나 때문에 배여진한테 당한 거니까 더더욱 이대로 두고 볼 수 없어. 어떻게 해서든 꼭 재판에서 이길 거야. 만약 패소한다고 해도 다시 항소할 거야.”임유진의 말을 가만히 듣고 있던 강지혁이 천천히 입을 열었다.“그렇게도 이겨야겠다면 내가 좀 도와줄까? 곽동현이 무죄로 풀려날 수 있게?”이에 임유진이 조금 놀란 듯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곽동현이라면 언제나 싫은 기색밖에 내비치지 않았는데 왜 갑자기 도와준다고 하는 거지?“왜? 내가
거절은 용납하지 않겠다는 듯한 강지혁의 단호한 목소리가 차 안에 울려 퍼졌다....배여진은 샵에서 뛰쳐나온 후 잔뜩 부어버린 얼굴로 강현수의 별장을 찾아왔다.강현수 앞에서 제대로 울어버릴 작정으로 말이다.그리고 제일 중요한 임유진이 강지혁과 결혼했다는 사실을 알려줘야만 했다.맞은 건 분하지만 덕에 좋은 소식을 알게 됐으니 결과적으로 좋았다.두 사람의 결혼 소식을 듣게 되면 강현수도 이제 임유진을 향한 마음을 접을 것이 분명했으니까.다만 좋은 일이기는 하지만 임유진이 강지혁 덕에 신분 상승해 사모님 소리 된 건 아무리 생각해봐도 열이 받았다.그렇게 씩씩대며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갑자기 별장 경비원이 그녀를 막아섰다.“대표님은 지금 집에 안 계십니다.”“이봐요. 현수 씨가 없어도 나는 들어갈 수 있어요. 지금껏 내 출입을 막은 적 단 한 번도 없었다고요. 알아듣겠어요?”배여진이 고개를 빳빳이 쳐들고 말했다.임유진에게 호되게 당하고 온 터라 괜히 경비원에게 화풀이했다.“어제 대표님께서 직접 여기로 찾아와 앞으로 배여진 씨를 안으로 들이지 말라고 하셨습니다.”경비원의 단호한 말에 배여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그럴 리가요!”“제 말이 믿기지 않으시면 대표님께 직접 물어보세요.”직접 물어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강현수를 만나지 못한지 벌써 며칠째고 강현수 회사로 찾아가 봐도 바로 문 앞에서 막혔으니까. 게다가 강현수에게 전화를 걸어봐도 여전히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배여진은 이를 꽉 깨물더니 상관없다는 듯 발걸음을 옮겼다.“현수 씨한테 물어볼 필요도 없어요. 분명히 무슨 착오가 있었을 테니까. 그리고 경고하는데 만약 또다시 내 앞길을 가로막으면 그때는 이 경비원 일 못 하게 만들어버릴 줄 알아요! 현수 씨는 내 말이라면 뭐든 들어주니까!”그렇게 배여진이 으름장을 놓고 안으로 들어가려는데 경비원이 또다시 그녀를 막았다.그러고는 다른 말 없이 바로 경찰에 신고했다.이에 배여진이 어이가 없다는 눈길로 그를 바라보았다.“지금... 감히
“뭐라고요? 대체 누가 손을 썼다는 건데요?!”배여진이 화를 냈다.“그건 저도 모르죠. 다만 강 대표님 덕에 이제껏 좋은 역할을 많이 차지했으니 배여진 씨를 노리는 사람이 많을 거예요.”게다가 그것뿐만이 아니라 배여진은 평소 사람들을 습관적으로 하대했기에 앙심을 품은 사람들이 많았다.만약 강현수가 뒤에 없었으면 지금쯤 아마 더 세게 당하고 있었을 것이다.사실 매니저도 다른 사람 못지않게 배여진을 싫어했다. 그도 그럴 것이 얼굴이 예쁜 것도 아니고 연기를 잘하는 것도 아니고 게다가 인성까지 더러우니 좋게 봐줄래야 봐줄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녀는 허구한 날 매니저를 부려먹었고 간혹 실수를 한 날에는 갖은 욕설과 비난의 말을 내뱉었다.아마 강현수가 아니었으면 배여진의 매니저 같은 건 진작에 때려치웠을 것이다.그래서 지금 배여진이 연예인으로서 타격이 큰 기사가 났는데도 꼴좋다는 생각만 들 뿐 매니저로서 그녀를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았다.“아니면 여진 씨가 강 대표님한테 직접 도움을 청해보는 건 어떨까요? 기사 좀 내려달라고.”매니저가 귀찮은 듯 알아서 하라는 듯한 말투로 말했다.이에 배여진이 입술을 잘근잘근 깨물었다.‘강현수랑 연락이 됐으면 애초에 너 따위 것한테 내가 연락을 안 했겠지! 그리고 기사도 진작에 막았을 거고!’“알겠어요. 내가... 현수 씨한테 부탁해볼게요.”배여진은 대충 얼버무린 후 전화를 끊었다. 그러고는 분노가 치밀어 올라 손에 든 휴대폰을 바닥에 그대로 던져버렸다.“다들 두고봐!”내일이면 배여진의 생일 파티가 열리게 된다.“내일 현수 씨를 만나면 나 무시했던 인간들 싹 다 처리해 달라고 할 거야!”배여진은 강현수가 자신의 생일 파티에 올 것이라고 확신하고 있었다....조용한 방 안.강현수가 비서에게서 임유진의 자료를 건네받았다.“임유진 씨 어린 시절 자료입니다. 임유진 씨는 그때 대표님께서 구조돼 병원에 입원하신 후 마찬가지로 S 의 병원에 이송되었습니다. 당시 병원 기록을 보면 고열을 앓았다고
강현수가 시선을 내려 자기 두 손을 바라보았다.그는 그때 눈물을 흘리며 이 두 손으로 임유진의 무릎에서 흐르는 피를 닦아주었다. 그를 지켜주려다 흘린 피를 말이다.왜 바보같이 임유진이 그 여자아이라는 걸 못 알아봤을까.이미 임유진을 사랑하고 있었으면서 왜 번번이 그녀를 놓쳐버린 걸까. 심지어 마지막에는 그녀가 보내는 도움의 손길을 그대로 무시해버렸다.만약 그때 그녀를 배여진으로 착각만 하지 않았더라면... 그때 질투에 눈이 멀어 그녀를 모른 척하지 않았더라면... 줄곧 찾아 헤맸던 아이가 배여진이었을 때 조금 더 깊게 조사해봤더라면... 그랬더라면 어쩌면 지금쯤 모든 게 달라져 있지 않았을까...?그는 정말 바보였다.자기가 지켜야 할 여자가 누군지 조차 모르는 바보 등이었다.강현수는 임유진만 생각하면 가슴이 찢어질 듯 아프고 숨조차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다음날.임유진은 간단히 준비를 마친 후 오랜만에 사무소로 향했다.물론 차 변호사가 그간 휴가를 주기는 했지만 계속 쉬는 건 아무래도 눈치가 보였다.그리고 지금은 덜컥 임신까지 해버린 상태이기에 휴가로는 이제 부족해졌다.게다가 하나도 아닌 세쌍둥이를 임신하게 된 터라 더 많이 신경을 써야 해서 지금 현재 맡고 있는 사건을 제외한 다른 사건은 더 이상 맡을 수가 없게 된다.임유진은 사무실로 들어간 후 곧바로 차 변호사를 찾아가 임신했다는 사실을 전했다.“임신이요?”차 변호사가 깜짝 놀란 얼굴로 물었다.“네, 세쌍둥이고 지금 3개월 됐어요. 제가 지금 맡고 있는 일은 최대한 잘 마무리 지을게요. 하지만 새로운 건은 더 이상 수임하지 못할 것 같아요. 아마 빠른 시일 내에 새로운 비서를 구하셔야 할 것 같아요. 정말 죄송합니다!”임유진이 고개를 숙였다.그도 그럴 것이 사무소에서 일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갑자기 임신을 해버렸으니까.게다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솔직히 지금 맡은 건도 제대로 마무리 지을 수 있을지 의문이었다.또한 갑자기 사람을 구해야 하니 차 변호사 입장에서도 상
빈번하게 토하는 건 아니었지만 한번 토하게 되면 음식물을 전부 다 토하기 전까지는 멈추지 못할 정도로 심하게 토하게 된다.토를 다 한 후 화장실 물을 내리고 세면대로 향하는 그때 마침 화장실로 들어온 정한나와 마주쳐버렸다.양다리 걸친 게 들통나고 세레나에게 잔뜩 두들겨 맞은 영상이 인터넷에 올라간 뒤로 정한나는 사무소에서 거의 없는 사람처럼 지내며 임유진에게도 더 이상 시비를 걸지 않았다.하지만 화장실에서 마주친 지금 정한나의 눈빛이 어딘가 묘하게 불편했다.임유진은 아무 말 없이 정한나를 지나 그녀의 뒤에 있는 세면대로 가 손을 씻었다.그러자 정한나가 뒤를 돌더니 먼저 말을 건네왔다.“방금 엄청나게 토하던데, 혹시 임신한 건 아니죠?”떠보는 듯한 말에 임유진은 순순히 인정했다.“맞는데요?”어차피 임신이라는 건 시간이 지나면 배가 불러와 모를래야 모를 수가 없었으니까.그리고 애초에 임유진은 임신 사실을 숨길 생각도 없었다.정한나는 임유진의 태연한 대답에 놀랐는지 입까지 틀어막고 오버를 했다.“정말... 임신이라고요? 세상에, 혼전임신인 거네!”임유진은 정한나가 그러든지 말든지 손을 씻은 다음 유유히 화장실에서 나왔다.그런데 몇 시간 후, 점심시간이 채 되기도 전에 사무실 안에서 임유진이 혼전 임신했다는 사실이 일파만파 퍼지기 시작했다.심지어 그 소식을 들은 어떤 동료는 임유진의 앞으로 와 직접 묻기까지 했다.“유진 씨, 한나 씨한테서 들었어요. 혼전 임신했다던데 정말이에요?”임유진이 천천히 입을 열려던 찰나 정한나가 갑자기 어디선가 튀어나오더니 잔뜩 비아냥거리며 대신 대답했다.“뭘 물어요. 당연히 진짜지. 아까 유진 씨가 화장실에서 나한테 직접 얘기한 거라니까요? 그리고 성아 씨가 못 봐서 그렇지 유진 씨 토 엄청 했어요. 드라마에서 임산부들이 입덧할 때 모습이랑 똑같았다니까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답했다.“네, 저 임신 맞아요.”이에 정한나는 임유진의 약점이라도 잡은 사람처럼 큰소리로 외치기 시작했다.“들었죠? 내 말이 맞
“내가 결혼했다는 걸 정한나 씨한테 보고해야 할 의무라도 있나요?”임유진의 지나치게 당당한 말에 정한나가 움찔했다.그때 그녀의 머릿속으로 순간 강현수의 얼굴이 떠올랐다.‘전에 굳이 사무실로 찾아온 것도 그렇고, 설마... 강현수랑 결혼한 건가? 잠깐만 그러면 임유진이 강현수의 아이를?!’하지만 정한나는 곧바로 말이 안 된다며 고개를 저었다.그도 그럴 것이 만약 임유진의 남편이 강현수라면 인터넷이 난리가 났을 테니까. 그런데 그 흔한 가십 기사 하나 없었다.정한나는 뭔가 떠올린 듯 씩 웃으며 말했다.“유진 씨 설마 혼전임신이라고 사람들이 수군거리는 게 싫어서 일부러 결혼했다고 하는 건 아니죠? 내 말에 반박하고 싶으면 남편 이름이 뭔지 얘기해봐요. 그리고 오늘 퇴근할 때 유진 씨 데리러 오라고도 하고요. 다들 유진 씨랑 동룐데 남편 얼굴 정도는 봐도 되지 않겠어요? 설마 임신한 와이프한테 직접 버스 타고 오라고 한 건 아닐 거 아니에요.”임유진은 그 말에 입을 꾹 닫았다.만약 강지혁에게 이 얘기를 하게 되면 아마 바로 이곳으로 달려올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강지혁이 이곳에 나타나게 되면 그때는 사무소를 더 이상 편히 출근하지 못하게 되어버린다.임유진의 침묵에 정한나는 자신이 생각한 게 맞다고 확신했는지 입꼬리를 올리며 웃었다.“유진 씨, 혼전임신이 뭐가 대수라고 그런 거짓말까지 해요? 변호사가 돼서 부끄럽지도...”그때 정장을 입은 남자 여러 명이 프런트 데스크 직원의 안내에 따라 임유진의 곁으로 다가왔다.그들은 임유진의 얼굴을 보더니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고 인사를 올렸다.“안녕하십니까, 작은 사모님.”작은 사모님이라는 말에 정한나는 하려던 말을 그대로 도로 입안에 집어넣었다.그러고는 정장을 입은 남자들과 임유진을 번갈아 훑었다.‘임유진이 왜 작은 사모님이야?!’임유진은 갑자기 다가온 남자들을 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이들 중 제일 앞에 서 있는 남자는 임유진도 한번 만나 적이 있다.전에 강문철의 병실에서 줄곧 강문철의
그 말에 사람들이 잠시 침묵하더니 서로 눈치를 봤다.강씨 집안에 돈이 많은 남자면 강지혁과 강현수밖에 없었다.“혹시 강현수 아닐까요? 지난번에도 사무실로 찾아왔잖아요.”“설마요. 그랬다면 벌써 인터넷이 난리가 나지 않았을까요?”“그건 그렇긴 한데... 그럼 설마 강지혁...?”강현수가 아니면 강지혁밖에 없었다.“그럴 리가요!”그때 가만히 있던 정한나가 반박했다.“내가 볼 때 방금 남자들은 유진 씨가 고용한 알바들 같아요. 우리한테 자기가 결혼했다고 믿게 하기 위해서요. 그리고 생각해봐요. 만약 남편이 정말 강지혁이면 왜 아직도 여기서 출근하겠어요. 집에서 느긋하게 태교나 하지.”“연기는 아닌 것 같은데요?”그녀의 말에 동료 한 명이 고개를 갸웃했다.“연기할 거면 차라리 남편 역할을 해줄 사람을 찾는 게 더 확실하지 않을까요?”다들 멍청한 사람들이 아니기에 정한나가 지금 얼마나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하는지 다 알고 있었다.그때 누군가가 창문 쪽으로 가 건물 밖을 내려다보고는 깜짝 놀란 얼굴로 소리를 질렀다.“세상에, 유진 씨 데리러 온 차 한정판 링컨 타운카예요! 저게 대체 얼마짜리야.”“게다가 차량 번호도 9999, 골드 번호예요!”“저런 차에 저런 차량 번호에 거기다 강씨 집안이라는 말까지, 정말 강지혁 맞나 본데요?”“유진 씨가 그럼 정말 강지혁이랑 결혼했다는 거예요?! 세상에! 이건 완전 빅 뉴스잖아요!”“와, 유진 씨 완전 팔자 폈네! 부럽다 부러워.”사람들은 감탄을 그지 못했다.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 유독 정한나만 입을 꾹 닫고 말이 없었다.그도 그럴 것이 아무것도 모르면서 혼전임신이네 편히 돈 받아가네 하는 소리를 해댔으니까.링컨 차를 차고 유유히 떠나는 사람에게 할 말은 절대 아니었다.게다가 남편이 강지혁인데 이깟 월급이 아쉬울까.정한나는 지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은 기분이었다....임유진은 남자들을 따라 병원에 도착했다.강문철은 여전히 병상에 누운 채 링거를 맞고 있었다.다만 전에 만났
하지만 아무리 내리쳐도 고통은 가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윽...”이경빈의 머릿속으로 당시의 장면이 하나둘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탁유미는 그때 이경빈에게 자신은 억울하다고, 자신이 그런 게 아니라고 수백 번을 더 말했다.하지만 그 말을 들었음에도 그는 전혀 믿어주지 않았고 오로지 탁씨 가문에 복수할 것만을 생각하며 공수진이 그렇게 된 게 전부 탁유미 때문이라고 확정을 지었다.그때는 그렇게 해야만 모든 게 끝날 줄 알았다. 비참한 그녀의 말로를 봐야만 가슴속의 응어리가 다 사라질 줄 알았다.그는 법을 무기로 그녀의 몸을 잔인하게 찔러댔다.그리고 이윽고 그녀의 자존심과 순박함 그리고 세상을 믿는 그 맑은 눈을 완전히 부숴버렸다.“경빈이 너는 운명을 믿어?”“글쎄. 너는?”“나는 믿어. 그리고 그 운명과 평생 함께한다는 얘기도 믿어. 운명이라면 서로 말고는 눈에 들어오는 사람이 없을 거야. 만약 다른 누군가가 눈에 들어오면 이전 사람은 운명이 아니었던 거지. 경빈아, 나는 네가 내 운명의 사람이라고 믿어.”“날 진심으로 사랑한다는 말이 하고 싶은 거야?”“응. 나는 이번 생에 이경빈이 아닌 다른 남자를 좋아하고 사랑할 계획은 없거든. 난 너만 사랑할 거야!”너만 사랑할 거라는 말을 했던 탁유미의 얼굴은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다.그녀는 정말 자신의 모든 것을 다 그에게 내어줄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사랑했다.하지만 그는 그런 그녀의 사랑을 짓밟고 더럽히고 또 처참하게 버렸다.임유진은 면회실에서 나와 천천히 이경빈의 앞으로 다가갔다.바닥에 엎드린 채 몸을 덜덜 떠는 그를 보며 그녀는 담담한 목소리로 물었다.“이경빈 씨는 언니한테 목숨을 한번 빚졌어요. 그 목숨 다시 언니한테 줄 수 있어요?”이경빈은 그 말에 고개를 들더니 처연하게 웃었다.“내 목숨 같은 거 유미한테 큰 가치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만약 유미가 원한다면 내 목숨 따위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어요.”만약 탁유미가 그의 목숨을 원한다면 그는 몇백 번이고 죽어줄 수 있다.
또한 금방이라도 떨어질 것 같은 벼랑 끝에 서 있는 기분이었다.“돈을 받아? 공수진이 원하는 대로 해줘?”이경빈은 분노에 찬 눈빛으로 의사를 바라보았다.“당신 의사잖아. 사람 목숨을 살리는 의사잖아! 그런데 그 간사한 혀로 죄 없는 사람을 감옥으로 보내?!”의사는 이경빈의 호통에 깜짝 놀란 듯 몸을 웅크리며 그의 눈을 피했다.“제가 보냈다뇨. 저... 저는 그냥 공수진 씨가 유산했다는 말밖에 안 했어요. 그 여자가 공수진 씨를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건... 이경빈 씨잖아요.”그의 말에 이경빈은 순간 할 말이 없어졌다.의사 말대로 탁유미가 공수진을 계단에서 밀었다고 증언한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그였으니까.그 어떤 증거보다 그의 한마디가 제일 크게 작용했다.이경빈은 한순간 꿀 먹은 벙어리가 되어 버렸고 은이 얼어붙은 것처럼 미동도 하지 않았다.“이경빈 씨는 그때 공수진 씨의 치마가 피로 물든 것을 봤다고 했어요. 그런데 공수진 씨는 임신하지 않았죠. 그러니 유산은 더더욱 없을 일이고요. 그렇다면 그 피는 대체 뭐였을까요?”임유진이 이경빈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이경빈은 덜덜 떨리는 입술을 꽉 깨물며 눈을 질끈 감았다.눈을 감자마자 당시의 화면이 하나둘 스쳐 지나가기 시작했다.“어떻게 임신도 아니고 유산도 아닌데 피를 흘릴 수 있었을까요. 그것도 하필 유미 언니랑 얘기하다가 마침 계단에서 떨어져서요. 제 생각은 이래요. 애초에 공수진 씨는 유미 언니를 모함하기 위해 미리 피가 든 팩을 준비했고 언니를 계단으로 불러 일부러 마치 언니한테 밀쳐진 것처럼 계단에서 구른 거죠.”임유진은 계속해서 이경빈의 얼굴을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어갔다.“이경빈 씨, 그날 정말 유미 언니가 공수진 씨를 밀었나요? 그걸 확실히 두 눈으로 보셨어요? 사실은 공수진 씨가 언니가 밀었다고 하니까 그렇겠거니 한 건 아니고요? 사실 그 사건은 조금만 제대로 조사해보면 금방 진실이 뭔지 알 수 있는 사건이에요. 그런데 이경빈 씨는 그때 복수심에 눈이 멀었고 마침
“가 보면 알아요.”임유진은 담담하게 대꾸했다.조금 있으면 이경빈도 모든 진실을 알게 된다. 그리고 그가 탁유미에게 얼마나 큰 잘못을 했는지, 얼마나 멍청한 짓을 저질렀는지 역시 알게 된다.그때가 되면 이번에는 뭐로 보상하겠다고 할까.어쩌면 강지혁의 말대로 모든 진실을 알게 되면 그는 남은 생을 평생 후회 속에서 고통스럽게 살게 살아갈지도 모른다.병원에서 나온 후 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차에 올라탔다.가는 길, 이경빈이 임유진을 보며 물었다.“주원호를 병실로 보낸 것도 임유진 씹니까?”“네.”임유진은 그간 줄곧 강지혁의 도움으로 주원호의 동태를 파악하고 있었기에 공항에 간다는 것을 듣자마자 바로 그를 잡아 왔다.사실 그녀의 계획대로라면 주원호를 등장시킬 필요도 없었다. 이경빈에게만 조용히 따로 진실을 얘기해주려고 했었으니까.그런데 그사이 공수진이 또다시 일을 저질렀고 탁유미는 그로 인해 큰 상처를 입게 됐다.이경빈은 가만히 있다가 다시 물었다.“그럼 유미가 나한테 골수를 기증해줬다는 것도 훨씬 전에 이미 알고 있었겠네요.”“네. 사실은 그걸 알게 되고 나서 유미 언니한테 얘기를 했었어요. 어쩌면 이경빈 씨를 구한 사람이 언니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이경빈 씨한테 얘기해보는 건 어떻겠냐고. 그런데 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어차피 자신이 말해봤자 이경빈 씨는 믿지 않을 거라고요.”이경빈은 그 말에 심장이 또다시 욱신거리며 아파 났다.탁유미는 이미 모든 걸 다 파악하고 있었다.그가 믿지 않을 거라는 걸 너무나도 잘 알고 있었다.대체 탁유미는 어떤 기분이었을까. 자기가 구한 사람이 화를 내고 사과하라고 윽박지르고 강제로 무릎까지 꿇으라고 명령하는 걸 보며.이경빈이 또다시 자책하고 있을 그때 차량이 드디어 목적지인 구치소 앞에 도착했다.이경빈은 차에서 내린 후 의문 섞인 얼굴로 임유진을 바라보았다.여기는 왜 온 거지?대체 누가 있길래?이경빈은 임유진을 따라 구치소 안 면회실에 도착했다.안으로 들어가 보니 어딘가 낯이 익은 한 남자
이경빈이 손을 다쳤나 하는 의문이 아주 잠깐 들었지만 탁유미는 이내 고개를 저으며 생각을 멈췄다.이경빈과 관련된 일은 이제 그 무엇도 생각하고 싶지 않으니까.“언니를 찾아와서 뭐라 하던가요?”임유진이 의자에 앉으며 물었다.“골수를 기증해준 사람이 나라는 걸 아는 눈치였어요. 그리고 공수진이 유산한 게 나 때문이 아니라 공수진의 자작극 때문이라는 것도요.”탁유미가 담담하게 말했다.“보상을 해주겠다고는 하는데 이경빈한테는 그 어떤 것도 받고 싶지 않아요.”태연한 얼굴로 얘기하고 있지만 임유진은 알고 있다.이 반응은 상처를 너무나도 많이 받아 모든 것이 공허해진 표현이라는 것을.“공수진은 언니를 모함한 것뿐만이 아니라 이경빈도 속였어요. 몇 년을 속았으니 이경빈은 무조건 공씨 일가에게 자신의 당한 것의 몇 배를 갚아줄 거예요.”“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에요.”임유진은 탁유미가 이경빈의 얘기를 썩 반기지 않자 얼른 화제를 바꿨다.“윤이는 유치원에 갔나 봐요?”“네. 엄마가 등원시켜줬어요.”요 며칠 김수영은 매일 밤 윤이와 함께 이곳으로 와 탁유미의 곁을 지켰다.‘아주머니랑 윤이도 이경빈이 병실 밖에 있는 걸 봤을 텐데... 아주머니는 보나 마나 화를 내셨겠지만 윤이는...’임유진은 속으로 생각하다가 다시 입을 열었다.“언니, 정말 항암치료 안 받을 거예요?”“네, 항암 치료를 시작하면 그때는 정말 병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될 거예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을 이곳에서 보내고 싶지는 않아요. 참, 나 내일이면 퇴원할 수 있대요. 유진 씨, 그날은 정말 고마웠어요.”만약 임유진이 타이밍 좋게 쳐들어오지 않았더라면 더 끔찍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벌써요?”임유진이 깜짝 놀라며 물었다.“언니, 그러지 말고 며칠 더 입원하는 게 어때요?”아무래도 병원에 있으면 의료진들의 케어를 바로바로 받을 수 있을 테니까.“아니요. 그냥 퇴원할래요. 계속 입원해 있으면...”계속 입원해 있으면 생명의 카운트다운이 더 빨리 흘러가는 느낌이니까.탁유미는
“응. 친구가 앞으로는 건강하게 살게 해달라고 기도했어. 간절하게 기도했으니 부처님도 분명히 들어주실 거야.”“친구? 친구 누구?”“나도 아직 본 적 없는 친구야. 아마 기회가 되면 그 어디선가 만날 수도 있겠다.”탁유미가 환하게 웃었다.“친군데 한 번도 본 적이 없다고? 뭐 인터넷으로만 아는 친구야?”“비밀. 나중에 얘기해줄게.”탁유미는 그날 미소를 지으며 끝내 친구에 관해서 얘기해주지 않았다.지금에 와서 돌이켜보면 그녀가 말한 친구는 바로 그였다.탁유미는 기증을 하고 나서도 여전히 이름도 모르는 그 젊은이를 위해 건강해지기를 빌어주고 있었다.정작 그 기도 덕에 살아난 그는 그녀의 인생을 처참하게 무너트렸는데 말이다.어쩌면 그날 그녀에게 친구가 누군지 조금만 더 자세하게 물어봤더라면 기증 사실에 대해 알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하지만 이경빈은 당시 그녀를 그저 복수의 대상으로만 생각하고 있었고 그녀와는 미래를 꿈 꿀 생각조차 하지 않았기에 그 친구에 관해서도 크게 관심이 없었다.그때 이경빈의 경호원이 다가와 그를 부축했다.“대표님, 괜찮으십...”경호원은 말을 하다 말고 조금 벙찐 얼굴로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도 그럴 것이 이경빈의 모습이 꼭 영혼이 다 빠져나간 듯한 사람 같아 보였기 때문이다....임유진이 탁유미를 보러 찾아왔을 때도 이경빈은 여전히 병실 앞을 떠나지 않고 있었다.아무런 움직임도 없는 것이 꼭 죽은 사람 같았다.임유진은 그 모습을 보며 속으로 짧은 한숨을 내뱉었다.‘아주 조금이라도 공수진을 의심했으면 이렇게까지는 안 됐을 텐데.’하지만 그의 초췌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어쩌면 이경빈은 정말 탁유미를 진심으로 사랑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사랑이 아니면 이렇게까지 고통스러워하지 않았을 테니까.“언제부터 이러고 있었어요?”임유진이 병실을 지키고 있는 경호원들에게 물었다.“어젯밤부터 줄곧 이곳에 있으셨습니다.”임유진은 이경빈을 힐끔 보더니 별말 없이 병실 안으로 들어갔다.병실 안에는 탁유미 혼자
탁유미는 차갑게 말을 내뱉은 후 이경빈의 손에 잡힌 자신의 옷을 반대로 잡아당겼다.하지만 아무리 잡아당겨도 도저히 잡아당겨 지지를 않았다.이경빈은 이대로 그녀의 옷을 놓쳐버리면 두 번 다시 그녀를 만나지 못할 것 같아 손이 하얘질 때까지 꽉 쥐고 놓지 않았다.탁유미는 이에 미간을 찌푸리며 강지혁의 경호원을 바라보며 말했다.“이거 놔. 손 다치고 싶지 않으면.”경호원은 그녀의 눈빛에 얼른 앞으로 다가가 탁유미의 옷을 꽉 잡고 있는 이경빈의 손을 잡았다.하지만 이경빈은 경호원의 엄청난 손아귀 힘에도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계속해서 탁유미를 바라보았다.“네가 나 원망하는 거 알아. 당연해. 네가 날 싫어하는 것도, 날 증오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야. 하지만 내 말 좀 들어줘. 너랑 단둘이서 얘기를 나누고 싶어. 너한테 하고 싶은 얘기가 너무 많아!”“난 너랑 할 얘기 없어.”그녀의 단호한 대답에 이경빈의 얼굴이 고통으로 일그러졌다.옷을 꽉 잡은 손이 경호원의 힘으로 하나둘 펴지며 서서히 고통이 일고 있는데도, 얼마나 힘을 줬는지 손가락이 꺾여서는 안 될 방향으로 꺾이고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그녀의 옷을 놓아주지 않았다.이대로 놓아주면 다시는 그녀 가까이 갈 수조차 없을까 봐, 그녀와는 이로써 모든 게 다 끝이 날까 봐 그는 너무나도 두려웠다.탁유미는 제 옷을 꽉 잡은 채 놓아주지 않는 그를 보며 경멸의 눈길을 보냈다.“너는 항상 이런 식이야. 너는 예나 지금이나 한결같이 자기밖에 모르는 이기적인 사람이야. 너는 네가 다 맞다고 생각하지? 만약 네가 조금이라도 남을 배려하는 인간이었다면 억지로 끌고 가 무릎을 꿇리고 머리를 조아리게 하는 짓은 강요하지 않았을 거야. 너는 항상 네 기분만 중요하고 네 생각만 중요한 사람이었어! 존중이라는 게 뭔지도 모르는 최악의 인간이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마치 몸이 얼어버린 것처럼 제자리에 굳어버렸다.크나큰 충격이라도 받은 듯 그는 천천히 고개를 숙이더니 이내 손아귀의 힘을 스르르 풀었다.탁유미는 옷을 정
이경빈의 말에 그의 뒤에 있던 경호원들이 한발 앞으로 나섰다.인수로만 놓고 보면 이경빈 쪽이 훨씬 우세였지만 그럼에도 강지혁의 경호원들은 비켜줄 생각을 하지 않았다.특정 인원들의 출입은 무슨 수를 써서든 막으라는 강지혁의 명령을 받았으니까.“비켜드릴 수는 없습니다. 돌아가세요.”긴장감이 흐르고 상황은 일촉즉발이었다.그런데 그때 갑자기 병실 문이 열리고 안쪽에서 탁유미가 걸어 나왔다.강지혁의 경호원들은 그녀를 보자마자 황급히 고개를 숙였다.“소란을 끼쳐드려 죄송합니다. 이경빈 대표님은 저희가 금방 되돌려보내겠습니다.”그들은 말을 마친 후 다시 이경빈을 바라보며 경계태세를 갖췄다.탁유미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들어 이경빈을 바라보았다.그는 마지막으로 봤던 때와 달리 깔끔한 차림이기는 했으나 턱 쪽에 수염이 까끌까끌 나 있었고 머리도 헝클어져 있었으며 다크서클은 물론이고 눈가도 엄청 빨개 있었다.이제껏 줄곧 한 점 흐트러짐 없이 자신을 세팅하고 다니던 남자였는데 말이다.이경빈은 탁유미가 문을 열고 나온 순간부터 그녀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움직이지 않았다.며칠 만에 보는 그녀는 환자복을 입고 있었고 얼굴은 더 야위어 있었으며 길게 늘어트린 머리카락은 오늘따라 유독 더 힘이 없어 보였다.게다가 이마에는 까진 상처가 있었는데 복도 조명 때문에 더 잘 보였다.이경빈은 그 상처를 보는 순간 심장에 마치 칼에 찔린 듯한 고통이 일었다.그녀의 이마에 난 상처는 그날 그의 명령으로 머리가 조아려졌을 때 생긴 상처가 분명했다.그렇게도 사과하는 것을 거부했는데 그는 억지로 그녀의 무릎을 꿇리고 강제로 머리를 조아리게 했다.이경빈은 그날 경호원의 손에 의해 몇 번이고 바닥에 머리를 박는 그녀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했다.왜 바보같이 그녀에게 그런 수모를 줬을까.왜 등신처럼 그녀의 고통과 절망을 외면하고 공수진에게 사과하게 했을까.이경빈이 과거의 자신을 질책하던 그때 탁유미의 차가운 목소리가 들려왔다.“늦은 시간에 여기까지는 무슨 일이야. 왜, 또
주원호의 말에 이경빈의 몸이 움찔 떨렸다.탁유미는 그저 복수대상일 뿐이라고?아니. 탁유미는 그에게 단지 복수대상뿐인 여자가 아니었다. 그가 유일하게 진심으로 사랑했던 여자였다.이경빈은 심장이 점점 더 세게 아파 와 이윽고 벽에 몸을 기댔다.꼭 이 통증에 잠식되어가는 듯한 기분이다.그는 멀고 먼 길을 돌아 이제야 자신이 탁유미를 아직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다.한때는 고작 원수 집안의 딸일 뿐인 여자라 그녀와 함께했던 시간 따위는 금방 지워질 줄 알았다. 그녀를 감옥에 보내 복수를 하고 나면 아주 손쉽게 그녀를 마음속에서 떨쳐낼 수 있을 줄 알았다.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그의 희망했을 뿐 그는 줄곧 그녀를 마음에 담고 있었다.만약 탁유미를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녀가 허름한 모습으로 있는 게 신경이 쓰일 리도 없고 그녀가 다른 남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질투 날 리도 없다.또한 상처만 줬던 그녀에게 배신감이 들 리도 없다.이경빈은 항상 공수진의 편에만 서고 한 번도 탁유미의 얘기를 들으려 하지 않았다.그는 자신의 감정을 직면하는 것에서 늘 도망쳐왔다.죽도록 미운 원수의 딸을 사랑하게 됐다는 것을 인정할 용기가 없었다.이경빈은 몸 옆으로 축 늘어진 자신의 두 손에 서서히 힘을 가했다.얼마나 세게 주먹을 쥐었는지 손톱이 살을 뚫어버리고 이내 바닥으로 피까지 뚝뚝 흘러내렸다.하지만 그는 고통 따위 전혀 느껴지지 않는 듯 텅 비어 버린 얼굴로 탁유미의 병실을 향해 뚜벅뚜벅 걸어갔다.탁유미를 만나 그간 상처를 줘서 미안했다고, 아무것도 모른 채 멍청하게 굴어서 정말 미안했다고 사과를 해야만 한다.그녀의 아버지를 향한 증오를 그따위 비열한 방식으로 그녀에게 화풀이해서는 안 됐다고 사과해야만 한다.또한 앞으로는 정말 잘 해주겠다고, 지금까지의 고통을 전부 다 잊을 수 있을 만큼 잘해주겠다고 말을 해야만 한다.이경빈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해놓고는 막상 탁유미의 병실에 점점 가까워지자 덜컥 겁이 나기 시작했다.탁유미가 전과 같은 원망과 증오가 서
이경빈은 말 그대로 공수진에게 생지옥이라는 게 무엇인지 맛보게 해줄 생각이다.그와 탁유미의 인생을 가지고 논 대가를 평생에 걸쳐 갚게 할 생각이다....병실에서 나온 이경빈은 심장께가 무언가에 짓눌린 것처럼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그는 탁유미를 모함하려고 한 공수진도 물론 증오스러웠지만 그녀의 거짓말에 넘어가 자신의 목숨을 살려준 여자에게 무자비했던 자신이 더 증오스러웠다.아까 병실로 들어간 순간 이경빈은 억지로 탁유미의 무릎을 꿇리고 그녀에게 머리까지 조아리게 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랐다.바닥에 쿵쿵 부딪히던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생생해 마음이 짓이겨지는 것 같았다.왜 그렇게 못되게 굴었을까?정말 공수진을 위해서였을까?사실은 그저 그런 방식으로 탁유미에게 상처를 줘 그녀를 향한 마음을 애써 덮으려고 했던 건 아닐까?윤이를 이용해 이씨 집안 재산을 노리고 있다는 사실을 들었음에도, 공수진이 어렵게 생긴 아이를 유산했다는 소식을 들었음에도 자꾸 상처받은 듯한 탁유미의 얼굴들이 떠올라 더 모질게 굴었던 건 아닐까?탁유미는 그에게 등신이라고 했다.맞는 말이다.그는 정말 구제 불능의 등신이었다.“저... 저기, 저는 그저 공수진의 부탁을 들어준 것뿐이에요. 제가 아는 건 다 털어놨으니 이제 그만 저 풀어주세요...”주원호가 이경빈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몇십 분 전 그는 비행기에 탑승하려는 찰나 검은색 정장의 사람들에 의해 강제로 병원으로 데려와 졌고 이경빈의 앞에서 공수진에 관한 모든 얘기를 실토하라는 협박을 받았다.만약 사실대로 얘기하지 않으면 평생 감방에서 썩게 할 수도 있다면서 말이다.주원호는 솔직히 그저 공수진에게 돈만 조금 얻어낼 생각이었는데 일이 이렇게까지 커질 줄은 몰랐다.이렇게 될 줄 알았으면 돈이고 뭐고 공수진 근처로는 절대로 가지 않았을 것이다.‘그런데 대체 누가 날 데리고 온 거지? 상황을 볼 때 이경빈은 아닌 것 같은데.’“풀어달라고?”이경빈은 그 말에 헛웃음을 쳤다.공수진을 도와 진실을 덮어버린 그